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위기 (215/278)

                                                          [[위기]]

하룬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페론의 시선 때문에 정신이 분산되어 꽤 힘들게 노력을 하고서야 겨우 또렷한 아리의 영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리! 

마침내 그의 의념은 단단하게 세워졌고 뇌에서는 강한 파동이 발생했다.

-오빠!

당장 아리가 그를 불렀는데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듯 뜻하지 않은 뇌파 통신에 들뜬 감정만이 느껴졌다.

-아리, 어디야?

-지금 유니온 S구역 지하의 폐기장이에요. 타이탄 워커를 복원하러 왔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동요가 심해요. 무슨 일이에요?

언제나 하룬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아리는 하룬의 뇌파에서 전해지는 불안한 감정을 읽었다.

-빨리 피해야 해!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글로리 가이아가 우리 기지를 알고 있어.

-네에?

-곧 놈들이 공격을 할 거야.

거기까지 의념을 전했을 때 페론의 눈빛이 변했다. 하룬의 태도가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마나 봉인구를 차고 몸까지 구속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그가 보는 하룬은 무척이나 위험한 존재였다. 베타테스터도 아닌데 벌써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도들의 성취를 한참 뛰어넘었으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하룬은 페론의 시선에 집중력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의념을 보냈다.

-빨리 벨과 합류해! 방어하기 힘들 것 같으면 아예 기지를 폐쇄하고 중앙 기지로 옮기거나 도망쳐!

-오빠! 오빠!

아리가 그를 간절하게 불렀지만 그의 몸 상태나 보안상 더이상 뇌파를 전하는 것은 무리였다.

"슬슬 마무리하도록 하자. 이 정도면 나도 꽤 친절하게 널 대했으니까."

페론은 이제까지의 친근한 표정을 지우고 차가운 어조로 대답을 종용했다.

"이제 결정을 할 시간이다!"

페론은 하룬이 정보를 말할 거라고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멋진 세상에서 신으로 군림할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는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하룬은 성년이 될 때까지 무능력자로 힘겹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난 너희들의 제안을...... 거절하겠다!"

"......뭐? 뭐라고?"

페론은 하룬의 대답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하룬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비밀들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난 내가 보호해야 할 동료들과 가족들이 있다. 나 혼자 잘먹고 잘 사는 건 의미가 없어. 모두가 함께할 수 없다면……."

하룬은 죽음을 예감했다.

'벨과 아리 그리고 아즈만의 능력이라면 기지와 기지 식구들을 잘 보살펴 줄 거야. 나 역시 이곳에서 죽는다고 현실에서도 반드시 죽는다고 확신할 수 없어. 이렇게 되면 벨과 아리 그리고 아즈만의 능력을 믿어 보는 수밖에.'

동화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벨제라트 화산 지대에 들어서서 계속 마수들을 상대하느라고 잊고 있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제대로 동화율을 체크하지 못한 것이 무척 불안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룬은 죽음을 각오했다.

-벨아!

-언니!

벨은 금방 대답을 해 왔다, 하룬의 뇌파 통신 때문에 혼비백산한 아리는 벨의 목소리에 별다른 기색이 없자 안심을 했다.

-방금 오빠가 뇌파를 통해 위험을 알려 왔어.

-무슨 위험이지? 히잉! 나한테는 안 하고.

아리는 벨이 이런 상황에서도 가벼운 질투를 하는 것에 내심 웃었다.

-글로리 가이아가 곧 돌풍 기지를 공격할 거라고 준비하라고 했어.

-글로리 가이아가? 위성이나 정찰 호크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다. 자장풍이 부는 경우가 아니면 정찰호크나 위성이 의심스러운 움직임을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하룬이 실없는 소리를 하자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강한 집중이 필요한 뇌파 통신을 해 올 리도 없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해가와 거래를 한 것이 빌미가 된 것같아.

아리는 하룬이 다급하게 통신을 끊은 것이 조금 걱정이었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벨을 통해 기지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뫼비우스가 헤니를 통해 그런 위험을 먼저 알려왔던 것이다.

-알았어. 그때 이야기한 대로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 언니.

-그럼 난 안 가 봐도 되는 거야?

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즈만까지 있으니 걱정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지의 방어력은 어지간한 규모가 아니면 철별이었다.

-헤헤! 언니는 타이탄 워커를 복원하는 데만 신경 쓰라고, 그게 앞으로 우리의 최고 무기가 될 테니까. 복원은 어떻게 돼가?

-이제 약 60% 정도야. 사이보그 대원들은 다 데리고 왔는데도 손이 모자라.

-쏘우 오빠와 연구 대원들을 모조리 끌고 갔으면 벌써 끝냈을 텐데.

-그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이 건은 오빠와 우리 셋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거야.

-하긴. 위험한 기술을 함부로 공개할 수는 없지.

-아무튼 조심해서 처리해.

-알았어. 언니.

벨은 아리와의 뇌파 통신을 마치고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중앙 기지는 격리시키자.'

중앙 기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이다. 정말 중요한 시설과 재료 들은 이미 중앙 기지로 모두 옮겨 둔 상황이다.

설사 호수 옆에 있는 돌풍 기지가 파괴되더라도 중앙 기지만 건재하면 된다. 거기에 아리가 계획대로 타이탄 워커만 완벽하게 복원한다면 며칠이면 다시 복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돌풍 기지로 건나가니 회의실에 돌풍 기지의 조장급 인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요, 벨 참모?"

"급한 정보가 들어왔어요."

급한 정보라는 말에 참석자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이전에 이미 이런 건에 대해 회의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글로리 가이아가 우리 돌풍 기지를 노린다는 정보에요."

"정찰 결과는 어때, 벨?"

쏘우는 대뜸 정찰 결과를 물어왔다.

"그게 이상해요. 주변 30킬로미터까지 아무런 징후가 없어요."

"그래? 정보의 신뢰 수준은 어떤데?"

"대장님이 직접 알려 왔어요."

"으음!"

참석자들은 하룬이 직접 이 정보를 알려 왔다는 말에 늦추었던 긴장의 끈을 조였다. 그들이 아는 하룬은 절대로 실없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허엄! 그럼 일단 플랜 원을 가동하도록 하지."

"그렇게 합시다.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했으니."

기지 소장의 제안에 황 박사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쏘우는 반대였다.

"하지만 위성이나 호크는 아무런 징후도 포착하지 못했는데 기지 식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좀……."

플랜 원은 이런 경우를 위해 기존에 생활을 하던 공간은 물론 지하 10층에서 15층까지 폐쇄를 하고 파괴를 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과 각종 필요한 물건은 전부 지하 16층 이하에 있는 피난 시설로 옮겨야만 한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30킬로미터 밖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설령 바이크를 타고 오더라도 1시간의 여유는 있습니다."

철웅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약 도보라면 그 시간은 몇 배로 더 걸릴 것이다.

"저 역시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설령 특수군 수백 명이 처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방어 시설은 충분히 기지를 방어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전투조의 무력이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로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힘을 주어 의견을 개신했다. 대산 조장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얼굴이었다. 세 전투조장들은 그간에 이루어진 수련의 결과에 고무되어 있었다.

그건 쏘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만들거나 개량한 무기에 상당한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벨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 역시 정찰결과를 토대로 플랜 원을 가동하는 것이 별로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장과 황 박사의 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하룬이 아리를 통해 위험을 알려 왔는데 무시를 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하룬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때 헤니가 그녀의 난처함을 해결해 주었다.

"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플랜 원을 가동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대장은 우리가 신속하게 방어 태세를 취할 거라고 믿고 정보를 보내 왔다고 생각해요. 설사 잘못된 정보로 판명이 나더라도 우리기지를 이끄는 분은 대장이니 그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봐요."

그녀의 말에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 자리에는 없지만 돌풍 기지의 대장은 하룬이다. 그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그럴 만한 근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설사 플랜 원이 헛된 일이라고 판명이 나더라도 일단 대장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좋아요. 그럼 플랜 원을 가동하도록 하세요."

"네!"

참석자들은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저마다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흩어졌다.

곧 비상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기지 식구들이 연구동과 수련동으로 몰려들었다. 미리 연구 시설과 캡슐을 옮길 인원을 편성해 두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맡은 시설물을 해제하고 지하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벨은 플랜 원의 진행 사항을 점검하기 위해 소장실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각 층에 설치된 카메라들을 통해 전해진 영상들이 곧 소장실의 입구를 제외한 새 벽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황 박사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먼저 데리고 피난했다. 아이들은 무슨 놀이라도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시시덕거렸지만 어른들의 심각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금방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돌풍 기지의 웬만한 시설과 공작기계 들은 분리와 해체가 쉽도록 설치되어 있었다. 이미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1차로 훈련도 했던 터라 사람들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차분하게 자신이 맡은 시설물이나 기계 혹은 설비를 분해해서 엘리베이터를 통해 더 깊은 지하로 옮기기 시작했다.

벨은 영상을 확인하면서 정찰 호크를 다시 날렸다. 이제 총 10마리로 늘어난 정찰 호크들은 각각 정해진 방향으로 날아가면서 실시간으로 영상 정보를 보내올 것이다.

작업을 가장 먼저 마친 조는 전투조였다. 그들이 옮길 것은 쏘우가 개조한 특수 캡슐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들은 그 일을 마치자마자 무기를 수령하고 기지의 입구를 비롯해서 각 층에 대기하며 적을 막을 준비를 하게 된다.

똑똑!

누군가 노크를 하더니 바로 문을 열었다.

벨은 소장실로 들어오는 3명의 대원들에게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이곳에 전투대원이 들어올 일은 없었던 것이다. 3명은 모두 한 달 이내에 기지에 들어온 인공수정체 출신들로 기본기가 뛰어나 전투조에 영입된 대원들이었다.

벨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각자 맡은 곳에 가야 할 전투 조원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에요?"

부드럽기는 했지만 차가운 벨의 말에 이마에는 작은별모양의 문신을 새긴 대원이 야릇한 웃음을 머금었다.

"벨 참모, 우리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할 일이라는 말에 혹시 전투조의 조장들이 자신을 호위할 대원을 파견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 벨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마인 대원이군요. 옆에 있는 분들은 해서와 바랑 대원이네요."

한 번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이름까지 외운 것에 놀란 듯 3명은 서로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 할 일이라는 게 뭐지요?"

"뭐긴. 네년을 사로잡으려고 그러지!"

중앙에 서 있던 마인의 말이 신호인 듯 양옆에 있던 해서와 바랑이 그녀를 향해 덮쳐 왔다.

벨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무식하게 덮쳐드는 대원들에게 잡히지는 않았다. 벨은 의자를 집어 왼쪽을 노리고 달려드는 해서에게 던졌다. 해서는 별명이 혼혈 하르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엄청난 거구였다.

빠악!

단단한 목재로 만든 의자였지만 해서의 주먹에 부서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벨이 바랑 쪽으로 두 걸음 이동한 상태였다.

"타앗!"

벨의 다리가 옆으로 접혔다가 쭉 펴지더니 발끝이 바랑의 턱을 강타했다.

"컥!"

바랑은 비명과 함께 달려오던 힘을 못 이겨 해서 쪽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바랑의 눈은 뇌로 직접 올라간 충격으로 인해 게게 풀려 있었다.

"어!"

의자를 주먹으로 부수느라고 잠시 멈춘 해서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바랑을 보고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그를 받으려고 했다.

벨은 그런 바랑을 따라 두 번 바닥을 박차고는 위로 뛰어 올랐다.

막 바랑의 몸을 받아 냈던 해서는 바랑의 몸이 무너지자 황급히 힘을 주어 그를 끌어 올리려다가 순간적으로 바랑의 어깨 너머에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부츠 끝을 피할 수 없었다.

빠악!

"커억!"

벨의 부츠 끝은 해서의 코를 짓뭉개고 말았다. 순식간에 해서의 코뼈는 부러져 내려앉았고 구멍에서는 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쌍년이!"

격분한 해서가 바랑의 몸을 밀치고 벌떡 일어났지만 벨은 빙그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에게 발뒤측을 날리고 있었다.

빡!

이번에는 얼굴이 제대로 맞았다. 거구인 해서의 몸이 거의 1미터는 옆으로 날아갔다. 제대로 정타가 들어갔지만 해서의 몸이 튼튼해서인지 아니면 벨의 공격력이 약해서인지 해서는 금방 다시 일어났다.

"퉤!"

해서는 엉망이 된 입을 벌려 침을 밷었다. 맞은 입안이 엉망이 되었는지 침 속에는 피와 함께 이빨 몇 개와 살점까지 섞여 있었다.

"이런 X 같은 년이!"

해서는 옷 속에서 비수를 꺼냈다. 곰 같은 덩치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비수지만 벨의 얼굴은 금방 파랗게 변했다. 튜브 속에서 분화를 할 때 아즈만이 프로그래밍한 격투술은 배웠고 최근에 하룬이 가르쳐 준 수련 검식을 익혀 남다른 체력은 물론 단전을 생성한 터라 어느 정도의 격투는 가능했지만 무기는 차원이 달랐다.

"갈기갈지 찢어주마!"

해서는 비수의 날을 피범벅이 된 입에 대고 피를 묻혔다.

"그만해라. 애가 겁을 먹었잖아."

돌아보니 마인이 개량 입자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것을 본 벨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글로리 가이아냐?"

"흐흐흐. 잘 아네. 정식으로 소개하지. 우린 비밀에 가려진 글로리 가이아의 블러드 섀도우라고 해."

벨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급조한 정보망을 너무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구로 받아들이기 전에 기지에 들어온 모든 인공수정체들의 정신을 검색할 걸그랬다. 생각은 있었는데 하는 일이 워낙 많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 얌전하게 의자에 앉아."

벨은 마인이 원하는 대로 의자에 앉아 놈들에게 단단히 결박을 당했고 이네 그녀의 모습은 기지 내에 있는 멀티 화면에 나타났다.

-벨 참모는 우리 손에 있다. 그녀를 살리고 싶으면 당장 행동을 멈추고 광장으로 집합해라. 1명이라도 빠지면 이 귀겹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얼굴과 몸에 이 비수로 문신을 새겨 주겠다.

마인의 협박은 영상과 함께 기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저런!"

기지 곳곳에 포진했던 전투조의 대원들은 물론 한창 짐을 옮기던 기지 식구들이 놀라 행동을 멈추었다.

"저놈들은 전투조의 마인과 해서 그리고 바랑인데."

전투대원들은 금방 그들을 알아보았다. 최근 한 달에서 열흘 사이에 기지에 합류한 인공수정체 출신 대원들이었던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로수가 눈에 불을 뿜으며 카메라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글로리 가이아의 블러드 섀도우 요원들이다. 너희들은 이미 우리에 의해 포위되었으니 순순히 항복해라.

"미친 새끼들!"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마인은 징그럽게 웃었다.

'지하통로? 그렇구나!'

정찰 호크가 전해온 영상을 쳐다본 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검은 슈트의 전사들이 기지밖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세 방향이었다.

벨은 자신들도 지하 통로를 이용하면서 적들 역시 지하 통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글로리 가이아는 오랜 세월 동안 유니온 밖에서 특별한 활동을 하던 자들이니 따로 지하 도로를 건설했을 수도 있다.

"흐흐흐! 우리 동료들이 오고 있구나. 이제 이곳도 끝장이다."

마인의 음침한 웃음소리를 듣는 벨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으로 인해 기지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아즈만. 기지를 폐쇄해요.

-네가 위험해. 저자들은 진짜로 널 죽일 수도 있어. 살인을 많이 해 본 도살자들이야.

-알아요. 하짐나 나 때운에 수백 명이 같이 죽을 수는 없어요.

-알았다.

아즈만은 벨의 결심을 만류하더니 벨의 말이 맞는다고 여겼는지 유일한 기지의 입구인 1층 문을 폐쇄했다.

그그그긍.

지상에 거대한 바위로 위장한 발전 시설들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1층으로 내려앉았고 입구는 삼층으로 된 강철 문이 모두 닫혔다.

"크크크!"

마인은 기지가 폐쇄된 것을 알고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광기 어린 눈빛에 벨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그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죽고 싶단 말이군.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꺄아악!"

마인은 의자 뒤로 묶인 벨의 어깨 한쪽을 모질게 비틀었다. 뿌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벨의 한쪽 팔이 어께에서 빠져 나왔고 벨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들 행동 개시해!"

마인이 카메라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벨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다른 자들이 더 있는 게 분명했다.

-아악!

-뭐야? 너 왜그래? 커억!

곧 소장실 가득 띄워 놓은 홀로그램 창에는 미친놈처럼 같은 식구들에게 비수를 날리거나 쇠막대 등으로 공격하는 자들이 날뛰는 모습이 이곳저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곧 기지는 혼란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같은 식구였던 자들이 돌변해서 아무에게나 폭행을 가하거나 칼을 휘두르자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패닉에 빠져 질서를 잃고 이리저리 도망을 치고 있었다.

'내 실수야!'

벨은 이럴 경우를 예상하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안팎으로 이렇게 적들이 날뛰고 사람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미리 짜 놓았던 플랜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전투조라도 제대로 움직인다면 좋겠는데.'

벨의 눈은 로수가 이끄는 전투 1조가 모인 지하 1층으로 향했다.

돌풍 기지의 전투 1조 대원들은 입구 쪽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미리 짜놓은 계획에 의하면 로수 조원들이 기지의 입구를 지키기로 되어 있었지만 배신자들로 인해 지상 1층과 지하 1층에서 치열한 정투를 벌이게 되었다.

연구조와 주민 들을 지원하기로 한 다른 두 개 조의 상황도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쓩! 쓩! 쓩!

"제기랄! 고개를 내밀 수도 없어!"

감마는 1층 복도에 포진하고 있는 적의 입자건으로 인해 고전을 하고 있었다.

로수를 비롯한 30명의 대원들은 달랑 전투 슈트만 입은 상태에서 무기도 없이 지하 2층의 소장실에서 억류되어 있는 벨을 구하기 위해 계단을 타고 내려간 상태였다. 

"무기도 없이 벨 참모를 어떻게 구할 거지?"

"몸으로라도 해야지."

예비가 얼굴을 굳혔다. 그는 벨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겨우 슈트만 착용한 상태로 무기도 없이 간 로수 조장과 일행이 걱정스러웠지만 자신들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전투 슈트를 착용한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입자건에 사지 몇 군데는 가루로 변하고 말았을 것이다.

"저 새끼들도 블러드 섀도우겠지?

바닥에 엎드린 예비의 말에 감마는 아무 대답도 없이 자신의 슈트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큰 희생이 나기 전에 배신자들이 밝혀져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우리는 전투도 해 보지 못하고 박살이 날뻔했어."

백업을 맡은 사로의 말이 맞았다.

"나인이와 레이스가 큰 역활을 했어."

예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들어온 신입들 중 총 14명이 배신자였다. 전투조는 6명이나 되었다.

벨 참모가 그들중 3명에게 포로가 된 후 전투조와 합류한 나인과 레이스는 나머지 배신자들을 지목했던 것이다.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이었나 봐."

"그러게. 정말 대단했어. 그래서 따로 수련을 했나 봐. 그 2명은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오러를 볼 수 있다고 하잖아. 적발된 놈들은 그 오러가 시꺼먼 색깔이라더라."

예비와 사로는 아까 전의 상활을 떠올리며 아직도 모골이 송연했다.

입구를 수비하는 역활을 맡은 로수의 조원들은 그 시간에 게임에 접속해 있었다. 강제 접속 종료에 이어 경보 소리까지 들리자 놀라 캡슐 밖으로 나와 미리 지정된 집결 장소인 1층 복도 중앙에 모였다. 

다들 무슨일인지 궁금해하며 불안감에 웅성거리는 사이에 3명이 바퀴 달린 테이블에 가득 앃인 정투 슈트를 가지고 왔다. 대원들은 차례대로 슈트를 받아 착용하기 시작했다.

"비상 상황이다! 무기가 오면 미리 정해진 자리로 이동해서 맡은 역활을 수행하면 된다!"

그때만 해도 실제 상황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소시를 지르는 로수조자 큰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빨리 와!"

부조장인 사에는 무긱에서 입자건들을 가지고 오는 신 조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밀고 오는 테이블에는 입자건과 빔 소드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때였다.

나인과 레이스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녀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벨 참모가 기지에 침입한 글로리 가이아에게 포로가 되었어요!"

나인의 외침을 들은 조원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접속을 해제하고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기지 전체로 방영된 화면과 소리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이야? 잠깐만!"

"방금 각 방에 있는 홀로비전으로 자신들이 블러드 섀도우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벨 참모를 억류하고 있는 화면이 나왔어요."

"……."

조원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그들은 최근에 기지에 들어온 인공수정체들로 3초에 소속되어 비상 상황에서 기지 주민의 호위를 맡은 대원들이었어요."

"그럼 놈들이 인공수정체란 말이야?"

"네."

로수는 큰 충격이 받은 얼굴로 나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공수정체 출신 대원들의 충격은 더욱더 컸다. 잘못하면 블러드 섀도우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도, 도대체 어떤 놈들이?"

한 인공수정체 대원이 이를 악물고 눈에서 불을 뿜었다. 이제야 정말 사람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잘못하면 이곳에 온 인공수정체 출신들이 모두 쫒거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때 레이스가 무기를 가지고 오는 대원들을 쳐다보더니 나인을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그들을 본 나인의 눈빛이 심하게 떨렸다.

"조장. 잠시만요."

나인은 조장인 로수와 부조장인 사예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로수와 사예의 얼굴이 확 변하며 무기를 가지고 온 세 신입 대원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놈들이 눈치를 챘다. 다 죽여 버려!"

놈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된 것을 눈치로 알아챈 것이다. 한쪽으로 물러나 나란히 선 세놈이 갑작이 입자건의 총구를 조원들에게 돌린 것이다.

"방(防)!"

레이스가 소리를 지르자 대원들의 앞에 불투명한 공기의 막이 생겼다. 그때 세 놈의 입자건이 연속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팅! 팅! 팅! 팅! 팅!

마치 커튼처럼 조원들의 앞을 막은 불투명한 막이 입자탄에 의해 금방 엉망으로 찢겨 나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조원들은 그 3명이 블러드 섀도우들이며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사실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피하거나 공격 자세를 잡은 대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의외의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다.

놈들의 1차 사격은 막아 냈지만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사격을 바라보는 대원들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훈련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멈춰엇!"

나인의 머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입에서 찢어지는 것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자 방아쇠를 당기려던 세 배신자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피햇!"

대원들은 그제야 외부로 통하는 입구 쪽으로 도망을 칠 수 있었다. 입구에는 두께가 엄청난 강철 문이 삼중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강철 문 뒤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고 특별한 처리를 해 두었기 때문에 그 뒤쪽에 숨는다면 개량된 입자건이라도 뚫지 못할 것이다.

"방(防)! 공(攻)!"

한 번에 상당한 기력을 소비했는지 창백해진 나인이 로수에 의해 질질 끌려가다시피 도망을 치는 순간에 레이스가 잠시의 간격을 둔 채 소리를 질렀다.

팅! 팅! 팅!

입자탄이 다시 생성된 불투명한 막에 부딪히며 소멸되고 막이 깨지기가 무섭게 그 파편이 세 놈을 향해 날아갔다.

"산개!"

세놈은 빠른 몸놀림으로 자신들을 향해 쇄도해 오는 막의 파편을 피했다.

팍! 파악! 틱!

공기로 이루어진 막의 파편은 쌓아 올린 입자건과 벽 그리고 바닥과 충돌했지만 약간의 흔적만 남길 정도로 위력은 크지 않았다.

"빌어먹을! 속았다!"

이제야 속은 것을 알고 세 놈이 다시 공격할 준비를 했짐나 그때는 이미 나머지 대원들은 강철 문 뒤로 피한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 쌓인 입자건을 난사해 봤지만 특수 처리가 된 강철 문은 깊은 상처를 입긴 했지만 생각대로 뚫리거나 부숴지지 않았다.

상대가 비록 숫자가 많다지만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상태라 무기 테이블을 밀면서 문 쪽으로 접근했던 블러드 섀도우의 세 요원은 느닷없이 날아온 굵은 쇠구슬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쓩!

눈알 크기의 쇠구슬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한지 높이 쌓였던 입자건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테이블로 막았기 망정이지 직접 몸을 받았다면 슈트를 입었어도 심하게 부상당했을 것이다.

하룬을 따라 암기술을 수련한 감마의 쇠구슬이었다. 한시도 쇠구슬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을 정도로 수련을 생활화했던 감마는 검술이 익스퍼트 경지에 오른 실력자여서 쇠구슬에도 어느 정도 기가 실려 있었다.

퍽!

쇠구슬은 단단한 벽을 깊이 파고들었다. 타격에 강한 슈트를 착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속의 뼈와 살은 상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위력임을 알 수 있었던 블러드 섀도우 요원들은 전진을 멈추었다.

그들은 테이블에 몸을 숨긴 채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입자건을 난사했다.

"실망이군."

페론은 하룬을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벨과 아리 그리고 기지 식구들이 아니었다면 그간에 쌓아 왔던 그들과의 정이 아니었다면, 하룬 역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미안하다."

하룬은 진심으로 페론에게 사과를 했다. 그가 보여 준 호의는 정말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그런 정도였던 것이다.

"아니."

뜻밖에도 페론은 고개를 저었다. 실망은 했지만 화가 난 얼굴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부럽다는 시선으로 하룬을 보고 있었다.

"초월자들의 유전자를 가진 우리 사도들은 감정의 폭이 극히 좁지. 다른 자들처럼 술이나 마약 혹은 섹스에도 무덤덤하고 기쁨과 슬플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도 거의 느끼지 못하지."

'역시 그런 건가?'

아까도 잠시 한 말이짐나 하룬은 페론의 말을 통해 초월자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 때문에 자신의 감정 폭이 좁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난 한 번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 목숨을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다른 모든 사도들이 다 그래. 그런데 넌 정말 특이하군. 어떤 면에서는 내가 무척 부럽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궁금해."

페론이 뭐가 더 말을 하려는 순간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막이 흔들렸다.

우우웅.

"제길! 이제 시간이 없다."

아마 밖에 있던 두 사람이 들어오려고 하거나 페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났으리라.

"난 날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네가 보여 준 호의는 절대 잊지 않으마."

"자식. 정말 멋있네.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면 넌 사도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정은 나와 같은 사도들로서는 애초에 가지지 못한 것이라 이해할 수도 없짐나 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잘 견뎌라. 포러스 늙은이의 정신 마법은 정말 강하니까. 어떤 상황이든 이 세상의 주인이 너라는 걸 잊지 마라. 네가 죽으면 이 세상도 없는 거니까. 살아 있다면 어쨌거나 그 세상의 주인은 너다. 난 이제 본부로 돌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보여 준 또 하나의 호의는 피에 절은 마나 봉인구를 느슨하게 풀어 준 것이다. 어차피 자의로 풀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기에 하룬에게 별 도운은 되지 않았지만 팔목과 발목을 파고드는 강침은 그만큼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막 하룬에게서 몸을 돌리려던 페론은 복잡한 눈빛으로 하룬을 쳐다보았다.

"휴우! 정말 특이한 형제구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생각해 봐라. 난 너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

마나 봉인구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 준 행동이 마지막까지 하룬의 마음을 돌리려던 의도적인 수작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 봤으면서도 끈끈한 유대감을 느낀 것일까?

"네게도 진짜 중요한 것들이 있다면 나와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럴지도. 어쨌건 내가 한 이야기는 비밀이다."

페론은 하룬의 의사를 정말 존중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건 염려하지 마라. 이야기를 해도 믿지도 않을 테니까. 또 이야기를 할 기회도 없을 거야."

"후후후! 해도 상관 없다. 내 스승인 포러스는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이제는 마탑에도 전혀 신경을 안 쓰니까. 다른 놈들이 들으면 그건 재수 없이 죽는 지름길이지."

페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이 펼친 음파 차단 마법을 해제했다.

"역시 실패했군."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포러스라는 늙은 흑마법사였다. 그가 나이켄을 비롯한 마법사 5명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기에 내가 말했잔아. 이렇게 혼자 힘으로 성공한 놈들은 심지가 굳어 절대 설득할 수 없다고. 어쨌거나 내게는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포러스의 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과 광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전 다시 본부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게. 정보는 내가 책임지고 뽑아서 통신으로 전해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페론은 방을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하룬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부러움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놈을 풀어라."

나이켄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포러스가 뭘 하려는지 알고있는 듯 둘은 하룬에게 향했고 나머지 셋은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고문 도구를 밖으로 치웠다.

포러스는 품에서 몇 가지 물품을 꺼내 비어 버린 실내 중앙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역오망성의 문양을 가진 흑마법진이었다.

"정신 마법인가?"

나이켄과 브리앙에 의해 마법진의 중앙에 누운 하룬이 물었다.

페론의 마지막 호의로 인해 마나 봉인구의 구속 상태가 조금 느슨해지자 마나 오션의 마나는 몰라도 마수의 힘은 극히 미약하짐나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시간을 끌려는 의도였다.

"잘 아는군. 정신 마법의 후유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 왜 굳이 이런 방법까지 쓰게 만드는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야."

마법사는 아니지만 지혜의 파편을 소유한 하룬이다. 정신 마법의 후유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뭐, 어차피 죽을 텐데 그래도 꿈틀거리다가 죽는 게 나다운 것 같아서 말이지."

"크크크! 네 말도 일리는 있군. 그게 인간의 본성이지. 애초부터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한다고 해서 살려 둘 생각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하룬은 포러스의 말에 페론을 떠올렸다.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말했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그의 말이 사실이었을까?'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다. 믿기에는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자리들을 잡아라."

포러스의 말에 다섯 마법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각자 오망성의 꼭짓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포러스는 그들에게 직접 마법을 가르쳤거나 그개 아니라면 다크니스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위치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대로 마법진이 발동할 때까지 잠시 시간이 있으니 대화라도 해 볼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니 다섯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메모라이징을 한 것이 아니었는지 꽤 긴 주문을 빠르게 영창하고 있었다.

"죽기 전에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알려주지."

포러스는 크게 인심을 쓴다는 눈빛으로 하룬을 내려다 보았다.

"당신은 누구지?"

"흐흐. 나?"

다른 이가 없다는 걸 뻔히 알며서도 묻는 것을 보면 실없는 성격이거나 그게 아니면 대화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 당신 말이야."

"어린놈이 말하는 태도하고는. 에잉!"

마치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서 쉬이 얘기해 줄 수 없다는것 같은 태도에 하룬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포러스의 눈빛이 당장 차갑게 빛나고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익숙한 마나를 가지고 있군. 단순한 흑마법사는 아닌 것 같은 데 혹시 산악 부족 출신인가?"

포러스는 뭐라고 소리를 칠 기세를 보였다가 하룬의 말을 듣더니 주름진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렸다.

"어떻게 알았지?"

"광포한 마수의 힘이 몸에서 꿈틀거리고 있어. 흑마법사특유의 다크 마나와는 별개로 마수의 힘을 지니고 있는 건 데빌 산맥의 산악 부족이 유일하지."

"똑똑한 놈이군."

포러스는 이제 흥미가 동하는 표정을 지으며 하룬을 정면으로 보고 섰다.

"그런 힘을 가지고 왜 다크니스와 손을 잡은 거지?"

하룬은 포러스를 보며 그 경지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페론의 소개가 없었더라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힘없는 늙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마나를 봉인당한 상태지만 예민한 육감은 더욱 날카로워진 상태인데 마수를 대하는 것과 같은 느낌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포러스는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혹시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산악 부족의 후예들은 보통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너희들처럼 우리 산악 부족 역시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건 아나?"

"알지. 아카족의 칸으로부터 창세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놈이 혹시 타키닌이 산악 부족 출신이라는 건 이야기를 해 주었나?"

포러스의 말에 죽음을 준비하며 애써 담담한 마음을 가지려고 했던 하룬은 정말 깜짝 놀랐따. 수백 년 전에 대륙을 지옥으로 만든 타키닌이 산악 부족 출신이라니. 그야말로 눈이 뒤집힐 비밀이었다.

"특별한 피를 계승한 우리 산악 부족의 후예들 중에 극소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채 태어나지. 그중에는 마왕의 강림을 막는 타키야와 같은 초인도 있었고 라 제국의 개국에 일조한 마르쉼과 같은 정령사도 있었다. 아! 또 황제와의 악연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지워진 비도지존이라고 불렸던 영웅도 있었지."

"……."

포러스가 타키야는 물론이고 비도지존까지 산악 부족의 후예라고 말하자 하룬은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산악 부족의 조상은 원래 이계에 살다가 먼저 이곳으로 건너온 발몬 신에 의해 소환되는 대신 강인한 환경 적응력과 육체 그리고 마나와 친숙한 능력을 얻었지. 그런 능력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령과 계약을 하거나 주술을 사용할 수 있어 아주 예전에는 우리 산악 부족을 엘프나 드워프와 같은 이종족으로 여기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능력의 발현 정도는 약화되었지만 수백 년에 한번씩 특별한 존재들이 태어나 이 세계의 질서에 기여를 했지. 몇 번에 걸쳐 번성했따가 멸망한 문명이기에 우리 산악 부족은 큰 활약을했지. 물론 자신들이 이 세계의 주류라고 오판하는 인간들은 잘 모르지만 말이야."

하룬은 페론이 말해 준 현실의 비밀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놀랐다. 마치 연거푸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현실감이 희미해졌다.

그 와중에 갑자기 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피를 통해 전승되는 능력이라는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하룬은 이를 악물었다. 페론의 말에 의하면 자신 역시 그런 부류지만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런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 돼.'

어떤 사회체제를 취하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자들과 끌려가는 자들은 나오기 마련이다. 즉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계급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계급이 발생한느 것이 아니라 계급 간의 이동이 어느 정도로 유연한지에 달려 있다.

하룬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세상은 누구나 노력을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타인의 위에 군림하는 것이나 대를 이어 특별한 능력을 가지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 불공평한 일이다.

무능력자로 사회의 홀대를 받으며 비루한 삶을 살아온 하룬은 제대로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희망이 있어야 한닥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면 휴먼은 삶의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살아도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삶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그런 삶은 희망이 없다.

"나 역시 정령사이자 마법사지. 용병 마법사와 에핀족 여전사 사이의 혼혈로 태어나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을때 마수에게 어미를 잃었다. 외지인과의 혼혈을 극도로 증오하는 부족민들로부터 갖은 박해를 받으며 벌레처럼 살던 나는 아주 우연히 기연을 얻었지. 타키닌 대마법사께서 세상에 나가기전에 흑마법의 체계를 나름대로 완성시켜 정리한 마법서와 연구 시설 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던전에 들어가게 되었지. 그곳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 마법 연구에 푹 빠져 살았다."

하룬은 나이켄이 일전에 자신을 소개할 때 타키닌과 같은 학파의 제자라고 한 것이 실은 이자에게 마법을 배웠기 때문에 한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싱도 타키닌처럼 세상을 피로, 죽은 자들로 가득 채우고 싶은 건가?"

"아니. 아니야,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했는데 세상을 망칠 수는 없지."

뜻밖의 말이 나왔다.

"타키닌 조사의 경우는 미친 상태였어. 그분은 특이하게도 벽을 만난 검사들에게 잘 알려진 마경에 빠진 것이지."

마경에 대해서는 딜런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강해지려는 욕구가 과도하거나 몸 안에 축적한 막대한 마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마나는 그자의 육신은 물론 뇌를 잠식해서 더 많은 마나를 원하게 되는데 그 방법은 대게 끔찍한 살육이다.

"그분은 또 다른 산악 부족의 후예인 오츠왈드 후작이 남긴 검술까지 익혔던 거지. 그 과정에서 마경에 빠졌짐나 타키닌 조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세상에 나섰다가 세상사를 알지 못하는 탓에 시비가 붙어 몇 번 사고를 쳤고, 결국 폭주를 하게 된 거지."

"당신은 내내 던전에 있었다면서 어떻게 그걸 알았지?"

"크크크! 타키닌 조사는 세상 사람들이 아는 대로 당시 전 대륙에서 모인 마법사들과 신관들의 마지막 공격을 받고 죽은 게 아니야. 담나 마지막 전투에서 마나 고리가 다 깨진 상태로 간신히 살아났지. 사체들의 산속에 숨어 약간의 힘을 되찾은 그분은 힘겹게 던전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치셨지. 다크 문 마탑이 모든 마탑의 중심으로 우뚝 서라는 것이 그분의 유지였다."

아마 포러스가 다크니스와 손을 잡은 것은 타키닌이 남긴 유지를 따르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방인들이 아니고서는 흑마법을 익힐 자들은 세상에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산악 부족에 그런 비사가 있을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이 거기까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주문 소리가 잦아들며 방 안이 칙칙하고 무거운 기운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을텐데 아쉽구나.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그렇군."

하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이 뒤집어질 정도의 비밀을 알게 되었찜나 이제 정신 마법을 당하면 버티든 아니든 자신의 정신은 붕괴되어 백지가 되고 결국은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상적인 몸 상태라면 모르지만 그간 받은 고문으로 인해 정신력까지 약해져 있으니 상황은 최악이다.

'하지만 난 하룬이다.'

하룬은 자신이 이제껏 많은 일들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 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설령 페론이 말한 대로 초월자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간에 해 온 노력이라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깟 정신 마법. 한 번 시험해 보자.'

이를 악물고 눈의 초점을 한곳에 맞추었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

"소울 컨트롤(영혼 제어)!"

포러스의 주문과 함께 뭔가 이질적이고 불쾌한 기운이 자신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분명히 포러스의 의지를 가진 마나의 촉수였다.

마치 정령이 동화된 비수처럼 살아 움직이는 마나의 촉수는 순식간에 하룬의 뇌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크윽! 제발!'

하룬은 어퍼 오션의 마나를 움직이려고 의지를 일으켰지만 전격의 기운을 품은 마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괴적이고 폭발성을 내재한 마나의 촉수는 삽시간에 하룬의 뇌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하룬의 의지는 강력하게 반항했지만 의지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하룬의 의식은 끊어지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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