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이놈!"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하룬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대한 벌판에 서 있었는데 앞에서 키가 10미텅데 달하는 거대한 생명체가 자신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룬 앞의 대기가 그 고함에 마치 해일처럼 일어나 그의몸을 강타했다.
퍼억! 털썩!
"크윽!"
거대한 음파에 직격당한 하룬은 전신이 부서지는 격통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 모질게 떨어졌다.
전신의 뼈가 모두 부러진 것 같았다. 갈비뼈들은 모두 부러져 폐와 심장을 찌른 듯 숨도 쉴 수 없었고 온몸의 구멍을 통해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고통 속에서도 하룬의 눈은 거대한 생명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넌?"
분명히 포러스였다. 염소수염과 찢어진 눈, 해골과 같은 얼굴은 그대로인데 그 몸은 엄청나게 커져 머리가 하늘에 닿을 듯했다.
근육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피부는 단단한 각질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안광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기가 넘쳤다.
'여긴 어디지?'
뜬금없이 나타난 거인도 그렇고 자신이 왜 이런 생경한 곳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은 분명히 빨려 나갔던 마나를 다시 빨아들이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감히 내가 하는 일에 방해를 해?"
"쿨럭! 넌 누구냐?"
하룬은 끊어진 내장을 피와 함께 토하며 물었다.
분명히 사악한 흑마법사 포러스가 맞는 것 같은데 지금의 모습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엄과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마왕이 현세(現世)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알 필요 없다! 벌레 같은 놈! 죽어랏!"
어느새 거인이 된 포러스의 손에는 거대한 흑색 창이 들려 있었는데 그 창이 하룬을 향해 날아왔다.
퍼억!
하룬의 몸통은 거대한 흑색 창에 꿰뚫려 버리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그의 몸은 창에 꿰뚫린 채 1미터 높이에 떠 날아가 버렸다.
"크윽!"
통째로 꿰뚫리는 감각은 정말로 충격적이었고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현실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생생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머리통을 잘라 주지!"
어디서 생긴 것인지 거대한 검을 쥔 포러스는 잔혹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뎅강!
자신의 목이 잘리는 소리가 너무나 선명했다. 그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푸앗!
머리통이 떨어져 나간 그의 목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가 눈에 들어왔다.
'내 몸속에 저렇게 많은 피가 있었나?'
고통은 생생한데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머리가 떨어져 죽어 가는 순간에도 그렇게 실없는 생각이나 떠올리다니 말이다.
죽는 순간이 되면 살아왔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더니 말짱 거짓말에 불과했나 보다.
'이렇게 죽다니!'
너무나 허무했다. 기껏 빨려 나가는 마나의 흐름을 역류시켰는데 한순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이렇게 죽고 마는 것이다.
하룬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크크크! 그래, 그래야지."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포러스의 음침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크! 영혼이 벌써 소멸되면 곤란하지. 페론 놈이 한 말을 들으니까 쓸 만한 배경을 가진 놈 같은데 이왕이면 놈의 기억까지 흡수해야지.그럼 내가 이제 이방인이 되는건가? 흐흐흐! 소울 어시밀레이션!(영혼 동화)"
기이한 느낌이다. 분명히 머리통이 떨어져 죽은 것이 확실한데 뇌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뭔가 자신의 것을 상대방이 빼가는 느낌이다. 그중에는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벨과 아리의 기억도 있었다.
죽더라도 소중한 그녀들의 기억은 뺏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돼!"
하룬의 입에서 벼락과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빼 가려는 포러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네놈의 머리통을 부수고 말겠어!'
자신의 상태도 의식하지 못하고 분노를 불태우는 하룬이다.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 머리통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하룬의 두 손이 포러스의 머리통을 붙잡고 사정없이 힘을 가했다.
"크흒! 아아악!"
죽었다고 생각했던 하룬의 반격이 너무 의외였을까? 아니면 방심을 했던 것일까?
머리가 떨어져 나간 하룬의 몸은 포러스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포러스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지만 눈에서 분노의 화염을 발산하는 하룬의 의지를 부여받은 몸통의 거대한 두손이 가하는 압력에 눈알이 빠져나오고 두개골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휘리릭!
살아 있는 것처럼 날아올라 몸통과 결합한 하룬의 머리에서는 세 개의 큰 뿔이 솟아 나오고 붉은 안광이 활화산처럼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하룬의 전신을 짙은 회색 기운이 감싸고 있었고 포러스의 몸에서는 붉은 안개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사......러.......주오."
포러스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하룬에게 뭔가 말을 했지만 그는 오직 포러스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의에 휩싸여있는 상황이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꽈직!
결국 두 손의 압력에 견디지 못한 포러스의 머리통이 부서지고 말았다.
기어코 맞대어진 하룬의 손바닥 사이로 누런 뇌수와 붉고 진득한 피 그리고 부서진 뼈가 흘러내렸다.
"벨과 아리의 기억을 훔치려고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광기가 폭발한 하룬은 그 뇌수를 먹기 시작했다.
스르르!
죽은 포러스의 육신이 안개로 변하더니 하룬의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하룬은 어느 순간 피와 뇌수로 더러워졌던 자신의 손이 깨끗한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보니 포러스의 사체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믿기지가 않아 사방을 둘러본 하룬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뭐지?'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머리통이 떨어졌던 자신의 몸은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목을 몇 번 움직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하룬의 눈빛이 갑자기 강렬해졌다.
자신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기억들이 갑자기 떠올랐던것이다.
수많은 마법의 원리와 그 발현 방법, 벽에 발광석이 박힌 거대한 실험실의 풍경, 고문과 실험을 당해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는 인간과 몬스터, 겁간당한 후 혀를 물어 자살한 처녀 등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영상들이 떠오른 순간 하룬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고 말았다.
한 인간이 살아온 이력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가는데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자신이 살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 자신이 살았으면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학지 못할 테니 그것은 아닐것이다.
'포러스의 기억이다!'
그랬다.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포러스가 말한 대로 산악 부족과 외지인의 혼혈로 태어나 힘겹게 살다가 타키닌의 던전을 발견해서 흑마법사의 길을 걸어온 삶의 여정과 기억이었다.
그중에는 다크니스와의 만남과 그들이 구해온 마왕의 파편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혹시 이 현상이 영혼 장악과 영혼 동화라는 마법 때문에?'
두 마법을 떠올리자 그 내용이 너무나 상세하게 그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상대의 영혼을 장악하고 기억과 영혼력을 흡수해서 육신을 차지하는 마법이라고?'
실로 엄청난 마법이었다. 이 마법을 사용하면 불사(不死)는 아닐지라도 노쇠해진 육체를 버리고 새 육신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상대방의 기억은 자신에게 동화되어 버리지만 말이다.
포러스는 영혼 치환처럼 상대방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이 자리한 육체를 바꾸는 마법도 알고 있었지만 그건 실마리만 잡았을 뿐이다.
'그럼 이곳은 내 의식의 깊은 곳이란 말인가?'
번쩍!
하룬의 눈이 떠졌다. 어느 틈에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로브와 마법 지팡이를 남긴 포러스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 주변에 흑마법진을 펼치고 있었던 5명의 자리에는 갖가지 아이템들이 남아 있었고 미스릴과 피로 그린 문양은 사라져 있었다.
어느새 마법진은 사라진 것이다. 방어구는 보이지 않았지만 암기 벨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손이 닿는 위치에 있는 벨트를 집어 착용을 하려던 하룬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공간을 열어 속옷과 방어구를 꺼내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공간을 열 수가 없다.
'설마 여전히 마나를 쓸 수 없는 건가?'
그러고 보니 마나 봉인구가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 하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윽!"
절로 고통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 하룬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온몸이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그대로 움직일 수있으니 다행이다.
암기 벨트에서 투명 비수를 꺼낸 하룬은 마나 봉인구의 연결 부위를 내리쳤다.
까앙!
불꽃과 함께 연결 부위가 파였다. 절삭력에 있어서는 투명비수가 가장 강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씨름을 한 끝에 겨우 마나 봉인구를 풀어 낸 하룬은 일단 급한 대로 암기 벨트를 맨 다음 실내에 남은 아이템들을 챙겨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중에는 하룬이 정신 마법에 당해서 내놓았을 에리피안의 목걸이도 있었다.
하룬은 포러스가 남긴 로브를 입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으윽!'
한참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던 하룬은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감고 말았다.
고문으로 인해 시간의 경과도 알지 못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지금은 환한 대낮이었다.
잠시 눈물을 흘리던 하룬이 겨우 사물을 식별했을 때 전면에서 고함들이 터져 나왔다.
"하룬이다!"
"사고가 생겼다!"
그를 알아본 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간신히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하룬은 자신이 지구라트가 보이는 한 건물 앞에 서 있으며 지구라트로부터 수백 명이 넘는 다크니스의 무리가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는 걸 알수 있었다.
그 모습에 놀라 움직이려던 하룬은 격렬한 신음성을 터트렸다.
"으윽!"
갑자기 마나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간 멈추어 있었던 마나는 물론 흑마법진을 통해 빨아들인 마나 그리고 포러스와 다섯 마법사로부터 흡수한 마나들이 일제히 준동한 것이다.
놀란 하룬이 부지불식중에 마나 플로를 운용하려다가 멈추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흑기사들과 마법이 코앞으로 닥쳐왔던 것이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안타깝다. 아무리 많은 마나라도 마나 플로를 통해 순화시키고 회전을 통해 밀도를 높이면 모두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몸 안에 마나를 축적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판단이 들었다.
'쏟아 내자!'
이왕 쏟아 낼 거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다크니스의 무리를 공격하는 방법으로 헤야만 했다.
하룬은 비수 두 자루를 꺼내 들고 마나를 양손으로 이끌었다.
미친놈처럼 발광을 하는 마나는 고삐가 풀린 말처럼 날뛰고 있었지만 간신히 원래 자신이 품고 있었던 마나가 그의 의지에 반응해 움직이자 다른 마나들도 그 뒤를 따랐다.
장심(掌心)에 이른 마나는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룬은 자신이 축적한 마나가 회전을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그에 휩쓸려 함께 회전하는 것이다.
각기 성질이 상이한 마나는 하나로 녹아들지 않고 층을 이루어 쌓이기 시작했다.
수십 겹으로 쌓인 마나는 불안정해서 밀도가 높아지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험한 상태였다.
주르르.
이를 악물고 양손에 모이는 마나의 밀도를 높이던 하룬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이 바로 얼굴을 격타하려는 순간 후끈한 열기를 느낀 하룬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두 가지 성질의 마나를 비수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번쩍!
순간적으로 비수에서 찬란한 빛이 나더니 이내 전방을 향해 폭발적으로 터져 나갔다.
고오오오!
예상한 폭발음은 없었다. 단지 하룬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빛이 눈 깜짝할 사이에 폭발했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반향은 너무나 컸다. 후폭풍에 휘말려 건물의 벽에 모질게 부딪힌 하룬은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과 함께 다시 앞으로 튕겨 나와 지구라트 앞의 바닥을 굴렀다.
"으윽!"
잠시 정신을 잃었던 하룬은 바닥에 모질게 뒷머리를 박는 고통으로 눈을 떴다.
하늘이 붉게 보였다. 억제할 수 없는 마나의 폭출로 인해 눈 주변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나간 것이다.
쿨럭! 쿨럭!
하룬은 격렬한 기침과 함께 시꺼멓게 죽은피를 토했다.
한참 동안 피를 게워 내던 하룬은 겨우 정신이 들자 힘겹게 눈물로 범벅이 된 눈꺼풀을 열어 붉은색으로 가득한 전방을 보았다.
"다들 정신 차렸! 저놈을 죽여야 해!"
누군가 고함을 지른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지구라트 각층 난간에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리가 붉은 영상으로 보였다.
"공, 공격해!"
"아아악!"
또다시 마나가 준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마나 로드는 모두 찢겨 나갔고 뼈와 근육은 엉망으로 변했다.
수용 한도를 초과해서 마나를 흡수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에 마나를 쏟아 낸 후유증인지는 모르겠지만 극력한 통증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하룬은 고통에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마나를 양손 바닥에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는 것은 통증이 아니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같이 가자!'
참을 수 없는 분노는 근육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끊어지는 통증도 잊게 만들었다.
왜 자신이 이 꼴이 되어야 하는가?
'도대체 왜? 왜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하냐, 이 슬로크 같은 놈들아!'
하룬의 의식은 오로지 장심으로 쏠렸다. 몇 번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전에는 폭발하고 말았을 밀도를 한참 초과했지만 여전히 마나는 고속 회전을 하며 쌓이고 있었다.
퍼억!
매직 애로우가 몸을 강타했다.
풀썩.
하룬의 몸이 뒤로 밀렸지만 다행히 마나는 흩어지지 않았다.
"야아악!"
하룬은 아을 쓰며 두 손에 쌓인 마나를 비수 안으로 몰아 넣었다.
번쩍!
붉었던 눈앞이 순간 환해졌다. 너무 밝은 빛 때문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고오오!
이번에도 역시 폭발음은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등짝이 부서지는 격통과 함께 머릿속까지 붉게 변했다.
"죽여야 한다!"
"죽여라!"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진득한 살의가 다시 느껴졌다.
하룬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의 끈을 단단하게 그러쥐고 힘껏 당겼다.
쿨럭! 쿨럭!
격렬한 기침과 함께 내장이 통째로 입 밖으로 빠져나가는것 같았지만 억지로 눈을 떴다.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눈을 떴지만 세상은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시력을 잃은 모양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룬은 상체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고개를 조금 든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팔과 손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크크! 날 죽이겠다고! 날 죽이려면 너희들도 죽을 생각을 해야지!"
포러스를 상대로 일으켰던 광기가 다시 폭발했다.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게임에서마저 놈들의 실험체가 되었다. 이렇게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다. 할 수 있다면 1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고 싶었다.
두 번이나 익스플로전 소드를 펼쳤지만 아직도 몸속에는 들끓는 마나로 가득하다.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하룬은 극한의 살의에 휩싸여 사방을 향해 익스플로전 소드를 쏟아 냈다. 후폭풍에 수십 미터를 날아가 엉망이 된 몸으로 다시 자세를 잡고 마나를 쏟아 냈다.
고오오! 고오오!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빛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세상을 발기발기 찢어 버릴 무시무시한 살의뿐.
시간이 멈추었다.
쿨럭! 쿨럭!
몇 번 격렬하게 기침을 한 하룬은 눈꺼풀을 드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눈을 떴다.
눈앞은 여전히 붉게 변한 상태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이상하다.
눈앞이 빙빙 돌더니 뒤통수에 약한 충격과 함께 옆으로 젖힌 고개로 인해 붉은 땅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땅에는 자신이 토한 죽은 핏덩이도 있었다.
'죽는 건가?'
핏덩이 속에는 끊어지고 부서진 장기 파편도 있었다.
쿨럭!
이번에는 선홍색 피다. 아무래도 혈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심장도 문제가 있는지 불규칙한 박동이 들렸다.
빠각!
땅을 짚고 일어서 보려고 손바닥에 힘을 주었지만 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팔이 부러진 건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감각이 정상인 곳이 없었다. 그나마 정상인 곳은 눈을 비롯한 머리 부위밖에 없는 것 같다.
통증이 제대로 느껴지는 곳이 불과 몇 곳에 불과했다. 아프다는 감각은 역설적이게도 살아 있다는 반증이건만 그 감각도 죽어 간다.
하룬은 몸을 일으킬 생각을 포기하고 그 상태로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폭주를 한 걸까?'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희미해졌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몸을 뺏은 것처럼 몽롱했다. 의식을 몸 안을 돌렸다.
'허어! 완전히 엉망이 되었구나!'
몸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안 좋았다. 뼈는 모조리 부서진 것 같았고 근육은 찢기고 끊어졌다.
관절은 어긋나 있었고 혈관도 수없이 터져 아직도 필사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에도 불구하고 십분의 일도 머리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나 로드는 더 좋지 않았다. 이제는 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터져 나간 것이다.
마나 오션은 텅 비어 있었다. 마나 스토리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몸 안에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다니는 마나가 가득했다.
대신 그 마나들이 쉴 새 없이 충돌하며 몸을 최악으로 망가뜨리고 있었다. 제어하지 못하는 마나는 폭발물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생각이 맞는지 성질이 다른 마나들은 서로 부딪히며 연쇄적으로 폭발을 하거나 혹은 비슷한 성질끼리 모여 더 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현실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모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인지할수 있었다.
'그런데 놈들이 왜 공격을 안 하지?'
처음에 자신을 공격했던 자들도 그렇고 지구라트 위에 있던 자들의 추가적인 공격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뭐, 그들이 공격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죽어 가고 있지만 말이다.
'설마 내공격에 그들이 다 죽은 걸까?'
하룬의 붉은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많은 자들이 다 죽었다고?'
하룬은 아까 보았던 지구라트 앞쪽 크기를 떠올렸다. 적어도 지름이 500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자신이 본것이 사실이라면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강력한 폭발에 의해 한순간에 가루가 되고 만 것이리라.
쿨럭!
또다시 피를 토했다. 그 속에서 부서진 내장이 또 보였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근육들은 파열이 되어는지 움직이지 않았고 뼈는 지지대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서서히 의식이 흐릿해졌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래도 별 볼 일 없던 보더러로서 끝내는 삶이 아니다. 나름 엄청난 돈도 벌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처도 만들어 주었다.
세계를 암중에서 조종하는 거대 세력에 멋지게 한 방을 먹이기도 했고 휴먼들을 망가뜨리던 마약 생산 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지구와 이 세계에 대한 비밀도 알았다. 페론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 얽힌 비밀도 알았다.
'큭큭! 내가 가이아의 사도라고? 웃기지 마라. 난 그런 특혜 따위는 받지 않은 몸이야!'
하룬은 결국 페론의 말을 부정했다. 놈의 말이 사실일지 몰라도 자신은 페론이 말하는 가이아의 사도일 리가 없다.
녀석들의 실험체로 태어난 주제에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적으로 등장까지 했으니 그 정도면 제대로 산 셈이다.
'바보 같은 놈!'
하룬은 자신을 자책핶다. 무식하게 보너스 스텟을 행운에 모두 투자해서 기연(奇緣)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얻은 것은 좋았지만 글로리 가이아가 암중으로 자신의 정체와 기지를 파악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혼자 잘난 것처럼 살아왔던 삶이 우스웠다.
'기지는 벨과 아리가 잘 지키겠지?'
미리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도 했고 위기 상황에 대비하라고 했으니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벨과 아리라면 아즈만의 능력을 빌려 잘 대처할 것이다.
'아리가 보고 싶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해 보고 싶었던 것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다 해 보는 건대.'
아쉬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새로 기지 식구가 된 인공수정체들에 대한 대비만 잘했더라도 기지가 위험에 빠지고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비욘드에 빠져 현실을 등한시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이 녀석들은 어떻게 됐을까?'
다섯 정령이 보고 싶었다. 마나 동결로 인해 정령들을 소환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마법을 몰랐다. 최소한 대비는 했어야만 했었다.
'가만!'
흐릿했던 하룬의 눈에서 정광이 솟았다. 자신은 이제 마나봉인구를 벗어 버린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싸가지! 나이아! 라이피! 위신느! 피닉스!
하룬은 다섯 정령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런 주인이 다 죽어 가잖아!
싸가지의 말이 들리자 하룬이 힘겹게 웃었다. 다행히 그 강력한 폭발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아공간은 아무 이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네 정령은 아무런 ㄷ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룬은 불안했지만 죽어 가는 그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으찻!
싸가지는 하룬의 머리를 들고 그 밑에 자신의 다리르 밀어 넣었다. 힘이 빠지고 있었지만 귀여운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해 왔던 싸가지. 말투와 행동이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이렇게 귀여운 열 살남짓의 어린애로 변한 다음에는 그런 행동마저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런 싸가지가 지금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무서워! 주인이 마나 동결진 안에 빠진 순간 밖으로 나갈수가 없어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이 번쩍하더니 내가 있는 아공간까지 엄청난 충격파가 전해졌어. 소멸되는 줄 알았다고!
아공간은 이곳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룬을 매개로 연결이 되어 있었기에 그런 충격파가 전해진것 같았다.
싸가지가 소멸을 걱정할 정도로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동안 고마웠다!
-왜 그래, 주인? 꼭 죽으 사람처럼. 주인은 이방인이라서 다시 부활할 수 있잖아.
하룬은 순진한 녀석의 말에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겨루처럼 동화율을 조정했을텐데 나만은 아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과 계속 리얼 모드로 이곳의 삶을 살아왔기에 미처 그 점을 간과하고 만 것이다.
-그럼 죽는 거야? 그럼 우리도 모두 소멸된다고!
녀속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마도....., 몸이 엉망이야. 어떤 걸로도 치료를 할.....
힘겹게 대답을 하던 하룬의 눈에서 신광(神光)이 번득였다.
-싸가지, 아공간에서 엘프의 눈물을 찾아봐.
-엘프의 눈물? 그거라면 잘 알지.
싸가지의 상체가 투명해지더니 이내 다시 모습을 보였다.아마도 상체만 아공간에 넣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귀여운 외양을 가지고 있는 싸가지라도 몸의 절반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다시 나타난 싸가지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내게 먹여 줘.
-알았어, 주인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싸가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싸가지는 하룬의 입술을 약간 벌리고 엘프의 눈물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최상급을 넘어선 포션이니 한 방울이라도 새지 않게 조심해야만 했다. 엘프의 눈물은 굳이 목젖을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엘프의 눈물은 그 조그만 병안에 들어 있었던 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금방 사지의 말단 부위까지 퍼져 나갔다.
-이제 괜찮아 질거야. 넌 일단 아공간으로 돌아가.
-알았어, 주인.
녀석이 사라지며 다시 땅에 머리가 닿는 것을 느낀 직후 하룬은 정신을 잃었다.
꽈앙!
거대한 마나의 폭발과 함께 급기야 간신히 뛰고 있던 하룬의 심장이 터졌고 전신으로 향하는 혈액의 공급이 완전하게 끊겼던 것이다.
엘프의 눈물은 하룬의 몸 안에서 기화(氣化)되었다. 금세 하룬의 몸 전체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기화된 엘프의 눈물은 먼저 하룬의 몸을 완벽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다. 뼈는 부서져 가루가 되었고 살과 내장은 녹아 버렸다.
하룬의 몸은 어느새 물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암기 벨트는 모습을 바꾸어 그 물 덩어리가 그대로 보였다.
물 덩어리는 외관이 변한 암기 벨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신기하게도 인간의 크기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쩌어엉!
강력한 빛이 폭발했다. 빛에 휩싸인 수막이 급속하게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빛을 흡수하는 수막에 굴곡이 생기기 시작했다.
머리와 팔 그리고 다리가 생기고 얼굴에 이목구비가 만들어졌다.
단단하고 질긴 피부 위로 털들이 자라고 한층 작아진 문신들이 모습을 보였다. 뼈가 몸을 형성하고 근육들이 제자리에 나타났다.
그 속에 심장과 장기들이 생겨나 활동하기 시작했다.
세곳의 마나 오션과 108개의 마나 스토리지가 엄청난 마나를 품은 채 생겨나고 탄탄대로로 변한 마나 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룬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신비로운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적막한 곳에서 그렇게 하룬은 다시 태어났다.
원래라면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그쳐야 할 엘프의 눈물은 하룬의 몸에 깃든 거대한 에너지와 결합하여 각성의 순간에 겪는 바디체인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을 재성생(再生性)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