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과 달의 신전
하룬은 벨이 회복되는 것도 확인할 겨를이 없이 기지 복구가 안정적으로 진행된 것을 호가인하고는 비욘드에 접속해야만 했다.
이곳에서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다행하게도 아리가 제때 복귀한 덕에 안심할 수 있었다. 비욘드에 접속한 하룬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크레이터였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깊이는 50미터에 육박하고 지름은 대충봐도 1킬로미터는 될 것 같은 크레이터를 본 하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저 크레이터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무사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뭐 어쨌든 나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마나량이 폭증한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하룬은 무엇보다도 대마법사인 포러스의 정신 마법에 대항해서 싸우는 와중에 각성을 한 정신 능력이 기꺼웠다.
'일단 내 상태부터 다시 파악하자.'
그동안은 스스로도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리얼 모드로 플레이를 해 왔다. 하지만 자신이 얻은 정신 능력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상황이 되자 게임 모드른 통해 기본적인 정보라도 얻고 싶었다.
하룬은 일단 상태 창부터 열었다.
이름: 하룬
종족: 인간
직업: 이능력 정령 검사
레벨: 195
칭호: 그레이트 버거(외 32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2차 전직을 했다. 전직소를 통하지 않아도 전직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하룬은 생소한 이름의 칭호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룬은 버거(Bugger)란 칭호가 자신이 마치 버그처럼 비욘드의 시스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플레이를 하는 자를 말한다고 이해했다.
'하긴! 나와 같은 존재는 게임 시스템으로 설명할 수 없겠지.'
레벨이 올랐다. 그것도 11이나. 어찌 된 일일까?
'혹시?'
하룬은 정신을 차렸던 과정을 떠올리며 꼼꼼하게 분석을 시작했다. 자신의 육체를 차지하려는 포러스의 정신 공격에 당해 하룬의 영혼은 거의 소멸되고 있었다.
포러스는 하룬의 육체를 차지했다고 확신하고 새로운 육체에 마나 고리를 단번에 형성하기 위해 마나 흡수를 시작했다.
하룬이 그동안 쌓아 온 마나와 포러스로부터 흡수한 마나 그리고 주변으로부터 빨려 들어온 마나가 몸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나들은 그 성질이 너무나 다른 탓에 마나고리를 생성하기는커녕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마나의 충돌이 커지며 그것을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포러스의 육체 장악력이 약해졌다.
'아! 그런 거로군.'
이제야 자신이 소생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닫게 된 하룬이다. 소멸되려던 하룬의 영혼은 기하급수적으로 약화되는 포러스의 영혼이 내어준 자리를 차지하며 급속하게 재생했다.
그 과정에 정신 능력은 각성을 일으켰고 결국 자신의 육체를 차지했던 포러스의 영혼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애초에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기 위해 흑마법진도 마나 집적용으로 펼쳐 놓았던 터라 영혼이 융체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속적으로 하룬의 육체로 마나가 몰려들었고 어느 순간마나 집적이 한계를 초과하자 흑마법진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건물 밖으로 나온 하룬은 감당할 수없이 쌓인 마나를 밖으로 배출하며 폭발시켰고 그 폭발이 지구라트를 비롯한 성 전체를 모두 파괴시킨 것은 물론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레벨이 오른 것이다. 그의 눈이 직업란에 잠시 머물렀다.
현실의 육체적 능력이 상당 부분 반영되는 비욘드의 특성을 고려하면 자신이 이능력자가 되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벨의 대역을 구할 때 썼던 새로운 힘이 바로 이능력일 것이다.
'앞으로 이능력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나인과 레이스가 쓴 이능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잘만 사용하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스탯 창으로 시선을 돌린 하룬의 눈이 커졌다.
생명력:12,400
마나:11,854
정령력:10,420
힘: 304 체력:312
지식:154 지혜:301
행운:60 민첩:332
지구력:198 심안:65
집중:81 의지:101
자정:80% 영력:330
SP.:9,980 명성:34,210
통솔력:3,210 카리스마:420
물리 방어력:30%
마법 방어력:35%
독 저항력:40%
'굉장하군!'
스텟들은 거의 밸런스 붕괴 상태였다. 레벨의 수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높은 수치였던 것이다. 거의 모든 항목이 일반적인 계산 결과로 예상되는 수치의 다섯 배 이상이었다.
주어진 보너스 스텟은 행운 스텟으로 모두 몰아넣었다.
'일반 게이머들이 알면 기함을 하겠군.'
스텟 창을 보는 하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페론의 말대로 자신이 선택된 휴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야! 이건 내가 죽음을 극복하고 얻은 능력들이야!'
자기 합리화라고 해도 좋았다. 하룬은 설사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자신이 노력하고 위험을 극복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보다 보니 새로 생긴 스텟도 있었다.
'영력? 330 이나 되네. 이건 뭐지?'
그 이름으로 보아 이능력과 관계된 것은 알겠지만 자세한것은 알 수 있었다. 스텟 창에 이어 스킬 창을 열고 새롭게 얻은 스킬을 살펴 보았다.
소울 파워 스킬: 영력 제한 100 이상
소울 컨트롤 - 초급LV.1(0.34)/LV.10:상대의 영혼을 제어하여 원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
초당 마나 소모:100
소울 도미네이션 - 초급 Lv.1(0.14)Lv.10:상대의 영혼을 굴복시켜 주인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초당 마나 소모:1,000
소울 세이즈 - 초급Lv.1(0.04)/Lv.10:상대의 영혼을 장악하여 명령을 심을 수 잇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
스킬을 마스터하면 상대의 영혼을 소멸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그 육체에 옮길 수 있다.
초당 마나 소모:3,000
언령 - 초급Lv.1(14.20)/Lv.10:의지를 담아 외치는 순간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결과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범주에 걸쳐 있다.
초당 마나 소모:10,000
하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로 엄청난 스킬들이다. 흑마법사의 경우 적어도 4서클은 되어야 시도할 수 있는 정신계 마법을 영력이라는 스텟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영력이라는 스텟이 있어야만 발휘할 수 있는 스킬로 소울 장악의 경우에는 상대의 영혼을 소멸 혹은 일시적으로 봉인시키고 그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거였군!'
현실에서 상단전의 힘, 즉 이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나인과 레이스가 가진 힘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잘한 스킬들이 더 있었다.
매혹 - 초급Lv.1(0.24)/Lv.10:상대의 영혼에 호감을 주어 상대를 의도대로 이끌 수 있다. 순간 자동으로 발동되는 스킬이다.
초당 마나 소모:10
위세 - 초급Lv.7(54.1)/Lv.10:상대의 영혼을 겁박하여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 기세를 일으킬 때 저절로 발동되는 스킬이다.
초당 마나 소모:10
'이런 스킬들이 어떻게 그냥 생긴 거지?'
다른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비욘드를 가상이 아닌 다른 현실로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살아온 하룬이지만 스킬을 익히려면 반복적으로 같은 행위를 하거나 혹은 스킬북을 통해 배워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룬은 한참 동안 분화구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여전히 알몬인 것을 인지하고는 속옷과 방어구를 꺼내 입었다.
하룬은 마지막으로 외투를 입기 전에 벗어 놓았던 암기 벨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폭발에도 끄덕도 없군.'
암기 벨트를 바라보는 하룬의 눈은 따뜻했다. 암기 벨트에는 비도지존이 남긴 비수들은 물론 어둠의 비수와 투명 비수 그리고 많은 비수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고맙다!'
하룬은 암기 벨트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인 양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상의 위에 착용하고 외투를 마지막으로 입었다.
부르르.
하룬의 마음이 담긴 따듯한 손길에 암기 벨트가 감동한듯 떨었지만 하룬은 이미 분화구를 벗어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분화구 위로 올라온 하룬은 비로소 주변 풍결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그다왓트 나무들이 감싸고 있는 삼면과 결계가 자리했던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자리가 바로 성이 있던 자리군. 아니, 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폭발력이 미쳤어.'
엘프들이 사랑하던 아그다왓트 나무들이 폭발의 충격으로 여기저기 상한 모습에 하룬은 아무도 보지 않고 있음에도 미안함을 느꼈다.
하룬은 뿌리가 노출된 상태로 절반 정도가 심하게 부러진 아그다왓트 나무에 얼굴을 대고 사과했다. 그 나무가 가장 많이 상했던 것이다.
-미안해! 하지만 엘프들을 죽인 녀석들을 처리한 거니까 이해해 줘.
-괜찮다, 인간. 이해한다.
'응?'
설마 아그다왓트 나무가 자신의 의지를 듣고 이렇게 의지를 전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하룬은 깜짝 놀랐다. 영력이 생기며 얻게 된 놀라운 능력 중의 하나였다.
-어차피 우리는 죽어 가고 있었다.
-왜?
-지하에 거대한 화맥이 흐르고 있어. 그 화맥의 분출을 간신히 누르고 있던 결계의 힘이 사라졌기 때문에 화맥의 분출과 함께 이 숲도 얼마 후면 사라질 거야.
-그렇구나.
마음이 급해졌다. 언제 이곳이 폭발할지 모르는 것이다.
-인간에게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인데?
신기했다. 이렇게 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우리는 곧 소멸할 거야. 안전한 곳에 우리의 후손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 줘.
-뿌리를 내린다고?
-가장 건강한 씨앗들을 줄게. 오래전부터 엘프들이 부러워하던 트라 분지를 찾아가 적당한 곳에 씨앗을 뿌려 줘. 그러면 우리가 힘을 잃으면서 산맥 곳곳으로 흩어졌던 엘프들이 그곳으로 찾아올거야.
운이 좋아 이 땅을 떠났던 고엘프들이 나타난다면 엘프들이 마수들의 위협을 피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결계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자신 역시 그곳에 볼일이 있었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고마워, 인간. 당신이라면 들어줄 줄 알았어. 우리의 친구 에리피안이 죽기 전까지도 굳게 믿었으니까.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황홀할 정도로 상쾌한 수향을 머금은 바람은 하룬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고 전신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건 뭐지?
부탁했던 씨앗이 아니라 바람이 몸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하룬이 물었다.
-우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인간에 대한 마음의 선물이야. 언제고 나중에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야.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순간 바람의 끝자락을 타고 작은 씨앗들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청량하고 진한 수향을 머금은 씨앗들이 하룬의 주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살아왔던 아그다왓트의 후손들이야. 이제 우리는 소멸하지만 그대의 도움을 받은 우리의 후손들이 풍요롭고 안전한 땅에서 우리 대신 살거야. 고워, 인간!
-이봐!
아그다왓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후드득!
어느새 누렇게 변한 거대한 나뭇잎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나무들은 윤기를 잃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들처럼 앙상하게 변해 버린 아그다왓트 나무들의 모습에 하룬은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모두 죽은 건가?'
그런 것 같다. 방금 전까지 그에게 의지를 전했던 아그다왓트 나무에서 더 이상 생기를 느낄 수 없었다. 얼마나 이 땅에서 살아왔는지 모를 거대한 아그다왓트 나무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쓸쓸하고 슬펐다.
어쩌면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씨앗에 주입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무릇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아그다왓트 나무들도 후손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거라고 생각한 하룬은 씨앗들을 아공간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반드시 그곳에 심어 줄게' (골드런: 왜 눈물나려함ㅠ)
트라 분지에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이제 달의 신전에 들어가야겠군.'
곧 이곳이 폭발할 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정령들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엘프의 눈물을 복용할 당시 정령들을 불렀지만 그의 부름에 응답한 것은 싸가지밖에 없었던 터라 다른 정령들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싸가지! 나이아! 라이피! 위신느! 피닉스!
-주인!
역시 이번에도 하룬의 소환에 반응한 것은 싸가지가 유일했다.
"어! 너 모습이 많이 달라졌구나."
-흐흐흐! 또 한 번 각성을 했거든. 어때 멋있지?
싸가지는 완벽한 인간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멋쩍게 웃는 모습이나 표정이 너무 생생했다.
"후훗! 이젠 완전히 인간 같은데."
-헤헤! 주인이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아.
"이젠 그 모습으로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그 말에 싸가지는 콧등에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녀석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쉬운 감정을 담고 있었다.
-시간이 조검 더 있었더라면 그럴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만 물질계에 머무를 수 있을 뿐이거든.
"그래? 이거 아까운걸. 이렇게 변한 너랑 같이 다니면 좋을 텐데."
그 말은 진심이었다.
-고마워, 주인. 조금 더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참! 그나저나 다른 정령들은 어떻게 된 거야?"
-걔들은 지금 각성의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야.
"다행이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좋은 쪽이라니 다행이다.
-걔들이 각성을 끝내고 나면 정령왕만큼은 아니지만 큰힘을 가지게 될 거야.
"후후! 기대가 되는걸. 혹시 걔들도 너처럼 모습이 변할까?"
-아마도. 자신이 평소에 원하던 모습으로 진화할 거야, 주인.
싸가지의 말을 들은 하룬은 나이아와 위신느의 달라졌을 모습이 기대되었다. 그녀들은 정령이긴 하지만 자신과 운명의 끈으로 묶인 존재에다가 자신에게 애정을 느끼는 여성체이다 보니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아깝다, 주인.
-뭐가?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 싸가지였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주인 혼자 이계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데.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하룬은 의지로 대화를 하다가 싸가지의 말에 놀라 부지불식중에 입을 벌려 말을 하고 말았다.
-그동안 주인이 구해 준 물건들과 주인의 몸속으로 들어온 마왕의 파편이 변한 정령력을 통해 내 힘을 9할 정도는 되찾았거든.
나머지 1할만 더 채우면 주인의 진체(瞋體)가 있는 이계와 연결되는 통로를 내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 그게 정....말이야?
놀라 눈을 부릅뜬 하룬의 물음에 싸가지가 평소의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은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을 때 포러스가 마왕의 파편을 먹였고 그것이 잠시나마 정령력으로 변해 전신으로 퍼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영문을 몰랐다.
하룬은 예전에 포니라는 에션셜 정령을 통해 보았던 정보를 떠올렸다.
-그럼 네가 차원의 통로를 열 수 있는 거야?
-응. 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 통로가 되는 거지.
너무 뜻밖의 말이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하룬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싸가지를 쳐다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내 몸을 잠식했던 수많은 오염 물질들로 인해 기억마저 사라져서 그동안은 나도 몰랐었어. 그런데 주인 덕분에 내능력을 되찾으면서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더라고.
내겐 분명 그런 능력이 있어. 내 첫 주인이던 아드실비론은 나의 그 능력을 이용해서 차원을 여행했었거든.
-아드실비론?
-응. 아득한 초고대에 어마어마한 권능을 가진 신들이 아인종들과 함께 살았던 때가 있었어. 평화로웠던 시기도 있었지만 힘에 취한 신들이 제작기 자신을 따르는 아인종의 소원을 들어주며 세상은 곧 전란에 빠지고 말았어.
그 때 나타난이가 바로 아드실비론이었지. 고인간(古人間)의 한 종족인 휘로아 중 비천한 태생으로 출생했지만 신인(神人) 시대를 종결시킨 위대한 영웅이었지.
-고인간은 뭐지?
-고인간은 고도의 지석 능력을 가진 아인종 혼혈로 태어난 이들을 말해. 거인족을 위시한 다양한 인간과 엘프, 드워프, 요정, 수인족 간의 혼혈이지. 휘로아는 그중 수인족과 인간의 혼혈이야.
-그....게 가능한 거야?
-그때는 가능했어. 세상에 에너지가 가득 차 있었고 아인종들의 유전자는 상호 교환이 가능했으니까. 수많은 돌연변이가 높은 확률로 출현하던 시대였어. 심지어는 단성생식도 이루어졌었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싸가지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과 요정 간에도 번식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만약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하면 인간과 신 그리고 인간과 동물 간에도 생식(生殖)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거야 말로 신화로군.'
하룬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휘로아는 혼혈족을 뜻하는 고인간의 한 종족으로 적어도 세 종 이상 아인종의 유전자가 섞인 경우를 말해. 비록 숫자는 극히 적었지만 그중에는 뛰어난 자들이 계속해서 나왔어.
혼혈에 혼혈이 더해지면서 열성유전인자로 인해 어린 시절에 죽는 도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태반이었지만 일단 살아남는 자들은 잡종강세 효과-잡종 세대가 몸의 크기, 중식력, 저항성 등에서 어버이보다 뛰어난 현상-로 본래 아인종의 우성유전형질이 발현되어 그 능력이 뛰어났어.
'그런건가?'
현재의 인간인 휴먼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에 있어 종말 시대의 인간들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 이유로 오염된 환경이나 최소한의 한정된 생활만 가능한 배리어와 같은 것들이 있지만 황 박사와 같은 학자들은 비교적 가까운 사이의 혈연 간에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근친혼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종말 시대와 휴먼 시대 간에 존재했던 수백 년의 암흑시대에 인간들은 주로 대규모의 기지나 깊은 산속의 제한된 곳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근친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 유니온 체제하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분이 구분된 사회이니만큼 결혼은 같은 구역에 사는 같은 계급 간에 이루어졌고 S나 A구역의 경우 혈연으로 따지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인 것이다.
물론 근친혼으로 순수한 유전형질이 발현되어 뛰어난 인물이 출현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으로 보면 근친혼은 인간의 능력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성장을 하며 휘로아의 로드가 된 아드실비론은 신들이 물질계에 직접 현신하거나 아인종들을 조종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어. 그래서 직접 키운 전사들을 이끌고 신들을 공격했지. 그 와중에 수많은 동료를 만났고 나역시 그의 높은 이상과 꿈에 반해 그 행렬에 끼어들었어.
'후후후! 정말 신화로군.'
자신의 상식선을 한참 상회하는 이야기에 하룬은 어느새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싸가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지만 인간이 어떻게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말살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신들에 의해 휘둘려 오직 도구화되어 버린 수많은 아인종들이 그에게 힘을 주었어. 각 종족의 우성형질을 골고루 갖춘 아드실비론은 결혼을 통해 아인종들을 통합해 갔는데 그중 드워프 족으로부터 신기(神器)라고 불리는 수많은 무기들을 얻었고 요정족으로부터는 신도 두려워하는 정령과의 친화력과 그 방법을 배웠어.
수인족 부인들을 통해 육체에 내재된 가공할 잠력을 이끄는 법을, 엘프를 통해서는 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지.
요컨대 그는 아인종의 통합 로드가 된 것이다.
-모든 아인종의 힘이 합쳐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전능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권능을 가진 신들이 아드실비론과 그 동료들에 의해 소멸되기 시작한 거지. 신이라고 하더라도 소멸을 피할 수는 없는 존재이고 그 힘은 유한하니까.
결국 수백년에 걸친 싸움 끝에 아드실비론은 신들과의 마지막 협상을 통해 그들을 천계와 마계라는 차원의 틈에 자리한 공간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어. 그리고 정령들에게도 원하는 대로 정령계라는 공간으로 이주하도록 해 주었지. 아인종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물질계라고 부르게 된 것도 그때부터야.
'정말 대단한 존재였군!'
하룬은 아드실비론이란 존재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이란 달리 신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그런 신들을 그렇게까지 만들었다니 정말 대단하다.
-강포한 자들이 사라진 세상은 이내 평화를 찾았어. 아인종들은 각기 정해진 구역에서 풍요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며 살았지.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평화였어. 강포한 자들은 사라졌지만 아인종들을 괴롭히는 자연현상은 여전했으니까.
거대한 에너지들이 충돌한 결과, 촉발된 가뭄과 홍수 그리고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는 아인종들에게는 아드실비론과 그 동료들이 이룩한 평화 시기를 금방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위협적이었어.
원래 인간이란 존재가 그러하다. 비록 엘프가 오랜 수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아인종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소멸될 위험을 피해 거주지로 정해진 천계와 마계로 들어간 신들은 넘치는 에너지가 존재하는 물질계가 그리웠어. 천계와 마계는 에너지가 조화되지 않은 혼돈의 땅이었거든.
천계의 신들은 존재 자체를 걸고 한 맹약으로 인해 비록 물질계에는 나타날 수 없었지만 믿음을 전제로 행사할 수 있는 신성력이라는 정신적인 힘을 이용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했고,
마계 역시 흑마법사와 같은 사악한 자들의 소환을 통하거나 가끔씩 일어나나는 차원의 비틀림 현상을 이용해서 아인종과 같은 기운을 가진 존재들을 물질계로 내려보내 물질계가 가진 풍성한 에너지를 흡수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었어. 만 년이 몇번 거듭해서 흐르자 세상은 다시 어지러워졌어.
하룬은 이제 흥미로운 눈빛으로 싸가지를 주시했다. 단순한 이야기로 듣기에는 너무 흥미로웠던 것이다.
-운석 충돌과 대규모의 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아인종들의 문명이 대규모로 멸망하고 난 후 천계와 마계의 신들은 대리인의 육체에 강림하는 방법을 찾아 다시 물질계에 그 모습을 드러냈어.
그들은 풍요로운 물질계의 신선한 에너지를 탐닉하는 동시에 이전의 찬란한 문명을 잃어버린 아인종들을 수족으로 부려 다시 전쟁을 시작했어. 또다시 세상은 피와 죽음으로 어지러워졌지. 그때 한 수인족이 아드실비론이 세운 신전에 들어왔어.
'이번에는 수인족이 그 주인공인가?'
정말 흥미롭다.
-펠이란 그 수인족은 레드울프를 모계로 하는 전사로 나를 비롯해서 아드실비론이 남긴 힘을 수습하고 그가 남긴 신기를 손에 넣었지.
하지만 일찍이 다른 아인종들에 의해 그 부모는 물론이고 동족이 학살된 것을 기억하는 그는 아드실비론처럼 높은 이상을 가지지는 못했어.
오로지 몇 번에 걸쳐 부모와 동족들을 학살한 아인종들과 그 배후에 자리한 신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수심밖에는 없었지.
'그게 정상이라고!'
하룬은 펠이란 존재에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뭔가 부족한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펠은 쉽게 부모와 동족을 학살했던 아인종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어. 그의 복수는 그 후 각 종족에 강림한 신들에게 옮겨 갔지. 펠은 아드실비론이 남긴 힘과 능력을 이용해서 신들과 그들의 추종자들과의 끈질긴 전투를 이어 갔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복수에 눈이 멀어 아드실비론이 남긴 힘을 일부밖에 수습하지 못한 상태였어.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무리를 거느리지 않았다는 거야. 그는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적들을 상대했어.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많은 동료와 수하를 거느리고 위대한 존재들과 싸웠다는 아드실비론보다 혼자 힘으로 혈로(血路)를 헤쳐 나간 펠이란 존재에 매료된 것이다.
'아마 그는 자신의 복수 때문에 다른 이들이 상하는 것을 보기 힘들었을지도 몰라.'
하룬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룬 역시 그런 성격이었던 것이다.
-펠은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협에 빠졌지만 아드실비론이 남긴 힘과 신기를 사용해서 혼자 힘으로 그것들을 극복하고 초인이 되어 갔어. 천계나 마계까지 통로를 열 수 있는 내 능력도 펠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지.
그런 과정을 통해 나역시 펠 떄문에 수많은 생명을 거둘 수밖에 없었고 성격도 변했어. 그렇게 혈로를 걷던 펠은 마침내 신들의 대리인과 마지막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었는데?
하룬은 이야기를 끊는 싸가지에게 순간적으로 분노를 느낄 정도로 몰입을 하고 있었다.
-펠은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다해 신들의 대리인과 싸웠어. 나 역시 정령왕에 버금가는 능력으로 그들을 상대했고.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드실비론의 능력의 절반밖에 가지지 못한 펠은 직접 강림하지 못해서 가진 힘을 다 쓰지 못하는 신들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하지 못하고 결국 같이 소멸하고 말았지.
"이런!"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신들의 대리인들은 모두 소멸이 되었고 천계, 마계와 이어진 통로도 사라졌지만 펠 역시 처참하게 폐허가 된 차가운 땅에서 죽고 말았어. 나 역시 모든 힘을 잃었고, 신기들은 부서지거나 그 능력을 잃고 말았어. 그렇게 세상은 다시 불완전한 평화의 시기를 맞게 되었지.
"그럼 그 자리가 바로 황도(皇都)란 말이야?"
-맞아, 주인 난 그 자리에서 펠과 신들의 대리인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의 원념과 사념 그리고 파괴된 힘의 파편에 오염이 되어 영광스러운 과거도 추억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어.
-그렇구나!
하룬은 싸가지가 알고 있는 역사가 산악 부족이 알고 있는 창세기보다 훨씬 더 이른 시대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뭐 둘 다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였기에 그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묘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싸가지도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단지 오염된 정령으로만 생각했던 싸가지에게 그런 화려한 과거가 있었다니 정말 놀라웠다. 자신은 그런 싸가지를 매일 구박만 했으니....
하룬은 이제 더 이상 싸가지를 싸가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요즈음 하룬은 싸가지에게 아리나 벨에게서 느끼는 남다른 정까지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싸가지야!
-왜, 주인?
-너이제 이름 바꿔라.
-뭐어?
눈이 휘둥그레지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나 보다. 간간이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눈치를 주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다.
-이제 네 이름은 펠이다. 펠!
-펠? 정말 그 이름을 줄 거야?
-그래. 한때는 주인이었던 존재의 이름이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넌 충분히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어.
그렇다. 두 번에 걸쳐 아인종들을 자신들의 도구로 여겼던 신들을 물리치는 데 큰 공적을 세운 싸가지 아니, 펠이라면 그 이름을 가져도 된다.
-정말이지, 주인?
인간과는 달리 그 이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펠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 그리고 앞으로는 주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해. 넌 앞으로 내 동생이다.
-으핵!
펠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하룬의 이런 반응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것이다.
-내가 비록 아득한 옛날 신들과 싸웠다는 위대한 영웅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몰랐으면 모르되 네 과거를 알고도 너에게 주인임을 강요할 수는 없지.
그렇다고 널 형으로 부르기에는 알량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렇게밖에 할 수 없구나.
-.....혀, 형!
펠이 하룸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녀석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것이다.
-엉엉엉! 형! 형! 형!
펠은 한참이 지나도록 울면서 형이란 소리를 반복했다.
"형!"
마침내 울음을 그친 녀석이 입을 벌려 소리를 내어 불렀다.
"왜?"
"헤헤헤!"
자신을 불러 놓고 쑥스러운 웃음만 짓는 펠의 얼굴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난 형이 좋아!"
"그러냐?"
"응. 처음 봤을 때는 완전 꽝이었는데 알면 알수록 너무 인간적이야. 우유부단한 구석도 많고 여자들에게 물러터진 것도 그렇고 단점도 엄청 많지만 일단 결심을 하면 묵묵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은 정말 마음에 들어.
내가 두 번에 걸쳐 모셨던 주인들은 높은 이상을 가졌거나 절대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을 가지긴 했지만 인간적으로 형이 훨씬 더 매력적이야."
"그렇다면 다행이네."
하룬은 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뭐, 나도 내가 그리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제 겨우 한심한 상태에서 벗어났으니까. 그런 위대한 존재들과 비교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난 그저 나와 내 가족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평화롭게 사는 게 유일한 꿈이니까.'
위대한 존재들과 두 번이나 같이한 펠이 그런 자신에게 남다른 매력을 느꼈다니 정말 다행이다. 그런 존재들과 비교를 당하면 정말 살기가 싫을 것이다. 하룬은 자신의 가치를 스르로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들에 비해 부족하든 넘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부족하면 채우면 그만이고 넘치면 남들에게 퍼 주면 되는 것이다. 그게 하룬이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였다.
"앞으로 조금만 더 노력해서 차원의 통로를 열 정도가 되어야 이 형에게 도움이 될 거야."
"알았어. 노력하고 있다고. 그래도 마왕의 눈 때문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기대하라고. 그렇게 되면 나도 인간체로 이 물질계에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후훗! 기대하마."
하룬은 펠의 머리르 쓰다듬으며 정말 그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번거로운 로그아웃과 같은 과정 없이 현실과 이곳 세상을 오갈 수 있을 것이다.
"형은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 들어가 있어."
"알았어, 형 난 능력을 올리고 있을게. 저 네 녀석의 힘들도 좀 올려 주고."
"하하하! 우리 펠이 최고다!"
다른 네 정령까지 챙길 생각을 하다니 정말 믿음직했다. 한때 정령왕의 능력까지 썼던 펠이라면 지금 마지막 각성을 앞두고 있는 네 정령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럼 부탁하마."
"후후후. 걱정 하지마, 형. 형 동생이 이래 봬도 명색이 세상을 구한 펠의 이름을 가진 존재라고."
작은 일에도 으스대는 태도는 어디 가지 않았지만 이름과 관계가 달라져서 그런지 좋게만 보였다.
펠이 돌아가자 하룬의 눈은 엘프들의 신성지로 향했다. 그곳을 지키던 결계는 이미 풀려 있어 에리피안의 목걸이는 필요 없었다.
'도대체 얼마만 한 힘이 가해지면 결계가 파괴되는 거지?'
분명 자신이 무의식중에 한 짓이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결계로 인해 그 안에 있던 달의 신전이 온전한 것은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마왕의 눈을 어디 가서 찾을 건가. 생각을 정리한 하룬은 달의 신전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의 신전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규모가 무척 컸다. 수천년은 족히 되었을 신전은 그 뜻이나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각가지 문양과 그림 들로 장식되었는데 그 뼈대는 아그다왓트 나무와 뿌리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아그다왓트 나무의 하단이 바로 신전 건물이었다. 하룬은 던전을 생각해서 극히 조심했지만 애초에 문이 존재하지 않는 신전 내부로 들어선 순간 본 풍경에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게 뭐야? 이게 정말 신전인가?'
신전 내부에 정면에 있는 인간 크기의 목상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가구도 물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살풍경하기까지 한 내부를 보고 놀란 하룬은 목상을 주시했다.
귀가 긴 아름다운 여인이 벽을 이루고 있는 아그다왓트 나무로 대충 조각한 누군가의 품에 안겨 미소를 짓고 있는 목상이었다. 그 누군가는 제대로 조각되지 않았다. 다만 거무튀튀한 몸에 붉은 안광 그리고 거대한 뿔 세 개가 솟은 머리부분이 상징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발몬이다!'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은 발몬의 아내이자 엘프들이 숭배하는 하이엘프아란의 신상일 것이다. 특이한 것은 발몬 신의 모습을 제대로 조각되지 않은 점이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테지만 하룬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저 모습은 내가 폭주했을 때와 비슷한데.'
붉은 안광은 모르겠지만 뇌전이 방전되는 세 개의 뿔이 무척 친숙하게 느껴졌다. 잠시 신상을 보던 하룬은 마왕의 눈을 찾기 위해 신전 내부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하지만 신전에는 따로 마련된 공간이 전혀 없었다. 혹시 몰라 지하실이 있나 확인을 해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하룬은 꽤 오랜 시간이 흐룬 후에 다시 신상 앞으로 움직였다.
'마왕의 눈이 있다면 이 신상밖에는 없는데.....'
마왕의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전혀알지 못하는 하룬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숭배하는 하이엘프 아란의 눈에 마왕의 눈을 박아 놓았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아!'
신상을 살피던 하룬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하이엘프 아란의 두 눈을 쏘아보던 하룬은 거대한 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박혀 있는 붉은 두 눈에서 오싹할 정도의 거대한 힘을 느낀 것이다.
하룬은 조심스럽게 하이엘프 아란의 상에 손을 대었다.
지지직!
순간 하룬의 머리칼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조각상으로부터 시퍼런 뇌전이 일어나 순식간에 하룬의 몸을 잠식한 것이다. 측량하기 힘든 강력한 전류에 노출된 하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헉! 어떻게 이런 전격이?'
어마어마한 전격이 머리카락 끝에서 발끝까지 흘렀다. 전신 세포들이 올올이 깨어나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근육들은 푸들거리며 저절로 반응했고 감각은 통감을 빼고는 작용하지 않았다.
'혹시 이건 하이엘프 아란이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선더 파워?'
에리피안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발몬 신의 부인 중 하나였던 하이엘프 아란은 특이하게도 뇌전의 정령을 소환할 뿐 아니라 뇌전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가 무기를 휘두르면 새파란 뇌전이 함께 날아갔고 어둠의 종자들은 새까맣게 타 죽었다. 그녀의 뇌전력은 마왕도 두려워할 정도여서 발몬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했다.
비록 움직일 수는 없지만 생각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룬자신도 어퍼 오션에 뇌전을 가지고 있어 전격의 힘에 순간적으로 몸의 통제권을 잃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이대로 조금 더 시간이 흐른다면 몸이 통재로 타 버릴 것이다. 위기의 순간이지만 하룬은 왠지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묘해! 아주 익숙해!'
전신을 감싸고 쉴 새 없이 방전하는 뇌전이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뇌전과는 달리 뭔가 감정을 품은 것처럼 느껴지는 뇌전에 하룬의 어퍼 오션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하룬의 의지가 받아들여 새로운 존재가 된 뇌전구는 일전에 있었던 경험을 통해 학습이 되어서 그랬는지 이번에는 하룬이 별도의 의지를 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으로 촉수를 뻗어 뇌전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속도는 너무나 느렸지만 한 번 하룬이 그 현상을 의식하고 뇌전을 흡수하겠다고 의지를 세운 후로는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푸슈슉!
어퍼 오션에 자리를 잡은 뇌전구가 급속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속으로 회전하는 뇌전구 주변에는 진공 현상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몸 안에서 쉴 새 없이 내리치던 뇌전이 그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하룬의 의지와 결합하여 고속으로 회전하는 뇌전구에 빨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룬은 자신을 잊을 정도로 그 과정에 몰입했다.
치지지직!
시퍼런 뇌전은 끊임없이 어퍼 오션의 뇌전구로 빨려 들어갔다. 뇌전구의 색이 시퍼렇게 변해 가고 조금씩 크기가 커졌지만 하룬은 오직 뇌전을 흡수하겠다는 의지만을 세운채 의식을 어퍼 오션에 집중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은 하룬의 몸에서 조금씩 뇌전이 옅어지고 있었다. 어퍼 오션을 가득 채운 뇌전구로 인해 더 이상 뇌전을 흡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뇌전은 센트럴 오션과 마나 스토리지로 향했다.
한데 비슷한 성질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어퍼 오션과는 달리 다른 마나 오션들은 상황이 달랐다. 마나들이 뇌전에 반발해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만것이다.
'크윽! 위험하다!'
태극 문양을 이루고 있는 각 오션의 마나는 엄청난 뇌전의 힘에 그 조화가 깨지려고 했다. 하룬은 본능적으로 이 상태로 방관하면 뭔가 큰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감지했다.
지금 하룬이 감지하고 있는 마나의 상태는 액체에 가까웠다. 사실은 단순한 기운에 불과하지만 밀도를 키웠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급한 마음에 지혜의 파편에 있는 내용을 떠올린 하룬은 실망만 했다.
마나량이 중요시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마나의 밀도가 그 양보다 마법의 발현이나 그 힘에 있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론이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밀도를 증가시킨 마나의 폭발력은 극히 위험하다.
마나의 그 본질은 극세 미립자의 형태로 기존 분류에 의한 물질 상태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다만 마나를 받아들이는 자의 의지로 밀도를 최대한 높이면 액체나 기체 혹은 고체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서로 섞이지 않는 마나를 한데 쌓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다. 마나 간의 융합과 친화 그리고 반발 현사은 여전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지만 알려진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룬어를 통해 그런 현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극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질적인 성질의 마나라도 평형 상태를 유지마면 한곳에 축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형 상태가 깨지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하다. 그렇기에 이종(異種)의 마나를 융화시키거나 한곳에 쌓는 것은 기피해야 할 것이다.
필사적으로 이런 경우에 도움이 될 내용을 찾았지만 별다른 수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회, 회전밖에 없다!'
밀도를 높이다가 더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어둠의 마나와 자연의 마나는 태극 문양을 이루어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으니 이번에도 그런 요행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이번에는 의식을 분리해야만 했다. 그것도 무려 108개나 되는 마나 스토리지로 말이다. 하룬은 이를 악물었다.
요행히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지만 조심성 없는 행동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위험에 빠진 것이다.
'나눠 보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가는 자신의 몸은 물론 이 엘프의 신전이 폭발로 한 방에 날아갈 판이다. 마나의 충돌로 인한 폭발의 위력은 이미 자신도 잘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던 일로 알고 있는 하룬이다.
'돌아! 돌아라!'
처음에는 마나 오션의 마나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의식을 옮기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의식을 나눌 수도 없었다. 생각만으로 의식이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쿠르릉!
콰지직!
벌써 몇 군데는 폭발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익! 큰일이다!'
한 번 폭발이 일어나면 그 폭발은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룬은 짧은 숙고 후에 의식을 몸 전체로 넓혔다. 의식을 분리할 수 없다면 그 대상을 하나로 모으는 것밖에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몸 전체가 마나 오션이 된 것처럼 의식을 몸전체로 확장한 상태에서 강력한 의지를 부여했다. 처음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의지가 집중되지 않아서 그런지 마음먹은 대로 회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죽음 직전으로 몰린 하룬의 집중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고 포러스와의 정신 싸움 후에 높아진 그의 정신력은 서서히 마나의 움직임을 장악해 갔다. 마나 오션이 가장 먼저 그의 의지를 받아들여 회전을 시작핶고 평소에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았던 센트럴 오션의 마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폭발이 시작되려던 몇몇 마나 스토리지가 급격하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자체적으로 회전을 하며 뇌전을 받아들이고 밀도를 키우기 시작했다.
'되, 된다!'
곳곳에서 회전을 하며 뇌전을 흡수하는 마나 오션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단 몸 전체를 마나 오션으로 상정하고 의지력을 발휘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
일부 마나 스토리지는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로 회전력이 약하거나 회전 방향이 뒤바뀌는 등 혼란이 있었지만 곧 하룬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뇌전력이 기존의 두 마나와 섞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일단 폭발의 위험을 피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잠시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마나의 회전이나 뇌전의 흡수가 중지되었던 것이다.
육체를 가진 자신을 잊었다. 강력한 의지력을 행사하는 의식체가 되어 어느새 우주로 변해 버린 육체에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한다. 회전하며 뇌전을 흡수하여 점차 덩치를 키우는 마나에 의지를 부여한다.
-넌 나라는 존재에 속한다!
강력한 의지는 이미 평형 상태를 유지한 채 존재하는 마나는 물론이고 뇌전에도 각인되었고 하룬만의 것으로 변해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고비는 넘겼군!'
최소한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최악의 경우는 피했다. 더이상 유입되는 뇌전도 없었고 각 마나 오션의 마나가 안정된 상태로 변했던 것이다.
'뇌전의 마나가 테가 되어 버린것일까?'
기존의 두 마나는 태극 문양을 이루어 구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고 뇌전의 마나는 그 구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섞이기를 바라고 회전을 했지만 의외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어디.'
하룬은 의지를 일으켜 마나 오션으로 부터 한 가닥의 마나를 손가닥으로 이끌었다. 순간 손가락 끝에 작은 빛무리가 일렁이더니 오러가 만들어졌다. 자연의 마나로 만들어진 오러였다.
'그냥 자연스럽게 마나를 쓸 때는 자연의 마나가 나오는군.'
자연의 마나에는 뇌전의 마나가 전혀 섞이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에는 뇌전의 마나 차례였다. 의지를 일으키자 마나구의 테두리를 형성했던 뇌전의 마나가 마치 끈처럼 풀려 나오며 손가락을 향해 순간적으로 이동했다.
지지직!
하룬의 손가락 끝에 손가락 크기의 전격의 막대가 생성되어 있었다.
'이제는 안전하군.'
하룬은 비로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모험이 성공한 것이다. 아직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뇌전의 마나는 태극을 이루고 있는 두 마나르 보호하는 형태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새로운 힘을 얻었구나.'
비록 어퍼 오션에 뇌전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블리츠대거를 통해서만 발현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때나 뇌전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의식을 내부에서 외부로 돌린 하룬은 신상의 모습에서 위화가을 느낄 수 있었다.
'달라졌다!'
발몬 신의 이마 한가운데 이제까지 없었던 큰 보석이 생겨나 있었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제3의 눈처럼 보이는 보석은 어린아이 주먹 크기로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룬은 마치 홀린 듯 이마 사이에 튀어나온 보석을 오른손으로 살며시 쥐었다.
스르르.
보석은 녹는 것처럼 액체로 변하더니 그의 손을 통해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룬은 멍하니 그 과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현실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뭐지?'
오른손으로 흡수된 기이한 성질의 보석은 그의 팔과 어깨를 거쳐 목과 은중을 지나 이마 한가운데로 움직였다. 그러곤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릿속이 무척이나 맑고 깨끗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룬은 손으로 그 부위를 만저 보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지할 수 있었다.
'이게 마왕의 눈인가?'
누구도 확인해 줄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룬은 그렇다고 확신했다. 다만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많이 달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이다. 마왕의 눈이라고 해서 뭔가 음침하고 악기가 가득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혹시 몰라 포러스의 기억을 뒤졌지만 아쉽게도 그의 기억조각은 아직도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룬은 이제까지완 달리 신상이 완전히 빛을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빛을 발하며 신성한 오러를 뿜어내던 신상이 칙칙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생기를 잃고 죽은 것처럼 보였다.
'내게로 그 힘이 전해져서 그런 걸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였다.
쿠르르! 쿠르르!
신전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화맥이 폭발하는 구나!'
아그다왓트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이 땅을 보호하는 결계가 사라졌으니 그 활동을 시작한 것이리라. 하룬은 신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사를 했다.
'제게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란 님이 아끼시는 엘프들은 제가 꼭 구하겠습니다.'
서둘러 밖으로 나온 하룬은 땅이 마치 물결치듯 일어나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신전이 자리한 거대한 아그다왓트 나무도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땅의 요동은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이래서는 벗어나기 힘들 것 같은데.'
당혹스러웠다. 어디까지 폭발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그다왓트 숲을 넘어 화염 지대 전체가 폭발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펼쳐도 폭발 반경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그아웃을 할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럼 다음에 접속할때가 문제다. 잘못하면 용암 위에 접속할 수도 있었다. 이곳의 지형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아!'
마침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쯤이면 버처리비크들이 그가 준 순정석을 모두 흡수했을 것 같았다. 자신을 태우기는 좀 힘들겠지만 녀석들의 힘이라면 최소한 폭발하는 지역 밖에까지는 태워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노, 수니, 어디에 있니?
-친구, 우리는 푸른 숲에 있다.
다행이다. 녀석들은 이미 순정석의 마나를 모두 흡수한 것이다. 푸른 숲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녀석들의 비행 속도라면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줘야겠다.
녀석들은 아무리 먼 거리라도 자신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알았다. 기다려라, 친구!
쿠르르! 쿠르르!
기어코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폭발에 앞서 전조로 일어난 지진이다. 하룬은 신전이 자리한 거대한 아그다왓트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나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린 최초의 아그다왓트 나무인 듯 거의 100미터를 넘게 올라가자 겨우 그 꼭대기에 이르렀다.
하룬은 흔들리는 나무 위에서 미노와 수니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자칫하면 이 상태로 로그아웃을 해야 할 수도 있기에 더욱 불안했다.
다급한 하룬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하늘에 두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노, 수니, 빨리 와!
-가고 있다.
두 점은 빠르게 커지고 선명해졌다. 다급한 하룬은 그 속도가 이전에 비해 몇 배 더 빨라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마침내 시야에 미노와 수니가 들어온 하룬은 경호성을 토했다.
"헉!"
미노와 수니가 맞는 걸까? 거대한 동체를 가진 두 마리의 버처리비크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를 활짝 편 버처리비크들은 이전에 비해 몇 배는 더 커진 모습이었다.
-미노, 그사이에 이렇게 커진 거니?
-친구가 준 그것을 먹고 푹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커졌다. 고맙다!
각성이라도 한 것일까?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처럼 거대한 날개를 지는 두 버처리비크의 모습은 너무나 멋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노의 지적능력도 좀 올라간 것 같다.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편해졌다.
그사이 아래로부터 후끈한 열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땅이 갈라진 틈으로부터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해.
-내 등에 타라.
미노가 멋지게 선회를 하며 조금 아래쪽의 굵은 가지에 앉았다. 메신저 스킬로 미노의 등으로 날아내린 하룬은 푹신한 감촉과 함께 풍성한 깃털 위에 자리를 잡았다.
-간다! 꽉 잡아!
퍼득! 퍼득!
얼마나 힘이 좋은지 두 번의 날개짓만으로 하늘로 솟아오른 미노는 빠르게 고도를 올렸고 그 뒤를 수니가 따랐다.
'이 정도면 10명 이상은 타겠구나.'
미노의 등은 무척 넓었다. 편평하지는 않지만 잘만 하면 10명 이상은 충분히 탈 수 있었다.
쿠아앙! 쿠아앙!
기어코 땅에서 폭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미노의 목 너머로 내려다본 아래는 온통 불바다가 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시뻘건 용암이 터져 나왔고 숲은 화염에 휩싸였다.
그 속에서 미처 폭발 범위를 벗아나지 못했던 마수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곧 화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휴우!'
이제야 긴장이 풀렸다. 고공에 부는 바람이 세차게 그의 몸에 부딪히는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노, 아카 성으로 가자!
참 많은 것을 잃고 얻은 땅이었다.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용암지대를 내려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린 하룬의 눈이 새로운 희망으로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