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가즈 로드(God's Road) (235/278)
  •  가즈 로드(God's Road)

    럼과 레이스가 들뜬 얼굴로 사무실을 나가자 하룬은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휴우! 이런 일은 알아서 하면 안 되나?'

    뭔가 책임질 일을 결정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무작정 사인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작은 일도 고려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지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필요한 곳은 많았다. 효율적으로 배분하지 않으면 소외된 부서나 주민 들은 불만을 가지게 될 것이고 기지 분위기는 엉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드디어 마지막 결제를 끝낸 하룬은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몸을 풀었다.

    '오랜만에 현실에서 수련을 해야겠구나!'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하룬은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룬은 홀가분하게 혼자 기지 밖으로 나갔다. 기지의 수뇌부들은 물론이고 전투조원들까지 새로운 생활공간을 만드는 작업에 투입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지 밖은 오후인데도 뜨거운 햇빛과 함게 부드러운 열풍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는 호수에서 연유한 비릿하면서도 진한 물냄새와 인근 숲과 초지에서 흘러나온 짙은 초목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

    "후으읍!"

    깊게 대기를 들이마신 하룬은 다른 때와는 달리 대기에 섞인 자연의 기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기(氣)의 실체는 믿음 속에 존재한다. 즉 그 실체는 객관적으로 보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기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기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그것도 기를 체내에 상당한 양으로 축적했을 때에나 관조를 통해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의 존재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기이한 감흥에 젖은 하룬은 메신저 스킬을 수련하는 대신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마나 플로를 운행했다. 호흡과 함께 체내로 유입된 자연의 기에 자극을 받은 하단전의 기는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하룬의 의지를 받아들여 실처럼 풀리기 시작했다. 꼬리뼈를 거쳐 척추를 타고 올라가는 기의 운행은 평소와 같았다. 하룬의 의식은 혈도를 따라 움직이는 한편 단전에도 머물러 있었다. 비욘드의 수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의식을 나누게 된 것이다.

    '이상하네.'

    단전의 상태가 기이했다. 평소에는 공처럼 둥글게 뭉쳐 있어야 할 기가 굴곡이 있는 반원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뭔가가 빠진 모양이었다.

    '뭐가 빠진 거지?'

    하룬이 그걸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슈슈슛!

    갑자기 온몸의 피부조직이 모공을 열었다. 그리고 모공을 통해 물밀 듯이 유입되는 새로운 성질의 기가 하룬을 놀라게 만들었다. 끈적거리면서도 서늘하고 폭발적인 힘을 가진 새로운 기는 어디서 몰려든 것인지 호흡은 물론이고 온몸을 통해 하룬의 몸 안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혈도들로 몰려들었다.

    '흐억!'

    한꺼번에 몰려든 이질적인 기가 합류하자 혈도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룬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순간적으로 초과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온몸이 터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왜?'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하룬은 이를 악물고 좁은 혈도를 가득 메운 기를 운행시키기 시작했다.

    툭! 툭!

    혈도와 연결된 세혈들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룬의 오공(五孔)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룬은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알수 없지만 자신의 위험한 상태는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잘못하면 죽는다!'

    하룬은 긴장했다. 그의 의식은 몸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까지 확장된 상태에서 오공여서 피가 나오고 풍선처럼 부풀은 몸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험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은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오랜수련으로 단단해진 그의 혈도는 이질적인 기를 힘겹게 수용해서 전신을 주천하고 있었다. 그 선단이 하단전에 가까워지자 하룬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과 함께 하룬은 새로운 기가 무척 친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의 성질은 이제까지 축적한 것과 달랐지만 묘하게 익숙했다. 잠시 생각을 하던 하룬의 눈이 커졌다. 그 정체를 깨달았던 것이다.

    '아! 이 기는 어둠의 마나다!'

    하룬은 새롭게 유입된 마증유의 기가 비욘드의 아바타가 가지고 있는 어둠의 마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골드런:괴물의 탄생?)

    '어둠의 마나가 현실에도 있었구나! 그럼 이것이 일체화 과정인가?'

    비욘드의 아바타는 어둠의 마나를 가지고 있지만 현실의 하룬은 이제까지 그것을 축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현실에서 마나 플로를 운용하자 그것을 채워, 두 존재를 동화시키려는 것이다. 힘들게 혈도를 거쳐 단전으로 돌아온 기는 2개로 분리되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어둠의 마나로 추정되는 새로운 기와 기존의 기가 비욘드에서처럼 태극 문양을 이루어 자리를 잡은 것이다. 혈도로 스며들어 자연의 기와 합류한 새로운 기는 하룬의 의지에 감응하여 난폭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러고는 주천을 통해 단전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기 시작한 새로운 기는 그 덩치를 키워 결국은 기존의 기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자연의 기가 부족해!'

    하룬이 그렇게 느끼는 순간 이번에는 전신으로 자연의 기가 급속하게 유입되어 균형을 이루려고 했다. 그렇게 자연의 기와 새로운 기는 상대가 자신보다 많다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하룬은 어느새 모든 것을 잊고 기의 운행에만 전념했다. 두 기는 미세한 불균형도 참지 못하고 경쟁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상대가 더 많으면 자신의 동료들을 불러들였고 그 양을 조절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다른 기가 균형을 맞추려고 자신의 동료들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두 가지 성질의 기가 극히 미세한 차이로 균형을 이루었을 때야 하룬의 마나 플로는 끝이 났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새로운 기는 아직도 야생마처럼 거친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운기조식을 통해 순화시키는 한편 두 기를 이제 어던 식으로 발현을 해야 하는지도 확인해야만 했다. 하룬은 운공 삼매경에 빠졌다. 한꺼번에 폭증한 기 때문에 혈도는 반복적인 충격과 자극으로 넓어졌고 단전도 커져 있었다. 행공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기는 하룬의 의지를 받아들여 순화되었다. 두 기는 마치 교미를 하는 뱀처럼 서로 몸을 꼰 상태로 하나처럼 움직였는데 갈수록 그 성질이 순수해지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상단전과 중단전도 커졌다!'

    하단전과 새로운 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상단전도 몇 배는 더 커져 있었고 뇌전의 기도 늘어나 있었다. 두가지 기운과 섞여 들어왔다가 분리가 된 것 같았다. 아직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단전의 기 역시 느낌만으로는 주먹처럼 크고 단단하게 뭉쳐 있는 상태였고 세 단전 사이에는 고속도로처럼 넓게 확장된 길이 열려 있었다.

    '기이한 일이구나!'

    하룬은 어느새 자신이 피부를 통해 호흡을 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물론 무의식중으로 코를 통한 호흡도 하고 있지만 피부 역시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한 번에 흡입하는 공기의 양이 엄청나서 생각 같아서는 5분이나 10분에 한 번만 숨을 들이켜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부 호흡은 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룬은 한참 동안 그 원인을 생각한 끝에 개연성 있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지금 단전에 자리를 잡은 두 기운은 정확하게 균형을 이룬것이 아니다. 미세하지만 차이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두 기운은 본능적으로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돌아가며 자신의 동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 과정은 하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처럼 불수의 근육이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듯이 두 기운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캡슐의 동화율이 높다고는 하되 절대 100%는 될 수 없다. 그곳에서 얻은 힘 중 이곳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정령력이 대표적인 경우다. 현실에 그 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현실과 비욘드의 세상이 동일한 곳이 아니기에 캡슐의 능력으로는 그 힘을 끌어들이기 힘들것이다. 하룬이 마침내 운기행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적어도 수백 번은 운기행공을 했기에 시간의 흐름이 제일 신경이 쓰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벨과 아리가 알면 난리가 날 것이다.

    '아니지. 아즈만이 체크했을 거야.'

    하룬은 그 생각을 하고서야 겨우 안정을 찾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응? 설마 두어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건가?"

    막 지고 있는 해의 위치로 보아 오후 7시에서 8시 정도로 추정되었다. 불과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하루가 지났다면 벨이나 아리가 벌써 자신을 찾으러 나왔을 것이다. 감으로는 며칠은 족히 지났는데 실제로는 몇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하룬은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강렬한 햇살에 부서지는 호수의 잔잔한 파도를 보았다. 남들에게는 피부암을 유발할 정도의 강력한 햇빛도 하룬에게는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며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은 모공을 통해 직접 체내로 들어와서 전신 세포를 부드럽게 애무해주었다. 하룬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생하게 자연을 받아들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흥과 함게 벼락처럼 강렬한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기는 세상의 본질이며 우주의 근원이다. 기는 어디에서 오고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걸까?'

    수많은 의문들과 대답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혜의 파편을 통해 단순히 기억만 해 두었던 수많은 내용들이 살아 움직이며 스스로 화두가 되고 또 그 화두의 대답이 되었다. 하룬은 두 눈을 감고 마치 바위가 된 듯 그렇게 한참을 깨달음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던 수많은 지식들이 뇌리에 완전히 새겨졌을 때 하룬이 눈을 떴다.

    번쩍!

    하룬은 눈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젠 뭔가 알 것 같아!'

    세상이 달라 보였다. 같은 자연이지만 그 뿌리를 알게 되자 더욱 신비해 보였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들은 수많은 성질의 기가 특정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위대한 창조물들이다. 그중에는 자신도 있다. 자연은 주인이 없다. 의지를 가진 인간이 주인으로 자처할뿐 그 주인이 될 수 없다. 그조차 자연의 일부이니 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이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며 자연과 순응 혹은 도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임과 동시에 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사물들이 본능적으로 기를 담는 것에 비해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기를 체내에 담을 수 있다. 지혜의 파편에서 알아낸 것처럼 인체 내에는 기를 담을 수 있는 큰 장소들이 3곳, 중간 크기의 장소가 무려 108곳이나 된다. 하지만 이번에 하룬이 깨달은 바에 의하면 인체에는 그보다 더 많은 기의 그릇이 널려 있었다.  

    '어쩌면 인체 전체가 하나의 단전이 될 수도......'

    한동안 깨달은 것들을 정리하는 한편 음미하던 하룬의 두손이 호수를 향해 펼쳤다. 손과 손의 거리는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안쪽으로 모아졌다. 하룬의 의지에 순응한 자연의 기는 왼손으로, 어둠의 기는 오른손으로 향했다. 양손의 손가락 끝에 이슬이 맺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오색의 구슬과 거무튀튀한 구슬이 5개씩 생겨났다.

    '되는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하자 정말 기의 발출이 가능해졌다. 그것도 단순한 기의 발출이 아니라 기를 유형화시키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혈도가 모두 열리고 유형화될 정도로 방대한 기가 축적된 것이다.

    '기의 폭발도 가능할까?"

    유형화된 두 가지 성질의 기를 발출하여 일정한 거리에서 폭발을 시켜 볼 생각이다. 왠지 감이 좋았다.

    "가라!"

    두 가지 성질을 가진 구슬들이 일제히 앞으로 튕겨졌다. 호수 가운데까지 쏘아진 10개의 구슬들이 한순간 부딪혔다.

    꽈아앙! 

    뇌성벽력이 터진 것처럼 굉음이 울리며 퍼지더니 호수가 순간적으로 푹 파였다. 깊게 파인 분화구의 가장자리에서 거대한 벽이 솟구쳐 사방으로 날아갔다.

    '굉장하군!'

    하룬과는 거의 1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두 기가 폭발을 했지만 그의 몸은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호수의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들 역시 물에 젖은 모습이었으니 폭발의 강도와 그 파급 범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대한 분화구처럼 파인 호수는 얼마 후 다시 제 모습을 찾았지만 하룬은 아직도 멍청히 서 있었다.

    '이 기를 박살을 통해 내쏟는다면.....'

    얼른 생각해도 입자포의 위력에 버금갈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것을 시도해 보자.'

    하룬은 활짝 열린 모공을 통해 기를 내보낸 일정한 거리에 잡아 두고 밀도를 높였다. 삽시간에 그의 몸은 2개의 막에 휩싸였는데 밖의 것은 반투명했지만 안쪽의 것은 거무튀튀한 색깔이었다. 어느 정도의 방호력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방어 막을 생성한 것은 사실이다.

    '이 막들이 입자포탄을 막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바라지만 실험을 할 수 없으니 소용없는 생각이다. 그래도 기의 소비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막을 생성한다는 뜻을 세운 직후 체내는 물론이고 체외에서도 두 가지 성질의 마나가 몰려들어 막을 이룬 것이다.

    '이제 드디어 현실에서도 소드 마스터가 된 건가?'

    하룬의 얼구렝서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만족스러웠다. 이제야 기의 수발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하룬은 마법사들처럼 공명을 이용하지 않아도 의지만으로 외계의 기를 어느 정도는 조종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기뻤다. 비욘드에 파란이 일어났다.

    -드디어 이방인들의 순수한 힘으로 다크니스의 성을 함락했다!

    게임 방송사들이 일제히 낭보를 전했다.

    -반 다크니스 연합과 발을 맞추어 가즈 로드 작전을 수행한 대형 길드 중 4곳이 드디어 공성전에서 승리하다!

    이 뉴스를 접한 이방인들은 일제히 환호를 터뜨렸다. 이제까지 난공불락이었던 다크니스의 성들을 이번에 4곳이나 이방인들이 차지했던 것이다. 그 4곳은 광산을 보유한 성으로, 그곳을 차지한 길드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비욘드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는 근거지와 자금을 얻게 된 것이다. 돌풍 용병대의 고문단이 가세한 세 번에 걸친 공성전에 대한 편집 영상과 그 과정을 통해 다크니스의 성에 대한 비밀에 파헤쳐진 영향은 무척이나 컸다. 마수와 흑마법진 그리고 지구라트라는 건물과 첨탑이 가진 비밀을 비로소 알게 된 대 다크니스 연합과 이방인 길드들은 세 성의 공성전을 바탕으로 이제까지와는 달리 전격적이고 압도적인 전력으로 성을 공략했다. 대 다크니스 연합은 4개의 성을 손에 넣었고 연합을 통해 고수들의 숫자를 늘린 대형 길드들도 4개의 성을 차지했다. 이방인들의 경우 소드 마스터나 마도사 급 마법사가 없었지만, 마탑과 신전 연합에서 파견한 고위 마법사들과 고위 사제들이 흑마법진을 해체하는 동시에 지구라트의 첨탑에 타격을 가해 통신과 워프를 방해한 덕에 힘들기는 하지만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고수들의 숫자는 부족하지만 익스퍼트 급이나 4서클 수준의 마법사들을 대량으로 보유한 이방인 길드들은 숫자로 밀어붙였고 결국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다크니스가 보유한 소드 마스터들과 마도사들의 경우, 아직 그 경지가 불완전한 상태라 합공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길드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탑과 신전 연합은 앞으로도 공성전을 벌일 예정인 이방인 길드에 현실적인 수준으로 전폭적인 도움을 주기로 약속함에 따라 많은 세력이 대 다크니스 연합에 암묵적으로 가세를 하게 되었다. 다크니스가 버리고 간 광산 시설들을 이용해서 벌써 금을 생산해서 전비를 충당하기 시작한 아리수 성의 상황이 알려지면서 나름 힘이 있거나 실력이 있다고 자신하는 세력들과 개인들이 급격하게 데빌 산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데빌 산맥은 이제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한편 하룬은 기지의 급한 일을 마치고 비욘드로 돌아왔다. 티노 부부와 고문단은 지혜의 파편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세 번에 걸친 공성전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련을 하고 있었다.

    "좀 더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미루스는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이 안타까웠나 보다.

    "하하하! 그래도 벌써 많이 늦었습니다."

    다른 대원들은 이미 사탕가 봉 인근에 도착해서 인근의 세 부족 전사들을 소집하고 공성전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하긴 그렇지요. 그냥 아쉬워서 해 본 소리입니다."

    그간의 수련과 명상을 통해 고문단들의 기도는 또 한 번 바뀌었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 기도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기세를 조절할 정도의 실력이 된 것이다. 하룬은 은밀하게 요새로 들어가서 코엠 상단을 방문했다.

    "언니는 급한 일로 현실에 갔어요."

    아이류가 미안한 얼굴로 세류의 부재를 알렸다.

    "대장님이 원하시는 물건은 이미 입고가 되었어요."

    그나마 필요한 물건이 준비되어 다행이었다. 하룬은 마수 가죽을 내주고 산악 부족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들과 무기들을 챙겼다. 세류를 만나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지만 시간이 없는 그에게는 오히려 잘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룬 대장님,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요."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순간 아이류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부탁?"

    "그, 그게....."

    무슨 부탁인지 몰라도 얼굴을 붉힌 아이류가 주저했다. 그 모습이 벨을 보는 것 같아 무척 귀엽게 보였다. 하룬의 부드러운 눈길에 용기를 얻은 아이류가 입을 열었다.

    "사인 좀 해 주세요!"

    "사인?"

    "네. 대장님을 만났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믿질 않아서....>"

    "후훗!"

    아이류의 엉뚱한 부탁에 하룬은 내심 불편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사인도 해 주고 캠으로 인증 촬영까지 해 주었다.

    "끼야! 너무 멋있어요! 친구들이 부러워 죽으려고 할 거예요. 고마워요, 하룬 오빠!"

    잠시 같이한 사이에 은근슬쩍 오빠라고 호칭을 달리하는 아이류였다. 세류보다는 비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 같았다.

    "그럼 나중에 또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아이류가 흔드는 손을 뒤로하고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하룬은 미노와 수니를 타고 사탕가 봉으로 향했다.

    "휘유! 끝내준다!"

    "공중 유영 주술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군."

    "허허헛! 플라이 마법과도 비교가 안 되네."

    바디체인지를 겪은 탓인지 이번 비행에서 멀미를 한 것은 티노 부부가 유일했다. 고문들은 이제 비행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음미할 정도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에 이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건 우리 용병대원들뿐 일 거야."

    "암! 아득한 고대에는 와이번을 길들여 타고 다닌 기사 이야기도 있지만 지금은 설사 황제라 해도 이런 호사를 누를수는 없지."

    "허허허! 우리 히든 대원들 덕분에 좋은 걸 경험해 보네."

    고문들의 만족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긴 아득한 고대부터 인간들은 하늘을 날기를 열망해 왔다. 물론 마법사의 플라이 마법이나 주술사의 공중 유영 주술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제한된 짧은 시간 동안에 비교적 낮은 고도를 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하늘 높이 날아올라 바람을 가르거나 안고 비행하는 짜릿한 속도감과 재미는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미노와 수니는 사탕가 봉우리 인근에 도착해서 수많은 인간들의 기척을 느끼곤 하룬 일행을 그곳에 내려 주었다. 작은 동산처럼 거대한 미노와 수니의 착륙에 산악 부족들은 놀라 머리를 땅에 묻었지만 돌풍 용병대원들은 반가운 얼굴로 하룬 일행을 맞았다.

    "대장님!"

    "먼저 도착해 있었군요."

    바슈를 비롯한 고문들이 무려 1만에 달하는 세 부족의 전사들을 모은 상태였다. 각 부족의 자랑인 대전사들과 포머칸들이 나선 일이라 사탕가 봉 인근에 거주하는 세 부족은 거의 모든 전사를 보낸 것이다.

    "숙영지를 마련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하룬은 미노와 수니를 위해 육포 스무 자루를 꺼내 레미에게 건네주었다.

    "미노와 수니는 인간만큼 영특하니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헤헤! 알았어요, 대장님. 제게 맡겨 주세요."

    레미는 주술사이기도 했지만 동물들과 친화력이 높았다. 따듯하고 다정한 마음을 가져서 그런지 테이밍에 뛰어난 재주가 잇다고 라티카 칸이 칭찬했었던 것이다. 숙영지에 들어서니 거대한 나무 두 그루를 기둥 삼아 친 거대한 막사가 작은 막사들 가운데 모습을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50명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산은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낮아서인지 작은 화로 몇 개가 중간에 놓여 있었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도네이스는 피곤하지도 않는지 식사부터 챙기려 들었지만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차부터 한잔 마시며 상황부터 들어봅시다. 정찰은 해 보셨습니까?"

    하룬의 시선이 먼저 이곳에 도착한 고문들을 향했다. 하룬은 고문들에게 경이라는 칭호를 쓰기로 했고 그것이 백작 위 이상의 고위 귀족에게 부르는 칭호임을 알고 있는 고문들은 마음에 들어 했다.

    "네, 대장님. 3곳 모두 정밀 정찰을 실시했습니다. 각 성에는 2,000명 정도의 적이 있었으며 그중 사악한 마법사들은 300명 정도이고 기사들은 500명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 중앙에 있는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절반씩 교대로 업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고문들 중 바이얀이 보고를 했다. 아마 2교대로 접속을 하는 모양이다. 요새 주변의 성들처럼 숫자가 많지 않아 다행이다.

    "성 밖은요?"

    "성 밖으로 백 마리 정도의 마수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위험한 프로즐리는 열 마리 정도였습니다." 

    "경계 상태는 어땠습니까?"

    "산맥 안쪽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광산 같은 특별한 시설이 없어서인지 풀어진 상태였습니다. 특기할 것은 언데드가 밤에 경계를 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데드요?"

    하룬의 말에 겨루가 대답을 했다.

    "네. 좀비 종류로 보였는데 보통의 좀비와는 달리 이성을 가진 것 같았습니다. 일부 좀비는 상당히 강해 보였습니다. 보통 좀비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어둠의 던전에서 만났던 좀비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산악 부족들은 언데드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어 겨루가 대신 대답을 한 듯했다.

    '강화 언데드가 드디어 배치되기 시작했구나!'

    틀림없었다. 포러스의 기억에 의하면 강화 언데드의 제조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숫자는 얼마나 되나?"

    "자세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낮에 성벽을 지키는 인원이 200명 정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 정도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간 좀비의 존재가 산악 부족들에게도 알려졌는지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언데드는 상대할 방도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아!"

    하룬에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금새 밝아졌다. 누구도 그 방도가 뭐냐고 묻지 않았지만 걱정을 날려 버린 얼굴이 되었다.

    "첫 목표는 어디가 좋을 것 같습니까?"

    "거리는 3곳 모두 비슷합니다. 하지만 미리 의논을 해 본 결과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곳을 먼저 처리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탕가 봉우리의 서쪽에 있는 강가에 세워진 성인데 저희는 임의대로 아카툰 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형은 어떻습니까?"

    "성의 남쪽은 수심이 깊고 폭이 꽤 넓은 강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과 서쪽은 가파른 벼랑을 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할 수 있는 곳은 넓은 초지와 연결된 동쪽뿐입니다."

    아카툰 성은 실로 절묘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수비하는 쪽에 비해 공격하는 쪽이 굉장히 힘든 그런 지형이었다. 때문에 이틀 전에 도착해서 세심하게 정찰대를 운용한 산악 부족들은 이곳만 제대로 처리하면 나머지 두 성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회의는 생각보다 길어져 중간에 점심 식사를 하면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속전속결이다!'

    자신의 사람들만 있으니 전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당장 현실에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산적해 있는 만큼 이곳의 일은 빨리 마무리를 해야만 했다. 아침 해가 뜬 하늘을 바라보는 하룬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언데드들의 전력을 알 수 없어 이번에는 아침 식사 시간을 노리기로 했다.

    -미노, 수니, 준비됐니?

    -응, 친구! 준비 됐어!

    -나도.

    하룬의 의념에 대답을 하는 두 녀석의 목소리는 기운찼다.

    -그럼 시작해!

    하룬의 지시에 숙영지 인근에서 레미와 함께 밤을 보낸 미노와 수니가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지면에 짙은 그늘이 생길 정도로 거대한 동체를 가진 두 녀석이 흑마법진이 만들어 낸 결계를 발톱과 날개로 찢고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몬스터다!"

    "하늘이야!"

    성벽에서 경계를 하고 있던 흑전사들이 강하게 흔들리는 마나의 유동에 놀라 동요했다.

    "화살을 쏴라!"

    슈슈슈욱!

    성벽 곳곳에서 날리는 화살이 미노와 수니의 거대한 동체를 목표로 날아갔다. 대부분의 화살은 강력한 바람을 일으키며 움직이는 날개짓에 힘을 잃고 떨어졌지만 일부는 몸에 맞았다. 물론 철시도 아닌 화살이 녀석들의 몸에 꽂히지는 못했지만 날카로운 화살촉은 미노와 수니를 화나게 만들었다.

    꾸어어워!

    꽈아아아아!

    미노와 수니의 포효는 대기를 뒤흔들었고 결계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흔들렸다. 흑전사들은 물론이고 비상 상황에 지구라트로 뛰어나온 성의 수뇌부들이 비틀거렸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은 물론이고 심장이 오그라들고 근육이 수축되었다. 그때 하룬이 넓은 초지로 어둠의 힘을 넓게 퍼트렸다.

    -오라! 나는 너희들의 주인, 너희들을 치료해 주마.

    하룬은 어둠의 힘에 이끌려 다가오는 마수들의 머릿속에 어둠의 힘을 집어넣었다. 혼탁한 마력은 제거하고 어둠의 마나를 그 자리에 넣었다.

    -가라! 자유롭게 살던 너희를 아프게 만들고 구속시킨 자들에게 복수해라! 혼탁한 어둠의 마나를 가진 자들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뼈와 살을 씹어 먹어라!

    끄와아악!

    쿠워어!

    강렬한 복수심에 휩싸인 마수들은 분노성을 터뜨리며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그사이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초지를 돌아다니며 마나 디텍트 마법을 펼쳤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 하위 마법사들과 전사들이 따르다가 지시하는 곳을 디그 마법으로 파고 마나석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르막쓰이진!"

    어느새 울려 퍼지는 저음의 주술이, 긴 관악기가 토해 내는 소리와 함께 섞여 근방의 대기를 달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마수 가죽으로 만든 갖가지 타악기가 토해 내는 소리와 신비한 운율의 주술이 결합하여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의 심장을 달구었다.

    마법사들이 흑마법진의 코어를 파괴하기 시작하자 화살 공격에 광분한 미노와 수니는 완전히 결계를 찢어발길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일정한 고도까지 하강한 후 안정적인 날갯짓으로 한 자리에 체공했다. 공격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1만 전사들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력한 힘에 전율하면서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산악을 뛰어다니던 강인한 두 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발몬의 후예들이여! 이 신성한 대지를 더럽히는 사악한 자들을 말살하라!

    하룬의 의념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잔뜩 고양시킨 투기가 그 의념에 폭주하며 전사들을 이끌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고문들은 날 듯이 성을향해 달려가는 전사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아악!"

    "마수들이 미쳤다! 테이밍이 잘못됐다!"

    성벽을 뛰어 올라온 마수들의 공격에 당황한 흑전사들의 비명과 경호성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마수들을 관리하던 흑마법사 3명이 프로즐리에 의해 완전히 짓뭉개졌고 단단한 성문도 깨져 버렸다. 전사들은 성벽과 성문을 통해 물밀 듯이 성안으로 쇄도했고 다크니스와 격돌했다.

    "카아악!"

    "아악!"

    대전사들이 앞장을 섰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비명은 대부분 다크니스의 것이었다. 마수들도 산악 부족과 섞여 다크니스 무리를 공격했다.

    "이놈들은 뭐야?"

    "우아악!"

    처음에는 산악 부족의 전사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마수들 무기를 휘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요는 금방 진정이 되었다. 전사장들이 이미 공지했던 사실을 다시 확인시켰던 것이다.

    "대장님이 말씀하셨다. 아까 말한 대로 이놈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아. 마수들은 신경 쓰지 말고 적들을 공격해!"

    마수들은 하룬의 명령으로 인해 흑마력을 가진 자들만 공격하기 때문에 위험할 일이 없었다. 성 중앙까지는 파죽지세로 움직였다. 믿고 있던 흑마법진이 깨지고 마수들이 반기를 든 상황에서 기껏해야 1,500명에 불과한 인원 가지고는 1만에 가까운 전사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언데들을 깨워라!"

    "빨리해!"

    흑마법사들은 언데드들을 깨워 지구라트를 향해 쇄도하는 적들의 앞에 세웠다.

    크르르르.

    붉게 변한 눈과 입 밖으로 튀어나온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피와 침이 섞인 거품이 역겨운 악취를 뿜어내고 있는 좀비를 맞이한 전사들은 잠시 멈칫했다. 놀랍게도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고 땅속에서 기어 나온 좀비들의 몸놀림은 흑전사들보다 빨랐고 상처를 입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몸통으로 기며 물어뜯으려는 좀비의 강렬한 살기에 용맹한 전사들도 질린 얼굴이 되었다.

    '입고 있는 군복으로 봐서는 실종자들을 호송하던 병사들 이구나.'

    딜런은 이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불쌍한 놈들!"

    딜런의 검에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는가 싶더니 횡으로 날아갔다.

    꽈과가강!

    폭음과 함께 10구의 좀비가 어육으로 짓이겨진 상태로 날아갔다. 아무리 익스퍼트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는 강화 좀비라도 이 상태가 되면 움직일 수 없었다. 딜런의 공격을 기점으로 대전사 출신 고문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검에서는 일제히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 나왔고 마수의 힘까지 끌어 올리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강화 좀비들을 난도질했다.

    '헙!'

    호루시키는 기함을 했다. 비상 신호를 듣고 옷을 갈아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지체 없이 뛰어나왔지만 그사이 적들은 이미 지구라트 앞의 광장까지 밀려들었다.

    '빌어먹을! 산악 부족들이다.'

    안 그래도 산악 부족들에 의해 성 3개를 빼앗겼다는 소식은 들었다. 새벽 시간을 이용해서 가해진 빠른 기습으로 인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자들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흑마법진은 기이한 주술을 쓰는 주술사들에 의해 파진(破陳)되고 마수들은 미쳐 날뛰었다고 했다. 마법이라고도 하는 혹자는 주술이라고도 했던 공격에 지구라트에서 가장 중요한 첨탑은 부서지고 소드 마스터와 오러가 아닌 기이한 힘을 가진 전사들에 의해 도륙을 당했다고 했다.

    "그런 힘이 어디 있어!"

    호루시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까지 견디는 힘이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최근 본부에서 파견해준 2명의 소드 마스터와 5명의 6서클 마도사, 역시 6서클 마도사인 자신의 힘만으로도 미개한 산악 부족 따위는 얼마든지 부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드 마스터가 한두 명이 아니야!'

    놀랍게도 적들 사이에는 소드 마스터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꽤 많았다.

    꽈앙!

    "크아악!"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에 시선을 돌려 보니 생각하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본부에서 파견되어 거들먹거리며 갖은 패악을 떨던 소드 마스터 게이튼이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상대 검사의 검에서도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올라 있었다.

    "지, 지원을 요청해!"

    "네, 성주님!"

    다행히 기습 소식을 받고 접속한 수하가 그의 명령을 받고 첨탑으로 올라갔다. 이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호루시키의 눈빛이 강해졌다.

    '제길! 어마어마한 놈들이군.'

    적들의 선두에는 놀라운 실력자들이 다수 있어 본부에서 시범적으로 양성해 파견해 준 강화 언데드들이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과 머리통이 분리되어 쓰러졌다. 하지만 강화 언데드들은 테이밍이 풀렸거나 적들에 의해 역으로 테이밍당한 마수들을 상당수 처리해 주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흑마법진이 해제되고 마수들의 기습으로 단숨에 지구라트 주변까지 밀렸던 수하들은, 강화 언데드들이 마수들을 처리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접속을 해제했던 실력자들이 빠르게 가세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대로 버티다가 지원군이 오면 승산이 있어!'

    특무조 소속인 파이키와 시드라를 비롯한 5명의 마도사들이 흑마법으로 소드 마스터인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마도사들은 각종 흑마법과 블링크 같은 이동 마법을 통해 상대를 묶어 놓고 있었다. 적들은 흑마법에 취약한 듯 무식하게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 올려 흑마법을 힘으로 깨려고만 하고 있었다.

    "다크 스피어!"

    "포이즌 핸드!"

    "데드 보그!"

    그의 친동생인 사이키스는 얼마 전 완성한 데스 나이트를 소환해서 소드 마스터 1명을 훌륭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 중급 이상으로 추측되는 검사는 소드 마스터 둘이 상대를 하고 있었지만 밀리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직 여유는 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지켜본 호루시키는 적의 전력을 면밀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적들 중에는 엄청난 힘을 가진 소드 마스터들이 10명 가까이 있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강한 적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산악 부족들이군.'

    드러난 피부에 문신을 한 산악 부족의 전사들은 흑전사들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이상한 종류의 힘을 쓰기는 하지만 제한 시간이 있어 그것만 견디면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걸 호루시키는 잘 알고 있었다.

    '크크! 미친놈들! 감히 이곳에 마법사도 거의 없이 쳐들어 오다니!'

    놈들에게 주술사라는 존재가 있다고 들었지만 흑마법사들이 근접 공격 마법으로 나머지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는 것에 반해 적들 중에는 마법을 쓰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주술은 대체로 넓은 지역이나 다수의 목표를 대상으로 한다고 했다.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산악 부족들이라면 연합군은 아니겠지.'

    연합군만 아니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 자신들 때문에 연합한 세 제국과 마탑 그리고 신전 측에서 가즈 로드라는 작전을 이방인들과 함께 실시하는 바람에 최근 11개의 성이 떨어졌다. 특히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성을 함락시키며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제는 별 떨거지 같은 놈들까지 난리군.'

    마츠루트 요새 인근과 세 제국의 국경을 면하고 있는 성들 때문에 비상이긴 하지만 이쪽은 전력에 여유가 있다. 자신의 성을 관할하는 거점 성에는 알카이드 특전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최근 본부에서 양성한 소드 마스터들과 6서클 마도사들이 수십 명이나 가세한 터라 그 전력의 일부만 워프해 오더라도 이 미개한 놈들을 제압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비록 숫자의 차이로 인해 전황은 좋지 않았지만 거점 성의 지원군이 도착하면 금세 뒤집을 수 있다.

    '어쭈! 싸울수록 실력이 늘어나네. 설마 실력을 숨겼었던 건가?'

    처음에는 상대를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마도사들이 어느순간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마법을 경험하지 못했던 대전사들이 빠르게 마법 공격에 적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마수의 힘을 끌어 올리자 블링크 마법도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도사들이 밀리기 시작하자 전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미개한 산악 부족의 전사들을 상대로 승기를 잡았던 흑마법사들마저,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덤벼드는 놈들의 기세에 눌린 것이다.

    '빨리!'

    다급한 마음에 자꾸 지구라트의 첨탑으로 눈길을 주던 호루시키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첨탑에서 푸른 아지랑이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이건 워프 마법진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걸 말한다.

    "지원군이 온다! 힘을 내라!"

    이제 광장 대부분을 적에게 내주고 지구라트를 향해 밀리던 다크니스의 무리의 눈이 첨탑으로 향했다. 강렬한 마나의 유동과 함께 첨탑을 제외하고는 텅 비었던 5층의 옥상에 커다랗고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 푸른 기운이 완전해지면 기백 단위의 지원군이 차례대로 워프를 해 올 것이다. 그것을 본 다크니스 무리가 힘을 냈다.

    "지원군이 도착한다! 적을 밀어내라!"

    "다크 애로우!"

    "포이즌 클라우드!"

    흑마법사들은 흑마력을 쥐어짜 흑마법을 펼쳤고 흑기사들과 얼마 남지 않은 흑전사들도 흑마력을 끌어 올려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 기세에 놀란 산악 부족의 전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흐흐흐! 겁은 많아 가지고."

    호루시키는 이제는 스무 걸음 이상 떨어진 적들을 보며 음침하게 웃었다. 적들도 지원군의 전력을 짐작하는 것 같았지만 그가 아는 지원군의 실력은 안다고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졌다. 큰 그늘이 광장을 드리운 것이다.

    "뭐야?"

    하늘을 쳐다본 호루시키의 눈이 커졌다.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거대한 새 두 마리가 20미터 상공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 새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다. 티노와 도네이스가 영교(靈交)를 하고 있는 미노와 수니의 등에는 바슈를 비롯한 포머칸 5명과 타니엘라 사형제가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일제히 주술과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주술의 힘으로 마법의 위력을 몇 배로 증강시키는 주술 공조 마법을 펼치려고 하는 것이다.

    "암함브로알 키울세이라투 아키툼바 고르시윰......"

    "플레임 익스플로젼!"

    "기가 선더 스피어."

    주문을 들은 호루시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주술은 모르겠지만 마법은 틀림없이 7서클의 원소 마법이었다. 워프가 진행되는 동안 마법진이 충격을 받으면 지원군이 몰살하고 만다. 모르긴 해도 첫 번째로 워프해 오는 선발대에는 가장 강한 실력자들이 몰려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손도 못 써 보고 죽고 말 것이다. 공중에 거대한 화염 덩어리와 벼락 창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안 돼! 모두 지구라트에 실드를 펼쳐라!"

    호루시키의 비명과 같은 명령에 흑마법사들이 일제히 지구라트 건물을 대상으로 다크 실드를 펼쳤다. 살아남은 흑마법사의 숫자는 100명이 조금 넘지만 그들이 한꺼번에 펼친 다크 실드는 서로 융합을 하면서 지구라트 건물을 시꺼먼 방어 막으로 감싸 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한 마법 공격은 없었다.

    '뭐지? 중간에 취소한 건가? 아니야! 분명히 마나의 유동이 지속되고 있어!'

    호루시키는 알 수 없는 현상에 하늘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하늘에는 여전히 화염 덩어리와 벼락 창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마법 공격은 가해지지 않았다. 다만 기이한 운율과 힘을 가진 주술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뭐야?'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것 때문에 화염 덩어리와 벼락 창이 점점 더 커져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산악 부족의 전사들은 공격을 멈추고 지구라트를 주시했다. 거의 3분이 흘렀을 때 결국 파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크 실드가 급격하게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커억!"

    "마력이 달린다!"

    "다크 실드!"

    이제까지 끊임없이 흑마법을 펼쳐 적을 막아 왔던 흑마법사들은 흑마력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실드 마법은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재차 다크 실드를 펼쳤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실드의 색깔은 처음에 비해 무척이나 흐려 보였다. 하늘에 떠 있는 화염 덩어리와 벼락 창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불안하긴 했지만 극도의 이기주의에 물든 흑마법사들은 마력이 달리자 나중을 위해 실드 마법에 들어가는 마력을 은밀하게 줄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첨탑의 옆에는 마법진의 형상이 완벽해지고 그 안에는 푸른 원기둥이 생성되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호루시키는 분명히 마법 주문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 공격을 하지 않는 적의 꿍꿍이가 궁금했지만 불안한 마음에 지구라트 전체에 건 실드 막을 유지하려고 했다.

    "오오! 온다!"

    "지원군이 온다!"

    푸른 원기둥 속에 사람의 형성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다크 실드는 급격하게 약해지다가 결국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지원군이 왔다는 사실에 흑마력의 고갈을 무릅쓰고 실드 마법을 펼치던 흑마법사들이 손을 놓은 것이다. 호루시키는 안타까웠지만 이제 몇 초만 지나면 1차 지원군이 도착하는 터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쿠르릉! 꽈앙! 쿠르르! 꽈앙!

    흑마법진이 만들어 낸 음습한 기운이 사라진 하늘에서 화염 덩어리를 필두로 귀가 먹먹해지는 뇌성이 울려 퍼지며 시퍼런 뇌전이 수십 차례에 걸쳐 지구라트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다!"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 하늘에 머물러 있던 화염 덩어리와 벼락 창이 드디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화르르! 화르르! 꽈아앙! 꽈아앙!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화염 덩어리의 크기는 놀랍게도 2층 건물의 크기였고 그 화염은 지구라트에 닿는 순간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지구라트는 순간적으로 강력한 화염에 휩싸였다.

    지이이잉! 쩌저저정!

    거대한 뇌전 창은 폭발이 일어난 건물과 첨탑의 마법진이 발생시킨 워프진 중앙에 꽂혔고, 순간적으로 푸른 원기둥이 일그러지며 강력한 마나 폭발이 진행되었다. 7서클 마법과 워프 진에서 파생된 마나가 뒤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피, 피해!"

    "도망쳐야 해!"

    호루시키를 비롯한 마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블링크를 펼쳤다. 검사들은 뭐가 뭔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고 흑마력을 소진한 흑마법사들은 블링크조차 펼칠 기력이 없었다.

    쩌어엉!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지구라트의 상층부가 부서지며 무너져 내렸다. 푸른 원기둥은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크아악!"

    "아악! 제발!"

    넋을 놓고 있었던 대부분의 다크니스 무리가 비산하는 지구라트의 파편과 푸른 원기둥의 잔해에 맞아 비명을 질렀다. 재빠르게 건물 내부로 피신했던 자들은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크윽! 이럴 수가!"

    연속해서 블링크를 펼쳐 폭발의 범위를 벗어나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는 지구라트를 보자, 호루시키와 마도사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흑기사들 10여 명이 자신들과 다른 방향으로 피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지구라트의 폭발로 인해 어육으로 변해 죽고 만 것이다. 지원군들을 품고 있었을 푸른 원기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원군이 모두 죽었어! 놈들은 일부로 워프가 완성되기 직전을 노린 거야!"

    사이키스의 말대로 놈들은 완벽한 순간을 노려 어마어마한 마법 공격을 가한 것이다.

    '어떻게 완성한 마법을 늦출 수 있었던 거지? 그것도 그렇지만 분명히 마법 주문은 두 번에 불과했는데 저런 강력한 위력이 나올 수 있는 거야?'

    호루시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법의 발현을 늦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금의 마법 공격은 적어도 10여 명의 7서클 대마도사가 펼친 정도의 위력이였던 것이다.

    써걱!

    "조심.... 크아악!"

    옆에 서 있던 사이키스가 뭔가 소리를 치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화들짝 놀라 주위를 돌아본 호루시키는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오러 블레이드를 볼 수 있었다. 길이 2미터에 달하는 오러 블레이드가 회전을 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사이키스의 이마에는 시커먼 색깔의 비수가 깊이 박혀 있었다.

    '헉!'

    아무리 놀란 와중이라지만 자신의 주변으로 비수가 날아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니 등골이 서늘했다. 사이키스의 죽음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놀란 호루시키의 눈이 커졌다.

    "피, 피해!"

    가까스로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막상 블링크 마법을 펼치려던 호루시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변했다. 사이키스의 이마에 박혔던 시꺼먼 비수가 스르르 빠져나오더니 공중에서 멈추고는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검첨을 보였던 것이다.

    "블링....커억!"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날아온 비수는 목을 꿰뚫었다. 순간 화끈한 감각과 함께 이질적인 기운이 온몸에 빠르게 휘돌아다니더니 흑마력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부릅뜬 호루시키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비수의 자루끝에 매달린 연하지만 검붉은 기운이 사이키스의 이마와 연결되어 있었다.

    '흑마력뿐 아니라 저, 정혈까지 빨아먹고 있어!'

    시꺼먼 비수는 살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이키스와 자신의 흑마력과 정혈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호루시키의 눈에서 빠르게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마도사들의 몸을 난도질하는 오러 블레이드와 살아남은 10여 명의 흑기사들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는 미개하다고 생각한 산악 부족의 전사들이 비쳤다. 지금보다 열 배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상대를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자들이라는 판단이 이제야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놈들은 악마야!'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데빌 산맥에 건설한 성들 중 10개를 관할하고 있는 알카이드 전단장 투베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뛰어 들어온 부관의 반응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알카시스 성과의 통신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하지도 못했던 보고에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뜨거운 찻물이 허벅지를 적셨지만 의식하지 못했다. 

    "워프 직후 상황 보고가 없어 저희 쪽에서 통신을 시도했지만 연결이 안 됩니다."

    통상적으로 워프가 이루어지면 그 성공 여부를 통신으로 보고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차례의 지원군을 워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워프진의 반응은?"

    "그, 그것도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선발대가 도착한 직후에 워프진이 훼손된 것이 분명했다.

    "설마 놈들 중에 대마법사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비상 통신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알카시스 성이 미개한 산악 부족의 기습을 받았으며 전황이 열세라는 소식뿐이었다. 호루시키 성주는 현실에서 자신과 오래 같이한 수하였다. 능력도 뛰어나지만 판단력이 명석하기로 소문난 친구였다.

    "그럼 워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했나?"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료되기 바로 직전에 이상한 징후가 있어 상황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상한 징후라니?"

    "워프 직후 강력한 마나 유동이 전해졌습니다."

    "빌어먹을!"

    부관의 보고에 투베르의 얼굴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 후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워프는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선발대는 총 300명이다. 그들 중에는 알카이드 전단의 2개대 200명은 물론이고 최근 본부에서 마왕의 파편을 통해 급하게 양성한 소드 마스터 10명과 6서클 마도사 7명,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흑기사들과 5서클 흑마법사들 100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는 노블 출신들이 10명이나 된다.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그 연놈들은 조직의 고위급 간부들의 자제들로 남들이 사냥과 퀘스트를 통해 힘들게 레벨 업을 한 것과는 달리 마왕의 파편과 마나 집적 마법진을 이용해서 단기간에 최고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선발대의 숫자는 비록 300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거점 성이 보유한 전력의 절반 이상이나 되기 때문이다. 특히 오만불손한 태도로 내내 자신을 긁던 소드 마스터들과 마도사들이 빠지면 자신이 거느린 수하 중 쓸 만한 전력은 알카이드 전단의 8개 대 800명밖에 없는 상황이다.

    "알카시드와 가장 가까운 성과 통신할 테니 준비하라!"

    "네, 단장님!"

    도보로 이동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이니, 가까운 성으로 하여금 알카시스 성에 대한 정황을 조사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 전력에도 불구하고 미개한 산악 부족 놈들에게 녹아 버린 것은 아니겠지?'

    마수의 힘이라는 기이한 능력을 쓴다고 해도 제대로 마나를 다룰 수도 없는 미개한 족속들이지만,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안 그래도 연합군 때문에 걱정이 많은데..... 쯔쯔!'

    이때만 해도 투베르는 불안하지만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만큼 선발대의 전력이 막강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