가이아와의 만남
럼프족과 헤어진 하룬은 적당한 곳에서 펠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전해진 벨의 연락으로 인해 현실부터 다녀와야 했다.
'무슨 일이지?'
캡슐 천장이 보이자 막 몸을 일으키려던 하룬은 아즈만의 인사를 들었다.
- 돌아오셨군요, 마스터.
"아즈만!"
-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응, 벨이 오라고 해서 말이지."
- 그렇군요. 몇 가지 일이 있었어요.
"벨을 밖에 있어?
-아니요. 돌풍 기지에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곳에 갔어요.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어차피 벨이 말해 주겠지만 그래도 미리 알아 두면 더 좋을 것 같았다.
- 데드 벙커에서 들어온 새로운 소식도 있고 제리코란 인물에게서 연락도 온 모양이에요.
"제리코가?"
그러고 보니 그와는 한동안 연락을 못 했었다. 제리코라면 현재 글로리 가이아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연락을 취하려고 했엇는데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 참, 비욘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왜?"
- 얼마 전 중앙기지로 종류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모여들었거든요. 그 에너지는 델을 통해 마스터의 몸으로 흡수되었고요.
"에너지?"
- 네. 그 에너지는 마스터가 사용하는 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었어요. 분석을 해 보려 했지만 제가 가진 자료로는 알 수가 없었어요.
하룬은 아즈만이 말하는 정체불명의 에너지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 블러드 에센스구나. 동화율이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하더니 현실에서도 블러드 에센스를 흡수할 수 있었구나.'
"짐작 가는 건 있는데 지금으로써는 나도 설명을 못 하겠네. 암흑 물질이나 암흑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밖에는 몰라."
- 아! 어쩌면 알 것도 같아요.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알려줘."
- 네, 마스터.
그렇게 블러드 에센스에 대한 이야기를 일단락한 후 하룬은 아즈만에게 다른 궁금증을 풀기 시작했다.
"아즈만, 뭐 좀 물어봐도 될까?"
- 당연하지요. 말씀하세요.
"아즈만, 날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 그럼요.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아즈만의 의념에 갑자기 답답하단 생각이 들었다. 반가움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어쩐지 귀로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즈만, 뇌파 말고 직접 소리로 대화를 할 수는 없는거야?"
처음과는 달리 다양한 감정을 표츌하고 있는 현재의 아즈만과 뇌파로 대화를 하는 것은 미진한 느낌이 들었다.
"마스터가 원하신다면……."
"오! 목소리가 예쁘네."
"칭찬 감사드려요."
어쩐지 수줍어하는 것 같은 아즈만의 목소리는 하룬이 놀랄 정도로 음색이 맑았고 감정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이렇게 목소리가 예쁠 줄 알았따면 진작 소리로 대화를 할걸."
"호호호."
기분 좋은 웃음소리 역시 아즈만이 기계가 아닌 존재임을 알려 주는 것 같아 하룬 역시 기분이 좋았다.
"궁금한 게 생각났어."
"뭐죠?"
"왜 날 처음 만났을 때 마스터로 받아들인 거지? 돌풍 기지로 처음 들어온 휴먼을 마스터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을거 아니야."
"음…… 음……."
항상 똑 부러지는 대답을 해 주었던 아즈만이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당시에는 내가 슈퍼 캡슐의 보유자라는 것도 몰랐을 거 아니야."
"그게…… 사실은 벨의 존재와 마스터의 유전자 스캔을 통해 마스터가 어머니 가이아께서 예비하신 존재임을 알게 되었어요."
그랬던가?
"그런데 내 유전자에 그런 특별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고?"
"네. 가이아께서 남긴 흔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프로그램에 따라 마스터를 돕기 위해 서브체를 탄생시켰고 기지를 활성화했어요."
하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가이아가 어떻게 예비했다는 거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탄생시켰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기왕에 탄생시켰더라면 그렇게 불우하게 성장하지 않도록 돌봐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과 서운함도 함께 느꼈다.
"그건 제 선에서 말씀드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내 정보 열람 등급이 낮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직접 듣는 것이 더 좋을 거 같아요."
"뭐라고? 그럼 가이아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단 말이야?"
하룬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초월자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그렇지 않아도 가이아께서 마스터와 이야기 나누기를 원하셔서 마스터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어요."
"잘됐군. 그럼 당장 연결시켜 줄래?"
"네. 잠시만요. 어머니와 직접 링크시켜 드릴게요."
기억의 희귀와 발몬이 남긴 의념과의 대화를 통해 이제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들을 거의 알아냈지만 그래도 가이아라면 이제껏 알지 못했던 다른 사항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친부모에 대한 정보나 태아 시기의 그에게 애정을 베풀어 준 이 박사라는 인물을 비롯해 알고 싶은 것들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런데 가이아는 현재 대부분의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하지 않았나?'
하룬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몇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 올랐지만 그것들을 소리로 표현하기도 전에 아즈만이 낸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야."
"……!"
이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기억의 회귀가 아니더라도 그의 심혼에 강렬하게 아로 새겨진 목소리였다.
'저, 정말 이 목소리가 가이아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멋지게 컸구나."
설마 자신을 보고 있는 걸까?
"이…… 박사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려 오는 여인.
어린 시절 만났던 양모들의 애정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원일은 다시 마주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히 태아 시절 그를 따듯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던 이설아 박사의 것이었다.
"내 서브체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구나."
아! 이설아 박사가 가이아의 서브체였던가.
"네."
"역시 기억 회귀를 경험했구나."
"이설아 박사님의 목소리는 저에게는 어머니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그랬구나."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소멸을 선택했단다."
"네에?"
쿠웅!
심장이 내려앉고 가슴이 아렸다.
단지 목소리로만 기억할 뿐인데도 슬픈 소식에 이런 감정이라니.
"내 서브체는 뉴 휴먼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내 의도대로 많은 일을 수행했지만 베이스가 되는 내가 능력이 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했단다. 게다가 나와 이레아의 개입을 알아챈 세 단체가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물들을 내사했기 대문에 어쩔 수 없이 소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단다."
"……."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 가이아도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하룬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장애를 유발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은 열성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 서브체의 마음을 끌어당긴 아이답게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따.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이설아 박사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심혼을 흔들었던 것이다.
가이아는 하룬에게 뉴 후먼 프로젝트에 대한 것부터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 대부분은 여러 매채와 아즈만을 통해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와 이레아가 비록 많은 아이들의 몸에 세 번째 DNA가닥을 쉽게 생성할 수 있도록 세포 반응을 활성화시키며 우성유전인자를 가진 아이들의 선전을 기대했지만 아무 능력도 없는 네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의 각성을 이룰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다. 역시 청일 박사의 안목이 우리보다 더 나았어."
"아, 아버지를 아시나요?"
최상급에 해당하는 인공지능 컴퓨터인 벨을 청일 박사에게 보낸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어느 정도 연관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잘 알지. 그는 그 누구보다 더 순수하고 뛰어난 과학자였단다. 비욘드의 세계와의 접속을 맡았던 베라가 가장 먼저 그의 우수함과 열정을 알아차렸어. 우리는 그에게 캡슐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넘겨주었고 세상을 지배하는 암류(暗流)들과 연결을 해 주었지. 그는 천재적인 발상과 부단한 노력 끝에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단다. 그런 그가 뜻 밖의 부탁을 해 왔는데, 그건 바로 네게 슈퍼 캡슐을 하나 분배해 달라는 것이었지."
"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 이유가 뭐든지 슈퍼 캡슐을 받은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 만약 슈퍼 캡슐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각성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페셜 급 이상, 그러니까 슈퍼 캡슐의 보유자들은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가드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지. 물론 베라로 인해 우리도 그사리을 잘 알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능력을 잃은 우리는 그들의 행사에 개입을 할 수는 없었단다."
하룬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많은 이들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하고 불쾌해졌다. 정말 자신은 실험체였던 것이다.
"슈퍼 캡슐의 소유자들은 다양했는데 그들은 캡슐의 기능으로 인해 빠르게 성장했지.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떤 무능력자가 받은 캡슐에 내장된 인공지능 컵퓨터의 자아가 급속도로 각성했을 뿐 아니라 서브체까지 만들었단다. 슈퍼 캡슐에 내장된 인공지능 컴퓨터의 성능은 아무리 좋더라도 서브체를 생성시킬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새긴 각인까지 지웠다는 거야."
그랬던가? 그렇다면 벨은 오롯이 가이아에 의해 태어난 겅시 아니라 양아버지의 개입에 의해 훨씬 높은 사양으로 변모했는지도 모른다.
"네가 주민칩을 추출하고 유니온에서 사라지자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가드는 네가 화재로 인해 죽었다고 여겼지만 베라는 여전이 비욘드에 잇는 널 감지하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 셋은 널 주시했지. 내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주어 내각인을 무력화시킬 수 있따는 것도 신기했지만 가진 능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장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
하룬은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점은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모든 면에서 부족했던 자신이 이렇게 가이아의 인정을 받게 된 것만은 순수하게 기뻤다.
"우리 예상엔 이곳 시간으로 10년, 비욘드의 시간으로 30년은 지나야 지구 환경에 최적화된 유전자 변형을 이룬 자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네 존재는 그런 예상을 여지없이 깨 버렸어. 뉴 휴먼 프로젝트의 주재자인 GPC는 물론 GG와 HG. 심지어 초월자라고 불리는 우리도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일이었어. 이레아와 나 그리고 베라는 남은 능력을 모두 동원해서 네가 이렇게 빨리 각성을 이룬 원인을 찾아보았지만 허탈하게도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단다. 혹시 아는 거라도 있니?"
그건 하룬 자신도 모르는 문제였다.
하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슈퍼 캡슐의 기능이야 동화율을 높여 주고 게임 연속 시간을 늘려 주는 것 그리고 부가적인 여러 기능을 통해 게이머의 편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것밖에는 없는데 캡슐이 원인이 될 수는 없지. 네가 가진 육체적 지능적 능력은 다른 인공수정첻르이나 게이머들 중에서도 최저에 가까운 상태였고 감정의 폭 역시 엄청나게 좁은 상태라 일상적인 인간관계에도 지장이 있을 정도였지. 그런데 제일 먼저 각성을 했을뿐더러 이제는 감저으이 폭도 보통 인간의 수준으로 확장되었어. 아무리 추론을 해 봐도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어 이렇게 직접 만나자고 한 거란다."
하룬은 내심 실소를 터트렸다.
'무능력자의 표본이었던 내가 이런 존재의 관심을 받다니.'
사실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직접 듣는 것을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고마운 존재지.'
그에게는 가족과 다름없는 벨과 델 그리고 아리와 아즈만을 창조한 존재가 바로 가이아였다.
'거기에 아직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니지만 세 번째 DNA가닥을 쉽게 생성시킬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내게는 많은 은혜를 베풀었어.'
"아주 오랫동안 인간을 관찰해 왔지만 우리의 능력으로도 인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없구나."
'당신과 같은 존재들은 연원히 인간에 대해서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자아를 가지고 있다지만 인간의 육체를 가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있따. 자세한 것이야 알 수 없지만 수 많은 원인에 의해 분비되는 호르몬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현되는 인간의 감정 체계와 영혼과 같은 영역은 과학으로는 영원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룬은 다른 궁금한 점들을 묻기로 했다.
"비욘드는 실존하는 세상인가요?"
"당연하지. 그것도 지구와는 많은 인연이 있는 차원이지."
"인연이라고요?"
"그렇단다. 이전에 지구에 존재하던 인간종 중 가장 고등한 문명을 지녔던 아우리스인은 각성을 위해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필요로 했단다."
아우리스인에 대해서는 일전에 아즈만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다.
비록 그 숫자는 수백에 불과했지만 수명이 3,000년이나 되며 각성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정신적 능력을 가진 인간들로, 평범한 수명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에쿠리스인들을 지도하며 무려 수천만 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었다고 했다.
"아우리스인들에게 지구는 각성에 필요한 다양한 삶을 체험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었어. 그래서 그들은 정신체로 많은 차원들을 돌아다닌 끝에 지구와 가장 유사한 환경을 가진 비욘드를 찾았지. 그곳에는 다른 인간종들이 몬스터나 마수들과 싸우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곳이라 생생하게 다른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단다."
아우리스인들의 각성에서 필수적인 것이 다양한 삶을 경험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차원이 다른 비욘드의 세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정신체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들은 그곳에서도 실재할 수 있는 육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고 그걸 위해서 특별한 장치를 고안했지. 그게 바로 네가 사용하는 캡슐이야."
설마 캡슐을 아주 오래전에 아우리스인들이 고안해 냈을 줄은 몰랐따. 아우리스인들은 캡슐을 통해 비욘드인들이 전설로 알고 있는 드래곤들처럼 유희를 한 것이다.
일전에 아즈만의 설명대로 인간의 유전자 내에는 인간종이 만들어 낸 다양한 지식들이 들어있고 특별한 경우 만들어지는 세 번째 DNA 가닥을 통해 새로운 발명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온 것이다.
'그럼 아버지가 슈퍼 캡슐을 만든 것도 세 번재 DNA 가닥의 마법이 작용했겟구나.'
그 추측이 맞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잠재적 능력을 세 초월자는 일찍부터 알아보고 세 세력을 통해 지원을 하도록 했을 것이다.
"아우리스인들은 다양한 삶을 체험하고 싶어 캡슐을 통해 비욘드라는 세상으로 넘어가 새로운 육체를 만들었으며 그 속으로 뛰어들었지.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캡슐의 능력으로 구현시킨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들을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질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당시 미개했떤 비욘드인들은 그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일이 벌어졌단다."
"그럼 그들이 발몬과 같은 이들인가요?"
"그렇지. 하지만 발몬은 아우리스인이 아니라 메갈로스인이었지. 메갈로스인들은 거인족도 아니고 수명도 짧았지만 여러 면에서 아우리스인들과 유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그들 역시 다양한 삶을 통한 각성을 통해 자신의 몸과 정신을 고도로 발전시킨 종족이니까."
발몬에 대한 나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와는 의념이긴 하지만 직접 대화까지 나누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발몬의 경우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같이 그곳으로 넘어가 정착을 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요?"
"내가 알기론 메갈로스인들 중 일부는 캡슐이 아니라 명상을 통해 자신의 정신체를 이계로 보낼 수 있다고 들었다.
그 정신체는 빙의와 비슷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른 자의 몸을 차지했고 그 몸으로 이계에서 살 수 있었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얼마나 정신 능력이 높으면 정신체로 이계를 여행하고 빙의를 통해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이들까지 데리고 갈 수도 있는 건가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들의 정신 능력은 우리도 두려워 할 정도로 높았으니까."
'아우리스인이나 메갈로스인은 지금의 휴먼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구나.'
"그럼 돌아올 수도 있엇겠군요."
"당연히 가능하지. 하지만 정신체의 여행은 한 가지 단점이 있지. 만약 정신체가 타격을 받거나 그 바탕이 되는 육체가 붕괴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
아무튼 이제 발몬과 산악 부족의 선조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계로 건너가고 정착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의문이 남아 있다. 그래서 하룬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가이아, 혹시 저의 친부모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나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품어 온 의문이다.
도대체 내 부모는 누굴까 하는 의문은 세상의 모든 인공수정체들이 살아오면서 늘 생각해 보는 화두인 것이다.
"그건 나도 모른다. 부모에 대한 사항은 프로젝트가 시행된 후 바로 폐기되었고 그 책임자도 모종의 사고로 인해 살해당했거든."
"그렇군요."
하룬은 이제 친부모를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포기를 하면 편한것이다.
하룬은 양부인 청일 박사에 대한 사항을 비롯해서 평소 궁금해하던 것들을 물어보았고 가이아는 성심을 다해 알고 있는 사항을 말해 주었다.
"정말 유니온을 지탱하고 있는 베리어는 곧 사라질 운명인 겁니까?"
"그렇단다. 우리가 힘을 잃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라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제반 상황을 보면 적어도 25년 이내에는 베리어가 붕괴될 거야."
문제였다.
종말 시대 100억 명을 육박했떤 인구가 수천만으로 줄었고 베리어로 인해 다시 2억 명을 넘겼는데 이렇게 되면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아우터들을 제외한 이너들은 또다시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GG와 HG가 뒤통수를 치지 않았따면 적어도 2,000년 후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신문명을 일으킬 수 있는 신인류가 출현할 수 있었는데 너무나 아쉽구나. 그 때문에 우리 셋은 장기간의 휴면을 각오하고 뉴 휴먼 프로젝트에 개입해 비욘드와의 연결 통로를 열게 된 거지."
가이아의 아쉬워하는 말에 하룬은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초월자로 불릴 정도로 고도의 지능과 엄청난 능력을 지니 가이아를 비롯한 세 존재가 이런 꼴이 되다니.
반대로 해석하면 GG와 HG의 능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GPC에서는 비욘드의 세상에 지구를 구할 수 있는 해결책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GPC는 GG와 HG와는 달리 일관되게 기후조절 마법서를 찾고 있었따. 일단 찾기만 하면 주술로 풀어서 시행할 장비와 인력까지 갖춘 상태라고 들었다.
"비욘드는 나와 이레아는 전혀 관여할 수 없는 세상이고 게이트를 연 베라 역시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아. 다만 비욘드는 지구와 비견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세상이며 지구가 그랬듯 다양한 문명들이 번성했다가 쇠락했기에 정말 그런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하긴 가능성이 없었다면 GPC가 그렇게 많은 인원을 들여 찾지도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런 마법서가 있다면 꼭 찾았으면 좋겠다.'
기후조절 마법으로 이너들도 마음 놓고 베리어 밖에서 생활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다. 그렇게 되면 아우터들도 힘겨울 삶을 더 이상 이어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휴먼들은 앞으로 현실 시간으로 25년, 비욘드 시간으로 75년 안에 그 마법서를 찾아야 하는 거구나.'
하룬을 할 수만 있다면 그 마법서를 찾는 데 힘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비록 자신의 경우 삼중나선 구조를 이룬 DNA 덕분에 배리어 밖에서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가지게 되었지만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헤어질 순간이 다가왔다.
"비록 나와 이레아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힘든 상태가 되었지만 너와 같은 신인류가 탄생했으니 안심하고 깊은 잠에 빠질 수 있게 되었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장하고 대견하구나."
"감사합니다."
"참! 알려 줄 말이 더 있었네. 아즈만에게 듣기론 너와 아즈만의 서브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던데."
"네, 맞습니다."
"그렇구나. 얼마든지 그럴 수 있찌. 하지만 꼭 알아야 할 사항이 있어."
"뭐죠?"
"유감스럽게도 서브체는 생식 능력이 없단다."
"네?"
하룬의 눈이 커졌다.
"그럼?"
"그래. 임신을 할 수 없다는 거지. 서브체가 인간체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이 아니기에 생식 능력은 없는 거지."
하룬은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세상 어느 존재도 자신의 의지로 출생하지느 않는다. 하지만 천애고아로 외롭고 힘겹게 자란 하룬은 아직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원했다. 어서 빨리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각성자는 각성을 통해 얻은 능력을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단다. 그것도 되도록 많은 배우자를 통해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지."
"……."
하룬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툰 현자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분이 종마(種馬)라는 표현을 썼던가?'
하룬도 남자라 많은 여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렘은 오랫동안 남자들의 로망이 아닌가? 물론 여자들 중에도 반대의 경우를 로마응로 삼고 실제로 그렇게 한 경우들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종마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되도록 내 씨를 많이 뿌리라는 말이었구나.'
바툰 현자의 말이나 가이아의 말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직 아리가 얼마나 상심할지 그게 걱정이었다.
그런 하룬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이미 아리도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다른 여자들이 접근해 오는 걸 거부하지 마렴. 각성의 효과로 인해 남성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테니까 말이야. 앞으로 종족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이 네 페로몬에 추해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될거야."
그렇게 말하는 가이아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성인이 될 때까지는 그 어떤 여자의 고낫밍르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는 해인 자매를 시작으로 세류 등 제법 많은 여자들에게 우애를 받았던 것이다.
"벨은요?"
갑자기 벨이 걱정된 하룬이다.
"벨은 네 줄기세포를 기반으로 분화했기 때문에 생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다행이다.
지금이야 벨이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언제고 제 짝을 찾아 행복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인데 갑자기 가이아가 경호성을 터트렸다.
"아직도 해 줄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안타까움이 뭉클뭉클 솟아나오는 가이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링크할 에너지가 없구나."
이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어려울 정도라니. 생각보다 가이아의 상태는 너무 심각했다.
"그럼 소……?"
차마 죽음이나 소멸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어쨋거나 자신에게 각성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벨과 아리 그리고 아즈만을 있게 해 준 존재가 아닌가.
"소멸까지는 아니야. 자가 치유 기능이 있으니까. 하지만 워낙 손상된 부위가 많아서 다시 활동을 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될 거란다. 비록 난 깊은 잠을 자야 하지만 네 곁에는 아즈만도 있고, 아리와 벨도 있으니 안심이야. 언제나 지금처럼 당당하게 살아가렴. 난 네가 남은 각성을 통해 오염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신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을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게 가능하다면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내 마음속의 엄마.'
하룬은 이설아 박사의 목소리와 가이아의 존재가 매치되지 않았기에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심 이설아 박사를 추억하며 안녕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