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6화.하룬의 위기 (257/278)

하룬의 위기

싸악!

그그극!

페오가 휘두른 검은 좀비의 손톱을 피해 놈의 옆구리에 박혔지만 뼈가 얼마나 단단한지 긁히는 소리만 날 뿐 끄덕도 하지 않는다. 페오는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검을 회수했다. 잘못하다가는 놈이 검면이라도 잡는다면 무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지겨운 놈들!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빨리 시작하라고!"

그와 등을 대고 있는 알먼은 마나가 거의 바닥이 났지만 이를 악물고 온몸의 마나를 다 끌어 올려 검첨에 오러 광을 피워 냈다. 알먼은 허리에서 뼈마디가 돌아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상체를 급격하게 틀어 덮쳐 오는 슬로크의 이빨을 피한 후 놈의 옆구리를 검으로 찔렀다.

푸욱!

"흐머! 무서운 거! 이놈의 늑대 변종은 왜 이렇게 숨통이 질긴 거야?"

영악한 슬로크는 더 깊이 찔리기 전에 앞 발통으로 검을 치며 물러났다. 10년이 넘도록 복무하며 제국의 기본 검술을 바탕으로 뼈를 깎는 수련과 실전을 통해 오러를 끌어낸 알먼이지만 이 데빌 산맥의 마수는 오러 소드를 사용하는 기사들이 아니면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서웠다.

물러난 슬로크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러나왔지만 놈은 이전보다 더 흉흉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젠 정말 지쳤다. 노련하고 실력이 뛰어난 병사들이엇기에 이 정도까지 견딜 수 있었다.

습격을 당한 초기에는 상대가 흑기사들이어서 꽤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상대가 마수와 강화 언데드로 바뀌자 합공을 통해 잘 견뎌 왔다.

"카악! 퉤! 하아! 하아!"

끈적거리는 침을 뱉은 알먼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수는 물로이고 강화 언데드들마저 몸놀림이 빨라 잠시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돌리면 바로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습격을 당한 지 20분 정도가 지나자 체력은 물론 정신력도 바닥이다.

이왕 죽을 거 한놈이라도 더 데려가려고 악을 쓴 것도 잠시, 절망 속에 빠져들려고 할 때 메시지 마법으로 전해져 온 소식에 의하면 돌풍 용병대의 하룬 대장이 출동했다고 한다. 신호가 오면 바로 북쪽으로 탈출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아! 빨리! 제발!"

간절한 그의 소리를 들은 것일까?

쿠르릉! 쿠르릉!

몸을 무겁게 만들었던 음침한 대기가 갑자기 요동을 쳤다. 놀라 하늘을 보니 먹구름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던 막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출렁거렸다. 그래서일까 마수들과 언데드들의 공격이 느려졌다.

'지금인가? 아니, 아니야! 마수들이 공격 방향을 바꾸어 성 밖으로 나갈 때라고 했어.'

테오와 알먼은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북쪽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랜 군복무를 통해 상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이 익숙했기에 참을 성 있게 기다렸다.

갑자기 성안에서 벌어졌던 전투가 멈추었다.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양측 모두 몸을 멈춘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가린 먹구름과 같은 막으로 향했다.

쩌저저정!

빙하가 갈라지는 걸까? 검은 구음이 얼음처럼 부서지더니 한순간 갑자기 막이 사라지며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흑마법진이 깨졌다!"

누군가의 소리와 함께 몸을 짓누르던 묵직한 무게감이 사라졌다. 정말 흑마법진이 깨진 것일까? 가즈 로드 측 인물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저건 뭐지?"

흑마법진이 깨졌다고 환호를 하던 사람들은 하늘에 떠 있는 정체불명의 물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늘 높은 곳에는 새처럼 생겼지만 전설의 드래곤만큼 거대한 두 생물체와 더불어 이상한 물체들이 수십 개가 있었다.

정체불명의 생물체는 날개를 펴고 있었지만 아래에서는 그 실체를 정확하게 볼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와이번보바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다.

"마, 마법?"

다른 물체들을 보는 마법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으으. 저건 도대체 뭐지?"

파블로는 생김새는 매직 미사일을 닮았지만 그 크기나 길이는 족히 서너 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물체들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때 몸 전체로 전해지는 진동과 강한 파동이 느껴졌다.

지지지징!

푸르렀던 하늘과 깨끗한 시야가 다시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이런! 흑마법진이 깨진 게 아니야!"

파블로가 비명처럼 소리치는 순간 하늘에 떠 있던 거대한 매직 미사일들이 땅을 향해서 엄청난 빠르기로 폭사되었다.

"어어어! 후유!"

거대한 매직 미사일의 속도가 너무 빨라 어느 곳으로 떨러지는지 알 수 없기에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던 가즈 로드의 마법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진의 코어를 보호하라!"

"빨리 실드를 쳐!"

"더블 다크 실드!"

"레인지 실드!"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흑마법사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순간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앙! 꽈아앙!

"카아악!"

"끄아악!"

'어떻게 됐지?'

5미터에 달하는 높은 성벽으로 인해 성 밖의 동정을 알 수 없기에 갑갑했던 파블로는 무심코 플라이 마법을 펼치려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크아앙! 쿠르르!

'마수들이 왜?'

미리 듣긴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공격하던 마수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성 밖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또한 검게 변했던 저주의 땅이 제 색깔을 찾음과 동시에 음험한 기운이 한결 약해졌다.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것이 성안 쪽만 내린다는 것이었다. 기이한 일이 연속되어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갑자기 이슬비를 맞은 언데드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지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는 좀비들의 썩어 가던 살점들은 흐물흐물 녹아내렸고 스켈레톤들의 검은 뼈다귀들은 하얗게 변해 뚝뚝 부러지고 있었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언데드들의 처참한 몰골에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다.

"뭐야? 흑마법은 깨졌지만 마법진은 그대로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누군가 그런 소리를 할 때 신관들이 모인 곳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홀리……홀리 레인이 내렸다!"

홀리 레인이라니!

이름대로라면 신성력이 담긴 비가 아닌가. 사람들은 이제야 미쳐 날뛰던 언데드들이 왜 갑자기 저 꼴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지만 도대체 누가, 왜,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련의 일들을 만들어 냈는지 궁금해졌다.

미리 돌풍 용병대가 모종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용병에 불과한 그들이 이런 엄청난 일을 야기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을 때였다.

"지금이닷! 북쪽으로 탈출하라!"

넋을 잃고 있었던 가즈 로드 측 사람들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시페라엘 후작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약속한 시간이 된 것이다.

"앞을 막는 건 모조리 박살 내라!"

"315천인대가 선봉이다!"

"길을 뚫어라!"

지휘관들의 명령에 병사들은 지체하지 않고 북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더 이상 강화 언데드들의 공격은 없었다.

'어떻게 한 거지?'

파블로는 호기심 많은 마법사답게 그 순간에도 마수들의 이빨고 발톱에 부서지고 있는 언데드들의 머리통을 보면서 의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이런 능력을 가진 인물은 없었다. 흑마법사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순간적으로 마수들의 공격 목표를 바꿀 정도로 정신을 제압할 수는 없다.

"소문은 돌풍 용병대의 능력을 십분의 일도 말하지 못했군요."

누군가 곁에 다가와 한 말로 인해 정신을 차린 파블로는 그 인물이 총사라는 것을 알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총사님!"

"흑마법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은 우리를 위협할 수 없을 거예요. 강력한 충격으로 잠시 흑마법진이 기능을 멈춘 사이에 알 수 없는 기이한 마법으로 코어를 정확하게 타격했어요."

총사의 말을 들은 파블로는 이제야 마법 발현을 억누르고 있던 음침한 마나장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상당 부분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도 가지요!"

"네! 그런데 저…… 저……."

북쪽으로 시선을 준 사람들의 눈이 다시 커졌다.

어떻게 된 것일까? 언제 저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북쪽에 있는 성벽 한쪽이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2미터에 이르는 푸른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로 길을 열고 있는 용병 검사가 눈에 들어왔다.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

아그레시아를 호종하기 위해 달려온 후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분명히 소드 마스터 상급이 되어 끝없이 샘솟는 마나를 가져야만 구사할 수 있다는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였다.

검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전방을 향해 날아간 수십 자루의 영롱하게 빛나는 오러 블레이드는 길을 막는 것은 마법이건 오러 소드건 오러 블레이드건 상관치 않고 모조리 부수고 베어 버렸다.

"세상에!"

후작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탄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고 있는 용병 검사의 양편에는 같은 방어구를 입은 검사 둘이 함께 길을 열고 있었는데 그들의 검에서도 1미터가 훨씬 넘는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올라 있었다. 후작이 놀란 것은 오러 블레이드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두 검사의 몸은 잔연 때문에 수십 명으로 보일 정도였던 것이다. 그 두 검사는 중앙에서 길을 열고 있는 검사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같은 소드 마스터가 경악할 정도의 속도로 인해 수십 자루의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운데 있는 저분은 돌풍 용병대의 딜런 경이네요. 언제 저런 경지에 올랐는지 모르겠군요."

아그레시아는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딜런을 알아보았다. 비록 보이는 거라곤 겨우 뒷모습이지만 하룬 대장을 연상시키는 묵직하고 단단한 기도 때문이었다.

"아!"

후작은 탄성을 지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돌풍 용병대에 속한 세 검사의 신기神技에 말을 잊은 것이다.

'저런 검사들이 용병이라고?'

후작은 도저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저런 실력이라면 새로 개국한 세 제국에서 공작이나 총사령관의 직위는 언제라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 실력자들이 용병이라니!

아그레시아가 그런 후작을 일깨웠다.

"우리도 가지요. 이 상태라면 굳이 후미를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네에?"

명색이 군단장인 후작이지만 오늘따라 계속 얼이 빠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또다시 하늘에서 마법 공격이 쏟아지고 있어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은 팔뚝만 한 크기의 매직 애로우 수백 개가 성 밖 남쪽을 향해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매직 애로우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떨어져 내렸다.

꽈앙! 꽈앙! 꽝! 꽝!

"크아악!"

강력한 충격음과 함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정말 엄청나군요. 저들이 돌풍 용병대가 맞습니까?"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도 파블로는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어느 용병대가 이렇게 강력한 무력을 가졌단 말인가. 이제까지 용병에 대해 가졌던 관념을 송두리째 바꾸어야만 할 것 같았다.

"돌풍은 정말 괴물이군요. 저 정도의 소드 마스터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후작은 아무래도 검사라서 그런지 딜런에게 관심과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무리 상급 소드 마스터라도 저 정도로 계속 플라잉 오러 블레이드를 날리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지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이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부상자들을 챙긴 31병단과 32병단이 완전히 성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것은 후방을 방어하며 후퇴할 예정인 33병단뿐이었다. 사상자를 제외한 인원은 겨우 3,000명밖에 되지 않지만, 짧지만 제대로 휴식을 하게 되어 사기가 오른 사제들이 축복과 회복을 걸어 준 결과 정상의 상태에 가까운 컨디션이 되어 있었다.

"어! 적의 반격입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막 움직이려던 사람들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맙소사!"

거대한 검은 손 2개가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 크기가 삼 층 건물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검은 손은 무시무시한 살기와 함께 검은 꼬리를 남기고 있었다.

"설마 다크 프린스가? 하지만 이건……."

후버론이 성벽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 성 남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알려지길 다크 프린스가 7서클에 올랐다고 했다. 공격 계열에 속하는 흑마법은 그리 많지 않다. 다크 핸드라고 해 봐야 3서클 마법이다. 물론 흑마력을 바탕으로 조종이 가능하기 때문에 백마법으로는 4서클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저렇게 큰 다크 핸드라면 서클을 한참 벗어난다. 7서클로도 어림없다.

"흑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마력 전이일 거예요."

아그레시아가 후버론의 말에 대답했다.

저 정도로 거대한 다크 핸드라면 7서클로도 어림없다. 7서클로 알려진 다크 프린스가 다른 흑마법사들로부터 마력 전이를 받아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후버론 탑주와 비슷한 경지의 대마법사가 마력 전이까지 사용하여 함정을 파고 자신들을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머리칼이 곤두섰다.

쩌저저정!

순식간에 고공의 목표물에 접근한 거대한 검은 손들과 정체불명의 거대한 새들이 충돌하는 순간 대기가 요동을 쳤다.

"불리해!"

거의 본능적으로 매직 아이를 펼칭 후버론이 소리를 질렀다. 거대한 새들이 밀리는 것을 또렷하게 보았던 것이다. 거대한 새들의 발톱들이 검은 손과 부딪히는 순간 위쪽으로 튕기듯 올라갔던 것이다.

"안 돼!"

엄청난 힘에 의해 튕긴 새의 등에서 몇 사람이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필시 그 이상한 증폭 마법을 쓴 마법사들이리라. 후버론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었다.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저 높이에서 떨어지면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때 위로 튕겨졌던 거대한 새들이 힘차게 날갯짓을 하더니 멋지게 활강을 해서 날아가던 사람들을 받아 내었다.

와아아!

아그레시아를 비롯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래로 떨어져 내렸던 거대한 검은 손들이 다시 위로 날아가자 사람들의 얼굴에는 진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밀리지 않을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소드 마스터가 타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거대한 새의 등 쪽에 회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나타나 있었다.

"회색이라니! 저런 색은 본 적이 없는데."

후작의 말도 잠시 사람들의 관심은 거대한 다크 핸드를 향해 날아가는 오러 블레이드에 쏠렸다.

"날다니! 검사가 하늘에서 날다니!"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검사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기이한 광경은 결단코 본 적이 없었다. 거대한 새 두 마리가 하나의 다크 핸드를 상대하는 사이에. 회색의 외투를 날개처럼 펼친 검사 역시 날면서 다른 하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쩌엉! 쩌엉!

얼마나 많은 마나가 주입이 되었는지 거대한 다크 핸드와 회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산산이 부서졌다. 글리고 또다기 위와 아래로 튕겨지는 다크 핸드와 괴조들의 모습과 함께 대기가 깰질 것처럼 요동을 쳤다.

오러 블레이드가 부서지는 순간 충격을 받았는지 검사는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선연하게 보였다.

"어떡해!"

아그레시아가 안타까운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는 동안 정신을 잃었던 검사가 정신을 차렸는지 자세를 잡고 외투를 날개처럼 펼쳤다. 그러자 낙하 속도가 줄었다.

"하룬 대장이다!"

잠시였지만 꽤 많이 낙하를 했기에 매직 아이를 통해 검사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던 아그레시아가 탄성과 함께 반색을 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피를 토하던데 괜찮을까? 그런데 하룬 대장이 소드 마스터였단 말이야?'

뛰어난 정령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실력일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몇 살 정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던 아그레시아로서는 더욱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 살 전후에 소드 마스터엿던 정령 검사가 있었던가?'

모후가 병사한 후 황실 도서관과 마탑을 오가며 수많은 책을 읽었던 아그레시아지만 하룬과 같은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령 검사도 흔치 않은데 검술 실력이 무려 소드 마스터라니!

아그레시아는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이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저 정도 실력이라면 괜찮을 거야.'

비록 상대가 8서클 대마법사와 비견되는 7서클 흑마법사라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정령술과 소드 마스터에 이르는 검술 실력을 가진 하룬이니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그레시아를 비롯해 하늘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안도하는 사이에 땅에서 하늘로 검은 손 하나가 다시 빠르게 솟구쳤다.

크기는 비슷하지만 이전에 비하며 색생이 엷은 것으로 보아 다크 프린스로 의심되는 흑마법사도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다크 핸드로 인해 다시 날아 올라가려던 검사의 의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검사의 날개처럼 펄럭이는 외투의 힘을 빌린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마법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지 허공의 한 자리에 멈추더니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헛! 설마 최소한 중급 이상이란 말인가?"

후작이 입을 떡 벌렸다. 검첨에서 솟아나온 오러 블레이드는 이전의 것과 비교해 거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그 실력이 최소 한 단계 이상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룬의 마나 오션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로서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쩌엉! 쩌엉!

또다시 대기가 깨질 듯 요동을 쳤다.

"사람들이 아니야!"

누군가의 말처럼 지금과 같은 전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크 프린스를 수행하고 있을 흑마법사들도 많을 텐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을 보면 그쪽 역시 이쪽처럼 기이한 전투에 넋이 나가 있을 것이다.

그때 아그레시아는 문득 머릿속을 울리는 묘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요?

'뭐지?'

분명히 눈을 뜨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리는 신기한 일에 아그레시아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왠지 그 목소리가 간절하게 들려 눈을 뗄 수 없는 상공의 전투에서 시선을 돌려 잠시 자신의 내면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뭐하는 거요?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계속 싸워야 하는 거요? 왜 탈출하지 않는 거요?

'이, 이건!'

분명히 하룬의 목소리였다. 아니, 음성이 아니라 의념이었지만 발신자가 하룬임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꿀꺽!

머리로 직접 전해지는 의념을 처음 접한 아그레시아가 놀라 목젖을 움직였다.

─거기서 뭐하는 거요? 빨리 움직이란 말이오!

하룬의 다급한 의념에 고개를 돌려 본 아그레시아는 어느새 북쪽 경사면의 정상까지 치고 올라간 돌풍 용병대의 세 검사와 그를 따라 기를 쓰고 올라가는 두 병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헉!"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 아그레시아는 후퇴라는 걸 모르는 마수들이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성안까지 밀려들어 오고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벽 근처에는 마수들의 사체가 즐비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정신이 팔린 사이 흑기사들을 앞세운 다크니스가 마수들을 죽이며 다시 성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이어 벌어지는 기이한 일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릿속이 차가워지고 온몸의 털들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바보같이 방금 전만 해도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주제에 벼랑 끝에 서있는 줄도 모르고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정신 차려요!"

증폭 마법까지 건 그녀의 목소리는 상공의 전투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빨리 탈출해요!"

"아! 이런!"

이제야 자신들의 상황을 자각한 사람들은 지체하지 않고 신형을 북쪽으로 날렸다. 처음 작전대로 33병단의 이천여 병사들은 아직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눈 언데드들의 머리통을 끊고 부수면서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누구 때문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전투를 치르고 있는데 지상에 있는 가즈 로드 측은 탈출로를 열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고스란히 날리고 있었다.

하룬은 거대한 검은 손이 주먹 형태로 변하며 자신을 짓쳐오는 것을 보며 박살을 휘둘렀다.

꽈앙!

울컥!

주먹을 쥔 검은 손은 박살의 오러 블레이드로 내리치는 순간 엄청난 반탄력과 검을 통해 전해 오는 강력한 힘 때문에 그의 몸이 공중으로 쑥 올라갔다. 그리고 내장이 자리를 이탈하며 솟구친 피가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제기랄! 마력 전이로군.'

특수한 흑마법진을 구성하여 그 중앙에 있는 이에게 마력을 이전하는 마력 전이는 포러스의 기억으로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 공명 마법으로도 흑마법진은 완벽하게 깰 수가 없었다. 변칙적인 육망성을 이루고 앉아 있는 흑마법사들은 자신의 마력을 흑마법진의 힘을 중심에 있는 다크 프린스에게 전하고 있었다.

다른 흑마법사들의 마나 전이가 없었다면 다크 프린스가 아무리 7서클 흑마법사라도 이렇게 거대한 다크 핸드를 무려 2개씩이나 운용할 수 없을 것이다.

꽈앙!

끄르르!

자신만이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낮은 소리지만 수니도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꾸아아악!

제 짝의 부상 때문에 분노한 미노가 피어를 토하고 있지만 수백 명의 달하는 흑마법사의 힘에 흑마법진의 힘까지 전해받고 있는 다크 프린스의 다크 핸드 마법은 너무나 강력했다.

아마 마나를 모두 소진한 마법사들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더 이상 충격을 받으면 미노와 수니는 물론이고 대원들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다.

하룬은 하단전의 마나를 전력으로 끌어 올려 오러 블레이드를 강화했다.

"그래, 해보자!"

이렇게 무력하기는 처음인 것 같다. 삼사 층 건물의 크기를 가진 검은 손은 하룬과 비슷한 고도에서 멈추더니 이번에는 손날을 세웠다.

'미치겠군!'

잠시 시선을 지상으로 돌린 하룬은 다크 프린스로 짐작되는 인물의 손이 손날을 세우고 위를 향해 날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젠장! 뭐, 이런 마법이 다 있어?'

마법사는 아니지만 하룬이 마법, 그것도 흑마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포러스의 기억을 흡수한 그다. 하지만 하룬이 알고 있는 다크 핸드 마법은 이런 식으로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마치 다크 프린스의 손이 공간을 격隔하고 자신을 직접 상대하는 것과 같았다. 마법이되 뭉크의 손 공격처럼 자유롭고 치명적인 공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손이 공격권 안에 들어가면 자신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오러 블레이드에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면 말은 다한 것이다.

하룬은 이번에는 쫙 편 손바닥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면서 오므라드는 것을 보며 전력으로 박살을 휘둘렀다. 검술을 사용하고 싶어도 공격 자체가 워낙 무지막지한 터라 순수하게 힘으로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전력을 다한 하룬의 박살과 다크 프린스의 다크 핸드가 다시 격돌했다.

꽈아앙!

쩌저엉!

"푸우!"

갑자기 세상이 까맣게 변해 버렸다. 입을 포함한 오공으로는 피를 토해 내고 있엇지만 의식이 순간적으로 끊긴 것이다.

쐐애액!

정신을 잃은 하룬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낙하했다.

순간적으로 50여 미터를 낙하한 하룬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뭔가 위험한 기운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본능이 감지하고 의식을 다시 깨운 것이다.

힘겹게 눈을 뜬 하룬은 자신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으며 그런 자신을 향해 다크 핸드가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나르스의 날개!'

기절한 순간 끊어졌던 문신의 힘을 떠올린 순간 펄럭거리던 외투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낙하 속도를 감소시켰다.

휘리릭!

팔다리를 움직여 공중 한 점에서 다시 안정적인 자세를 취한 하룬은 지상의 흑마법진과 다크 프린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하룬은 흑마법사들과 흑마법진으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다크 프린스에게 향하는 것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자신이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을 정도로 피해를 봤지만 적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빌어먹을! 저놈은 싸울수록 강해지고 있어!'

다크 프린스는 심상心象을 통한 일반적인 다크 핸드 마법 대신 자신의 몸을 매개로 다른 흑마법사들의 마력을 전이받아 마법을 펼치고 있는데 갈수록 그 운용법이 세밀해지고 또 강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다크 핸드의 밀도는 한층 더 높아져 같은 크기라도 그 강도에 있어서는 처음의 몇 배는 더 상해진 상태다.

'흑마법이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사실 직접적인 전투에서 흑마법은 백마법이나 검술에 비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은 실전된 전설의 운석 소환 마법 정도가 아니면 오러 블레이드를 견딜 수 있는 마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흑마법의 경우 언데드 계열을 제외하면 저주나 키메라 제조, 정신 계열, 포이즌 계열 등에 특화되어 전투에 직접적인 공격 마법은 몇 개에 불과했다.

'어떻게 이방인이 7서클에 올랐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가 가진 배경을 생각하자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포러스의 기억대로라면 '시험의 관'이라는 고대의 유물과 다크 문 마탑 그리고 마왕의 파편을 통해 단기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검술과 마찬가지로 마법 역시 수련해온 시간과 실패를 통해 겪어 온 경험이, 심하면 두세 단계를 건너뛸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그런데 겨우 20대 초반에 불과한 이방인이 아무리 수하들과 마법진의 조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정교하고 위력적인 공격을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치기는커녕 점점 더 강력해지는군.'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미 하단전의 마나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하룬은 할 수 없이 마나 스토리지를 일부 개방했다. 그렇게 엄청난 양의 마나가 박살로 주입되자 오러 블레이드의 색상은 진해졌고 길이도 더 길어졌다.

'빨리 도망쳤으면 우리도 쉽게 도망칠 거 아니야!'

넋을 놓고 공중전을 구경하고 있는 가즈 로드 측에게 원망을 해 보는 하룬이다.

그래도 마나 스토리지의 마나들이 모두 개방되자 손상된 그의 장기는 무서운 속도로 회복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기다리던 다크 핸드는 바로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점점 더 색이 짙어지고 소름끼치는 마기가 강해지는 것을 보면 마지막 한 방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오기가 난 하룬은 박살에 마나를 우겨 넣는 한편 멍청하게 아직도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성안의 아그레시아에게 의념을 보냈다.

'통했군!'

다행히도 그녀의 정신력이 높았는지 의념은 정확하게 전달된 것 같다.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가즈 로드 측 사람들이 일제히 성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딜런을 비롯한 전사단 고문 셋이 길을 열어 둔 상태였다.

'우리도 튀어야겠다!'

굳이 이곳에 남아서 다크 프린스를 상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하룬은 미노와 수니에게도 도망치라고 의념을 보냈다.

─조심해라, 친구!

미노와 수니는 하룬을 걱정하며 남은 힘을 다해 하늘 높이 올라갔다. 다행하게도 두 녀석이 상대하고 있던 다크 핸드는 잠시 버처리비크들을 따라 올라가다가 포기를 했는지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하룬은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

'2개가 합세하면 나도 못 견딘다. 한 번만 맞받아치고 튀자!'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다크 핸드가 손가락을 쭉 편 채 가공할 빠르기로 그를 향해 날아왔다.

"타앗!"

하룬은 기합성과 함께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손가락들을 향해 박살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어어어엉!

세상이 산산조각이 났다.

대기는 유리처럼 깨졌고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충격파가 충돌의 반작용으로 날아가는 하룬을 덮쳤다.

"우욱! 크으윽!"

전신이 터져 나가는 것 같다.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눈앞은 붉게 변해 있었다. 나르스의 날개 문신으로 향하던 힘이 순간적으로 끊겼는지 원하는 자세를 잡을 수가 없다.

머릿속이 아득해져 간다.

'죽는 건가?'

하지만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아리! 벨! 펠!'

이제야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이대로 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남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다.

하룬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피범벅이 된 터라 진한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다행히 감각은 아직 죽지 않았다. 고통이든 뭐든 감각이 살아 있으니 이대로 손을 놓고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다.

하룬은 모든 마나 스토리지를 개방했다. 그리고 활성화된 문신에 깃든 힘들도 다 끌어 올렸다. 그렇게 마나 스토리지의 마나와 문신에 깃들어 있던 힘들이 전신으로 처지자 자리를 벗어났던 장기들과 파열되고 끊긴 근육들이 빠른 속도로 재생되었고 엉망이 된 뼈들이 제자리를 잡았다.

'난 죽을 뻔했는데 너희들은 그대로군.'

이제 지상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극히 짧은 순간 정상을 회복한 하룬은 공중에 뜬 상태로 마치 살아 있는 존재를 보는 듯 다크 핸드를 쳐다보았다.

'이제 합체까지!'

자신만이 위험했던 것이 아닌 듯 다크 핸드 하나는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는데 미노와 수니를 상대했던 다크 핸드와 섞이기 시작했다.

곧 심하게 손상된 다크 핸드는 사라지고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거대해진 다크 핸드가 나타났다. 거의 오 층 건물에 해당할 정도로 엄청난 다크 핸드는 조롱을 하듯 거대한 검지를 까닥거리며 하룬을 도발했다.

'이번에는 만만치 않을 것다!'

이 정도까지 자신이 가진 힘을 끌어낸 적은 없었다. 몇 가지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별개로 존재할 뿐 이렇게 자신의 의지로 한껏 끌어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3미터 길이에 두께도 두 배로 커진 회색 오러 블레이드를 바라보는 하룬의 눈빛이 강해졌다. 엄청난 크기의 다크 핸드를 상대로 검술은 필요하지 않다. 있다면 오로지 힘과 힘의 격돌뿐이다.

'제기랄!'

상대가 되지 않을 거란 사실은 거대한 다크 핸드를 상대하고 있는 하룬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이 다크 핸드가 한창 도망치고 있는 가즈 로드를 향한다면 실로 엄청난 생명들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간다!"

하룬은 도발하는 거대한 손가락을 향해 날아가며 박살을 휘둘렀다.

어느새 주먹을 쥔 형태로 변한 다크 핸드를 공격한 것은 박살이 아니엇다. 날아가는 순간 하룬의 왼손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비도들을 날렸던 것이다.

푹! 푹! 푹! 푹!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살에 박히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수많은 비수들이 거대한 검은 주먹에 꽂혔다. 하지만 거대한 검은 주먹은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의미가 있는 변화가 있었다. 검은 주먹의 내부에서 강력한 전류가 폭발적으로 방전하고 있었다.

움찔! 움찔!

어둠의 비수와 비도지존의 유물인 네 자루의 비수들이 박힌 자리가 심하게 요동을 친 것이다. 특히 상단전의 뇌력이 흘러들어 간 블리츠 대거가 박힌 부분은 고통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다크 핸드는 여전히 그 위용을 잃지 않고 금방이라도 하룬을 짓누를 듯 위압적이었다.

그 순간 지상에서 날아온 거대한 화염구가 다크 핸드와 부딪쳤다.

꽈아아앙!

삽시간에 다크 핸드의 손가락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이 정도 크기의 파이어 플레임이라면?'

아래로 눈을 돌린 하룬은 북쪽 성벽에 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후버론 대마법사가 있었는데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고 있었다.

하룬은 그가 힘겹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웃음을 지었지만 내심은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동시에 공격했다면 위력이 극대화되었을 텐데 말이다.

폭발의 여파로 잠시 뒤로 날아갔던 하룬은 하늘로 비산한 다크핸드의 일부 파편들이 본체에 합류하기 시작하자 공격을 서둘렀다.

푸욱!

만 몸을 날라려던 하룬은 갑자기 가슴 부위에 극렬한 통증을 느꼈다. 뭔가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뚫고 들어와 등판으로 나간 것 같았다.

휘청!

하룬의 몸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몸 안의 마나들이 갑자기 급격하게 들끓으며 폭주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슴 한복판에 휘황한 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단검 자루가 보였다.

'언제?'

전혀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디서 날아온 단검일까?

어떻게 이렇게 높은 상공까지 날릴 수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어떤 아이템이기에 이렇게 빠르게 마나를 흩뜨리는 것일까?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비록 의문에 공격에 직격당한 상태지만 후버론 대마법사가 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타앗!"

하룬의 거대한 회색 오러 블레이드가 손가락이 날아가 버린 검은 주먹과 충돌했다.

쩌저저저저정.

자신의 몸을 포함한 세상이 산산조각 났다. 충돌음도 없이 충돌 지점에서 생성된 엄청난 진파가 하룬의 몸을 강타했다.

"쿠악!"

비명과 함께 날아가는 하룬의 입과 코 그리고 귀에서는 시꺼멓게 죽은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은 그저 살덩이에 불과할 뿐 뼈는 모두 제자리를 이탈했고 장기는 조각조각 부서져 버렸다.

'제길! 박살이 내 마나를 담지 못했어!'

그 순간에도 하룬은 너무나 아쉬웠다. 마지막 격돌의 순간 박살이 그가 주입한 마나를 모두 수용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의 충격이 겹치자 다크 핸드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

'박살이 내 마나를 견딜 수 있었다면…….'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하룬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안 돼! 혀엉! 동화! 이동!

아득한 의식의 저 먼 곳에서 펠의 다급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크 핸드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하늘은 온통 사까맣게 변했다.

다크 핸드로 하룬과 싸웠던 다크 프린스는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마력 전이를 수행하던 수많은 흑마법사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흑마법진은 어느새 깨져 있었다.

'이럴 수도 있는 건가?'

격돌이 일어났던 곳을 향하는 다크 프린스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다크 핸드가 깨졌다. 자신의 흑마력을 매개로 수백 명의 흑마법사들로부터 전이된 흑마력과 흑마법진의 흑마력을 끌어 들여 만든 다크 핸드가 산산조각이 나며 대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하늘을 물들였던 짙은 어둠이 어느 순간 급속하게 엷어지며 푸른 하늘이 간간이 드러나고 있었다.

다크 프린스는 입과 코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설마 다 가루가 된 것일까?'

기대했던 장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의 시체를 비롯해서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는 세상이라면 당연히 보였어야 하는 그런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산산이 부서진 비수 조각들로 추정되는 파편들이 빛에 반사되어 비처럼 내리고 있을 뿐이다.

'죽었겠지?'

자신이 상대했던 자의 모습은 다크 핸드의 파편으로 인해 검게 변한 하늘 속으로 숨은 듯 사라져 버렸다. 그가 썼던 기이한 검도 역시 산산조각이 난 듯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흑마력을 전했던 흑마법사들과 흑마법진의 마력전이 효율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그 힘이라면 산을 통째로 뭉갤 수 있을 정도로 가공할 수준이다. 사람이라면 그 힘 앞에 절대로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놈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얼마 전 입수한 이상한 단검까지 썼다.

'극강의 혼이란 이름을 제외하고는 아무 정보도 알 수 없었던 이상한 단검이었지.'

극강의 혼으란 이름에 맞게 목표의 재질이 무엇이든 부숴버리는 그 단검을 우연히 입수해서 애지중지했건만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그것까지 날린 것이다.

'설마 그 단검까지 놈과 함께 가루가 된 것일까?'

아깝다는 생각도 잠시 생각했던 적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이 보이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심각한 내상에도 불구하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그의 매직 아이에는 살점이나 뼛조각으로 추정되는 것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놈이 비수나 단검과 함께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방인일 가능성이었다.

만약 놈이 이방인이라면 부활할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자 불안감이 급속하게 커졌다. 다시는 그런 놈과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 아니겠지.'

저런 능력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 소드 마스터인 주제에 마법사처럼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거기에 꺼림칙한 비수들을 생각하면 더욱 경계가 되었다.

'죽었을 거야.'

이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이상한 점들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다른 결론은 아예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그렇게 오래 체공할 수는 없엇다. 그렇다고 특별한 비행 아이템을 가진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희한한 능력을 가진 자였어.'

일대일, 아니 십 대 일이라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자였다. 새처럼 날아다니며 오러 블레이드를 날리는 소드 마스터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런 자에게는 마법도 큰 소용이 없었다.

다크 프린스는 현실은 물론 비욘드를 플레이하면서 처음으로 강한 패배감을 느꼈다. 자신의 능력을 상회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지만 왠지 방금 상대했던 자를 떠올리자 자꾸 두렵고 불안해졌던 것이다.

'불안하긴 하지만 죽었겠지? 무려 수백 명의 마나를 하데 모은 만큼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이니까 말이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다크 프린스의 얼굴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번갈아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다크 프린스의 얼굴을 주시하는 인물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시린이었다. 다크니스 총참모장이며 현실에서는 다크 프린스의 개인 비서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충격이 컸던 걸까? 저렇게 감정 변화가 심한 것은 처음 보는데.'

"로드, 괜찮으세요?"

시린이 그의 목에 손을 넣어 머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얹었다.

"쿨럭! 쿠악!"

격렬한 기침과 함께 목과 입에 고인 죽은피를 토한 다크프린스는 그제야 많은 흑마법사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들은?"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매직 아이가 자연스럽게 해제되며 시야가 뿌옇게 변해 전황을 볼 수가 없었다.

"북쪽에 펼친 포위망이 완전히 괴멸되었어요. 적들은 이미 포위망을 벗어났어요."

"다른 방향에 포진했던 병력도 있었잖아?"

"그게, 급하게 연락이 들어왔는데 최소 소드 마스터 중급으로 추정되는 다른 자들이 나타나 산 건너편에 매복하고 있는 단원들을 도륙했답니다. 추격이야 가능하지만 그자들이 합류한 만큼 마법사들의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자칫하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요."

"그런가? 추격을 중지하도록 해!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자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줄은 몰랐으니까."

다크 프린스는 2미터가 넘는 오러 블레이드로 전방을 모조리 날려 버리며 급경사지를 내려오던 세 소드 마스터와 최상급 마나석들로 구현한 흑마법진이 깨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엄청난 마법 공격을 떠올렸다.

비록 자신의 예하에 엄청난 숫자의 부하들이 있엇지만 일대일로 그 정도의 강자들을 상대할 자는 없었다. 그런 자들이 포위망 뒤쪽의 산 정상에서부터 느닷없이 치고 내려왔으니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의 그 파이어 플레임은 누가 날린 거야?"

다크 프린스가 이를 갈며 물었다.

"데스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후버론 대마법사가 날린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그때만 해도 흑마법진이 깨지지 않아 그 정도 위력의 파이어 플레임을 구사할 수 있는 적은 그가 유일했거든요."

"빌어먹을 늙은이! 이번에 그 황녀라는 계집과 함께 죽였어야 했는데."

자신은 7서클 대마도사. 흑마법도 마찬가지지만 8서클 이상의 마법들은 대부분 실전되었기에 별달리 주의하지 않았던 후버론이 뒤통수를 제대로 쳤다.

'역시 거물이라는 건가?'

그렇게 절묘한 순간의 다크 핸드의 위력을 반감시키다니.

다크 핸드의 손가락 부분들이 날아가지 않았다면 정체불명의 기사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확실하게 가루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자들은 누구였지?"

"거대한 새를 타고 나타난 것과 로드께서 상대했던 자의 인상착의를 보건대 돌풍 용병대로 추정됩니다."

"아! 그놈들이었군."

시린이 한 말을 들은 다크 프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았다. 문제는 듣던 것보다 그 무위가 훨씬 강했다는 것이지만 놈들의 수장이 다크 핸드의 시체도 못 남기고 죽었으니 어쩌면 장기적으로 볼 때는 다행이다.

"그럼 그놈이 하룬이라는 자였겠군."

"네, 그렇게 추정하고 있어요."

그러자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설마 하룬으로 추정되는 자가 이방인은 아니겠지?'

사체나 그 파편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거렸다. 그러다 보니 하룬이 이방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룬이 이방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돌풍 용병대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에 잠시 나돈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으로서 정령 검사는 나타난 적이 없었고 그 무력이 워낙 뛰어나 그런 소문은 곧 수그러들었다.

'아니지. 이방인이 그런 실력을 가졌을 리가 없지.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니 일단 확인부터 해야겠군.'

함정을 파고 기다렸던 가즈 로드와 괴물과 같은 거대한 새들, 나머지 용병들은 이미 도주했을 테지만 그가 죽인 것이 하룬이라면 손해는 아니다. 분명히 그들이 고스트를 박멸해온 자들일 테니 말이다.

"죽었겠지?"

"네에? 아! 당연히 죽었겠죠. 그게 어떤 공격인데요. 그 극강의 혼이란 비수가 등급이 모호하긴 하지만 무엇이든 부숴 버리는 엄청난 아이템이잖아요."

시린은 일부러 힘을 주어 말을 했다. 그녀가 본 다크 프린스는 평소와는 다르게 많이 불안한 얼굴이었기에 자신감을 북돋아 주고 싶었다.

시린으로서는 처음 보는 생경한 모습이었기에 더욱 그의 손을 꽉 쥐며 확인해 주었다. 평소에는 자신감이 과해 은근히 걱정할 정도의 로드였는데 처음으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그럴 거야! 그 단검까지 맞고 살았을 리가 없지."

다크 프린스는 시린의 동의에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측 피해는 어떤가?"

"보시다시피 로드에게 힘을 빌려 준 마법사들 중 일부는 마나 역류로 사망했고 대다수가 심각한 내상을 입었어요."

"제기랄!"

잘생기고 귀티가 줄줄 흐르는 다크 프린스의 얼굴이 순간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무려 수백 명에 달하는 수하들의 힘을 전해 받았는데도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마력전이로 인한 내상은 포션으로도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 엄청난 전력을 한동안 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 정도 실력자가 정말로 용병은 아닐 거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설마 GPC는 아니겠지?'

비록 자신의 마법에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치부하고 싶은 하룬이지만 놈과 싸운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특히 자신과 연결된 다크 핸드를 타고 전해졌던 그 엄청난 전격과 마력을 흡수하던 이상한 현상을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했다.

"로드, 일단 포션부터 드세요!"

다크 프린스는 시린이 건넨 최상급 치료 포션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매복계는 완전히 실패했따! 적의 우두머리가 소문처럼 현자의 반열에 올랐다면 앞으로는 쉽지 않겠군. 치잇!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상대할 때 방심하지 않을 테지.'

고스트가 상당한 피해를 받은 이상 이제 제국들의 지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것이다.

'그 문제는 골든 로드의 활약에 따라 변수가 생길 테니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가즈 로드의 수뇌부는 놓쳤지만 그래도 하룬이라는 용병대장을 죽인 것이 그나마 다행인 건가?'

이렇게 맞붙고 보니 이제까지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던 하룬과 돌풍 용병대가 자신의 행보에 큰 변수였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없앤 자가 하룬이 맞는다면 스페셜 포스의 행사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골든 로드 측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고 있는 상태인데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당장은 힘을 비축해야 하니 일단은 움츠려야겠지? 이런 건 내 성격과는 안 맞는데…….'

이곳에 매복계를 펼치는 대신 몇 개의 성을 포기했다. 전략적인 가치가 높은 곳들이라 이곳 일이 성공한다면 몰아서 탈환 작전에 돌입하려고 했는데, 돌연 나타난 돌풍 용병대로 인해 자신의 흑마법사 전력이 상당 폭 깎여 나갔다.

'빌어먹을!'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한갓 용병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용병들을 주축으로 한 스페셜 포스에게 연일 밀리는 고스트를 비웃었건만 아주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적들이 자신들처럼 마나 유동이 극심한 데빌 산맥에서도 워프를 할 수 있게 됨으로 인해 더 이상 신속한 이동과 지원의 이점은 사라졌다. 힘과 힘으로 부딪히면 자신들이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추가 병력이 마련될 때까지는 골든 로드만 믿어야겠군.'

은밀하게 추진되는 작전이 성공한다면 몇 개월 뒤부터는 전력이 크게 상승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적들을 잘 막으면 된다. 아마 이번에 크게 한 방 먹였으니 한동안은 몸을 사릴 것이다.

'이번에 반드시 죽였어야 했는데.'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변수가 출현했으니 말이다.

'어차피 노인네들은 모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당분간은 상관없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글로리 가이아 상층부는 비욘드의 세상이 개방된 후 처음부터 흑마법에 관심을 가졌다. 기묘하게도 데드 벙커에서 진행하던 생체 연구는 흑마법과 유사한 부분이 많았고 실제로도 서로 깊은 연관이 있었다.

다크 문 마탑에 비치되어 있던 흑마법서들은 현실로 넘겨 데드 벙커의 연구에 활용되고 있었고 최근에는 괄목할 만한 실험 결과도 나왔다. 그 때문에 조직의 상층부 인물들은 대거 데드 벙커로 향했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한다.

'혼돈의 땅으로 간 파견대가 잘해 줘야 하는데…… 그곳에서 순수석을 얻는다면 마왕의 파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얻게 될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마왕을 강림시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가장 순수한 마나로 충만한 순수석의 존재가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수련의 관에서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비록 회심의 노림수가 수포로 돌아갔지만 순수석만 얻는다면 단번에 계속되는 열세를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병력을 수습해서 2본부로 돌아간다!"

이미 암중에 세상의 대부분을 장악한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일단 그에게 내려진 이 비욘드 세상을 지배하라는 명령은 혼돈의 땅에서 순수석을 얻는 것에 달려 있다.

다크 프린스의 차가운 눈은 혼돈의 땅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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