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시티
배리어 축소로 유니온 분위기가 뒤숭숭한 가운데 하룬과 인공수정체 출신 대원들이 유니온으로 잠입했다. 대원들은 대부분 럼과 레이스가 이끌고 있었다. 아리는 드릴리언을 이용해서 레이스의 집 지하까지 연결되는 지하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그들은 안면이 있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물론 은행 일을 비롯해서 식량과 생필품 구입과 같은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하룬은 따로 움직여 예전에 살던 집으로 향했다. 진수가 사들여 신축한 건물은 다행하게도 아직 비어 있는 상태였다. 집 안에 있는 가구의 청소 상태나 마당의 잔디 상태를 보아하니 진수가 가끔 챙기는 모양이다. 집 밖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통행이 뜸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직장에 있을 시간인 것이다.
'좀 이른데 괜찮을까?'
게임하는 데 방해가 될까 걱정을 하면서도 차임벨을 눌렀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진수가 달려 나왔다.
"정민아, 아니 하룬 대장!"
오랫만에 보는 진수의 얼굴은 살이 좀 올라 보기 좋았다.
"잘 지냈어요, 형?"
"하하하. 네 덕분에 잘 지내지. 일단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간 하룬은 말끔하게 치워진 집 안을 보며 놀란 눈치였다.
"하하! 이번 기회에 친구들 가족들이 여기로 들어왔어. 유니온에서도 세금을 감면해 준다고 하고 집 안에 여자들이 있으니 예전보다 한결 깨끗해져서 편하게 생활하고 있어."
어째 깨끗하다 싶었더니 여자의 손길이 닿은 거였다. 진수와 그 친구들이 정리나 청소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룬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본 진수가 웃으며 말했다.
"친구들은 지금 코엠 성 주변의 던전을 깨고 있는 중이야."
"아! 거긴 또 언제 갔어요?"
"대장을 찾아간 거지. 한데 코엠 성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고대 시대의 유산으로 추정되는 던전을 발견하게 되어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중이야. 레벨도 레벨이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드는 던전이라 몇 번씩 죽어 가면서도 조금씩 안으로 진입하고 있어."
"역시 형은 게임의 재미를 즐기고 있군요."
정말 부러웠다. 자신은 이계를 현실로 살고 있지만 진수와 그 친구들은 대부분의 유저처럼 그곳을 가상현실로 생각하고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게 다 대장 덕분이야."
"에이! 형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듯하다. 잠시 그간에 벌어졌던 일들을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차임벨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지?"
"후후! 대장에게 소개를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불렀어. 잠깐만."
진수는 문을 열어 주러 나갔다.
'형이 보자고 한 것이 이거 때문이었나?'
잠시 기다리자 진수와 함게 두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1명은 30대 중반의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남자로 지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1명은 스물 살 정도의 여자였는데 근육질의 몸매에 폭발적인 야성의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하룬의 시선이 잠시 여자에게 머물렀다.
'뛰어난 전사구나.'
한눈에 그 기도가 들어왔다. 절제된 몸짓 속에 폭발할 듯 가라앉은 힘이 느껴졌다. 하룬은 그 여자가 남자의 경호원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앉으시지요."
진수의 말을 따라 자리에 앉자 그가 소개를 했다.
"이쪽은 제가 소속되어 있는 돌풍 용병대의 대장 하룬입니다. 대장, 이분은 언더 시티의 지도자이자 사비 길드의 길드장이신 류이시고 옆에는 그분의 따님이셔."
하룬은 수행원이나 경호원이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남자의 딸이라는 사실에 놀라며 인사를 했다.
'언더 시티의 지도자라고? 형이 굉장한 사람과 안면이 있었네.'
정말 놀랄 일이다. 하룬이 알기론 언더 시티는 유니온 당국에 불법 단체로 인식되어 존재 자체를 부인당하는 것은 물론 그 지도자들은 모두 수배되어 있다. 그런데 진수가 언더 시티의 지도자와 안면이 있을 줄이야.
"하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하하! 게임명은 류이지만 실제 이름은 파랑이라고 합니다. 제 딸은 오랑이고요. 현실과 가상에서 위명이 쟁쟁한 하룬 대장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말 귀한 분을 이렇게 직접 대면할 수 있어 기쁩니다."
파랑은 얼굴 가득 호감을 드러내며 하룬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행동에 손을 내미는 하룬의 눈빛이 따듯해졌다. 그런 그를 향해 뜨거운 관심을 담은 시선이 닿았다.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시네요. 전 아빠와 비슷한 연배인줄 알았어요."
"하하! 그랬습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작년에 성인이 되었습니다."
"네에? 어머!어머! 나랑 동갑이시네요."
나이가 같은 것이 뭐가 그리 좋은지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는 오랑의 모습에 하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원래 좀 노안입니다."
"이런! 제 딸이 초면에 큰 실례를 했군요. 워낙 성격이 천방지축이라 저도 제어를 못 한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파랑의 말에 오랑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실례되는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닙니다. 따님이 별 뜻 없이 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실제 나이를 들은 사람들은 좀 많이 놀라는 편입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신경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과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다. 예전에 해골과 같은 몰골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야 지금이 훨씬 나았다. 그래도 이제는 거리를 지나가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이가 없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그런 하룬을 향해 던지는 파랑의 시선이 잠시 강렬해졌다가 정상으로 돌아갔다.
"명성대로 굉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군요. 메마른 것 같으면서도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감성이 느껴집니다. 젊은 분이 정말 대단합니다."
파랑의 말을 들은 하룬은 그가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이가 자신을 엿보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터이니 그 사실을 금방 신경을 꺼 버렸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우연히 만나 목숨까지 구해 준 진수씨가 돌풍 대원인 것을 알고 하룬 대장을 꼭 만나게 해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이렇게 만나 보니 정말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룬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역시 목적이 있는 걸까?'
눈치를 보니 진수도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진수가 자신에대해 말할 리가 없다.
"진수 대원에게 배리어 축소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이들을 받아들여 언더 시티도 이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요."
"아!"
탄성을 지르며 진수를 쳐다보자 그는 복잡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귀중한 정보를 함부로 말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우리에게 힘이 부족해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었는데 언더 시티가 했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진심이었다. 사실 배리어 축소 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지만 많은 이들을 위해 특별히 어떤 수를 내지 못했다. 힘과 능력이 없어 유니온으로부터 축출된 이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지만 소수를, 그것도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취할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 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가식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얼굴로 다 드러났다.
"부끄럽다니요.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언더 시티로 이주를 했는데요. 유니온 정부에 의해 버려진 그분들로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디서 사정을 들었는지 진수가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하룬은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게임 때문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우리가 게으르지 않았다면 선별을 하지 않고 더 많이 받아들일 수도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파랑은 언더 시티가 휴먼력 초기에 지상의 유니온과 함께 건설이 되었으나 채광이나 각종 시설 문제로 인해 효용이 떨어져 버려졌다는 사실과 체제에 반항하는 이들이 압제를 피해 지하로 숨어든 것이 그 효시가 된 것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언더 시티는 유니온의 면적만큼 방대합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방치되었다는 것 등의 여러 문제로 인해 일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휴먼이 살기에는 부적합하지요."
하긴 100년 넘게 버려진 곳이라면 다시 휴먼들이 거주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일 것이다.
"차근차근 준비를 해 왔다면 이번에 버려진 100만 명에 가까운 휴먼들을 다 받아들일 수도 있었는데 우리가 정보를 너무 늦게 입수한 데다가 식량을 비롯해서 가진 힘이 약해 도움을 줄 수 없어서 가슴이 아픕니다."
"아닙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절망에 빠진 휴먼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하룬은 진심으로 파랑이 존경스러웠다. 비록 그가 시장으로 유니온의 원로들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을 모아 처리하는 위치에 있긴 하지만 진수의 태도로 보아 이번 일에 파랑이 큰 힘을 기울였음을 알수 있었다. 유니온에서 포기한 100만 명의 주민들 대다수는 정신병자. 마약중독자, 장애인, 창녀, 도둑과 같은 보더러들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유니온 정부나 GG 혹은 HG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파랑이 달리 보였다. 유약하고 온화한 이미지 속에 강한 신념을 가진 타고난 지도자의 상(像)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혜련이와 비슷한 사람이군.'
맑은 눈은 혜지로 빛나고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강한 신념과 올곧은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가슴이 열리니 대화가 즐거워졌다. 하룬은 마음을 열고 파랑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파랑은 진수와 하룬에게 현재의 유니온 체제의 문제점들과 그 대안들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자 파랑의 전신에서는 휘광이 어렸고 그의 열변은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의식 수준에 의해 진화하는 일종의 생명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구성원들 각각은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그런 활동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로, 참여 없이 이룰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싫다고 귀찮다고 멀리하는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은 멀어집니다. 설사 원하는 것이 오더라도 자신의 것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유니온의 신분 체제를 혁파하고 능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거대한 가족처럼 살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이제까지는 정치나 사회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두 사람에게 제대로 된 사회와 정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주었다.
"제가 오랫만에 마음이 통하는 분들을 만나서 열을 냈내요."
파랑은 거의 3시간에 걸쳐 자신의 생각을 확신에 찬 어조로 웅변했다.
"아닙니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저도요. 시장님의 말씀대로 도전할 수 있고 꿈이 있는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3시간이 훌쩍 흘렀다. 시간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파랑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이야기는 두 사람을 매료시켰다.
'이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휴먼들도 조금은 사는 맛이 나지 않을까?'
파랑은 휴먼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을 열고 싶어 한다. 모두가 함께 노력하면 가능한 꿈을 꿀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하룬은 그저 막연히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조그마한 사회를 만들었지만 특별히 정치나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돌풍 기지는 점점 더 커지고 있지만 명색이 기지의 대장이면서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듣기만 했지만 정치나 사회 분야에 있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시간을 내서 이런 분야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겠구나.'
모든 면에서 부족하기만 한 자신을 자책하는 하룬이다.
"에휴! 한 번 말하기 시작하면 기본이 3시간이라니까. 아빠, 그것도 병이에요."
진지한 분위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던 오랑의 핀잔에 파랑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허! 그러게 말이다. 이 지병은 어째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구나.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굉장히 유익했습니다."
"저도요."
진수도 꽤 감명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빠, 빨리 용건을 말해야죠."
"아! 그렇지."
파랑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몇 번 흔들고는 식은 차를 마셨다.
"사실 진수군에게 대장과의 만남을 부탁한 이유가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그동안 아우터들과 오랫동안 거래를 해 왔습니다. 우리 언더시티에 피룡한 기기들도 많고 시설의 개보수가 필요해서 여러 가지 금속이나 기계 등을 암시장과 아우터들을 통해 구입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체적으로 마련한 식량과 의복, 약품 등을 공급했지요. 그런데 변종 생물들의 발호로 인해 호위대를 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언더시티도 자체 호위대를 운용하고 있지만 변종 생물들을 상대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해 나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진수 대원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현실에도 돌풍 용병대가 존재하고 상행도 직접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 일을 의논하려고 대장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하게 된 겁니다."
파랑 부녀는 기대가 가득한 시선으로 하룬을 주시했다.
'곤란한걸.'
연기는 되었지만 머지않아 데드 벙커 공격이 예정되어 있다. 그 작전에는 모든 전투대원들이 참여할 것이다. 안 그래도 상행을 직접 운용하려는 생각을 했던 만큼 정상적이라면 그 상행에 언더 시티를 참가시키면 된다.
"흐음.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룬은 좀 곤란한 얼굴로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언더 시티의 지도자이니 만큼 굳이 GG의 데드 벙커에 대한 이야기를 숨길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그가 꼭 알아야 하는 정보일 수도 있었기에 말이다.
"헙!"
"세상에!"
파랑 부녀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뜻밖에도 그들은 데드 벙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데드 벙커는 위험한 곳입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위험한 일을 맡았습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하룬은 파랑이 데드 벙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파랑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언더 시티를 건설하신 분들은 휴먼력 초기에 유니온 태동에 관여하신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입니다. 비록 유니온에서 추방당하거나 암살 위협으로 언더 시티를 건설하기는 했지만 그분들은 종말 시대에 뿌리를 두고 암흑 시대에도 독버섯처럼 이어 온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현재 유니온들을 암중으로 장악하고 말도 안 되는 신분 체제를 고착화시킨 것은 그들이 주범입니다."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던 파랑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역시 알고 있구나!"
언더 시티의 규모나 그들의 힘은 알 수 없지만 그들 역시 GG와 HG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중 데드 벙커는 변종 생물을 탄생시킨 것으로 유력하게 의심되는 곳으로 불사(不死)의 생을 원하는 놈들의 지도자들이 공을 들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원래는 오염된 환경에 휴먼들이 적응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전 세계에 3곳이 설립되었으며 이곳 코원 유니온 인근에 있는 곳이 가장 규모도 크고 방대한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곳은 원래 종말시대에 전 세계적인 유전공학 연구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땅속 깊이 건설된 덕분에 암흑 시대를 거치면서도 연구 자료들을 비롯해서 연구 시설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순순한 연구 시설에 불과했지만 빅 유니온들을 암중에 장악한 글로리 가이아의 숨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시킬 목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휴먼력 초기에는 우리 언더 시티나 휴먼 가드를 비롯해 적지 않은 세력들이 그곳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방어는 철벽과 같아서 모두가 실패를 했지요. 그런 곳을 공격하려고 한다니 안 됩니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파랑은 생각 이상으로 데드 벙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룬은 파랑의 걱정은 충분히 받아들였지만 뜻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계획이 있습니다."
"허어. 이거 참!"
파랑은 긴 한숨으로 우려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하룬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전혀 알지 못하던 파랑 부녀가 자신과 돌풍 용병대를 위해 진심으로 걱정해 주자 마음이 뿌듯했다. 이런 것만 보아도 그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언더 시티에서 필요한 물건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용광로 마을에서 가져온 물건들도 있고 GPC와의 거래를 통해 확보한 것들도 있습니다. 만약 재고가 있다면 우선적으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파랑 대신 오랑이 벌떡 일어나 반색을 했다.
"이게 우리가 당장 필요한 물건들이에요."
오랑은 평소에도 가지고 다니는 듯 서둘러 품속에서 몇 장에 달하는 물품 리스트를 꺼내 주었다. 최근에 엄청난 인원을 받아들인 탓인지 그 목록에는 식량과 약품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오랑이 언더 시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룬은 리스트를 보며 아즈만에게 뇌파를 보냈다. 벨과 아리와의 뇌파 통신이 거리나 개인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 비해 아즈만과는 제한이 거의 없었다.
-아즈만, 내가 보고 있는 리스트의 물품 재고를 좀 확인해 줘.
-네, 마스터.
하룬이 꼼꼼하게 리스트를 확인했다.
-마스터, 모든 물품을 다 보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 있는 품목 중 21개는 향후 1년 정도 사용할 양밖에 없어 보유하기를 희망합니다. 그것들을 제외하고는 물량이 충분합니다. 그 물건들을 필요한 수량만큼 반출해도 지난번 GPC와의 거래로 인해 재고는 충분합니다.
아즈만은 제공하기에 부족한 물품들을 불러 주었다. 아즈만의 말을 들은 하룬은 미소를 지었다. 파랑 부녀에게는 뜬금없는 미소로 보이겠지만 하룬은 돕기로 작정한 마당에 도울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이 중 21개 품목을 제외하고는 다 우리 기지에서 충분히 보유하고 있습니다. 내일 중으로 이곳에서 전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하룬의 말에 파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랑은 현재 불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20만에 가까운 인원을 한 번에 받아들이면서 언더 시티가 보유한 각종 자원의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기존 시민들의 불만을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준비된 일이 아니기에 근시일내에 부족한 물품들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시장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던 파랑으로서는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현재 언더 시티의 각종 자원은 많이 부족했다.
"하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갑자기 열 배가 넘게 인구가 느는 바람에 지출이 많아 자금도 부족하고 돌풍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은혜라니요. 친구 간에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더불어 사는 친구의 일이니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지요. 이번에 제공하는 물품은 나중에 여유가 되었을 때 갚으시면 됩니다."
같은 적을 두고 있는 사이이니 여유가 있을 때 도와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다. 하룬의 말에 파랑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친구?"
"네. 우리는 앞으로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미래를 개척해나갈 테니 친구가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친구라는 말은 하룬에게 있어서는 가족과도 같은 개념이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파랑의 말을 통해 하룬은 언더 시티에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하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읽은 것일까? 파랑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친구인 겁니다, 하룬 대장."
"그렇습니다. 뜻이 통하는 순간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전 앞으로 언더 시티를 우리 돌풍 기지의 친구로 생각하겠습니다."
"친구라! 정말 좋은 단어요. 후후! 친구라."
파랑은 친구라는 말이 좋은지 몇 번이나 혼잣말을 했다.
"좋습니다. 돌풍 용병대가 우리를 친구로 생각하니 우리도 친구를 위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데드 벙커를 목표로 한 작전에 우리의 특전대를 파견하지요."
"네에? 아니....."
"호호호! 아빠가 이렇게 화끈하다니 엄마가 봤으면 기절을 했을 거야. 특전대장, 오랑 이하 특전대 250명은 시장의 특별 지시로 데드 벙커 공격에서 선봉에 서겠습니다."
하룬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오랑이 냉큼 파랑의 말에 반응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말하던 오랑이 나중에는 정색을 하고 각오를 다졌다. 그런 그녀의 전신에는 불굴의 용기와 꺾이지 않는 투기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타고난 전사구나.'
전투 실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기세만으로는 용병대 최고의 실력인 철웅이나 로수와 버금갈 정도였다.
"이, 이건 아무래도....."
"하하하! 내가 시티 집행부의 의결 없이 특전단을 움직이겠다는 약속을 하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지만 사실은 시 정관을 보면 GG와 HG 그리고 GPC를 상대하는 특수한 경우에는 별도의 의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우리 윗세대의 숙원이었던 데드 벙커를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하여 돌풍과 같이 움직이려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왠지 대장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내린 결정이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전대장!"
"네, 시장님!"
"이 작전 중에는 특전단의 지휘권은 돌풍 용병대에게 있다. 독자적인 움직임이나 항명은 군율로 다스리겠다!"
"복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이제 완전히 끝을 보였다.
"이건.... 휴우! 감사합니다. 기필코 데드 벙커를 끝장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한 번 더 사양하려던 하룬은 한숨으로 그 마음을 털어 버렸다. 안 그래도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니 도움을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받은 도움만큼 은혜를 갚으면 되는 것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실 진수의 만나자는 말을 전해 듣고 망설였었다. 이래저래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진수를 만나기 위해 어렵게 시간을 낸 것이 우연치 않게 큰 인연을 맺는 결과를 가져왔다.
-호호호! 일이 잘되었군요. 유전자 변형이 심하게 일어나 괴력을 가지게 되었거나 오염된 환경에 특화된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언더 시티의 특전단은, 유니온의 특수대와 비교해도 전혀 달리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어요. 쏘우 조장이 한때 그들에게 슈트를 만들어 줬다고 했어요. 이들의 전력이면 우리가 제공하는 물품의 열 배 정도는 가치가 있어요.
아즈만 역시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쏘우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더 시티에는 유니온에서 폐기한 휴먼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유니온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로 이들은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 외모는 흉측하지만 배리어 밖의 환경에 뛰어난 적응력을 가지고 있으며 뛰어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장애인으로 분류되어 보더러 지역의 보육원으로 버려진 이들은 그 가족들에 의해 은밀하게 언더 시티로 보내지며 유니온과 언더 시티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좋은 인연인 거 같아!'
자신은 워낙 배운 것도 없고 감정도 메말라 있다.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야도 협소하기만 하다. 하룬은 작은 무리라면 모드되 큰 지도자는 될 수 없다고 자평했다. 현재 그는 세상을 암중에서 경영하는 거대 세력들과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고 있다. 1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그 기약 없는 싸움에서 행여 백만분의 일이라도 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거나 더 희박한 확률과 행운으로 그들을 없앨 수 있다면 권력의 공백이 일어난 사회는 혼란에 싸일 것이다.
'그런 혼란기가 오면 저런 분이 나서게 될 거야. 저분이 이끌어 가는 사회라면 적어도 현재의 유니온보다는 나을거야.'
자신이 찾은 소명이 세 거대 세력을 깨부스는 것이라면 파랑의 소명은 유니온 체제에 길들어져 자신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을 계몽하여 절대다수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리라.
'난 내가 할 일만 하면 돼!'
자신이 할 일만 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 이후의 일은 자신이 걱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룬과 파랑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하며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확실히 유니온에 대해서는 파랑이 훨씬 더 폭넓고 깊이 있는 정보를 알고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최상위 권력 기관인 원로원의 구성과 원로들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행정원을 비롯한 행정사법 조직들과 군부 그리고 그들의 최근 동향에 이르기까지 파랑이 알고 있는 정보는 실로 방대했다.
유니온 주민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초단파 통신을 통해 세계 곳곳의 유니온 지하에 존재하는 다른 언더 시티들과의 교류를 가지고 있는 언더 시티의 정보력은 아주 뛰어났다. 파랑과의 만남을 통해 돌풍 기지는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하룬 자신은 자신의 꿈과 이후에 걸어갈 행보에 대해 명확한 사고를 정립할 수 있었다. 기지로 돌아온 하룬은 친위조로 하여금 언더 시티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지하 통로를 통해 전달하도록 조치했다.
'이제 돌풍 기지는 혼자가 아니다!'
언더 시티를 생각하자 하룬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비록 그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전력도 약하지만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했다. 더구나 그 지도자는 올곧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을 마무리하고 그동안 쌓인 결재 서류와 씨름을 하던 하룬은 럼과 레이스의 방문을 받았다.
"대장님, 할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좋은 관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왜 찾아왔는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일단 앉아. 그리고 대원의 자격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친구의 자격으로 온 거면 이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나도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는 친구와 편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하룬의 말에 럼이 활짝 웃으며 레이스와 함게 자리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럼은 각고의 노력 끝에 최근에 검기 사용자가 되었다. 레이스는 나인을 비롯한 12명의 이능력자를 지휘하는 특수조를 책임지고 있었다. 머잖아 그녀는 이능력자들만의 특수조 조장이 될 예정이었다.
"우리 결혼하려고."
럼은 잠시 망설이다가 얼굴을 붉히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결혼?"
뜻밖의 말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부모님들도 허락하셨어."
"...."
하룬은 입을 떡 벌리고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터져 나온 웃음소리.
"하하하핫! 하하핫!"
새로운 식구들로 인해 기지 전체의 업무가 폭증해서 생긴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정말 축하해!"
하룬은 두 사람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기지가 출범한 후 최초로 새로운 부부가 탄생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별게 아닐 수도 있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가정이 탄생한다는 건 모두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양쪽 부모님도 이리로 이주하시겠다고 하시는데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지."
아직 돌풍 기지에 여유는 많다. 더구나 다양한 경험을 가진 어른들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고마워, 대장. 아버지가 많이 좋아하실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네 아버지는 방위청에서 근무하시잖아. 그럼 안전하실 텐데."
방위청에서 근무를 한다면 생활은 안정되었고 안전도 일반 주민들에 비해 양호한 상태다. 물론 자식과 같이 살고 싶어 이주할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쌓은 많은 것들이 있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번 배리어 축소를 보시면서 많은 생각을 하신 거 같아. 노블들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은 언제라도 버려질 수 있다고 느끼셨나 봐. 우리 부모님들뿐 아니라 많은 주민들이 그런 생각으로 무척이나 불안하게 살고 있대."
"럼의 말이 맞아요, 대장. 저희 부모님의 경우에도 비슷한 이유로 이주를 결심하셨어요. 이제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든 유니온이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하며 노블들의 전횡을 지켜봤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요. 다들 언제 버려질지 몰라 불안하게 살고 있더라고요. 이능력을 가지고 있어 같은 훈련을 받은 친구 셋도 이참에 이곳으로 이주하기로 했어요."
그러고 보니 유니온은 이번 배리어 축소 건으로 인해 많은것을 잃은 것 같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민들이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신뢰를 잃은 것이다. 그 신뢰는 노블들이 권력과 금력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게 했던 바탕이었다. 일단 자신도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유니온에 대한 불신감과 함께 유니온 체제에 대한 총체적인 반감을 키우게 했다. 주민들은 이제까지 온갖 불평등을 감수하게 만든 소속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이번 배리어 축소로 인해 유니온은 큰 변혁을 맞이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룬은 잠시 스쳐가는 생각에 심각해졌다가 굳게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을 보고 다시 얼굴을 풀었다.
"결혼식은 언제 할래?"
"결혼식? 아니, 우리는 그냥....."
주저하며 말하는 럼의 태도를 보니 두 사람이 합의한 상태에서 동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아마 그를 찾아온 이유도 두 사람이 동거하기로 한 사실을 알리고 새로운 집의 배정을 부탁하러 온 것 같았다. 잠시 결혼에 대해서 생각을 한 하룬은 고개를 흔들었다.
"결혼식을 올려야 해! 너희 둘의 결혼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야. 우리 돌풍 기지가 탄생하고 나서 처음으로 맺어지는 부부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부모님과 기지 식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모두에게 확인받고 약속해야지."
"그, 그게....."
럼과 레이스는 그저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자신들도 결혼식을 생각했지만 워낙 가진 것도 없고 유니온 내의 관습으로도 특별한 예식을 하지 않고 눈 맞으면 바로 동거를 하기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다.
"양쪽 부모님은 언제까지 오실 수 있대?"
"일주일 후에 모시러 가기로 했어. 가구 같은 건 필요 없으니 돈이나 옷과 같은 물건들만 챙기시면 되니까 오래 걸릴일도 없어."
"좋아! 이 문제는 내가 책임지지. 앞으로 열흘 후에 기지 최초의 결혼식이 열릴 테니까 두 사람은 마음이 급해도 열흘만 더 참아. 사고 치지 말고."
".....사고는 벌써 쳤지. 임신 3개월인데......"
"뭐야? 이 녀석, 알고 보니 수련은 하지 않고 연애만 했잖아!"
"아, 아니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다고. 전투조 회식 때 레이스가 술만 권하지 않았으면 사고는 치지 않았을 거라고."
애써 변명을 하는 럼과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레이스를 보는 하룬의 눈빛은 따스했다. 두 사람의 결혼과 2세 소식이 마치 기지의 미래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