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1화.새 대원들 (252/278)

 새 대원들 

뫼비우스는 몰려드는 사람으로 인해 늘어난 건물들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다람쥐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하룬을 한곳으로 안내했다. 요새 성벽과 붙은 삼 층 건물의 가장 위층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용병들이 장기 투숙을 하는 곳인 듯 무려 열 개나 되는 방들이 좁은 복도를 마주하고 있었다.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 복도는 지저분했고 고약한 냄새까지 났다.

"이곳입니다."

"휴유!"

방문에 새겨진 '3' 이라는 숫자가 희미해질 만큼 낡은 여관의 잔은 방에 묵는 신세로 전락한 성녀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파 왔다. 빛의 교단 성녀로서 희생적이고 고결하게 살아왔던 인생의 여정이 이런 곳으로 향하다니.

똑똑!

"누구세요?"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녀의 목소리가 맞았다.

"하룬입니다."

"네? 하……룬 대장?"

조심스럽게 열리는 낡은 문틈 사이로 윤기를 잃고 날리는 성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파문을 당할 때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탄력을 잃은 뺨과 턱에 이어 상심으로 빛을 잃은 눈이 그를 향했다.

"어떻게? 어, 어서 들어오세요."

정말 하룬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확인한 성녀가 문을 열었다. 늘 '베부' 가루로 엷게 화장을 하고 있었던 얼굴이었기에 무척이나 생소하게 보이는 성녀였다. 초췌한 민낯이었지만 이상하게 생경한 느낌은 없었다.

"전 지부 사무실에 가 있겠습니다."

뫼비우스는 그를 보고 멈칫하는 성녀의 반응을 보고 자리를 피했다. 자신이 성녀라도 이렇게 나락에 떨어졌을 때는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을 같았던 것이다. 그래도 하룬 대장을 반기는 것을 보면 자신이 모시는 대장이 다른 사람들이게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어 돌아서면서도 마음은 뿌듯했다.

하룬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밀짚 위에 더러운 시트를 씌워 만든 침대 하나와 작은 옷장 그리고 낡은 나무 의자 한 개와 물주전자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실내였다.

"앉……으세요."

의자를 가리키는 성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창피함,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물질적인 것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성녀였다.

하룬은 그냥 서서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녀가 혹여 신경을 쓸까 봐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데빌 산맥 깊숙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성녀님의 소식을 오늘에야 들었습니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이제 전 성녀가 아니에요. 이레안이라고 불러 주세요."

의자와 마주한 침대 끝에 앉은 이레안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룬은 눈을 들어 성녀를 응시했다.

이렇게 똑바로 성녀를 보는 건 처음이다.

파리한 안색과 윤기를 잃고 이리저리 뭉쳐진 머리칼 그리고 눈 밑에 짙게 자리한 다크서클로 인해 병자처럼 보이는 성녀였지만 그녀의 호수처럼 큰 눈과 맑고 깊은 눈빛은 하룬을 통채로 담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 서른이 조금 넘었을까?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성녀를 보면서 한 번도 나이를 추측해 본 적이 없었다.

"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성배 이야기였다. 성녀가 교단에서 축출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성배를 분실했다는 것이었다.

"소용이 없으니까요. 타락해 버린 그들에게 성배를 맡겼다가는 신성력이 그랬듯 언제 어떻게 없어질지 모르니까요. 성경에 나와 있듯 타락한 사제들은 마계의 마물보다 더 위험한 존재랍니다. 전 처음부터 성배를 제대로 지킬 수 있고 성수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분은 하룬 대장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어요."

확실히 성녀의 마음은 교단을 떠났다. 늘 온화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날이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교단으로부터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어요. 날 쫓아내려고 작정항 이상 그 어떤 변명도, 그 어떤 이유도 그들을 납득시킬 수 없어요. 교단의 율법은 늘 그렇게 죽어 버린 교리를 이리저리 갖다 붙여 희생자를 만들죠. 오랫동안 보아 왔스면서도 그걸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신의 의지는 글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권력과 탐욕에 찌들어 잇으면서도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그들은 죽을 때까지도 알지 못하니까요."

성녀의 눈에 생소한 감정이 떠올랐다. 지독한 분노와 자기 혐오 그리고 연민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성녀의 눈은 그녀를 1명의 여자로 보게 만들었다.

'아름답구나!'

이리한 일이다. 같은 사람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 있는지.

이제야 그녀의 나이가 제대로 보였다. 20대 중반 정도에 눈을 제외하고는 특별하게 예쁜 구석은 없는 이목구비와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성녀 이레안은 지금 지치고 힘든 얼굴 이었다.

"예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녀가 이 꼴이 되었으니 그 역시 좋은 상황은 아닐 것이다.

"저와 함께 파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이 세계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가 사는 세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룬은 예힘의 절망감을 짐작했다. 이전 종말 시대에도 진정한 사제들은 힘과 권력에 취한 사제들에게 밀려 제대로 뜻과 의지를 펼쳐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한탄하며 스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고 현실에서 만나 봐야겠구나.'

절망이 휴먼을 무너뜨리는 것은 수없이 보아 왔던 하룬이다. 이럴 때는 뭔가 새로운 꿈을 꾸게 해 주는 것이 가장 뛰어난 치유책이다.

예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하룬은 다시 성녀를 보았다.

"이제는 뭘 하고 싶습니까?"

교단의 발표로는 신성력까지 잃어버렸다고 하니 더욱 절망적인 상황일 것이다.

"용병이 되고 싶어요."

"네?"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하룬이 멍해졌다.

"용병이 되어 보려고요. 신성력은 봉인되었지만 치료술은 그대로거든요."

교단 측에서 어떻게 그녀의 신성력을 봉인했는지 궁금했지만 그보다 치료술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이 일었다.

"치료술이라고요?"

"네. 원래 신성력은 쓰기 힘든 힘이라 가벼운 병증은 약초로 그리고 심각한 병증은 수술로 치료하거든요. 대대로 성녀에게 내려오는 약초술과 치료술이라면 1명의 용병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일이 세상을 여행하는 것과 가진 것 없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불쌍한 민초들을 치료하는 거였거든요."

흥미로운 일이다. 만인의 우러름을 받으며 살아오던 성녀가 남몰래 꿈꾸던 일이 치료사라니 아니, 용병이라니 기가 막힌다. 사실 요즘에서야 용병이 조금 인정을 받고 있지만 통합 길드가 생기기 전에만 해도 용병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느 용병 단체라도 대륙 전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빛의 신전 총교에서 축출한 성녀를 치료사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니, 이곳 마츠루트 요새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신전들과 이곳의 사정이 급박하지 않았더라면 한적한 시골의 수도원에 갇혀서 평생 나오지도 못하가 살다가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이 성녀의 운명이었다.

"후후! 어렵겠지요. 빛의 신전을 무시할 수 있는 용병단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나 혼자 다니는 건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고요."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하룬은 어린 나이에 성녀가 되어 제대로 된 삶도 살지 못하고 평생 낮은 곳에서 고통에 신음해 온 이들을 위해 살아온 자조 어린 그녀의 씁쓸한 미소에 마음이 울컥해졌다.

"나와 함께 일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녀가 살아온 이력을 몰랐다면 모르되 잠시 동행까지 했던 하룬이 그녀의 곤란한 상황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진심입니까?"

"네. 정식으로 영입하는 겁니다, 이레안."

이레안은 대답 대신 하룬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그의 내심을 탐색이라도 하는 듯.

"우리 용병대에는 헤니라는 뛰어난 치료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방인이고 그쪽 세상에서도 할 일이 많아 최근에는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레안이라면 헤니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물론 더 많을 기여를 해 줄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룬의 말은 사실이다. 헤니는 최근 전혀 비욘드에 접속하지 않고 있다. 그녀가 맡은 기지의 일만 해도 너무나 바쁘기 때문이다.

대를 이어 내려온 수준 높은 치료술과 약초술을 익히고 이미 수없이 행한 이레안의 경지는 1급 치료사일 테니 돌충으로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괜찮겠어요?"

빛의 신전이 가진 영향력과 압력을 고민하는 것이리라.

하룬은 어깨를 으쓱하며 드물게 짓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돌풍 용병대는 그 어느 나라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어느 교단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요. 또 우리를 무시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돌풍 용병대는 국가 단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하룬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이레안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환희의 미소와 함께 작은 입술이 열렸다.

"치료사 이레안이 대장님을 뵙습니다."

"한 가족이 되어 기쁩니다, 이레안 대원! 앞으로 잘해 봅시다."

하룬은 어설프게 내미는 이레안의 팔뚝에 자신의 팔뚝을 밀착했다.

"후훗! 정말 용병이 되었네요. 날 임신시키고 어머니를 떠나 아무 소식도 없었던 비정한 아버지 때문에 싫어하면서도, 자유가 없는 성녀 생활을 하면서 언제부터인가 꼭 용병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남들이게 성녀가 아니라 이레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어요. 드디어 내 꿈을 이뤘네요. 고마워요, 대장."

처음은 웃음으로 시작했던 그녀의 말은 나중에는 흐느낌에 섞여 거의 들리지 않았다.

뭉클!

이레안은 여러 감정에 휩싸여 감당할 수 없는지 팔뚝을 마주 대고 있던 하룬에게 안겨 들었다.

후으읍.

하룬은 그녀의 행동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벼락에 맞은 것처럼 그녀를 안은 채 굳어 버렸다.

'왜?'

설마 성녀가 자신의 품에 안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심장이 맹렬히 뛰기 시작했다.

'흑! 이건 정말 곤란하군.'

분명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행색인데 왜 이리 좋은 향기가 난단 말인가? 뜨거운 여름날 맘껏 햇빛을 받으며 자라는 풋사과가 뿜어내는 것 같은 엷은 체향이건만 들이마신 것만으로도 뇌가 곤죽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풍만은커녕 깡말라 뼈가 느껴지는 그녀의 몸인데 그의 몸에 닿은 부분에서는 왜 이리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단 말인가?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었나?'

하룬은 성녀를 여인으로 느끼는 자신에게 실망감을 느끼는 한편 아리에게 강렬한 죄책감을 느꼈다. 이미 한 여인에게 마음을 준 이상 이렇게 흔들리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에 대한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여인으로 느끼는 순간 반사적으로 아리를 떠올린 하룬은 그녀를 밀치려고 하다가 내심 한숨을 내쉬며 힘을 뺐다. 그랬다가는 이레안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 싶었다.

하룬은 이레안을 안고 한참을 그렇게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이레안은 감정이 폭발했는지 하룬의 품에 안겨 한참 동안 방어구 앞섶을 적시고는 수줍은 얼굴로 벗어나려고 했다.

"잠깐만."

하룬은 아공간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이레안의 얼굴이엇지만 묘하게도 전혀 더럽다고 느낄 수 없었다.

손수건을 사양하지 않고 자신이 운 흔적을 닦았지만 여전히 물기에 젖어 있는 이레안의 눈이 한참 후에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대장. 정말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다시는 울지 말아요. 앞으로 이레안은 나를 비롯한 동료들이 지켜 줄 테니까."

"후훗! 고마워요. 정말 마음이 든든해졌어요. 빨리 동료들을 만나 보고 싶어요!"

비록 눈물젖은 얼굴이지만 이레안은 오랜만에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돌풍 용병대 전용 방어구를 입은 이레안은 묘하게 어울렸다. 강렬하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방어구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결한 분위기를 희석시킨 탓인지 예전에 그녀를 만났던 이라고 해도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하룬도 그사이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아까 느겼던 혼란도 어느덧 사라져 편한 마음으로 그녀를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룬의 방에서 목욕을 하고 나온 이레안은 미리 준비한 방어구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더니 무척 만족한 모양이다.

"끼얏! 이 방어구 정말 대단해요."

마치 어린애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놀려 보며 방어구가 준 신체 능력의 변화를 몇 번이고 확인한 그녀는 하룬을 졸라 대원들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했다.

특별한 손님의 출현에 수련을 핑계로 숙소를 떠나지 않고 있던 대원들이 생소한 인물을 데리고 나온 하룬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의 눈은 방어구를 입고 있는 새로운 인물에게 향하고 있었다.

짓누르고 있던 마음고생에서 벗어난 이레안은 큰 눈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단발에 깨끗한 피부를 지니고 있어서 그런지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거기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사람들을 불러 소개를 하니 대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굽니까?"

티노가 다른 대원들을 대신해서 물었다.

"새 대원입니다. 이름은 이레안이고 치료사입니다. 앞으로 잘 대해 주십시오."

"아!"

최근 헤니가 접속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대원들은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 영입한 대원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레안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분은 우리 용병대의 부대장이신 티노요. 그리고 이분은……."

하룬은 대원들을 일일이 소개시켜 주었다. 티노를 비롯한 몇 사람들은 전에 이레안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썰미가 뛰어난 티노가 못 알아 챘다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원들ㅇ에게 인사를 하는 이레안은 생기가 넘쳐서 그걸 보던 하룬은 그녀가 얼마 전까지 의기소침했었다는 사실을 잠시 의심할 정도였다.

'어느 게 이레안의 원래 모습일까?'

하룬은 어느새 도네이스를 비롯해서 비교적 젊은 대원들과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성녀라는 가면 속에 숨겨 왔던 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었다. 그녀가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딜런이 이레안을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하룬에게 말했다.

"좋은 아가씨군요."

"네. 좋은사람입니다. 마음도 착하고. 치료 쪽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방어 능력이 없으니 딜런 경이 좀 보살펴 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런데 어딘가 눈에 익은데……."

역시 딜런이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딜런이라면 나중에 알려주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티노가 다가왔다.

"일단 레미하고 같이 방을 쓰면 될 것 같습니다. 방어구야 대장님이 직접 챙기셨고 나머지 개인 물품은 도니가 챙길 겁니다. 그런데 정말 해맑은 성격의 아가씨로군요. 첫 만남에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든데."

역시 티노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느새 도네이스를 통해 이레안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합류한 것을 알아낸 모양이다.

"부대장이 신경을 써 주십시오. 최근에 힘든 일이 있어서 한동안은 여러 사람의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룬은 그런 티노가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있어 하룬이 대원들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아직은 대원들에게 이레안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하룬은 사실을 밝히려다가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사실은 자신이 이레안에게 강하게 이끌리는 것을 본인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새벽 수련을 마친 고문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 함께 시장에 갈 준비를 갖추었다. 시장에 간 첫날 마음에 드는 무기를 찾지 못한 이들이 많았기도 했거니와 치료사로 합류한 이레안이 살 것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오늘만큼은 딜런도 시장에 가기로 했다. 그 역시 개인적으로 구할 것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딜러 대신 타니엘라가 숙소에 남으려고 했지만 하룬은 외출할 계획이 없었기에 그를 설득했다.

"형, 나 용동 좀."

다들 돈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펠은 하룬에게 용돈을 요구했다.

"부대장에게 달라고 해."

평소에도 돈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하룬이다. 하지만 펠은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티노 아저씨가 지출하는 건 공적인 돈이고 난 개인적인 용도로 필요하단 말이야."

"그래?"

하긴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티노가 돈을 내는 상황이니 모두들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거나 쓸 물건을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아공간에 돈이 될 진귀한 보물이 그득한데 자신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는 펠이 무척이나 기특해 보였다. 처음 싸가지라는 이름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인간체였으면 비 오는 날 먼지가 날 때까지 패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룬은 아공간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잠깐 이쪽으로 모이세요!"

하룬의 말에 다들 하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여러분들도 가족들과 지인들이 있고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있는데 무조건 곰금을 들먹였으니 무척 골란했을 겁니다."

사실 산악 부족 출신의 고문들의 경우 연봉에 해당하는 보수를 안 받기로 고집했다. 그래서 그 대신 그들의 연봉에 해당하는 물품을 해당 부족에게 더 지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에버그린에서 막 나왔을 때였고 지금은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돈이 거의 필요 없는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산악부족들 간에도 상거래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으며 물품 거래를 위해 개인적인 자금을 모을 필요성이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앞으로 고문들에게는 연봉과는 별도로 품위 유지비로 1년에 두 번으로 나누어 1,000골드를 지급하겠습니다. 고문들께서는 우리 돌풍 용병대의 얼굴이니 앞으로는 외관이나 주위 분들에게 신경을 더 쓰도록 하십시오."

하룬은 고문들에게 일괄적으로 500골드를 지급했다.

"허허! 고맙습니다, 대장님. 역시 우리에겐 대장님밖에 없습니다."

내심 이런 돈을 바라고 있었는지 당장 아슈인 고문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감사를 표시했다.

"이레안은 상급 치료사이니 고문들과 동일한 연봉 체계를 적용하겠습니다."

하룬은 이레안에게도 품위 유지비가 있어야겠지요?"

"그럼요. 꼭 필요해요! 초년에 고생을 심하게 한 탓에 원판이 좀 떨어져서 많이 꾸며야 하거든요."

"어허! 이 사람이!"

하룬의 말에 도네이스가 반색을 하자 티노가 짐짓 성난 얼굴로 그녀를 째려보았다. 하룬은 웃으면서 티노에게도 500골드를 주었지만 도네이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돈을 채 갔다. 티노는 울상이 되었지만 안타까운 내색은 하지 못했다.

"레미와 베이킨은 도네이스처럼 아직 품위 유지비를 받을 수 없지만 이번에는 내가 용돈을 주지."

하룬은 레미와 베이킨 그리고 펠에게 각각 50골드를 주었다. 무척 큰돈이긴 했지만 둘 다 영민하니 허튼 곳에 쓰지는 않을 것이다.

"쳇! 더 줘, 형!"

"부족한 거야?"

"그럼 나 지금 입고 있는 옷밖에 없다고. 방어구도 다 큰것밖에 없어서 수선도 해야 하고 나도 살 게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내가 생각을 못했구나."

생각해 보니 펠이 필요한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티노 부부가 따로 챙기기는 하겠지만 본인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고 싶을 것이다.

더구나 이 비욘드의 세상은 현실과 달리 의복이나 방어구는 물론 수선에 들어가는 가격이 무척이나 비쌌다. 하룬은 펠이 시장에서 군것질이나 작은 소품을 사기 위해 용돈을 달라고 한 줄 알았던 것이다.

펠은 결국 200골드를 더 받고서야 웃으면서 시장으로 향했다.

대원들이 숙소를 떠난 후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바로 친위 기사단 부단장인 일룸이었다. 일전에 이벨린을 수행했었고 하룬 일행과 잠시 동행하기도 했던 일룸은 흰 머리카락과 수염에 검은 눈썹을 가진 인상적인 한 노인을 대동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은 아닌지요?"

일룸이 전과는 달리 정중하게 인사를 해 왔다.

"아닙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하룬 대장의 얼굴이 그렇게 잘생겼는지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런 얼굴을 왜 가리고 다니셨습니까?"

첫 만남부터 서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룬이 반갑게 맞아 주자 일룸이 활짝 웃었다.

"하하!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이분은……."

"자네가 바로 돌풍 용병대의 하룬 대장이군. 전하께는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었네. 난 전 친위기사단 단장 마샤인 폰 페트로 아사임이라고 하네."

마샤인은 딜런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경지는 비슷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는 소드 마스터에 오른 터라 다른이의 경지를 어느 정도는 엿볼 수 있게 된 하룬이다.

"아! 그렇습니까?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돌풍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하룬이라고 합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하룬은 두 사람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하룬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마샤인의 날카로운 눈길이 계속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알았지만 굳이 자신의 경지를 숨기지는 않았다.

다만 자리에 앉자 마샤인의 눈빛이 달라진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기도를 재어 본 것 같았다.

차를 권한 하룬은 한 모금을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일룸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하룬은 가볍게 안부를 물은 것에 불과했지만 일룸의 얼굴은 대번에 안 좋게 변해 버렸다.

"그게…… 대장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그만 해직되고 말았습니다."

"아!"

하룬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미안함의 탄성을 질렀다. 일룸은 황실의 요인을 경호하는 친위 기사단의 부단장이다. 황녀가 황궁에서 실종되었으니 그에게는 당연히 큰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일 때문에 하룬 대장을 찾아왔습니다."

일룸은 하룬이 사과의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직설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무슨……?"

"실은……."

일룸은 주저하는 바가 있는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마샤인이 입을 열었다.

"하룬 대장, 우리는 이제 야인野人이오. 우리를 용병으로 받아 주시오."

그의 실력을 알아봐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정한 것인지 당장 말투가 바뀌었다.

"네에?"

하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샤인이 하는 말의 저의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친위기사단의 임무는 황제 폐하를 비롯한 황실 요인의 경호와 호위였소. 그런데 황궁에서 황녀 전하가 납치되었으니 우리는 직무를 유기한 셈이지. 당연히 해임될 수밖에 없었소. 사실 평생 지하 감옥에 유페가 되거나 만인 앞에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폐하께서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주셔서 야인으로 풀어 주셨소."

"그랬군요."

"하지만 주군을 지키지 못한 불명예를 안은 우리가 돌아갈 곳은 아무 데도 업소. 가족이야 우리가 없어도 가문이 여전하니 걱정 없이 살 테지만 우리는 불명예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그 어디서든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는 입장이오. 해서 고민을 했소."

"단장님과 전 이번에 책임을 통감하고 사임한 기사들을 수습해서 따로 이벨린 전하를 찾기로 했지만 평생 검만 익혀서 머리가 굳은 탓인지 좋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은 돈이 많거나 가문의 자금을 쓸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니 의뢰를 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이번에는 마샤인 대신 일룸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전하를 찾을 방법을 모색하던 우리는 무작정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후로트 국장을 만날 수 있었고 이곳에 많은 정보 길드가 모여 있다는 것을 듣고는 따라왔지요. 그런데 어제 후로트 국장이 말하길 돌풍 용병대가 이번일을 맡았으니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하께서 무사히 귀환하는 걸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안심이 되질 않습니다. 해서 고민 끝에 돌풍 용병대의 대원으로 들어가기로 작정을 하게 된 겁니다."

"으음."

하룬은 이제야 마샤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참으로 기사다운 이들이구나.'

이미 해직까지 당한 마당에도 주군에 대한 책임감에 평생 하잖고 천하다고 치부하던 용병까지 될 생각을 한 두 사람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두 사람은 정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생을 많이 한 듯 초췌한 모습이었다. 정기적으로 손을 봐야 하는 풀 플레이트 갑옷도 여러 곳이 녹슬어 있었고 눈빛도 빛이 바래 있었다.

"비록 그렇게 마음을 정했지만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따로 행동할 생각까지 했었소. 하지만 대장을 직접 만나 보니 소문이나 이벨린 전하께서 하신 말씀 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었소. 받아만 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겠소. 다만 황녀 전하를 구출하는 일에는 꼭 참여하게 해 주시오. 난 보수 따위는 필요 없으니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평생 개처럼 부려도 좋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허어, 참. 오늘은 돈이 엄청나게 나가는 날인가 보다.'

하룬은 고민하지 않고 두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드 마스터 중급과 중상급의 실력자들이 스스로 찾아들었는데 그걸 내치면 바보지!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인데.'

하룬은 말없이 마법주머니에서 미스릴 바를 꺼냈다. 족히 일만 골드는 나가는 묵직한 미스릴 바를 그들 앞으로 하나씩 밀었다.

"무슨?"

두 사람은 하룬의 행동에 의아한 얼굴이었다.

"환영합니다, 두 분. 지금 이 시간부로 두 분은 돌풍 용병대의 전사단 고문이 되었습니다. 연봉은 첫해 1만 골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기별로 지급하는 품위 유지비 입니다."

하룬은 추가로 500골드를 꺼내 두 사람 앞으로 밀어 주었다.

"아, 아니오. 이런 건 필요 없소. 아니, 필요없습니다."

마샤인은 하룬이 거부할 거라곤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무려 1만 골드에 해당하는 미스릴 바를 대뜸 연봉이라면서 내놓을 줄은 몰랐다. 또한 품위 유지비라니.

'친위 기사단의 단장이엇을 때 내 연봉이 8,500골드였는데 용병 초임이 1만 골드라니. 도대체 이 용병대는 뭐야?'

영지체가 철폐된 파이린 제국이기에 연봉 개념을 알고 있는 마샤인과 일룸이기에 적잖이 놀랐다.

"그럴 수는 없지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용병이란 자신의 생명으로 의뢰를 수행하기에 위험수당이 꽤 쌥니다. 더구나 우리 돌풍 용병대는 어려운 의뢰만 처리하기에 위험도는 더욱 높지요. 두 분은 당연히 받을 돈을 받는 겁니다."

"하, 하지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받아들인 의뢰 중 하나는 1억 골드짜리입니다."

"헙!"

"흐업!"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비록 고위 귀족가에서 태어났고 그 정도 액수는 꿈에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와 질 좋은 무기 그리고 일상 생활용품은 정기적으로 무상 지급될 겁니다. 다만 마법 배낭과 같은 물품은 개인적으로 구입하기 바랍니다. 두 분도 바로 임무에 투입될 테니 무기 손질을 비롯해서 개인 물품을 구입하기시 바랍니다. 이번에 받아들인 두 의뢰의 내용은……."

마샤인과 일룸은 미처 돈을 챙기기도 전에 고스트에 관한 건과 이벨린 황녀에 대한 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금방 돌풍 용병대원으로서 한발을 내딛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