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세류 (229/278)

세류

이벨린과 의남매를 맺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상단으로 돌아오는 동안 하룬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새로운 여동생이 1명 생겼다는 것에 더해 같은 세상을 꿈꾸는 동료가 생겼다는 것에 마음 한구석이 든든했다.

'이벨린과 내가 꿈꾸는 세상은 비슷해. 그녀가 꿈꾸는 세상이라면 확실히 현재보다는 낫겠지.'

이벨린의 힘이 강했더라면 좀 더 멋진 일들을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원대한 생각과 개인적인 역량은 가지고 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바쳐 줄 세력이 없다. 지금까지 워낙 소극적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하룬 자신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 생각이나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여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이벨린은 다르다. 자신에게 나약한 모습을 여실하게 드러냈지만 그녀에게는 그에게 없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확고한 정치 신념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난 그런 능력도 없거니와 그 정도의 열정이나 관심도 없어.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했다. 잘될까 하는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GG와 GPC에도 내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저렇게 자신에게도 서서히 힘이 생기고 있는 상황이라 정보만 갖추어진다면 놈들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운 좋게 포러스의 기억을 흡수했지만 아직도 완전하지 않았거니와, 현실과 이곳 세상에서 두 세력의 최근 정보는 얻을 수가 없었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몇 있었다.

'페론이라면?'

페론과 연수를 할 수 있다면 GG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자신이 있다. 하지만 페론은 이미 현실 세상의 삶을 포기했다. 그가 꿈꾸는 것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세 신과 인공수정체 형제들을 데리고 이 세상으로 와서 사는 것이다.

'가만! 캡슐에 내장된 초자아 컴퓨터가 자신도 모르게 캡슐 사용자의 행동을 GG 본부에 전해 주고 있다면?'

만약 GG도 휴먼 가드처럼 은밀하게 조직원들의 플레이를 감찰하고 있다면 녀석도 위험할 수 있다. 그때는 마법으로 대화를 숨겼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틀림없이 조직에 반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노출하고 말 것이다. 어쩌면 15사도회라는 조직의 존재와 그들의 의도는 진즉에 GG 상층부에 노출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빨리 다시 만났으면 좋겠군.'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서 포러스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을 때 페론이 해 주었던 주의 사항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영혼이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때문에 하룬은 페론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해수련은 어떨까?'

잠시 생각을 하던 하룬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해수련이라면 정보 면이나 파워 면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녀는 노블로 태어나 이제까지 노블로서 충실하게 살아왔다. 굳이 이야기를 해 보지 않아도 그건 알수 있다.

'그렇다면.....역시 그녀뿐인가?'

하룬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은 세류였다. 그녀를 떠올리자. 하룬이 표정이 묘 해졌다. 자수성가를 한 부친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해서 노블로 편입된 세류는 해수련과는 달리 노블로서의 의식이 강하지 않았다. 기업 경여에 참여를 하면서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노블들과 신분제의 폐해에 대한 것도 두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한태 부담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웬만하면 얽히고 싶지 않은데....'

자신을 향한 마음이 말끔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하룬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좀 더 밀착된 관계를 가지게 되면 결국 그녀를 힘들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그를 갈등하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

일반적인 정보라면 벨이나 아리 그리고 아즈만이 충분히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세계를 암중으로 지배하는 거대 세력들을 상대하려고 작정한 하룬에게는 보다 특별한 정보들이 필요하다.

'일단 세류와 이야기를 해 보자!'

세류의 생각을 들어 봐야만 한다. 그녀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라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룬은 몇 시간에 걸친 장고 끝에 마음을 정하고 내실을 벗어났다. 코엠 성에 있을 수도 있지만 이곳에 와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찾아가 보기로 한 것이다. 내실 밖에는 딜런이 앉아 명상에 잠겨 있다가 그를 보고 일어섰다. 그를 보는 하룬의 눈빛이 따듯했다. 귀족이기에 앞서 기사도에 충실한 이라서 용병대에 들어와서는 수하의 도리를 다하는 딜런이지만 하룬은 그에게 늘 부정(父精)을 느끼고 있었다.

"어딜 가십니까?"

"딜런 경, 코엠 상단에 가려고요. 같이 가시죠."

"네. 그런데 고문들 중에 심심한 이들도 있는 것 같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 도착해서 고문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 보니 숙소 앞에 대전사 출신 고문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표정들이 무척이나 권태롭다. 딜런처럼 명상을 통해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직접 몸을 움직여 수련하는 이들이라 따로 수련장이 없는 숙소에서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포커칸 출신들은 타니엘라와 미루스를 붙잡고 여전히 주술과 마법과의 관계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분들에게 제대로 된 무기도 드리지 못했군.'

하룬은 마침 잘됐다는 생각에 대전사 출신 고문들을 모두끌고 밖으로 나왔다. 현재 마츠루트 요새는 황도만큼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공작성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들끓는 곳이 되었다. 상단들치고 이곳에 지부를 설치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이곳으로 거점을 옮기거나 분점을 설치했다. 다른 성과 차이가 있다면 무기를 가진 자들이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크니스를 노리는 수많은 이방인들과 용병들이 득실대기 때문이었다.

산악 부족 출신 고문들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요새에는 각양각색의 외모를 가진 이방인들은 물론 용병들까지 몰려든 터라 금방 그 관심은 식었다. 하룬은 먼저 공방 거리로 들어가 무기 상점을 찾았다. 특별히 아는 곳이 없는 터라 가장 규모가 커 보이는 곳으로 들어간 하룬은 고문들에게 무기를 고르도록 했다. 평생 마수와 싸워 오며 나름 경지에 오른 이들이다. 특별히 무기의 이점을 따지는 수준은 이미 초월한 그들이지만 그래도 무기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허허! 정말 좋은 무기들이군."

"이 날 좀 보게."

고문들은 평소의 과묵함에서 벗어나 마치 어린이처럼 천진한 표정으로 진열된 다양한 무기들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이곳에 있는 무기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전승되어 온 부족의 대장장이가 제련했던 자신들의 무기와 다른 현격하게 높은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눈에서 뜨거운 열기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실력만큼이나 눈이 높았기 때문에 쉽게 무기를 고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하룬이 매니저에게 속삭였다.

"다른 것들은 없나?"

"왜 없겠습니까? 지하에는 세 제국의 명장들이 만든 명품들을 따로 진열해 두었습니다."

매니저를 따로 지하로 내려가니 고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눈에도 명품임을 알아볼 수 있는 무기들이 그들의 눈을 유혹했던 것이다.

'최소한 레어급 이상이군.'

한 대장간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납품받은 것으로 보이는 질 좋은 무기들과 방어구들이다. 고문들은 이곳에 와서야 결국 하나둘 무기를 고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명품임을 알 수 있는 무기들이고 고르는 이의 경지가 높으니 허술하게 고를 리가 없었다. 딜런은 드워프가 만들어 준 검이 있으니 고르지 않았지만 하룬은 잘 정련된 비수 50개가 빽빽하게 꽂혀 있는 허리띠 하나를 골랐다.

"비쌀 텐데 괜찮을까요?"

무기를 고른 고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고른 무기들이 만만치 않은 가격임을 생각해 내곤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사 드릴 수 있습니다."

하룬은 큰소리를 쳤지만 대금을 치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가격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왔던 것이다.

'이분들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으니 좀스러운 생각은 하지 말자.'

새로 합류한 고문들은 딜런과는 다른 조건으로 용병대에 들어왔다. 그들은 언제든 용병대를 나갈 수 있다는 단서를달고 영입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산악 부족들이 믿는 마지막 힘이었기에 온전하게 용병대에 소속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허! 안 그래도 우리보다 아이들이 더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조금 신경이 쓰였는데. 대장님이 저희들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 주시는군요."

무기 상점을 나오는 고문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본바탕이 무표정한 산악 부족들인 데다가 대전사들은 특히 더 무섭고 차가운 외관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푸근한 얼굴이 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하룬과 딜런도 전염된 듯한 미소를 지었다.

'포머칸 출신인 고문분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없는지 알아봐야겠구나.'

자신의 부족에 대한 안위와 보다 더 높은 경지를 희구하는것 말고는 물욕(物慾)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고 생각했던 고문들의 반응에 하룬은 꽤 놀랐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혹은 경지가 올라가도 기본적인 욕구는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기분 좋게 무기 상점을 나온 하룬은 곧장 코엠 상단의 지점으로 향했다.

코엠 상단의 상점은 요새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규모만해도 돌풍 상점의 열 배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상점은 온갖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종류별로 상품들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었다. 오면서 잠시 눈으로 구경한 다른 상점들과는 달리 모든 물품을 취급하면서도 전문성까지 엿볼 수 있었다.

'쇼핑몰을 응용했군.'

현실에 존재하는 쇼핑몰처럼 모든 물품을 한자리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한 코엠 상점의 의도는 제대로 통했다. 상점안은 가만히 서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손님?"

잠시 주저하는 사이 다가온 청순한 외모의 아가씨가 물었다. 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아주 매력적인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얼마나 지혜로운지가 보이는 특이한 아가씨였다.

"이곳 지단주, 점장을 만나고 싶어서 왔소만."

하룬의 용건에 아가씨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무슨 용무이신지요?"

"난 하룬이라고 하오."

"....하....룬, 하룬이시라면 돌풍?"

하룬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아가씨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고는 침을 삼켰다. 하룬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강렬한 존경의 염이 서려 있었다. 뭔가 들은 거라도 있는 것 같았다.

"전 마츠루트 요새의 점장인 아이류라고 해요. 언니들에게 대장님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떤 일로?"(골드런: 아...이...유?)

"세류가 혹시 이곳에 와 있습니까?"

아이류는 하룬이 세류를 찾자 긴장한 표정을 풀었다.

"네. 지금은 후원에 있어요. 제가 안내할게요."

정신을 차린 아이류의 얼굴은 흥분으로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류 자매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하룬과 고문들이 아이류를 따라간 후원은 엄청나게 넓었다. 3층 높이의 창고가 무려 5개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대규모 물량이 입고된 듯 후원 전체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100여 명에 달하는 인부들이 짐을 풀고 그 내용물을 창고에 넣고 있었다.

"언니, 세류 언니!"

침착하게 일행을 안내하던 아이류는, 인부들과 점원들을 지휘하고 있는 세류를 보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그러곤 세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열 살 정도는 어려진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풋!"

"후후후! 귀여운 아가씨로군."

고문들은 이미 그만한 나이의 손녀가 있거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터라, 아이류의 행동이 귀여웠는지 따듯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귀여운데. 이름을 보니 세류와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것 같고.'

그의 예상이 맞았는지 세류는 아이류의 채신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따듯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하룬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아이류의 옆에 있던 세류의 얼굴이 갑자기 그대로 굳더니 잠시 후 환하게 퍼졌다.

"하룬!"

세류는 하룬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금세 그의 앞까지 달려온 그녀는 전혀 속도를 늦출 생각을 하지 않고, 품으로 뛰어들 기세였다. 그 모습에 하룬은 작게 고개를 저었지만 두 팔을 벌렸다. 누가 보아도 친구 간에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굳이 다른 이들 앞에서 그녀를 민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와락!

달려오는 탄력을 받아 하룬의 품으로 뛰어든 세류의 긴 머리칼이 하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아래로 향했다. 그녀 특유의 체취가 진하게 콧속으로 들어왔다.

"언제 왔어?"

"어제."

"근데 왜 이제 왔어?"

'후유 누가 보면 친구가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생각하겠네. 아니지. 우리 고문들이 보고 있지.'

"아! 소개할 분들이 있어. 우리 고문님들이야."

그제야 하룬의 품을 벗어나는 세류였다. 하지만 영 내키지 않는지 행동이 느릿하기만 했다. 그래도 고문들을 향해 얼굴을 돌린 세류는 기품이 넘치는 우아한 태도로 변해 있었다.

"코엠 상단을 맡고 있는 세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선 이미 안면이 있는 딜런을 향해 따로 조용히 목례를 했다.

"반갑소, 세류 양."

"네, 딜런 경. 건강해 보이셔서 반갑습니다."

하룬은 세류에게 고문들을 일일이 소개시켜 주었다. 산악 부족들에게 나눠 준 생필품은 그녀의 코엠 상단에서 구했다는 이야기와 자신과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곁들이자 고문들은 친근한 얼굴로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사실 하룬은 고문들에게 세류를 소개해 주려고 이곳까지 동행한 것이다. 앞으로 산악 부족들과의 거래는 돌풍 용병대와 돌풍 상단이 전담하겠지만 급한 경우에는 코엠 상단이 대신할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안면을 익히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딜런 경, 전 세류와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다른 분들과 함게 상점에서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시고 먼저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돈은 제게도 충분히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대장."

딜런은 하룬이 은밀하게 전해 주는 돈주머니를 사양하고는 상점으로 되돌아갔다.

"여긴 어쩐 일이야? 산악 부족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걸로 알았는데."

"그랬지. 성을 2개 더 빼앗은 다음에 이곳으로 온 거야."

"....어떻게?"

산악 부족들이 공성전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전해진 것은 얼마 전이다. 그곳은 요새와는 보름 이상이 걸리는 곳이다. 하룬은 주름이 생길 정도로 커진 세류의 눈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우리 용병대에 히든 대원들이 있어."

"히든 대원?

더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다. 그 얼굴 표정이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나이를 생각하면 자신보다 한참 연상이지만 하도 남들이 나이보다 위로 보아서 그런지 그녀가 연상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버처리비크를 타고 왔어. 녀석들을 타면 여기까지 3시간 도 안 걸리니까."

"아!"

그녀 역시 하룬이 버처리비크란 괴조를 부린다는 정보는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새가 사람을 태우고 몇 시간 안에 그렇게 먼 곳에서 이곳까지 날아올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렇구나! 돌풍 용병대는 정말 대단해. 또 어떤 히든 대원들이 있는 거야?"

"후후후! 나중에 알려 주지."

"쳇! 치사하게. 친구 사이에 비밀이 많은 건 자격 미달이라고. 난 너에게 비밀이 별로 없단 말이야!"

"정말?"

"그래! 기회가 없어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있을지 몰라도 일부러 너에게 숨기는 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어."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로 그런 모양이다. 갑자기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는 나이부터 시작해서 속이는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천천히 이야기할게. 널 못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입장 때문에 그래."

"칫! 알았어. 내가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건 나도 아니까. 이해는 하지만 왜 속이 상하는지 몰라."

세류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서운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어떤 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산악 부족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구하려고 왔어. 더불어 이곳에서 처리할 일들도 몇 건 있고."

"말이라도 나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

"후후후! 사실은 보고 싶기도 했어."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를 보려고 코엠 성에 들를 생각도 했으니까. 어떻게 성을 다스리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호호! 진작 그럴 것이지."

세류는 이제야 기분이 좋아진 듯 활짝 웃었다.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하룬의 마음이 살짝 설렐 정도로 말이다. 하룬은 힘들게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용건을 꺼냈다.

"10만 명이 6개월 정도 쓸 수 있는 생필품이 있을까?"

그 말에 세류의 눈이 다시 커졌다.

"10만 명이라고?"

생각보다 더 엄청난 물량이다. 하룬이야 가격에 대해 까다로운 편이 아니니 엄청난 거래가 될 것이다.

꿀꺽!

세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는 놀라 입을 벌렸다.

"응. 운반은 우리 쪽에서 할게."

"운반까지?"

운반 문제까지 구매자가 책임진다니 이거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는 거래였다. 마수들과 몬스터들 천지인 데빌 산맥에서 운반 문제가 빠지면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마츠 평원과 강을 두고 마주하고 있는 지역에 상단전용의 워프 마법진을 설치해 놓았다. 그곳에서 요새까지만 운반하면 되는 것이다.

"엿새 정도는 시간을 줘야 해."

"가능해."

어차피 생각한 대로라면 그 정도 여유는 있다.

"구입가에 30%의 마진이면 만족해?"

"좋아! 이거 세류와 친구가 되길 잘했네."

이곳 마츠루트 요새에서는 품목에 따라서는 심한 경우 열배까지도 받는다. 이 정도면 정말 좋은 가격인 것이다. 

"대신 마수 가죽으로 대금을 치러 줘."

"마수 가죽을?"

"응. 요즘 타림 공방에서 만든 방어구들 때문에 난리가 났어."

그럴 것이다. 돌풍 상점에서 독점으로 판매하고 있는 타림 공방의 가죽 방어구는 가볍고 착용감이 뛰어난 데다가 플레이트 메일에 비견되는 방호력을 가지고 있었다.

"찾는 이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공급이 달리니 당연한 일이지.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파이린 황실을 비롯해서 세 제국과 귀족들 그리고 기사들 중에서도 찾는 이들이 많아. 그런데 뛰어난 장인이 있으면 뭘 해. 재료가 없는걸."

이방인들의 레벨이 올라가면서 레어급 방어구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레벨 업을 위해 사냥을 하는 이방인들은 무거운 플레이트 메일 종류 보다는 하드레더를 선호했다. 그 때문에 타림 공방에서 제작하는 하드레더들은 경매로 팔릴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좋아! 가격만 제대로 쳐 준다면 그렇게 하지."

어차피 마수 가죽을 처리해야만 했다. 돌풍 상단과 계약을 맺고 있는 타림 공방이 소화할 수 있는 물량은 그가 가지고 온 마수 가죽들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이번 거래의 이익은 마수 가죽에서 얻을 거야. 워낙 희귀한 데다가 수요가 많아 금액이 폭등했으니까 가격은 걱정하지 마."

"고맙다. 친구! 그럼 일주일 후에 준비를 하지."

정말 든든했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거래를 할 상대가 있는 것도 행운이었다. 거래를 간단하게 마무리한 후 두 사람은 별실에 따듯한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친구 덕분에 골치 아픈 일을 간단하게 처리했네."

"후후후! 친구가 아니라 애인이었다면 더 간단할 수도 있었어."

농담 속에 진정을 섞어 말하는 세류를 보니 아직 하룬을 마음 깊숙이 새긴 상태이긴 하지만 아픈 시간은 잘 지난 것 같았다. 이럴 때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 최고다.

"좀 물어 볼것이 있어."

"뭔데?"

세류는 하룬이 화제를 바꾼다고 생각했는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벨라라는 이름을 들어봤어?"

"벨라?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어?"

세류는 깜짝 놀란 얼굴로 하룬을 주시했다.

"GPC에서 꽤 중요한 인물 같던데....."

"맞긴 하지만 네가 어떻게 걔를 알아?"

세류는 선선히 자신이 아는 인물임을 드러냈다.

"조직에서 위치가 어떻게 돼?"

"응. GPC 비욘드 팀의 팀장이야. 유로식스 유니온 행정청장의 딸로 작년에 겨우 성년이 되었는데 비욘드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그 자리를 거머쥐었어."

나이를 생각하면 인공수정체 출신이 맞았다. 아마도 이벨린의 경우처럼 친부모가 나타나 그녀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맡고 있는 직책이 하룬의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어쩌면 페론이 말한 파이오니어 사도회의 사도들은 그들 조직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세류가 의문에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벨라는 공간에 대한 이능력을 가졌다고 들었는데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어. 그런데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혹시 의뢰 건으로 만났던 거야?"

"아는 수준은 아니야. 그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야. 그녀가 파이오니어 사도회의 일원이라기에 확인해 보려고 물어본 거야."

"파이오니어 사도회? 그게 뭔데?"

호기심이 잔뜩 묻어나는 세류의 눈빛에 하룬은 잠시 망설인 끝에 페론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친구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로 격상되어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마, 말도 안돼!"

이야기를 다 들은 세류는 입에 바람을 물고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강렬했다.

'그런 조직이 암약하고 있다고? 더구나 세 갓급 컴퓨터의 분체라니!'

에이션트 컴퓨터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 역시 조직에 중용되면서 들은 바가 있었다. 레아라는 이름의 초자아 인공지능 컴퓨터가 GPC에게 세상을 경영할 힘을 주었으며 휴먼 시대를 열어 주면서 그 능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신' 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인공수정체의 탄생 과정에 관여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

비욘드에서 찾고 있는 마법에 대한 이야기나 그것을 새롭게 주술로 풀어 현실에서 광역 기후조절 마법을 펼치려는 의도는 자신도 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마법서를 찾기 위해 많은 조직원들이 움직인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파이오니어 사도회가 다른 목적으로 쓰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 한 이야기는 그간 네 세계의 하룬이 수집한 정보와 내가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정보 그리고 파이오니어 사도회에 속한 인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통합시켜 알게 된 내용이야."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

'사실이야! 하룬이 내게 거짓을 말할 리가 없지. 더구나 충분한 개연성도 있고.'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이면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니!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휴먼들이 당면한 문제에 빠져 치열하게 사는 현실의 숨겨진 곳에서, 세상을 뒤엎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세류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허공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녀 특유의 열정과 힘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넋이 빠진 모양이다. 한참 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내게 해 주는 거야?"

"친구니까.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네가 있는 세상이나 이곳 모두 크나큰 변혁을 앞두고 있어. 준비한 자들만이 세상을 이끌 수 있을 테지."

하룬의 말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그럴까? 세류는 다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역시 한참 만에 나온 질문이었다. 이 세계의 주민인 하룬에게 물을 내용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리라.

"준비를 해야 해. 이 변혁의 시대를 맞아 네가 따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겠지."

"준비?"

"네가 원하는 세상이 지금과 같은 세상이 아니란 걸 알아. 난 능력이 없으면 모르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면 이런 시기에 가만히 시류에 따라 움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게 존재의 의미 중 하나일 테니까."

"존재의 의미...."

너무 의미심장한 화두였을까? 세류의 아름다운 눈매가 좁아졌다.

"누구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있어. 그것이 안락한 삶이든 아니면 환락으로 가득 찬 하렘이든 말이야. 가장 불행한 삶은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 모르고 그저 피동적, 습관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 것야. 희망도 꿈도 없이 그저 죽기 위해서 걸어가는 삶에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지만 이왕이면 삶이 가치 있다면 더 좋겠지."

"....."

"나와 다른 존재이면서도 같은 존재인 하룬은 그곳 세상에서 유니온에 의해 사육되어 희망 없이 사는 휴먼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하더군. 그저 의미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염된 환경이나 변종 생물과 싸워서 자신의 삶을 지킬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싶다고 했어. 그게 휴먼의 본질이며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이자 목표라고."

"......"

"난 네가 하룬과 같은 길을 걸었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준노블인 네가 가진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을 거야. 안락하고 풍족한 생활 대신 불편하고 부족한 삶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라. 네가 이미 품고 있는 이상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없다면 새로운 이상을 꿈꾸길 바라."

하룬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세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세류야말로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배웠고 세상에 대해서도 더 잘 알고 있는데.'

하룬은 세류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붉힌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자신의 말에 세류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난 너와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 이곳이든 그곳이든 말이야. 생각해 봐. 난 할 일이 있어서 엿해 후에 다시 올게."

하룬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떴지만 세류는 석상이 된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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