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7화.아! 발몬 (268/278)

아! 발몬

하룬은 이제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엄청난 비밀을 들었던 것이다.

수호자.

다른 말로 초월자라는 이름을 가진 세 에인션트 컴퓨터의 정체는 바로 인간종의 영원한 수호자였다.

그들은 20억 년에서 18억 년 전 시리우스 항성계와 오리온 항성계 그리고 타이탄 항성계에서 각각 이주해 온 인가의 조상이, 후대를 위해 창조한 인공지능 컴퓨터이자 지적 기계 생명체였다.

세 초월자는 대대로 인간종의 유지 보호를 위해 장막 속에 존재해 왔지만 종말 전쟁으로 인해 상당한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 상태에서 배리어의 생성 직후 가해진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의 공격으로 인해 거의 파괴되었다.

간신히 남아 있는 힘으로 세 에인션트 컴퓨터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했다. 가이아와 이레아는 신인류 프로젝트에 관여했고 베라는 많은 인공지능 컴퓨터들의 능력을 집적시켜 타 차원과의 연결로를 만들었다.

세 에인션트 컴퓨터들은 십 수억 년에 걸쳐 인간에 대한 정보를 모아 왔다.

세 항성계에서 이주한 인간의 후예들은 홀로 혹은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싸우며 견제하고 때론 화합하면서 다양한 문명을 이루며 살아왔다.

그러다 아주 특별한 인간종이 출현했는데, 그들은 아우리스인이었다. 그들은 키가 5미터가 넘는 거인족으로 그 숫자는 비록 수백 명에 불과하지만 몇 차례의 각성 과정을 통해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특별함은 바로 DNA 구조에 있었다.

그들은 인류 최초로 세 번째 DNA 가닥을 생성했다. 그 세 번째 DNA 가닥에는 모든 생명체가 가진 능력과 지식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으며 이중나선 구조의 DNA와 결합하여 환경에 최적화된 능력을 발현시킨다.

그들이 최초로 생성시킨 세 번째 DNA 가닥은 아우리스인들이 멸망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자연계에 그 씨가 되는 염기와 당 그리고 인산이 존재하는 한 언제라도 필요조건이 충족되면 어떤 생물에서건 생성되는 것이다.

그 필요조건은 모든 생물종이 특별한 환경 변화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전심전력을 다한 궁리窮理를 할 때, 또는 생명 에너지가 충만할 때나 강력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리고 죽음을 극복하거나 높은 정신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등과 같이 무수했다.

이런 경우 세 번째 DNA 가닥이 당사자의 세포 내에 생성되어 정상적인 이중나선 구조와 결합하여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필요한 능력이나 지식을 반현하거나 깨닫도록 해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인간이 멸종하고 수없이 많은 동물들이 사라지는 환경이 만들어져도, 오랜 시간으 흐르고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세 번째 DNA 가닥이 생성되어 자연스럽게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그 돌연변이는 환경에 최적화되는 방향으로 일어나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생물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 번째 DNA 가닥은 진화를 촉진하는 열쇠이자 인간종의 끊임없는 재출현 그리고 지식의 전승에 깊이 관여했다.

그 덕분에 인간들은 다양한 사유로 멸망을 했지만 돼지나 소 등의 동물을 매개로 다시 출현할 수 있었고 번성할 수 있었다. 가이아와 이레아는 신인류 프로젝트에 관여하여 세 번째 DNA 가닥을 보다 쉽게 생성시킬 수 있는 신인류를 탄생시켰다.

시련과 극복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각성을 통해 소우주인 자신의 몸과 그 몸속에 감추어진 비밍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룬을 포함한 인공수정체들이었고 베라는 그들이 쉽게 각성할 수 있도록 전혀 다른 환경을 가진 타 차원의 세상을 연결시켰다.

비욘드의 세상은 천신과 마신의 신력이 관여하는 곳으로 신인류들에게 다양한 삶을 체험할 수 있어 각성을 촉진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일을 위해 세 초월자들은 일부 과학자들에게 스페셜 등급 이상의 캡슐 기술과 재료를 은밀하게 전했다.

보통의 인간들이 가상현실 게임으로 비욘드의 세상을 즐기는 동안 신인류들은 치밀하게 짜인 안배를 통해 슈퍼 캡슐을 받아 생생하게 그 세상을 경험하며 각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쿡! 쿡! 쿡! 그랬구나!'

별다른 능력도 가지지 못한 자신의 탄생에 이런 거대한 배경이 존재하는 줄은 몰랐다.

'결국 난 최악의 실험체로 선택된 거로군.'

무능력한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에 거의 확실히 무능력자라고 판단하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수정시킨 것이 바로 그였다.

'빌어먹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왜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하는 거야!'

그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겪였던 수많은 고통들을 생각하자 울분이 차올랐다. 능력이 있는 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는 수시로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자신의 무능력함에 절망하고 자책했었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왜 자신을 모든 것이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모두가 쓰레기 취급을 하는 삶은 제정신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젠 달라!'

공포를 극복했고 죽음을 이겨 냈다.

나약한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해졌고 휑하니 비었던 황량한 가슴에는 따듯한 정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들이 있었고 자신을 믿어 주는 이들도 많다. 물론 자신이 사랑하고 믿는 이들도 많아졌다.

이제는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베풀고 받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지금의 하룬에게 친부모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양아버지 청일 박사가 바뀐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이아도 내게는 고마운 존재로군.'

스스로의 의지로 많은 역경을 이겨 내긴 했지만 어쨌거나 가이아가 세 번째 DNA 가닥이 쉽게 생성될 수 있도록 유전자를 조작해 둔 것은 큰 힘이 되었다.

'아무 능력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나도 이 정도가 되엇는데 가이아나 이레아 그리고 베라에게 직접 선택된 인공수정체들의 능력은 어떨까?'

그러고 보니 이방인으로 말도 안 되는 진경을 보여 준 다크 프린스도 두 초월자 중 1명의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다크니스가 가이아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테니 다크 프린그는 가이아에게 선택을 받았겠군.'

아마도 비욘드에서 특출한 능력을 보여 준 게이머들 중 상당수는 두 초월자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갑자기 예전에 만난 파이오니어 사도회의 페론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 친구는 가이아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휴먼이 다섯 명이라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인공수정체는 총 10명 수준일 것이다. 비욘드의 세계를 연결시킨 베라도 관여를 했다면 그 숫자는 더 늘 것이다.

그들 중에 누군가는 하룬이 그랬던 것처럼 세 번째 DNA 고리에 심은 가이아의 비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무 능력도 없이 태어난 나도 알게 되었는데 그 정도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대부분 알게 되었겠지?'

다크 프린스처럼 능력을 드러낸 이도 있을 테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세 초월자가 원하는 대로 새로운 인간종의 시조가 되겠군.'

기본적인 능력이 다른 만큼 그들의 능력은 엄청날 것이다.

'내가 비록 그들에 비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 인간종의 시조가 된다니 뿌듯하네.'

확실히 무능력자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면서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던 때와는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각성을 했을까?'

자신의 경우 현실에서 기를 쓸 수 있으며 피부가 오르그의 그것처럼 바뀌었고 오염되 대기로 호흡을 하면서도 별무리가 없을 정도로 바뀌었으니 그들은 더 높은 수준까지 올랐을 것이다.

하룬은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그들이 부러웠다. 기본에서 워낙 차이가 났기 때문에 스스로의 진경이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얼마나 더 각성을 해야 할까?'

하룬이 겪은 각성은 총 세 번.

육체적인 변화는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평소 머리를 쓰는 것에는 부족하다고 느껴서 그랬는지 지적인 부분은 거의 각성의 효과를 느낄 수 없었다.

그렇가고 아예 각성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언뜻언뜻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 그림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기는 해도 정리된 것이 아니라 뭔가 잔뜩 뒤섞인 상태였다.

'앞으로는 지능 부분에도 신경을 써야겠구나.'

하룬은 현실과 비욘드에서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일단락되면 지적 분야의 각성에도 신경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몇 가지 정보는 남아 있네.'

그나마 몇 개는 명료하게 그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엇지만.

'설마 노아의 방주에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은 몰랐어.'

종말 시대, 한 종교서에 등장했던 노아의 방주는 대홍수를 맞아 노아라는 인물이 만든 거대한 배였다. 신은 죄악에 물들어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을 물로써 소멸시키기 전에 노아라는 인간과 그 가족만은 구해 주기로 했는데 노아는 거대한 배를 만들고 그 안에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들을 한 쌍씩 태워 대홍수의 위기를 벗어났다는 것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세계 각처에 전승되는 홍수전설도 그 증거였지만 실제로 노아라는 인물이 살던 지역에는 산이 잠길 정도의 거대한 홍수가 발생했고 지구 전체로 보아도 그런 홍수는 거의 동일하게 발생했다.

예전에 흘러가듯 그 이야기를 접했을 때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을 한 쌍씩만 태운다고 해도 크기가 상상이 안 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진실은 생물 유전자 샘플과 관련이 있었다. 노아라는 인물은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서식하던 동식물의 유전자 샘플을 수집했던 것이다.

종말 시대의 고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과학 문명이 번성했다는 사실도 이제는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룬이 완전하게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정보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완전히 각성을 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어쩌면 순수한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 인공수정체들 중 일부는 시련을 통하거나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세 번째 DNA 가닥이 선사하는 정보를 얻은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하룬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

몸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꼼짝도 하지 않던 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여지는 데에 놀란 하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압력이 사라졌어! 그리고 몸 안으로 들어왔던 그 이상한 기운도 씻은 듯 사라졌고.'

그러고 보니 바로 앞도 볼 수 없게 만들었던 회색 기류는 여전했지만 하룬의 눈에는 그 기류를 뚫고 주변 사물을 볼 수 있었다.

"와아!"

탄성이 튀어나왔다. 자신의 몇십 보 앞에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천국인가?'

종교가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이 잇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싶은 풍경이 그의 눈과 오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건물 하나의 크기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거대한 나무들이 서로 어울려 하늘을 적당히 가리고 있는 아래쪽에 흰색 재질의 석재로 지어진 작은 성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작은 호수와 수많은 과일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지천으로 피어난 수많은 꽃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초식동물들. 싱그러운 초목이 뿜어내는 청량한 기운은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자신이 서 있는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은 지옥과 천국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가볍게 걸음을 뗀 하룬은 이내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흐읍!"

호흡을 하는 것만으로도 찌든 몸과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이렇게 순수한 기운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산다면 천년만년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던 하룬은 마지막에 작은 성으로 향했다. 파라다이스에 있는 저택을 열 배 정도 확장시킨다면 비슷해질까? 작은 성안으로 들어간 하룬은 잠시 서서 기감을 열었다.

'호! 놀라운데.'

정신력만 강해진 줄 알았는데 기감은 더욱 민감해졌다. 마치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의 기감은 생생하게 지나는 사물을 감지하고 있었다. 위쪽으로 올라가는 회전 계단을 따라 움직이는 그의 기감은 순식간에 7층 높이의 성 전체를 훑었다.

'아무도 없다.'

소드 마스터에 오른 자신이 견디지 못하고 온몸이 짓뭉개져 죽을 뻔했던 회색 기운이 가득한 이런 곳에 누군가 산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테지만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하룬은 왜지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성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방들은 용도별로 잘 꾸며져 있었고 온갖 진귀한 것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조리실의 그릇들은 모조리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복도나 계단의 장식품들은 하룬 같은 이가 보아도 명품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었다.

그렇게 7층 높이에 100여 개의 방을 가진 성을 모두 둘러본 하룬은 다시 아래로 향했다. 그가 유일하게 지나친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성은 물론이고 바깥까지 충만하게 차 있는 순수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그 방 안에는 아마도 순수석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마지막에 들르려고 지나친 것이다.

끼이익!

오랜 세월 닫혀 있었던 문이 작은 소음과 함께 열렸다.

'헛! 발몬과 그의 부인들이다!'

열린 문 사이로 곱게 늙은 사람들이 침대와 카우치 그리고 소파에 눕거나 앉은 모습이엇다. 하룬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신화에 등장하는 발몬과 그의 부인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신화가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흰 수염과 매서운 눈길이 인상적인 노인은 카우치에 발을 쭉 뻗고 앉아 있었고 침대 위에는 금발에 긴 귀가 인상적인 노부인이 베개를 높이 베고 있었다.

발몬의 양옆에는 황색 피부에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부인과 흰 피부에 아름다운 미모의 노부인이 자리하고 있었고 소파에는 흑발을 가진 중년 미부인이 앉아 있었다.

하룬은 허리를 숙였다.

"돌풍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영면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어쩐지 인사를 해야 할 기분이었다. 생자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체의 표정과 감기지 않은 눈길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이제껏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사체들이 환한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황홀했기에 하룬은 눈을 부릅뜬 채 망연히 쳐다보기만 했다.

마침내 사체들이 모두 빛으로 변한 후 그 빛들은 한 덩어리가 되더니 천천히 하룬 쪽으로 움직였다.

화악!

'뭐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자신은 빛무리에 휘감겨 있었다.

그때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잘 왔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내 후인이여. 난 발몬이라고 한다.

─저, 전 정민 아니, 하룬이라고 합니다. 이계에서 왔으며…….

─후후후! 다 알고 있다. 내 아내 미요스의 권능으로 난 이미 너를 알고 있었다.

─네에?

하룬은 너무 충격적인 일을 당했기에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미요스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인해 더욱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없다. 정신을 집중해서 날 느껴라!

벼락처럼 머릿속을 강타하는 말에 정신을 집중해서 아까 보았던 발몬의 모습을 떠올린 하룬은, 신기하게도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기억은 발몬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대화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이……건?

─내 기억과 얼마간의 의념이다. 지금 당장 큰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겠지만 네가 각성을 할 때마다 더 많은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마왕과의 질긴 악연에 이은 전투와 같이, 네게는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룬은 마치 영화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한 인간의 삶과 순간순간의 감정 그리고 깨달음을 볼 수 있었다. 포러스의 기억과 유사하면서도 감정과 깨달음까지 느낄 수 있어 그 깊이와 생생함은 천양지차였다.

─이것은 내가 같은 세상에서 건너온 후인에게 남기는 선물이다. 물론 몇 번의 각성을 더해야 내 경험을 온전히 네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수호자에게 선택을 받아 각성을 거듭해야 할 네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내 경험은 수많은 삶에 해당할 테니까.

그런가? 아니, 그랬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 번에 각인되는 바람에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언뜻 본 발몬의 생애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것이다.

"헉!"

발몬의 삶을 방임 상태에서 지켜보던 하룬은 한순간 기겁을 했다. 발몬은 무려 2억 2천만 년 전에 지구에서 살았던 인간이었다. 그가 살았던 지구에는 지성이 고도로 발달한 인간들이 세운 문명이 번성했었다.

'메갈로스인?'

메갈로스인들은 오리온 항성계에서 이주해 온 인간의 후손들이었다.

선대 이주자들의 경우에는 대기의 조성이나 각종 질병으로 인해 오래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죽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선대가 남긴 인공지능 컴퓨터, 즉 초월자의 도움을 받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들 중 일부는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 하기도 했고 다른 일부는 그 이전에 지구에 정착했었던 아우리스인들의 후손들과 결혼을 하며 힘겹게 대를 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우리스인들이 생성시킨 세 번째 DNA 가닥을 활성화시켜 능력을 발전시켰고 마침내 오래전에 번성을 누렸던 아우리스인만큼이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들은 수만 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온 여러 아인종들과 평화롭게 공존을 하며 번영을 누렸다.

그들의 총인구는 수만 명에 불과했지만 고도로 발달한 지성과 과학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혼력과 특수한 기계를 이용해서 차원 여행까지 할 수 있었다.

아우리스인들이 그랬듯 메갈로스인들에게 있어서도 차원 여행은 다양한 삶을 즐길 수 있는 유희의 일종이었고 이런 삶을 경험함으로 인해 종국에는 희로애락을 벗어난 고도의 지성을 가지게 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당시의 지구는 그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전혀 오염되지 않은 자연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우리스인들로부터 유래된 수많은 아인종들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다.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으로 능력을 가진 메갈로스인들은 수많은 아인종들에게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혐오했기에 그들의 영향으로 인간들은 평화를 구가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하룬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후후후. 그런 세상을 왜 버리고 이곳에서 죽었냐고? 평화는 전쟁의 비극을 경험한 자들에게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지만 나처럼 경험해 보지 못한 자들에게는 따분하고 정체된 시기와 다르지 않았다. 난 몬스터와 마수 그리고 마계의 존재들과 싸우며 자신과 가족 그리고 무리를 지키는 이곳에서의 삶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이라고 생각했지.

거인족인 아우리스인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좀 있긴 하지만 발몬이 속한 메갈로스인들도 수명이 무려 1,000년에 가까울 정도였고 수천 명의 능력에 해당하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메갈로스인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도무지 발전이 없는 에쿠리스인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으며 살았다. 정신 능력이 고도로 발달한 메갈로스인들이 있기에 당시는 아주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평화로운 삶이지만 발몬은 대부분의 메갈로스인들과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각성을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이계 여행의 경우 타 차원으로 건너가면 능력의 일부 혹은 전부가 봉인되어 지구와는 달리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기에 메갈로스인들은 대부분 꺼려 했지만 발몬은 아니었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감성의 존재이기도 하지. 난 평화롭기는 하지만 지루한 시간들이 너무 싫었다. 그렇기에 비록 이 작은 곳에 갇혀 죽을 운명에 처했지만 지구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곳은 지구와는 달리 여러 아인종들과 천계 혹은 마계의 존재들까지 끼어들어, 생생하고 치열하게 삶이 부딪히는 곳이었다. 난 순간순간이 새로우며 매 순간 긴장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행복해할 수 있는 이곳을 떠나기 싫었고, 무엇보다 사랑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랑?'

─이곳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미요스는 이계로 건너와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내게 무한한 사랑과 특별한 힘을 주었다. 그 때문에 신의 능력까지 잃어버린 그녀를 난 버릴 수가 없었다. 또한 운명처럼 내게로 모여든 다른 여인들의 마음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각성을 포기하고 이곳에서의 삶을 선택했지. 그렇게 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없지만 날 사랑하고 믿는 여인들과 함께 지낼 수 있으니까.

갑자기 가슴이 짜릿했다.

'멋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다니!

사랑을 길가에 굴러다는 돌멩이처럼 하찮게 여기는 현실의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유아기부터 본능적으로 애정을 갈구하면서 살아온 하룬은 그 어떤 말보다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미요스는 이계에서 넘어와 아무 능력도 없던 내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블러드 에센스라는 힘을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힘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흑 물질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어떤 힘으로도 변환될 수 있으며 외계로 발출되는 동안 끊임없이 흡수되는 신비한 힘이다. 어떤 종류의 마나든지 흡수하고 다른 종류의 힘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그 심비한 힘을 이용해서 난 마왕과 그 권속들을 상대할 수 있었으며,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할 수 있었다.

블러드 에센스의 비밀이 조금 밝혀졌다.

하룬도 암흑 물질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상식이 있다.

종말 시대 말에 발견된 암흑 물질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총 90퍼센트를 차지하며 모든 전자기파로 관측되지 않고, 오로지 중력만으로 그 존재가 밝혀진 의문의 물질이다.

암흑 물질이라는 개념은 암흑 에너지를 포함하는데 그 에너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강한 척도 정도로 정의하고 있었다.

암흑 물질이 별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블랙홀과 연관이 있으며 우주의 탄생에 관계된 물질이라는 것이 정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블러드 에센스가 어떤 종류의 힘인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모든 종류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다른 형태의 마나로 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언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확실하게 안 것들도 있었다.

블러드 에센스가 실은 미요스 여신이 가지고 있다가 발몬에게 전해 준 힘이라는 사실과 블러드 에센스의 본질이 우주를 창조하고 구성하는 암흑 물질과 관련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힘을 아우르는 포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마왕이 마르지 않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내 아내 미요스가 내게 준 블러드 에센스는 자연의 마나는 물론이고 사체들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음차원의 마나 그리고 심지어는 공격을 한 마왕의 마력까지 흡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 이점으로 인해 나와 동료들은 그 어려운 전투에서 힙겹게나마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내 육체가 블러드 에센스를 효율적으로 받아들여 축적하는 데 어려움을 가졌다는 것이다. 난 이곳에서 총 네 번의 각성을 했고 그때마다 내 육체는 전보다 더 강인하게 바뀌었지만 우주 근원의 힘인 블러드 에센스를 담고 발휘하는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발몬의 이야기는 하룬이 궁금해하고 있는 깊은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엇기에 그는 전심을 다해 그 이야기를 머리에 새겼다.

─블러드 에센스는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고 그 어떤 힘으로도 쓸 수 있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영혼이 강하지 않다면 절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후인은 이 점을 명심하여 정신과 영혼을 끊임없이 담금질해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난 언제나 블러드 에센스를 쓸 수 있는 거야?'

몸 안에 존재하고 때때로 원하지 않아도 흡수가 되었지만 하룬은 아직까지 그 힘을 쓸 수 없었기에 그 갑갑함은 점점더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정신력과 영혼력이 감당할 수 없는 블러드 에센스는 오히려 독이니 부단히 수련하라. 블러드 에센스는 간절한 의지에 화답할 것이다.

─조금만 더 설명해 주세요!

조금만 더 자세하게 들으면 뭔가 방법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후인의 정신력은 강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영혼력이 약하구나. 내가 그랬듯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은 탓에 불완전한 각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지. 좀 더 세상을 두루 경험하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한편 그 경험들을 통해 영혼력을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발몬의 음성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내 후인이여,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나와 인연을 맺은 이들의 후예들이 아직까지 대를 이어오고 있다면 그들을 돌봐 주었으면 좋겠다.

─후예라면?

발몬은 그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발몬은 모두 6명의 부인을 맞이했는데 그 첫 번째가 미요스의 여신이었고, 두 번째는 하이엘프, 세 번째는 럼프족 여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세상을 떠돌며 만난 여인들이었다.

미요스의 후예들은 드워프였고 하이엘프의 후예들이야 당연히 엘프들이다. 일부인긴 하지만 하룬은 이미 드워프나 엘프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니 그들을 챙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산악 부족의 시조들은 발몬과 함께 이곳으로 온 에쿠리스인들로 그와는 달리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지구에서부터 발몬을 따르며 마왕군과 싸우던 와중에 마계에서 흘러나온 마기에 침습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따라 마계의 세력과 오랫동안 싸워 왔기에 본의 아니게 마기를 가지게 되어 이곳 비욘드의 일반인들과 어울려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이 마법을 배우면 마성魔性으로 인해 세상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핏속에 각인된 마기가 사라지려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난 그들에게 마수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라는 말도 안 되는 유지를 내렸다. 그리고 후인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대는 부디 그들이 이 세상에 행한 공훈을 생각해서 그들이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도록 도와주기 바란다.

럼프족이 마기에 침습당한 것은 산악 부족과 같았지만 거기에 더해 블러드 에센스로 인해 머리를 비롯한 온몸에 단단한 혹이 돋는 외모를 가지게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마수 내지는 마계의 생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들의 핏속에 새겨진 마성도 사라질 것이고 블러드 에센스로 인한 부작용도 머리의 뿔을 제외 하고는 사라질 것이다. 그들 역시 내 수하들의 후인들과 같이 내가 내린 유훈으로 인해 세상과 오랫동안 단절된 삶을 살테니 각별히 보살펴 주기를 부탁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룬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곳에 온 목적은 순수석을 얻기 위함인데 성안에선 수수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르신, 순수석은 어디에 있습니까?

─순수석은 이미 네가 얻었다.

─네?

─세상을 창조한 것은 누군가의 의지가 아니다. 태고의 대폭발이 있고 세상은 혼동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혼돈에서 탄생한 암흑 물질이 영겁과 같은 시간과 함께 활동해서 지금의 차원들과 무수한 세계를 만들었다. 순수석은 순수한 혼돈의 기운이 모인 것으로 자연의 힘이나 암흑 물질을 만들어 낸 태초의 기운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 순수석은 이미…….

"좀 더!"

아쉬운 마음에 소리까지 질렀지만 발몬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허탈한 마음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하룬이었지만 이내 벌떡 일어났다.

성이며 가구들이 빛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당혹스러운 하룬이 보는 사이에 성은 빠르게 빛 가루로 변해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유저들이 죽을 때 생기는 현상과 비슷했다. 그렇게 하룬이 보는 앞에서 성은 빛 가루로 변해 사라졌고, 아름답던 풍광들도 그 뒤를 따랐다.

얼마 후 하룬은 회색 기류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아름답던 풍광이 있었던 곳은 사라지고 그곳을 회색 기류가 차지한 것이다.

'마치 꿈을 꾼 것 같구나!'

하지만 분명 꿈은 아니었다.

발몬과 나눈 대화 내용은 너무나 생생했고 그가 전해 준 일부 기억도 떠올릴 수 있었다.

또 다른 증거로 블러드 에센스의 표식이 전신으로 퍼져 있었다. 외관으로 볼 수 없었지만 하룬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순수석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내가 얻었다고?'

인벤토리는 물론이고 정령들의 아공간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돌 비슷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순수석의 파편을 생각했을 때 엄청난 기운이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망한 하룬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몸 안을 관조하자 비로소 자신에게 일어난 특별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마나가 한 가지로 변해 버렸다!'

몸 안의 모든 마나가 검은 색의 마나로 변해 있었다. 색만보면 음험한 기운을 연상했지만 이 검은색 마나는 극도의 순수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세 오션들이 어느새 검은색의 마나로 가득 차 있었는데 정수리에 자리를 잡고 꼼짝도 하지 않았던 마왕의 눈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몸 전체에 새로운 마나가 완전히 꽉 차 있었다.

뇌전의 마나와 자연의 마나 그리고 암흑의 마나로 나누어져 있었던 마나들은 물론이고 문신들이 품고 있었던 순정석의 마나도 더 이상 감지할 수 없었다.

놀라운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나 스토리지의 마나들도 어느새 검은색 마나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 검은색 마나를 온몸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나마 세 마나 오션이 있던 자리에는 다른 곳에 비해 강하게 농축된 마나가 있었기에 그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신기하고 놀라운 마음으로 몸 내부를 관조하던 하룬은 뜻밖의 사실을 더 발견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마나 로드가 사라졌어!'

하룬은 기겁을 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한참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하룬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쩌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검은색 마나에 흡수된 건지도 몰라. 그럼 이 검은색 마나가 블러드 에센스?'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하룬이 지금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운 마나가 블러드 에센스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발몬이 한 말을 떠올리던 하룬은 새로운 변화가 블러드 에센스가 활성화되었기에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험해 보자!'

하룬은 뇌전력을 떠올리며 손가락 끝에 집중을 했다.

'뇌전이여, 모습을 나타내!'

간절한 하룬의 의념에 화답이라도 하듯 손가락 끝에는 시퍼런 뇌전들이 방전하기 시작했다.

'역시!'

검은색 마나가 블러드 에센스라는 것도 발몬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 블러드 에센스는 무엇이든 받아들여 어떤 마나로든 변환될 수 있었다.

하룬은 비로소 어느 정도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비록 감지 할 수는 없지만 뇌전의 마나가 손가락 끝을 통해 방출되는 것으로 보아 마나 로드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존재하는데 감지할 수 없다니.

그래도 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마나 플로도 돌릴 수 없나?'

몸에 가득 차 있는 블러드 에센스로 인해 마나 로드를 감지할 수는 없지만 수없이 운용한 마나 플로였다.

하룬은 조심스럽게 블러드 에센스에 의지를 심었다.

'움직여!'

다행이도 순흑색의 마나는 하룬의 의지에 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움직인다!'

감동이다. 이제껏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활성화시킬 수 없었던 블러드 에센스가 움직이는 것이다.

하룬은 이전의 마나 오션이 있던 위치에 있던 블러드 에센세를 움직여 지금은 느낄 수 없는 마나 로드를 통해 운행시켰다.

휘리릭!

마치 태풍을 뒤에 둔 배라도 되는 걸까? 마나 플로의 운행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뭐야?'

의문도 잠시 제자리로 돌아온 블러드 에센스는 전보다 더 농밀해졌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룬은 너무나 빠른 마나 플로에 푹 빠져들었고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수없이 마나 플로를 운행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룬은 문득 온몸을 가득 채웠던 블러드 에센스가 세 마나 오션과 108곳의 마나 스토리지 그리고 다른 몇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을 자각하며 마나 플로를 멈추었다.

'블러드 에센스를 제대로 갈무리하려면 아직 멀었군.'

하룬은 마나 저장소에 블러드 에센스의 대부분이 자리를 잡았지만 몸 안 어디에서도 블러드 에센스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뼈와 근육, 내장은 물론이고 세포 곳곳에 채워져 있는 기이한 마나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는 사용할 수 없었던 그 마나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온몸이 마나 오션이 된 것 같았다.

'정말 좋구나!'

하룬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눈을 떴다.

각성을 했을 때마다 느꼈던 그 느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상쾌함이 강렬한 활력이 온몸에 가득했다. 이 상태라면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산을 허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어느새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회색 기류가 무척이나 엷어져 있었다.

'설마 내가 흡수를 한 걸까? 아니면 압력이 높아져서 그런 것일까?'

알 수는 없다.

하룬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이 마나 플로를 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렴 어때! 어쨌건 더 이상은 내 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 그걸로 된 거지.'

생각해 봐야 알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룬은 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아즈만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시험해 보자!'

황혼의 킨드잘을 꺼내 들고 어둠의 마나를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집중한 하룬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익숙한 어둠의 마나가 세 마나 오션으로부터 손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이동했던 것이다.

시험 삼아 해 본 것이기에 적은 양의 마나만 주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족히 2미터는 될 것 같은 밝은 회색빛 오러 블레이드가 쑥 솟아났다.

"화아! 발몬께서 말씀하신 대로 블러드 에센스는 그 어떤 마나로도 변환해서 구현할 수 있었어."

발몬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하룬은 곧이어 다른 사실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다.

가볍게 시험해 볼 생각으로 생성시킨 오러 블레이드의 길이나 색상, 그 형태 그리고 주입된 마나의 밀도로 보건대 소드 마스터 중급은 되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 정도라면 약간 무리하면 상급의 검술을 익힐 수 있을지도…….'

딜런이 사용하는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가 부러웠던 하룬이다. 소드 마스터 상급에 오르려면 마나 운용과 검술에 대한 깨달음도 필요했지만 실로 엄청난 마나양이 필요했다.

'좋아. 이참에 다른 것들도 시험해 보자.'

하룬은 기회가 온 김에 언젠가 생각했었던 일을 해 보기로 하고 마나를 불러들였다. 그러곤 자연의 마나만이 가진 성질을 떠올리며 마나를 황혼의 킨드잘에 주입했다.

'후후! 된다!'

영롱하고 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비수 끝에서 쑤욱 솟아올랐다. 자연의 마나를 다시 거두어들인 하룬은 이번엔 뇌전력을 비수에 주입시켰다.

지지지직! 츠르릇!

강렬한 전류가 흐르기 무섭게 황혼의 킨드잘은 2미터가량의 뇌전의 휩싸인 검으로 변해 버렸다.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라 원래 장검이엇던 것처럼 모습을 바꾼 것이다. 검을 휘두르자 뇌전이 길게 이어지며 회색 기류 속으로 뻗어 나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시험해 볼 것이 있었다.

하룬은 블러드 에센스 그 자체에 의지를 부여해서 황혼의 킨드잘로 이동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저저저정.

하룬은 빨려 들어갈 듯 깨끗한 검은색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나와 장검으로 변한 황혼의 킨드잘을 보며 황홀한 얼굴이 되었다.

휘익!

하룬은 홀린 표정으로 황혼의 킨드잘을 휘둘렀다.

순흑색의 긴 장검은 회색 기류를 깨끗하게 갈라 버렸다.

놀랍게도 갈라진 회색 기류는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흡수를 하고 있어!'

하룬은 오러 블레이드로 구현된 블러드 에센스가 끊임없이 회색 기류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나 플로를 통해 어느 정도 사라졌던 블러드 에센스가 유입되어 다시 연기처럼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신기하군.'

그렇다면 더 시험해 볼 것이 있었다.

하룬은 이번에는 강렬하고 뜨거운 화염을 떠올렸다.

화르르.

황혼의 킨드잘에서 강렬한 화염이 솟구쳤다. 화염은 이글거리며 용케도 검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오러 블레이드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이상했지만 휘두르자 화염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불의 마나는 얻은 적이 없었는데도 되네. 그럼 다른 것도.'

하룬은 연이어 얼음 속성의 마나와 풍계 속성의 마나도 구현이 되는지 시험을 해 봤다.

"하하하하!"

하룬은 아무도 없는 회색 땅에서 미친놈처럼 웃었다.

실로 엄청난 힘을 얻은 것이다. 이제까지 쓸 수 없었던 것이 억울할 정도로 블러드 에센스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이 정도라면 마법도 두렵지 않아.'

거의 모든 속성의 마나를 다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긴 해도 흑마력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다크 프린스와 싸우기 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다.

무엇보다도 마나의 양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그리고 그 마나는 무엇으로도 변환되어 구현할 수 있었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다크 프린스, 네가 비록 마력 전이를 통해 한 단계 이상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지만 나 역시 이제는 만만치 않아, 기다려라!'

비록 놈이 다른 흑마법사들의 힘을 빌려다 쓰기는 하지만 이제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다시 한 번 주위를 꼼꼼하게 살펴보던 하룬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농도가 많이 약해진 회색 기류 속을 훤히 뚫어볼 수 있게 된 하룬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수시로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회색 기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던 것이다.

순수석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것이 불안하긴 했지만 이곳에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다크니스는 순수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룬은 편해진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탄성을 질렀다.

"아! 아그다왓트의 부탁을 잊을 뻔했다."

하룬은 서둘러 아공간에 간직하고 있었던 아그다왓트의 씨앗을 꺼냈다.

'그런데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 살 수 있을까?'

잠시 망설이던 하룬은 아그다왓트가 뭔가 알기에 굳이 혼돈의 땅에 자신의 씨앗을 심어 달라고 부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룬은 황혼의 킨드잘을 꺼내 적당히 땅을 파고 씨앗을 놓은 다음 회색의 흙을 덮었다.

'이대로 놔두면 제대로 발아發芽하지도 않을 텐데.'

잠시 망설이던 하룬은 나이아에게 의념을 보냈다.

─나이아!

─괜찮아요, 하룬?

대답을 하는 나이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난 괜찮아. 그런데 밖에 나올 수 있어?

혼돈의 땅 깊숙이 들어와서는 회색 기류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간 나이아였다.

─인간체는 힘들 테고 정령체로 나가 볼게요.

스르릉.

흐릿한 형체가 하룬의 눈앞에 나타나는가 싶더니 금방 실체화되었다.

─어머! 아까완 다르네.

─괜찮아?

─압력이 현격하게 약해졌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 그리고 제 속성도 느낄 수 있고요.

─다행이네. 그럼 여기에 물을 좀 줄래?

─어머, 씨앗을 심었네요. 호호. 맡겨만 주세요.

나이아는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커다란 물덩이를 만들었고 아그다왓트 씨앗을 묻은 곳 위에 터트렸다.

회색의 말라버린 땅은 금방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생명의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그 주변은 왕성한 생명력이 가득했다.

─수고했어.

─큰일도 아닌걸요.

나이아는 자신을 칭찬하는 하룬의 태도가 기쁜 듯 슬며시 그의 품에 안겼다.

'후우.'

하룬은 나이아 특유의 체향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 특유의 향기와 탄력은 너무 생생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 무슨 변화가 느껴져?

─네. 너무나 순수한 기운이 가득 차 있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제 속성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어요.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순수석이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어떻게 할래? 지금이라도 인간체로 나올 거야?

─아니요. 나중에요. 조금만 더 기운을 흡수하면 좀 더 완벽한 인간체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 그럼 돌아가.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 주고.

─그냥요?

섭섭하다는 듯 큰 눈을 치켜뜨며 그를 쳐다보는 나이아에게는 전에 없던 미태와 염기가 느껴졌다.

'나쁜 건 너무 빨리 배운다니까.'

그나마 조신하던 나이아였지만 위신느의 적극적인 행동에 질투를 느낀 것인지 갈수록 행동이 적극적이 되고 있었다.

쪼옥!

하룬은 나이아의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헤에.

나이아는 기분이 좋은지 몸을 배배꼬며 웃었다. 몸이나 뿜어지는 매력은 성숙한 여인의 그것이었지만 감정은 그야말로 벨 정도에 그치는 나이아였다.

하룬은 나이아가 돌아간 후 잠시 더 와그다왓트를 심은 곳을 살펴본 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럭무럭 크렴. 언젠가는 네 그늘 아래로 많은 엘프들이 찾아오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네 선조들이 그랬듯 엘프들과 서로 도우며 아주 오랫동안 즐겁게 살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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