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격퇴와 회유 (231/278)

 격퇴와 회유

슈앙! 슝! 슈앙! 슝! 슝!

로켓 입자포 공격에 이어 개량 입자건들과 파동건들이 불을 뿜었다.

파바밧! 퍼억!

뜨거운 열기에 바싹 건조된 흙바닥이 푹푹 파이며 금세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그 속에서 적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응사해!"

반투명한 에너지 막에 가려진 적들도 입자건을 난사해 왔다.

"허억!"

"컥!"

억눌린 신음이 양옆에서 들려왔다. 놈들이 난사한 입자탄에 맞은 것이다. 슈트의 방호력으로 인해 죽지는 않겠지만 상당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전문가들이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공황 상태에 빠졌을 텐데, 그 와중에도 목표를 찾아 정확하게 사격을 하는 것을 보면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 틀림없었다. 지뢰와 입자포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어려운 전투가 되었을 것이다.

"쫓아갈까요?"

"아리가 뚫어 놓은 암로로 이동해! 우리가 먼저 2차 매복지로 가야 한다!"

"네, 대장님!"

이곳에서 승부를 볼 수는 없다. 아직 일반 대원들은 저들을 일대일로 상대할 능력이 없었다. 대원들이 암로로 움직였지만 하룬은 그 자리에 머물러 적들을 보았다. 흙먼지가 걷히며 쓰러진 채 버둥거리는 부상자들과 벌써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도망을 치는 적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살아남았군."

연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도망을 치는 자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200명 정도로 보였다. 비록 30문밖에 되지 않았지만 현 시대의 최고의 공격 무기인 로켓 입자포와 입자건 사격으로 겨우 50여 명을 처리했을 뿐이었다.

'로켓 입자포를 이 정도로 막아 내다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살아남았다. 이게 모두 놈들의 몸 주변에 생성되어 있는 에너지 배리어 때문이다. 연속해서 포격을 받았던 배리어는 로켓 입자포의 플라즈마 입자빔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상당수는 살아남은 것이다. 결적적인 피해를 주리라는 기대가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룬은 놈들이 암중에 세계를 경영하는 자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희한한 무기도 다 있구나!'

원리나 에너지원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배리어를 형성해서 플라즈마 상태의 입자빔을 막아 내는 최첨단 방어무기였다. 아마 쏘우에게 가져가면 무척 흥분할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이지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휘부의 퇴각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적들의 신형이 비틀거렸던 것이다. 거기에 이제까지 그들을 지켜 주었던 에너지 배리어는 모두 다 사라진 상태였다.

"경계를 철저히 하라! 서둘러라!"

제리코는 돌풍 기지의 추가 공격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다행인 건가?'

예상했던 매복 공격이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아 제리코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입자포를 제외한 다른 전력이 너무 약했다는 점이 걸리기는 했지만 적들의 동태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안심이었다.

'제기랄! 천하의 알코르 전단이 이렇게 비참하게 도망을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나마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단원들이 최첨단 슈트를 지급받은 상태로 출동한 것이 다행이다. 최첨단 슈트에 내장된 에너지 배리어 기능은 적들이 가한 입자포와 입자건 들을 효과적으로 막아 낸 것이다.

'에너지 배리어가 조금만 더 가동된다면 좋았을 텐데.'

핵 전자를 이용해 작동되는 개인 에너지 배리어의 가동 시간은 5분이 한계였다. 최근 개발이 되어 자신들의 경우에도 삼분의 일만이 지급받았을 뿐이다.

'으드득! 다음에 올 때는 제대로 준비해서 아주 박살을 내주마!'

후퇴하는 와중에도 멀리 보이는 관목 숲과 매복 지점을 응시하는 제리코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후퇴하는 입장이라 후미가 된 선두권이 마침내 2차 지뢰매설 지역을 통과하는 순간, 하룬의 명령이 2차 매복 지점에 도착해서 대기하던 돌풍 대원들에게 떨어졌다.

"마지막 목표물이 매설 지역에 들어오는 대로 폭파하라!"

하룬의 명령이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태범의 수신호를 받은 대원들이 일제히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꽈앙! 꽈앙!

굉음과 함께 땅거죽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흙먼지와 함게 알코르 단원들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솟구쳤다. 혼비백산한 올코르 단원들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으로 움직였지만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돌풍 대원들의 눈이 스산하게 빛나며 버튼을 눌렀다.

꽈앙! 꽈앙!

폭발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충격 흡수를 해 주는 슈트를 착용했지만 연속된 폭발과 입자탄의 포격을 계속해서 받은 알코르 단원들은 깊은 내상을 입고 말았다. 수십 차례의 폭발이 끝나고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자들의 사체가 널려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일부는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움직였다. 그 숫자는 언뜻 보아도 백을 헤아리고 있었다.

'끝장을 내 주마!'

"공격!"

하룬의 차가운 목소리가 대원들의 통신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하룬은 명령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거의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적들을 향해 메신저 패스트를 펼치며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대원들이 은신하고 있던 곳에서 뛰어나오며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파앗!

슈트와 함께 살과 뼈까지 깊이 베인 알코르 단원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연속된 폭발과 공격에 심한 내상을 입고 혼비백산해서 후퇴를 하던 알코르 단원들은, 돌풍 용병대의 기습에 적절하게 대항할 수 없었다. 바람처럼 전장으로 달려간 하룬의 박살이 검풍을 일으키며 살벌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슈악! 싸악!

박살의 양날에 어린 검기는 앞에 막아선 적들의 무기와 슈트를 통째로 베어 내고 있었다. 깊은 내상을 입은 알코르 단원들은 무기에 기를 담는 것은 고사하고 정상적으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룬의 목표는 간간이 보이는 능력자들이다. 연속된 충격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자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양 떼를 덮친 늑대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하룬이 지나간 길에는 펄펄 날아다니며 부하들을 독려하던 중간 관리자들의 사체가 줄을 이었다. 그런 하룬이 적들의 눈에 뜨이지 않을 리가 없다. 곧 그중 일부가 하룬을 향해 달려왔다.

"이노옴!"

하룬은 자신을 향해 검기를 날리며 달려오는 적을 향해 차가운 웃음을 지어 주었다.

타앗!

메신저 스킬을 펼친 하룬의 몸이 마치 고무줄처럼 늘어나며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적의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헉!"

들어 올린 검을 내리칠 여유도 없이 품을 파고드는 박살이 심장을 찔렀다. 검이 늘어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한순간에 검첨에서 솟아난 1미터가 넘는 검기는, 슈트와 갈비뼈를 뚫고 펄떡거리는 심장을 찔렀다.

팍!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왼손 바닥으로 가슴을 때리자 하룬의 몸이 잔영을 남기며 박살과 함께 몇 미터 뒤로 물러났다.

퍼억!

화끈한 감각을 통해 심장에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떨어져 내리던 검은 헛되이 땅을 내리쳤다.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알코르 전단의 한 조장이 고개를 숙여 심장 부위를 쳐다보았다.

콸! 콸!

붉고 뜨거운 핏물이 박살이 빠져나간 구멍을 통해 힘차게 흘러나왔다.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 그의 눈에서 급속하게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보통 상대가 아니야! 우린 잘못 왔어!'

두 번의 폭발과 연속된 입자포 공격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동료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내상에도 불구하고 잠력까지 폭발시킨 상태지만 달려드는 적을 상대할 수 없었다. 검기를 끌어 올린 자신의 검이 겨우 50센티미터를 내려오는 동안 상대는 4미터를 격하고 날아와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물러난 것이다. 하룬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진 적들 사이로 바람처럼 움직이며, 기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조장급을 찾아다녔다. 메신저 스킬을 펼친 그의 몸은 상대의 동체 시력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빨랐고, 박살에 어린 검기는 상대의 몸에 검신이 닿기도 전에 급소를 찌르고 베었다. 그렇게 적진을 헤집고 다니던 하룬의 눈에 한 인물이 들어왔다.

'적장이군!'

두 번에 걸친 폭발과 연속된 입자포 공격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 사내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혼란에 빠진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진형을 펼쳐라! 부상자를 진의 안쪽으로 옮겨라! 조장급들이 앞을 막아!"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명령이 울려 퍼지자 노련한 적들은 몇 개의 원진을 만들었다. 내상에도 불구하고 잠력을 폭발시켜 검기를 사용하는 조장들과 대장들이 원진의 앞을 막자 부상자들이 그 뒤로 숨었다. 돌풍 쪽에서도 검기 능력자들이 앞장을 섰지만 실전이 부족해 일시에 그 진형을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뒤로 빠진 자들 중 일부는 메고 있는 배낭을 뒤져 폭발물을 꺼내고 있었다. 우두머리의 명령으로 인해 그의 주위에 있는 자들은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겁도 없이 쳐들어왔으니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게 하룬이 정한 법이다. 하룬은 외투를 열어 암기 벨트를 개방했다.

파바바밧!

슈슈슈슛!

수십 자루의 단검과 비수들이 진형의 앞에서 돌풍 대원을 막고 있는 5명의 조장급 단원들을 향해 날아갔다.

"막아!"

채채채챙!

타타타탕!

시끄러운 금속성과 함께 대부분의 단검과 비수 들이 선두에 선 자들에 의해 떨어졌다. 하지만 하룬이 진짜 노린 것은 그 뒤에 있었다. 하룬의 상단전에 웅크리고 있던 시퍼런 뇌전을 머금고 있는 열 자루의 비수들이 그것이었다.

"아악!"

"또 있어!"

빠르게 검을 휘둘러 비수를 막던 선두열이 전격에 휩싸이며 쓰러지고 있었다. 타격의 순간 엄청난 전류가 쥐고 있는 무기를 통해 전도되었고, 놀랍게도 쳐 냈는데도 불구하고 튕겨지다가 이내 더한 속도로 날아왔던 것이다. 쓰러진 자들을 통해 엄청난 전류가 안쪽에 있던 부상자들에게 전해졌다.

금방 그 일대는 시퍼런 뇌전이 방전하며 안에있던 자들까지 감전시켰다.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던 자들은 감전되어 뒤로 쓰러지는 동료들의 몸을 피할 여유가 없었다. 순식간에 진형이 부서져 버렸다. 하룬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뇌전력을 회수해야 했다. 의식을 열 줄기로 분리한 것에 더해 너무 많은 뇌전을 한꺼번에 내보낸 후유증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돌아와!'

전해진 의념을 통해 일정한 범위를 휩쓸던 뇌전이 마치 푸른 물줄기처럼 변해 하룬의 미간으로 돌아왔다.

'후유!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뇌전이 다 돌아오자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현실에서 상단전의 뇌전을 어느 정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미처 시험해 보지 못해서 벌어진 실수였다.

'뭐야? 두 배는 더 는 것 같은데.'

순간적인 판단이지만 돌아온 뇌전의 양은 내보낸 것에 비해 최소한 두 배는 더 많았다.

'설마 휴먼의 몸에 흐르는 미세 전류를 흡수한 건가?'

인간의 몸에는 약하지만 미세 전류가 흐른다. 특히 신경세포들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강한 생체 전류가 흐르고 있다. 그 생체 전류와 하룬의 상단전에 자리한 뇌전의 성질은 거의 같았다. 뇌전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주변의 미세한 전류를 끌어들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원래는 자연적인 에너지에 불과했던 뇌전이지만 하룬의 의지에 길들여진 뇌전은 방사되어도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주변에 있는 전기를 끌어들인 것이다. 겨우 극심한 두통에서 해방된 하룬은 이제야 안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잘들 하는군.'

대원들은 잘 싸우고 있었다. 하룬은 미리 위험한 자들을 제거했지만 그래도 일부 실력자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대산과 사용을 비롯한 검기 사용자들이 맡아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반 대원들이 상대하고 있는데 그 짧은 사이에 많은 적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때 감전되어 죽어 버린 자들의 시체가 꿈틀거렸다.

"호오!"

하룬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 귀하다는 플라튬 합금으로 짐작되는 슈트를 걸친 자가 힘들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도색이 벗겨지며 플라튬 특유의 광택이 드러났다. 하긴 플라튬 합금이 아니면 엄청난 전격을 견뎌 낼 리가 없다.

"쿨럭! 쿨럭!"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난 자가 고글을 위로 올리고 격렬한 기침을 했다. 날카롭게 위로 올라간 진한 눈썹과 얇은 입술이 무척이나 냉혹하게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하룬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경탄과 공포로 젖어 있었다. 뇌전이 흐르는 비수에 생명을 준 자. 전신에서 심혼을 옥죄는 두려운 기세를 뿜어내는 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게임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수준급의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그의 본능은 하룬을 보는 순간 말하고 있었다.

'이자는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찍어 누르는 기세는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몇 번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갔으며 강인한 정신력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만이 이런 기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룬의 그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서 있는 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전장을 훑어보았다. 슈트 때문에 폭발에도 살아남은 자들은 많았다. 대부분 심각한 내상을 입어 제대로 운신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리코는 그 모습에 침통한 표정으로 하룬을 응시했다.

"크윽! 철저하게 당했군. 당신은 누구요?"

"하룬!"

하룬 역시 고글을 올리며 짧게 대답했다. 하룬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제리코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렇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틀거리는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난 글로리 가이아의 특수전단인 알코르의 전단장 제리코요."

"제리코라. 꽤 어린 친구로군."

사실은 비슷한 나이지만 하룬은 노안으로 인해 오랫동안 적어도 대여섯 살 위의 나이로 살았기에 그 자신도 또래를 어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감히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을 공격하다니. 내 경고가 그렇게 약했나?"

경고라는 말에 제리코의 눈에 잠시 의아함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후후후! 경고를 했었나? 빌어먹을! 윗대가리들이 경고를 무시했거나 아니면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내게 불가능한 임무를 맡긴 거로군. 쿨럭!"

내상이 심한지 격렬한 기침과 함께 검붉은 핏덩어리를 토한 제리코의 눈이 잠시 전장을 향했다. 그러고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블러드 새도우가 몰살당한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명령을 따라 이곳으로 오다니. 나도 미쳤지!"

전의가 사라진 제리코의 눈이 하룬을 향했다.

"항복하면 받아 줄 거요?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최대한 협조하겠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 꼴이 되어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지만 한 단체의 우두머리로 수하들의 생명은 챙겨야만 했다.

"항복이라...."

설마 항복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전장을 둘러본 하룬은 이제 서 있는 적의 숫자가 채 스물이 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망설였다. 바닥에는 수많은 부상자들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지르고 있었다. 더 이상의 살생은 불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수많은 패악을 부렸을 것이 분명한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하룬의 망설이는 기색을 읽은 제리코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모든 것을 바치겠소. 원한다면 내 생명도."

하룬은 적이 수장치고는 그릇이 작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을 읽은 것일까? 제리코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살자고 항복하는 건 아니오. 반드시 살려야 할 자들이 있소."

"좋아!"

하룬은 대원들에게 공격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지시를 받은 대원들이 물러나자 가까스로 검을 휘두르던 자들 상당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이 새끼들아! 다 덤벼!"

아직도 광기와 살기에 젖어 발악을 하는 자들이 개중에 있어 하룬의 눈이 차가워지며 시퍼런 살기가 솟아 나왔다. 그런 자들을 바라보는 제리코의 눈에도 한기가 어렸다.

"처리해!"

하룬의 명령이 떨어지자 물러났던 대원들이 그자들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광기에 빠진 자들이라 위험은 하지만 대원들의 실전 경험을 위해서는 좋은 상대가 되어 줄 것이다.

"저놈들은 마약과 살육에 중독된 놈들이오. 언젠가는 내손으로 멱을 딸 참이었소. 저놈들은 몰라도 이제까지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던 자들은 살려 주었으면 좋겠소."

죄가 없다는 말이 우습게 들렸지만 왠지 그의 말이 하룬을 움직였다. 아니, 다급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하룬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죄가 없다?"

"말 그대로요. 전투원이 될 때 가해지는 필수적인 세뇌 과정도 거치지 않았고 은밀한 곳에서 수련만 하다가 내 비호를 받아 이제 갓 세상에 나온 녀석들이오. 평생 사랑도 받지 못하고 짐승처럼 사육되었다가 이제 겨우 세상을 구경한 불쌍한 형제들이오."

형제들이라는 말에 하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고 보니 제리코도 갓 성년을 넘긴 얼굴이었다. 묻지는 않았지만 그가 인공수정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공수정체인가?"

뜬금없는 하룬의 물음에 놀랐는지 제리코의 눈이 커지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혹시 벼리, 화랑이라는 녀석들을 아나?"

그 물음에는 제리코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룬은 이제 제리코가 인공수정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인공수정체들은 이상하게도 같은 인공수정체들에게 특별한 호감을 느끼게 된다. 정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다른이들이 주는 정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같은 인공수정체들끼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감을 가지는 것이 특징인 것이다.

"화랑과 벼리는 우리 돌풍 용병대원이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아닌데. 수하들을 모두 잃은 벼리는 지금....."

제리코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하룬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의 말을 끊었다. 제리코의 의아한 눈길에 하룬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도청은 없나?"

"아! 네! 게임 중이라면 몰라도 현재는 확실히 없습니다."

말하는 것을 보니 제리코도 캡슐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조직에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살아남으면 곤란한 자들이 있을 텐데?"

하룬의 말에 안도의 표정을 떠올린 제리코의 손가락이 여러 방향을 가리켰다.

"즉시 뒤로 물러나라!"

하룬의 명령이 떨어지자 광기에 젖어 있는 자들을 상대하던 대원들은 강하게 상대의 무기를 치며 뒤로 빠졌다. 순간 하룬의 손에서 비수들이 시퍼런 잔영을 남기며 연속해서 날아갔다.

"큭!"

"커억!"

공격이 멈추었음에도 광기에 젖어 있던 자들과 쓰러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자들 중 일부가 슈트와 헬멧 사이를 파고든 비수가 흘린 전격으로 인해 부르르 떨다가 쓰러졌다. 그 숫자는 거의 스물에 가까웠다.

'돌아와!'

전격을 머금은 비수를 회수하는 하룬을 경이롭게 바라보던 제리코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염력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염동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 뇌전의 힘이 담긴 비수를 염력으로 날리고 회수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들어 본적이 없다.

"하룬....대장은 대체 누구요?"

애매모호한 물음이었지만 하룬은 그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다.

"인공수정체로 GG에 의해서 강제로 납치되어 불행하게 살아왔던 벼리와 화랑을 히든 대원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대원들 중 절반은 인공수정체 출신들이다."

"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과 인연이 있나?"

"아, 아닙니다. 그들은 저를 알지 못합니다. 전 표면적으로는 인공수정체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공수정체라는 사실은 언제나 명심하고 있지요. 비록 출신 유니온도 다르고 명령 체계가 다른 조직에 몸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인공수정체 출신이기 때문에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대답을 하는 제리코는 완전히 하룬에게 승복한 상태였다. 우습게도 하룬이 자신과 같은 인공수정체를 대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마음을 완전히 연 것이다.

"그럼 그들이 돌풍 용병대로 전향했군요. 하지만 벼리는 지금....."

"내 지시를 받고 데드 벙커에 잠입했다. 우리 돌풍은 머지않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데드 벙커를 박살 낼 것이다."

제리코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역시 벼리의 정황과 데드 벙커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하룬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대장님!"

어느새 그에게 다가온 대원들이 그를 불렀다.

"제리코, 힘들겠지만 나머지 생존자들 중에서도 살 필요가 없는 쓰레기들을 확인해 줘야겠다."

"네, 대장!"

제리코는 하룬의 말에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이해했다.

"대산, 사용, 제리코가 가리키는 자들의 숨통을 끊어라!"

두 조장은 하룬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바로 제리코의 뒤를 따를 뿐이다. 그들이 쥔 검에는 뜨거운 열기에 굳어 가는 피가 비릿한 혈향을 풍기고 있었다. 살아남은 알코르 단원은 87명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내상은 물론 심각한 부상을 입어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제리코를 제외한 모든 알코르 단원들은 수면제로 재워 버렸다. 하룬은 3, 4조로 하여금 전장을 정리하게 하고 바이크를 이용해서 그들을 데리고 돌풍 기지로 돌아왔다.

"여기가 우리가 사는 곳이다!"

무장이 해제되어서인지 아니면 생소한 곳에 포로가 되어서 그런지 기가 잔뜩 죽은 제리코였지만 돌풍 기지를 구경하면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록 지상과 지하 1층에 불과했지만 그 시설이나 넓이는 이곳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하룬은 의식을 잃은 알코르 단원들을 지하 1층의 광장에 차례로 눕혔다. 제리코는 그런 단원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있었다.

혜련을 비롯한 치료조 대원들이 외상을 입은 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쏘우를 비롯한 연구조 대원들은 벗긴 슈트의 외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룬은 과연 이들이 사고를 치지 않고 기지 식구가 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지난번에 발생한 내부 동조자로 인해 이들을 온전히 믿기가 힘들었다.

"제리코, 이들 중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되는가?"

제리코는 하룬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대장님, 이들 중 37명은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간의 전투 경험과 공적을 토대로 선발된 다른 단원들과는 달리 제가 단주의 권한으로 임의로 받아들인 형제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룬은 태가사남매로 하여금 제리코가 가리킨 단원들에게 내상약을 복용시키도록 조치했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회복에 좋지 않을뿐더러 앞으로의 상황을 보지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룬은 직접 제리코를 데리고 돌풍 기지를 소개해 주었다.

제리코는 돌풍 기지의 시설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기지의 관리 체계가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지나는 동안 본 기지 식구들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그들 대부분은 얼마 전 큰 전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리코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런 느낌은 참으로 생소한 것이었다.

'기지 전체에 강한 활력과 희망이 흐르고 있다!'

제리코가 가장 크게 인상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하루하루 희망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꿈을 꾸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활기와 밝은 분위기가 기지 전체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인공수정체 출신의 기지 식구들도 만나 간단하게나마 이야기도 해 보았다. 제리코는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 형제들이 돌풍 기지에서 어떤 희망을 찾았는지를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돌풍 기지를 구경하고 소장실로 들어가 하룬이 자리에 앉자 제리코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항복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님!"

"벼리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험체로 살아온 것보다는 가치 있는 삶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하룬이 아까와는 달리 배신을 걱정하지 않았다. 블러드 새도우의 공격시에 생겼던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아즈만은 효과적으로 대상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정신감정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아까는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하룬은 제리코로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 자원(JA-One) 유니온 출신으로 인공수정체로 태어났습니다. 다른 인공수정체 형제들처럼 부양가정에서 버러지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다가 여섯 살 때 친부모가 찾아왔습니다. 잠시 부모와 함께 살던 저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검증받고 자원 유니온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졌던 친부모에 의해 특수학교로 보내졌습니다. 나중에야 그곳이 글로리 가이아에서 운영하는 곳이며 저처럼 어린 나이에 전투 분야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오는 곳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운이 좋았던 저와는 달리 GG에 의해 강제로 납치되어 그곳에 왔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열입곱 살이 될 때까지 각종 전투 기술과 전술을 배웠습니다."

제리코는 뛰어난 성적으로 특수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조직의 인정을 받아 배리어 밖을 오가며 변종 생물들을 상대하는 특수 전투단에 소속되었다. 뛰어난 전투 능력과 함께 게임에 있어서도 특출한 능력을 보인 제리코는 짧은 기간 동안 조직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의 친부모는 글로리 가이아의 중간 관리자로 유니온에서도 유서가 깊은 가문 출신이었다.

"빌어먹을! 부모라고는 하지만 이제까지 세 번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저란 존재는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능력이 없었으면 절대로 저를 찾아오지 않았겠지요."

'그런가? 그럴 수도.'

하룬은 잠시 상념에 빠졌다. 혹시 자신이 성년이 될 때까지 무능력자로 판별이 나서 친부모가 자신을 찾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저는 그 사실을 늦게 깨달았습니다. 바보처럼 늘 부모님이 방문하길 기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불쌍한 녀석이다. 차라리 바랄 것이 없다면 실망도 적을 텐데 멀쩡한 부모가 있으니 그 사랑을 내내 갈구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벨린과 비슷한 경우였다.

'아니, 좀 다르다!'

하룬이 이제까지 만나 본 인공수정체들 중 능력자들은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휴먼에 비해 감정의 폭이 무척이나 좁은 것도 그중 한 가지였지만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제대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즉 인공수정체들은 같은 인공수정체들에게서 느끼는 만큼의 정을 다른 존재들을 통해서는 느끼지 못한다. 설사 친부모가 사랑을 준다고 해도 제대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우도 그렇다.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만났던 양부모들 중에는 그에게 애정을 주려고 한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거부했다.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우린 불쌍한 존재들이다.'

제대로 사랑을 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런 존재들인 것이다. 물론 자신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아니, 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그가 강한 정을 느낀 존재는 벨이 처음이다. 그리고 아리와 아즈만이 그 뒤를 잇는다. 생각해 보면 그 셋을 제외한 다른 휴먼들에게는 그 반 정도로 정을 느끼지 못한다.

'휴먼체가 아닌 존재에게 정을 느끼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지.'

그러고 보니 자신도 굉장한 이질적인 존재였다.

"제 출신과 그간에 쌓은 공적으로 인해 조직에서 8개의 전단이 새로이 창설될 때 하나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힘이 있는 자리여서 졸업을 앞둔 친구들을 하나둘씩 제 전단으로 빼돌려 친위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벼리와 화랑의 존재는 그 무렵에 알았습니다만 유니온이 달라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리코는 자신의 사연 말고도 쓸 만한 고급 정보를 털어놓았다.

"GG는 HG와 마찬가지로 최고 권력 기관인 대 원로 회의를 중심으로, 관리 조직의 경우는 점조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 역시 원로 가문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르지만 일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룬은 제리코의 정보와 이전에 이벨린에게서 들은 것들을 토대로 GG와 HG의 조직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놈들의 조직은 그야말로 강력한 중앙집권 형태였다. 원로 가문들이 거의 모든 세력과 힘을 장악하고 있으며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조직원들끼리 다른 라인에 속하면 서로를 알기 힘들도록 되어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면서도 원로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정말 귀신같은 놈들이었다.

"이제 저와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의 1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눈 후 제리코가 심각한 얼굴로 물어 왔다.

"어떻게 하고 싶은가?"

"저도 친구들과 함께 돌풍 용병대원이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하룬도 거부하지 않으리라. 비록 아직은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상태라서 제대로 힘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와 친구들의 전투력은 얼마 전에 경험한 돌풍 용병대원들보다 못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한 제리코는 설레는 얼굴로 대답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형제들과 함게 새로운 꿈을 꾸며 살고 싶은 그의 열망이 이글거리는 눈빛을 통해 느껴졌지만, 하룬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다! 돌풍 용병대원으로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제리코, 너와 친구들은 GG로 복귀해야겠다!"

"네에?"

예상치 못한 자신의 말에 놀란 제리코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하룬은 생각한 바를 꺼냈다.

"우리 돌풍은 세상을 좀먹는 GG나 HG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릴 작정이다. 그러려면 고급 정보가 필요하다. 너도 알겠지만 GG의 조직은 극히 폐쇄적이라 정보 입수가 쉽지 않다. 아쉽겠지만 너는 GG에 복귀해서 놈들의 움직임을 내게 실시간으로 알려 주어야겠다."

"저를 믿고 돌풍 용병대원으로 받아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본부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문책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이렇게 대패한 상태로 돌아가면 어떤 문책이 내려질지 모른다. 조직의 중간 관리자인 친부모로 인해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이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직책은 얻기 힘들 것이다. 제리코는 이제라도 수많은 인공수정체 형제들이 있는 돌풍 기지의 식구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전투 상황에 대해 제대로 보고한다면 큰 문책은 받지 않을 것이다. 지위가 필요하다면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입자포를 100문 이상 보유하고 있으며 넓은 범위에 폭발물을 매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돌풍 기지다. 자신들의 공격을 미리 알고 있을 정도의 정보력과 1,000여 명의 특수전투원들을 어린애 팔 비트는 것처럼 쉽게 처리했다.

'그럴 수도.'

일부 대원들의 헬멧에 장착되어 자동으로 촬영되었을 캠의 영상을 통해 돌풍 기지의 전력이 밝혀지면 질책은 있겠지만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장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GG는 상상 이상으로 강합니다. 아마 HG도 GG만큼이나 강할 것입니다."

"후훗! 나와 비욘드에 있는 하룬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두 조직과 전쟁을 해 왔다. GG와 HG는 언제고 나와 돌풍 용병대의 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자신의 결의를 밝히는 하룬의 전신에서는 휘광처럼 강렬한 신념이 흘러나왔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다!'

제리코는 하룬의 단호한 말에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 대장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겁니까?"

"내가 꿈꾸는 세상에는 GG나 HG는 물론이고 GPC도 없다. 꿈꾸고 노력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능력이 있는 자들은 존중받지만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자들을 지금처럼 무시하지 않는다. 힘과 권력을 지닌 자들은 약자를 보살피고 존경을 받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

하룬의 말을 들은 제리코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사람 정말 크다!'

세상을 통째로 바꾸려고 한다. 오랫동안 굳어진 사회가 하룬의 신념과 용기에 의해 반드시 뒤집어질 거란 믿음이 생겼다. 자신이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고 있을 때 이 사람은 불합리한 사회를 통째로 바꾸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실제로 노력해 왔다. 그의 눈앞에 있는 하룬의 몸에서 갑자기 휘황한 빛무리가 어렸다.

'눈이 부셔!'

제리코는 처음으로 존경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맹렬한 욕구가 저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올랐다. 억제할 수 없는 걱정에 주먹을 쥔 손은 물론이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제리코, 널 다시 악취가 진동하는 곳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난 정보가 필요하다! 한 가지만 약속하마! 반드시 너와 네 친구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겠다."

제리코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하룬은 반드시 자신과 형제들을 GG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거면 됐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돌풍 대원으로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신과 친구들이 하룬의 꿈이자 이제는 자신의 꿈이 되어 버린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큰 쓸모가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하룬은 대원들을 시켜 죽지 않을 정도로 내상과 외상을 치료한 알코르 전단원들을 다시 전투 현장으로 보냈다.

"이들은 바로 깨어날 것이다. 네 형제들 중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만 우리의 존재를 말해 주어라."

그렇게 말한 후 하룬은 웜형 사이보그가 든 캡슐 한 주머니를 제리코에게 주었다.

"이것은 복용하는 즉시 뇌 중추신경에 결합하는 극세형(極細形)웜 사이보그다. 이것을 통해 상대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 기지에서 알 수 있다. 당사자는 알 수 없는 각종 정보나 혹은 위험을 알아차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기지에서 자폭 명령을 내리면 터지면서 독성 물질을 분비해 대상자를 죽일 수 있다. 웜형 사이보그는 특정한 몇 종류의 진동을 정기적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어디서 만나더라도 기지 식구인지 아니면 감시자인지를 알 수 있지. 또한 뇌파 통신도 가능해. 돌풍 식구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의심이 가는 경우나 중요한 직책에 있는 자라면 먹이도록 해."

제리코는 하룬과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GG 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만들 생각이었다. 웜형 사이보그는 그런 경우를 위해서 준 것이다.

"신기한 물건이군요."

캡슐을 이리저리 살피던 제리콘느 한순간 그것을 삼켜 버렸다.

꿀꺽!

"무슨 짓이야!"

"저부터 기지의 감시와 보호를 받겠습니다. 이래야 대장님도 저와 형제들을 신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벨참모와 뇌파 통신을 하기 위해서 부족한 이능력까지 개발하지 않아도 되니 좋지요."

"허! 이런!"

하룬은 캡슐이 제리코의 목을 넘어가는 순간 가느다란 의심의 끈을 놓아 버렸다. 사실 몇 시간에 걸친 대화를 통해 한 식구로 받아들인 자신의 결정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던 참이다.

"하하!"

제리코의 귀환 모습은 처참했지만 하룬의 온전한 신뢰를 받은 그의 마음은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거사를 앞두고 너무 큰일을 벌인 것일까? 기지로 돌아와 대충 일을 수습하고 비욘드로 돌아온 하룬은 벨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오빠!

-웬일이야?

-급하게 알려 줄 것이 있어.

-뭔데?

-데드 벙커에서 진행하기로 했던 일이 무기한 미뤄졌어.

-그래?

-벼리 오빠가 전해 온 바에 따르면 경계 태세를 특급으로 강화하고 연구 시설의 출입 제한도 강화했데.

-그럼 그곳으로 간 GG의 수뇌부들이 이동을 한 건가?

그럼 큰일이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들을 처리하는 것은 지금 돌풍 기지나 자신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아니야. 아즈만 언니가 진동파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있는데 이동을 한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어.

-음. 그럼 폭발 사건 때문에 놀라서 내린 결정이겠구나.

-아마도.

미리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놈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데드 벙커와 가장 가아운 유니온에서 일어난 연쇄 폭발 사건을 놈들의 수뇌가 심각한 위협으로 느낀 것이리라.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 모인 GG의 수뇌부들이 언제까지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네.

-맞아, 오빠. 우린 아주 귀중한 시간을 벌었어.

생각해 보니 정말 다행이다. 오르그들을 어떻게 이용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알코르 전단원들이 보유한 배리어 발생기에 대한 대처 방안도 아직 찾지 못했는데 잘 됐지, 뭐.

그 말도 맞다. 놈들이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지금까지 준비했던 작전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놈들은 일정 시설물을 감싸는 에너지 배리어를 만들 수 있는 무기도 있을 것이다. 데드 벙커에 그런 것이 있다면 전략을 수정해야만 한다. 

-일단 셋이 생각해 봐.

-알았어. 청일 님의 연구 일지에 답이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몸조심 해, 오빠. 다시 연락할게.

작전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에 하룬은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비욘드에서도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여유가 없어진 거지?'

한숨이 나왔다. 남들은 이 세상을 가상현실로 여기며 게임을 즐기는데 자신은 왜 이렇게 여유 없이 사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GG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그냥 모른 척하고 이 비욘드를 떠나고 싶다. 돌풍 기지에 칩거하며 기지 식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도 싶었다.

'하지만....'

하룬은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자신의 소명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휴먼이 휴먼인 이유는 높은 이상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삶이든 의미가 없지는 않다. 이상이나 목표가 없는 삶이라도 본인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삶은 어떤 모습이건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가지는 가치겠지.'

어떤 삶이든 살아가는 주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면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삶이라도 그 본인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룬은 이미 살아가는 목적을 세웠고 그것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걸로 된 거야.'

이상을 달성했는지 여부는 차후에 판단할 문제다. 이상을 위해 노력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하룬은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은 결과로 판단하지만 개인의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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