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7화.이벨린 황녀 (228/278)

이벨린 황녀

요새 안으로 돌아온 하룬은 헤르쉬와 통신을 했다.

-나야. 하룬.

-끼약! 하룬, 왜 이렇게 연락이 늦었어? 걱정했잖아.

헤르쉬는 기이한 소리까지 지르며 그의 통신을 반겼다. 그를 빼고는 달리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과도하게 반기는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어.

-그건 알고 있다고. 그런데 몸은 괜찮은 거야?

-응. 덕분에.

잠시 안부를 주고받은 후에 하룬은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소상히 말해 주었다.

-큰일 날 뻔했네.

-조금 위험했지. 그래, 요새를 비롯해서 세상 돌아가는 건 어때?

지금은 잠시 파이린 제국의 황도에 있는 본부에 돌아가 있는 헤르쉬는 하룬이 궁금해하는 정보들을 알려 주었다. 파이린 제국을 비롯한 신생 국가들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무력을 가진 이들이 대거 데빌 산맥으로 향하면서 불안 요소가 사라진 덕분이었다. 노예 제도를 비롯한 신분제 의 폐지를 단행한 파이린 제국이 아직 좀 불안했지만 황제의 강력한 영도력과 뛰어난 행정조직은 민생에 힘을 써 국민들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세 제국이 곧 대군을 데빌 산맥에 투입할 걸로 보여. 각 제국의 중앙군과 기사단 들이 이미 그곳을 향해 출발했거든. 신전 연합과 마탑 연합과도 어느 정도 말을 맞추어 놓은 것 같아. 어제 세 제국에 최고 기관회의가 열린 것을 보면 다크니스에 대한 중대한 정보를 들어왔나 봐. 일테면 본거지 정보의 정보일 거야.

-알아. 그거 내가 이벨린 황녀에게 전달한 정보야.

-아! 그렇구나! 하긴, 하룬이 아니면 그런 정보를 누가 알아내겠어. 아무튼 세 제국은 동시에 산맥으로 진군할 거 같아.

시간이 지나면서 복원되는 포러스의 기억을 참조할 때마다 느끼지만 다크니스는 무서운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기억이 모두 복원된 모두 복원된 것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엄청난 수의 강화 언데드 군단과 마수 군단을 양성하고 있는중이다. 아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억의 단편을 통해서 알아낸 것에 따르면 만약 다크니스가 혼돈의 땅에 있다는 자연석을 손에 넣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전력은 현재보다 두세 배는 증가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전력이 강해지는 상황이었다. 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세 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아니,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비욘드의 세상 모두가 다크니스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룬은 헤르쉬로부터 각국의 정황을 비롯해서 많은 정보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곧 세상의 중심은 데빌 산맥이 될 거야. 그래서 나도 다시 그곳으로 갈 건데, 하룬은 언제 움직여?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요새 근처에 있을 거야.

-알았어. 그럼 그 안에 요새에 도착해서 연락할게.

-기다리지.

헤르쉬가 곁에 있으면 정보 확보가 용이해서 그에게 나쁠것은 없다. 자체적으로 호위까지 대동할 테니 그녀의 안전에 자신이 신경을 쓸 일도 없을 것이고. 헤르쉬와 막 통신을 마쳤을 때 밖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님!"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온 것은 굴탄이었다.

"무슨 일이야?"

"황녀께서 '이클의 잎' 에서 기다린다는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굴탄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하룬은 대원들에게 약속이 있다고 알리고는 은밀하게 숙소의 후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이클의 잎' 은 요새 최고의 식당으로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가 얼마 전 차린곳이라 잘 알고 있었다. 이클의 잎에 도착한 하룬은 종업원들이 드나드는 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약속한 최상층의 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두 호위가 동행한 이벨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벨린의 얼굴이 심각해서 물어봤다.

"아니에요. 시간을 정한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요."

호위를 밖으로 내보낸 이벨린은 식당 측에서 미리 준비했을 찻주전자를 들었다. 이미 식은 상태지만 잔에 찻물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내내 상념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하룬에게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고 심각한 얼굴로 멈추었다. 그녀가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보안이 필요하신 겁니까?"

하룬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면서 불안해하는 이벨린의 태도를 보고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이듯 물었다. 이벨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지만 황녀가 불안해할 일이 있다는것만으로도 흥미가 일었다.

'무슨 일이지? 타니엘라 경이나 미루스 경이 없어서 방음마법도 사용할 수 없는데.'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벨린이 이능력자라면 뇌파를 이용한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능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강한 의지력을 사용하는 것이니 만큼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룬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신을 집중해서 이벨린에게 뇌파로 의지를 보냈다.

-들립니까?

처음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지만 몇 차례 반복해서 그녀에게 의념을 보내자 어느 순간 이벨린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자신의 앞에 앉은 하룬은 분명히 입술을 굳게 닫고 있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것도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목소리였다. 이벨린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빛냈다. 잠시 후 그녀의 작은 입이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였다. 비록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하룬은 그녀의 입술이 의미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합니까?

이벨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파를 이용해서 제 의지를 전한 겁니다. 의지를 집중해서 나에게 보낸다고 생각하십시오. 아주 간절하게.

하룬의 설명이 대충인 데다가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 그런지 이벨린은 쉽게 뇌파를 보내지 못했다. 뭐라 설명을 하고 싶어도 하룬  역시 그 자세한 과정이나 방법은 알지 못했다.

-날 똑바로 보십시오. 내 눈을 응시하면서 입을 벌려 말하듯 해 보세요. 이번에는 날 보면서 머릿속으로 당신이 하고싶은 말을 글로 쓰듯 천천히 떠올려 보십시오. 희미하게 뭔가 들려요. 좋아요. 의지를 더 강하게 일으켜 봐요.

두 사람은 한동안 여러 가지로 노력한 끝에 드디어 상대뇌파의 진동수를 맞출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어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의미가 통하는 문장까지 확대되었는데 그 속도가 무척 빨랐다.

-하룬 대장, 정확하게 들려요?

-네. 이제 많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요?

-아까 말한 대로 뇌파를 이용한 대화, 일명 뇌파 통신입니다. 달리는 영능 대화라고도 하지요.

-아! 전에 현실에서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상당한 수준의 이능력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곳에서도 가능하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이벨린은 자신이 해 놓고도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뇌파 통신이라면 그 누구도 도청할 수 없을 겁니다. 설사 당신이 사용하는 캡슐에 내장된 인공지능 컴퓨터라도 알 수 없습니다.

벨의 경우를 참고하면 슈퍼급이나 스폐셜급 캡슐에 내장된 인공지능 컴퓨터는 각인이 되어 있는 상태다. 캡슐의 주인과는 영적으로 이어졌지만 주인의 의사에 반해 각인된 상대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고 원하는 정보를 보낼 것이다. 일전에 아즈만이 해 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뇌파는 떠올린 영상마다 고유한 진동수가 있어서 그 어떤 기계로도 감청할 수 없다고 했다. 캡슐 소리가 나오자 이벨린이 맑은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랐다. 설마 하룬이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거지?'

그녀에게 있어 하룬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다른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조차 모르는 현실의 특급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뇌파 통신을 보내다니 역시 뛰어난 이능력자였군요.

그 말에 이벨린이 배시시 웃었는데 그 모습이 막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웠다.

-칭찬 고마워요! 이제까지 살면서 받은 칭찬 중 가장 기분이 좋네요.

이벨린은 이제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천진하고 싱그러운 표정으로 콧등을 찡그리며 자신의 기분을 포현했다. 어린 나이에 특급에 해당하는 능력을 발휘했던 그녀는, 이제까지 살면서 많은 칭찬을 들었지만 하룬의 칭찬만큼 기쁘게 만드는 칭찬은 들어 보지 못했다.

-하룬 대장은 아시는 것 같은데 사실 스폐셜급 이상의 캡슐 사용자는 모두 그 행동을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어요.

하룬은 굳이 알은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문스럽게 묻지도 않았다.

-우리 조직은 에이션트급보다는 처지지만 그래도 가장 높은 사양의 인공지능 컴퓨터를 조직원들의 캡슐과 연결시켜 그들의 연행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어요.

이벨린은 각인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것은 휴먼 가드에서 캡슐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의미했다. 하룬은 굳이 각인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캡슐 사용자를 말입니까?

-네! 거의. 임페리얼 컴패니에서 제작한 일반 캡슐들은 물론이고 스폐셜 캡슐들까지 출시되기 전에 은밀하게 연결시켜 두었어요. 본부에 있는 특별한 기관에서 조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 혹은 나중에라도 파악할 수 있어요. 설마 그런 짓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그럼 스폐셜급과 슈퍼급 캡슐은요?

-그 둘은 사정이 좀 달라요. 두 캡슐의 경우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어서 그런 작업이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 조직은 제한적이지만 캡슐 사용자의 말은 내장된 컴퓨터에 자동적으로 기록되어 메인 컴퓨터로 전해지고 있어요.

-그렇다는 이야기는 GG와 GPC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까?

-아마도요.

-다른 사람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저 역시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이벨린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하룬의 말에 이벨린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드러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제게 하고 싶은 말은 전하가 속한 조직에 반하는 일이라는 겁니까?

-네. 그래서 망설였어요. 글로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펜과 종이를 준비해 달라고 하면 그것마저 걸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하룬 대장 덕분에 이런 방법을 알게 되었네요. 그런데 모든 사람과 뇌파로 통신을 할 수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가능할 수도 있지만 양방향 통신이 되려면 둘 다 어느정도의 이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놀랍네요. 그럼 대장 역시 이능력자란 말이잖아요.

-어쩌다 보니 가지게 된 능력입니다.

하룬을 바라보는 이벨린의 눈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강렬한 호기심과 함께 경외의 빛까지 떠올라 있었다.

-정말 당신은 신비한 분이에요. 이방인인지 아니면 이 세계의 주민인지 헷갈리는 정체도 그렇고 그 능력도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네요.

사실이 그랬다. 정령사로 알려졌지만 검술도 뛰어나다. 거기에 기이한 힘을 사용하는 것에 더해 이제는 이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자신보다 더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하룬은 이벨린의 뜨거운 눈빛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외모도 많이 변했네요. 머리카락을 드러내서 그런지 나이도 훨씬 젊어 보이고 분위기도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행동도 그렇고요.

피식!

하룬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동갑의 이벨린에게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예전의 외모가 얼마나 노안(老顔)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제 누구도 듣지 못할 테니 하고 싪은 말을 하도록 하지요.

-알았어요. 사실은 대장에게 하고 싶은 의뢰가 있어요.

-그쪽 세계에 대한 일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도대체 뭘까?'

하룬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일단 지금 이 자리는 파이린 제국의 황녀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이방인으로 대장을 대하고 싶어요.

이벨린의 말에 하룬은 이벨린이 그만큼 솔직하게 어떤 사실을 털어놓고 부탁을 해 올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어차피 저는 신분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훗! 그 점은 이미 잘 알고 있어요.

이벨린은 자신 앞에서도 당당했던 하룬을 떠올리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먼저 지금 제 상황을 알려 드릴게요. 저는 대장이 아는대로 휴먼 가드라는 조직에 속해 있어요. 인공수정체로 태어나 일곱 살까지는 양부모와 함께 살았어요. 제게 있어서는 끔찍한 악몽으로 기억될 만큼, 유니온이 지급하는 부양비 때문에 저를 입양한 양부모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에게 학대를 받고 유년 시절을 보냈지요. 그러다가 이능력에 뛰어난 잠재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져 유니온의 특수 기관으로 옮겨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부모라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벨린도 인공수정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녀도 세 신급 존재에 의해 태어난 인공수정체 중 하나인 걸까?

-그분들은 제 탄생의 비밀을 알려 주었어요. 그리고 저를 시설에서 빼돌렸지요. 제 친부모들은 대단한 가문 사람들이었어요. 조직에서도 상층부에 속해 있었지만 우리 유니온 안에서는 노블이라고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과 세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컸던 전 친부모를 찾은 것과 새로운 환경에서 사랑을 받고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었어요.

이벨린처럼 친부모를 찾은 인공수정체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간간이 들은 적이 있었다. 뉴 휴먼 프로젝트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니온 사회에서 지위가 높았던 이들 중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인공수정체들을 찾는 이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전 그분들에게 자신으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말로만 부모 자식이지 그간 쌓은 정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그분들은 저를 자식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담보할 수단 중 하나로만 여겼어요. 자신들의 가정 대신 조직에서 운영하는 특별한 교육기관으로 보내 버리더군요.

어느새 처연해진 그녀의 얼굴에 하룬은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인공수정체들이라면 누구나 느꼈던 절망감이 새삼떠올랐던 것이다.

-전 이능력을 가진 아니들을 모아 교육하는 특별한 장소에서 성장기를 보냈어요. 나중에야 그곳이 휴먼 가드라는 조직에서, 이능력자를 양성하는 소녀 찬양대라는 교육 시설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곳에서는 일반 교육 과정 외에 이레아신에 대한 세뇌식 교육과 이능력을 발현하는 수련을 시켰어요. 소녀 찬양대는 살벌한 곳이었어요. 반년에 한 번씩 있는 평가에서 탈락을 하게 되면 어딘가로 보내졌어요.

'빌어먹을!'

왜 인공수정체들은 거의 모두가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걸까? 그가 아는 인공수정체들은 대부분 행복한 유년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지금도 힘겹게 살아고 있다. 부모도 모르게 태어난 것도 서럽고 억울한 일인데 이런 삶을 살아야 하다니.

-그곳에는 고아들이 태반이라 전 사정이 좋은 편에 속했어요. 정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 친부모가 절 보러 왔거든요. 다른 아이들은 무척이나 부러워했지만 정작 저는 그분들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지는 못했어요. 다가가려고 하면 밀어내던 엄마의 무의식적인 반응과 차갑기만 했던 아빠의 반응은, 이전보다 더 큰 슬픔과 상실감을 주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이 제 친부모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워요.

하룬 역시 인공수정체로 불우하게 자랐던 만큼 그녀의 감정 상태를 온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을 대한 이벨린은 자존심이 상하는 대신 가슴이 따듯해졌다. 하룬이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출신이 노블이고 능력도 어느 정도 있어서 10년 과정의 소녀 찬양대에서 부대장까지 했고, 2년 전 그곳을 졸업했을 때는 상급 이능력자로 판정되어 휴먼 가드의 전투단중 상위 서열에 있는 소호 특수대대에 배속되었어요. 그러곤 비욘드의 출시 이전에 베타테스터로 이곳 세상으로 오게 되었지요.

짧게 설명한 과거지만 그녀가 살아오면서 느꼈을 절망과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하룬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신세 한탄이 너무 길었나 봐요. 하지만 언제고 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었어요. 하룬 대장은 이곳 사람이니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창피하지 않고 좋네요.

-난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누구든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걸 찾는 것이 인생일 수도 있겠지요.

-맞아요. 이제는 예전만큼 가슴이 아프지 않아요.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스스로 찾았거든요.

-그게 뭡니까?

-새로운 세상이에요. 신분으로 정해지는 세상이 아니라 노력과 능력으로 뭔가 이뤄 가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능력과 결과에 공정하면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는 그런 따듯한 사회를 내 손으로 만들어 내고 싶어요. 이 세상뿐 아니라 내가 태어난 세상도요.

'이 여자.....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었구나!'

하룬은 이벨린에게 크게 감탄했다.

'난 그저 육체적으로 강해지는 것만 꿈꾸었는데 이 여자는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휴먼들을 위해 큰 꿈을 꾸어 왔구나.'

그녀가 살아온 삶이 하룬의 그것과 비교해서 더 편안했다고도 나았다고도 판단할 수는 없다. 삶이란 당면한(골드런:당면한사람?)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판단이 개입할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남들이 아무리 부러워하는 삶일지라도 본인은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군요. 내가 꿈꾸는 세상도 바로 그런 곳입니다. 신분이나 계급이야 사람이 사는 곳이면 명시적이든 아니든 생겨나기 마련이지만 노력한 만큼 인정받을수 있고 강자가 약자를 품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요?

-네. 그런 세상이라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룬의 말을 들은 이벨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이는 현실에서조차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밝히고 확인할 기회도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너무 반가워요. 다른 세상 사람인 하룬 대장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틀을 깨지 못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 뿐 누군가 앞장서서 그 틀을 깨고 한계를 부수면 모두 그런 꿈을 꾸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꿈을 이루려면 보다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룬의 물음에 이벨린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각고의 노력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휴먼 가드의 중간 계급에 해당하는 아무드 청년단의 세 부단장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어요. 아무드 청년단은 모두 6개의 무력 단체와 22개의 기업 단체 그리고 2개의 정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모두가 현실과 이곳 세상을 망라한 조직이지요. 신참 부단주인 저는 그중 1개의 무력 단체와 3개의 기업 단체를 맡고 있어요. 모두 이곳 세상과 연관이 깊은 단체들이에요.

아마도 그것은 이벨린이 파이린 제국의 황녀가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어요. 제가 이곳에서 이룩한 성과라면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이 주어지지 않았어요.

-받아야 할 것이라면?

-제대로 된 힘이나 권력 같은 것 말이에요. 예를 들어 우리 조직에는 100대의 슈퍼급 캡슐과 1만 대의 스폐셜 캡슐의 사용자들이 있어요. 그들은 캡슐의 놀라운 능력으로 인해 당연히 하이 랭커에 속하지요. 그런데 아무드 청년단의 부단장인 제가 그들의 게임 동향을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뿐 아니라 제게 배속된 무력 조직원은 채 1,000명도 되지 않아요. 다른 부단주들이나 단주의 동향도 전혀 알 수가 없고요.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제국의 황녀라는 위치에 있는만큼 휴먼 가드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활용도는 무궁무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HG가 이벨린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가 부단주가 되기 이전부터 해 오고 있는 특별한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군.'

하룬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어 눈을 질끈 감았다. 포러스의 부서진 기억들 중 일부가 이벨린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하나로 뭉치고 있었던 것이다. 타르 분지에는 다크니스의 흑기사들을 제외하고도 꽤 많은 전사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황금색 플레이트를 착용한 기사들도 꽤 많았다. 포러스는 그들이 헬 상단의 호위 전사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숫자가 상단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포러스는 다크니스와 협력하기는 했지만 깊은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고 마법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자세한것을 몰랐다. 하지만 하룬은 다르다.

'혹시 야합을 한 건가?'

반목을 하면서도 이익이 있으면 힘을 합하며 세상을 암중에서 조종하는 놈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들의 행방을 전혀 모릅니까?

-네. 그래서 불안해요. 아무드 청년단의 단주와 두 부단주가 거느린 세력도 분명 이곳 세상에 와 있는 건 확실한데 어디서 뭘 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어요. 상부에 물어보면 실력을 높이기 위해 모종의 장소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아요. 다크니스가 이렇게 준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수련을 하고 있다니 말도 안 되지요.

맞는 말이다. 벌써 움직임을 보였어야만 했다.

-그럼 그들의 대한 정보를 원하는 겁니까?

-네-.

하룬은 잠시 망설였다. 의뢰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그녀를 친구로 만들지 생각했던 것이다.

'일단 내 패를 보여 주고 이벨린의 마음을 알아보자. 안 그래도 내부 정보가 부족한데 친구가 되면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지.'

마침내 마음을 정한 하룬이 입을 열었다.

-마침 그것과 관련이 있을 법한 극비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뭐죠?

하룬은 기대에 찬 이벨린의 얼굴을 보며 포러스의 기억으로 파악한 일련의 사실들을 알려 주었다.

-헬 상단이라고요? 그들이 다크니스와 거래를 하고 있단 말이죠?

그녀는 역시 헬 상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골드런:오타때문에 말이 이상해질뻔.. 그녀는을 그년은 이라고썻네..)

-그렇습니다. 적어도 수천 명이 넘는 기사급 전사들이 상단의 호위를 이유로 놈들의 본거지를 드나들고 있다고 합니다.

하룬의 말을 들은 이벨린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결국 상부에서 명령을 내려 헬 상단을 집어삼켰군요. 내가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건가?'

-그 사실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네. 아무래도 조직에서 날 버리거나 중요한 사항에서 배제를 시키려는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결론으로 연결되는 겁니까?

-파이린 제국이 세워진 후 조직의 대 원로회에서 권고가 내려온 적이 있었어요. 이 세상의 기존 상단에 대항해서 세를 키우는 정공법보다는 암흑가를 장악하고 지하경제를 움직이는 헬 상단을 손에 넣으라는 권고였어요.

-그런데요?

-하지만 저는 그 지시에 정면으로 반발했어요. 군수품 밀수 및 제작, 매춘과 마약, 장물 거래와 같이 더러운 짓으로 이 세상에 자리를 잡지 않아도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확신했던 거지요. 그런짓은 우리 세상의 글로리 가이아가 하는 더러운 짓이거든요. 세상을 좀먹고 더럽혀, 결국은 자신들과 부를 독점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이는 짓이지요. 그래서 전 아무르 청년단확대 간부회의에서 발언권을 얻어 그 권고 사항의 부당함을 알리고 결국 철회를 하게 만들었어요.

-그럼 그 일 때문이겠군요.

-네! 그날 제가 한 발언이 위로 전해진 것이 틀림없어요. 제 발언 속에 들어 있는 세계관이나 사회관이 낱낱이 해석되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현재 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상황이 이해가 가요. 그게 아니라도 제가 그동안 했던일 중에는 조직의 이익과 상치되는 일들이 꽤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이벨린은 이제야 모든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크게 한탄을 하더니 결국 이를 갈았다. 어쩐지 불안했다. 파이린 제국의 황녀가 된 후 조직으로부터 많은 요구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상하게 무리한 요구가 없었다. 특히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휴먼 가드의 상단을 창설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내게는 제대로 된 무력 조직이 주어지지 않았어!'

그녀가 거느린 휴먼 가드의 조직원들은 대부분 상인이나. 행정관 들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기사 전력이나 마법사들이 그녀 휘하의 무력 조직에 있기는 하지만 정작 뛰어난 실력자는 없었다. 자신에게 배속되기 전에 모두 다른 전투단으로 간 것이다. 그래서 현재 그녀의 친위 기사단에는 이방인이 거의 없었다.

'이런 걸 보면 향후 날 제거하거나 혹은 실권도 없는 나 모르게 다른 일을 진행하겟다는 이야기야!'

치가 떨렸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파이린 제국의 황녀가되고 제국의 실권을 상당 부분 확보한 것은 엄청난 공적이지만 휴먼 가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부단주가 아니라 단주 자리를 주어도 될 정도로 엄청난 공적이었지만 조직에서는 달리 생각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의뢰를 하고 싶어요.

-하십시오.

-제가 사는 세상과 이곳 세상에서 암약하는 휴먼 가드의 움직임을 확실하게 알아봐 주세요. 제가 보기에는 단순히 헬 상단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가 아닐 거에요.

-같은 생각입니다. 분명히 두 세력은 뭔가 획책하고 있는것이 있습니다. 지구에는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하룬과 돌풍 용병대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쪽 일은 그들에게 맡기도록 하지요.

-부탁드려요. 이제라도 현실을 알았으니 저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거예요.

-좋습니다. 그럼 의뢰를 접수하도록 하지요. 아니, 의뢰가 아니라 같은 길을 가는 동료의 부탁으로 알고 처리하지요.

하룬은 휴먼 가드에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이벨린을 상대로 의뢰비를 챙길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 정도는 친구의 부탁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고마워요. 그럼 이제 우린 동료가 된 건가요?

-후후후! 그렇습니다. 같은 뜻을 품고 같은 길을 가는 동료임이 확실합니다.

이벨린은 하룬의 말에 강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따듯한 정감이 어려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뭡니까?

-들어준다고 약속하세요.

-네?

얼굴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그를 향한 눈빛에는 수줍음이 가득하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워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그랬습니까?

-친부모를 찾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저란 존재가 도구에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어요. 그분들에게 저는 바라지 않던 존재였거든요. 그나마 타고난 능력이 있어 조직에서 기대를 하니 자식으로 인정한 거지요.

하룬은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이벨린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차라리 내 편이 더 나은 건지도.....'

그런 부모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하룬이 지금의 유니온의 체제를 혐오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을 들자면 유니온이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의 붕괴를 조장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니온은 가족의 가치 대신 물질과 능력 지상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휴먼들은 가족의 정보다는 자신을 더 우선하게 되고 돈과 권력을 비롯한 물질적인 것을 숭배하게 되었다. 하룬이 생각하는 사회란 최소 단위인 가족의 확장이었다. 가족에서 친구, 이웃으로 확장되는 개념이 그가 생각하는 올바른 사회였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날 위해 울어 줄 이가 1명도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면 쓸쓸해지고 삶이 의미가 없어지더라고요.

그건 당연하다. 현재 유니온 사회에서는 가족이 죽어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슬플 정도로 정을 쌓은 적이 없는 것이다. 휴먼들의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얕고 좁았다. 유니온이 그런 관계를 조장했다. 사람들이 이기적일수록 관리하기가 용이하다. 모두가 개인의 영달에만 신경을 쓰는 사회는 변수가 크게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내게도 진정한 친구나 가족이 있었으면 하고 꿈꾸었어요.

이 순간 이벨린의 얼굴에는 도도하고 차가운 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벨처럼 보살핌이 필요한 소녀가 1명 있을 뿐이다. 사랑을 받지 못해 외로움에 처절하게 흐느껴 우는 작고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 그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속마음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내가 그 친구이며 가족이 되어 주지.

-정말요?

하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확인하는 이벨린을 향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벨린은 눈빛이 강렬해지고 환한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줄지어 생기고 이내 얼굴을 타고 흘렀다.

-고...마.....워요!

이벨린은 격한 감정의 범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울기만 했다. 조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따듯한 정을 받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하룬은 그런 그녀를 일으켜 가만히 안아 주었다. 황녀로 보았을 때와는 달리 가녀린 그녀의 몸이 격한 감정으로 인한 열기에 휩싸요, 격동을 이기지 못하고 떨고 있는것이 느껴졌다.

-울지 마, 이벨린. 내가 널 지켜 주마!

이벨린은 따듯하고 진정 어린 하룬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넓고 단단한 그의 품에 안겨 펑펑 눈물만 흘렸다.

-오빠, 하룬 오빠, 오빠!

이벨린은 하룬을 보호자로 받아들였다. 그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 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 것이다. 하룬은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그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따듯해지고 충만해졌던 것이다.

'오빠가 아니라 친구라야 맞는데.'

하룬은 이벨린이 자신을 친구 대신 오빠로 받아들인 것이 조금 서운했다. 그놈의 노안 효과는 바디체인지를 겪었음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네가 사는 세상의 하룬도 널 지켜 줄 거야. 그는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니까.

-분신이요?

-응. 나와 그는 같은 영혼이나 다름없어. 믿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각각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행동하면서도 영혼을 공유하고 있거든.

-그게 가능해요?

역시 무리한 시도였을까? 이벨린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우리도 이런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어.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그와 나는 같은 존재나 다름없어. 그러니 그쪽 세상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그에게 부탁해.

이벨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왠지 하룬의 말에 믿음이 갔다. 그가 이제까지 해 온 일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까지 미치는 그의 정보력 그리고 뇌파를 통한 대화까지 생각하면 2명의 하룬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가진 이들이다.

-우리에게는 벨이라는 귀여운 여동생이 있어. 이제 너에게도 동생이 되겠지.

-어머! 벨이라고요? 호호! 정말 신 난다.

이벨린은 동심으로 돌아간 듯 아지 보지도 못한 여동생의 존재에 신 나 했다.

-어떻게 생겼을까? 뭘 좋아할까? 갑자기 생긴 언니를 인정할까? 또래처럼 멋 내고 화장하는 걸 좋아할까?

이벨린은 뇌파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하룬에게 전해지는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벨의 존재에 잠시 심취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가족이 생겨서 참 좋아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듯해지고 편안해져요.

친부모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소한 감정이었지만 왠지 좋았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동안 시시각각 그녀를 외롭고 힘들게 만들었던 감정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신기하게도 오빠라고 부르는 순간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관계였었던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졌고 든든했다.

-나도 그래. 이 험한 세사엥서 서로 의지할 가족이 1명 더 생겼구나.

-고마워요, 오빠. 앞으로 좋은 동생이 될게요. 

현실에서야 다른 유니온에 거주하니 서로 도울 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도울 일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자신의 조직에서조차 따돌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헤헤! 오빠, 하룬 오빠, 오빠라는 소리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이벨린은 스스로 부르는 오빠라는 단어가 좋았는지 몇 번이나 되뇌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남매의 정을 쌓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고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벨린은 밤이 이슥해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밖으로 옮겼다.

-다음부터는 이벨이라고 불러 줘요, 오빠.

-....알았다. 부디 몸조심하고.

-헤헤! 지금 나 걱정하는 거 맞죠? 왠지 마음이 따듯해졌어요. 정말 가족이 생긴 것 같아요.

-부디 몸조심하고 언제라도 뇌파로 통신을 보내. 나도 네가 부탁한 것과 연관된 정보를 알게 되면 바로 연락할 테니까.

-고마워요, 하룬 오빠! 나 이제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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