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수 길드
알코르 전단의 침략을 제대로 격퇴한 하룬은 비욘드로 돌아오자마자 마탑 연합과 신전 연합의 방문을 받았다. 그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후버론이 반가운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 화염 지대에 들어갔었다고?"
"네. 고생 좀 했습니다."
"정말 수고 많았네. 자네 덕분에 다크니스의 본거지를 찾을 수 있었어."
후버론은 하룬이 비록 사람들이 천하다고 무시하는 용병이긴 하지만 자신의 혈육처럼 느껴졌다. 하룬은 자신도 다 파악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장 덕분에 가즈 로드(God' Road) 작전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어요."
빛의 신전을 대표하는 성녀도 다른 사제들과 함께 하룬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룬은 어느덧 신전 연합의 대표로 격상된 성녀의 위상에 기꺼운 마음이 되었다. 후버론이 먼저 하룬과 이야기를 하자 신전 연합의 사제들이 그녀를 보며 눈짓을 통해 나서라고 재촉하는 것이 보였다. 한눈에도 그녀의 영향력이 엿보였던 것이다.
"의뢰를 수행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가즈 로드가 뭡니까?"
"가즈 로드는 세 제국과 마탑 연합 그리고 신전 연합이 힘을 합해 이 세상에 마왕을 강림시키려는 사악한 다크니스를 말살하고자 계획된 작전명이에요."
어째 손을 놓고 있다 싶었더니 이들은 이방인의 뒤에서 이런 거대한 연합 세력과 통합 작전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다크니스는 절대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겁니다."
하룬의 말에 후버론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야지. 하지만 저들의 저력이 생각보다 높아서 걱정이네."
하긴 이들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돌풍 용병대가 관여한 성 4개를 제외하고는 아직 공성전에 성공한 이방인 길드는 나오지 않았다. 공성전에 뛰어든 거대 길드들이 타 길드와의 연합을 통해 최대 2만 명에 육박하는 길드원들을 거느리고 있고 마탑 연합과 신전 연합의 물품 지원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크니스의 힘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네. 놈들의 전력을 종잡을 수가 없어. 우린 한 성에 최대 3,000명으로 잡았었네. 하지만 놈들의 숫자는 최대 2만 명까지 늘어났네. 그걸 토대로 계산을 하면 놈들의 숫자는 최소 100만이 넘네. 마수나 언데드는 헤아리지 않았는데도 말이지."
후버론의 말에 마법사들과 사제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대 다크니스 연합은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큰 충격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적들의 숫자가 그들의 예상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이다. 처음 예상은 약 7만이었다. 성의 개수가 총 72개이니 한 성에 주둔하는 숫자가 1,000명이라고 잡아도 72,000명인 것이다. 성이 완성되지 않은 곳이 많긴 하지만 마츠루트 요새와 가까운 성에는 통상 3,0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치른 공성전을 참관하러 갔던 사람들은, 불리한 상황이 되자 성안에서 꾸역꾸역 추가되는 다크니스의 숫자를 보고 질려 버렸던 것이다. 이방인들과는 달리 실력자들이 다수인 다크니스는 최대 2만 명까지 늘어났던 것이다.
"우리가 이번 작전을 위해 준비한 전력은 최대 10만 명이네. 기사가 총 1만 명에 마법사와 사제 6,000명, 성기사 4,000명에 나머지는 전투 경험이 많은 강병들과 레인저 병으로 구성했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라면 우리는 놈들의 본거지는 고사하고 몇 개의 성을 공략할 수 있을는지. 휴우!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네."
그렇게 말하는 후버론과 사람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룬은 놈들의 성 중앙에 세워진 지구라트 건물의 첨탑이 워프 마법진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려다가 말았다. 한 성의 인원수가 늘어나는 것이야 그걸로 밝혀질 수 있지만 적들의 전력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조금씩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 포러스의 기억을 토대로 판단하건대, 다크니스에는 정규 전력을 빼고도 10만이 훨씬 넘는 강화 언데드 군단과 5만 이상의 마수 군단이 연성되고 있었다.
포러스의 기억과 그의 판단이 사실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될 강화 언데드와 마수 들은 익스퍼트 급이 아니면 상대를 할 수 없다. 즉 대 다크니스 연합의 가즈 로드는 결국 철저하게 실패를 하게 될 공산이 컸다. 아니, 틀림없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믿어 줄지도 의문이지만 정보의 출처를 공개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대장에게 다시 의뢰를 하고 싶어요."
"의뢰요?"
뜬금없는 의뢰 이야기를 꺼낸 성녀의 얼굴은 심각했다.
"우리 연합 세력은 아직 다크니스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않았어요. 아시다시피 상당히 이질적인 세력의 연합이니 만큼 손발이 맞지 않을 것이 분명해요."
맞는 말이다. 자세한 지휘 체계는 알 수 없지만 당장 마탑과 신전만 해도 이곳에 같이 찾아온 것이 이상할 정도로 적대적인 세력들이다. 그러니 손발이 맞을 리가 없다. 제아무리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유기적인 협조가 되지 않으면 다크니스를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가 없다.
"해서 우리는 다크니스를 상대로 4개의 성을 빼앗은 돌풍 용병대의 전투 전술을 참조하려고 해요."
요컨대 돌풍 용병대가 공성전을 하는 것을 참관하고 그 전투를 분석해서 자신들에게 적용하겠다는 이야기다.
'잘 됐군!'
안 그래도 다크니스의 성을 3개 정도 공략할 생각이었다.
'지구라트의 첨탑에 새겨진 마법진을 통해도 100킬로미터 내에서만 워프할 수 있다고 했지.'
포러스의 기억에 의하면 지구라트의 첨탑에 새겨진 마법진을 활성화시킨다고 해도 마음대로 워프를 사용할 수 없었다. 거리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다크니스는 5개의 거점 성을 정해 1곳에 2만 명에 달하는 예비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타르 분지를 중심으로 위치한 17개의 성을 제외한 나머지 55개의 성은, 1개의 거점 성이 다른 10개의 성을 지휘하는 식으로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거점 성은 북두칠성의 이름을 딴 전투단이 맡고 있었다.
사탕가 봉 인근 3개의 성을 공격할 예정인 하룬은 놈들의 이목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요새 근처의 성이 이방인들의 공격에 넘어가면 적들은 예비대를 그쪽 거점 성으로 이동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앧가 던진다고 덥석 받을 수는 없는 법. 하룬은 얼굴을 굳혔다.
"현재 이곳에는 저와 고문단 일부만이 온 상태입니다. 다른 대원들이 이곳에 오려면 20일은 걸릴 겁니다."
"허허! 이거 어쩐다! 우린 곧 출정을 해야 하는데....."
"연합은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급하게 10만의 병력을 완성했어요. 그들은 일주일 후면 예정된 성을 공격하게 될 거예요."
통합 조직이 완료되고 작전까지 완성되었으니 당장 움직여야 한다. 20일이나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안 되겠는가?"
그렇다고 유일하게 공성전에 성공한 하룬에게 어떤 비책도 알아내지 못한 상태로 진군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후버론을 비롯한 사람들은 다급하게 하룬에게 매달렸다. 하룬은 조금 튕기다가 의뢰를 받아들였다.
"상황을 고려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고문단이 이방인 길드를 지휘해서 공성전을 치르겠습니다. 그걸 참관하시면 어떻게 다크니스를 상대해야 할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마탑 연합과 신전 연합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이 돌풍 용병대의 전략을 파악하여 자신들에게 적용하려는 것이니 다른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공성전에 성공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마탑 연합과 신전 연합은 각각 50만 골드에 해당하는 마법 물품과 신성 물품을 제공하기로 했고 세 제국에서는 100만 골드에 해당하는 군수품을 내놓기로 했다. 의뢰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지자 후버론과 성녀는 이제 하룬이 한편이라고 생각했는지 가즈 로드에 대해 대략전인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세 제국은 신전 연합과 마탑 연합을 포함하는 통합 회의를 통해 4개의 군세를 만들었다. 1군은 세 제국의 연합군이자 주축으로 총 3만의 군세에 총사령관으로는 미노 제국의 미노스 공작이 맡았으며, 일반 병사들의 경우 각국의 소드 유저 상급 이상의 실력자들이 참여했다. 1군의 목표는 마츠루트 요새에서 다크니스의 본거지인 타르 분지까지의 직진로에 위치한 6개의 성이었다. 향후 보급을 위해서 반드시 이 성들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2군은 파이린 제국군으로 군세는 2만 명으로 마츠 평원을 거쳐 데빌 산맥의 북족에서 남서진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는 모두 6개의 성이 있지만 그중 2개는 이미 하룬과 산악 부족이 장악한 곳이었다. 사령관으로는 이벨린 황녀의 친위기사단 단장을 역임한 일룸이었다.
3군은 신 테론 제국군이 주축으로 군세는 3만에 사령관은 소드 마스터인 요로사스 후작이고, 타르 분지로 북동진하기로 했다. 진군로에 놓인 성은 4개로 이 중 2곳은 이방인 길드가 책임지기로 했다. 4군은 토틀란 후작이 거느린 미노 제국군으로 군세는 2만이지만 마수의 숲을 지키던 레인저 군단과 정예 기사단 4개가 참가하고 있다. 이들의 진군로에는 모두 8개의 성이 있었다. 마탑 연합과 신전 연합은 각 군의 고위 마법사들과 사제들, 성기사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법 물품과 신성 물품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성기사들과 사제들 그리고 마법사들은 가장 가까운 군으로 분산되어 배치되었고 보급을 위해 군상(軍商)을 정해 따르게 했다. 데빌 산맥이 워낙 험해서 병사들이 버거워하는 곳이라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군상의 위치는 세 제국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정보 누출을 막기 위해 공개 입찰 방식을 피했던 것이다. 코엠 상단은 파이린 제국의 군상으로 지정되었다. 제국 측에서는 대형 워프진을 활용한 이동 시간의 단축을 특징으로 하는 코엠 상단에 큰 점수를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하룬의 영향력도 상당히 들어가 있었지만 본인은 물론이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즈 로드 작전은 아레스로부터 전투 영상을 입수한 각 게임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공성전에 대해 방영하면서 시작될 것이다.
아레스와 그 친구들이 촬영한 전투 영상은 게임 방송사들에 의해 편집될 예정이다. 방송사들이 가장 역점을 두고 편집할 부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생생한 전투 장면을 살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성전의 전력이 잘 드러나는 전투의 흐름이었다. 일반 게이머들은 생생한 전투 장면에 환호하고 열광하겠지만 대형 길드들은 다른 부분을 보게 될 것이다. 워프를 통해 한걸음에 요새로 달려온 헤르쉬와 뫼비우스는 다른 일로 바빴다. 그들은 임시로 대 다크니스 연합의 전령이 되어 다크니스의 성을 공격할 대형 길드를 만나야만 했던 것이다. 헤르쉬는 요새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들을 맡았고 뫼비우스는 오프라인을 통해 거대 길드와 접촉했다.
"반 다크니스 연합이 드디어 다크니스의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작전명 '가즈 로드' 를 개시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적들은 강력한 워프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만큼 공격 개시일을 맞추는 것이 유리합니다. 연합 측은 이방인들과의 통신 채널을 전담하는 인물을 선정해서 이방인 길드와 보조를 맞추기로 했습니다."
길드 측에서도 헤르쉬와 뫼비우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다크니스는 예비 전력을 가지고 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적을 공격하면 예전처럼 무지막지한 지원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해볼 만하겠군."
데빌 산맥의 외곽에 위치한 22개의 길드가 헤르쉬와 뫼비우스의 전언을 받아들였다. 잠정적인 공격 일자는 일주일 후로 잡혀 있었기에 그사이에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성을 점령하겠다!"
그사이 적게는 두 번에서 많게는 다섯 번까지 공성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다운된 레벨 업과 장비의 추가 구입 등 길드원들의 전력 강화에 엄청난 자금력을 쏟아부은 길드장들은 투지를 불태웠다. 뫼비우스는 그 와중에 진수가 구해 온 드워프제 통신기를 비싼 값에 파는 부수적인 일로 돌풍 상단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앞으로도 대 다크니스 연합과 행보를 맞추어 가며 다른 성들을 더 얻을 생각이 있는 터라 연합의 이방인 전담인과의 통신은 필수였다. 요새에는 수많은 정보 상인들과 간세들이 들어와 있었지만 연합과 길드 간의 묵약은 다행하게도 노출되지 않았다. 정보 노출을 우려해서 양측은 극소수의 수뇌만을 제외하고는 이런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발트랑, 오랫만이군."
"어서 오십시오, 하룬 대장님."
하룬 일행을 맞이하는 발트랑의 얼굴은 환했다. 그간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예전에 비해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지만 지금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사예 양도 여전히 아름답군요."
발트랑과 같이 하룬을 맞이하던 사예는 그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오세요. 그동안 좀 변하신 거 같네요. 예전에는 무뚝뚝하고 차갑기만 했는데 지금은 많이 여유로워 보여요."
긴 머리를 질끈 묶어 얼굴을 많이 노출시킨 탓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어려 보인다는 덕담 아닌 덕담을 해 주었다.
"하하! 그런가요? 그때는 친해지지 않았을 때니 그랬을 겁니다. 제가 워낙 사람을 가려서요."
이미 안면이 있었고 나쁘지 않은 인연을 맺고 있었기에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이분들은?"
"우리 용병대의 부대장과 고문들이시네."
"그렇습니까?"
발트랑은 한눈에도 그 경지를 추측하기 힘든 기도를 지닌 고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면이 있는 딜런과 도네이스는 그렇다고 치지만 얼굴과 몸에 작은 문신을 새긴 전사들과 마법사인 듯한 고문들도 엄청난 기도를 보이고 있었다.(골드런:난이런게좋드라)
'최소한 나보다는 위다!'
부대장 티노는 자신과 비슷한 실력임이 확실하지만 도네이스와 고문들은 그의 경지로는 정확한 실력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돌풍의 저력은 어디까지지?'
슈퍼 캡슐과 최고의 동화율, 길드와 막강한 자금력으로 유저들 중에서는 발군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 랭커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는 강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의 실력이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고문들을 대하니 본능적으로 기세가 꺾였다. 아레스와 함게 반 다크니스 연합과 공성전을 전담할 방송사 사람들이 합류한 하룬 일행은 대형 막사로 안내되었다. 자리를 잡은 양측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같이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룬이라고 합니다."
하룬은 티노를 비롯한 대원들을 1명씩 소개시켜 주었다. 티노를 비롯해서 용병대의 핵심 인물들은 이미 고요의 땅에서부터 그 위명을 떨쳤기에 소개가 될 때마다 감탄성과 함께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용병대의 원년 멤버인 티노와 도네이스, 딜런 그리고 두마도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분이 용병 공작으로 알려지신 딜런 경이시군요."
딜런은 귀족 출신으로 미노 제국에서 적극적인 영입 제의를 받은 것이 알려졌다. 소드 마스터 중급에 이른 그 실력과 용병도 마다하지 않고 실전을 통해 검의 길을 걷고 있다는 이력이 아레스에 의해 퍼지면서 그의 별명은 용병 공작으로 불렸다. 딜런은 비욘드의 기사들은 물론이고 검의 길을 걷는 이방인들에게는 존경받는 검호(劍豪)가 되었다. 검의 길을 완성하기 위해 신분을 버린 딜런은 별명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바람의 혼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치 바람처럼 표홀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룬에게 전수받은 메신저 스킬을 뼈르 깎는 노력으로 능숙하게 펼치게 된 티노가 그 주인공이다. 이 과분한 이름에 티노는 얼굴을 붉혔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티노를 보는 도네이스의 눈길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도네이스는 신궁으로 불렸다. 비욘드의 경우 아처가 특화되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의 경우 아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오러가 담긴 그녀의 화살은 플레이트 메일도 뚫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 기사들도 그녀의 존재를 경외시하고 있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전투 마법의 대가들로 알려졌다.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빠른 캐스팅과 쿨 타임이 거의 없는 전투 마법의 난사로 유명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마법진에 대해서는 대륙 최고라는 사실이 은밀하게 퍼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다른 고문들은 그런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기쁜마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하룬의 소개가 끝나자 발트랑이 일어나 길드의 중요 인물들을 소개했다.
"이렇게 위명이 쟁쟁한 분들과 한시적이나마 동료가 된것은 우리 길드의 영광입니다. 부디 이 인연을 토대로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실력으로나 자금력으로나 이방인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아리수 길드와 좋은 인연을 맺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요. 그건 저희가 부탁할 일입니다."
두 세력의 수장들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터라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한 게이머들의 경우 탑 랭커들이 이제 겨우 5서클 마법사이거나 익스퍼트 상급에 오른 상태이니 6서클 마도사들과 소드 마스터로 구성된 고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기만 했다. 방송 관계자들과 대 다크니스 연합에서 파견된 이들까지 소개가 끝나자 드디어 회의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룬 대장님께서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을 지시해 주십시오."
아리수 길드의 길드장인 발트랑은 하룬 일행의 능력을 완벽하게 믿었다. 의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을 아예 포기한 것이다.
"하하!"
생각하지 못했던 길드장의 태도에 하룬은 나직이 멋쩍은 웃음만 흘렸다.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실력도 없는 자들이 날뛰면 대사를 그르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이미 두 번이나 공성전에서 패했다. 단순하게 패한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피해를 본 것이다. 그런 것에 반해 하룬은 코엠 상단과 산악 부족들을 도와 4개의 성을 단숨에 빼앗았다. 분명히 비책이 있을 것이다. 발트랑은 하룬과 돌풍 용병대의 능력을 믿고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저희가 지휘를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저 성은 아리수 길드의 성이 될 것이고 우리는 떠날 겁니다. 지휘권을 넘겼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길드원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우리 돌풍 용병대를 이용한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룬의 부드러운 말에 아리수 길드의 수뇌부들은 체면을 세워 줘서 고맙다는 표정들이었다. 사실 고용한 것은 자신들인데 명령을 받는 상황이 되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부분을 하룬이 어루만져 준 것이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가칭 아리수 성의 경우 병령이 2곳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파악한 정보로는 성안에 약 4,000명이 있으며 성과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광산에 2,000명이 있습니다. 놈들이 길들여 주변에 풀어 놓은 마수는 이백 마리 정도로 추정됩니다."
버처리비크를 타고 오는 동안 인근과 성에 대한 기본 정찰은 마친 상태였다.
"맞습니다."
발트랑과 사예를 포함한 길드 수뇌부들의 눈이 커졌다. 이제 방금 도착한 하룬 일행이 어떻게 적들의 인원을 아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이전까지 우리가 상대했던 다크니스의 구성을 보면 흑전사들이 30%를 차지합니다. 그렇게 보면 흑전사들이 3,000명에 흑마법사들이 900명 그리고 흑기사들이 2,100명이 될 겁니다. 최근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아리수 성의 경우에는 소드 마스터와 6서클 마도사가 증원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헤르쉬로부터 전해 들은 극비 정보였다. 최근 세 제국과 인접한 성들에 소드 마스터와 6서클 마도사로 보이는 인물들이 합류했다는 사실이 제국 정보 길드의 촉수에 걸려든 것이다. 하룬의 말에 아리수 쪽 인사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떻게 하룬이 그런 정보를 알아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적의 전력을 들은 아리수 길드 수뇌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들 역시 두 번에 걸쳐 공성전을 치른 터라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현재 아리수 길드의 전력을 알고 싶습니다."
하룬의 시선을 받은 발트랑은 바로 자신들의 전력을 밝혔다.
"익스퍼트 급 전사가 4,000명이고 5서클 마법사가 8명, 4서클 마법사가 84명입니다. 그 외는 소드 유저 중급 이상의 전사가 8,500명이고 3서클 이하의 마법사가 3,000명입니다. 거기에 익스퍼트 급에 해당하는 1급 이상의 용병 750명이 있습니다."
역시 아리수는 비욘드에서 이름을 떨치는 대형 길드다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크니스의 전력에 비하면 확연한 열세였다. 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침통한 얼굴이었다.
"어떻습니까? 힘들겠습니까?"
당연히 힘들다. 상대는 새로이 소드 마스터와 마도사가 가세했다. 소드 마스터와 마도사는 1인 군단으로 불릴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고수들의 숫자는 우리가 더 많지.'
하룬은 지혜의 파편을 통해 새로운 경지에 오른 고문들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힘들지도 않습니다. 저희 돌풍의 고문들께서는 우리 측의 힘을 반감시키는 흑마법진을 제거하고 광역 주술로 여러분의 능력을 3할 정도는 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들의 수뇌부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두 번에 걸친 공성전으로 인해 길드원들의 사기는 바닥을기고 있는 상황이다. 길드원들의 레벨 다운은 물론이고 스크롤을 비롯한 군수물자 때문에 길드의 자금력도 현격하게 떨어졌다.
"아! 마수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들이 믿고 있는 전력의 한 축인 마수는 우리를 위해 움직이게 될 테니까요."
굳이 확인해 줄 필요도 없다는 듯 다른 사안을 꺼내는 하룬의 태도에 발트랑과 수뇌부들은 흥분이 되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세한 작전을 의논해 보지요."
하룬의 말을 경청하는 아리수 길드원들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리수 성은 경사가 심한 산 중턱을 깎아 세워져 있었다. 위쪽은 더욱 경사가 높았고 암벽 지대라 위에서 아래쪽으로 공격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공격을 하려면 오직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산기슭부터 성까지는 람비와 브롤프를 비롯한 여섯 종의 마수 이백여 마리가 지키고 있었다. 공격은 마법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새벽에 시작되었다. 주술로 만든 안개가 산기슭에서 시작되어 위쪽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주술사들의 높은 실력으로 인해 안개는 무척이나 짙었고 떠오르는 햇빛을 가릴 정도였다.
으르릉.
마수들은 짙은 안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오라! 내게로 오라!
안개 속으로 하룬의 의지가 전해졌다. 어둠의 마나가 의지를 타고 전해지는 순간 마수들은 본능적인 이끌림을 억제하지 못하고 하룬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 중턱까지 널리 퍼져 있던 마수들이 몰려드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 정도로 하룬의 의지는 강력한 이끌림을 가지고 있었다. 하룬은 몰려든 마수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몇 번 해본 터라 그리 어렵지 않게 녀석들의 머릿속에서 흑마력을 흡수하고 어둠의 마나를 집어넣었다. 마수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너희들의 진정한 주인이 이르노니 너희들을 구속하고 아프게 한 자들을 공격하라!
하룬의 의지는 마수들의 공격성을 극한까지 자극했다. 이제까지 자유롭게 본성을 드러내며 살아왔던 마수들은, 흑마법사들의 정신 마법에 제압당한 것을 기억하고는 그들이 있는 성을 향해 흉성을 드러냈었다.
-가라! 가서 너희를 아프게 만든 자들의 살과 뼈를 씹어 먹어라!
크아아앙!
마수들이 일제히 포효를 했다. 은밀할 필요는 없었다. 마수들이 성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하룬은 마나를 공명시켜 자신의 의지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주술을 펼쳐라!
-마법진을 해제하라!
-총공격하라!
낮지만 기이한 운율의 주술이 퍼지는 순간 성을 향해 뛰어 올라가는 아리수 길드원들은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경험했다.
"버퍼의 일종인가 보다."
"놀라워! 이렇게 많은 인원을 대상으로 버퍼 효과를 줄 수 있다니."
앞장서서 달리던 길드 수뇌부들은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활력에 잠시 걸음을 멈출 정도로 놀랐다. 이런 종류의 마법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주술은 주술사들의 주문이 계속되는 한 유지되는 것이기에, 효과는 신성력에 의한 버퍼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버퍼만이 아니야! 안개 속이 다 보여!"
광역 주술의 효과는 눈까지 밝게 해 주었다. 덕분에 공격자들은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성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마수들은 어떻게 된 거지?"
"저길 봐! 마수들이 놈들의 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누군가의 외침이 말하듯 마수들이 자신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산 중턱의 성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가고 있었다.
"마수들이 우리를 도와 놈들을 공격한다! 다들 달려라! 마수들과 공조해야 효과적이다!"
발트랑의 명령에 아리수 길드원들의 사기는 하늘까지 올라갔다. 두 번에 걸친 공성전에서 마수에게 죽은 길드원들의 숫자는 수천을 넘었던 터라 마수에 대한 두려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크아왕! 크르르!
람비와 브롤프와 같은 마수들은 5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한 번 박차는 것만으로 뛰어올랐고, 프로즐리는 단단한 성문을 주먹과 어깨로 들이박았다.
"이놈들이 왜 이래?"
"마수들이 미쳤다!"
마수들의 공격에 당황한 경계병들은 비상종을 울리기도 전에 마수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목이 뜯겼다. 제일 먼저 성벽에 오른 람비들은 빠르고 은밀한 움직임으로 성벽 위의 경계병들을 처리했고, 브롤프들과 블랙오파드들은 비상 종소리에 놀라 지정된 장소로 달려오는 흑전사들과 흑기사들을 공격했다.
꽈앙!
프로즐리들이 박살을 낸 성문을 통해 안으로 진입한 아리수 길드의 실력자들은 사전에 지정된 곳으로 달려가며 혼란에 빠진 적들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적이다!"
"모두 죽여라!"
성의 중심부로부터 검은 갑주를 입은 흑기사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맞이한 것은 적이 아니라 화살들이었다.
슈욱! 슈욱!
어느새 성벽과 외곽에 자리한 건물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용병들이었다. 1급 이상의 용병들은 거의 모두 웬만큼은 활을 다룰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모든 무기를 다뤄야만 하고 그중 활과 화살은 자신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무기였다.
"크윽!"
"아악!"
짙은 안개를 뚫고 날아온 화살들을 흑전사들은 물론 흑기사들과 마법사들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화살뿐이 아니었다. 용병들의 화살 공격이 시작되자 아리수 길드원들이 일제히 석궁을 꺼내 쿼럴을 날린 것이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쏜 쿼럴은 하드레더만 착용한 흑전사들에게는 횡액이나 다름없었다.
"크윽!"
"비겁하...."
집중적인 쿼럴 공격을 받은 흑전사들은 물론이고 흑기사들마저 쓰러지기 시작했다. 가늘고 단단한 쿼럴은 플레이트 메일을 뚫을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하드레더를 입은 흑저산들과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화살과 쿼럴에 몸이 꿰뚫려야만 했다. 잠시에 불과했지만 좁은 땅에 건축된 탓에 건물들 사이의 좁은 길로 몰려든 적들은 집중사격을 받았다. 넓고 시야가 확보된 곳이라면 그 결과가 달라졌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화살과 쿼럴은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실드!"
"라이트 아이!"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마법사들이 실드를 펼치고 안력을 높이는 마법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광역 마법이 아닌지라 흑기사들과 흑전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루스가 이끄는 마법사들은 빠르게 성 외곽을 돌며 흑마법진을 이루는 코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의 경험이 있는 터라 미루스는 대충 짐작한 곳에 마나 디텍트 마법을 펼쳐 위치를 확인하고 디그 마법으로 깊은 땅속에 묻혀있던 마나석을 들어냈다. 마법진이 깨지면서 성 주변의 대기는 엷어지는 안개와 함께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성주님, 적의 공격입니다!"
단잠에 곤하게 빠졌던 베인즈는 수하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뭐, 뭐야?"
"적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누가?"
아직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베인즈는 로브를 걸치고 마법 지팡이를 찾으며 물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이미 성문이 깨지고 다수의 적들이 성내로 진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빨리 귀빈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와 달라고 부탁해라. 다른 놈들을 보내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깨우고 비상 신호를 발동해서 로그아웃한 놈들을 접속하도록 해!"
전날 늦게까지 마법 수련을 했던 마법사들은 자신처럼 혼곤하게 곯아떨어질 시간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베인즈는 성안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비명과 신음이 욕설과 고함을 뚫고 들려왔다.
"제기랄!"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절묘한 시간에 안개가 끼는 것을 이용해서 쳐들어온 것이다.
"토네이도!"
6서클 마도사답게 빠르게 캐스팅한 베인즈의 마법은 짙은 안개를 하늘 높이 날려 버렸다. 몇 번을 연속해서 토네이도 마법을 펼치자 성안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헉!"
성안의 상황은 너무 뜻밖이었다.
"왜 마수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거야?"
마수들이 완전히 미쳐서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흑기사들은 대충 막아 내고 있었지만 흑전사들의 경우에는 마수들에 의해 처참한 몰골로 죽어 가고 있었다. 특히 서른 마리 정도의 프로즐리들은 미쳐 날뛰며 한데 뭉쳐서 움직이면서 적을 막고 있는 흑기사들마저 학살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벌써 성의 절반은 적들에게 장악당했다.
"으드득! 아리수 놈들이 감히!"
두 번에 걸쳐 상대했던 아리수 길드는 귀빈들의 합류로 인해 이전처럼 거점 성의 지원이 없어도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 그렇지!'
짧은 순간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놈들이 이번에는 작정을하고 쳐들어왔지만 속속 지구라트 밖으로 뛰어나오는 흑기사들과 흑마법사들이 가세하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하를 보내 거점성에 지원 요청을 하려던 베인즈는 잠시 상황을 두고 보기로 했다.
"그 재수 없는 특수전단 놈들이 거들먹거리는 꼴은 안 봐도 되겠군. 나중에 경계를 선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경계를 제대로 하지 못한 벌을 주어야겠구나!"
이런 허약한 놈들에게 성안 진입을 용인한 것만으로도 베인즈는 충분히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마수들의 정신 마법을 해제하고 새로운 정신 마법을 걸었는지는 몰라도 이 정도 전력이면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번에야말로 다시는 시도할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박살을 내 주마!"
그의 시선에 이제야 지구라트 밖으로 나오는 10명이 들어왔다.
'빌어먹은 특무조 놈들이 드디어 밥값을 하겠구나.'
비록 마왕의 파편에 담긴 가공할 흑마력을 특별한 마법진을 이요애서 강제로 흡수해 단기간에 탄생하기는 했지만 소드 마스터들이 다섯이고 자신과 같은 6서클 마도사가 무려 다섯이다. 자신이 이끌기에 좀 껄끄러운 녀석들이지만 이렇게 전시인 상황이니 자신의 명령이 통할 것이다. 다시 전황을 살핀 베인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작전이고 뭐고 따로 내릴 필요도 없겠군."
특별히 믿는 것이 있나 했더니 전력은 예전 그대로였다. 아니, 두 번에 걸쳐 레벨 다운을 당했기에 처음보다 전력은 더 약해져 있었다. 적들은 처음의 기세를 잃어버리고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화살을 날리던 용병들이 아래로 내려와 가세를 했지만 1선을 차지하고 있는 마수들과 아리수 길드원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흑기사들의 압도적인 무력에 속절없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워낙 좁은 길목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라 마법사들은 따로 공격을 펼칠 기회도 없었다.
"다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본부에서 파견한 특무조 수장인 포투겔라의 싸가지없는 말에 베인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큰 거 몇 방만 날리면 적들은 혼비백산해서 성 밖으로 도망가게 될 것이다. 놈들이 어떻게 마법진을 깨뜨리고 마수들을 조종했는지는 몰라도 이 정도는 특무조가 없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막 세부적인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베인즈는 뭔가 강력한 위화감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졌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매직 미사일이었다.
'뭐야?'
잘못 본 것일까? 이렇게 거대한 매직 미사일이 있다고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포머칸들과의 연구로 탄생시킨 주술 공조 마법의 존재를 그가 알 리 없었다. 거대한 통나무 크기의 매직 미사일이 엄청난 마나 유동을 일으키며 하늘로부터 똑바로 지구라트를 향해 빠른 속도로 투하되고 있었다.
꽈아앙!
번쩍!
고오오!
고막이 터졌다. 강력한 섬광에 눈이 한순간 시력을 잃었다.
"실드!"
다급한 상황에서도 용케 실드 마법을 펼쳤지만 단숨에 박살 났고 그의 몸은 세찬 바람에 의해 하늘로 훨훨 날았다.
"으윽! 악!"
지구라트 4층에서 멀리 떨어진 광장의 한쪽으로 떨어진 베인즈는 비명을 질렀다.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머리는 어디에 부딪힌 것인지 얼굴에 따듯한 액체가 흘렀다. 눈을 떴지만 온통 하얗게 빛날 뿐 사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끄아아악!"
건방지게 성주인 자신을 무시하던 특무조 수장인 포투겔라의 비명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너무 흐릿해서 격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마음에 귀를 만진 베인즈는 귓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따듯한 피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몇 번이나 눈을 빠르게 떴다 감기를 계속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조금씩 눈앞에 다양한 색깔이 번진 상태로 보이기 시작했다. 베인즈는 자신의 몸을 상대로 치유 마법을 펼치려고 했지만 마나 고리가 너무 불안정한 상태임을 알고 포기했다. 마왕의 파편과 흑마법으로 단기간에 이룬 6서클의 경지는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는 연약하고 위험한 상태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베인즈는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크 실드!"
"블링크!"
"다크 핸드!"
꽈앙!
"아악!"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비명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분명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베인즈는 필사적으로 눈을 비볐다. 마침내 붉은 기가 돌기는 하지만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헉!"
지구라트의 첨탑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아니, 지구라트 전체가 부서진 상태로 내려앉아 있었다. 그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붉은 액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곧 그 액체는 고운 빛 가루로 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만큼 큰 위력을 가진 마법 공격이기에 이렇게 지구라트가 박살이 났을까? 베인즈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지구라트의 잔해를 잠시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지구라트의 폐허 주변에는 한창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외투가 포함한 회색 방어구를 입은 자들이 특무조와 흑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뭐야? 저 병신들은."
오러 블레이드를 날린 소드 마스터가 기껏 검기를 일으킨 검사에 의해 쓰러지고 있었다.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의 궤적을 뚫고 들어온 소드 오러가 심장을 뚫은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자를 수 있다는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고도 저렇게 당할 수 있다니!
꽈앙!
후두둑!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젊은 놈이 쥔 검 끝이 강하게 빛나는가 싶더니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부채꼴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에 의해 수십이 넘는 흑기사들이 몸이 갑주째 터져 산산조각이 났다.
'미, 미친!'
익스퍼트 중상급에 달하는 검사들이 한 번에 수십이 죽다니!
'저놈은 또 뭐야?'
그의 시선에 마치 새처럼 빠르게 날아다니는 인물이 들어왔다. 작은 체구의 중년 사내는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오러 소드가 솟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흑기사들이 연방 쓰러지고 있었다.
'포위를 해야 하는데 왜?'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소수의 실력자들이 맹수처럼 날뛰게 놔두면 안 된다. 당연히 협공을 해서 손발을 묶어 놔야만 하는 것이다. 베인즈는 자신의 수하들이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본 전장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이상하게 지휘자들이 나서는 걸 보지 못했다.
'으드득! 저년이었구나!'
파앙! 푹!
촉이 오색 구슬로 되어 있는 시커먼 화살이 날아가는가 싶더니 흑전사들에게 뭐라고 명령을 내리던 조장 하나가 머리통에 화살을 박은 채 뒤로 날아갔다. 그 화살을 날린 주인공은 건물 위를 이동하면서 중간 지휘자들을 화살로 요격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명령 체계가 엉망이 되고 만 것이다.
한쪽에서는 마도사들이 모여 중첩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법이 바로 다크 실드였다. 공격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실드라니! 한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날아오는 파이어 랜스의 크기가 엄청났던 것이다. 일반적인 파이어 랜스의 열 배는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파이러 랜스는 마도사들이 중첩해서 펼친 보호 마법을 단숨에 부수고 그들로 하여금 피를 쏟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현실감이 없다. 멍하니 전투를 보던 베인즈의 눈에 한순간 빛이 돌아왔다. 젊은 놈의 왼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비수와 단검 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중 한 자루는 자신을 향하고 있었는데 시퍼런 뇌전을 머금고 있었다.
"헙!"
뭔가 마법을 펼쳐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마법사들이 기겁을 하고 블링크 마법을 펼쳤다. 조건반사적으로 주문을 캐스팅하려는 순간 머릿속이 화끈해졌다.
"커억!"
지지직! 지지직!
다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하얀 백지 위에 살아왔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나, 죽는 건가?'
베인즈는 죽는 순간에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성공입니다!"
성을 진입하다가 익스퍼트 상급의 흑기사 한 놈에게 잡혀 고군분투 끝에 놈을 처리하고 성안의 광장에 도착한 발트랑은, 부상을 치료한 직후 수하에게 보고를 받고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휴우! 정말 성공했군!"
발트랑은 감회 어린 얼굴로 엉망으로 변한 성안을 바라보았다. 성 중앙에 위치한 5층 높이의 건물은 완전히 주저앉았고 다른 건물들도 격렬한 전투로 인해 손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복구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크니스가 이방인 세력인 탓에 시체나 핏자국은 별로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겹게 승리를 거둔 길드원들과 용병들은 전리품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신들과는 달리 다크니스들은 상당한 양의 아이템을 떨어뜨린 것이다. 저 정도의 양이라면 원래 자신들보다 레벨이 높았던 만큼 전비를 보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 돌풍 용병대는 어디에 있나?"
"그분들은 이곳 상황이 대충 마무리되자 광산으로 가셨습니다."
"아!"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의뢰는 칼같이 지킨다고 하더니 이곳 상황을 정리하고는 다음 목적지로 향한 것이다.
"대단했습니다."
사예와 함께 부길드장을 받고 있는 세윰이 피로한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 역시 흑기사들을 상대하느라고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지만 눈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무지막지한 마법 한방으로 지구라트를 박살 낸 것은 물론 소드 마스터와 마도사들을 어린애 다루듯 처리하더군요. 고요의 땅에서는 제 실력을 다 보이지 않은 거였어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여실한 사예도 가까이 왔는데 돌풍 용병대의 위용에 감복한 얼굴이었다.
"세상은 이들의 실력은 십분의 일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소드 마스터라도 같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 마도사라도 같은 마도사가 아니더군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세윰도 봤나요? 하룬 대장의 마지막으로 비수를 날리는 거."
"네! 봤습니다. 시퍼런 뇌전이 흐르는 비수들이 마치 매직 미사일처럼 살아서 움직이며 급소를 파고들더군요. 그러고는 상대를 새까맣게 태워 버렸습니다."
세윰은 말을 하면서도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생각을 하자 소름이 쫙 끼쳤다. 마치 자신이 당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뭐랄까? 그 붉은 안개는 봤어요?"
"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정렬술의 일종인 것 같더군요."
죽은 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엷고 붉은 안개에 휩싸인 하룬의 모습은 경외심을 일으켰다. 그 안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안개를 후광처럼 두른 하룬의 모습은 고대의 신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난 사예와 함께 광산으로 갈 테니 부길마가 이곳 상황을 정리해요."
"저도 가고 싶.... 알겠습니다."
세윰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발트랑은 살아남은 길드원 중에서 운신이 가능한 이들을 이끌고 하룬이 2,000명의 예비 전력과 먼저 향한 광산으로 향했다.
"우리도 같이 가겠습니다."
용병들의 수장인 파벳이 따라붙었다.
"그대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소."
도와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들과의 계약 내용에 광산에 대한 공격은 없었다.
"어차피 지금 출발해 봐야 구경만 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용병들의 영웅인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의 위용을 구경하고 싶어서 가는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용병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 용병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나 자신을 따르는 많은 길드원들이 지금 상당히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광산으로 가는 이유는 하룬과 돌풍 용병대의 위용을 가까이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가릴 만큼 거대한 새를 타고 나타나 단숨에 지구라트를 부수고 소드 마스터와 마도사 들로 구성된 다크니스의 수뇌부를 척살한 돌풍 용병대원들을 생각하자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말도 안 되는 무지막지한 마법과 무려 1만이 넘는 이를 대상으로 광역 주술을 펼치는 신비한 마법사들과 오러 블레이드가 없이도 소드 마스터를 척살하는 용병 검사들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시퍼런 뇌전이 흐르는 수많은 비수와 단검 들을 던져 그만큼의 목숨을 끊는 환상적인 비도술을 다시 보고 싶었다. 광장을 둘러싸고 다크니스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던 사람들은 수많은 주검들 사이에 피처럼 붉은 안개에 둘러싸여 오연하게 서 있는 하룬의 웅자(雄姿)에 반하고 말았다.
"홍염의 사신(死愼)이야!"
"꼭 맞는 이름이군."
하룬이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들 사이로 홍염의 사신이라는 이름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대승이었다. 이전의 공성전과는 달리 사망자가 채 3,000명을 넘지 않았다. 살아남은 길드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세 번만의 승리를 자축했다. 사예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진이 빠진 모습으로 저마다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2시간도 걸리지 않아 광산을 장악하고 돌아온 하룬은 감개 어린 얼굴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발트랑에게 축하를 해 주었다.
"이제 이 성의 이름은 아리수가 되었군. 발트랑, 축하해!"
"이게 모두 대장님과 돌풍 용병대의 덕분입니다."
하룬과 돌풍 용병대가 아니었다면 이 성과 금광은 절대로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해내다니!'
이번 일을 맡은 돌풍 용병대는 비록 그 숫자는 적었지만 실로 엄청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2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맡은 일을 모두 해냈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거의 200명에 달하는 적들의 수뇌부를 격살했다. 발트랑의 눈에 비친 고문들은 소드 마스터와 7서클 대마도사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나 7서클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다크니스의 소드 마스터를 참살하고 흑마법사들을 마법으로 뭉개 버렸다.
'세상에 이런 용병대가 또 있을까?'
발트랑은 고개를 흔들었다. 돌풍 용병대는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이런 실력을 가진 인물들이 용병으로 머무르다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는 떠나도 되겠지?"
"아! 네. 하지만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지요."
"아니야. 이틀 간격으로 의뢰가 있어서 말이야. 마무리까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발트랑은 하룬이 말하는 의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리수의 경우 하룬의 낙점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뫼비우스와 같은 유니온이라는 점과 돌풍 용병대의 일을 일부 대행하는 뫼비우스가 겨루를 비롯한 친구들과 친해서였다. 어떻게든 하룬을 붙잡고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발트랑은 미리 준비했던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하룬에게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언제고 한번 거하게 대접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참!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우리 대원인 겨루와 방커 그리고 마리에 관한 일이야."
세 친구의 이야기에 발트랑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들을 돌풍 기지로 데려가려고 하네. 그간 자네가 많이 애를 썼다고 들었어."
"친구들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전신이나 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언제까지 자네에게 얹혀있을 순 없으니 그쪽으로 옮겨서 할 일을 찾아보라고 했네."
"그랬군요."
친구들을 떠올린 발트랑의 표정이 조금 복잡했다. 인공수정체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더 발트랑에게 있어 그 세 사람은 친구이자 형제였다. 불의의 사고로 중증 장애를 입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코원 유니온의 군부를 끌고 나갈 재목이 되었을 것이다.
군부의 실세인 사가의 양자가 되고 선망하던 노블이 되었지만 그 생활은 생각한 것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버려질지 모른다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으로 인해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가끔 시간을 내어 나란히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세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가볍게 술 한잔 하는 것이 그나마 그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 친구들에게는 돌풍 용병대와 함께하는 것이 더 좋은일일 겁니다."
놔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이 아렸다. 그동안 자신이 돌봐 준 것도 잊고 자신을 떠날 생각을 한 친구들이 서운하기도 했고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화가 나기도 했다.
"그쪽에 좋은 의사가 있고 희귀한 약초도 있으니, 언제고 몸이 정상이 되면 자네에게 받은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했네. 자네는 그들에게 친구 이전에 형제라고 하더군."
"...."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울컥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양부의 친딸이자 약혼녀인 사예는 완벽하게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발트랑이지만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준 것은 아니다. 그가 믿는 것은 세 친구밖에 없었다. 그런 친구들이 자신을 떠나려는 것에 서운하고 아쉬웠지만 친구들 역시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돌풍 용병대가 은밀하게 움직일 테니 도우미에게 그 사실을 알려 두도록 해."
"알겠습니다. 친구들을 잘 부탁드린다고 동생분께 전해주십시오."
"내 동생의 말을 전하지. 살아가다가 힘들면 언제라도 열려 있으니 돌풍을 찾아오라고 하더군. GG와 HG만큼은 아니지만 GPC도 그리 좋은 단체는 아니라면서 말이야."
"네에?"
발트랑은 GPC라는 소리에 경악했다.
"그리고 이건 극비 정보지만 자네가 찾는 그 마법서는 다크니스의 본거지인 타르 분지에 있네."
"네에?"
발트랑은 정신이 없었다. 설마 하룬이 이 정도의 정보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쩌면 그 마법서로 인해 GPC가 다크니스에 회유당할 수도 있어. 미리 대비해 두게."
"...."
대답을 할 수가 없다. 하룬은 모든 사정을 다 알고 하는 말이지만 발트랑은 그 사실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겨루를 통해서 언제든 연락해. 그곳이든 이곳이든 힘이 되어 줄 테니까. 나와 하룬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1명이나 다름없네."
하룬은 뫼비우스나 이 발트랑처럼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는 이들이 좋았다. 더구나 그런 이들이 형제나 다름없는 인공수정체라면 자신의 힘이 닿는 한 돕고 싶었다.
"내가 아는 사가 놈은 딸은 물론이고 자네도 마리오네트처럼 생각할 족속이야. 대항하려면 은밀하게 움직여야 해. 그러다가 힘에 부치면 언제라도 도움을 청하게. 우리 쪽에 연락이 닿지 않으면 같은 조직에 있는 코엠 상담의 세류에게 연락을 해도 되고. 그 친구에게 내 얘길 하면 최대한 도움을 줄 거야."
"세...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장님."
쌍류 그룹의 후계자인 세류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GPC의 요인이라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하룬 대장은 이미 그녀와 친구 사이로 추정될 정도의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도무지 내 잣대로는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군. 아니, 사람들인가?'
발트랑은 뛰어난 용병 정도로만 생각했던 하룬이 너무 신비하게 보였다.
'현실의 하룬도 이 정도로 큰 사람일까?'
발트랑의 눈이 하늘로 향했다.
"단장님, 고리돈입니다."(골드런: 안녕 난 고리돈이라고해)
"들어와!"
페론은 사람을 맞이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부관인 고리돈을 안으로 들였다. 고리돈은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비상했으며 그와는 같은 유니온의 같은 구역에서 자란 친구였다. 다만 그는 페론과 달리 못된 양부모를 만나 학대를 당하는 바람에 능력 발현이 늦어져 무능력자로 판정되어서 뒤늦게 조직에 들어왔다.
"이 밤에 무슨 일인가?"
"그게...."
고리돈은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을 했다.
"이상합니다. 사카 성에서 정기 통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카 성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데빌 산맥 외곽에 세워진 성들은 하루에 두 번은 반드시 본부와 통신을 하기로 되어 있다. 다른 때 같으면 아침까지 기다려 확인을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다른 전단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얼마 전에 산악 부족들에게 성을 3개나 연속해서 빼앗긴 것이다. 그 때문에 다크니스 전 조직은 비상이 걸려 있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 통신이 연결되지 않았다면 첨탑이 있는 지구라트가 손상되었거나 성에 변고가 있다는 말이었다. 사카 성은 금광을 관리하는 성 중 1곳이라 그 중요도가 높아 본부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특무조를 가장 먼저 파견할 정도로 특별히 관리를 하는 곳이다.
"마주 성에서 뭐라고 하던가?"
마주 성은 사카 성과는 걸어서 사흘 거리에 있는 광산 요새였다.
"그쪽에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마수 정찰대를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고리돈이 알아서 잘 처리한 모양이다. 마수를 타고 가면 반나절이면 도착하니 곧 연락이 올 것이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특무조까지 파견되어 있는 상황이라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누군가 성을 공격했다면 당연히 비상 통신이 왔을 것이다. 10분이면 통신이 가능한데 설마 그 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흑마법진과 마수로 1마 보호를 받는 성을 10분 안에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혹시 돌풍 용병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고리돈의 말에 페론의 잘생긴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들이 빼앗긴 4개의 성이 돌풍 용병대와 관련이 있다는 정보를 마츠루트 요새에 깔아 둔 세작들로부터 입수했던 것이다.
'설마 복수를?'
몇 시간 전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제리코가 이끄는 알코르 전단이 돌풍 기지를 공격하러 갔다가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밝혀진 돌풍 기지의 전력은 페론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심각한 피해를 입고 코원 유니온의 본부로 복귀한 제리코는 알코르 전단원들을 학살하는 하룬을 직접 상대했다고 했다. 물론 비욘드의 그 하룬과는 나이 차이도 있고 분위기도 달랐다고 했다.
'결국 내가 만났던 하룬은 이방인이 아니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