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화.위기와 변수 (259/278)

위기와 변수

"으으으!"

펠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악!"

무의식중에 일어나려고 했던 펠은 생소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손뼈가 모두 부러진 상태였던 것이다.

"지독하게 아프네. 인간체라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어."

생소한 고통의 감각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자신의 상태를 살펴본 펠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악이었던 것이다. 내장은 제자리를 이탈했고 뼈들은 모두 부러진 상태였다.

시급히 상태를 호전시켜야만 했다. 다행히 아직도 흡수하지 못한 순수석의 파편이 있고 자신이 정려이었기에 그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 펠의 눈에 생경한 풍경이 들어왔다.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은 작은 연못가였는데 특이하게 연못의 물은 새까만 검은색이었지만 짙은 마나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더 눈을 돌린 펠은 연못이 호리병처럼 생긴 지형의 바닥에 있다는 것과 연못 주변에는 처음 보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리병의 바닥에 해당하는 이곳은 연못을 포항해서 기껏해야 걸어서 오십 보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았는데 빛나는 검은색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펠은 눈에 보이는 풍경이 생소하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가 어디지?'

교개를 갸우뚱하던 펠의 눈이 한순간 빛났다.

'여긴? 틀림없어!'

이곳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에서도 사라졌던 바로 그곳이었다.

'내가 마지막 순간 무의식중에 떠올린 영상이 바로 이곳이었구나.'

거대한 다크 핸드와 격돌한 하룬이 피를 뿜어내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그에게 날아갔던 펠은 이미 모든 힘을 소진한 상태였지만, 그대로 있으면 소멸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본능적으로 공간 이동을 시도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이 바로 이곳이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곳이었는데 어떻게 그 순간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형! 형!"

이동 순간을 생각하던 펠은 이제야 하룬의 존재를 떠올리고 그를 불렀다.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룬은 계약을 떠나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인간이었다.

부러지고 짓이겨진 팔다리를 버둥거려 간신히 일어나 앉은 펠은 연못의 반대편에 엎어진 상태로 누워 있는 하룬을 볼 수 있었다.

'후우!'

이동 순간은 아무 기억도 없을 정도였기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자신과 같은 이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펠은 하룬의 곁으로 가기 위해 기어야만 했다. 다리 근육은 물론 뼈까지 모두 부러져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죽으면 안 돼, 형!"

단순히 계약자라서가 아니다. 이전의 계약자들과는 달리 하룬은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그의 영향으로 인간이 되고 싶었다.

하룬은 이전의 계약자들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였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이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본신의 능력뿐 아니라 사고나 감정의 폭이 무척이나 좁았던 하룬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와 함께 생생하게 겪은 펠이다.

이전의 계약자들이 어느 정도 완성된 존재들이하면 하룬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존재였다.

펠은 하룬을 만난 후 처음으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만남속에서 같이 성장하고 싶었다. 다행히 하룬도 펠을 아꼈고, 그를 위해 정령석을 비롯해서 많은 아이템을 구해주었다. 그랬기에 이 정도나마 본래 자신의 기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 치가 떨리게 아프긴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즐거워.'

잠깐 움직인 대가로 부러진 뼈들과 찢어진 근육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신경세포들은 격렬한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수 있기에 자신이 인간체가 되었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을 더욱 생생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이전의 정령체라면 기운이 다하는 순간 아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을 것이다. 고통은 느끼지만 이런 종류가 아니라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본신을 구성하는 정령력이 뒤틀리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데 따른 심리적인 통증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생생하게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고통이 오히려 스스로 살아 있음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얼마나 움직였을까?

펠은 엎어진 상태로 허벅지를 연못에 걸치고 있는 하룬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형! 형!"

몇 번이나 불러 보지만 하룬은 아무 대답이 없다.

'설마?'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 와락 겁이 났다. 자신이야 인간체가 소멸되더라도 다시 구성할 수 있지만 하룬은 아니다. 만약 하룬이 죽는다면 그와 한 운명으로 묶인 자신마저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하룬 역시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공포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힘겹게 손을 뻗어 뺨을 바닥에 대고 있는 하룬의 코앞에 댄 펠은 희미하게나마 호흡의 증거를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야!'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본 펠은 다급해졌다. 코와 입은 물론이고 눈과 귀에서도 흘러나온 피가 새까맣게 변색된채 이미 굳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뼈와 근육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심장을 포함한 내장 기관들은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빨리'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숨을 놓은 것은 아니니 엘프의 눈물을 먹일 수 있다.

"으으윽!"

안간힘을 썼지만 지금 상태로는 하룬의 몸을 똑바로 눕힐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급한 마음 때문인지 고통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겨우 얼굴이 하늘을 보게 만드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다시 한 번 코앞에 손가락을 댄 펠은 더 이상 숨결이 느껴지지 않자 더 다급해졌다. 심장의 기복은 아예 사라졌고 몸은 딱딱해지고 있었다. 이른바 사후강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지 30분 이내라면 다시 영혼을 되돌릴 수 있는 엘프의 비약이엇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된다. 펠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익숙하게 아공간에서 엘프의 눈물을 꺼내 하룬의 입안에 떨어뜨렸다.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하룬의 얼굴을 바라보던 펠은 문득 눈앞이 아득해지자 자신의 몸 상태 역시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심장의 박동이 약해지며 머리로 향하는 혈류량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형, 힘을 내!"

펠은 마지막으로 마음을 담아 응원을 하고는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정령체로 변환했다. 역시나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희미해진 정령체는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소멸될 수 있는 위급한 상태였다.

펠은 그대로 하룬의 가슴 어름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곳에 자신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순수석의 파편이 있는 것이다.

"어떡해?"

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녀는 델의 비상 연락을 받고 캡슐 안으로 들어와 하룬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지가 짓눌려 온몸의 뼈란 뼈는 살을 헤집고 튀어나온 상태에 심장은 멈추고 호흡도 끊겼다. 몸의 온 구멍으로 빠져나온 피는 이미 굳어 가고 있었고 머리통도 납작하게 눌린것이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온몸이 후들거렸지만 벨은 애써 정신을 차렸다.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에 그나마 빨리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델, 어떤 상황이야?"

─그게 말이죠…….

델은 하룬에게 일어난 상황을 영상을 곁들여 가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왜 오빠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냐고?"

비욘드의 아바타는 느리긴 하지만 재생 과정을 겪고 있다는데 현실의 육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현실의 육체가 동화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비욘드의 아바타까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이런 괴리의 원인을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동화율이 거의 98퍼센트에 달하니 아바타의 변화가 현실의 육체에 즉각적으로 반영이 되어애 하건만 그렇지가 않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벨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뭔가 떠오를 듯 가물거리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왜 동화 현상이 안 일어나는 거지?'

기계적인 결함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오빠의 양부인 청일 박사가 심혈을 기울여 외관을 완성했고 초월자 가이아의 자식인 자신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지난번에도 엘프의 눈물은 그 이름값을 했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다면 떼를 써서라도 일찌감치 복제체와의 동화를 수련시킬 것을 그랬다, 동조화 과정을 통해 복제체로 하여금 비욘드를 플레이하게 만들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타격을 받았겠지만 이렇게 위험한 상태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의심이 되는 부분은 있습니다.

"뭐지?"

벨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마스터의 가슴에 박혀 있는 단검의 존재입니다.

"단검?"

─네.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단검입니다. 절삭력에 더해 물질의 기본 구조를 깨뜨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으로 마스터의 회복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어떡해?"

당장 비욘드로 갈 수도 없기에 벨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엘프의 눈물이 활성화되어 마스터가 부활하게 되면 그 단검도 자연히 빠질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 다행이다.

"그럼 다른 문제는 뭔데?"

벨의 채근에 델은 확신이 없는지 잠시 시간을 두고 대답을 했다.

─계속해서 지난번의 상황과 현재의 차이점을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스터를 위해 공급 대기 중인 각종 영양 성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영양 성분? 그럼 혹시 약재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동화가 100퍼센트가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부분이니까요.

비욘드의 세상은 현실과는 다르다. 마나는 기로 대체되고 각종 음식 또한 캡슐에 주입된 영양 성분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엘프의 눈물이 만들어 내는 기적적인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그 정도의 효과를 지닌 특별한 물품이 있어야만 했다.

"아마 네 말이 맞을 거야!"

다른 영양 성분이 벨이 주기적으로 구해서 공급을 할 수 있었지만 약초의 경우는 그게 어려웠던 것이다.

"암무, 암무를 만나야겠어. 약초 마을 출신들도."

암무 일행과 약초 마을 사람들은 알몸뚱이에 가까운 꼴리기는 했지만 나름 자신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가지고 왔다. 그중에는 약초들도 있을 것이다.

벨은 다급한 얼굴로 빠르게 돌풍 기지로 향했다.

암무와 대산 노인은 벨의 집무실에 왔지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지 참모가 자신들을 직접 찾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기지 생활은 어떠세요?"

"아주 좋습니다. 일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이 거의 없이 휴먼 가드의 노예나 다름없었던 우리들에게 이곳은 노력을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파라다이스나 마찬가지이니까요."

대산 노인은 자신보다는 아들 부부와 손주를 생각하며 크게 만족했다. 특히 제대로 된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이곳 시스템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너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아우터들은 후대에 각별한 신경을 써 왔던 것이다.

"저 역시 만족스럽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마음껏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지만 꿈을 꿀 수 있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겁니다."

암무 역시 지금의 기지 생활에 만족했다. 무엇보다도 미앙이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만족스러웠다.

"두 분을 이렇게 부른 것은 부탁이 있어서예요."

두 사람은 본론이 나오자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하룬 대장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어요."

"넷?"

"어쩌다가? 부상 정도는 어떻습니까?"

하룬이 돌풍 기지의 정신적인 지주라는 점을 잘 알고 있고 두 사람에게는 각별한 은인이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극비 임무를 수행하다가 부상을 당했는데 현재 의식불명 상태랍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세포가 괴사할 수도 있어서 서둘러야 하는데……."

벨릐 심각한 얼굴을 보면서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아 두 사람의 얼굴도 덩달아 딱딱하게 굳었다.

"외상도 그렇지만 내상이 아주 심각해요. 하지만 현재 기지가 비축하고 있는 약재로는 대장님을 치료할 수가 없어요."

"그럼?"

대산 노인은 이제야 벨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 약초를 찾아야 해요. 그것도 영약이라고 불릴 정도의 약효를 가진."

"산삼!"

"네. 산삼도 필요하지만 하수오와 같은 다른 약재들도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벨과 아즈만은 지난번에 하룬이 사망 직전까지 갔다가 회복된 이면에 산삼을 비롯한 약초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각종 데이터를 통해 확인했다. 산삼을 비록한 약초들에 함유된 어떤 성분들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세포와 장기 재생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있을 법한 곳들을 알고 있습니다."

당장 대산 노인이 소리쳤다.

"정말요?"

"네, 참모."

대산 농인의 반응에 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역시 약초들이 자라는 곳을 몇 군데 알고 있습니다."

암무 역시 좋은 소식을 전했다. 그가 약초밭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은 미앙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암무를 부른 것이다. 암무는 오르그 퉁그리들이 은밀하게 약초를 재배하는 곳들을 알고 있었다.

"필요한 약초 목록이 있습니까?"

"네. 여기요."

벨은 최초에 자신이 캡슐 상태로 하룬에게 보내졌을 때 청일 박사가 알려 준 리스트들 중에서 약초만을 뽑아 보여 주었다. 아즈만의 능력으로도 그 약초들의 개별적인 효능만 확인했을 뿐 상호작용까지는 알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준비해야만 했다.

"흠. 산삼과 하수오, 시로미, 홍해삼, 장생 전복, 금린어를 비롯한 열 가지 정도의 약재를 제외하고는 구하기 어려운 것은 거의 없군요."

"산삼과 시로미 그리고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는 모르지만 다른 약재들은 재가 알고 있는 약초밭에서 재배하는 것들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벨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대장의 상황이 알려지면 기지 분위기가 흔들릴 것 같아서 되도록 비밀리에 이 일을 처리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그러지요. 아들을 포함해서 5명 정도면 가능합니다."

"저 역시 몸이 날랜 동료 10명 정도면 약초밭에 잠입할 수 있습니다. 산 몇 개에 걸쳐서 자연 상태처럼 꾸며진 곳이니까요."

다행이다. 두 사람에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하룬의 상태를 말해 주자 당장 출발할 것처럼 나서주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바다에서 채취할 수 있는 약재들인데 그것들은 아리가 맡을 것이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무력이 뛰어난 시크릿 대원들이 5명씩 동행할 테니 안전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시크릿 대원들이 말입니까?"

두 사람은 말만 무성했지 제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돌풍 용병대의 시크릿 대원들이 자신들과 동행한다는 말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소문에 의하면 시크릿 대원들의 무력은 조장들인 로수나 철웅 등에 육박한다고 했다. 그들은 은밀하게 돌풍 기지를 지키는 한편 하룬 대장이 내린 특별한 임무들을 수행해 왔다고 했다.

"그런데 척추 산맥까지 가려면 꽤 오래 걸릴 텐데 걱정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곳까지 가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텐데."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약재를 구해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안전이야 시크릿 대원들이 합류한다니 한숨 돌렸지만 강렬한 빛이 내리쬐는 한낮에 움직이기 힘들기에 아침과 저녁에 움직이는 것을 상정하면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그리 길지 않다. 거기에 일단 산맥에 들어서면 이동 속도는 더욱 느려질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크릿 대원들이 사용하는 지하 도로와 마그네틱 카를 이용하면 척추 산맥까지는 몇 시간도 안 걸리니까요. 그런데 짐작이 간다는 곳은 어딘가요?"

이미 아리는 척추 산맥까지 뚫려 있는 지하 도로를 복원했다. 그 지하 도로들은 척추 산맥에 산재한 광산들과 연결이 되어 있었지만 지진 등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수리하거나 개보수할 능력이 없어서, 버러진 채 방치되어 지금은 유니온도 존재를 아예 알지 못했다.

대산 노인과 암무가 알려 준 장소들 중에는 지하 도로의 출구와 가까운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오가는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여행에 필요한 것들은 제가 챙길 테니 두 분은 돌아가서 같이 갈 동료들을 모으고 은밀하게 출발 준비를 해 주세요. 다만 위험할 수 있으니 죄송하지만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거예요."

일단 산맥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벨이 부러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준 대장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걱정했었는데 이렇게라도 힘이 될 수 있다니 다행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오갈 데 없는 우리를 받아 주고 제대로 살 수 있게 해 주신 대장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하찮은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결연한 표정으로 의지를 단단히 세우고는 바삐 참모실을 빠져나갔다.

"고마워요. 이렇게 위험한 일에 나서 주어서."

벨은 혹시라도 두 사람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까 봐 두려워했었다. 위험할 때는 그 상황을 벗어나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다가도 막상 안전해지면 그런 다짐을 잊어버리는 것이 휴먼들의 본성임을 아즈만의 자료를 통해 알고는 걱정을 했었던 것이다.

"오빠, 힘을 내! 오빠를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이미 아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다로 향했다. 잠수정을 활용하면 바다에서 자라는 약재를 쉽게 채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룬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서 들어와!"

뫼비우스는 여전히 망설이는 얼굴이었지만 고사빈이 그의 손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뭉클거리는 젖가슴이 그의 어깨에 짓눌리며 강렬한 유혹의 감각을 전하고 있었다.

"이……거 괜찮을까요?"

한눈에도 최고급품으로 보이는 가구들과 장식품들로 가득한 실내는 구노블 가문의 본가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중 가장 작은 것 하나만 내다 팔아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고급품들이 즐비했다.

설마 고사빈이 자신을 고가高家의 저택으로 데리고 올 줄은 몰랐기에 뫼비우스는 많이 당황했다.

고사빈은 몇 번의 파티에서 그녀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던 매력의 소유자가 당황한 모습에 생각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꼈다.

'이제는 내가 어떤 여자인지 제대로 알겠지?'

비류와 같은 젖비린내 나는 어린 얼뜨기 노블들과 자신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 줄 생각으로 데리고 온 것인데 과연 뫼비우스는 그녀의 생각대로 완전히 넋이 빠진 것 같았다.

노블들의 세계에 홀연히 나타난 뫼비우스는 요즘 너도나도 하는 비욘드 게임에서 거대한 정보 길드를 만들어 냈으며 현실에서도 정보 회사를 세워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능력 있는 남자였다.

성형 따위로는 만들 수 없는 조각과 같은 외모는 물론이고 뛰어난 화술과 유머를 가진 뫼비우스는, 비류라는 애인을 두고 있엇지만 모든 여자들이 유혹하고 싶은 남자였다.

노골적인 유혹에도 불구하고 늘 따라다니는 비류를 의식해서인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 주던 뫼비우스를 그녀가 드디어 유혹한 것이다.

고사빈은 뫼비우스가 적어도 몇 년 정도는 자신을 만족시켜 줄 남자라고 생각했기에 첫 만남부터 자신의 모든 매력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자신의 배경이 되는 본가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훗! 자기, 생각보다 겁이 많구나."

서른이 훨씬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사빈이 애교를 부리자 뫼비우스는 뇌가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겁이 나서가 아니라 이렇게 주인도 없는 저택에 야밤에 방문해도 되는가 싶어서 걱정했을 뿐입니다."

뫼비우스는 마음속에서 스멀거리며 일어나는 불안감을 억눌렀다.

"호호호. 그런 거였구나. 요즘 노인네들은 이곳에 아예 안들르니까 걱정하지 마."

고사빈은 더운 듯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어깨를 덮었던 숄을 벗었다.

.훅!'

뫼비우스의 눈이 커지며 뜨거운 콧김이 흘러나왔다.

기름을 바른 듯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는 손가락으로 만지면 빛 가루가 묻어나올 것처럼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긴 목과 도드라진 쇄골은 눈을 뜨겁게 만들었고 연한 향수와 섞인 체향은 심장박동을 몇 배나 빠르게 만들었다.

'요물妖物이군.'

자신이 짐작한 대로 고사빈은 커리어우먼의 전형적인 외모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였던 것이다.

'녹는다, 녹아!'

비류를 만나기 전에 노블 출신 여자들을 사귀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빈은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코원 유니온의 재무국을 장악해 온 고씨 집안의 무남독녀로 차기 재무국장으로 승승장구하는 엄청난 여자였다.

'이거 위험한걸.'

이런 종류의 여자는 남자의 정혈을 몽땅 빨아먹는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자신이 나락에 떨어질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상류층 여자들을 만나면서 이런저런 봉변을 당해 보았던 뫼비우스는 고사빈과의 일이 고씨 가문에 알려지면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최하가 소리 없이 죽는 거겠지.'

두 번 이혼을 했고 현재도 동거하는 남자가 있는 사빈이다. 고씨 가문의 후계자인 그녀가 남자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횡액을 당하는 것은 자신 뿐이다.

'하지만 난 뫼비우스야!'

지금은 사업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여자를 다루는 건 자신의 특기다. 누구는 그게 다른 남자들에 비해 몇 배나 강렬한 페로몬을 발산하기 때문이라고 했고, 다른 누구는 여자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수려한 외모와 화술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어쨌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자신이 있는 뫼비우스다.

"나중에라도 어른들이 알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S구역에 마련한 저의 새 집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칫! 괜찮다니까. 좋아! 그렇게 불안하다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자고. 그곳이라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을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요?"

"그래. 그런 곳이 있어. 가자!"

얼마 전 마신 술이 제대로 올랐는지 아니면 다가올 뜨거운 순간을 기대하는 건지 사빈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동안 들인 공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녀의 얼굴은 춘정春情이 가득하다.

샴푸와 향수 그리고 성숙한 여체가 뿜어내는 살 냄새가 섞인 체향은 그의 임내심을 시험했지만 뫼비우는 선수답게 꾹 참아 냈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사빈의 자신만만함에 뫼비우스도 소극적인 행동을 털어 버렸다.

집 안으로 들어간 사빈은 옷 방으로 추측되는 방으로 들어가 행거를 한쪽으로 밀더니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르릉.

놀랍게도 벽이 옆으로 움직이더니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호호! 오랜만이네."

안으로 들어간 사빈은 뫼비우스의 팔에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얹은 채 그를 끌어당겼다. 엘리베리터의 단추는 2개밖에 없었다. UP과 DOWN.

아래로 향하는 단추를 누르자 엘리베리터는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아래로 향했고 그 순간 사빈의 열기 가득한 붉은 입술이 뫼비우스에게 향했다.

뜨거운 키스.

스릉.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사빈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뜨거운 열정으로 인해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어 버린 사빈이었다. 하지만 허리를 감은 뫼비우스의 팔에 힘이 조금 들어가자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음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은 채 엘리베이터 밖으로 빠져나왔다.

순간 뫼비우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건?"

"호호! 놀랐지? 이곳은 지하 500미터에 있는 일종의 안가安家야. 우리 집안사람들이 이곳을 시크릿 하우스라고 부르고 있어. 핵폭탄이 터지거나 진도 9 이상의 지진에도 견딜수 있게 설계가 되어 있고,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몇백 년은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

부릅뜬 뫼비우스의 눈에 높이가 20여 미터에 달하고 넓이는 수천 제곱미터가 넘는 공간이 들어왔다. 인공조명은 물론이고 갖가지 식물들이 자라는 지하 정원과 수영장 그리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3층 건물이 그의 눈을 자극했다.

뫼비우스는 이곳을 보고 종말 전쟁 이후 노블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휴먼시대까지 삶을 이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게 퍼스트 노블의 힘 중 하나구나!'

노블 중의 노블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노블인 고씨 가문의 숨겨진 장소를 본 뫼비우스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님과 손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뫼비우스의 눈이 더 커졌다.

"하루 쉬다 갈 거니까 음식을 준비해 놔."

─네, 주인님.

사빈의 말에 다시 들려오는 음성은 여성의 것이었지만 묘하게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굽니까?"

"시크릿 하우스를 관장하는 인공지능 컴퓨터야. 에인션트급에는 못 미치지만 유니온 메인 컴퓨터와 같은 등급이야."

"아!"

정말 대단한 가문이다. 한 유니온에 하나밖에 없다는 슈퍼 양자 컴퓨터를 일개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니.

뫼비우스는 약간 얼이 빠진 상태로 사빈이 이끄는 대로 3층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화아!'

안으로 들어간 뫼비우스는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렸다. 이제는 밖으로 마음껏 나갈 수가 없는 데다가 코원 유니온 인근에는 매장되지 않았기에, 사진만으로만 보았던 비취색 대리석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상의 그것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들과 장식품들이 실내를 그 어느 곳보다 더 화려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땀을 너무 흘렸나 봐. 나 씻고 나올 테니까 집안 구경하고 있어."

사빈은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수개월 동안 공을 들였던 뫼비우스를 드디러 유혹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지금 너무 흥분했다는 것과 유난히 몸이 뜨거웠기에 지금까지의 자극으로 인해 땀을 많이 흘렸던 걸 말이다.

'커억!'

뫼비우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드레스를 벗고 속옷까지 하나씩 벗어 버리는 사빈의 과감한 행동에 코피를 쏟을 뻔했다. 우월한 유전자를 받았고 주기적인 수술 등 철저하게 관리를 한 덕분에 8등신에 풍만하고 볼륨이 있는 몸매를 가진 사빈이다.

"조금 이따가 봐!"

눈웃음을 치며 욕실로 향하는 사빈으로 인해 급격하게 흥분 지수가 올라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짐긍으로 돌변할 위기를 넘긴 뫼비우스는 잠시 고개를 흔들어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가 그 대단하다는 퍼스트 노블의 시크릿 하우스란 말이지.'

이런 곳이 있다는 건 공식적인 애인인 비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비류의 집안도 노블이긴 하지만 지하 깊숙한 곳에 이런 은밀한 것을 만들 정도의 부는 가지지 못했다.

뫼비우스는 안방으로 향했다. 이왕 왔으니 어떤 곳인지 살필 참이었다.

"젠장!"

안방으로 들어간 뫼비우스의 입에서 나짓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침대부터 시작해서 서랍장에 이르기까지 최고급품이 아닌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종말 시대에 제작된 고가구이면서 말이다. 도대체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관리를 했기에 이렇게 빛을 내고 있는 것일까?

자신도 꽤 돈을 벌어서 좋은 집에서 산다고 자부했건만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뭔가 손상이 있을까 봐 조심하게 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기를 죽이는 곳이다

그렇게 방 안을 구경하던 뫼비우스의 눈이 한순간 강렬하게 빛났다.

'비밀 장소다!'

자신들 이전에 이 방에 들렀을 이라면 틀림없이 주인인 고가의 가주와 그 부인 중 하나겠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는 비밀 장소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정보를 다루는 뫼비우스인 터라 주저하지 않고 벽으로 향했다. 벽 일부가 옆으로 밀려 들어간 곳에는 안방과 비슷한 크기의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눈이 돌아갈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이 말로만 들었던 보물실이구나!'

예전에 본 종말 시대의 영화에서 재벌 집에 설치되어 있는 보물실이 틀림없었다. 각종 보물들을 모아서 전시한 곳으로 은밀하게 자신의 수집품을 즐긴다고 하던가.

안으로 들어간 뫼비우스는 황금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왕관이나 팔찌 등의 보물들이 벽과 방에 3열로 세워진 진열대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참욕이 일어 보물들을 가지고 싶었지만 경거망동을 할 정도는 아니다.

행여 무슨 보안장치라도 되어 있으면 이제 곧 긴 작업을 마무리할 시점에 크나큰 실수가 될 것이다.

"아서라, 뫼비우스!"

그가 사빈에게 줄 것은 사랑. 그녀에게 받을 것은 정보와 강력한 영향력이다.

뫼비우스는 공식적인 애인인 비류에게는 미안했지만 고사빈을 기반으로 노블 출신의 요인要人들을 사귀어 유니온의 고급 정보들을 빼낼 생각이었다.

남들은 어떻게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뫼비우스는 자신의 뛰어난 외모와 여자 다루는 기술을 최대한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챙실 생각이다.

글로리 가이아의 대표 격인 고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를 제대로 녹인다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자신은 물론 아무런 바람도 없이 자신을 지원해서 제대로 세상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하룬은 대장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를 만난 뫼비우스는 그녀가 글로리 가이아의 코원 지부장 가문의 후계자임을 알아내고 하룬 대장에게 은혜 갚음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몇 달에 걸쳐 그녀를 유혹해 왔다.

뫼비우스는 혹시라도 사빈이 욕실에서 나와 자신이 보물실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을 본다면 애써 만들어 둔 자신에 대한 호감이 사라질까 두려워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돌아서는 뫼비우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뭐지?"

보물실과 어울리지 않는 서류가 보였던 것이다. 유리로 된 케이스에 담겨 있는 서류의 제목을 본 뫼비우스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억! 신세계 협약?"

뫼비우스는 제목이 흥미로워 서류를 꺼내, 두툼한 서류를 앞에서부터 훑었다.

어느 순간 뫼비우스의 숨이 멈추었다. 그러곤 서류를 든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대박이닷!"

서류의 내용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내용은 세 에인션트 컴퓨터의 도움으로 배리어를 생성하고 새롭고 안전한 주거지를 얻은 휴먼들 중 일부 과학자들과 기업가들이 비밀리에 연 회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자들이 아무 소유권도 없는데 서로 짜고, 배리어를 생성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일 때문에 과다하게 능력을 사용하여 부하가 걸린 세 에인션트 컴퓨터를 파괴한 다음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그 일을 했다고 사기를 쳤다는 거잖아.'

자세하게 본 것은 아니지만 서류의 내용은 그랬다.

맨 끝에 연명을 한 자들의 이름을 보건대 약 130명 정도의 과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기업가 들이 모의해서 에인션트 컴퓨터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바쳐 가면서 이룩한 일을 자신들이 했다고 꾸민 것이다.

'이래 놓고서, 뭐? 자신들이 선조가 배리어의 생성과 도시 형성을 했기에 유니온의 땅과 건물이 자신들의 소유이며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단 말이지.'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어떻게 그 정도 숫자에 불과한 자들이 이런 일을 꾸미고 실행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건 지금 현재 유니온들의 상황을 보면 이들의 음모는 성공했다.

이들은 퍼스트 노블이라는 이름으로 노블 중의 노블로 대를 이어 세상의 돈과 권력을 모두 소유해 왔다. 일반 주민들은 능력을 판별해서 임의대로 직업을 갖게 강요해 놓고 자신들은 능력과는 상관없이 대를 이어 세상을 지배해 온 것이다.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어린 나이부터 보더러로 살아온 뫼비우스는 이가 갈렸다.

이런 자들 때문에 새롭고 안전한 세상을 만든 세 에인션트 컴퓨터는 대부분의 능력을 잃어버렸고 일반 주민들은 그들의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서류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짜릿한 전류가 전신을 흘렀다.

뫼비우스는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가히 혁병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까지 유니온의 주민들은 번 돈의 대부분을 주거비와 생활비로 지불해 왔다. 워낙 주택 임대료도 비쌌고 식료품 가격도 높아서 유니온에서 권장하는 게임을 제외하고는 여가를 즐길 수가 없었다.

뫼비우스는 주변의 동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서류를 말아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름 담대하다고 자부했던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물건이라면 이용하기에 따라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거야.'

그런 생각을 하던 뫼비우스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행동은 자신의 목숨만 위험하게 만들 거란 확신이 든 것이다.

'이 물건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

고가는 물론 글로리 가이아 아니, 노블 중 상당수와 관련이 있는 현실에서 이 물건을 잘못 다루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가치가 엄청난 물건이다.

잠시 고심하던 뫼비우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를 떠올린 뫼비우스는 무릎을 쳤다.

'흐흐흐! 하룬 대장에게 드리면 알아서 처리하시겠지.'

지금 하룬 대장은 다크 프린스와의 싸움으로 은밀한 곳에 숨어 치료를 하고 있으니 현실의 하룬에게 전해 주면 될 것이다.

현실의 하룬 대장에게 직접 신세를 진 것은 아니지만 비욘드의 하룬 대장은 현실의 하룬이 자신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해 왔으니 그러면 될 것이다.

'내게 이런 보물을 주다니 정말 사랑스러운 여인이군. 이런 귀한 선물을 주었으니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려 줘야겠지.'

사빈이 들어간 욕실을 바라보는 뫼비우스의 전신에서 강한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껏 여자를 만날 때 만큼은 그 여인만이 자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 왔다.

'그나저나 한 번은 더 와야겠네.'

위조를 한 후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면 빠른 시간 내에 다시 이곳에 들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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