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어 축소
벨을 통해 연락을 받은 박살 대장간 식구들은 며칠 동안 고민을 했다.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떠나자!"
드디어 가장인 바란이 결정을 내렸다. 가족들은 그의 결정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언제든 떠나려고 했던 것이다. 다만 이주에 따른 문제가 많아 그 시기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곳은 어떨까?"
"이곳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렇겠지."
해란과 세란은 걱정보다는 기대가 큰지 밝은 얼굴이었다.
"너희들은 돌풍 기지로 연락해서 우리 결정을 알리고 이주할 준비를 하렴. 나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 볼 테니까."
바란은 이번에 돌풍 기지로 가면서 아는 친구들을 다 데리고 갈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제 배리어 밖으로 내몰릴지 모르는 이런 곳에서 살 수는 없지.'
더 이상 유니온 정부에 대한 신뢰가 없다. 하룬의 말이 사실이라면 벌써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유니온은 조용하기만 하다.
'결국 보더러들은 버리겠다는 얘기지.'
사회의 밑바닥을 구성하는 하층민들은 그 어떤 사회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들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유니온 정부는 모르는 모양이다. 누구든 보더러가 될 수 있는데 이렇게 처리한다면 누가 유니온을 따를 것인가. 이번에는 피한다고 하더라도 언제 배리어가 더 축소될지 모르는데 이곳에서 살 수는 없다.
돌풍 기지라면 자신과 같은 장인들이 필요할 테니 대우를 해 줄 때 이주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게에 남은 해란과 세란은 걱정이 많았다. 그간 가게 일이 줄어드는 바람에 덩달아 게임에 집중하느라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유니온을 축소할까?"
"틀림없어. 하룬은 괜한 말을 하는 애가 아니잖아."
"하긴, 걔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예전부터 나왔던 이야기고."
"어차피 아우터들과의 교역이 중단되면서 내수에만 의존해야 하는데 내수 가지고는 가게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으니까 지금 움직이는 것이 정답이야."
"그나저나 이주하려면 짐 옮기는 게 제일 문제야."
"그건 하룬이 알아서 해 주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 보통 문제가 아니다. 소형 용광로부터 시작해서 가져갈 것들은 모두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인력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걱정스러웠지만 하룬을 생각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지만 하룬은 어렵지 않게 처리를 했던 것이 그녀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게임은 할 수 있겠지?"
"당연하지. 혜련이에게 들으니까 돌풍 기지의 식구가 되면 각자 소속을 정해야 하는데 만약 게임을 통해 돈을 벌기를 희망한다면 상인조에 들면 된다더라. 그게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여가 생활로 즐기든지."
해란과 세란은 걱정과 기대를 하며 돌풍 기지로 이주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진수도 벨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진수는 친구들에게 배리어 축소에 대한 것을 전해 주었다. 둘은 자신처럼 고아인 터라 별 관계가 없었지만 세 친구는 가족들이 F구역에 있어 빨리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도 방은 많았고 부족하면 하룬이 살던 집을 구입해 두었으니 그곳에 거주하면 될 것이다. 그동안 무능력자로 분류되어 제대로 가족을 챙기지 못했던 친구들이 간만에 어깨를 으쓱일 일이었다. 진수는 예전에 챙겼어야 했는데 게임에 빠져 못했다는 반성을 하면서 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지만 세 친구는 진수와 하룬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고맙다, 진수야! 하룬 대장과 네 은혜는 언제고 내 목숨을 받쳐서라도 갚을게."
"나도 두 사람 덕분에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아들과 오빠역할을 할 수 있게 됬어. 나 역시 같은 마음이야."
"이제 더 이상 F구역에서 사는 가족들 떄문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용병대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가족들도 편안하게 살게 되었고. 이 모든 것이 대장과 네 덕분이야. 유니온에서는 무능력하다고 버린 몸이지만 필요하다면 지옥의 유황불에라도 들어갈게."
세 친구는 물론이고 다른 두 친구까지 은혜 운운하며 진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진수가 평소에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이렇게 게임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은 하룬 덕분이라고 말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하룬이 자신에게 준 거금에서 친구들 몫의 월급을 꼬박꼬박 주었던 것이 이런 오해를 가져왔다.
"진수야,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까?"
친구들의 물음에 진수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섯 친구는 마치 병아리처럼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내린 결정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참에 그냥 돌풍 기지로 들어갈까?"
그 말에 친구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면 우리야 좋지. 우리가 명색이 돌풍 용병대의 히든 대원들 아니냐. 기지로 들어가면 그래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지 않겠어?"
"그래. 굳이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은 편할 거야."
"이제는 우리도 제법 돈을 벌 수 있으니 기지에도 미안하지 않을 거고."
친구들의 반응은 배리어 축소와는 상관없이 이참에 돌풍 기지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자신이 이렇게 편하게 게임을 즐기면서 살 수 있게 해 준 것은 하룬이다. 그런 하룬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기에 고민을 하는 것이다.
'아니야! 우리야 기지로 들어가면 편하겠지만 돌풍 용병대는 기지 외에도 유니온 안에 거점이 있어야 해.'
물론 자신 말고 다른 이가 하룬을 돕고 있을 수도 있지만 진수는 그런 이들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 준 동생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골드런:훈훈하네)
'기지에는 나 말고도 하룬을 도울 이들은 많아.'
그걸 생각하자 고민은 사라졌다.
"아니, 이곳에 남자!"
"왜?"
"유니온 안에도 거점이 있어야 해. 그게 지금 우리가 돌풍 기지를 도울 수 있는 일이야."
친구들은 진수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알겠는데 현실에서 우리가 도울 일이 있을까?"
"그건 모르지."
진수는 불안할 수 있지만 당분간 기지로 이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혹시 사비 길드 아니, 언더 시티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무비의 말에 진수의 눈빛이 강해졌다.
'유니온의 체제에 반항적인 인사들이 이끌고 있는 언더시티라면 정민 아니, 하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하룬의 부탁으로 스카이루프 산맥의 그린 엘프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도왔던 사비 길드는 코원 유니온의 언더 시티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유니온을 지향하는 이들은 휴먼력 초기부터 유니온 지배 세력들에 밀려 배리어 밖으로 추방당하거나 암살 위협을 받았다. 그들 대부분은 식자층으로 독재화되어 가는 과학자 그룹과 경제인 그룹에 대항했지만 하나둘 제거 대상이 되어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이 암살을 피해 모여든 곳이 바로 계획도시인 유니온의 지하였다. 원래 유니온의 지하 30미터 지점에는 거대한 상하수도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곳에 모여든 이들은 힘을 모아 지하에 개미집과 같은 거대한 도시를 건설해 왔다. 사비 길드의 길드장인 류에 의하면 빅 유니온의 지하에는 어느 곳이든 언더 시티가 있으며 나름의 사회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현재 유니온에서 실전된 지식과 기술 들이 있어 암시장을 통해 유니온의 지하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지상의 주민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며 그들 나름의 사회를 건설했다. 물론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지상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지만 그들의 능력은 무척 뛰어났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최근 빅 유니온에서 배리어를 축소한다면서 받아들인 유민들로 인해 엄청난 숫자로 불어났다고 한다. 배리어 축소는 100년이 넘게 나름대로 생존해 온 그들의 힘이 급속도로 커져 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진수와 친구들은 기아에 굶주린 상황에서 오크들에게 포위되어 거의 죽어 가던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사비 길드의 길드원들은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며 깍듯하게 생명의 은인으로 대했다. 그들은 진수 일행이 돌풍 용병대의 히든 대원이라는 사실과 코원 유니온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며 헤어지기전에 신신당부를 했다.
-현실에도 돌풍 용병대가 있으며 배리어 밖에 거점이 있다는 정보는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돌풍 용병대와 거래를 할 일이 많을 것 같군요. 굳이 거래가 아니라 언제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찾아 주십시오. 코원 유니온 지하에도 우리 언더 시티가 있습니다.
스카이루프 산맥을 빠져나오면서 동행했던 시간을 통해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좋아! 일단 대장을 만나면 의논해 보자. 어쩌면 대장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거야."
진수는 일단 벨과 통신을 해 보기로 했다.
자정.
오늘따라 배리어는 달빛까지 삼켜 버릴 정도로 불투명한것이 기분 나쁜 밤이었다. F구역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은 다음 날 새벽 출근을 위해 일찍 잠이 들었고 소수에 속하는 부랑자들과 환락에 찌든 막장 인생들은 술과 섹스를 탐하기 위해 환락의 거리를 비틀거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서클 스트리트는 거대한 원형의 거리로,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이 혼재하는 지역 그리고 배리어와 가까운 비하우스(벌집) 지역을 분리한다. 그런데 그 거리에 수많은 방위군들이 집결해 있었다.
"뭐야?"
"나도 모르지. 오르그의 대습격이 있을 거라고 하던데....."
방위군들은 지정된 곳에 집결했지만 뭔지 모를 불안감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분명 통상적인 작전은 아니다. 이 정도인원 이라면 모든 방원군이 다 소집되었을 것이다.
"오르그의 습격이라면 배리어 근처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위에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원."
방위군들은 흔히 보더 에어리어 칭하는 지역을 바라보았다. 유니온 정부에 의해서 무능력자로 판명이 되었거나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진 자들이 사는 F구역도 정확하게는 세 지역으로 나뉜다. E구역과 인접한 곳은 그나마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어 나름 부유하고 여유 있는 자들이 사는 지역이며, 배리어와 가까운 지역은 그야말로 가장 하층 주민이 비하우스라고 부르는 원룸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중간의 서클 스트리트는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이 겹쳐 있다. 그렇게 방위군들이 대기하고 있는 사이에 지휘자들이 회의를 마치고 흩어졌다. 그리고 그에 마추어 유니온 안쪽에서 수많은 건설기계들이 서클 스트리트로 몰려들고 있었다.
폭이 20미터에 달하는 서클 스트리트의 중앙에는 폭이 3미터에 달하는 분리대가 있었는데 그곳은 이미 깊이 파진 상태였다. 듣기로는 전기망 공사를 위해서 판 것이라고 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방위군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하달받은 작전과는 너무나 상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소대장, 무슨 일입니까?"
한 병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자신들을 불러 모은 소대장에게 물었다.
"정식 작전이 하달되었다. 배리어 축소 작전이다!"
"네에?"
병사들이 화들짝 놀랐다.
"행정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발전 시설 노후화에 따른 에너지 부족 문제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배리어 축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고려한 것이 유니온에 아무필요도 없는 폐인들과 범죄자들 그리고 체제 저항자들의 처리 문제였다."
"딸꾹!"
긴장을 한 병사 중에는 딸꾹질을 하는 이도 나왔다.
"많은 논의를 통해 행정원과 원로원은 보더 지역과 보더러들을 유니온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그 경계가 바로 이거리다. 우리가 할 일은 이제 더 이상 유니온 주민이 아닌 자들이 새로 건설된 강철 벽을 손상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벽을 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다."
"...."
병사들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질문을 했다.
"설마.... 죽이는 겁니까?"
"강철 벽을 접근하면 그렇게 해야지. 저들은 우리 유니온의 병균이다. 안으로 들일 자는 이미 선별해서 들였으니 남은 자들은 모두 필요 없는 존재들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동정심은 버려라."
군 경력이 일천한 몇 명의 병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은 유니온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는데 잠깐 사이 이 거리를 경계로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 괴리감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배리어를 축소한다는 소문은 언젠가부터 은밀하게 퍼졌지만 설마 이렇게 전격적으로 실시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저 너머에 사는 휴먼들은 더 이상 이너들이 아니다. 술과 마약 그리고 섹스에 중독된 자들은 그동안 우리 유니온을 좀먹어 왔다. 그들이 떨어져 나가면 남은 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요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쓸데없는 동정은 금물이다."
소대장은 방금 전 회의에서 들은 것을 그대로 대원들에게 전했다.
"그, 그래도....."
"쓰읍!"
누군가 주저하며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소대장이 눈을 부라리자 황급히 입을 닫았다.
"지금 이 시각부터 아무터들과 내통하거나 거래를 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추방이다.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해당하는 사항이니 명심해라."
"....네!"
더 이상 불만이 입으로 흘러나오지는 않았지만 비하우스 지역을 바라보는 소대장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제길! 졸지에 100만 명 정도가 아우터로 전락하는군.'
유니온 인구의 15%가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오르그들의 먹이로 전락하거나 혹은 운이 좋으면 아우터로서의 힘겨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 많은 휴먼들이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이렇게 한순간에 배리어 밖으로 밀리는 현실은 그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휴우! 어쩔 수 없지.'
이런 현상은 코원 유니온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미 빅 유니온들은 상당수가 이렇게 배리어를 축소하거나 축소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 경우에 대비해서 미리 선량한 주민들은 주거지를 더 안쪽으로 옮겼다는 유니온 정부의 말이 사실이기만을 기대해야 했다.
"정확히 0시 30분에 거리 중앙에 있는 분리대 위치에 강철로 된 방벽을 세울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혹시 모를 아우터들의 공격과 유니온으로의 침투를 막는 것이다. 지금부터 입자건의 발사를 허가한다!"
거대한 건설기계들이 이미 너비 3미터, 높이 7미터에 달하는 강철판들을 붙잡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 저편에도 어느새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건설기계들이 내는 굉음에 잠이 깨어 밖으로 나온 주민들이거나 혹은 이제야 귀가를 하는 주민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밤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격수들은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거리에 나와 있는 아우터들을 저격하라. 소란이 커지면 우리만 힘들어진다."
시간이 되자 소대장이 말없이 빔소드를 뽑아 위로 쳐들었다.
핑! 피비빙! 피잉!
저격수들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주민들을 향해 입자탄을 발사했다. 거리라고 해 봐야 겨우 10미터였기에 입자탄에 맞은 주민들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부서진 몸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목격자들이 사라지자 대기를 하고 있던 거대한 레미콘 차들이 큰 호스를 통해 이미 깊게 파여진 구덩이에 강화콘크리트 용액을 붓기 시작했다. 다음은 건설기계들 차례였다. 거대한 집게를 가진 기계들은 두 기가 한 조가 되어 거대한 강철판을 들어 올려 강화콘크리트 용액 속에 끼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콘크리트가 굳는 하루가 가장 중요하다. 방벽에 접근하는 물체는 무조건 말살하라는 것이 상부의 명령이다. 다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라."
소대장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언제 와 있었는지 10명이 탈 수 있는 가슴 높이의 안전망이 설치된 리프트가 있었다. 공사장에서 흔히 쓰이는 것이지만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은 몰랐다. 방위군들은 무기를 휴대하고 리프트에 올라갔다. 철골 사다리가 움직이자 7미터 높이의 방벽 너머가 훤히 보이는 높이까지 올라갔다.
'휴우!'
어둠에 잠겨 있는 비하우스 지역과 그 중심에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트레시 스트리트가 눈에 들어오자 방위군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남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떨려 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제기랄! 하루아침에 아우터로 전락해서 변종 생물의 먹잇감이 되어야 하다니. 이거 완전히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군. 이러다가 내가 사는 D구역까지 이렇게 되는 거 아니야?'
방위군들의 눈빛은 착잡하기만 했다.
-방벽으로 접근하는 물체는 무조건 파괴하라! 반복한다! 방벽으로 접근하는 물체는 모두 파괴하라!
함께 탄 소대장이 이어폰으로부터 명령을 하달받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통신기를 통해 소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방위군들이 입자건을 안전 모드에서 발사 모드로 전환하고 가슴 높이의 턱에 거치를 했을 때는 이미 자신들이 맡은 300미터의 구간에는 높이 7미터의 강철 벽이 빼곡하게 세워진 상태였다.
"이게 뭐야?"
"웬 벽이 생긴 거지?"
한밤에 울리는 기계음에 놀라 밖으로 나온 비하우스의 주민들은 높이 세워진 강철 벽의 존재에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악! 시체가 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민들은 먼저 나왔다가 저격을 받아 죽은 시체를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사격 개시!
-하지만 저들은 그저 보기만 하고.....
-닥쳐 더 수가 늘어나면 곤란해. 사격 개시!
소대장의 명령에 리프트에 올라탄 방위군들은 조준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핑! 핑! 핑!
"컥!"
"크윽!"
"뭐야? 왜 이래?"
갑자기 생겨난 강철 벽에 놀라 모이던 주민들은 방위군들의 사격을 받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강철 벽을 세운 건설기계들은 대형 운송 컨베이어들이 나른 두께 3미터에 가로세로 3.5미터의 거대한 벽돌을 강철 벽에 붙여 쌓기 시작했다. 벽의 방호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보강 시설이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배리어가 방호벽 안쪽으로 축소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염된 환경에 노출되는 지역의 주민들은 당장 직면한 생존 문제에만 몰두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런 살육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강철 벽과 가까운 지역부터 시작해서 비하우스들의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이내 처참한 사태로 이어지는 것은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런 배리어의 축소 정책은 30개의 빅 유니온 전테로 급격히 파급되었다. 에너지 문제로 촉발된 이 정책은 남은 자들에게는 유니온 경제를 병들게 하는 범죄자들과 무능력자들을 분리한다는 명분으로 진행되었다.
일부의 유니온을 제외하고는 약 1년의 준비 기간 동안 축출할 대상을 선별해서 이미 거주지를 바꾸었고 그간 S에서 F까지 있던 구역을 통합하여 다시 3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NS, NI, NO의 3개로 재편된 구역 안에서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주어졌고 동일한 대우를 했다. 극도의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만연하는 유니온 체제하에서 하루를 살기에도 빠듯한 주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아우터를 양산했던 사건을 잊기 시작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도 잘못하면 배리어 밖으로 추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간 유니온 체제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했던 수많은 주민들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돈 것도 그런 공포를 부추겼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전체 인구의 20%가량을 배리어 밖으로 밀어낸 이 정책으로 인해 각 유니온의 분위기는 흉흉하기만 했다. 상황에 따라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들 불안해했고 그 결과 가상현실 게임의 접속자가 늘기도 했다.
배리어 밖에 놓인 지역은 일시에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폭동이 일어났지만 진입할 주체가 없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구역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점들이 불타고 악탈당한것을 시작으로 생존을 위해 무리를 짓고 무기를 마련해서 세력을 키우는 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시간이 더 흐르자 그들은 무리를 이끌고 살아남기 위한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오직 힘이 있는 자들이 한정된 자원을 소유하고 자기 무리에게만 분배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생산 시설이 없는 지역이라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많은 주민들이 무리를 지어 부족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밤을 이용해서 아우터들이 모여 산다는 산간 지역으로 탈출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으로 인해 허벅지 어름까지 모래가 쌓인 도시는 이글거리는 햇볕 때문에 낮에는 유령의 도시로 변했고 오염된 환경에 노출된 건물들은 빠른 속도로 노화되기 시작했다. 현실의 일은 게임 비욘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단 접속자 수가 상당 폭 감소했다.
신규로 유입된 게이머들도 많았지만 상당수를 차지하던 게임 폐인들이 대거 무능력자로 분류된 보더러였던 탓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식료품을 구하는 것과 변종 생물과 싸워 생존하는 것이 지상 명제가 되었다. 가상현실 게임은 이제는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오락이 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데빌 산맥의 다크니스 성을 공략하는 것도 많은 지장을 받고 있었다. 각 길드의 하부 조직원들 중에도 보더러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배리어 축소 소식을 듣고도 마지막 성의 공략에 몰두했던 하룬은 만 하루가 지나서야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마침내 세 번째 성까지 공략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룬은 고생한 부대장 부부와 고문단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고 새로운 정보를 핑계로 현실로 나올 수 있었다. 벨과 아리가 캡슐 밖으로 나온 하룬을 반겼다.
"어떻게 된 거야?"
"너무나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서 언니나 나도 아무 징후를 느끼지 못했어."
사실 벨과 아리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 일을 파악하지 못할리가 없지만 두 사람은 현재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벨은 벼리를 비롯한 GG의 인물들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한편 기지 일을 하고 있었고 아리는 쏘우와 함게 알코르 전단원들이 착용한 슈트를 통해 배리어 생성 원리를 파악하느라 이제야 그 사태를 알게 되었다.
"아무튼 직접 가 봐야겠어!"
"준비할게."
하룬은 바이크들을 모두 이끌고 전투조 대원들과 함게 이제는 배리어가 사라진 F구역 안으로 진입했다. 2개의 달은 무심하게 정적에 빠진 F구역을 비추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유니온에서 버린 사람들의 8할 정도는 오늘 저녁 무렵에 이곳을 빠져나갔어."
벨은 이미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빠져나가?"
"응, 오빠. 방위군이나 유니온 관료 출신으로 장애를 입거나 퇴출이 된 자들이 주축으로 동남쪽을 향해 떠났어. 또한 GG의 하부 조직에 있었던 자들도 무리를 이끌고 출발했고."
남은 사람의 8할이라면 거의 80만 명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벨과 아리에게 들은 바로는 유니온에서 버려진 사람들은 100만 명 정도였다. 그들 상당수는 특별한 능력이 없어 뚜렷한 직장이 없을뿐더러 유니온 체제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보더러들이다. 뚜렷한 직장과 가정이 있는 자들은 최우선으로 잔류가 허락되었기에 버려진 자들은 대부분 혼자였다. 그들 중에는 폭력 조직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들과 아우터거나 출생 등록이 되지 않은 비시민(非市民), 한때는 시민이었지만 각종 사고로 인해 쓸모가 없어진 이들도 섞여 있었다.
"동남쪽이라? 척추 산맥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유니온의 동남쪽에는 척추 산맥과 연결되는 높고 험한 산들이 있다. 아마 그들은 척추 산맥에 흩어져 사는 아우터 마을들을 찾아 나선 것 같았다. 하룬의 생각보다는 빨리 움직인 것이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동남쪽을 쳐다보는 하룬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북방에서 내려온 문명 오르그들에 의해 쫓겨난 포악한 오르그들이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배리어가 축소된다는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퍼져 있었고 최근 주거 변경이 자주 이루어졌기에 나름대로 무리를 이끄는 자들이 준비를 했나 봐요."
하긴 배리어 축소에 대한 소문은 이미 1년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배리어가 사라진 이상 이곳에 더 머무르다가는 보유하고 있는 식량만 축내다가 오르그와 하르크 들의 머기악 될 뿐이라는 사실을 보더러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럼 2할이 남은 건가?"
죽음만큼 칙칙한 침묵이 짙게 깔린 거리를 걷는 기분은 참으로 기이했다. 한때는 자신에게도 절망적인 삶의 기반이었건만 지금은 발목 위까지 쌓인 흙먼지가 말해 주듯 하루 만에 유령의 도시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응. 20만 정도가 남은 거지. 그런데 그게 이상해. 출발하기 전에 위성을 통해 생명 반응을 체크했는데 지금 이 도시에 남은 것은 수천 명도 되지 않아."
"그래?"
하룬의 눈매가 좁아졌다.
"이상해. 위성으로도 아무런 것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줄잡아 20만 정도가 꺼진 듯이 사라졌어."
"그거 정말 이상한 일이군."
위성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20만에 가까운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남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트래시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생체 반응이 감지되고 있어."
벨의 팔목에 채워진 초소형 컴퓨터가 만들어 낸 홀로그램에는 각종 폭력 조직이 기생하고 있던 트래시 스트리트에 생체 반응을 의미하는 파란 점들이 몰려 있었다.
"가 보자!"
하룬은 빠르게 트래시 스트리트로 이동했다. 하룬은 백여 대의 개조 바이크에 나눠 타고 있는 대원들을 트래시 스트리트의 입구에 대기하도록 하고 친위대와 벨만 데리고 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글로리 가이아의 하부 조직이 장악한 곳이니 만큼 트래시 스트리트는 위험한 곳이었다. 한꺼번에 병력을 몰고 들어갔다가는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몰랐다.
"이런!"
비록 음습하기는 했지만 환락의 거리로 불렸던 트래시 스트리트는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수많은 상점들이 부서져 있거나 불타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거리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 대부분이 노약자들이거나 창녀들로 추정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폭동이 일어난 것은 이해할 수가 있다. 버려졌다는 현실과 변종 생물에 대한 공포로 충분히 미쳐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니 일시에 터진 광기와 발작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 널린 시체는 대부분이 노인이거나 아이들이다. 중간에는 젊은 사체들도 있었지만 짙은 화장과 싸구려 향수를 뿌린 창녀들이었다.
'설마 글로리 가이아 놈들이 이 살육을 벌인 건가?'
원래 이 트래시 스트리트를 장악했던 것은 글로리 가이아의 하부 세력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정보력이라면 이미 이곳을 빠져나갔을텐데.'
어쩌면 글로리 가이아의 상부 조직에서 하부 조직을 통째로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달빛을 제대로 들지 않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 순간 하룬의 걸음이 멈추었다. 누군가 하룬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누구냐?"
"으으으.... 사, 살려 주세요!"
신음이 가녀린 것을 보면 어린아이가 분명했다. 흙먼지로 뿌옇게 변한 고글을 올리고 내려다보니 일고여덟 살 정도 되는 소년이 쓰러진 상태로 자신의 발목을 필사적으로 잡고 있었다.
"우리도 데리고 가 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소매치기뿐 아니라 남자 손님도 받을 테니 제발...."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말라 버린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진 얼굴 가운데서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말하는 것을 보니 출생 등록도 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키워져 소매치기를 전전하던 아이인 것 같았다. 하룬은 소년을 안았다. 살이나 근육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깡마른 소년의 몸은, 살아온 삶의 무게처럼 가볍기만 했다.
"이름이 뭐냐?"
"이름은 없고 갈비라고들 불렀어요."
불쌍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자신은 이름이라도 있었건만 이 녀석은 누구도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 불쌍해라!"
어느새 다가온 벨이 소년의 몰골을 보더니 울상이 되어 재빨리 녀석의 상태를 확인했다.
"갈비뼈 세 대가 부러졌고 발목도 부러졌어. 오른쪽 팔은 탈골이 되었고 장출혈이 있었던 거 같아."
"빨리 치료해 줘라!"
하룬은 골목에서 나와 바이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품에 안긴 소년의 눈빛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드디어 보호자를 만난 것이다.
"좀 참아! 이 누나가 아프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알았지?"
"네, 예쁜 누나!"
갈비는 어느새 고글을 올린 벨의 얼굴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룬에게 내공 심법을 배운 벨은 하룬이나 아리와는 또 다른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기를 통한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의료 분야를 맡은 혜련을 몇 번 도와주던 벨은 하룬이 가르쳐준 내공 심법을 통해 놀라운 속도로 기를 축적했는데 그녀의 기는 상처를 치료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벨은 장갑을 벗고 기를 끌어 올려 소년의 몸 안으로 흘려 넣었다. 부러진 갈비뼈는 물론이고 발목의 부러진 부위를 기로 감싸고 뼈를 움직이자 제자리를 찾았다. 거의 발달하지 못한 근육과 인대가 아리의 기를 받아들여 급속하게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그 후 탈골된 팔을 맞추고 출혈이 일어난 장을 부드럽게 기로 어루만지자 이제까지 고통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신음하던 갈비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그게...."
갈비라는 소년 역시 모든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저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을 뿐이다. 하룬과 벨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했다. 갈비의 말을 들은 벨이나 하룬은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글로리 가이아의 하부 조직에 있던 놈들이 화풀이를 한 모양이네요."
"그래. 아리 말이 맞는거 같아."
글로리 가이아의 하부 세력은 상부로부터 버림을 받은 모양이다. 수뇌부 일부만 제외하고는 배리어가 축소되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광기와 분노에 젖어 버린 놈들은 그동안 자신들에게 많은 돈을 벌게 해 준 범죄 조직의 최하층에 그 화를 풀었다. 앵벌이와 소매치기, 도둑칠, 매춘을 통해 자신들에게 돈을 벌게 해 준 불쌍한 노약자와 창녀 들의 효용이 사라지자 만 하루에 걸쳐 놈들은 공포와 분노를 그들에게 풀었던 것이다. 특히 성인들과 노인들이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지금 이 거리에 남아 있는 휴먼들은 대부분 아이들이며 창녀 출신들이 일부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 나쁜 놈들은 동남쪽에 있는 구름 산이라는 곳으로 간다고 했어요."
구름 산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글로리 가이아와 연관이 있는 곳일 것이다.
'언제고 반드시 모두 죽여 주지!'
하룬은 격렬한 분노를 속으로 삭였다. 지금 따라간다면 잡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벨아, 돌풍 기지에 얼마나 수용할 수 있지?"
"며칠 작업을 하면 최대 1,500명까지는 수용할 수 있어."
빈 지하층들을 거주 시설로 바꾸는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미 상당한 물자를 비축해 둔 것이다. 더구나 바란 가족이 엄청난 재료와 함께 암시장의 장인 가족들을 대거 데리고 왔기에 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마약중독은 치료할 수 있겠어?"
일전에 하룬은 혜련을 기지의 의료조장으로 임명하면서 마약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라고 했었다. 그때는 지나치듯 한 말이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그 경과가 궁금했다.
"성인의 경우 완치는 어렵다고 했어. 아즈만 언니의 의견도 그렇고. 다만 마약에 노출된 시간이 5년 미만이고 성장기에 있는 경우 시간이 걸리고 후유증이 남긴 하지만 완치할수 있다고 했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정도라도 다행이다. 하룬은 대원들을 거리로 불러들여 건물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했다.
"우리는 돌풍 용병대입니다! 여러분들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우리와 함께 유니온을 떠날 사람들은 빨리 밖으로 나오십시오. 이곳은 곧 변종 생물들의 세상이 될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나오십시오."
대원들은 바이크를 타고 골목을 누비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나오세요! 오늘 밤 안에 이동을 해야 합니다!"
"오르그들과 하르크들이 몰려올 겁니다. 서두르세요!"
대원들이 소리를 높이며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빌어먹을!'
평생 이 좁은 거리에 갇혀 사육되다시피 생활했던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의로 그 어떤 행동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자유를 주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며 지금은 극심한 공포에 잠식되어 좁고 허름한 공간에 숨어 있을 것이다. 하룬은 답답한 마음에 헬멧을 벗고 대원들 틈에 끼어 골목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가 한 건물로 들어가서 밖으로 나올 것을 설득하다가 포기를 하고 돌아서려던 때였다.
"아저씨!"
어둠 속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소리는 건물의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났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계단에서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누구?"
하룬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F구역에서 몇 년 동안 살긴 했지만 그가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더구나 트래시 스트리트는 와 본 적이 거의 없다. 어둠 속에서 달빛이 비치는 입구로 천천히 나오는 인영은 작았다. 거의 허리에도 채 미치지 못할 정도의 작고 가녀린 체구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넌?"
어딘지 익숙했지만 기억은 또렷하지 않았다.
"스팟이에요. 아저씨의 그 맑고 강렬한 눈빛 때문에 알아봤어요."
어딜 어떻게 맞은 건지 얼굴 반면이 시퍼렇게 멍이 든 소녀는 입술과 볼까지 부어 있어 그 얼굴을 더욱 짐작할 수 없었다.
"스팟?"
"응. 그때 내가 아저씨에게 달라붙어서 호객을 했었잖아요. 아저씨는 이 근처에 산다고 했고요."
"아!"
이제야 생각이 났다. 바란으로부터 박살과 방어구를 얻은 날 암시장에서 나와만났던 꼬마 창녀였다. 스팟은 하룬이 자신을 알아보는 눈치를 보이자 기뻤는지 활짝 웃었다.
'귀여운 아이구나!'
웃는 모습이 예쁜 아이였다. 기뻐하는 것이 상대에게까지 전해지는 특이한 인상을 주는 스팟이 한 번 스쳐 지나간 것에 불과한 자신을 알아봐 준 것이 신기했다.
"아저씨, 돌풍 용병대원이었어요?"
"그래."
"와아! 아저씨, 멋있어요! 나도 크면 거기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랬니?"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비욘드가 성인 전용 게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캡슐의 가격으로 인해 미성년들 중 비욘드를 하는 아이는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칫! 지금 내 말 못 믿는 거죠?"
"아니야. 믿는다!"
하룬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삐친 것 같은 소녀의 표정이 무척 귀여웠던 것이다. 벨이 몇 살 더 어렸다면 스팟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칫! 못 믿겠으면 관둬요. 거짓말은 아니니까. 매일 우리를 괴롭히고 짐승처럼 다루던 헬나이트파가 제일 두려워하는 존재가 돌풍 용병대여서 우리도 아저씨들을 잘 알고 있다니까요."
거기까지 듣자 하룬은 스팟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것 같았다. 헬나이트파는 글로리 가이아의 하부 조직일 것이다. 그들이 만약 비욘드에 접속했다면 틀림없이 다크니스의 하급 무사가 되었을 것이다. 돌풍 용병대는 마츠 평원과 데빌 산맥에서 벌써 몇 번이나 다크니스를 박살 냈다. 그들 중에 이 트래시 스트리트를 장악했던 폭력 조직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듣고 스팟은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자신을 괴롭하는 헬나이트 조직원들이 돌풍 용병대를 두려워하는 것만은 안 모양이다.
"우리를 구해 줄 거예요?"
"그래!
"다른 자들은 우리와 같은 꼬마들과 여자들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버리고 갔는데 돌풍 용병대는 우리가 왜 필요하지요?"
"....뭐어?"
하룬은 순간 벙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팟이 이렇게 논리 정연하게 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돌풍 용병대도 섹스 파트너나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가요?"
"...."
하룬은 스팟의 말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져서 눈을 감고 말았다. 이제까지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아왔는지 가슴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하룬은 너무 가슴이 아파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럼 더 이상하잖아요.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돌풍 용병대가 있는 곳에는 아이들이 무척 적단다. 거의 다 어른들이지. 아저씨는 우리 기지가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해지길 바란단다."
"정말요? 정말 아무것도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고요?"
이미 깊은 상처를 받은 영혼은 하룬의 눈을 통해 뭔가 알아내려는 듯 집요하게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바라는 것이 있기는 해. 너희들이 우리의 미래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미래요?"
이런 곳에서 쓰레기처럼 성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영특한 면모를 보이는 스팟이지만 그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같다.
"너희들은 돌풍 기지로 가면 교육을 받게 될 거야? 그래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면 돼. 우리의 뒤를 이어 용병이 되어도 좋고 요리를 하거나 의사가 될 수도 있지. 우리는 식구가 모자라단다."
"아!"
이제야 하룬의 말을 이해한 걸까? 스팟은 활짝 웃었다. 비록 엉망이 된 얼굴이지만 그 웃음은 달빛을 끌어들여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것 같았다.
"정말이죠?"
"그래!"
"하지만 우리는 세미롱이 없으면 제대로 움질일 수 없어요. 벌써 꽤 많은 친구들이 약이 없어서 죽었고, 지금도 제대로 움직일 힘이 없어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를 버리고 간 헬나이트의 악귀들이 말하길 세미롱 때문에 앞으로 우린 자라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마약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방도가 있으니"
"끼야악!"
하룬의 말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스팟은 갑자기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하룬에게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스팟을 쳐 내려던 하룬은 달빛에 비친 눈물을 보고 그의 허벅지를 안으려던 그녀를 안아 들었다.
"어엉엉엉!"
뭐가 그리도 슬픈지 흐느끼는 스팟을 안아 든 하룬은 겨우 20킬로그램이 넘을 것 같은 몸무게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뼈에 살가죽을 붙인 형상이었다. 어쩌면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스팟의 나이가 사실은 몇 살 더 먹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먹었어요. 언니나 오빠 들이 중독되어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말라서 죽어 가는 걸 보면서도 먹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걸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고 손님이 어떤 변태적인 짓을 해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다 받아 줄수 있었어요. 우리 모두는 계속 그 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약의 공급이 갑자기 끊기는가 싶더니 확 줄었고 상납금이 늘어 중독이 심하고 몸이약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 갔어요."
"후우!"
하룬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사태를 야기한 것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우리 엄마도 얼마 전에 죽었어요. 뼈밖에 남지 않은 몸과 수시로 피를 토하는 몸으로 변태가 아니면 손님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어서 세미롱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최근에는 나처럼 어린 여자애를 찾는 변태손님들이 확 줄었어요. 그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있는 무서운 사내들이나 유니온 안쪽 지역에 사는 돈이 많은 작자들인데 최근에는 발길을 끊었거든요."
아마 엄마가 죽은 후 스팟은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엄마가 죽으면서 그랬어요. 더는 그 약을 먹지 않아서 너무 좋다고. 골수까지 중독된 엄마는 세미롱도 모자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끝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어요. 죽기 직전의 엄마는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었어요. 아름답고 따듯한 엄마였어요. 늘 혼탁하고 흐릿했던 눈이 그날은 별처럼 빛났어요. 내 머리카락을 엄마가 따듯한 손길로 예쁘게 땋하 주면서 말했어요. 그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요. 어떻게든 그 약을 먹이지 않는 보호자를 찾아가라고요. 처음 본 엄마의 맑은 눈빛이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그 보호자가 되어 주마!"
가슴이 먹먹해진 상태라 하룬은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지만 애써 말했다.
"으아앙!"
하룬에게 안긴 상태에서 스팟은 한참을 울었다. 하룬은 말없이 스팟을 따듯하게 안아 주었다. 꽉 안으면 부서질 것 같아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울음소리가 잦아들더니 결국 스팟이 눈물을 그쳤다.
"아저씨, 내려 줘요!"
"왜?"
"친구들을 데리고 올게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지만 스팟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렴."
스팟은 생각보다 인맥이 넓었다. 그렇게 대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녀도 나오지 않던 사람들이 스팟이 다람쥐처럼 빠르게 움직이자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혜련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치료조원들과 함께 상처를 입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치료하는 한편 가벼운 식사를 제공했다. 이들 대부분은 이틀 동안 굶주린 상태로 방치되어 상처가 없어도 기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1차로 사람들이 나온 후에는 2차로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온 아이들의 말을 들어 보니 건물들 안에는 마약중독이 심하거나 병을 앓고 있어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
그 일에는 스팟을 비롯해서 몇 명의 아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외부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를 했던 것이다. 하룬은 1차로 1,000여 명에 가까운 아이들과 여자들을 기지로 보냈다. 100여 명의 대원들은 바이크로 기지에 다녀올것이다. 벨과 아리를 통해 새로운 식구들을 위한 각종 준비 사항을 당부하던 하룬은 문득 한 여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천사 같은 아이예요."
돌아보니 마약중독이 심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한 젊은 여자가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대원들을 이끌고 이 건물 저 건물을 옮겨 다니는 스팟이 있었다.
"쟤 엄마도 저와 같은 창녀였어요. 언니는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참 예뻤어요. 꽤 좋은 집안에서 자랐지만 무능력자로 판명되어 이 구역으로 밀려났고 남자를 잘못 만나 이곳까지 흘러들었지요. 못된 헬나이트 놈들에 의해 마약으로 길들여졌지만 자신보다 더 불쌍하고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을 도왔어요. 쟤도 그랬지요. 언니는 점점 죽어 갔지만 쟤가 언니를 대신해서 우리를 도왔어요. 손님을 못 받아 굶주린 저와 같은 형편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놈들에게 떼를 쓰거나 편을 들다가 매일 맞곤 했지요. 늘 멍 자국을 달고 사는 탓에 놈들은 얼룩이라는 뜻으로 스팟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저 아이는 언제나 활기차게 사람들을 도왔어요. 지금처럼 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은 스팟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스팟을 바라보는 하룬의 눈빛이 따듯해졌다.
'나이도 어린 꼬마가 나보다 훨씬 낫구나!'
자신은 이제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행운이든 아니든 자신의 노력 때문이든 자신에게는 이제 많은 힘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힘을 가지고도 이렇게 어둠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사는 이들에게 눈을 돌리지 못했다. 진작 이들을 생각했다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많이 아팠다.
"고마워요! 우리가 돌풍 용병대를 위해 어떤 일을 해 줄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냄새나고 더러운 곳을 떠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는 거예요.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입니까?"
"우리와 같은 중독자들은 약간의 식량만 주고 이곳에 놔두고 가세요. 어린아이들은 마약을 접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성장기에 있으니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는 아니에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몸으로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쓸모가 없는 사람은 없소!"
"....쓸모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요?"
"그래요. 하다못해 조금 형편이 낫지만 삶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소."
자신의 삶이 버겁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도 객관적으로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자신보다 더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세상을 원망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 수도 있소."
"...."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요. 늘 누군가와 어울리며 비교하고 비교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휴먼이오.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무능력함에 실망할 수 있지만 그건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모든 존재가 경험하는 것이오. 이 많은 아이들이 기지에 가면 과연 누구에게 의지를 하겠소? 생면부지의 기존 기지 식구들을 단박에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소?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을 때까지 그대와 같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감싸 안고 보듬어 주어야만 하오. 그리고 마약중독을 치료할 수 없다고 누가 그랬소?"
"....설마 마약중독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녀의 말이 너무 뾰족해서일까? 아니면 그녀의 심정과 비슷해서일까? 근처에 모여 바이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여자들이 일제히 하룬을 보았다.
"마약중독으로 인해 뇌세포가 파괴되긴 했지만 인체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소. 재생이 되지 않더라도 나머지 부분만으로도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오. 마약중독을 벗어나겠다는 의지만 강력하면 얼마든지 재활을 할 수 있소."
"저, 정말, 정말이죠?"
"그래요. 우리 기지의 수석 의사가 자신한 말이니 틀림없소. 기지에 가면 마약중독을 치료할 약들과 재활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반드시 마약을 끊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으시오."
"흐흑! 흑!"
"살 수 있어! 흐흐흑!"
하룬의 단호한 말에 근처에 있던 여인들이 일제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약중독으로 인해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몸이다. 이제 마약을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도 없는 몸이 되어 버렸기에 어쩔수 없이 고통스럽게 금단증상을 견디고 있었다. 금단증상은 몸은 물론 정신마저 파괴한다. 많은 동료들이 그 끔찍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여기 있는 여자들은 아이를 가지고 있거나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모질게 잡고 간신히 견뎌 온 이들이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어쨌거나 삶의 기반이었던 유니온은 배리어를 축소했다.
오염된 공기는 벌써 자신들은 물론 아이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들의 고혈을 빼먹고 살던 자들마저 자신들을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르그나 하르크 들의 먹이가 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친 것이다. 늘 염원했음에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 희망은 가장 깊은 절망의 시간에 이렇게 찾아왔다. 눈물에 젖은 수많은 눈빛들이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뛰고있는 하룬과 돌풍 용병대원들을 향하고 있었다. 트래시 스트리트에 남아 있던 생존자들은 세 번에 걸쳐 돌풍 기지로 옮겨졌다. 얼마 전에 기지를 공격해 왔던 알코르 전단이 남기고 간 바이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라고요?"
"끼아아! 너무 좋아!"
"이렇게 깨끗한 곳은 처음이야!"
기지를 둘러본 여자들은 놀라운 시설에 놀라고 어리벙벙한 얼굴이었지만 아이들은 아무리 험한 생활을 해 왔다고 해도 천진했다. 이제부터 자신들이 살 곳이라고 생각하자 신이 나서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팟은 벌써 기지의 몇 안 되는 안면을 익혀 사방을 쑤시고 돌아다녔고 그 정보를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황 박사와 소장은 일부 식구들과 함께 이주해 온 이들과 신상을 파악하고 임시로 거주할 방을 배정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나머지 식구들은 벨과 아리를 도와 비어 있던 지하층에 생활공간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접속하지 않은 상인조 식구들은 준비한 옷과 생필품을 나눠 주었다. 생산조에서는 정교한 로봇 팔을 이용해서 쉴 새없이 필요한 가구들을 만들어 냈고 취사조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늦은 아침 식사를 교대로 마친 사람들은 식당과 광장을 비롯한 몇 곳에 모여 홀로그램 영상을 통해 하룬과 기지 수뇌부들의 환영 인사를 받았다.
-이곳에서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우리 기지의 새로운 식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가족입니다. 모든 가족이 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집은 안전해지고 살기 편한 공간이 될 겁니다. 지금 여러분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기존 식구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 후면 자신의 방을 가지게 될 겁니다. 며칠 동안 푹 쉬면서 앞으로 살아갈 내집이 어떤 곳인지 구경도 하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지 안내를 받을 겁니다.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게 될 것인지 지금은 말해 보아야 실감할 수 없을 테니 일단 쉬십시오.
돌풍 기지의 수뇌부들이 돌아가며 해 준 환영 인사와 이곳에 들어와서 만난 돌풍 기지 식구들의 진심 어린 태도에 사람들은 적잖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적어도 이곳이라면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식구들이 불안과 기대와 교차점에 서 있을때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인원은 파악이 됐습니까?"
하룬의 시선은 제일 먼저 소장에게 향했다. 그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네, 대장님. 총인원은 3,024명으로 여자 2,211명에 남자 813명이고 그중 성인은 654명입니다. 성인 중 남자는 마흔살 이상으로 112명인데 그나마도 갖가지 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성년이건 미성년이건 건강한 남자는 모든 유니온을 떠난 것이다. 남은 남자들은 마약 중독이 심해 움직임이 불편하거나 노령자인 것이다.
"아이들은 열 살 미만이 1,541명이며 나머지도 열여섯 살이합니다. 성년에 가까운 아이들은 모두 유니온을 떠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군요. 새 식구들의 건강 상태는 어때?"
이번에는 혜련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새 식구들 대부분이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예요. 중독 현상은 성인들이 무척 심해요.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환자가 200명이 남짓이고 나머지도 판단력을 비롯한 지적 능력과 신경 그리고 근육에 이상을 보이고 있어요. 아이들의 경우는 나이가 많을수록 심하게 중독되었는데 남자아이들보다는 여자아이들이 더 심해요."
혜련의 보고에 사람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새로운 식구들은 정상적인 이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마약에 깊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치료 가능성은?"
"기지 메인 컴퓨터의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열 살 미만의 경우는 6개월 안에 완치할 수 있어요. 열여섯 살 미만의 청소년들도 1년 정도면 상당한 수준까지 회복이 될 거예요. 문제는 성인들인데 중증 환자들의 경우는 치료가 끝나도 죽은 뇌세포로 인해 정상적인 지적 능력이나 운동 능력을 찾기 힘들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 줘, 치료조장."
혜련은 보고를 하는 동안 내내 침통하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인공수정체들을 챙겨 온 그녀는 절망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벨 참모, 거주 시설을 만드는 작업은 어때?"
"현재 공정율은 34%예요. 기지 식구들은 물론이고 얼마전 바란 오빠와 함께 온 장인들도 가세해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어서 이틀 정도면 완료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다행이다. 그나마 재료가 충분하기에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아리 참모, 배정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네. 그 부분은 황 박사님의 조언으로 결정했어요. 일단 가정이 있는 경우는 방 2개짜리를 배정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성인들의 경우는 1인 1실의 집을 배정하고 아이들의 경우는 일단 가정을 가진 식구들에게 2명씩 배정을 하기로 했어요. 저희는 이런 조치가 가정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정서적인 안정은 물론 사회성을 길러 주는 데 큰 모움이 될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수고했어, 아리. 그런데 그게 과연 도움이 될까?"
의도는 좋은데 우려가 되었다. 자신 역시 부양 가정에서 컸지만 어린 시절은 불행하기만 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