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릴리언
기지는 빠르게 정상을 찾고 있었다.
전투조들은 블러드 새도우들로부터 전리품을 수거했다. 쏘우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슈트와 무기 그리고 그들이 지닌 각종 군용 물품은 연구용으로 쓸 귀한 물건들이다.
기지 식구들과 상인조들은 하룬의 지휘하에 파괴된 시설물을 보강하고 부서진 물품들을 한데 모아 버리는 한편 새로운 물건으로 교체했고 피로 얼룩진 기지를 청소했다.
쏘우의 연구조는 생산조와 함께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기지가 혼란에서 벗어나자 하룬은 아즈만이 직접 관리하는 치료실에 들렀다.
한 층을 모두 쓰고 있는 치료실은 다양한 생김새의 로봇팔들이 기민하게 움직이며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헤니를 비롯한 20명의 식구들이 아즈만을 돕고 있었다.
아즈만의 뛰어난 치료술과 각종 정밀 의료기기들로 인해 경상자들은 물론 중상자들도 적적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 머지않아 모두들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중에는 벨의 대역을 했던 생체 사이보그도 있었지만 아즈만이 남모르게 중앙 기지의 벨과 바꿔치기를 했다. 기지 식구들이 알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치료실로 이송해 온 벨을 대역의 상처 부위에 동일한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동화율대로 그 정도는 낮았다. 그래도 처음으로 심각한 상처를 받은 터라 하룬은 안심할 수 없었다.
'가만두지 않겠어!"
자신이 다쳤다면 이런 마음까지는 아니였을지 모른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벨이 전신에 자상이며 타박상을 입고 신음하는 것을 본 하룬은 이를 갈았다.
이제까지 놈들의 꼭두각시로 태어나고 산 것도 억울한데 겨우 마련한 안식처를 공격당하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동생까지 이렇게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힘이 없다 해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오빠!"
의식을 차린 벨이 자신을 부른 순간에야 차갑게 굳었던 하룬의 마음과 얼굴이 풀어졌다.
"괜찮아?"
"응! 그런데 나 정말 무서웠어."
태어나 처음 당한 생명의 위협에 벨은 두려운 얼굴로 하룬의 품에 안겼다. 목과 뺨에 남아 있는 자상의 흔적에 하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프지?"
"헤헤! 아프긴 한데 오빠가 안아 주니까 괜찮아졌어!"
이럴 때는 등을 토닥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하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처음 느꼈던 두려움을 이겨낸 벨의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하룬은 안심할 수 있었다.
"오빠가 안 왔다면 정말 죽을 뻔했어. 고마워, 오빠!"
"고맙기는."
"다음에는 절대로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지 않을 거야!"
작은 주먹을 불끈 쥔 벨이 다짐을 했다. 하룬이 가르쳐 준 수련 검식은 물론 아즈만에게 주입받은 각종 전투술을 수련해서 다음에는 한몫 단단히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시 숨을 돌린 하룬은 휴식을 위해 중앙 기지로 이동했다.
"아즈만, 놈들의 이동 경로는 확인했어?"
-네, 마스터. 적들은 땅속 100미터 깊이에 건설된 지하 도로를 통해 기지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왔어요. 분명히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래? 설마 놈들에게 드릴리언이 있단 말이야?"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최근 벨과 제가 데드 벙커에 신경을 쓰느라 주변 상황을 체크하는 일을 잊기는 했지만 분명히 얼마 전까지는 없었던 지하 도로였어요. 단기간에 지하 도로를 건설하려면 드릴리언이 필수적이에요.
드릴리언이 사라진 것이 언젠데 이렇게 느닷없이 출현하다니. 상식적으로는 믿기 힘들었지만 아즈만의 분석대로 드릴리언이 없다면 그 일은 불가능하다.
"아무튼 확인해 보면 알겠지. 그 도로를 따라가면 놈들의 근거지가 나오겠지?"
-네. 확실해요. 그 도로는 GG의 본거지와 연결되어 있을거예요.
"그렇단 말이지."
하룬은 이를 갈았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이미 미트라 조를 처리했고 비욘드에서 다크니스와 적대적인 입장을 드러낸 자신이야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죄도 없이 죽거나 다친 기지 식구들을 생각하면 머리털이 곤두섰다.
'어디 너희들도 당해 봐라!'
마침 좋은 물건이 있다. 놈들이 기지 입구를 폭파하기 위해 가져온 폭발물이라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쏘우가 만들어 놓은 것도 있을 테니 이참에 아주 박사을 내고 말리라.
"정찰 호크를 날려 지하 통로를 살펴봐."
-네, 마스터.
아즈만은 대답과 함께 영상을 띄었다. 정찰 호크들의 눈이 보내오는 영상이었다. 정찰 호크들의 눈 속에 심어진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도 주변 사물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정찰 호크들은 순식간에 기지와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직경 5미터의 원통형 구덩이 위에 도착했다.
'열려 있군!'
통로를 지키는 자는 없었다. 정찰 호크들은 아래로 뚫린 수직갱을 향해 날아내렸다. 수직갱의 벽은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벽을 바라보는 하룬의 눈매가 좁아졌다. 놈들이 어떻게 이런 구멍을 판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인력으로 한 것은 아닐 텐데. 정말 드릴리언을 보유하고 있었구나.'
그렇다고 휴먼력 초기에 건설된 것은 아닐 것이다. 지하도로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밖으로 향하는 입구까지 그때판 것이라고는 믿지 못하겠다. 하룬은 이 구멍이 분명 최근에 판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다리?'
수직갱의 한쪽 벽에는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 그것을 타고 올라온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을 보면 최근에 판 것이 틀림없다.
호크들은 순식간에 100미터 깊이로 내려갔다. 마침내 지하 통로가 드러났을 때 하룬의 눈이 커졌다.
"......저건?"
틀림없는 타이탄 워커였다. 그것도 지하 도로를 건설할 때 쓰는 드릴리언이었다. 직경이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드릴이 달린 기계가 그곳에 있었다.
-드릴리언이에요. 비록 본체에서 수동으로 조작하는 비효율적인 방식이고 동력원도 전기라서 작업 수행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타이탄 워커가 틀림없어요.
호크의 영상을 공유하고 있던 아즈만도 놀랐는지 전해 오는 파동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타이탄 워커는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타이탄 워커의 동원력인 수정석이 고갈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던 타이탄 워커의 출현에 하룬은 가슴에 납덩어리를 올려 둔 기분이었다.
유니온들도 보유하지 못한 타이탄워커를 GG가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란 것이다.
'정말 놈들의 힘은 상상하기 힘들구나.'
드릴리언 주변에는 모두 10명이 모여 있었다. 음식이라도 먹었는지 방만한 태도로 드릴리언 주변에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2명은 아까 밖엣허 보았던 GG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호크가 아무 소음도 내지 않고 그들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놈들의 대화를 도청했다.
"왜 신호가 안 오지?"
"오겠지."
"설마 일이 잘못되지는 않았겠지?"
"무슨 소리를! 우리 블러드 새도우는 조직에서도 최강의 실력을 가졌다고. 아마 저항이 심한 모양이야 기지 규모가 꽤 크다니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그런데 왜 통신이 안 돼?"
"통신이야 목표물이 지하 기지이니 그럴 수 있어. 통신 장애를 유발하는 시설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긴. 저고도 무인 비행체의 탐색에도 한동안 노출되지 않은 그럴 수도 있겠군. 어쨌거나 빨리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야 하는데."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건 나도 잘 몰라. 대장의 말로는 조만간 F구역에 큰일이 생길 예정이라 이번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면 바로 본부를 그 안쪽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그랬거든."
"그래?"
다행히 놈들은 이미 블러드 새도우가 전멸한 것을 알지 못했다.
다른 8명은 벽에 등을 대고 잠이라도 자는지 조용했지만 그중 둘이 나직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 끝날까?"
"그거야 모르지. 우리가 알 필요도 없고."
그렇게 대답을 하는 자는 황토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본부에서는 왜 이곳에서 대기를 하라는 거지? 우리 할일은 모두 다 한 것 같은데."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으응? 그게 뭔데?"
"넌 드릴리언 조작수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GG가 돌풍기지를 정리하면 우리가 기지로 진입할거야."
"기지로 진입한다고? 우리가?"
"응. 잘은 모르지만 애초에 GG측과 그렇게 협의가 된 거 같아. 그쪽은 돌풍 기지에 있는 자들을 해치우고 돌풍 기지는 우리가 활용하기로."
"아!"
"쉿! 조용히 해."
"아, 알았어."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드릴리언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GG가 아니군. 그럼 어디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드릴리언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의 세력은 HG 아니면 GPC일 것이다.
'이거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다르군. 서로 적대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협력을 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가만!'
하룬은 그들이 입은 황토색 슈트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집중했다. 황토색 슈트로 인해 포러스로부터 흡수한 기억의 조각들이 빠르게 합치면서 짧은 영상을 보여 주었다.
포러스가 기억하는 황토색에 얽힌 기억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황토색 플레이트 메일이나 황토색 로브를 걸친 자들로 다크니스에 막대한 양의 물품들을 공급했고 마나석이나 금속 괴(塊)를 받아 갔다.
포러스의 기억에 의하면 그들은 GG의 본부가 있는 트라지분지에서 꽤 자주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크니스의 조력자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상인으로 오랫동안 어둠의 장막 너머에서 얌악해 온 헤로파 상단의 인물들이라고 했다.
헤로파 상단은 건국 초기에 태동하여 전 대륙에 걸쳐 지하경제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들은 인신매매와 환락 산업은 물론이고 무기, 마약, 장물의 거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골든 배틀에도 관계가 있었다.
한마디로 돈이라면 영혼까지 팔 정도로 돈에 환장한 놈들인 것이다. 포러스조차 고개를 내두를 '인간말종'들로, 놈들이 다크니스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크니스 측에서 마나석을 비롯한 각종 보석들을 받고 무기류를 포함한 보급품을 제공했다.
분지를 드나들던 헤로파 상단의 호위대는 다크니스의 흑기사들이나 흑마법사들에게도 꿇리지 않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포러스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분지에 출입하는 헤로파 상단의 인물 상당수가 이방인이라는 점이었다. 상인들은 물론이고 호위대에도 이방인들이 다수 존재했던 것이다.
하룬은 포러스의 기억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추론해 냈다.
'그들은 틀림없이 휴먼 가드다! 그리고 휴먼 가드가 헤로파 상단을 장악했구나!'
틀림없었다. 현실에서도 각종 자원과 기업 들을 통해 유니온들의 경제를 암중에 장악한 휴먼 가드는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비욘드에서 어둠의 상인 혹은 전쟁상인으로 알려진 헤로파 상단을 장악한 것이다.
하룬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벨린은 휴먼 가드에서 소외된 것일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마츠루트 요새에 들러 그것도 확인해 봐야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혹이 하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혹시 GG와 HG가 손을 잡은 건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렇게 두 무리가 같이 있는 것이나 대화 그리고 포러스의 기억을 참조하니 적대적이라고 알려진 두 무리가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단순히 돈 때문에 손을 잡은 건지는 모르지만 두 무리가 은밀하게 야합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두 무리의 적대 관계를 이용하려던 하룬으로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일인 것이다.
'두 무리가 힘을 합한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해야 해!'
서둘러야만 한다. 마음을 정한 하룬은 돌풍 기지로 이동해서 은밀하게 대산을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대장님?"
"큰일을 겪은 후라 대원들이 쉬어야 하겠지만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
"뭐든지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대산은 하룬의 은밀한 태도를 보고 긴장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사이보그 대원들만 집합시켜서 완전무장을 하고 날 따라와라. 새벽이 오기 전에 우리 기지를 침략한 자들의 본거지를 소탕할 것이다."
비록 기를 사용하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전투 지식을 주입받고 훈련을 받은 상태로 태어난 사이보그 대원들이라면 큰 피해 없이 놈들을 상대할 수 있다.
잠입과 정찰 능력과 입자건을 다루는 능력만 놓고 보면 다른 대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역량을 가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맥없이 놈들에게 당한 것이 억울했던 대산이 눈을 부릅떴다.
대산이 물러간 후 쏘우를 호출했다.
"무슨 일이오, 대장?"
눈이 쑥 들어가고 짙은 다크서클이 드러난 얼굴을 보니 마음고생은 물론이고 기지 복구를 인해 고된 업무량을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님, 기지 내에 폭약이 있습니까?"
"폭약? C4와 C16이라면 만들어 놓은 것이 좀 있긴 한데, 왜 그러시오?"
"이곳 상황이 적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복수라는 말에 쏘우의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그럼, 오늘 밤에?"
"네. 마침 놈들이 이곳 주변까지 이동해 온 지하 통로가 있으니 그걸 통해서 역으로 침투할 생각입니다."
"알겠소, 대장. 내 당장 폭약을 가지고 오리다."
흥분한 얼굴로 연구실로 달려간 쏘우는 파동 리모콘들과 그것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C4와C16 폭약 수십 킬로그램을 가지고 왔다.
"이거 1그램이면 반경 3미터 이내에 있는 물체는 산산조각으로 만들 수 있소. 놈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게 만들어 주시오."
"걱정 마십시오. 아마 내일 유니온은 난리가 날 겁니다."
"흐흐흐! 벌써 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네."
성공한 것도 아닌데 쏘우는 감격한 얼굴로 눈물까지 흘렸다.
"폭약을 좀 더 만들어 두십시오. 앞으로 쓸 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알겠소, 대장. 안 그래도 벨 참모가 폭약을 포함해서 각종 무기류를 최대한 많이 생산하라고 했었소. 폭약의 재고도 충분하고 얼마 전 기지로 들어온 아우터들이 가져온 재료들까지 있으니 문제없소."
"아! 그리고 이번 일은 형님과 저만 아는 일로 해 두시지요. 기지 식구들이 걱정할까 두렵습니다."
"알겠소."
쏘우는 다크서클에도 불구하고 만면에 희색을 띠며 연구실로 돌아갔다.
대산이 데리고 온 대원의 숫자는 30명이었다. 제작 과정에서 아즈만으로부터 이미 각종 무기술이나 전투 기술을 습득한 터라 따로 수련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총기류를 이용한 전투는 익숙한 것이었다.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반가운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오빠!
아리였다.
-아리!
-벨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큰일이 날 뻔했다면서요.
-큰일은 뭐.
-아즈만이 그러는데 캡슐 안에 있는 오빠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많이 걱정했대요. 기지 사정도 급박했지만 오빠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서 기지에 신경을 못 썼나 봐요. 하도 위험해서 강제로 접속을 종료시키려고 했는데 잘못하다가는 더 큰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 마음을 졸였나 봐요.
아마 죽을 위기를 겪었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동화율이 높으니 캡슐 안에 놓인 그의 상태도 죽기 직전까지 갔을것이다.
-그래?
'아즈만이 마음을 졸였다? 아즈만도 감정을 느끼는 건가?'
전설로 남은 세 에인션트 컴퓨터를 제외하면 현존하는 컴퓨터 중 최고의 사양을 가진 인공지능 컴퓨터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감정을 가졌다면 이미 컴퓨터라기보다는 초자아체로 봐야만 한다.
-연략을 받고는 복원 과정을 멈추고 기지로 출발을 하려는데 오빠가 캡슐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대기하고 있었어요. 타이탄 워커를 복원하는 과정이 중요해서 멈출 수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돕지 못해서.....,
-아니야, 내가 있는데 뭘 그런데 복원은 어떻게 됐어?
-호호호! 다 됐어요. 드릴리언 2기와 타워리언 1기 그리고 워커 4기를 완성했어요. 쏠저는 아직이에요.
-정말 큰일을 해냈구나!
하룬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제 타이탄 워커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타이탄 워커만 있으면 새로운 유니온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타이탄 워커는 단순히 건설 쪽에만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군사용으로도 엄청난 효용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야?
-중앙 기지의 격납고에 도착했어요.
-마침 잘됐네. 드릴리언 1기만 끌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무슨 일인데요?
-복수를 해야지.
-좋은 생각이에요. 적들은 우리가 쳐들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을 거예요.
-그전에 미리 처리할 놈들이 있어. 블러드 새도우가 나온지하 통로에 대기하고 있는 놈들을 먼저 처리해야 해. 우리가 지하로 내려가서 놈들을 처리하기는 힘드니까 아리와 대원들이 처리해 주었으면 좋겠어.
하룬은 기지 인근의 지하에 대기하고 있는 적들과 그 위치를 알려 주었다.
-호호호. 문제 없어요. 제가 복원한 드릴리언은 저소음에 극미 진동으로 운용이 가능하니 위에서 저들의 신경을 조금만 분산시켜 주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좋아. 그럼 정확히 30분 후에 작전을 개시할게.
하룬은 아즈만을 통해 아리에게 놈들의 좌표를 전해 주었다.
어둠을 이용해서 목표를 향해 빠르게 이동한 하룬과 대산의 사이보그 대원들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구덩이 주변에 서 잠시 대기를 하다가 시간에 맞추어 작전을 개시했다.
"이게 웬 구멍이지?"
"그러게. 안에 뭔가 있나?"
하룬 일행이 구덩이 주변에서 웅성거리자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극도로 긴장했다. 구덩이 주변에 설치한 카메라와 연결된 작은 모니터를 통해 주위의 광경이 들어왔는데 나타난 자들이 입은 슈트의 디자인이나 색깔 그리고 무장 상태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우리 쪽은 아닌데."
작전을 성공리에 끝내고 귀환하기만을 기다리던 자신들의 동료가 아니라 처음 보는 이들의 출현에 지하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바짝 긴장하며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저들은 누구요?"
황토색 슈트를 착용한 한 인물이 블러드 새도우 대원에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확실한 것은 우리 대원이 아니라는거요."
"혹시 작전이 실패한 것은 아니요?"
"그럴 리가 없소. 블러드 새도우는 우리 조직에서 최강의 실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부대요."
블러드 새도우 대원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지만 내심 불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모니터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걱정하던 일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 사다리가 있습니다."
"그래? 누가 한 번 내려가 봐."
"알겠습니다."
누군가 사다리에 발을 걸치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터엉! 터엉!
금속 사다리에서 흘러나오는 단속적인 소리에 지하의 분위기는 빠르게 경색되었다.
"어쩔 셈이오?"
"대기하다가 제압합시다. 놈들은 겨우 셋에 불과합니다. 아마 파견을 나갔다가 기지로 귀환하는 놈들일 것이오."
"알았소."
분명 모니터에 들어온 인영은 셋에 불과했다. GG의 블러드 새도우 대원의 말대로 철수를 고려할 사안은 아닌 것이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이다. 굳이 지하 도로의 존재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모두들 무기를 쥐고 수직으로 뚫린 천장 주변에 은신한 채 대기를 하던 와중에 1명이 소리를 질렀다.
"벽에서 진동이 느껴져! 누군가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어!"
그는 우연히 벽에 귀를 대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일이 생기고 말았다.
푸욱!
그들에게서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드릴리언 특유의 거대한 드릴이 바닥에서 솟아난 것이다.
"뭐, 뭐야?"
자신들이 보유한 직경 5미터짜리 드릴과 외형은 같았다. 드릴 부분은 곧 천정을 뚫고 사라졌다. 그리고 모습을 보인것은 본체의 조종석이었다.
발광 장치가 달린 조종석의 문이 열리는 모습을 모두들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GG 측이나HG 측 모두 미리 들은 바는 없지만 적일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들이 알기론 타이탄 워커를 보유한 것은HG가 유일했던 것이다.
"이상해! 이쪽으로 파견된 드릴리언은 우리가 유일하다고 들었는데......"
1명이 그렇게 혼잣말을 하는 사이 조종석 문이 완전히 열리고 그 안에서 5명이 걸어 나왔다. 선두에 있는 인물은 여자인 듯 아름다운 라인의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큰 키에 볼륨 있는 몸매의 여성이 오른손에 잡고 있던 물건을 들어올렸다.
"누구......"
상대의 정체를 물으려던HG의 조장이 비명을 질렀다.
퓨웅! 퓨웅!
강한 파공성과 함께 입자탄이 날아와 그의 가슴에 박혔던 것이다.
"적이닷!"
나타난 상대가 적이란 사실을 확인한 순간 사람들은 기민하게 엄폐물을 찾아 달렸지만 아리와 사이보그 대원들이 쏘는 입자탄보다 더 빠를 수는 없었다.
"아악!"
"크윽!"
일반 입자탄의 몇 배에 이르는 강력한 위력에 튼튼한 방호력을 자랑하는 슈트는 무력하게 뚫리고 말았다.
'슈트를 뚫는 입자탄이라니!'
그들은 죽어 가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죽은 이들은 쏘우가 최근에 개발한 파워입자건의 위력을 처음으로 경험한 대상이 되었다.
파워입자건은 탄의 파괴력은 물론 입자가속 시간이 기존의 입자건에 비해 열 배는 더 빨라졌다.
-오빠, 다 해치웠어요.
-오케이!
아리의 보고를 들은 하룬은 대원들과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통로에 도착한 하룬은 자신의 품으로 뛰어드는 아리를 힘주어 안았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태가사남매를 비롯해서 뒤따라온 사이보그 대원 13명이 주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빠는 괜찮은 거죠?"
"그럼."
"걱정했어요."
노심초사를 했던 흔적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아리의 울먹거리는 말에 하룬은 가슴이 따듯해졌다. 누군가 자신으 걱정해 준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벨은요? 대역을 썼다지만 동화율이 높아서 아즈만이 걱정을 했다는데....."
"좀 다치긴 했지만 괜찮아. 외상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벨이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는 아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타이탄 워커가 나타난 거지? 이미 모두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어?"
하룬이 그녀 뒤로 보이는 드릴리언을 보며 물었다.
"호호호! 저건 완벽한 드릴리언이 아니에요. 잠시 살펴본 결과 드릴 부분은 예전 부품을 썼지만 동력원이 전기라서 여러모로 위험한 기계였어요.
아마 지진 등의 사유로 무너진 지하 통로를 수리하기 위해 폐기된 타이탄 워커의 부품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든 것 같아요."
"그래?"
"네. 제가 복원한 드릴리언의 경우는 드릴의 회전에 따라 발생하는 마찰열을 이용해서 가장자리로 물러나는 흙이나 돌을 녹여 외벽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비해 이 드릴리언의 경우는 그런 기느이 부좃해서 따로 장치를 달아서 부산물을 계속 처리를 해야 해서 작업 시간이 많이 걸려요. 또한 이걸로 만든 통로 역시 안전하지 못해서 약한 충격에도 무너져내려요."
"우리 거는 괜찮은 거지?"
"그럼요. 저들은 수정석의 에너지가 모두 소모되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서 폐기 처리를 했지만 사실 수정석의 에너지는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충전이 되거든요.
폐기장에서 찾은 수천 개의 수정석들의 에너지 보충율은 평균 30퍼센트에 달해 위성으로 찾은 수정 광산을 개발하지 않아도 충분히 쓸수 있어요."
"그거 잘됐네."
타이탄 워커를 복원한 것만 해도 큰 공인데 동력원까지 확보했다니 정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아리가 정말 큰일을 했어!"
"호호! 오빠에게 칭찬을 들으니까 정말 좋은데요."
아리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그윽한 눈길로 하룬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것은 사랑을 확인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놈들의 기지나 본거지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네. 그럼요."
"그럼 가자! 이번 기회에 우리에게 도발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보여 주자고."
아리 일행을 합해 50명에 육박하는 돌풍 용병대는 태범이 조종하는 드릴리언을 앞세운 채 적들이 타고 온 궤도 차량을 이용해서 유니온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