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2화.아그레시아 총사 (253/278)

아그레시아 총사

대원들은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이분들은 누굽니까?"

아슈인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머물고 있던 숙소 한곳에서 나오는 마샤인과 일룸을 보고 하룬에게 물었다.

"아, 그분들은……."

"일룸 경!"

하룬이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 티노가 일룸을 알아보고 그를 불렀다.

"티노 부대장, 오랜만이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리고 그 방어구는?"

어느새 하룬이 준 방어구를 착용한 두 사람이다. 대원들은 눈을 빛내며 두 사람에게 다가간 하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 두 분은 제가 새로운 고문으로 임명한 대원들입니다."

"네? 일룸 경을요? 일룸 경은 파이린 제국의 친위기사단 부단장의 신분인데……."

티노의 말에 사람들의 관심이 폭증했다. 제국의 친위기사단 부단장이라면 이전 테론 제국의 경우 백작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며 또한 실세인 것이다.

"사정이 있어 기사단을 나오셨습니다. 이분은 친위기사단 전 단장을 지내신 마샤인 고문입니다."

"헐!"

백작급의 부단장과 후작급인 전 단장까지.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이린 제국이야 이미 신분제도가 사라졌다지만 뿌리 깊은 가문 의식이 남아 있는 한 몇 대는 더 지나가야 진정한 신분제도의 폐지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대원들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귀한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왜 남들에게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용병이 된 것일까?

그들의 합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펠이었다.

"헤헤! 환영해요. 전 하룬 형의 동생 펠이라고 해요."

"응, 반갑다."

"정령사로군. 어려 보이는데 엄청나군."

일룸은 순수하게 인사를 받았지만 마샤인은 한눈에 펠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아보았다.

"반갑습니다.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딜런입니다."

딜런은 마샤인을 보자마자 그가 제도 아카데미의 선배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워낙 엘리트 코스를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선배였기 때문에 황도 소식을 들을 때면 그 이름을 자주 들었었다.

"반갑네. 자네가 돌풍에 있다는 소리는 들었었네. 헛! 상급? 언제 그렇게 실력이 오른 건가?"

마샤인은 자신이 아는 인물을 만나자 반가워하다가 그의 실력을 알아보곤 경악했다. 10년 가까운 연배가 차이 나는 데다가 가문의 검술 수준에서 큰 차이가 나기에 딜런의 이런 실력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상급은 아닙니다. 이제 겨우 중급입니다."

딜런과 하룬이 생각하는 기준은 일반적인 것과는 좀 달랐다. 그렇기에 하룬의 경우에도 현실 세계의 실력은 남들은 소드 마스터라고 부르겠지만 본인은 아직 익스퍼트 최상급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호오! 이분도 초급은 훌쩍 뛰어넘었고…… 이분도 초급 이긴 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군. 헙! 그러고 보니 다들 그러네. 도대체 다들 용병들이 맞기는 한건가? 완전히 드래곤 레어나 다름없군."

마샤인은 고문들의 기도를 알아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어딜 가더라도 실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그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고문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짱짱했던 것이다.

"하하하! 그건 선배님 말씀이 맞습니다. 드래곤 레어나 다름없지요. 7서클 대마도사가 둘이나 되니까요. 다른 고문들 역시 그에 버금가는 주술사들이고요."

딜런의 말에 마샤인은 물론이고 티노와 잠시 안부 인사를 나누던 일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고문들이 한결같이 대장보다 더 실력이 뛰어날 수 있는 거지? 아니, 이런 실력자들이 어떻게 용병 일을 할 수 있는 거야?'

얼굴에 문신을 한 것을 보면 데빌 산맥에 사는 산악 부족 출신인 것 같은데 그들의 무력이 이 정도로 뛰어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서로 인사들 나누세요."

하룬의 말에 티노와 딜런이 나서서 양쪽을 일일이 소개했다.

"엄청난 인물이었군. 뭐, 지금이야 같은 위치지만."

"나이가 어린 펠이나 이레안만 해도 대단한데 점점 더 대단한 인물들이 들어오는 것 같다."

"어쨌거나 대원들의 실력이 높으면 우리 모두에겐 좋은 일이지."

"암, 그렇지. 등을 맡길 동료들 실력이 뛰어나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지."

돌풍 용병대의 고문들에게는 거의 모든 집단에 있는 배타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를 이어 마수를 상대하며 살아온 이들에게는 실력이 가장 가치 있는 척도인 것이다.

일룸과 마샤인은 어색할 수 있는 첫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면이 있는 티노와 딜런 덕분에 빠르게 자신들을 어필 할 수 있었고 같이 저녁을 먹고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하는동안 급속하게 친해졌다.

파코추 마탑의 심처에서 은거를 하고 있던 아그레시아는 세 제국 황제들의 강력한 권유와 개인적으로 스승인 후버론 전대 탑주의 설득에 바로 마음을 정했다.

세 제국은 아그레시아에게 총사의 자리와 함께 그들이 파견한 병력에 대한 독자적인 지휘권과 향후 데빌 산맥에 자리를 잡으면 그것까지 인정을 해 준다는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더불어 고스트 건이 해결되면 각각 10만에 달하는 추가 병력 지원과 수천만 골드에 이르는 자금 지원까지 약속했다.

워프 마법진을 통해 바로 요새로 건너온 아그레시아는 가즈 로드의 새로운 총사가 되어 정식으로 자리에 취임했다. 과거 테론 제국 시절부터 그 혜지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이름이 높던 아그레시아의 총사 취임은, 다크 프린스의 등장으로 사기가 저하된 가즈 로드도 당장에 분위기가 변했다.

워프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바로 호의를 연 아그레시아는 가즈 로드와 그들의 적인 다크니스에 대한 각종 정보를 입수하고 이틀에 걸쳐 분석한 다음 다시 회의를 열었다.

"지금은 조직을 정비할 시기이니 당장 위험한 성은 병력을 철수하세요. 제국 정보 길드를 비롯한 정보 길드들과 연계해서 정기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이세요."

그녀는 그 두 가지를 먼저 처리하고 다음 수순으로 신전연합의 대표들을 소집했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신전 연합은 피해를 의식해서인지 신앙심도 부족하고 실력도 부족한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파견했더군요."

"아,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레아께서 대노하실 겁니다."

아그레시아의 직설적인 말에 사제들이 반발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신을 추앙하는 분들이 아니라고 잡아뗄 참인가요?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죠. 빛의 신전 성녀의 파문 건이야 이 몸이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동안 치러진 전투에서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신성 마법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사제들도 다수 있었고 심지어는 신성 치료도 하지 못하는 주교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성수는 맹물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태반이었고요. 성수는 뒤로 빼돌려 다들 착복을 했다지요? 이미 병사들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그, 그건……."

신전 연합의 대표들은 아그레시아의 말에 제대로 응수할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귀에도 그런 말이 들려오는 판이다.

"당장 사제의 탈을 쓰고 있는 이들과 겉멋만 잔뜩 들어 마녀사냥이나 하고 싶은 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제대로 된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보내지 않는다면 앞으로 세 제국에 있는 본전들은 물론 포교 활동도 하지 못할 수 있어요. 세 제국의 황제 폐하들이 지금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방인인 이벨린 황녀와는 달리 아그레시아 총사는 세 제국의 황제들과 아주 가까운 인척이며 거의 독자적인 지휘권을 확보한 인물이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가즈 로드에서 철수하세요. 지금의 인물들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요. 여러분에게 권한이 없다는 것은 아니까 돌아가서 당장 총교나 교단으로 연락하세요."

신전 연합은 강경하게 나오는 아그레시아 총사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미 세상에 그간에 신전 연합에서 취한 행동들이 퍼지고 있어 기부를 포함한 신전의 수입이 급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크니스의 위협이야 데빌 산맥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최근 고스트로 인해 상계가 극도로 위축되어 많은 상인들이 고초를 겪는 터라 신전 연합의 행태에 대해서 부정적인 분위기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신전 연합은 당장 실력 있는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 물품도 제대로 된 것들로 바꾸었고 가즈 로드의 파견 건을 이용해서 재물을 착복했던 주교급 인물들이 좌천되는 등 한바탕 소동을 겪어야만 했다.

아그레시아는 하루에 수십 명을 만나는 강도 높은 일정을 통해 가즈 로드의 인물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성의를 보였고 세 제국 황제들의 든든한 후원을 확인한 사람들은 그녀의 지휘권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마치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가 내린 조치들은 시기적절했고 가즈 로드의 사기도 다시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숙소에 머물며 대련과 수련을 하는 한편 고스트를 상대할 작전을 구상하던 하룬 역시 그녀의 요청으로 독대를 해야만 했다.

"오랜만이죠, 하룬 대장?"

오랜만에 본 아그레시아는 고요의 땅에서 봤던 것보다 더 밝은 얼굴이었다. 형제들과 황위를 놓고 싸우는 것이 그녀에게는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그렇군요. 전하의 소식은 후버론 대마법사로부터 가끔 전해 들었습니다."

"이제 전하로 불릴 신분은 아니니 편하게 대해 주세요. 테론 제국은 더 이상 세상에 없는 걸요. 그리고 망국의 황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요."

아그레시아는 제국이 망한 것도, 자신이 황녀의 지위를 상실한 것도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편해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총사!"

"이번에 제가 가즈 로드의 총사가 된 것이 실은 하룬 대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고 스승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고마워요, 이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주어서. 실은 아직 젊은 나이에 마탑에서만 지내는 것이 고역이었거든요."

"별말씀을요."

"기도가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네요."

얼굴 거의 대부분을 가렸던 앞머리를 뒤로 넘겨 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제로 표정이 부드러워져서일까? 아그레시아는 달라진 하룬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편하다고 생각했다.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당연히 좋은 의미로 한 말이에요. 전보다 더 멋있어진 것 같아요. 차가운 것도 멋있었지만 지금 보이는 부드러움은 더 멋진 것 같아요. 그래서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리가 자꾸 개인적인 분위기로 흐르자 당혹스러워진 하룬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왜 저와 독대를……."

"후후! 대장은 저와의 자리가 불편한가 보네요."

"그건 아닙니다."

하룬이 난처한 얼굴이 되자 아그레시아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그만하지요. 대장을 이렇게 따로 만나고자 한 것은 도움을 받을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도움이라니, 협조 관계라면 모를까 하룬이 그녀를 도울 일은 없어 보였기에 하룬은 의아했다.

"듣자 하니 돌풍 마탑에서 새로운 방식의 워프 마법진을 개발했다고 하더군요. 데빌 산맥과 같은 험지나 마나 유동이 심한 곳에서도 안전하게 워프를 할 수 있다면서요?"

'이런! 헤르쉬가 입을 열었군.'

괜히 헤르쉬에게 넘어가 극비 사항을 토설한 것이 이렇게 바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정말 대단한 거예요. 다크니스가 사용하는 워프 마법진 때문에 우리의 피해가 컸었는데 우리도 돌풍 마탑이 개발한 워프 마법진을 사용한다면 기동성을 크게 높일 수 있어 큰 도움이 될 거에요."

"……."

설마 워프 마법진에 대한 지식을 넘기라는 것일까? 그건 하룬이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마법단 고문들의 수없는 토론과 연구 끝에 탄생한 산물이니 그들이 결정할 문제인 것이다.

"나 또한 마나의 길을 걷는 자이니 그 워프 마법진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할게요. 그 워프 마법진을 현재 우리 가즈 로드가 장악하고 있는 성들에 설치해 준다면 돌풍 마탑을 마탑 연합의 일원으로 인정하지요."

"마탑 연합의 일원으로 말입니까?"

대단한 제안이다. 과연 아그레시아가 마탑 연합에서 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여부는 차치하고 마탑 연합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돌풍 마탑이 정식으로 마탑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7서클의 대마법사가 만들었다고 모두 정식 마탑이 되는 건 아니다. 제국들과 다른 마탑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함부로 지부도 설치하지 못하고 마법 아이템의 판매를 비롯한 각종 수익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수많은 자유 마탑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마탑 연합은 기득권을 가진 마탑들의 모임이기에 새로운 마탑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 강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단체다. 그런 마탑 연합에서 그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돌풍 마탑이 불이익을 받지 않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마음껏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건 돌풍으로서는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거래인 것이다.

"마탑 쪽과 의논을 해 보겠습니다."

"네, 그래 주세요."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기존 마탑들의 반응이 걱정되어 한 소리였지만 아그레시아는 자신이 있는 얼굴이었다.

"현재 밀리고 있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중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 워프 마법진이니 마탑 연합에서도 반대할 수 없을 거예요. 안정적인 워프 마법진은 우리 전력을 현재보다 몇 배는 더 끌어올려 줄 테니까요."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워프 마법진을 이용하면 몇개의 군단이 지원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할 부탁도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아그레시아가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이상 하룬도 성의를 보일 생각이었다. 그것이 다소 곤란한 문제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 사람을 거둬 주세요."

"네에?"

정말 뜬금없는 소리였다.

"내가 아는 사람을 돌풍에서 좀 받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거야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 인재라면 싫다고 해도 설득해서 데려와야 할 상황이니 말이다.

"어떤 친구입니까?"

"마법사에요. 이럴 게 아니고 지금 소개를 하도록 하지요."

짝! 짝! 짝!

아그레시아가 박수를 치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흰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게 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마법사는 마법 지팡이 대신 왼팔에 흰색의 완드를 차고 있었다.

"에몬, 인사를 올려라. 앞으로 널 이끌어 주실 돌풍 용병대의 하룬 대장이야."

아그레시아의 말에 마법사가 후드를 뒤로 넘겼다.

'여자? 아니, 남자인가?'

묘한 분위기를 가진 20대 초반의 얼굴이 드러났다. 선이 가늘고 고운 이목구비였지만 강렬한 눈빛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거칠고 사나웠다. 밝으면서도 음침하고 천진한 것 같으면서도 음흉한 정반대의 느낌을 동시에 풍기고 있어 종잡기가 힘들었다.

"에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에몬의 목소리 역시 남녀 구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투박한 행동으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드러난 것만으로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하룬입니다."

강렬한 눈빛이 하룬을 잠시 쏘아보았다. 눈싸움이라도 하고 싶은 것일까? 예전이라면 마주 쏘아봤을 테지만 하룬은 자연스럽게 눈을 돌려 아그레시아를 향했다.

"에몬은 망국의 황실 마법사로 6서클의 마법사예요."

"그렇군요."

외모로 짐작되는 나이에 6서클이라면 대단한 천재일 것이다. 거기에 황실 마탑의 마법사이기도 했다면 유명한 인물이리라. 그런데 이 정도의 인물을 왜 자신에게 맡기려고 하는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 하룬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아그레시아가 말을 덧붙였다.

"에몬은 정통 마법들은 물론 어쌔신 스킬과 구황실 마탑이 비밀리에 보유하고 있던 흑마법까지 익혔어요."

"아!"

"아실지 모르겠지만 황실에는 몇 개의 특수 조직이 있어요."

그건 잘 알고 있다. 하룬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데브론만 해도 사라진 황실의 비밀 조직이었던 메신저 기사단의 인물이 아니던가.

"조직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황제를 대신해서 직접 움직여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개인도 있었지요. 어떤 경우에는 상대의 정신을 들여다봐야 할 필요도 있지요. 검술도 일정 경지에 올랐고 어쌔신 스킬과 다양한 마법까지 익힌 극소수의 인물들이 극비리에 양성되어 왔답니다. 하지만 이제 테론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런 인물들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아그레시아의 말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에몬이 그런 존재란 말인가?'

어쩌면 종잡을 수 없는 기도를 풍기는 이유가 다양한 것을 익혀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몬은 그중 가장 최후에 양성된 요원으로 각종 전투 마법과 정신 마법을 집중적으로 익혔어요. 하룬 대장은 비도술은 물론 검술도 경지에 올랐고 정령술까지 사용한다고 알고 있어요. 돌풍 용병대의 많은 대원들이 여러 가지 기술을 동시에 익히고 있다는 이야기도 세간에서는 유명하지요. 그리고 돌풍 마탑은 정통 마법과는 다른 마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주술이나 흑마법의 일부까지도 포함했다더군요."

"제가 마법사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들 말하더군요."

"에몬은 제가 친동생처럼 아끼는 아이에요. 본래 제 개인 호위였지만 이젠 마탑에 돌아갈 일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내 곁에 두자니 너무 위험해요."

이제야 에몬을 자신에게 맡기려는 것이 이해되었다. 고귀한 황녀가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마법사라는 것이 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에몬의 입장에서 보면 마탑 연합의 고위급 마법사들이 득실대는 이곳에 있기에는 위험하다. 무엇보다 흑마법을 사용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흑마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룬은 흑마법을 익힌 자를 돌풍 마탑에 들이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에몬을 용병대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그레시아가 보증하는 인물인 것이다.

"반갑소, 에몬. 앞으로 잘해 봅시다."

하룬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에몬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룬의 손에 잡힌 가늘고 부드러운 손의 감촉과 그를 마주보는 고양이를 닮은 눈 그리고 열리는 얇고 부드러운 선홍색 입술이 기이한 감흥을 주었다. 편평한 가슴 어름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정말 이상한 생각이 들엇을지 모른다.

"하룬 대장, 에몬을 날 대하듯 그리해 줄 수 있나요?"

아껴 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몬, 앞으로 하룬 대장을 날 보듯 대할 수 있겠느냐?"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네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에 이제까지 하룬을 쏘아보던 눈빛이 부드럽게 변한다. 마치 연인을 보는 여인의 눈빛처럼 말이다.

'참으로 기이한 인물이군.'

"나중에 에몬에 대해서 해 줄 말이 있어요."

에몬이 먼저 나가고 뒤따라 나가는 하룬에게 아그레시아가 혼잣말처럼 소곤거렸다.

총사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 하룬은 회의를 소집했다.

펠은 한가롭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졸고 있었고 하룬은 눈매를 좁힌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뭔가 숙고를 하느라 사람들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있는 하룬이 이야기를 꺼내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하룬이 정신을 차렸다.

"아! 모두 왔군요."

"무슨 일입니까, 대장님?"

딜런이 사람들을 대신해서 물었다.

"일단 새 대원을 소개하겠습니다. 에몬!"

하룬의 말에 대원들의 눈은 새로운 얼굴로 향했다. 마치 여성과 남성을 합쳐 놓은 듯 아주 이질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에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강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에몬은 구 테론 제국 황실의 비밀 요원으로 키워졌습니다. 어쌔신 훈련을 받았으며 마법까지 익혔습니다. 그가 익힌 마법 중에는 흑마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원들 중에는 흑마법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분도 있겠지만 앞으로 다크니스를 상대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자리에서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좋은 인재이며 좋은 대원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몬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짝! 짝! 짝!

하룬의 말에 대원들은 박수를 쳐서 환영을 해 주었다.

에몬은 사람들의 반응이 뜻밖이었는지 조금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하룬의 곁에 앉았다.

다시 하룬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논의할 것은 돌풍 마탑에 관한 건입니다."

하룬의 말에 마법단 고문들의 눈빛이 강해졌다.

"아그레시아 총사가 워프 마법진을 넘겨 달라고 부탁해왔습니다. 조건은 마탑 연합에서 돌풍 마탑을 인정하고 그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포머칸 출신 고문들이야 그 의미를 잘 몰랐지만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들이 개발한 워프 마법진이야 순정석이 없으면 가동조차 되지 않기에 받아들여도 큰 부담도 없었다. 신생 마탑이 이렇게 빨리 마탑 연합에 가입할 가능성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웠던 것이다.

두 사람은 다른 고문들을 대표해서 바로 그 제안에 찬성했다. 다만 회의하는 자리이므로 나중에 다른 고문들에게 상세한 설명을 하기로 했다.

곧이어 하룬은 지난번에 논의하던 스페셜 포스 문제로 넘어갔다.

"팀 구성은 어떻게 됩니까?"

아무래도 대원들은 그것이 가장 궁금한 것 같았다. 타니엘라의 물음에 하룬은 미리 생각해 둔 인선을 불러 주었다.

1팀의 경우 딜런과 일룸을 포함한 전사단 고문 4명과 타니엘라와 아슈인을 포함한 마법단 고문 5명, 그리고 자신과 펠이었다. 거기에 에몬이 합류했다.

2팀의 경우 그동안 미노와 수니랑 많이 친해진 레미가 포함되었으며 마샤인을 포함한 전사단 고문 5명과 미루스와 에슬을 포함한 마법단 고문 6명 그리고 성녀 이레안과 돌풍 마탑에 들어온 베이킨이 그 대상이었다.

일단 팀이 정해지자 하룬은 지난번에는 손님들의 방문으로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작전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현재 세 제국의 경우 중대형 상단의 원거리 상행은 거의 멈추었습니다. 따라서 상단에 대한 고스트의 습격도 급격히 줄었습니다. 대신 각종 길드 지부나 신전 그리고 마탑 지부에 대한 습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돌풍 상단을 비롯한 상단들이 원거리 상행을 시작하게 되면 다시 습격이 있을 겁니다."

"그럼 우리는 그 상행에 맞추어 고스트를 맞을 준비를 하면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만만치 않은 준비를 해서 나타나겠지만 놈들의 목적이 상행위를 위축시키고 상단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습격을 해 올 겁니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놈들이 습격할 대상은 알 수 있겠군요. 하지만 레미 조장의 정보에 의하면 놈들은 나타난 후 10분이상을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상행에 모두 동행할 수도 없고 그 문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타니엘라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언급했다.

"상단의 중요 인물들은 신호 발생기를 사지고 상행을 할 겁니다. 파코추 마탑이 만든 신호 발생기는 작동시키면 즉시 위치 좌표에 대한 신호를 보낼 겁니다."

"하지만 미리 좌표를 입력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워프 마법진을 구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좌표를 입력하는 작업은 마법진을 설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 말이 맞다. 좌표를 미리 입력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좌표를 설정해서 입력하는 잡업은 숙련된 마도사라고 할지라도 최소 10분 이상 걸리는 어려운 일이다. 그것 때문에 고스트 측은 습격을 할 때 10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자세하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튼 1팀의 경우 그렇게 움직이고 2팀은 미노와 수니를 이용해서 조금 더 힘이 드는 작전을 수행해야 합니다."

"대장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걱정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습니다."

대원들은 하룬의 말에 불안감을 내려놓았다. 그들이 아는 하룬은 공연한 말은 절대로 하는 인물이 아니다.

"흐흐흐! 드디어 우리 돌풍을 선봉으로 해서 상단 연합의 반격이 시작되는군."

"아니지. 우리 돌풍 상단을 엿 먹인 자들에게 잘못 건드렸다는 걸 확실히 깨닫게 해 주는 거지."

"아무렴 어때. 앞으로 무지 재미있을 것 같으니 됐지."

고문들은 기대 어린 얼굴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동을 한다는 걸까? 좌표가 담긴 신호를 바로 받는다고 해도 10분 안에 그곳으로 가는 건 불가능한데.'

새로 대원이 된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긴장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기존 대원들을 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원래 돌풍 용병대의 분위기가 이런가?'

새 대원들의 머릿속에는 돌풍에서 적응을 하려면 꽤 오래 걸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요새에서 할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하룬은 오랜만에 현실로 나왔다.

펠이 욕심을 부렸지만 아직은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잘못하다가는 둘 다 소멸될 수도 있으니 펠도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캡슐 밖으로 나오니 미리 연락을 받은 벨이 그를 반겼다.

와락!

역시 가족이란 좋은 것이다. 품에 안긴 벨의 등을 쓰다듬는 하룬의 손길에 따뜻한 정이 가득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빨리 나왔네."

"응. 아무래도 할 일이 많고 한동안 시간을 내지 못할 것 같아서 나왔어."

"헤헤헤. 오빠 냄새 참 좋다!"

몸은 이미 숙녀가 다 되어 가고 있는 벨이지만 하룬 앞에서는 아직도 곧잘 어리광을 부려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하룬은 벨을 허벅지 위에 앉히고 요즘 기지 사정을 물었다.

"새로 유입된 사람들 때문에 기지가 아주 소란스러워. 좋게 말하면 활기가 가득하고 나쁘게 말하면 시끄러워."

"그게 무슨 소리야?"

"암무를 비롯한 아우터들과 인공수정체들 그리고 기존 주민들이 은근히 세력을 만들어서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거든. 서로 경쟁일 하니까 일 처리도 빠르고 성과도 좋은데 난 아무래도 좀 걱정이 돼."

벨은 이제까지 가족처럼 지내 온 기지 식구들이 출신별로 뭉치는 현상을 우려하고 있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 휴먼들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경쟁이 격화되지 않도록 수뇌부들이 좀 신경을 써야겠지."

"안 그래도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얼마 후면 정식으로 기지를 시티로 개명하고 조직 체계도 새로 마련할 거야. 그런데 오빠는 정말 아무 욕심도 없는 거야?"

벨이라면 자신의 성격이나 생각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것을 보면 누군가 그의 의중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고픈 모양이다.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난 전면에 나서 사람들을 이끌기보다는 조용히 뒤에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 하긴 나도 주목을 받는 게 별로 좋지는 않아."

벨은 하룬을 이해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내성적인 성향을 가진 하룬은 나서기를 싫어했다. 그리고 커 오는 내내 부족한 것이 많았기에 얼핏 보면 욕심이 많은 것 같지만 일정 부분만 만족되면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 하룬이다.

"돌풍 기지는 우리 셋이 만들었지만 그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힘겨운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야. 만약의 경우라도 난 벨과 아리 그리고 이 중앙 기지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

"헤헤! 실은 나도 그래. 그런데 그 작은 소망조차도 바쁜 누구 때문에 제대로 이룰 수 없어서 그렇지."

"하하하! 미안해. 이제 정말 얼마 후면 우리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야."

하룬은 비욘드의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원하고자 하면 캡슐과 접속하여 하룬의 의식에 기생하여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벨이지만 그러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비욘드의 세계를 알고 싶어 했기에 수시로 그곳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좀 불합리한 것 같아."

"뭐가?"

이야기를 듣던 벨의 뜬금없는 말에 하룬이 물었다.

"그렇잖아. 이방인들이 아니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벨은 마수들의 난동과 고스트로 인해 야기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방인들이 없었더라면 생기지 않을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니.

"하지만 이방인들이 없었다고 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야."

"그래도 다크 프린스라는 작자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했잖아. 산악 부족들도 그렇고. 난 왠지 그 세계의 주민들이 불쌍해."

"그렇다고 이방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하룬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추었다. 뭔가 짜릿한 것이 머릿속을 울렸던 것이다.

"있다! 그런 방법이 있어!"

고스트는 몰라도 다크니스는 이방인들이 책임지게 만들 방법이 있는 것이다.

"아즈만!"

-네. 마스터.

"지금 내 생각을 읽고 판단해 봐."

아즈만은 하룬의 뇌파를 통해 그의 생각을 읽고 내용을 검토했다. 곁에 있던 벨도 그 일에 끼어들었다.

-이방인들의 실력은 빠르게 성장해서 현재 100위권까지 초특급 랭커들은 소드 마스터와 6서클에 육박하고 있어요. 레벨이 공개된 유저들 중 10,000위권의 하이랭커들도 이미 중급 익스퍼트와 4서클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부족하나마 다크니스를 상대할 전력이 될 거에요.

"그렇지?"

-네. 그곳 세상의 강자들과 연수한다면 충분히 다크니스를 상대할 수 있어요.

"내 판단으로도 가능한 것 같다. 그렇게 되면 가즈 로드는 충분히 다크니스를 감당할 수 있겠어."

벨도 같은 의견이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해야겠다."

하룬은 타르 분지에 대한 비밀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 유저들이 원하는 기후조절 마법서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소문이야 언제나 불확실한 법이 아닌가.

"참, 아리는 지금 어디에 있어?"

"바다에서 일은 다 보았고 애석하게도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당분간은 못 돌아올 것 같아."

"다른 일?"

"응. 비욘드에 푹 빠진 바쁘신 오빠를 빼고 우리 셋이 의논을 해 봤는데 앞으로 돌풍 기지의 미래와 오빠가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전 세계적인 도로망을 확보하기로 했거든."

"도로망이라니?"

"아무래도 돌풍 기지가 현 세상을 변화시키는 축이 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유니온과 통하는 도로망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너. 때문에 아리 언니가 그 일을 맡았고."

"그건 아리와 몇 명의 대원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그렇기는 하지만 지하 800미터 위치에 건설된 새로운 지하도로를 찾았어. 지진 때문에 붕괴된 구간이 많아 버려진 도로망인데 아리 언니와 아즈만이 복구한 타이탄 워커들과 새로 태어난 사이보그 대원들의 능력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모두 정비할 수 있을 거야."

하룬은 정말 고마웠다. 자신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번 기회에 운을 떼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걸 미리 파악하고 움직여 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쳇! 그렇게 아리 언니만 걱정하지 말라고. 나랑 아즈만도 얼마나 바쁘게 사는 줄 알아? 돌풍 기지의 참모 역할은 기본이고 거기에 더해 데드 벙커의 대원들과도 수시로 연락해야 하고 각종 사안에 대해서 시뮬레이션도 해야 한단 말이야."

벨은 하룬이 감동을 받아 잠시 입을 닫고 있는 것을 오해한 모양이다. 하룬은 입술을 삐죽 내민 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벨아. 아리도 고맙고 아즈만도 너무 고마워. 부족한 나 때문에 셋이 너무 고생을 하는 것 같아."

사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휴먼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겠다는 하룬의 꿈 때문에 셋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다.

"칫!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오빠의 꿈이 바로 우리의 꿈인걸. 우리 셋과 오빠는 같은 운명이라고."

"그래, 알았다. 내가 사과할게."

하룬은 가슴이 너무 따듯했다. 이렇게 자신을 믿고 아끼는 이들이 곁에 있기에 일의 성과를 떠나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오빠의 클론도 복제해 두었으니까 나중에 동화 훈련도 해야 할 거야."

"엉?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예전에 내 대역을 만들어 두었던 건 기억하고 있어?"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데드 벙커의 일도 그렇고 요즘 아리 언니가 좀 불안한가봐. 영혼이 자리하지 않은 오빠의 복제체를 만들어 두라고 부탁하더라고. 나중에 오빠가 의식 분리와 동화 수련을 하면 그 복제체를 분신처럼 움직일 수 있으니까 꼭 하도록 해."

클론은 알고 있었지만 영혼이 없는 복제체는 조금 다른 개념이라 한 번에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알았어. 참! 나중에 다시 올 때는 네 동생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겠다."

"동생?"

"응. 펠이라고 내가 전부터 말했던 녀석."

"아! 그 싸가지?"

"그래. 그 녀석. 이번에 각성을 했는데 공간 이동 능력이 대단해서 얼마 후면 캡슐과 상관없이 이 세상으로 올 수 있을 것 같다."

"후아! 정말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응. 나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조금더 능력이 올라가면 가능할 것 같다. 펠이 너와 아리 그리고 아즈만을 아주 많이 만나고 싶어 해."

"정말 신기하다. 정령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어."

벨도 기대가 되는지 눈을 반짝거렸다.

-마스터!

"응, 아즈만."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끝났어요.

"뭐였지?"

현실에 올 때마다 부탁한 것이 많아 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하룬이다. 그 목소리에 미안함이 여실하게 드러나서 그런지 대답을 하는 아즈만의 목소리가 따듯했다.

-적색 선전을 통해 기존 유니온의 체제 붕괴 가능성에 대한 마스터의 말씀대로 시뮬레이션을 진행해 보았는데 상당히 가능성이 높았어요.

"그래? 어느 정도나?"

-배리어 축소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거의 가능성이 없었는데 지금은 적색 선전의 내용에 따라 최대 60%까지 올라갔어요.

다른 수단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기형적으로 고착된 유니온 체제에 대한 적색 소문을 퍼트리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가능성이라니.

-단순히 유니온 체제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 그리고 GPC에 대한 악의적인 내용이 포함된다면 10년 안에 뭔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거에요.

"어휴! 다 좋은데 시간이 문제로군."

10년이면 너무 길다. 아즈만의 분석으로는 앞으로 배리어가 30년을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기존 질서의 붕괴와 더불어 창조적이고 효율적인 새 질서가 바로 선다고 해도 휴먼들에게는 겨우 20년의 시간이 남을 뿐이다.

그 시간으로는 배리어를 복구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확보할 수 없다. 아즈만의 능력을 100% 가동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최대한 빨리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를 정리해야 해.'

GPC야 그 두 세력과는 태동 자체가 다르니 변화의 물꼬를 틀고 민심의 향방에 따라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였다. 세력으로 따지면 바위에 달걀을 던지는 꼴이지만 다행히도 자신에게 기회가있다.

사실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불사와 재생의 묘약을 위해 적어도 글로리 가이아의 수뇌들이 모여든 데드 벙커를 처리할 수 있다면 꿈을 빨리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룬의 추측이 맞아떨어져 휴면 가드의 수뇌부들마저 그곳에 있다면 더욱 그 시간은 빨라질 것이다.

아무튼 머지않은 장래에 휴먼들의 미래를 건 아마겟돈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다. 책임감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세운 의지이며 그 의지가 아마겟돈이다.

하룬은 더 민첩하고 지혜롭게 움직여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