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의 정신과 내습.
"대장님은 어떻게 된 거지?"
비록 무표정해보이는 얼굴이지만 대원들을 볼 때면 엷은 온기를 띄고 있었던 딜런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대원들은 한 동굴에 숨어 있었는데 펠의 호위를 맡은 덕분에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에몬을 빼고는 전부 다 심각한 내상과 외상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동굴 밖에 날개를 접고 있는 미노와 수니도 다리 쪽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마나 포션을 복용해 가며 필사적으로 치료 마법을 펼친 에몬 덕분에 생명에 지장이 있는 대원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펠의 호위를 맡고 있던 에몬은 힘겹게 대답을 했다.
미노의 등에 타고 있는 그는 몸을 돌려 마지막 격돌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 무지막지한 다크 핸드와 격돌한 순간 대장은 오공에서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다. 그 순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펠이 대장을 향해 빨려가듯 날아가더니 어느 순간 두 사람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공간 이동이라도 한 것일까?
에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펠은 공간 이동의 후유증에다가 수니의 등에 타고 있었기에 연속된 충격에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보다는 좋아졌다지만 지금도 한번 공간 이동을 하고 나면 적어도 10분 정도는 무기력한 펠이었다.
딜런은 복잡한 눈빛으로 뭔가 깊이 생각에 빠진 에몬을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에몬, 좀 쉬었으면 다시 치료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슈벳과 고문들의 상태가 무척 안 좋았다. 전력을 기울여 마법을 발현시킨 후 수니의 등에 타고 있다가 다크 핸드의 공격에 연속적으로 충격을 받았기에 기혈이 꼬이고 서클이 불안정해졌다.
에몬은 의식을 잃고 기식이 엄엄한 상태의 대원들에게 치료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실 외상보다는 내상 쪽에 큰 문제가 있었기에 그나마 일레인보다는 에몬의 치료 마법이 효과가 있었다.
"나와 보벳이 먼저 요상할 테니 두 분이 우리를 지켜 주시오."
딜러은 일룸과 바윗에게 부탁을 했다.
"알겠소."
놈들을 뚫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일룸과 바윗은 마나를 거의 소진한 상태였기에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후들거리면서도 용케 움직여 일행이 숨은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딜런은 에몬이 연신 마나 포션을 마셔 가면서 치료 마법을 펼치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대원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요상을 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엄청난 놈들이었습니다."
기력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에다가 피까지 많이 흘린 탓에 가만히 있다가는 졸릴 것 같았던 일룸이 바윗에게 속삭였다.
"그러게 말이오. 다크 프린스가 엄청난 실력의 흑마법사라는 것은 들었지만 설마 수백 명에 달하는 흑마법사들의 힘까지 끌어모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소."
단순히 힘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나를 자신의 마나처럼 사용할 줄은 정말 몰랐다. 마법사들과 포머칸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마법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는 바람에 그도 얻어들은 것이 많지만 그런 식으로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흑마법이지요."
바윗은 일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마법과는 다르게 기이하고 두려운 내용들이 많기에 다들 흑마법사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동굴 안쪽을 향했다.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창백한 안색으로 포션을 들이켜고는 잠시 후 또 치료 마법을 펼치는 에몬을 만류하고 싶었지만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아 그럴 수도 없어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가즈 로드와 함께 탈출을 했지만 에몬과 통신이 되어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따로 길을 잡았다.
일행이 자리를 잡은 곳은 야트막한 절벽 근처였는데 미노와 수니는 물론이고 등에 탄 대원들의 상태는 최악이었따. 창백한 얼굴로 변한 에몬이 이리저리 뛰고 있었지만 미노와 수니를 비롯해서 모두가 의식을 잃고 있었다.
에몬에게 들어보니 마지막 격돌이 있기 전 대장이 피하라고 했단다. 발과 발톱이 피투성이로 변한 미노와 수니도 전사들이나 마법사들처럼 본능적으로 마나를 사용하기에, 거대한 다크 핸드와의 격돌로 인해 마나 역류를 일으켜 위험한 상태였지만 안간힘을 써서 겨우 이곳까지 날아왔다고 했다.
"대장은 괜찮겠지요?"
일룸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우리 대장인걸요."
일룸보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을 한 바윗도 약간은 불안했지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룬은 대원들에게있어 단순한 고용자가 아니었다. 비록 나이도 어리고 출신도 다르지만 그는 발몬이 안배한 산악 부족의 영웅이다. 현자 바툰의 말이 아니더라도 훨씬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
자신이 비록 검사로서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하룬 대장은 오늘 엄청난 경지를 보여 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사로서 가장 강한 딜런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멀쩡해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나타날 겁니다."
"그렇겠죠? 그럴 겁니다."
비록 일레인 황녀의 일로 인해 합류하게 되었지만 돌풍 용병대원으로 생활하는 것은 딱딱하고 정형적인 기사당 생활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일룸은 그간의 삶보다 용병이 된 후의 시간 동안 배우고 느낀 것들이 더 많았다.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동료 관계와 서로 존중해 주는 한편 더 높은 경지를 위해 함께 노력해 가는 마음 자세 그리고 서로의 등을 맞댈 수 있는 믿음이 있기에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전형적인 돌풍의 대원이 되어 버렸다.
그건 마샤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딜런을 통해 자신보다 더 빨리 용병대에 적응한 마샤인은 원래 돌풍에 들어온 목적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용병에 동화되었다.
눈만 뜨면 이루어지는 명상과 토론 그리고 실전과 같은 치열한 수련과 대련은 마샤인과 일룸에게 언제부처인가 정치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며 등한시했던 기사의 길을 상기시켰다.
하룬 대장이 건네준 순정석을 복용하고 가문의 비기를 다시 수련한 두 사람은 이전보다 훨씬 더 순후한 마나를 쌓을 수 있었고, 다른 대원들과의 토론과 명상 그리고 대련을 통해 빠르게 막고 있었던 벽을 뚫을 수 있었다.
'돌풍 용병대의 저력을 세상은 아직도 잘 모르고 있어.'
바깥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순식간에 한두 단계를 넘어섰지만 돌풍 전사단의 기준으로는 똑같은 경지에 불과했다.
'내가 아는 기사들이 돌풍 용병대가 이런 곳인지 알면 다들 들어오려고 난리를 치겠지?'
일룸은 정감 어린 눈길로 의식을 잃고 있는 대원들을 1명씩 쳐다보았다. 이들과 동료가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일룸은 돌풍 대원들에게 강한 동료애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까지 그가 평생을 몸담아 온 기사단들은 철저한 경쟁사회였다. 누구도 자신의 비기를 남에게 공개하는 법이 없을 뿐더러 작전이 없는 경우에는 그 모든 생활이 철저하게 개인 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돌풍 용병대는 다르다. 에버그린이라는 은거지에 들면 이전에 들어왔던 일족의 선배와 함께 수련을 하는 풍토가 몸에 배인 고문들은 물로이고, 대장과 딜런의 경우도 본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다. 서로 도우면서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이 돌풍 용병대의 모토였다.
그런 모토가 몸에 배인 대원들은 서로에게 형식적인 것이 아닌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보다는 팀을 아니, 용병대를 우선하는 마음 자세는 모두의 실력을 두 배 세 배로 끌어올리는 근본적인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3팀이 빨리 와야 할 텐데……."
바윗은 이곳을 향해 출발한 3팀이 빨리 도착하기를 빌고 있었다. 3팀에는 유일한 치료사 이레안이 있기 때문이다. 미노와 수니의 경우는 에몬의 치료 마법에도 큰 차도가 없었고 그 큰 동체 때문에 동굴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절벽 아래에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빌 산맥에서 다크 프린스와 하룬의 돌풍 용병대가 격돌한 사건은 세상에 빠르게 퍼졌다. 다크니스 측이 이례적으로 전투 영상을 일부 공개했던 것이다. 하룬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영상은 영상 구슬을 통해 비욘드 주민들에게까지 알려졌다. 그 소식으로 인해 비욘드는 들썩거리고 있었다.
"뭐야? 그럼 이제 돌풍 용병대는 끝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하룬 대장만 죽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하룬 대장이 그런 실력자였다니 정말 대단해."
"그러게. 비욘드에서는 꽤 유명세를 떨치고 있엇지만 용병이라고 해서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말이야."
"아무튼 고스트를 잡던 스페셜 포스의 활동도 많이 지장을 받겠네."
스페셜 포스의 주축이 돌풍 용병대라는 사실은 그들이 구해 준 상단 관꼐자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워낙 스페셜 포스의 활약이 대단했던 것이다. 스페셜 포스가 활약을 한 덕분에 상단들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였던 것이다.
"그렇겠지. 고스트의 활동이 슬슬 위축되던 시점이었는데 너무 아쉬워."
생산직 계열의 유저들도 고스트로 인해 상계가 위축되어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기에, 하룬의 사망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비욘드 주민들은 물론이고 이방인들도 모이면 하룬의 최후와 돌풍 용병대가 보일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상당 연합에서 난리가 났다. 전례가 없는 엄청난 자금을 들여 의뢰를 했기에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장은 죽지 않았습니다. 부상 정도가 심각해 요처에 은신한 채 치료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를 믿으십시오. 우리 돌풍은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반드시 의뢰를 처리합니다."
부대장인 티노의 단호한 말은 상단 연합의 우려를 어느 정도 불식시켰다.
이제까지도 훌륭하게 의뢰를 수행해 왔던 돌풍 용병대의 말이다. 더구나 스페셜 포스를 통해 돌풍 용병대가 엄청난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꼈기에 일말의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믿기로 했다.
"다만 대장님의 부상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대장님이 사망했다고 생각하는 적들은 지금과 달리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스페셜 포스에 의해 고스트가 막대한 피해를 입자 그들의 활동이 소극적으로 변했기에 이쪽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룬 대장의 죽음이 사실이라 믿는 적들은 공세로 나올 것이고 돌풍 용병대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전과를 올릴 생각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페셜 포스의 활동이 위축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 반대였다.
수뇌부 회의를 통해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해서 지속적으로 고스트를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일을 위해 기존 대원들에 더해 세 산악 부족들 중 전사장들의 절반이 합류했다.
펠이 사라졌기 때문에 미노와 수니는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친구가 죽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 미노와 수니였지만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미노와 수니는 이전가지는 단순히 이동 수단에 불과했다면 하룬의 실종 이후에는 직접 공격에 합류했다. 강력한 타격을 받았던 다크 프린스와의 격돌이 녀석들에게 인간들과 싸우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미노와 수니의 날개 공격은 6서클 정도의 마법은 깨뜨릴 수 있었고 발톱은 오러 블레이드를 상대할 수 있었기에 엄청난 전력이 되었다.
베런이 이끄는 팀이 호위하고 있는 상단 연합의 상행은 수조로웠다. 이제 사흘 정도만 더 가면 목적지인 오보른 성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남은 길은 평지였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을까? 막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적들이 공격을 해 왔다.
"아악!"
"적이다!"
숲에서 날아온 수십 발의 다크 애로우는 말을 비롯해서 상단 일꾼들 10여 명에게 격중되었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베런을 비롯한 용병들이 상인들의 앞으로 뛰쳐나갔을 때는 이미 상대방이 숲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는 터라 황금빛 갑주를 입은 적의 수장이 방만한 걸음으로 베런을 향해 걸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실력자였기에 배런은 내심 긴장했다.
빠르게 상대방의 숫자를 헤아린 베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2개 조 아니, 3개 조인가?'
앞이 캄캄했다. 3개 조라면 소드 마스터만 6명이다. 마법 전력을 무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에 반해 자신들의 경우는 3명이 전부다. 상급 익스퍼트 경지에 달하는 전사장들이 적들에 비해 많지만 처음과는 달리 적들도 실전 경험이 쌓이면서 빠르게 실력이 높아진 터라 적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일단 연락부터 해야겠구나.'
베런은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모본에게 눈짓을 했다. 지원군이 얼마나 빠르게 오느냐에 자신들의 사활이 달린 것이다. 적들이 간이 워프 마법진을 설치할 시간을 준다면 모르지만 그건 당연히 불가능한 상황이니 만약 미노와 수니를 이용하는 1팀과 2팀이 다른 적들을 상대하고 있거나 먼 거리에 있다면 자신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적들도 대장의 실종과 함께 신출귀몰했던 이동 수단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이리라.
"상인들과 물건만 내려놓고 간다면 막지 않겠다."
고스트의 수장이 한 말에 상인들을 제외한 일꾼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무차별적인 살상은 하지 않을 모양이다. 믿기는 힘들지만 여유를 부리는 것이나 투기의 정도가 약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었다.
"잠시 시간을 주시오."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주지."
상대는 순순히 시간을 주고는 숲 경계로 물러났다. 실로 자신만만한 태도였지만 그만큼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방중이었다.
뒤로 물러난 베런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돌풍의 의사소통 방식은 자유롭게 열려 있고, 다른 두 고문과 동행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수장의 의견이 절대적이다.
'적들의 말을 들으면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자리에서 꼬리를 보인다면 앞으로 스페셜 포스는 물론이고 돌풍 용병대는 이놈들을 제대로 막을 수 없다.'
어쩌면 적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새로운 작전을 시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들의 전력이 자신들에 비해 우세하긴 하지만 제대로 붙는다면 상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대원들 대다수가 산악 부족 출신이라 마수의 힘까지 사용하기 때문에 놈들도 은근히 부담스러워했다.
'전력을 깎아 먹지 않고 우리의 사기를 꺾자는 의도겠지. 한번 물러나면 다음에도 물러나게 될 테니까.'
마수들을 상대할 때도 그랬다. 마수를 상대로 한번 도망쳐 본 전사는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에 닥치면 도망을 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전사들의 사기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 결국 마수를 상대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면 그것을 대대적으로 선전 할지도 모르지.'
돌풍 용병대와 산악 부족들은 절대로 믿지 않고 있지만, 하룬 대장이 죽었다고 광고를 하는 놈들이다. 하지만 놈들의 광고는 의외로 그 여파가 강해서 돌풍 용병대와 스페셜 포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승승장구하던 처음과는 달리 불안감이 짙게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산악 부족이 제대로 세상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앞으로도 몇십 년은 더 걸릴 터, 그동안 마수 사냥과 더불어 용병으로 살아야 한다.'
용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뢰다. 돌풍 용병대는 그 신뢰를 착실하게 쌓아 왔다. 그런 신뢰를 발판으로 세 부족이 10년은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엄청난 선금이 지급된 의뢰까지 받았다.
'그걸 우리가 깰 수는 없지!'
마음을 정한 베런은 아직 창창한 젊은 용병들을 측은한 눈으로 잠시 훑어보고는 행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걸렸으나 그와 상인들의 목숨으로 더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기에 떨고는 있었지만 마음을 정한 듯 편하게 보였다.
"여기는 우리가 막겠소. 상인들은 마차를 몰아 서둘러 보로도 시로 가시오!"
보로도 시는 상행의 경유지는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적들이 서두르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아예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다.
"하지만……."
상행을 이끄는 하이트 상단의 행수는 핏기 없는 얼굴로 멈칫거렸다. 그 역시 적들의 전력을 파악했을 테니 걸음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상인과 용병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벌써 몇번이나 같이 사선을 넘은 사이였다.
"우리는 용병이오. 신뢰를 저버린 용병은 도적이나 다름없소."
베런의 말에 행수와 상인들의 얼굴은 이상하게 변했다.
그들은 살 수 있는 방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거는 베런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이상한 눈을 했다. 하지만 베런의 말을 들은 용병들은 말없이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수장의 의견에 따를 준비를 했다.
"괘, 괜찮겠습니까?"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행수였기에 살 기회가 생기자 당장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생각하지 못한 용병들의 결정에 당황한 표정은 더욱 짙어졌다.
"어서 가시오. 대신 이곳 상황은 빨리 본부로 알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베런 경. 비상 신호는 임 송출했지만 바로 구조 요청을 하겠습니다."
행수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과 물건을 포기하지 않는 베런 아니, 돌풍 용병대의 결단에 감복했다. 다른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돌풍 용병대는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용병이 아니었다.
베런과 용병들은 빠르게 진형을 갖추었다.
"공격!"
행수와 상인들이 신뢰를 위해 목숨을 건 용병들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으로 착잡한 마음이 되어 마차를 돌리는 사이 이제까지 그들을 호위해 왔던 200여 명의 용병들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슈우욱! 쐐액!
그들에 앞서 돌풍 마탑의 특기긴 공명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매직 미사일이 적들을 요격하고 있었다.
"감히 이것들이!"
당연히 자신의 제안에 따를 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던 고스트의 수장은 느닷없이 가해진 공격에 명령 대신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전명.
200여 명의 돌풍 용병대원은 1명의 생존자도 없이 의뢰를 지키기 위해 죽고 말았다. 분명히 살길이 있었지만 신뢰라는 두 글자를 지키기 위해 두 배 정도의 차이가 나는 적들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노의 비행으로도 3시간 거리에 있는 다른 공격 때문에 출동했었던 1팀이 도착했을 때는 처참한 사체들만 널려 있었다. 고스트는 이방인들이라는 특성상 얼마나 죽었는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로도 시에 도착했던 상단 관계자들의 청원을 받고 출동했던 시 경비 기사단과 우연히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버츄얼 방송사의 기자들이 뒤늦게 도착해 이 참상의 전말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돌풍 용병대의 분위기는 숨이 막힐 듯 가라앉았다.
용병대 출범 이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고문들이 3명이나 전사했고 전사장들도 10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족 전사들을 이끌어 나갈 소전사장 출신 대원들이 가장 안타까웠다.
하지만 베런의 결단으로 인해 돌풍 용병대는 더 큰 것을 얻었다. 베런이 마지막에 남겼던 말이 알려지면서 돌풍 용병대는 물론이고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용병들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올라가 버린 것이다.
"돌풍은 믿을 수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상황을 파악하던 상인 연합에서도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다. 돌풍 용병대는 전멸을 할망정 한번 받은 의뢰는 저버리지 않을 거라는 굳은 믿음이 그들을 안심하게 만든 것이다.
대원들의 경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의뢰를 수행하는 정신과 자세가 달라졌다. 설령 죽더라도 의뢰를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깊이 각인시킨 대원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키우기 위해 매 순간 전력을 기울여 수련했고,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적들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돌풍 용병대의 의지는 하룬 대장의 실종 사건 이후 강화되었던 고스트의 활동이 위축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스페셜 포스는 물론이고 일반 대원들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상대한 덕분에 그들의 전력은 빠르게 깎여 나갔던 것이다.
삐요! 삐요! 삐요!
갑자기 돌풍 기지 전체에 비상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막 업무에 돌입할 시간이엇기에 한창 자신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 놀라 각층 중앙에 마련된 광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비욘드 게임을 통해 기지 운영비를 벌어들이고 있는 상인조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모두 로그아웃을 하고 현실로 나왔다.
웅성웅성.
층마다 있는 중앙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비상 신호가 울렸는지 놀라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지 방송을 기다렸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기에 많이 놀라지는 않았지만 신규 이주민들의 경우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 비상 상황실에서 송출한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났다.
─돌풍 기지 방위청장인 로수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천여 명의 괴한들이 중무장을 갖춘 채 본 기지의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따라서 금일 9시 40분을 기해 기지의 지휘권을 참모실에서 접수하겠습니다. 이들은 닷새 전 기지 안으로 침투하려고 했었전 자들과 같은 무리로 추정됩니다. 우리 돌풍 기지 방위청은 목숨을 걸고 우리 기지를 공격한 자들을 격퇴할 것입니다. 주민 여러분들은 방위청의 지시에 따라 행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1급 예비군으로 분류된 분들은 즉시 지하 2층의 방위청 본부에서 무기를 수령하신 후 미리 지정된 곳으로 이동해서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각 부서장들께서는 비상 상황 메뉴얼에 맞추어 피해가 없도록 조치하기 바랍니다.
로수의 영상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사훈련을 3주일 이상 받은 성인 남녀 중 젊고 신체적 조건이 우수해서 1급 예비군으로 편성된 2,200명은 즉시 계단으로 향했다.
그들은 닷새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화로 혹시 기지 내부로 잠입한 적이나 동조자 들의 준동을 막고 주민들을 보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돌풍기지를 이끌어 가는 이들이 연속해서 방송에 나왔다.
─돌풍 기지 의료청장 혜련입니다. 비상 상황인 만큼 의료청의 인력이 부족합니다. 지원할 분들은 지금 즉시 지하 4층의 의료청 앞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돌풍 기지 과학청장 쏘우입니다. 무기 제작 라인에 숙련된 100명의 기술자가 부족합니다. 대장간에서 일했거나 기계를 다뤄 본 분들은 지금 즉시 지하 5층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돌풍 기지 사회교육청장입니다. 아이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실 분들은 지하 23층으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비상 상황인 만큼 인력이 추가로 더 필요했기에 각 부서는 지원을 받는다는 방송을 했고 그 안내 방송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계속해서 비상 신호음이 울리는 가운데 돌풍 기지의 주민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은 출신에 관계없이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기지인 만큼 주민들은 기지를 깊이 사랑했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두려움을 떨쳐 버렸다.
아우터 출신인 이람과 도석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괜찮겠지?"
"그럼! 우리 기지 방위군이 보유한 무기나 방위군의 무력은 유니온 따위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지난번에도 끄덕하지 않았잖아."
"혹시 지하로 침투하지는 않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 기지 자체를 강력한 전류를 이중으로 흘려 보호하고 있다고."
"그런데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코원 유니온은 아닌 것 같은데."
"방위청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어디에서 온 놈들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대. 그래서 방위청에서도 제대로 공지하지 못하는 거고. 다만 확실한 것은 놈들이 우리 기지를 노린다는 거지. 그것도 지속적으로 간세를 침투시키면서 말이야."
"빌어먹을 놈들! 어떻게든 정체를 밝혀서 완전히 박살을 내야 할 텐데."
"그나저나 자네는 어디로 갈 텐가?"
"난 3급 예비군이고 특별한 특기가 없으니 의료청에나 가보려고."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 나도 같은 입장이지만 아이들에게 가 보려고. 학교에 다니는 큰아이 말이 지난번에 어린 아이들이 많이 놀라서 교사들이 통제하는 데 많이 힘들었다고 하더군."
"어서 움직이자고. 잘못하다가는 늦어서 제대로 돕지도 못하겠어."
"그래. 이따가 상황이 종료되면 보자고. 조심해!"
이람과 도석은 층간에 설치되어 있는 5개의 계단 중 가장 오른쪽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쪽이 그나마 한산해 보였던 것이다.
이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주민들의 분위기나 그 대응 자세는 침착했으며 기민했다.
기지 입구에서 50미터, 250미터, 500미터 간격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숲의 지하에는 대형 입자포의 격납고들이 있었다. 1선에 배치된 입자포는 총 120문으로 입자포 1문을 관리하는 각 소포대는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포대의 소대장들은 헬멧 내부의 이어폰을 통해 포병 연대장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다.
─4시부터 9시 방향의 1대대 입자포는 포격을 준비하라!
포병 연대장 매그럼의 힘 있는 명령이 떨어지자 포병 대대 본부의 무전을 받은 1선의 입자포대 소대장들은 황토색으로 위장한 철판의 한곳에 부착되어 있는 컨트롤함의 비밀번호를 눌러 해제하고 노출된 숫자 기판의 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기이잉 기이잉.
거대한 철판이 반으로 갈려 양옆으로 움직이고 입자포를 얹은 포대가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쏘우가 과학청을 맡은 이래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이 바로 개량 입자포의 제작이었다.
청일 박사의 일지를 바탕으로 입자가속기에 대한 최촘단 기술을 입수하게 된 쏘우는 입자포를 개량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이 세 타입의 입자포였다.
사거리 2킬로미터에 분당 2회 포격이 가능하며 최대 20발까지 발사할 수 있는 대형 입자포와 사거리 1킬로미터에 분당 3회 포격이 가능하며 최대 5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중형 입자포. 그리고 사거리 300미터에 분당 10회의 포격이 가능하며 최대 2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소형 입자포들이 1선과 2선 그리고 마지막 3선의 방위지역에 배치된 것이다.
곧 각 소포대에서 경쟁적으로 통신이 본부로 향했다.
─1선 403, 위치 잡았습니다!
─1선 610, 위치 잡았습니다!
'4'는 4시와 5시 방향인 동남쫏의 30도에 해당하는 구역을 말하고 '03'은 그 30도의 방위각을 열로 나눈 것 중 세 번째 구역 즉 9도에서 12도 사이를 표시했다.
즉 대형 입자포는 기지 1선에 120문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중 50대가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것이다.
─위치 확보한 1대대는 입자가속을 실시해라. 또한 4시부터 9시 방향의 2대대 입자포도 포격을 준비하라!
매그럼의 명령에 따라 1대대와 마찬가지로 600명으로 구성된 2대대 역시 신속하게 입자포를 지상 위로 올려 1대대의 입자포 사이로 포격 위치를 잡았다.
그사이 포격 준비를 마친 1대대의 해당 소포대는 입자포의 입자가속 스위치를 눌렀다.
─우치 확보한 2대대는 입자가속을 실시하라!
드디어 완벽한 포화망이 완성되었다.
'어서 와라!'
매그럼은 주먹을 분끈 쥐며 본부 한쪽 벽을 차지한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위성에서 보내 주는 기지 주변의 분할 영상들이 떠올라 있었다.
─적의 최종 규모는 확인되었나요?
이어폰을 통해 작전 참모인 벨릐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매그럼은 평소에는 여동생처럼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업무적일 때는 누구보다도 두려운 벨을 생각하며 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새로 출범한 돌풍 시티에서 시정 위원회 참모에 임명된 벨은 이렇게 전시 상황이 되면 군부까지 통제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네. 400면 규모의 포병 대대를 포함해서 2,400명으로 구성된 연대급 병력입니다. 무인 정찰기 6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무인 정찰기? 아! 떴군요. 확인했어요.
통신이 잠시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먼저 포대에 배리어부터 가동하세요! 곧 기지 상공에서 EMP탕을 폭발시킬 거예요.
"알겠습니다."
매그럼은 곧바로 소 포대에 배리어를 가동시키도록 지시했다. 에너지 배리어는 물리적인 공격을 물론 수십 GHz 대역의 초고주파로부터 전자기기들을 보호할 수 있다.
파라다이스를 건설하며 축적된 배리어 기술로 인해 돌풍 기지는 반경 5∼10미터 범위 공간에 에너지 배리어를 생성할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가동 시간은 아직 30분을 넘을 수는 없었다.
배리어가 빠짐없이 가동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EMP탄이 터졌다.
츠즈즈즈.
지휘실을 포함한 본부 전체에 쳐진 에너지 배리어에도 불구하고 홀로그램 화면들과 장비들이 잠시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EMP탄의 위력은 엄청났다.
'역시 우리 기지의 기술력은 엄청나군.'
매그럼이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 벨의 말이 들려왔다.
─이제 적들의 무인 정찰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확인한 적 포병 대대의 규모는 어때요?
"이동이 용이한 소형 입자포 100문과 60밀리 곡사포 20문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흠. 그 정도의 화력이라면 우리 밥이군요. 중형 입자포의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대로 1선과 2선의 화력을 동시에 운용하세요.
"알겠습니다."
매그럼은 즉시 벨의 말대로 명령을 내렸다.
1선과 2선에 배치된 총 100대의 입자포를 운용한다면 적들을 막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대형 입자포탄의 살상반경이 지름 1미터이고 중형 입자포탄의 경우에는 지름 60센티미터인 것을 고려하면 포격 각도를 수정해 가면서 총 10번을 포격하면 적들이 침투하는 모든 영역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1선과 2선에 배치된 포병대는 적들이 중형 입자포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적들은 이런 경우를 미리 예상했는지 5열 횡대를 이루고 있었다. 횡대 간 거리는 약 20미터로 포격에 대비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들은 돌풍 기지의 포병대대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다.
매그럼은 빨리 적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랐지만 전자기를 교란시키는 EMP탄으로 인해 적들은 잠시 혼란에 빠져 진군을 멈추고 있었다.
잠시 후 적들은 결국 무용지물이 된 입자포들을 포기하고 조심스럽게 다시 기지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정찰 호크가 300미터 상공에서 잡은 영상으로 판단하건대 적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사주경계를 하면서도 저 정도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네.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저들이 입은 슈트의 기능인지는 몰라도 잘 훈련된 자들이야.'
영상을 보는 매그럼도 적들에게 살짝 감탄했을 정도였다. 검은 슈트를 입고 개량 입자건과 광선검을 소지한 적들은 자세를 낮춘 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609 방향, 선두 열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804 방향도 들어왔습니다."
관측병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홀로그램 화면이 아니라 관측병들의 앞에 놓인 기기 안에는 붉은 선을 넘은 적들이 점으로 표시되어 안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대기 상태를 유지하라!"
벨은 일건 소대장들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만약 적들이 포병대를 대동했다면 이때 포격을 명령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들에게 입자포가 없는 만큼 최대한 안쪽으로 끌어들여 일시에 화력을 집중해서 박살을 내야만했다.
그렇게 적들이 모두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고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적들도 불안했는지 대열을 유지한 채 최대한의 속도로 진군했던 것이다.
"501방향, 마지막 열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710방향도 들어왔습니다!"
"806방향도 들어왔습니다!"
마침내 모든 적들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포격 개시!"
매그럼의 명령이 떨어지자 1선과 2선의 입자포들이 일제히 입자포탄을 발사했다.
고오오! 고오오!
직사로 발사된 입자포탄들은 지나는 궤적 안에 있는 모든 물체를 분쇄시켰다. 바위, 돌, 풀은 물론이고 적들과 심지어 먼지가 가득한 대기까지 날려 버렸다.
"적들이 후퇴합니다."
관측병들이 흠분해서 보고해 왔다.
홀로그램 화면에 당황한 적들이 땅바닥에 엎어지거나 일부는 뒤로 도망치는 영상이 떠올랐다.
"전 포대는 좌측으로 발사각 0.5도 수정하라!"
매그럼의 명령에 따라 포격을 마친 포대들은 입자포의 포신을 움직였다. 그리고 발사각 수정을 마친 후 바로 본부로 보고했다.
총 360개의 점들 중 100개가 활성화된 화면을 보고 있던 본부 관측병 중 하나가 소리쳤다.
"연대장님, 발사각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오케이! 포격 개시!"
그렇게 0.5도씩 움직이며 좌우로 총 9번의 포격이 끝났다. 위성이 보내온 영상은 포격으로 인해 피어오른 먼지 때문에 상황을 알 수 없었지만 생명체 탐지기기는 기지 주변 1.5킬로미터 내에서는 더 이상 적들의 움직임이 없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후우!"
그제야 굳었던 매그럼의 얼굴이 펴졌다. 심호흡을 한 매그럼은 급하게 참모실로 통신을 보냈다.
"포병 연대장 매그럼입니다. 포격은 성공했습니다. 혀재 기지 1.5킬로미터 내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매그럼 연대장님, 수고했어요! 뒤처리를 위해 특수대대가 출동할 테니 엄호를 부탁해요.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직 상황이 완전하게 끝난 것은 아니다. 운 좋게 도망친 적들도 있을 테고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숨은 적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독 안에 든 쥐일 뿐이지!"
현실과 비욘드를 오가며 체계적으로 수련을 한 특수대는 전원이 검기를 사용하는 능력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쏘우의 과학청이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특수 슈트를 입고 있었다. 적 개개인의 무력은 알 수 없지만 우리 돌풍 기지의 특수대원들을 당할 수는 없지!'
위성과 정찰 호크 그리고 최첨단 기기로 적들의 동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데 당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제 할 일을 마친 포병 연대에는 기분 좋은 느긋함이 퍼졌다.
"모두 차 한잔 합시다!"
연대장 매그럼의 말에 본부 인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