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로드의 위기
가즈 로드 측은 점심 무렵에는 전투의 흔적을 대부분 정리
할 수 있었다. 다크니스 전력의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기에
다른 전투처럼 처참한 사체나 피가 남지 않았기에 쉽게 정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3군단은 최소한의 경계 인력만 남기고
휴식에 들어갔다. 성안에 있는 건물들 중 일부와 지구라트가
완파되었기에 쉴 장소는 부족했지만 볍사들은 대충 자리를
잡고 쓰러졌다. 지난 사흘간의 행군과 새벽의 전투는 지휘부
는 물론이고 병사들에게도 깊은 피로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그레시아와 후버론은 명상으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
었다. 건강을 위해서는 잠을 푹 자는 것이 가장 좋았지만 가
즈 로드 수뇌부는 다른 작전 지역을 체크할 필요가 있었기에
명상으로 피로를 풀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명상에 빠져든 후버론과 달리 아그레시아는 쉽게
명상에 들지 못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명상을 방해하고
있었다.
작전도 성공을 했는데 왜 이렇세 불안한지 모르겠다.
6개의 군단이 동시에 다크니스의 성을 공격해서 모두 함
락시켰다. 인명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마탑 연합에서 보내온
방어구에는 방어 마법이 인챈트되어 있었고 신전 연합에서
실력 있는 사제들이 대거 합류한 덕분에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아 전력의 누수는 최소화될 것이다.
'왜 이러지?'
이런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지병을 앓고 있었던 모후가 숨
을 거두었을 때를 비롯해서 자신에게 큰일이 생겼을 때였다.
'차라리 움직이는 편이 낫겠어!'
그녀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다급한 소리가 들려
왔다.
"적이다!"
"적의 공격이다!"
땡! 땡! 땡! 땡!
비상 종소리까지 울리자 아그레시아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에게 배정된 건물 밖으로 뛰어나온 아그레
시아는 성벽 위에서 경계를 하던 병사들이 어느새 올라온 흑
기사들에게 난도질당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총사, 무슨 일입니까?"
명상에서 깨어나 달려 나온 가즈 로드의 수뇌부들이 그녀
곁으로 모였다. 그들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어느새 자기편보
다 더 많은 숫자의 적들이 성벽에 올라오고 있는 광경이었다,
남들이 쉴 때 경계를 맡은 311천인대는 3군단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힘겹게 적들을 막아 내고 있었
다. 올라온 자들이 대부분 검기를 쓰는 흑기사들이라 상황은
무척 불리했다.
꽈아앙!
한쪽에만 난 성문 쪽에서 폭음이 울렸다.
"정신 차려라! 당황하지 마라!"
깊은 잠에서 깨어나 뛰어나왔지만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후작의 명령이 떨
어졌다.
"31병단은 정문으로 가라! 32병단은 동북쪽을, 33병단은
남서쪽을 방어하라!"
후작의 명령에 이어 각 병단장들의 명령이 떨어졌다.
가즈 로드의 병력은 기사들이나 병사들 모두가 경험이 풍
부하기 때문에 금방 혼란을 극복하고 해당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기민한 대처에 조금은 마음을 놓았던 아그레시아는 갑자
기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과 함께 음산한 기운을 느꼈다.
'뭐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감각 이상을 초래한 원인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청명하던 하늘에는 어느새 시꺼먼 먹구름이 모
여들고 있었다.
'지나가는 구름이 아니야!'
성 위에 자리한 먹구름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처
럼 가깝게 느껴졌다. 분명히 인위적인 냄새가 났다.
'그럼?'
뭔가를 떠올리자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그레시아
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흑마법진이 깨지지 않았어!"
"네에? 무슨?"
곁에 있던 후버론이 의아한 얼굴로 아그레시아를 쳐다 보
았다.
"흑마법진이 다시 가동되었어요!"
비명처럼 뾰족한 아그레시아의 말에 후버론의 얼굴이 딱
딱하게 굳었다. 분명 제거되었던 흑마법진이 다시 가동되었
음을 그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음산하고 불길한 감감과 함께
진에 갇힌자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한 능력 저하를
가져오는 흑마법진의 존재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일단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해요!"
아그레시아는 굳은 얼굴로 플라이 마법을 펼쳤다. 후버론
역시 그녀를 따라 상공으로 올라갔다.
"하아!"
성과 그 주변이 모두 시야에 들어올 정도의 고도로 날아
올라간 아그레시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엄청난 대군이 성을 에워싸고 있었
던 것이다.
"어마어마하군요."
후버론도 질린 얼굴이었다.
프로즐리만 해도 백 마리가 넘을 법한 마수는 물론이고 강
화 좀비와 스켈레톤과 같은 언데드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일반적인 행태와는 달리 다크니스 진영의 선봉은 검은 갑
주를 입은 흑기사들이었다. 그 뒤에 마수와 강화 언데드 들
이 따르고 있었고 그 뒤를 흑전사들이 받치고 있었다.
후방에는 검은 로브를 걸친 흑마법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
었는데 그중 일부는 마법진의 포스트와 코어에 마나석을 파
묻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은 공격 마
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수백 명의 흑기사들과 흑마법사들에
게 호위를 받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다. 흑발에 조각과도 같
은 얼굴을 가진 그 인물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성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쐐액! 쌔액!
흑마법사들 중 일부가 하늘에 떠 있는 그녀와 후버론을 발
견했는지 다크 애로우를 날렸다.
"빨리 피하십시오. 유도 기능이 걸려 있습니다."
후버론은 손을 흔들어 아그레시아의 앞쪽으로 이동하더니
더블 실드를 쳤다. 한 마법을 펼치는 동안 다른 마법을 펼치
는 것을 보면 8서클 대마법사가 맞았다.
꽝! 꽝! 꽝!
다크 매직 애로우가 실드 막을 치는 폭발음이 수십 차례나
이어졌다.
그사이 후버론과 아그레시아는 무사히 성 중앙의 한 건물
위로 내려왔다. 파괴되지 않은 건물 중 가장 높은 건물 옥상
이라 전투 상황이 훤히 들어왔다.
"어떻게 되어 가나요?"
그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건물 위로 올라온 참모
일렝 백작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어렵습니다. 병사들 중 반 이상이 방어구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상태로 적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흑마법진
까지 가동되며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일렝 백작의 말을 들으며 눈을 돌리자 이제 성벽 위를 거
의 다 내준 상황이 들어왔다. 성벽 아래에는 적들에게 죽음
을 당한 병사들의 사체가 즐비했고 마수들과 흑기사들이 성
안 쪽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성문은 이미 부서졌고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적들을
막느라고 좁은 공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병사들의 사체가 쌓여 피가 웅덩이를 이룰 정도로 처참한 상
황이었다.
"피할 곳도 없습니다. 다크니스는 산 위쪽을 포함해서 사
방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까 확인했다.
"우리가 오히려 적들에게 당했군요."
후버론이 밀물처럼 성을 향해 쇄도하는 다크니스를 보며
탄식을 했다. 놈들의 전 방위적인 공격은 그만큼 무서웠다.
"흑마법진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밀리지 않을 텐데……."
참모인 디커슨 마법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전황을 지켜보
았다. 보이는 거라곤 검은색 오러 소드에, 들리는 것은 모두
가즈 로드 측 병사들의 비명이었다. 새롭게 가동된 흑마법진
의 영향으로 양측 전력이 엄청난 영향을 받는 것이다.
"마나가 요동치고 있어요!"
급격한 마나의 유동을 감지한 아그레시아가 비명을 지르
듯 소리쳤다.
흑마법진의 영향과는 무관한 새로운 마나의 유동이었는데
그 정도가 엄청났다.
그르릉. 쿠르릉.
대지가 갑자기 요동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반이 마치 반죽이 된 듯 요동을 치더니 건물들은 세차게
흔들렸고 사람들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지기 일
쑤였다.
수우우욱! 쉬이이익!
성벽은 물론이고 사방에서 시커먼 엷은 연기가 스멀거리
며 솟아나더니 성을 완전히 감싸 버린 것이다.
"아악!"
"커억!"
몇 사람이 얼굴을 비롯한 몸 전체가 시커멓게 변하더니 목
을 잡고 쓰러졌다. 아무래도 독이 섞인 모양이다.
후버론은 한 떼의 마법사들과 함께 대단위 마법을 준비하
고 있어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3군단 전력은 자연스럽게 아직 검은 안개가 잠식하지 못
한 성안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마기다!"
"아니, 독이 섞여 있다!"
"주변을 경계해!"
사람들이 경호성을 질렀다.
"윈드 블로우!"
"토네이도!"
마법사들 중 일부가 즉각 풍계 마법을 펼쳤다. 엷은 검은
안개는 바람에 밀려났지만 일정 범위 밖으로는 흩어지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은 금방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뭔가 이상해! 바람을 막는 어떤 것이 성 주변에 있어!"
마법사들의 말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우왕좌왕했지만 마법
을 펼쳤을 때 잠시 물러났던 검은 안개는 마법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승님!"
뭔가 대단위 흑마법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지
식으로는 알 수가 없는 터라 아그레시아는 후버론을 불렀다.
대단위 마법을 준비하던 후버론은 뭔가를 생각하는지 이마
에 굵은 고랑을 만들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사이 바닥이며 건물들이 모두 엷지만 검은색으로 물들
어 갔고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뭔가 위험한 일이 바로
일어날 것 같은 긴박합이 느껴졌다.
"으아악! 내 몸이 녹고 있어!"
"끄악! 내 발!"
갑자기 곳곳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비명의 주인들은 검
게 변한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몸은 검
게 변해 녹기 시작하거나 발부터 시작해서 급격하게 썩고 있
었다.
검은 안개와 검은 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병사들은 순식
간에 뼈만 남은 몰골로 변했고 이내 흑마력에 잠식되어 스켈
레톤으로 다시 태어났다.
"으으으!"
그런 참혹한 광경을 바로 앞에서 보는 병사들의 사기는 바
닥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데스 필드라니!"
갑자기 후버론이 욕설과 함께 놀라 소리쳤다.
"데스 필드요?"
"8서클 흑마법이오, 총사.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이걸 어떻게 찾아낸 거지? 아니, 이럴 때가 아니
오. 마법사들은 모두 내 곁으로 모여라!"
후버론은 크게 소리를 질러 마법사들을 모으고는 아그레
시아에게 급하게 말했다.
"곧 성 전체가 죽음의 땅으로 변하게 될 겁니다. 흑마력이
미치는 범위에 갇힌 이들은 모두 죽게 될 겁니다. 제가 마법
사들과 함께 결계와 비슷한 마법진을 펼칠 테니 총사께서는
사제들에게 신성력으로 저 검은 연기를 밀어내야 한다고 지
시하십시오. 그래야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아그레시아는 데스 필드는 알지 못했지만 비슷한 흑마법
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일전에 다크 프린스가
다크 필드라는 마법을 펼쳐 일정 지역 안에 있는 가즈 로드
의 병력을 일시에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두르시오!"
후버론은 마법사들과 함께 '안티매직 존' 이라는 대단위
마법을 펼쳤다.
곧 그들이 있던 건물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정도의 범
위가 마법이 발휘될 수 없는 지역으로 변했다. 그 덕분에 꾸
물꾸물 움직이며 성안을 잠식하던 불길한 기운을 품은 땅의
전진이 멈추었다.
사제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신성 주문을 외
웠다.
"홀리 디바인 파워!"
검은 하늘을 간신히 뚫고 강림한 신성한 빛은 곧 범위를
확장했지만 마법사들이 펼쳐 놓은 안티매직 존을 벗어나지
는 못했다. 그게 신성 여단에 소속된 300명 사제들의 한계였
던 것이다.
"지독하군."
가지고 있던 마나석들을 이용해서 안티매직 존 마법을 마
법진 형태로 바꾼 후버론이 말라 버린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의 흑마법진은 공격을 할 때에 비해 두 배 이상 위력
이 강해졌고 다크 프린스로 추측되는 흑마법사가 주도해서
펼친 대단위 흑마법 '데스 필드' 는 벌써 수많은 아군을 언데
드로 만들어 버렸다.
대응이 효과적이었을까 성벽과 성문을 포함해서 내성 일
부만 장악한 것에 그친 다크니스 측은 작전을 바꾸었다. 이
제까지 선봉에 섰던 흑기사들 대신에 마수들과 강화 언데드
들이 그자리에 투입된 것이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기에 전황은 다소 유리해졌지만 마수
와 언데드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가즈 로드 측의 피로도는
시시각각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의 작전 변경은 가즈 로드 측에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후작의 명령으로 각 병단과 천인대
들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전열을 정비하고 부상자들을 성안
쪽으로 이송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친히 앞장서서 흑기사들을 베었던 후작이 잠시 짬이 나자
친위대원 몇 명과 함께 지휘부로 달려왔다.
"총사, 어서 피하십시오.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전황이나 작전을 물어볼 틈도 없이 후퇴를 종용하는 후작
의 얼굴에는 진땀이 가득했다. 이쪽에는 4명의 소드 마스터
가 있었지만 다크니스 측에는 무려 10명의 소드 마스터가 존
재했다. 비록 초급이긴 하지만 새벽의 공격에 상당한 마나를
소비하고 제대로 회복도 하지 못한 상태하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시지요, 총사."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후버론도 후작의 말에 동의했다. 자
신들이 가세한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라 상대
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 내기 힘들었다.
"저와 총본 참모들은 간이 워프 마법진으로 떠난다고 치
고 그럼 나머지 분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여?"
"저희는 한 방향으로 탈출을 할 겁니다. 희생자들이 많이
나겠지만 그래도 이곳에 갇혀 몰살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
지요."
그것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지만 아그레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다 죽고 말 겁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들도
성 밖에 대기하고 있는 엄청난 적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까지 포위망을 구축했는지는 모르지만 보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적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나 유동이 심한 지역이고 좌표도 모르는 지역이니 간이 워
프 마법진이 아닌 워프나 텔레포트는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당연히 스크롤 역시 소용이 없다. 이미 몇 번이나 시험해 봤던
일이다.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더 텔레포트나 워프를 하는
동안 공간에 짓이겨 죽기 십상이니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더욱 가셔야 합니다."
후작의 말에 아그레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여러분들을 놔두고 혼자 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탈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대원들은 희망을 잃을 겁
니다."
아그레시아는 비록 전장의 경험은 없지만 자신의 위치와
그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의 최고 책임자는 후작이 아
니라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혼자 살겠다고 사라지면 이곳에
남은 이들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저를 비롯한 이곳의 수뇌부는 이곳에
서 죽는 것이 최선이에여."
뛰어난 무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엄청난 마법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전 제국의 황녀이며 현자라는 위
치와 구성원들을 잘 아우를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가즈
로드의 수장이 된 아그레시아다.
그녀가 뛰어난 전략가나 장군이라면 명예가 실추되더라
도 한 번의 패배는 감수할 수 있다. 복수는 나중에 해도
된다.
'내가 죽으면 오히려 가즈 로드의 기세는 더욱 크게 일어
날 수 있을 꺼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러니 더욱 아그레시아는 절대 물러나거나 자신의 결정을 취소
할 생각이 없음을 결연한 눈빛과 표정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그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군요."
그렇게 말하는 후작의 얼굴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
럼 후련해 보였다.
"네. 우리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어요. 모두에게 알려 주세
요. 어차피 가는 죽음의 길이라면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야
한다고."
결연한 아그레시아의 말에 후작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피
가 튀는 전장으로 향했다.
곧이어 마나가 담긴 후작의 외침이 성안에 울려 퍼졌다.
"우리에게는 피하거나 물러설 곳은 없다. 우리 3군단은
총사와 함께 오늘 여기에서 뼈를 묻을 것이다. 마법사들은
공격 마법 대신 아군이 죽거든 언데드가 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에 우리 시신을 모조리 태워 버려라, 이왕 죽을 바에는
남은 동료들을 위해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그동안 수고 많
았다."
후작의 어조는 유언처럼 비장했다. 비탄과 분노 그리고 미
안함이 가득 담긴 그의 유언을 듣는 순간 3군단에 속한 이들
은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무
의식적인 반응으로 적을 상대했지만 이제 모든 상황을 알고
나니 새로운 각오가 생긴 것이다.
후작의 말처럼 이왕 죽을 거라면 남은 동료들을 위해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 그게 데빌 산맥의 악마들을 상대
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위해 파견된 자신들의 마지막 임무
인 것이다.
"325천인대! 우리가 제일 먼저 죽는다! 이제부터 적어도
10명은 죽이고 죽어야 한다. 허접하게 죽으면 지옥까지 쫓
아가서 엉덩이를 갈겨 주겠다!"
"카카카! 난 10명으로 만족 못 합니다. 적어도 30명은 데
리고 갈 겁니다."
"크크! 난 50명을 끌고 갈 겁니다."
"314천인대는 들어라! 지옥에 가서 점고했을 때 325천인
대보다 다크니스 놈들을 더 적게 끌고 온 것이 밝혀지면 그
냥 두지 않겠다. 우리의 목표는 일당백이다!"
"큭! 큭! 제기랄. 이제 겨우 열두 놈을 죽였는데 언제 나
머지 여든여덟 놈을 더 죽이란 말이오. 죽을 때까지 숨기려
고 했는데 결국 내 비장의 수를 써야겠군."
"하하하! 내가 제일 두려웠던 것이 언데드가 되는 것이었
는데 그나마 군단장 각하가 해결해 준다고 하니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 자, 죽으러 가자!"
성안 곳곳에서 천인장들과 백인장들의 명령 소리가 들려
왔고 그에 호응하는 병사들의 대답이 줄을 이었다, 병사들은
의외로 쉽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항상 죽음을 곁에 달고
다니는 이들이라서 그런 것인지 죽음을 나름대로의 방법으
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을 듣는 아그레시아와 참모진들의 눈에 눈물이 흘렀
다. 명령에 따라 이 지옥 같은 곳에 와서 결국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그 정신과 기세는 정말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영원히 여러분들을 기억할 거예요.'
눈물을 흘리는 아그레시아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떠올
라 있었다, 마음을 비워서 그런지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그
런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마법이 좋아 어린 시절부터 종일 황실 마탑에서 지내 왔던
그녀의 지인들은 거의 다 마법사들이었지만 특이한 이들도
몇 명 있었다, 형제들과 모후 그리고 친동생처럼 여겼던 시
녀들도 있었지만 고요의 땅에서 처음 만난 하룬의 얼굴도 있
었다,
군단장의 최종 명령이 떨어진 후 눈에 뜨이게 기세가 달라
진 가즈 로드 측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하나 둘 산화하
고 말 것이다. 가즈 로드의 총사로서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면 그게 무엇이든 붙잡아야만 한다. 1명이라도 살
릴 수 있다면 살려야만 했다.
'하룬! 그라면 혹시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몰라.'
이제까지 몇 번이나 기적과 같은 일을 해낸 하룬이라면 무
슨 수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심연의 바닥까지 가라앉
았던 마음이 급격하게 위로 떠올랐다.
아그레시아는 결국 지난번 하룬에게서 받은 통신기를 작
동시켰다.
-치익! 치익! 누구십니까?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는 하룬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가
슴이 울컥했다. 아그레시아는 잠시 그의 목소리가 주는 느낌
을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그레시아예요."
왠지 마지막 가는 순간에는 직책 따위를 내세우고 싶지 않
았다. 개인으로 산 적이 거의 없었던 그녀로서는 나름 파격
적인 반응이었지만 하룬은 그런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 총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아그레시아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음
도 알려주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마수들과 언데드들이 앞장을 서
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은데 본대가 가세하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일단 다른 지원군을 부르십시오.
"……고마워요!"
아그레시아는 너무나 당연하게 이 아수라장으로 오겠다고
말하는 하룬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잘못을 자책했다.
'왜 지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무도 다른 성이나 군단으로 지원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10분에 20명 정도의 인원이 이동할 수 있는 간이 워
프 마법진이고 현재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기에 그 정도의
지원으로는 현 상황을 극복할 수 없기에 오직 탈출 용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와 봐야 겨우 10명밖에 되지 않지만 하룬이 온다는 것만으
로도 절망의 그림자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다른 참모들의 얼
굴도 조금은 펴지고 있었다.
"당장 피론 성을 비롯한 우리 성들로 통신을 보내세요. 최
고 실력자들로 엄선해서 당장 이곳으로 보내라고. 후버론 님
은 워프가 엉키지 않도록 조절을 부탁드려요."
"네, 총사!"
"당황하지 않게 군단장에게도 즉각 대응군의 합류를 알리
세요."
아그레시아와 참모들은 절망에서 벗어나 활기차게 움직이
기 시작했다.
하룬은 통신을 끝내고 잠시 숙고에 빠져들었다. 생각 같아
서는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그들 10명이 간다고 해서 전
황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 방법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흑마법진이 가장 큰 문제로군.'
어떻게 해서든지 흑마법진을 깨야만 일부라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놈들이 마수들과 강화 언데드들의 희생을 앞세
운다면 죽음을 각오한 가즈 로드의 항전이 큰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하룬은 일단 미노와 수니에게 심어를 보냈다. 녀석들은 만
약을 위해 대원들이 있는 코엠성 인근에 머무르라고 했기에
근처에 있을 것이다.
-미노, 수니, 지금 어디에 있니?
심어를 보내고 잠시 후 녀셕들의 대답이 머릿속으로 들려
왔다.
-우린 지금 큰 양 산 근처에 있어.
-산양의 머리처럼 생긴 산 근처야. 와이번들이 보여서 쫓
아왔는데 어디로 숨었는지 안 보여.
녀석들의 말을 들은 하룬은 잠시 생각한 후에 그곳이 어디
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 이젠 데빌 산맥을 아주 자기들 영역으로 만들
생각이구나.'
언제부터인가 녀석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비행 생명체들의
씨를 말리고 있었다. 물론 작은 새들이야 신경도 쓰지 않지
만 아이콘라드나 와이번과 같은 몬스터들은 보이는 족족 잡
아 죽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어긴 녀셕들을 언제고 혼내 주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녀셕들의 행동이 더 다행이었다.
일전에 녀셕들과 동화를 해서 데빌 산맥의 곳곳을 머릿속
에 담아 둔 적이 있었다. 산양의 머리처럼 생긴 산이라면 지
금 아그레시아가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다.
-그럼 이곳은 알겠어?
하룬은 자신이 떠올린 영상을 심어와 함께 전했다.
-그곳이라면 잘 알아.
-그곳으로 갈까?
그동안 꽤 심심했었던지 수니가 이상할 정도로 적극적으
로 나온다.
-그곳의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어.
-캬! 캬! 캬! 드디어 시작이군.
-신 나겠다!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이다.
하룬이 미소를 지으며 언제 다가왔는지 펠과 레미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립니까?"
하지만 막상 질문을 던진 대원은 타니엘라였다.
"가즈 로드가 다크 프린스의 함정에 빠진 모양입니다."
"네?"
하룬은 아그레시아로부터 들은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알
려 주며 장비를 챙겼다. 대원들 역시 자신의 장비를 챙기며
하룬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우리가 도움이 될까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안 봐도 상황이 뻔하다. 이런 상황
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제 상태가
아닌데 3배나 많은 적들에게 포위를 당했으니 무슨 짓을 하
더라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일단 뒤를 치지요. 그리고 흑마법진만 제대로 깨뜨려도
전력 상승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
크니스의 흑마법진은 가즈 로드 측의 전력은 약화시키고 자
신들은 강화시키니 결국 그 차이는 엄청나게 된다. 실전 경
험이나 숙련도와 같은 부분에서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단순
비교를 하면 다크니스의 익스퍼트 초급이 가즈 로드의 익스
퍼트 중급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흐름. 흑마법진만 깰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문제는 그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보나 마나 흑마법진
이 펼쳐진 곳에는 적들이 득실대고 있을 것이다. 성안으로
난입한 적들 이외에도 약 3만 에 달하는 인원이 성을 포위하
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룬에게는 생각이 있었다. 마침 미노와 수니가 그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녀석들의 비
행 속도를 계산했을 때 적어도 5분 정도면 그 근처에 도착할
것이다.
"펠!"
"응, 형. 말만해."
한동안 정신없이 바쁘다가 갑자기 이틀 동안 출동이 업자
심심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원들을 괴롭히던 펠은
출동할 것 같은 분위기에 고무된 모양이다,
"미노의 등으로 이동할수 있을까?"
"움직이는 물체 위로의 이동이라? 어렵긴 하지만 가능할
것 같은데."
역시 펠이다.
하룬은 엄지를 들어 올려 녀석의 능력을 칭찬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대원들에게 눈을 돌렸다.
"모두 현재의 상황을 충분히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을 겁
니다. 우리는 미노의 등으로 이동해서 한창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는 곳으로 날아갈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적들의 수
뇌부를 최대한 혼란에 빠뜨리는 것과 흑마법진을 처리하는
겁니다."
대원들은 기대가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
려운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이 되는지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제게 마수들을 제어할 방법이 있습니다."
하룬은 마수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흑마력을 사용하면 마수들의 이빨과 발톱을 다크니스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전부는 불가능하더라도 어느 정도만
마수들을 테이밍하더라도 적진에 혼란을 줄수 있다.
거기에 미노와 수니로 하여금 흑마법진을 강하게 흔들 생
각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흑마법진 코어의 위치가 드
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미노의 등에 타고 있는 마탑 고문
들이 공명 마법을 이용해서 코어를 아예 파괴할 작정이다.
그 두 가지가 이루어지면 적들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고 딜런을 포함한 전사단 고문들이 가세하면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 과정 중에 지원군이
조금 더 가세하게 되면 더욱 힘이 될테고 말이다.
"뭐, 가능하니 대장님이 이야기를 했겠지요. 아무튼 준비
는 모두 끝났습니다."
비록 하룬의 말에 조금 허황되게 들리긴 했지만 대원들은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동안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
도 결국 하룬의 말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대원들이 하룬에게
가지는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하룬은 여전히 불안했다. 뭔가 걸리는 것이
사라지질 않았다,
'불안한데'
이제 곧 뫼비우스와 헤르쉬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크 프린스의 진군은 물론 데빌 산맥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된
다. 그런데 가즈 로드가 서두르다가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성공이군!"
대원들은 하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불안해하지 않았지만
하룬은 사실 속으로 펠의 공간 이동이 실패할까 봐 엄청나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펠은 하룬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멋지게 미노의 등 위로 정확하게 공간 이동을 한 것이다,
"아무튼 대장 형제는 불가사의한 존재들입니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워프의 후유증으로 생긴 어지러움
을 없앤 타니엘라가 중얼거렸다.
비록 미노가 한자리에서 체공을 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좌
표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중의 한점에 정확하게 워프한
다는 것은 타니엘라를 비롯한 마법사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맞아요. 타니엘라 님. 어떨 때 보면 펠이 대장보다 더 괴
물 같다니까요."
에몬이 기절한 듯 늘어져 있는 펠을 보며 소곤거렸다. 에
몬은 다른 팀원들은 마음껏 적을 상대하는 데 반해 자신은
계속 해서 펠의 호위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아무리 펠이 태고의 정령술을 익혔다고 하지만 저 어린 나
이에 이런 식의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지식으로
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다만 워낙 불가사의한
일을 많이 보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것뿐이다.
잠시 후 워프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눈은 지상으
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음습하고 옅은 검은색 반원 형태의 막이 구름처럼 성을 뒤
덮고 있었는데 그 안의 상황은 듣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후아! 완전히 포위된 상태군요."
레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성벽을 중심으로 그밖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검은색 로
브와 갑옷 그리고 하드레더를 걸친 다크니스의 세력이 진을
친 상태였다.
"저게 다 얼마야?"
"적어도 5만은 넘겠는데."
"성안 쪽에서 가즈 로드 측을 공격하는 마수와 언데드 들
만 해도 그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사람들은 두런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성안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가즈 로드의
상대는 인간이 아닌 마수들과 언데드들이었다. 곳곳에서 오
러 블레이드와 오러 소드를 사용하는 기사들이 분전하고 있
지만 상대의 숫자가 워낙 많았고 합공을 하고 있었기에 그리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우욱!"
갑자기 레미가 창백해진 얼굴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
리 뛰어난 자질을 가진 칸 후보라고는 해도 성안의 광경은
레미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처참했다.
성안은 사지가 잘리고 머리통이 떨어진 언데드들과 짓이
겨진 마수들의 사체와 더불어 갈기갈기 찢긴 인간들의 사체
가 가득했다. 상공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릿한 혈향이 콧속
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저 찢어 죽일 놈들!"
대원들은 성안 곳곳에 널린 가즈 로드 측의 참혹한 주검을
보며 분개했다.
"놈들이 머리를 썼군. 흑기사들과 흑전사들 그리고 흑마법
사들의 전력은 비축하고 마수와 언데드 들을 앞세워 지속적
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어. 저러다가 때가 되면 총공세를 펼
칠 테지. 그럼 지친 가즈 로드 측은 속절없이 무너질 테고."
'다크 프린스! 생각보다 용병술이 뛰어난 자로군.'
하룬은 타니엘라의 말을 들으며 감탄했다. 자신이 다크 프
린스라도 이런 작전을 구사했을 것이다. 동화율 문제를 어떻
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마수와 언데드 들을 공격에 투입함으
로써 인명 피해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제대로 걸렸군.'
성안으로 난입한 마수나 강화 언데드는 인간에 비해 전투
력이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해 월등한 체력과 방어력을
가진 놈들이라 가즈 로드 측은 지속적으로 희생자를 내고 있
었다.
성안과 그 주변을 둘러보던 하룬의 시선은 어느새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크니스의 시선을 우려해서 까마득한 상공에세 체공을
했지만 마나를 사용해서 안력을 높인 하룬의 눈은 성 밖 남
쪽의 다크 프린스로 의심되는 자를 살피고 있었다.
급조한 듯 붉은 속살의 흙으로 올린 언덕위에 수백 명의
흑기사들과 흑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한가
운데에는 의자에 앉아 전황을 살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존재
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 그 외모는 볼 수 없었다.
'후후! 드디어 만났구나!'
좀체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던 글로리 가이아의 수뇌부가
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장을 내려다본 하룬은 아까 잠시 생각해 두었던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한 것보다 다크니스의
전력이 너무 강해 보였던 것이다.
그때 목에 걸고 있던 통신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받아 보니 아그레시아였다.
-정말 와 주었군요, 하룬!
감격한 듯 조금은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초조한 마
음으로 하룬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매직 아이를 펼쳐 주변
을 면밀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돌풍과 저 하룬은 친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느끼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 순간 아그레시아에게는 더
이상 감동을 줄 수 없는 그런 말이었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3군단이 3분의 1이 죽었어요. 이러다가 적들이 총공격을 해
오면 10분도 견디지 못할 거에요.
하룬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지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행히 코엘 성에서 소드 마스터 3명과 6서클 마도사 2명 그
리고 익스퍼트 최상급 기사 5명이 막 산 너머에 도착했다고 해요.
워프의 후유증이 가라앉는 대로 움직인다고 했어요.
"어느 방향입니까?"
-북쪽이에요.
마침 하룬이 탈출로로 생각하고 있던 방향이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다른 지원군들도 그쪽으로 이동하라고 해 주십시오."
-이미 그렇게 전했어요.
일단 산만 넘어가면 안심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곧 우리가 흑마법진을 처리 하겠습니다. 파괴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영향력이 순간적으로 확연하게 줄어들 겁니다. 하
늘에서 폭음이 들리면 바로 북쪽을 뚫고 성을 벗어나십시오."
-북쪽이면 깎아지른 산인데요?
아그레시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의 북쪽은 약 60도 정도의 급경사지로 산 정상을 가장
빨리 오를수 있는 코스였다. 하지만 그 경사지 곳곳에는 수
많은 적들이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상
대할 적들의 숫자가 가장 적은 곳이기도 했다.
"적의 주력은 성문 앞쪽과 남쪽입니다. 그나마 포위망이
가장 느슨한 곳은 산 위쪽입니다. 저희 전사단 고문들이 최
대한 북쪽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해치울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신호는요?
"일단 흑마법진의 마력장이 요동을 치게 될 겁니다. 그리
고 지금 여러분들을 공격하고 있는 마수들이 이상행동을 할
겁니다."
-이상행동요?
"마수들중 꽤 많은 숫자가 공격 목표를 바꿀 겁니다."
이제까지 마수의 심령을 장악해 본 경험은 백여 마리가 최
대였지만 하룬은 자신이 있었다. 모든 마수의 심령을 제압하
는 건 불가능 하겠지만 자신이 보유한 흑마력은 마성이 강한
놈들일수록 더 쉽게 먹혀들었다.
"마수들 일부가 성 밖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면 그에 맞추
어 모종의 일로 인해 강화 언데드들 일부도 무력해질 겁니
다. 그와 동시에 버처리비크들이 흑마법진의 마법장에 충격
을 주면 그 즉시행동하면 됩니다."
-그, 그게 가능할까요?
불안한 듯 심하게 떨리는 아그레시아의 목소리가 통신기
를 통해 전해졌다. 하룬의 능력을 믿기는 하지만 직접 본 적
이 없는 그녀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일단 사람들에게 작전의 개요를 알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아, 알았어요.
하룬의 딱딱한 말에 그가 느끼고 있는 불쾌감을 감지한 아
그레시아가 화들짝 놀라 통신을 끊었다.
'어떡해! 기분 나빴나봐.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왜 하룬과 같은 용병에게 위압감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아그레시아는 서둘러 군단장인 후작을 찾아 하룬이 한 이
야기를 해 주었다. 삶을 포기했던 후작이니 만큼 총사의 이
야기에 크게 흥분했다.
"그럼 이 이야기를 빨리 전해야 합니다."
후작은 서둘러 마법 여단의 마법사들이 마지막 마법을 준
비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파블로를 만난 후작은 총사의 이
야기를 전했고 그는 주문을 준비 중인 마법사들을 불러 모아
그 내용을 전했다.
곧 다중의 메세지 마법이 사방으로 펼쳐졌고 얼마 지나지 않
아 3군단의 모든 인원이 하룬이 말한 내용을 숙지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