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지혜의 파편 (227/278)

 지혜의 파편

하룬은 상단 지하에 있는 은밀한 방에 들어가면서 저녁까지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도록 조치를 했다.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 상황이라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고문들은 아주 오랜만에 마츠루트 요새로 방문했기 때문에 무섭게 변한 요새를 구경하고 싶어 했고, 나서기 좋아하는 미루스가 그들을 끌고 나갔다.

돈을 충분히 주었으니 사고 싶은 것들은 마음껏 살 수 있을 것이다. 딜런과 타니엘라는 하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와서 밀실 앞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요즘 시간만 나면 행하는 명상에 빠져들었다. 새로 얻은 지혜의 파편을 대하는 하룬의 심장은 무섭게 박동했다. 

'과연 내가 원하는 내용이 있을까?'

또 다른 지혜의 파편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가 모은 것은 알려진 것들뿐이다. 하룬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책 형태를 한 지혜의 파편에 손바닥을 대었다.

파앗!

분명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 안의 사물은 사라지고 원형의 강의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탐스러운 흰 수염을 기른 노학자가 강단에 서서 지혜로 가득찬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본 과정까지 오느라 많이 고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본 과정은 여러분들이 땀과 열정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지식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지식은 죽어서는 절대로 쓸모가 없는 법, 필요와 열정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생기를 불어넣어 줘야만 한다. 지혜는 모일수록 빛을 발하는 법이지.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이제까지의 과정 동안 각각 마나의 길과 검의 길 그리고 생명의 길을 걸으며 습득한 지식 이외에 다른 분야의 지식들을 섭렵하여, 보다 큰 지식으로 키우고 그 지식에 생기를 넣는 방법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강의는 3개의 각론으로 나뉘어졌다. 이전보다 심오한 이론은 물론이고 개개의 이론을 증명하는 각종 예시며 실험, 연구 결과 들이 강론되었다.

'후우! 정말 어렵군.'

그동안 틈날 때마다 지혜의 파편을 꺼내 그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얻은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때문에 하룬은 이번 지혜의 파편에 나오는 강의 내용을 열 중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얻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생각하지도 않았던 아주 큰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현 상황과 이능에 대한 것 그리고 검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대충 2시간 정도 강론을 들은 하룬은 지혜의 파편에서 손을 떼었다. 더 이상은 들어 봐야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현재 이해할 수 있는 부분부터 다시 듣자!'

그렇게 생각을 한 하룬은 지혜의 파편 위에 다시 손바닥을 올렸다.

인간의 몸은 오묘하면서도 신비롭다. 혹자는 인체가 우주의 축약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수만년에 걸쳐 많은 문명 시대를 거치며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인체의 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으며 우주의 비밀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나 역시 마찬가지다. 마나의 본질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행해졌지만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이론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마나 이론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고대 시대에 확립된 이론으로 마나란 물질에 깃들어 있는 초자연적인 힘, 예컨대 영력(靈力)이나 주술력(呪術力)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마나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힘을 의미했다. 두 번째 마나 이론은 현시대에 들어서 확립된 이론으로 마나란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의 힘을 의미한다.

물질적인 최소 단위에 원자라는 개념이 있다. 원자는 그 중심을 이루는 핵과 상이한 성질과 활동성을 가진 양자와 음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는 그 자체로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양한 결합에 의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마나라는 개념은 원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를 포함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현상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원자 이외의 관념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그 이상의 힘까지 포함하는 것이 현재의 마나 개념이다. 마나는 자연계 어디에나 존재하며 전 우주에 걸쳐 존재한다. 또한 다양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발현하는 형태나 성질 그리고 그 힘의 매개체에 따라 마력, 정령력, 신성력, 흑마력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동질의 마나가 모여 생성된 더 큰 마나는 특유의 성질을 가진다. 일반적인 마나를 마나 혹은 마력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전사들이 가공해서 사용하는 힘이다.

정령력은 같은 차원에 속하지만 다른 공간 중 하나인 정력계에 존재하는 정령을 물질계에 소환할 수 있는 힘이며, 신성력 역시 마찬가지로 신계에 존재하는 신의 의지와 그 힘을 물질계에 발현할 수 있다. 흑마력은 마계의 힘을 물질계에 발현할 수 있는 힘이다. 특별한 것으로 광력과 뇌력 그리고 암력이라는 마나가 있다. 광력은 순수한 빛의 마나로 신성력을 포함하는 보다 높은 경지의 힘이며, 뇌력은 뇌전의 마나를 가공해서 사용하는 힘이다. 가장 특이한 마나로 암력이 있는데 암력은 어둠의 마나 혹은 어둠의 힘으로 불리며, 살아 있는 거대한 존재인 땅 그자체에서 발생하는 순수한 힘이다. 암력은 흑마력을 포함하는보다 높은 경지의 힘이다. 이 모든 마나는 큰 틀에서는 하나로 융합될 수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쉽게 섞이지 않고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그 부분을 듣는 하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가진 힘이 네 가지나 되는구나!'

자연의 마나, 정령력, 뇌력, 어둠의 힘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령력은 센트럴 오션에 존재하고 있으며 자연의 마나와 암력은 뇌력을 테두리로 두른 상태로 태극을 이루어 마나 오션에 존재하고 있다. 어퍼 오션에 존재하는 뇌력은 마나 오션의 뇌력과는 미세하지만 그 성질이 다른 것 같았다.

이 모든 종류의 마나는 생명체의 의지에 영향을 받으며 생명체의 몸 안에 머물 수 있다. 마법사나 검사 들은 특유의 의식을 통해 마나를 체내에 축적할 수 있으며 그 마나를 근력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가공해서 사용할 수 있다. 인체 안에 마나가 머물 수 있다고 알려진 장소는 모두 365곳 이라고 한다. 이곳들은 다른 연구에 의하면 마나 포인트 혹은 마나 오션이라고 부르며 마나 로드라는 특별한 길을 통해 특정한 성질로 가공할 수도 있다. 그중 111곳이 쉽게 마나를 저장할 수 있는 장소인데 특별히 3곳은 쉽게 확장시킬 수 있고 각각 어퍼 오션, 센트럴 오션, 로우 오션이라고 불린다. 이 3곳을 포함한 111곳은 의지를 통해 공간을 확장할 수도 있다. 인체는 신의 이름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오묘해서 마나 오션의 숫자가 한없이 늘어날 수 있으며 어떤 경우는 인체 전체가 거대한 마나 오션이 될 수도 있다는 일부 마학자들의 주장도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치기로 한다.

'다행이다!'

자신이 마나 스토리지라고 이름 붙였던 108곳의 상황이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하룬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확장이 가능하다고?'

자신의 경우 의지를 통해 저장할 수 있는 경우는 마나 오션의 마나가 유일했다.

센트럴 오션을 이용하는 마법사나 정령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주로 로우 오션을 이용하는 전사들의 경우 마나 포인트를 확장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체내에 축적한 마나의 양은 마나 사용자의 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고대의 선지자들부터 지금의 마나 사용자들에 이르기까지 마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 포인트를 확장하는 방법에 대해 수많은 연구가 행해졌다. 그 연구 결과는 아래와 같다.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의식적으로 외계에서 끌어들인 마나를 회전시켜 밀도를 높이고 의지를 부여해서 일정한 루트의 마나 로드를 거쳐 마나 포인트에 저장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반복하여 마나 포인트가 쫙 차게 되면 마나의 이해도가 증가하는 순간에 확장이 된다. 또 다른 방법은 극히 어려운 것으로 각기 상이한 성질의 마나들을 총체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종의 마나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마나의 균형이라는 성질을 이용하면 된다. 한 가지 성질의 마나가 증가하면 다른 마나는 균형을 이루기 위해 동종의 마나를 끌어들이는데 그런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제어가 힘든 관계로 잘못하다가는 마나의 충돌로 인해 마나의 그릇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 보다 안전한 방법도 있는데 이때는 각기 상이한 성질의 마나 두 종과 중간 성질의 마나 한 종이 필요하다. 동일한 장소에 놓인 상이한 성질의 마나는 서로 견제하는 상태로 안정된 상황을 이루려는 성향이 강하다. 즉 서로 밀어내려고 하지만 두 종의 마나를 안전하게 품을 그릇, 즉 중간 성질의 마나가 그 둘을 감싸면 그 자체로는 자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중간 성질의 마나로 그릇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온 상이한 성질의 마나들을 의식적으로 충돌시키게 되면, 충격에 의해 마나 오션은 급속하게 확장되며 각 성질의 마나는 확장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성질의 마나를 끌어들이게 되어 마나의 양이 급증하게 되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충돌의 세기를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릇 역할을 하는 마나가 깨지면 평형 상태를 이룬 마나 오션 역시 깨질 수 있기 때문에 각별하게 조심해야만 한다. 만약 무엇이든 녹여 버리는 강력한 성질의 마나로 그릇을 만든다면, 충돌을 이용해서 막대한 마나를 축적해 시간의 흐름과 수련의 정도에 따라 하나로 융해시킬 수도 있다.

거기까지 강의를 들은 순간 머릿속으로 들어온 지식들이 이전에 축적되었던 지식들과 결합해서 하나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그런 현상이 벌어졌구나!'

빠르게 진행되는 이해의 과정을 통해 그가 받아들였던 지식들이 생기를 머금었다.

번쩍!

저절로 눈에서 빛이 솟아났다. 하룬은 지혜의 파편에서 손을 떼고 마나 플로를 운용하는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의식이 내면으로 향하는 순간 뇌전의 마나를 바깥에 두르고 태극 문양을 이루고 있는 자연의 마나와 어둠의 마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먼저 뇌전의 마나로 단단한 그릇을 만들자!'

하룬은 뇌전의 마나에 의식을 집중해서 여러 차례 마나 플로를 거친 후 밀도와 순도를 높였다. 태극을 이루고 있는 자연의 마나와 어둠의 마나 중, 테를 이루고 있는 뇌전의 마나와 맞닿은 부분이 서서히 녹는 것이 보였다. 타는 것이 아니라 뇌전이 가진 열기에 녹기 시작한 것이다.

'무색에 아무런 성질도 느낄 수 없다!'

세 가지 마나가 융해되어 나타난 마나는 아무런 색감도 없고 아무런 성질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투명했지만 존재한다느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폭발을 시켜 보자!'

한 번에 마나 오션의 마나를 모두 폭발시킬 수는 없다. 하룬은 마나 오션의 벽과 붙어 있는 뇌전의 마나를 그대로 두고 자연의 마나와 어둠의 마나를 움직여 마나 플로를 돌렸다. 마나 로드를 돌려 순도가 높아진 두 마나의 첨단 부위가 마나 오션으로 들어오는 순간, 따로 분리해서 급격하게 회전시켜 구체로 만든 후 그 구체들을 충돌시켰다.

파앗!

하룬의 몸이 들썩거릴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다. 극미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폭발력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지만 다행하게도 틀이 잡힌 뇌전의 마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충격은 마나 오션과 이어진 마나 로드로 향했다. 마나 로드는 폭발로 인해 발생한 충격으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종말 시대의 자동차들의 내연기관이 그랬듯 연소와 폭발의 효과가 피스톤을 움직이는 데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폭발에 따른 일시적인 진공상태로 인해 마나 오션의 내부에는 강력한 흡입력이 발생했다. 당장 꼬리를 물고 이어진 마나들이 마나 오션으로 빨려 들어갔다. 흡입력은 비단 마나 오션과 그 주변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피부 전체의 모공들이 내부의 흡입력에 열렸고 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록 극히 작은 모공들이었지만 체내로 유입되는 마나량은 호흡에 의한 것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모공을 통해 들어온 마나들은 세포 단위를 통과해서 미세마나 로드를 경유, 결국은 마나 로드까지 밀려들었다. 하룬은 그 일련의 과정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감지하며 만족해했다.

'됐다! 이제 조금씩 강도를 더 높여 보자!'

파앙! 팡!

꽝! 꽈앙! 꽈과광!

충돌에 따른 폭음이 커지며 하룬의 전신은 수없이 허공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흡력을 이기지 못한 방어구와 속옷 들이 피부에 밀착되었다가 떨어지고 있었다. 폭발이 커질수록 흡입력은 더욱 커졌고 막대한 마나가 내부로 빨려 들어왔다. 마나들은 마나 로드를 거치며 세 가지 성질의 마나와 결합하여 덩치를 키워 갔다. 그 과정은 끝없이 지속되는 것 같았다.

하룬은 그릇 역할을 하는 뇌전의 마나가 더 이상의 충격이 가해지면 깨질 것 같은 긴박감에 의도적인 마나의 폭발을 멈추었다. 그동안 의도적인 폭발과 마나 플로에만 집중했던 하룬은 비로소 마나 오션 그 자체와 몸 전체를 살펴볼 수 있었다.

'헛! 마나 오션이 커졌다!'

놀랍게도 마나 오션의 크기는 두 배가 넘게 확장되어 있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확장된 것이다. 마나 오션만 커진것이 아니라, 속에 담긴 세 가지 성질의 마나 역시 그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우와! 엄청나구나.'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두 배로 늘어난 마나 오션을 가득 채운 마나들의 양이나 밀도는 전과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나 로드는 언제 또 이렇게 확장된 거지?'

마나 로드가 엄청나게 넓어진 것이다. 마나 로드와 이어진 미세 마나 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라면 이전에 비해 마나의 이동속도가 서너 배는 더 빠를 것이다. 몸 안의 변화를 대충 살펴본 하룬은 의식을 외부로 돌렸다. 확인할 일이 있었다.

'어디!'

반개했던 그의 눈이 완전히 열렸다. 암기 벨트에서 비수한 자루를 꺼내 든 하룬이 마나를 주입했다.

우우웅!

진동음을 토해 내던 비수의 날카로운 검첨에서 쑤욱 하며 오러가 솟아났다. 단순한 오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느다란 검사나 얇은 두께의 검기도 아니었다. 비수가 검으로 바뀐 듯 검의 형상을 온전히 갖춘 오러 블레이드가 그 모습을 보였다.

'오러 블레이드라니!'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경우는 마나량이 폭증한 것만으로도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허탈한 결과였다. 그렇게도 소드 마스터가 되기를 염원했는데 그 비밀이 마나량에 있었다니.

'아니야!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은 마나 오션의 크기를 폭발적으로 키워 막대한 마나를 축적하고 마나 로드를 넓히는데 있어.'

그의 경우가 그랬다. 마나의 폭발로 인해 발생한 충격은 마나 오션을 확장시키고 마나 로드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고 폭발 후에 발생한  흡입력은 막대한 양의 마나를 체내로 끌어들였다. 때문에 단기간에 엄청난 마나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러 블레이드는 맞는데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색이 왜 이렇지?'

오러는 수련한 마나에 따라 그 색깔이 달라진다. 보통 자연의 마나는 시퍼런 색깔이다. 뜨거운 성질의 마나는 붉은색이고 흑마력의 경우는 검은색이다. 하룬의 경우는 뇌전의 마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두 가지 성질의 마나로인해 회색으로 발현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오러 블레이드는 확실히 이상했다. 마나가 주입될 초기에 나타난 오러 블레이드는 회색이었지만 안정상태에 이르자 서서히 그 형상이 스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보면 회색의 검기로 여겨질 정도로 두께도 얇아졌다. 하지만 하룬은 느낄 수 있었다.

'투명한 오러 블레이드!'

시험 삼아서 일반 비수를 꺼내 그것 위에 오러 블레이드를 대고 살짝 힘을 가하자 대번에 비수가 잘렸다. 잘 정련된 비수가 소리도 없이 잘린 것이다.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이 아니고서는 말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난 소드 마스터다!'

소리를 질러 환호하고 싶었다.

'가만 이게 웬 냄새지?'

문득 정신을 차린 하룬은 자신의 몸에서 심하게 냄새가 나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뭐야?'

이제야 자신의 몸을 둘러본 하룬의 눈이 커졌다. 방어구의 색깔이 누렇게 변했을 뿐 아니라 군데군데 녹은 부위가 보였던 것이다. 지난번 뇌전의 마나를 얻으면서 노폐물을 전부 배출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모공이 열리면서 세포 단위까지 노폐물이 배출된 것이다. 하룬은 자신이 다시 바디체인지 현상을 겪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미 두 번이나 일어났기에 바디체인지는 조용하고 표가 안 나게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이제야 시간개념이 떠올랐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속옷부터 시작해 옷을 전부 갈아입은 하룬이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해 이미 마법 등불이 켜 있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그럼 벌써 저녁인가?'

자신은 늦은 밤에 지헤의 파편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늦은 밤부터 다음 날 저녁이 될 때까지, 지혜의 파편에서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에 당황해하던 하룬은 곧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을 대할 수 있었다. 미루스였다.

"어! 대장님, 이제 나오십니까?"

"아! 네."

"아니, 얼마나 심각한 일이기에 식사까지 거른답니까?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같이 무위도식하는 늙은이들과 상의하십시오. 고문은 두었다가 어디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사형과 딜런 경이 방 앞에 자리를 잡고 대장님과 같이 굶고 있기에 제가 강제로 식당에 끌고 갔다 오는 길입니다. 나중에 제 나이가 되어 후회하지 마시고 젊을 때부터 식사는 규칙적으로 챙기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지요."

자신에게 하는 말투와 대하는 태도는 주군을 대하는 것과 같지만 그 뒤에는 사랑하는 손자를 대하듯 자애롭고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기에 미루스의 가벼운 꾸짖음을 편하게 받아들였다. 상단에서 준비한 저녁을 맛있게 먹는 사이 뫼비우스가 찾아왔다.

"아까 낮에도 왔다 갔다면서."

"네. 대장님이 수련에 들어갔다고 해서 마저 볼일을 보러 다녀오는 길입니다."

뫼비우스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이야기가 잘 되었나 보지?"

"네. 돌풍 용병대의 손길을 기다리는 길드는 널렸습니다. 그중 탄탄한 전력과 건실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는 곳들만 골랐습니다. 돌풍 용병대와 손을 잡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저에게 절을 할 길드는 많습니다.

하룬은 뫼비우스가 가져온 리스트를 살펴보다가 한 길드의 이름을 보고 입가를 실룩였다.

"아리수면 발트랑이 길드장인데?"

"아리수 길드의 발트랑 길드장을 아십니까?"

그렇게 묻는 뫼비우스의 눈에 강한 놀람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예전에 잠시 이 친구의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지."

"아!"

뫼비우스는 탄성을 지르며 눈을 빛냈다.

"그럼 아리수 길드를?"

"그러지. 기왕이면 인연이 있는 편이 서로 편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뫼비우스가 정리한 서류에는 모두 9개의 길드와 전력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보수가 적혀 있었다. 역시 일 처리가 매끈했다. 따로 만나 보수 협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카오스 길드와 듀얼라이프 길드로 하지."

카오스 길드와 듀얼라이프 길드는 모두 코원 유니온 출신의 유저들이 결성했고 초대형 길드는 아니지만 탄탄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순서는?"

"아리수부터 시작해서 듀얼라이프로 끝내지. 그들은 지금 어디 있나?"

"세 길드는 공략하던 성이 있어서 그 근처에 있습니다만 통신으로 소식을 전하면 내일 정도에는 요새로 올 겁니다."

"좋아. 그럼 계약은 티노 부대장이 할 테니 같이 가서 하도록 해."

"그럼 공격 시점은 어떻게 잡을까요?"

"내가 할 일이 있으니 사흘 후로 하자고. 우리는 이틀 후 저녁까지 아리수 길드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합류하도록 하지."

지혜의 파편으로 할 일이 더 있었다. 거기에 마수 가죽과 약초로 가득 찬 마법 배낭을 비우고 생필품으로 바꾸어 채워야 했다.

"그럼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방송사들이 영상을 찍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레스가 있잖아."

"그 친구는 협상력이 너무 약합니다. 거기에 한 방송사에만 독점적으로 몰아주면 결국에는 가치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요컨대 게임 방송사 간에 경쟁을 시켜야 많이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아레스 덕분에 호울 비전 방송사는 연달아 특종을 방송해서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지만 시청률의 상향에도 불구하고 원고료는 그만큼 올라가지 않았다.

"아레스에게도 알아듣게 얘기를 했습니다."

"아레스는 뭐래?"

"대장이 방송 쪽에 전권을 주면 호울 비전 방송사를 나와 다시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다고 합니다."

안정된 정규 기자의 자리를 포기할 생각을 하다니 뜻밖이었지만 하룬은 아레스가 오래 전부터 고민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대금은 어떻게 할까요? 이전처럼 박살을 통하면 될까요?"

"응. 아니!"

무심코 대답을 하던 하룬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

"뫼비우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정보 조직은 어느 정도 규모지?"

뜻밖의 질문에 뫼비우스는 의아했지만 바로 대답을 했다.

"아직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단한 정도는 아닙니다. 그저 코원 유니온에 흘러 다니는 일반적인 정보 정도만 취급하는 수준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혼자서 일군 조직이었기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럼 혹시 다른 유니온에도 지부를 만들 수 있겠나? 아니, 보다 큰 정보 조직의 총수가 되어 보고 싶지 않은가?"

"네?"

"난 이곳은 물론 지구의 전 유니온을 관할하는 정보 조직을 원해. 내가 직접 관할하지 않더라도 내 의지가 전달될 수 있는 그런 정보 조직을 말이야."

하룬의 말에 뫼비우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코원 유니온의 정보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로도 정신이 없는 그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못 하겠는가?"

"아,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할 수 있다. 아니, 하고 싶다. 전 유니온에 지부를 가진 대형 정보 조직을 운용하는 것은 이 길로 나선 그가 품을 수 있는 최고의 꿈이다.

"그럼 이번에 방송사들에서 받을 대금으로 그런 조직망을 갖춰 봐. 난 앞에 드러나길 원하지 않으니 그 일은 뫼비우스에게 맡기지. 필요한 자금과 인력이 있다면 더 지원할게. 아레스와 그 친구들도 설득해서 같이 일을 한다면 보다 쉬워질거야."

"정말 그래도 될까요?"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런 정보 조직을 만들고 자신이 직접 운용할 수 있게 된다니. 비록 배후에 하룬이 있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자신이 최고 지도자가 되는 일이다. 이미 비욘드에 뿌리를 내린 정보 조직을 만들었다. 그 정보원들은 다양한 유니온 출신이라서 현실에서 만들지 못할리가 없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세상이니 이번 대금으로 받을 막대한 자금을 활용하면 쓸 만한 정보 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전부터 돌풍 용병대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좋아! 이제 넌 우리 돌풍 용병대의 히든 대원이다. 한번 제대로 된 정보 조직을 만들어 봐!"

"감사합니다."

뫼비우스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나갔다. 여러 경험을 통해 정보의 중요성을 통감한 하룬이다. 자신이야 시간이 없어서 직접 움직일 수 없지만 뫼비우스라면 잘할 것이다. 열심히 사는 아레스나 뫼비우스와 같은 친구를 보면 돕고싶은 생각이 든다. 벨을 만나지 못했으면 자신은 절망의 터널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했을 테지만 이 친구들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만큼 하룬은 그들을 인정했다. 뫼비우스가 나간 후 하룬은 굴탄에게 부탁해서 숙소의 출입을 막고 딜런과 타니엘라 그리고 미루스를 불러들였다. 후원과 회의실에서 대전사와 포머칸 출신의 고문들과 함께 수련과 토론을 하던 세 사람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얼굴로 하룬을 바라봤다.

"바쁜 세 분을 청한 것은 이 물건 때문입니다."

세 사람은 하룬이 가리킨 지혜의 파편을 보더니 표정이 확변했다.

"호, 혹시?"

"네. 드디어 네 번째 지혜의 파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와아아!"

미루스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막상 지혜의 파편을 잡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떤 내용입니까, 대장?"

평소에는 거의 부동심을 잃지 않던 딜런마저 얼굴이 붉게 상기될 정도로 흥분했다.

"많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제 수준으로는 앞부분만 들을 정도였습니다. 마나의 본질에 대한 강론과 운용에 대한 내용밖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 세상에!"

타니엘라는 마치 보물을 만지듯 황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미루스의 곁으로 가서 연방 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지혜의 파편을 만지고 있었다.

"대장님의 변화가 이것으로 비롯된 거였군요."

하룬을 바라보는 딜런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는 이미 하룬의 기도가 달라진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운이 좋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그럼 소드 마스터가 되신 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마나의 본질을 어느 정도 깨닫고 마나의 화합과 간섭 그리고 배척 현상을 이해하고 나니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오오! 축하합니다!"

딜런은 진심을 담아 하룬의 성취를 축하해 주었다.

"축하드립니다!"

"겔겔! 우리 용병대에 경사가 났군요. 소드 마스터가 2명이나 되니 이제 세상 사람들은 우리 돌풍 용병대를 달리 볼겁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도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었다.

"제 경지가 일천해서 내용의 태반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딜런 경이라면 좀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겁니다."

꿀꺽!

딜런은 긴장과 기대로 인해 연방 침을 삼키며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지혜의 파편을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타니엘라 경, 미루스 경."

"네, 대장님!"

"딜런 경이 먼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알았습니다. 그럼 우리는 호법을 서야겠군요."

"네, 부탁합니다."

깨달음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두 사람과 하룬이 딜런을 보호해야만 했다. 약간의 방해만으로도 깨지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었다.

"거기에 마나 집적 마법진을 설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진을 설치하기가 좀 곤란합니다. 마나석 문제도 있고요."

혹시 깨달음을 얻어 현재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다면 마나가 큰 폭으로 필요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록 이곳이 사람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기는 하지만 마나 집적진을 설치하면 마나 유동이 일어나 남들의 관심을 받기 십상이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나석은 최상급까지 제게 있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장소가 문제네요. 차라리 요새 밖으로 나갈까요?"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버처리비크 대원들이 우리를 내려 준 곳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럼 그렇게 하시죠."

자신을 찾아올 사람들이 좀 걸렸지만 지금 급한 것은 만남이 아니라 고문들의 실력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다. 타르 분지에 있는 다크니스의 본단을 치는 일이나 혼돈의 땅을 고려하면, 돌풍 용병대의 전력을 올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사탕가 봉 근처의 성을 장악하면 조장급과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중간 간부들에게도 지혜의 파편을 통한 기연을 얻게 해줄 작정이다.

"다른 고문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미루스가 들뜬 가운데서도 산악 부족 출신의 고문들을 챙겼다.

"그분들도 우리 용병대의 보물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암요!"

성정이 순수하여 감정 표현이 솔직한 미루스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달려 나갔다.

"그럼 우리도 갈까요?"

"네, 대장님."

하룬은 굴탄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지혜의 파편을 챙겨 대원들과 은밀하게 요새를 빠져나갔다. 순정석과 지혜의 파편을 대원들에게 공개한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딜런의 양보로 인해 순서가 조금 바뀌었다. 덕분에 티노와 도네이스 부부가 제일 먼저 지혜의 파편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간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우직하게 수련을 해 온 티노와 도네이스 부부는 두 번째 지혜의 파편을 경험하는 것에 그쳤지만 단숨에 한 단계를 뛰어넘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하룬에게 받은 최상급 마나석으로 만든 마나 집적진도 그들의 성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대장님."

"이젠 마나 궁술을 마스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익스퍼트 중급과 상급이 된 티노 부부는 환희에 찬 얼굴로 자신들에게 찾아온 행운을 즐겼다. 두 사람은 이제야 하룬과 고문들이 믿을 수 없이 빠른 진경(進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환한 얼굴을 본 타니엘라가 축하를 해 주었다.

"후후! 자네들과 우리는 복 받은 거라네.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를 복용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수준 높은 강의를 들을수 있으니 말이야."

"정말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보다 우리 대장님을 만난 것이 저에겐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껄껄!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맞네, 맞아! 대장님을 만난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행운이지."

타니엘라와 티노의 뜨거운 시선은 한쪽 구석에 앉아 명상에 빠진 하룬에게 향했다. 하룬은 마나 오션에 이어 마나 스토리지를 하나씩 확장할 생각이었다. 만약 이것이 성공하게 되면 인간의 몸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거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주먹질로 산을 부수고 발길질로 지진을 일으켰다는 고대의 초인들처럼 말이다. 다음은 딜런의 차례였다. 딜런은 하룬으로부터 받은 순정석을 복용하고 수련 검식으로 마나를 활성화시킨 후 지혜의 파편에 손바닥을 대었다. 1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눈을 뜬 딜런의 입에서 대소(大笑)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딜런은 상급으로 향하는 벽을 깨지는 못했지만 벽을 깰 수 있는 실마리의 대부분을 잡은 듯 환한 얼굴로 지혜의 파편에서 손바닥을 떼었다. 지금까지 늘 해 오던 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명상을 하며 그 내용을 되새기다 보면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검의 끝과 가까워질 것이다.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연속으로 7서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룬이 구해다 준 고대 마법서를 밤낮으로 연구할 것과 포머칸 출신의 고문들과의 토론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곱 번째 고리가 안정적으로 생성된 것을 확인한 후에도 그들은 지혜의 파편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명상에 들어갔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이건 우리 대장님이 수많은 의뢰와 고난을 극복하고 손에넣은 귀중한 보물입니다. 이 안에는 고대 시대에서 유래하는 신비하고 깊은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손바닥을 대고 정신을 집중하면 고대의 지식들이 강의 형태로 전해질 겁니다. 거기에서 무엇을 얻는지는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딜런의 설명에 대전사와 포머칸 출신의 고문들은 호기심어린 얼굴이 되었다. 지혜의 파편은 3개에 불과했지만 하룬이 검증의 관에서 경험한 지혜의 파편에 있는 내용들은 이미 타니엘라가 정리해 두었다. 지혜의 파편의 신기한 점 중 하나는 대상자가 다른 지혜의 파편에 있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 상위의 지혜를 강론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지혜의 파편은 3개라도 4개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세 고문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지만 잘 이해를 하지 못했던 산악 부족 출신의 대전사 고문들은 첫 번째 지혜의 파편부터 시작해서 연속으로 세 번째에 해당하는 강론까지 들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마정석 가루와 문신을 통해 마나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마나 오션을 생성하게 되어 새로운 경지에 이른 대전사 출신의 고문들은 체계적인 강의 내용에 어렵지 않게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미 딜런과 여러 차례 토론을 통해 마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 고문들에게, 지헤의 파편에 있는 체계적이고 안정성이 확인된 여러 마나 이론과 검술 이론은 그야말로 보물 그 자체였다. 포머칸 출신의 고문들 역시 지혜의 파편을 통해 주술과 마법의 깊은 연관성을 알게 되었으며 그 호환 가능성은 물론 마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이제 주술의 매개가 되는 각종 시약이나 재료가 없어도 주술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고무적인 것은 고문들 중 극히 일부만이 부분적인 바디체인지를 경험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전원이 완전한 바디체인지를 이룬 것이다. 이들의 경우 일족의 선배로부터 비의를 배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성향 자체가 개인 수련을 중시하던 터라 이론적인 부분과 폭넓은 시야 면에서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지혜의 파편이 그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자 단숨에 바디체인지를 이룰 정도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후아! 이건 정말 엄청난 보물이군요."

"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하룬으로 인해 신세계를 보게 된 산악 부족 출신의 고문들은 일제히 하룬 앞에서 오체투지를 했다. 이런 것은 그들이 숭배하는 발몬 신에게만 올리는 것이었다.

"대장님 덕분에 새로운 세계에 눈뜰 수 있었습니다. 부디 영원히 우리와 우리 후손을 이끌어 주십시오."

"대장님은 발몬 신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저희에게 보내 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고문들의 과한 반응에 하룬은 어쩔 줄 몰랐지만 티노 부부는 물론이고 딜런과 타니엘라 그리고 미루스까지 그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준비된 자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복연입니다. 이 지혜의 파편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여러분이 얻을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하룬은 애써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강함과 무도의 끝을 보고자 외길을 살아온 이들은 자신들이 얻은 깨달음이 하룬이 아니었으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이기에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지혜의 파편을 공개했다. 그들이 지혜의 파편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한 것은 자신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과한 반응은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자신을 마치 신처럼 대하는 것이다.

'나도 말재주가 좀 있었으면 좋겠군.'

이럴 때는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제일이다.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 보고 싶군요."

하룬의 말이 떨어지자 전사 계열의 대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를 찾았다. 주술사 계열의 고문들은 타니엘라와 미루스를 중심으로 모여 각자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밝히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부대장은 오랜만에 저와 함께 대련을 하시죠."

"감사합니다, 대장."

익스퍼트 중급이 되었지만 현재의 일행 중에서는 그 상대를 찾을 수 없었던 티노는 하룬의 제의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항상 자신을 챙기던 도네이스도 마나 궁술의 새로운 기예를 시험하느라고 벌써 자리를 떴다. 깊은 산속에 오러 블레이드들이 휘황한 빛을 내며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근처 지형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었다. 대전사 출신의 고문들은 이제 마수의 힘과 마나 오션의 마나를 합일시켜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할 수 있었고 마수의 힘을 운용하는 시간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하룬은 티노를 상대로 메신저 검술을 시험하는 한편 검기를 유지하는 세세한 마나 운용에 대한 조언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포머칸 출신의 고문들과 7서클에 오른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주술과 마법을 결합시켜 위력을 극대화하는 방안에 대해 토론했는데 모두 표정이 밝았다.

"주술 공조 마법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슬쩍 다가온 미루스가 하룬에게 자랑을 했다.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던 모양이다.

"지난번에 보았던 그 주술과 마법의 결합을 그렇게 이름붙였군요."

"네. 주술의 힘으로 마법의 위력을 최소 다섯 배에서 최대 오십 배까지 증강시키는 마법입니다. 포머칸 출신의 고문들이 지혜의 파편을 통해 주술과 마법이 한 뿌리에서 나왔으며 그 유사성과 호환성을 깨달았기에 새롭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놀랍군요. 그 정도의 위력이라니."

"흐흐. 당하는 쪽에서 보면 놀라 뒤집어질 겁니다. 기껏해야 손가락 굵기에 불과한 매직 미사일이 팔뚝이나 통나무 굵기에 창만 한 길이로 발현되니까요. 거기에 그 위력은 서클을 무시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주술의 효과가 더해져 중첩실드도 막지 못합니다."

확실히 자랑할 만했다. 놀란 하룬의 표정에 미루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했다.

"머지않은 가까운 미래에 태동할 우리 돌풍 마탑의 새로운 마법 체계에, 사람들은 크게 놀랄 겁니다"

서클을 무시하는 새로운 마법 체계라면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주술과 마법의 결합 방식은 무궁무진한 만큼 앞으로 탄생할 돌풍 마탑의 미래는 미루스의 미소만큼 밝았다. 일단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 그 위력을 확인한 터라 미루스를 비롯한 고문들은 시간과 장소를 잊을 정도로 몰두하고 있었다.

도네이스는 새롭게 얻은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와 일행의 식사를 준비했다. 이 중 누구도 식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도네이스의 시퍼런 서슬에 반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흐르고 요새로 돌아온 하룬 일행의 분위기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누구....세요?"

심지어는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바디체인지를 겪은 고문들을 못 알아보는 사태까지 나왔다.

"흐흐흐!"

"홧! 홧! 홧!"(골드런:이건 뭘까...?)

고문들은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 확인하고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바디체인지를 겪은 그들의 외모는 흉터도 사라지고 문신마저 현격하게 작아져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 덕분에 상점까지 가는 도중에 대전사 출신의 고문들은 혼기를 놓치거나 홀몸이 된 과년한 여자들로부터 은밀한 눈빛까지 받았던 것이다.

"이참에 나도 늦장가를 가 볼까?"

"흐흐흐! 나도 그럴 생각이야. 가고자 하는 길을 다 걸은것은 아니지만 왠지 이제는 쉬었다가 가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고문들은 예전에 없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아무 가치도 두지 않았던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청년기를 지나면서 잊고 있었던 결혼도 그중에 하나였다.

"우리 대장에게 단체로 중매를 부탁해 보세."

"그럴까? 우리 목숨이야 대장님 손에 달렸으니 결혼도 대장님에게 맡겨야지. 후후! 그러자고."

농담처럼 진담을 토해 내는 고문들의 뒤에서 딜런이 진한미소를 머금고 하룬을 보았다.

"왜요, 딜런 경?"

"앞으로 대장님이 많이 성가실 것 같아서 그럽니다. 용병대를 운영하는 것도 그렇지만 고문들까지 장가보내려면 골치 좀 아플 겁니다."

"하하하! 가겠다면 용병대 재산을 털어서라도 보내야지요."

화염 지대에서 죽을 위기를 겪으며 운이 좋아 의뢰를 완수하고 얻은 보물은 그 가치를 제대로 해냈다. 이제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실전이 필요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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