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드러나는 비밀들]]
고문이 멈춘지 꽤 시간이 지났다.
'큭! 큭! 내 꼴이 우습게 되었군.'
여전히 마나 봉인구와 벽과 연결된 쇠사슬에 구속된 상태지만 놈들의 알 수 없는 호의로 상급 포션을 먹은 하룬은 그래도 자신의 몸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이 되었다.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문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부는 다 벗겨 소금물에 절여진 상태로 이미 신경세포는 그 역활을 하지 못했다. 손톱과 발톱은 다 빠져나갔고 손발은 망치질로 인해 피에 젖은 살덩이로 변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근육들은 강제로 찢긴 상태였고 뼈의 연골은 부서져 있어 목 마래는 통증만 느낄 수 있을 뿐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쩌면 며칠 전에 척추 부분을 찌른 기다란 강철 침에 신경이 마비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어! 신수가 훤한데."
여전히 이죽거리는 얼굴로 나타난 나이켄이다.
"퉤!"
입을 별렸지만 말을 할 기력은 없었다. 적의에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피가 섞인 침을 뱉는 것이 고작이다.
"허허! 이러지 말라고. 그래도 내가 말려서 네 뼈가 가루로 변하는 걸 모면한 거야."
"크크크!"
하룬은 대답 대신 괴소를 흘렸다.
뭐 이 상태에서 뼈가 가루가 된다고 해 봐야 크게 달라질것은 없다. 아마도 견디기 힘든 고통의 순간을 보내야 할 테지만 죽는 게 빨라지는 것은 환영이다. 이 상태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곧 있으면 귀한 분들이 오실 거야. 그분들이라면 네가 감추고 있던 비밀들을 끄집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다만 그 이후에는 네 영혼이 지옥으로 가게 되겠지만."
하룬은 생생하게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도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고문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다. 아마 귀한 분들이라는 작자들은 나이켄보다 더 경지가 높은 정신 계열의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마법사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포기하라고. 나한테만 말해 줘.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쳐 준다면 널 살려 주지. 본부에서 사람이 나오기 전에 풀어 줄 수 있다고, 어때?"
순간적으로 하룬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이켄을 비롯한 흑마법사들이 펼치는 정신 계열의 마법도 간신히 저항할 수 있었다. 그간 다섯 번에 달하는 정신 마법의 후유증은 무척이나 커서 이 상태로 풀어 준다고 해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넌 살 수 있어서 좋고 나는 공을 세울 수 있어서 좋잖아. 어차피 넌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불게 되어 있어. 그러고 나서도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소멸되고 말겠지. 뭐, 네 꼬락서니로 봐서는 이 숲을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살아야 뭐든 시도할 수 있지 않겠어?"
나이켄은 붕괴되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하룬의 정신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래, 마왕의 눈을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어떻게든 살 수 있다면 마왕의 눈을 빼앗기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자신이 가진 포션을 모두 동원하고 마나 플로를 운용한다면 혹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룬의 마음은 점점 더 세차게 흔들렸다.
"좋아. 내가 조금 더 쓰지. 네 척추화 신경에 박아 넣은 강침들을 모두 빼 주도록 하지. 그리고 상급 치료 포션도 몇 병 줄 테니까 그걸로 건강을 회복해. 다른 놈들에게는 내가 죽은 걸로 할 테니까 추적도 없을 거야. 어때?"
"으으!"
하룬은 이를 갈 힘도 없어 기이한 신음만 흘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놈들은 전신의 신경에 금제를 가해 놓았던 것이다.
그때 낮으면서도 신경을 긁는 기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건 자네의 권한 밖의 일이야."
나이켄이 들어오면서 연 채로 놔두었던 문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있었다. 둘 다 나이켄이 입고 있는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하나는 겨우 성년을 넘긴 젊은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굴 가득한 주름살로 인해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늙은이였다.
"가이아에게 영광을! 존귀한 분들의 방문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이켄은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얼굴이 되어 그들의 앞에 길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는데 그 태도가 마치 왕을 대하는 병사를 연상하게만들 정도였다.
'이자들이 올 줄이야! 정말 뜻 밖이군.'
전투단 중 서열 3위인 메라크 전투단의 단주도 대단하지만 나이켄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든 것은 옆에 있는 노마법사였다. 그는 나이켄의 생각으로는 이 자리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전무한 존재였던 것이다.
"크음! 단주가 큰 공을 세웠군. 아마 나중에 큰 보상이 있을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남자의 말에 나이켄은 굽힌 허리를 일으킬 엄두도 내지 않고 그 자세로 더욱 고개를 수그렸다.
"가이아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메라크 단주님."
"내 그대를 기억해 두지. 이번 일에 대한 포상하고 별도로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게 놀러 오게나."
"감사합니다!"
나이켄은 젊은 사내의 말에 희열에 가득한 얼굴로 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하룬은 나이켄이 극경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대상을 보면서 그의 로브 앞에 새겨진 황금색 원이 세 개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이켄의 로브에는 두개의 원이 겹쳐 있었다. 새파란 나이에 다크니스에서 단주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이켄보다 더 경지가 높은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설마 7서클 마법사인가?'
그건 믿기 힘들었다. 제국이나 대륙의 마탑주들은 대개 7서클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들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은 자연계에는 희소한 흑마력 혹은 다크 마나라고 부르는 음차원의 마나를 기반으로 하기에 수련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거기에 오랜 세월 동안 마탑과 신전의 추적에 쫒기는 흑마법사들의 경우 그 수련 과정이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또한 흑마법의 위력이 백마법에 비해 한 서클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흑마법이 공존하던 시절에도 7서클에 오른 흑마법사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래. 이자가 요새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그 용병이라고? 하룬이라고 했던가?"
이번에는 늙은이가 나섰다. 금속을 긁는 듯 듣기 싫은 목소리였지만 나이켄은 아직도 허리를 굽힌 자세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탑주님. 돌풍 용병대의 대장 하룬입니다."
하룬은 탑주라는 호칭에 늙은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늙은이 역시 그런 하룬을 쳐다보았는데 무슨 눈빛이 그런지 속을 살살이 훑는 듯했다.
"흐흐흐! 흥미로운 마나를 가지고 있는 놈이군. 정령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필경 정령사렷다."
보는 것만으로 하룬이 정령사라는 것을 알아차린 늙은 마법사의 눈에 자리한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
"네, 사대 정령을 중급까지 부립니다."
나이켄은 자신이 믿는 대로 보고를 했다.
"재미있군. 게다가 마나 오션까지 있다? 마나 플로와 검술을 제대로 익힌 자로군. 전설에 나올 법한 정령검사라니! 어디서 이런 물건이 튀어나온 거지?"
마치 리치처럼 뼈에 주금이 자글자글한 가죽을 씌운 형상을 한 늙은이의 눈에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눈빛을 대한 하룬은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어느새 호기심이 사라진 늙은이의 눈빛에는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그가 감히 대항하기 힘든 지독한 살의와 흉흉함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
젊은 쪽이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하룬은 그 눈빛에 영혼을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앞이 아득하고 정신이 흐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행여 스승님의 소울 컨트롤 마법에 강하게 저항하다가 정신이 붕괴되면 안 됩니다."
"에이잉! 조금만 더 있었으면 되었을 것을."
무슨 의도를 품은 건지는 모르지만 늙은 흑마법사는 마치 다 잡은 먹이를 바라보고 입맛을 다시는 맹수처럼 느껴졌다.
'휴우!'
하룬은 어느새 몸이 서늘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방금 전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채 상대의 정신 마법에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나부터 소개하지. 난 다크니스의 메라크 특전단의 단주 페론이다. 이쪽은 내 스승님이자 우리 다크니스를 탄생시킨 다크문 마탑의 탑주이신 포러스 님이시다."
"메라크?"
그 이름은 들은 적이 있었다. 북두칠청 중 하나의 이름이다. 나이켄이 알리오츠 특전단의 단주다. 그렇다면 다크니스는 북두칠성의 이름을 따서 조직을 구성했을 것이다. 하룬은 다크니스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조직이라는 것을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페론은 아직도 허리를 숙인 상태로 있는 나이켄에게 물러나도록 손짓을 하고 포러스에게 하룬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포러스가 의자에 앉자 자신도 따라서 그 옆의 자리에 앉았는데 그 일련의 태도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것을 보니 현실에서도 노블임이 분명했다.
'이상하군.'
하룬은 상대가 다크니스의 고위급 인사라는 사실과 그에게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대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친근한 마음마져 들었다.
"네 이름은?"
"하룬이다."
이름 정도야 알려 줄 수 있다.
"후후! 하룬이라. 정민이라는 이름은 싫은가 보네."
페론의 말에 하룬은 눈을 부릅뜨고 강침이 뼈를 긁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격렬하게 떨었다.
'어떻게?'
설마 자신의 정체를 이자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까지 그가 이방인이라는 걸 알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여기 오기 전에 귀중한 정보가 입수되었지. 믿기지 않지만 비욘드의 세계에 명망을 떨치고 있는 돌풍 용병대의 하룬대장이 실은 우리와 같은 이방인이며 한동안 죽은 걸로 생각하고 있었던 인공수정체 정민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
하룬은 순간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룬뿐 아니라 나이켄도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막고 있었다.
"이름은 정민. 인공수정체 출신으로 본 글로리 가이아 소속인 슈퍼 캡슐 T-20의 소지자. 부양가정에서 가출하여 성년이 될 때까지 유니온 최하급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다가 최종적으로 무능력자로 평가되어 F구역에 배정되었으나 양부이자 슈펴 캡슐의 개발자인 청일 박사의 배려로 본 글로리 가이아의 실험체로 등록이 되었더군.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슈퍼 캡슐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정기적으로 실험체의 상활을 보고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우리 본부의 명령을 거부해서 게임 이력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포획 명령을 받은 미트라 조원들과 함께 사망한 것으로 사건 현장을 조작해서 유니온을 벗어났더군."
하룬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부인을 하기에는 사실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아아냈는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항상 다른 세력과는 그들이 상상하지 못한 사실을 꺼내 그들의 기세를 꺽어 의도한 것 이상의 결과를 끌어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그와 상반되는 경우였다.
"그럼 함께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리군. 그것도 상당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야. 얼마 전에는 코원 유니온의 해가와 거래를 하면서 휴대용 입자포까지 선보인 것을 보면 무기 생산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그랬던가? 왜 그렇게 튀는 무기까지 가지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이 GPC와의 거래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룬은 자신과 돌풍 기지에 대한 정보가 이미 이자들의 손에 넘어갔음을 확신했다.
'기지가 위험해!'
마비되었던 신경이 한꺼번에 폭주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뭐 며칠 안으로 추가 정보가 들어올 거야. 이미 한두 달 전에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서 은밀하게 인공수정체 출신들을 영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블러드 섀도우 요원들을 잠입시켰지. 아마 이제 언제라도 공작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자리를 잡았을 거야."
큰일이다. 전에 로그아웃을 했을 때 유니온 정부가 배리어 축소를 고려한다고 해서 꽤 많은 인공수정체 출신들을 기지로 들이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하룬의 눈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잡혀서 고문을 받는 동안 기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만 것이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정신 마법을 사용하면 육신은 아무리 멀쩡해도 영혼이 산산조각이 나서 소멸되고 말지."
페론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정상을 찾고 있는 하룬의 눈빛을 보았다.
'벨과 아리가 잘할 거야. 암, 그렇고말고.'
벨과 아리 그리고 아즈만의 능력을 떠올린 하룬은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룬은 페론을 향해 활활 불타오르는 뜨거운 눈빛을 던졌다.
'흐음! 심지가 굳은 자로군.'
자신의 근거지가 위험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룬은 금방 혼란한 마음을 추스른 것이다.
'믿는 거라도 있다는 건가?'
페론은 하룬이 벨과 아리 그리고 기지 식구들을 믿는 정도를 감히 어림할 수 없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이 몇 가지 있어. 그걸 말해 준다면 나이켄 단주가 한 약속을 지키도록 하지."
"…….궁금한 게 뭐지?"
"그전에 확인할 게 있어."
페론은 품속에서 스크롤을 한 장 꺼내 찢었다.
순간 휘황한 빛과 함께 하룬의 앞에서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크롤은 상대의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는 마법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 : 하룬
레벨 : 184
칭호 : 블레이져 학살자 (외33개) (흐려서 잘 안보여요)
직업 : 흐려서 안보임.ㅜ
대상자의 이름과 레벨 그리고 직업 정도만을 알 수 있는 약간의 정보만 떠올랐지만 상태창을 본 페론과 나이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호오!"
"레벨이 184?"
"역시 엄청난 인물이었군. 내 예상이 맞았어. 어떻게 이런 레벨까지 오를 수 있는 거지?"
페론의 혼잣말에 나이켄은 아직도 보고 있는 상태창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베타테스터도 아닌 게이머가 레벨이 184라니. 이건 사기야!'
비공식적인 정보이긴 했지만 베타테스터 출신인 탑 랭커들이 이제 겨우 160 레벨에 올랐을 뿐이다. 검사로 치면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고 마법사로는 갓 6서클에 오른 것이다.
"역시 내가 직접 오길 잘했군. 의심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럴 줄이야."
페론은 연방 탄성을 지르며 간단한 정보만이 담긴 상태창에서 눈을 때지 못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하도록 하지. 첫 번째, 네가 이제까지 해 온 게임 이력을 상세하게 말해 줄 것."
어떻게 해서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레벨을 184까지 올렸는지에 대해서 알면 다크니스의 전력은 급상승을 하게 될 것이다. 하룬은 고요했던 페론의 눈에 탐욕이 이글거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기지에 대한 모든 정보가 필요해."
만일 그것을 알려 준다면 기지는 단번에 박살이 나고 말것이다. 그건 죽어도 말을 해 줄 수 없는 일이다.
"세 번째, 엘프의 결계에 대한 정보를 털어 놔. 이 세 가지의 정보를 말해 준다면 살려 주지. 아니, 우리 다크니스에서도 높은 직책을 주도록 하지."
페론이 말을 마치고 하룬을 바라볼 때 옆에 앉아 있던 포러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그게 무슨 소리냐? 이놈의 몸을 내게 주……."
"탑주님!"
페론은 당황한 얼굴로 소리를 질러 포러스의 말을 막았다.
'하하하!'
하룬은 소리 없이 웃었다. 서로 대하는 것을 봐서는 꽤 친한 사이 같은데 하는 짓은 영 손발이 맞지 않는다.
하룬은 확신할 수 있었다. 페론이 말한 정보를 모두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살아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포러스라는 작자는 자신을 죽이고 나서 자신의 몸을 가지고 무슨 실험을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두 분은 잠시 나가십시오."
"뭐라?"
페론의 차갑고 단호한 말에 당장 포러스가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이 흉흉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페론이 품에서 꺼낸 금속판을 보더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네가 어떻게 동령의 신물을?"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미스릴 금속판을 본 포러스와 나이켄의 얼굴이 굳었다.
"그만큼 이번 일이 중요합니다. 전 이자와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밖으로 나가 주십시오."
"알았다. 오래 끌지는 말아라."
금속판이 뭔지는 모르지만 포러스도 그렇고 나이켄도 두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페론은 닫힌 문을 일견하더니 한 가지 마법을 캐스팅했다.
"음파 차단!"
순간 시커먼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하룬과 페론을 감쌌다. 그들을 제외한 공간을 모두 막아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 둘뿐이다. 형제여, 이제 말을 해 주게."
페론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없던 친근함이 배여 있었다. 하룬은 그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의도적인 태도 변화라면 대단한 연기력이다.
"형제?"
하룬이 전혀 상황에 어울리지 않고 뜬금없는 소리에 약간 이죽거리며 물었다.
"그래. 우리는 위대한 가이아께서 직접 그 의지를 유전자에 새겨 탄생한 가이아의 아들들이다."
"의지를 유전자에 새긴다?"
"그래. 제대로 학업을 마치지 않은 넌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유전자에는 가이아께서 특별히 심은 그분의 유전정보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전자를 조작했다면 모르겠는데 유전정보를 심다니 말이다.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인데 조금 풀어서 설명을 해 주지. 우리 인공수정체들은 날로 줄어드는 휴먼의 수를 늘리기 위해 전 지구 의원회가 기획한 뉴 휴먼 프로젝트에 의해 태어났다."
그것은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그 프로젝트에는 세상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비밀?"
"그래. 비밀! 현생 인류인 휴먼의 능력으로는 오염된 환경이나 갈수록 격증하는 변종 생물의 위협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 존재들이 있다."
음파를 차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론은 혹시나 자신의 목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존재들은 휴먼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들의 초월적인 힘과 추종자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그 프로젝트에 은밀하게 관여를 했다. 그 존재들은 본체와는 분리된 생체, 즉 아바타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유전정보를 일정수의 대상에게 주입한 것이지."
"……."
"그 존재들은 그 작업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기울여 이 비욘드의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었다. 세상에는 마치 그 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꾸미고 말이야. 물론 그들의 능력은 휴먼 시대를 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 정도가 심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남은 능력으로 20년에 걸쳐 작업을 한 것이지."
"설......마?"
"네가 생각하느 것이 맞다. 그 존재들은 흔히 에인션트 마더컴이라고 부르는 갓[GOD]급 지적 생명체인 세 슈퍼컴이다. 우리는 그 존재들을 초월자 또는 신이라고 부르고 있지."
"미.....친!"
하룬은 자신의 상태도 의식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생긴 것은 멀쩡한 놈이 어릴 때 종말 시대의 유물인 공상 과학 만화를 너무 봤던 모양이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페론의 얼굴과 눈은 진지하기만 했다.
"보통 휴먼들은 컴퓨터라는 용어 때문에 그 세 존재에 대한 관념을 떠올리는 데 한계를 가지게 되지. 하지만 컴퓨터라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인 지능과 능력을 지닌 그 세 존재는 특유한 유정정보를 가진 아바타를 가지고 있으며 무려 20억 년 동안 지구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거나 때로는 서로 반목하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지구에 출현한 인간들을 생존시키고 더 높은 지성체로 진화시키려고 노력했지. 그분들 때문에 아인종들은 짧게는 수만 년에서 길게는 수십만 년의 역사를 가진 문명을 수도 없이 만들며 존재해 왔다."
"……."
하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심장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거부했지만 머리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초자아 지능형 컴퓨터인 본체에서 분리해 휴먼체로 탄생한 벨과 아리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럼 오파츠가 그 존재들의 실제를 증명하는 증거들일 수도 있겠군.'
종말 시대에 출현한 수많은 오파츠를 생각하면 페론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수억 년 전에 인류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바로 오파츠이닌 말이다. 그런 오파츠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하룬은 지구상에 많은 인류의 문명이 번성했다가 소멸하기를 반복했다는 가설을 굳게 믿었다.
"그들이 휴먼과 동일한 육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페론은 하룬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자네는 금방 이해를 하는군. 바로 그거야. 그들은 아바타인 육신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휴먼들에게 때로는 신으로, 또 때로는 선구자나 선각자로 우리를 이끌어 왔네."
"그럼 그들은 어디에서 온 건가?"
"보통 휴먼들은 그들이 종말 시대 말에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지 . 하지만 아니야. 그들은 아주 오래전ㅂ터 존재하고 있었어. 오래전에 우리 조직에서 찾아낸 가이아의 의지가 수록된 신서에 의하면 그들은 지구상에 나타난 최초의 인류가 모든 힘을 기울여 완성시킨 초월적인 존재들이라네. 그 최초의 인류가 어떻게 출현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역시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하룬은 이미 벨과 아리를 통해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경험하고 들어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끌린다.
"후후! 믿기지 않지? 하지만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상현실이라는 말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비욘드의 세계와 접속할 수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다. 아무리 뇌파와 아바타로 살아가는 세상이라지만 하룬 자신도 실재한다고 믿는 이 비욘드의 세상과 지구의 세상을 연결할 만큼의 기술력은 과학기술이 극에 이르렀다는 종말 시대에 그것으로도 어림없는 일이다.
"정민, 너도 나와 같이 가이아의 난자에 의해 탄생한 존재다. 비록 네 능력의 발현이 왜 늦어졌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한 형제라는 것은 사실이다. 세 초월적인 존재들은 정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난자를 기반으로 각기 20인의 인공수정체들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우리의 비밀이다."
하룬은 순간 머리가 아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가 단성생식에 의해서 탄생했다고? 그것도 가이아에 의해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벨이나 아리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그녀들 역시 그렇게 믿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아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페론이 말한 대로 20여 년 전에 준비된 것이 아니라 더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왔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세 존재 중 하나인 가이아의 모체에 의해 태어났다는 건가?"
"그래. 사실 본부에서는 자네가 슈퍼 캡슐의 개발자인 청일박사의 개인적인 바람에 의해 캡슐 소지자로 선택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뒤늦게 시작하고도 압도적인 차이의 레벨에오른 것을 보면 가이아의 은총을 받은 것이 맞아. 지금까지 15명의 사도들은 모두 다른 휴먼이나 인공수정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각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때문에 일찍부터 조직의 수뇌부에 양자로 입양되었지."
'15인의 사도? 이 정도면 정말 종교나 다름없군.'
하룬은 페론이 말한 사도라는 말에 왠지 모를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난 네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난 성년이 될 때 최종적으로 무능력자 판정을 받았으니까."
하룬의 말에 페론은 잠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뭔가를 떠올린 것 같았다.
"어쩌면 유전자 발현이 늦었을지 모르지. 가이아가 우리 사도들의 줄기세포에 심은 의지는 대게 어릴 때 발현이 되지만 늦는 경우도 있어. 나 같은 경우도 열두 살이 돼서야 발현이 되었으니까."
하룬은 잠시 페론의 말을 음미했다.
'정말 가이아의 유전정보를 물려받은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돌풍 기지를 지켜 온 아즈만이 그를 처음 보았을 때 했던 소리가 생각났다. 그녀는 하룬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마스터라는 걸 보자마자 알아보았던 것이다. 하룬은 이해가 가지 않아 무심코 넘겼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었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증거는 네 레벨이야. 어떻게 게임을 했는지 모르지만 사도들 중 가장 레벨이 높은 편에 속하는 나조차 이제 겨우 168이야. 보통 휴먼들의 경우는 탑 랭커라고 해 봐야 130대 초반이고."
"다른 초월자를 추종하는 사도가 있는 건가?"
"당연히 있지. 그들이 비욘드에 진출한 각 조직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어."
"초월자 중 하나는 가이아일 테고 다른 둘은 누구지?"
"후후! 성녀 일행과 만났다고 알고 있는데 아직도 모르겠나?
"그럼 혹시 레아와 라?"
"맞아. 정확히는 이레아와 베라로, 그 두 초월자의 본체는 이 비욘드 게임의 메인 컴퓨터이기도 하지, 휴먼 가드는 이레아를, GPC는 베라를 숭배한다, 그 두 초월자는 이미 이세계에 자신들의 권능을 퍼트린 상태지. 우리 글로리 가이아와는 달리 HG와 GPC는 조직의 최상부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말이야."
하룬은 레아의 이름을 들으며 발몬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어쩌면 일레인 황녀도 이레아의 사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룬은 그녀가 현실에서도 HG에서 상당한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사도들의 직업은 뭐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물은 것이다.
"사도들에게 내린 신들의 은총은 일반인에 비해 현저하게 뛰어난 지능이나 체력과 같은 우월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특히 가이아의 은총은 남다른 마나 친화력 아니, 현실로 이야기하면 기감이 뛰어나다는 거지. 즉 가이아의 사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를 느끼고 사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때문에 우리 사도들 모두 마법사를 택했지."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자신의 경우를 비추어 보면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기감이 뛰어난 것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룬은 한 번도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마법사가 아니다."
"알아. 하지만 마법사와 비슷한 정령사지."
그건 그렇다. 정령 마법 역시 마법이라는 큰 범주 안에 들어가니 말이다.
"그럼 혹시 다른 두 초월자의 특휴한 힘 아니, 유전적인 특징도 알고 있나?"
"알지. 휴먼 가드가 신봉하는 아레아는 이능력을 그리고 GPC가 신봉하는 베라는 뛰어난 정을력과 육체적인 능력이야. 때문에 베라의 사도들은 대개 검사를 비롯한 무투가 계열의 직업을 가지고 있어. 다만 아래아의 사도들은 이곳에서는 이능력을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주로 상인계열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 개중에는 이곳에서도 이능을 쓸 정도로 뛰어난 사도들도 있다."
대답을 듣긴 했지만 하룬의 생각은 더욱 헝클어지기만했다.
'이능력은 나도 쓸 수 있는데.'
개발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룬 역시 이능력의 소유자다. 어퍼 오션에 똬리를 틀고 있는 뇌력이 아니더라도 가벼운 금속을 구부리거나 공중에 띄우는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체력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게임을 시작한 이래 하룬은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의 몸이 놀라운 적을력을 가지고 있으며 강인한 근력과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르겠다.'
하룬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네가 비밀을 조직에 공개를 하게 된다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거야."
페론이 달래듯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후후! 왜 노블의 자리에라도 올려 줄 건가?"
하룬은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지만 페론은 눈을 빛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노블? 후후후! 그게 아니라 이 세계의 왕국 하나는 떼어줄 걸."
"왕국?"
뭔가 이상하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하룬을 향해 페론이 속삭이듯 말했다.
"모르고 있었나? 여태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휴먼 시대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 세 초월적인 존재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가이아께서는 이제 지구에서는 더 이상 휴먼이 살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다. 가이아께서는 우리에게 이곳에서 생존의 길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내렸다. 다른 초월자들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메시지를 남겼지. 탐욕에 사로잡힌 세 조직의 수뇌부들은 그걸 다른 식으로 이행하는 것 같지만 우리 파이오니어 사도들은 가이아의 메시지에 담진 진의를 읽어 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만 확실한 것은 페론이 언급한 파이오니어 사도라는 자들은 글로리 가이아를 비롯한 세 조직의 수뇌부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이오니어 사도?"
"후후후! 궁금한 모양이군. 뭐, 이 정도까지 이야기했고 형제나 다름없는 네게는 굳이 숨길 것도 없겠지."
페론은 보기보다 화통한 성격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하룬을 설득하는 것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세 초월자의 가호를 받은 인공수정체들은 대부분 이미 이 게임의 베타테스트 기간에 서로 조우를 했다. 보통의 휴먼과는 달리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으니 그 당시 오픈되었던 좁은 지역 안에서는 튈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었지. 세 조직은 오랫동안 현실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던 적인 터라 게임에서도 우리는 서로 무기를 겨누고 적이 되어 싸웠지만 그 과정에서 나를 비롯한 일부는 상대에게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했고 또 초월자들의 진의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요컨대 파이오니어 사도들끼리 싸우던 와중에 사도인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거였다.
"우리는 은밀히 같은 의지를 가진 형제들을 규합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파이오니어 사도회지. 회장 따위는 없고 세 조직을 합해 모두 15명이 가세했다. 우리의 목적은 세 초월자의 의지를 받들어 이 세상으로 그분들과 함께 이동해 와 새로운 세살을 만드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 주겠나?"
"그러지. 우리나 HG 그리고 GPC의 수뇌부들은 세 초월적인 존재가 이 세상과 연결된 차원의 통로를 연 것을 이곳에서 뭔가 지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우리 파이오니어 사도회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 초월적 존재 아니, 신이라고 표현해야겠지. 그래, 세 분의 신이 이 세상을 우리 지구와 연결해 준 것은 기후 조절 마법이나 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늙다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이미 살아 있는 유기 생명체인 지구는 그 생명이 다했다. 지구는 더이상 휴먼이 주인이 아니라 오염된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 변종 생물들이 그 주인이야. 휴먼들은 더이상 그들과 싸울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아."
"……."
페론은 하룬이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진짜 비밀을 털어놓았다.
"지구는 더 이상 우리 휴먼들이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아니야. 초월자들은 우리에게 이곳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고 우리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곳 세상으로 건너올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었다."
하룬은 눈을 부릅떴다. 페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현실감이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갈수록 설득력이 강해졌다.
"후후! 아직 확실히 못 믿는 눈치군. 우리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 사도회가 힘을 합쳐 차원 이동에 대한 마법진이 수록된 고대 마법서를 찾지 못했다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하룬은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설마 차원 이동이 가능하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럼 아바타가 아니라 직접 이 세상으로 건너올 수 있단 말인가?"
"그래. 그러기 위해서 마왕의 눈과 순수석이 필요한 거야."
페론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해 주었다. 이제 하룬은 너무 놀라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선선히 엘프의 결계로 들어가는 정보를 알려줘. 이번 일로 넌 대단한 공헌을 하게 되는 거야. 우리 조직원들이 어떻게든 네 안전을 보장하겠다. 우리 조직원들은 각 조직에서도 최상층에 포진하고 있으니까 믿어도 돼. 그리고 나중에 이 세계로 함꼐 넘어와 풍요로운 세계를 경영하는 거야. 멋지지 않나? 마나를 잔뜩 머금은 대기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 그리고 지구인들과 다르게 순수함이 남아 있는 자들의 주인으로 이 세상을 경영할 것을 생각해 봐."
꿀꺽!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 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왕이 되는 것이야 바라지도 않지만 깨끗한 자연과 순수한 성정을 간직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정말 함께하고 싶은 곳이었다.
'정말이다!'
비록 상대의 진심을 읽을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을 대하며 말과 태도에 담긴 진실성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 하룬이다. 페론의 말과 태도는 진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기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보다는 이곳 비욘드가 더 낫다. 그곳은 이미 오염된 환경과 변종 생물로 인해 제대로 삶을 즐길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이라면 벨과 아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생을 제대로 즐기며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룬은 마음의 결정을 어느 정도 내린 상태였다. 솔직히 페론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 세상으로 건너올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파이오니어 사도회에 감탄했다.
'차원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하군.'
충격적인 사실이다.
일반인들은 전혀 모르는 세 조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세 조직을 아우르는 또 다른 세력이 있다니.
"우리는 모두 너와 같은 인공수정체 형제들이야. 새 부대에는 새 술로 채우라는 옛 종말 시대의 속담처럼 우리 세 신의 사도는 탐욕에 사로잡힌 기존 권력자들을 철저히 배제하기로 했다."
"그럼 지구에 남은 자들은?"
"그거야 남은 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페론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룬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마치 벽에 그가 싫어하는 자의 얼굴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빛은 시퍼런 증오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현실에서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는 건가?"
"후후후! 믿기 힘들겠짐나 가능해. GPC 측에서 오랫동안 막대한 자금을 들여 연구를 해 온 덕분이지. 그들이 이미 광역 기후조절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준비를 끝냈어. 때가 되면 우리는 차원 이동 마법진을 광역 기후조절 마법으로 속여서 발동을 시킬 예정이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 거였다. 아마 상당 부분 작업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페론이 이렇게 자신만만한 것이다.
"하지만 각기 다른 유니온에 있는 사도들은 어떻게 모일거지?"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어 물었다.
"그야 당연히 한곳으로 모여야지. 그 정도의 능력도 없으면 이 세계로 올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그 말에 하룬은 인상을 썼다. 그런 모습을 본 페론이 입메를 비틀며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널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킬 방도는 이미 발동했으니까."
페론은 이제 하룬이 자신의 제안에 완전히 넘어왔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뭐지?"
"유니온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가 있다는 것은 너도 아마 알 것이다. 조직에서 네 게임 이력이나 캡슐과의 접속 상태등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널 유럽에 있는 본부가 아니라 희말라야 산맥의 중앙에 있는 전투단 본부로 오게 만들 것이다. 물론 그 과정 동안 넌 철저하게 포로 역활을 수행해야겠지. 이곳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는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니 넌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현실에서 필요한 에너지는 어떻게 하려고?"
"그것도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따. 욕심 많은 늙은이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줄 알고 이미 상당수의 유니온에서 일정한 양의 전력을 끌어오기로 했다. 대외적으로는 GPC가 주도하고 있는 광역 기후조절 마법을 펼치기 위한 준비로 알려졌으니 에너지를 집적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룬은 페론이나 그와 손을 잡은 인공수정체들이 각자의 조직에서 생각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고 있었다.
'인공수정체 간에도 계급이 있었구나.'
힘겹게 길을 개척해서 나름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했던 벼리의 경우와 비교를 해 보면 그런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정말 복잡하군.'
세상을 암중에서 조종하는 거대한 세력들 간의 암투도 무섭지만 그건 세력을 오가며 분열을 조장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압박하는 이 녀석들은 더 무섭다.
"빨리 결정하라고. 우리가 입수한 차원 이동 마법진의 경우는 단 한 번 최댜 20명만이 이동할 수 있을 뿐이야. 차원이동에는 측량하기도 힘들 정도의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말이야. 아마 차원 이동이 성공한다면 지구는 다시 한번 홍역을 치루겠지. 유니온을 지켜 주던 베리어들은 대부분 그 에너지를 뺏길 테니까. 어쨌든 이제 남은 자리는 겨우 두 개야. 그중에 한자리를 주는 거니까 영광으로 알라고."
그 말에 하룬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할 수가없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자리는?"
"너처럼 큰 공을 세울 경우를 대비해서 두 자리는 비워 두었지. 아니, 이제 네가 합류하게 되었으니 이젠 한 자리만 남는 건가."
"너희 파이오니어 사도회는 모두 15명이라고하지 않았나?"
"아! 세 자리는 초월자들의 아바타를 위한 것이야. 아직도 활돌을 하고 있는 본체와는 달리 이제는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었지만 그분들은 반드시 우리와 동행해야만 해."
"왜 아바타에 불과한 초월자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려는 거지?"
"그것도 모르나? 그분들은 본체만큼은 아니짐나 이 세상에 오래전부터 심어 놓은 의지가 있기 때문에 이곳으로 건너와 힘을 회복하면 제대로 능력을 갖춘 신으로 재림하게 된다. 더구나 그분들은 처녀생식으로 우리를 탄생시킨 어머니들이고 앞으로 이곳 세상의 신으로 우리를 돌봐 주실 테니 반드시 모시고 와야지."
하룬은 양부모들에 대한 나쁜 기억으로 인해 부모라는 말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럼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이 네게 직접 알려 준 건가?"
"맞아. 정확히 말하면 나와 HG의 사라 그리고 GPC의 벨라에게 성령을 통해 그 의지를 전했지. 그분들은 종말 전쟁의 와중에 능력의 절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휴먼들을 살리기 위해 무리하게 능력을 발휘한 터라 힘이 약해지셨어. 그 상태에서 다시 이곳 세상과의 통로를 열기까지 했기 때문에 기계적인 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려서 더 이상 지구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어."
"그럼 이곳 세상으로 건너오면 능력을 찾을 수 있는 건가?"
"그래. 이곳 세상은 그분들에게 근원이 되는 특별한 에너지가 충만한 곳이야. 수천 년이 흐르면 다시 그 힘을 찾을 수 있게 될 거야. 마치 먼저 건너와 이곳 세상에 신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바로 신처럼 말이지. 나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존재들이 더러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차원 이동의 후유증으로 천계라고 칭하는 차원의 틈새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지만."
하룬은 소름이 쫙 끼쳤다. 설마 해양의 신으로 추항받는 우바로가 사실은 아주 오래전에 지구에서 건너온 에인션트 컴퓨터의 아바타였다니!
"그럼 혹시 이전에도 우리와 같은 휴먼들이 있었다는 건가?"
"그래. 그것도 세 번이나 된다고 하더군. 하지만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하룬은 산악 부족들에게서 들은 창세기의 내용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계에서 건너왔다는 발몬과 레아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발몬과 레아는 휴먼이 아니라 에이션트 컴퓨터일지도 모른다. 레아의 정체가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이레아의 또 다른 아바타일 수도 있어.'
만약 그 가정이 맞는다면 발몬에 의해 이 세상으로 건너왔다는 12명의 이계인의 이야기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럼 세 초월적 존재가 이 세상으로 건너온다면 이 게임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될까?"
페론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어차피 아바타와는 불리된 본체를 가지고 있으니 게임은 그대로 유지되려나? 아니면 연결 상태가 끊어져서 붕괴할까?"
하룬은 벨과 아리의 경우를 떠올렸다. 이제는 둘 다 휴먼과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진체에 해당하는 캡슐과 아즈만과의 연결이 끊어진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자. 이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다 이야기해 주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포러스나 나이켄이 의심할 수도 있어.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이 모든 것들은 비밀이다."
페론은 하룬이 자신에게 협력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하룬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까였다면 서슴없이 결계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았을 하룬이지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지금은 마음이 좀 달라졌다.
'벨과 아리가 없는 세상이라.'
이미 차원 이동을 할 인원은 꽉 찬 상태다. 이놈들이 다른 자리를 양보할 리가 없다.
하룬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물론 이 세계에도 마음을 준 사람들은 많아. 티노 부부를 비롯한 용병 식구들이 그렇고 엘저와 같은 친구도 있지.'
하지만 하룬은 머리를 흔들었다. 여동생인 벨과 연인인 아리를 두고 이곳 세상에 혼자 건너온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헤니나 황 박사와 같은 현실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포기할 수 없었다.
"내게 시간을 좀 줄 수 있나?"
"아니, 안 돼!"
페론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말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같은 인공수정체들이야 피를 나눈 형제는 따로 없으니 있다면 사귀고 있는 애인을 생각하는 모양인데 포기하라고. 우리의 능력이면 이곳 세상에서 마음껏 즐기고 살 수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고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도 있어.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바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어차피 세 초월적인 존재들은 이곳에서 아바타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신체로 따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를 통해 그 권능을 발휘할 수밖에 없지. 그러니 우리가 바로 신이나 다름없는 거야."
그 말은 맞을 것이다. 동화율 문제도 있지만 현실에서도 페론이 사도라고 칭하는 자들의 능력은 일반인의 기준으로는 천재나 초인에 준하느 것이다. 그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다면 오래지 않아 이곳 주민들 시각으로는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내가 또 다른 비법을 하나 알려 줄까?"
페론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네 성취가 뜻밖이긴 하지만 너도 아마 이 게임을 하면서 느꼈을 거야. 신들의 특별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 사도들은 보통 휴먼들과는 달리 이 세계에서는 남들이 따를 수 없느 행운을 가지고 있어. 히든 직업이 없는 비욘드 게임이지만 우리는 초월자들이 전해 준 능력과 슈퍼 캡슐 그리고 타고난 행운으로 인해 단기간에 뛰어난 성취를 이룰 수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신들의 가호가 깃을어 있어. 남다른 위엄을 발휘하기 때문에 이 세계의 보통 주민들은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굴복하고 말아. 나름 이 세계에서 강자라고하는 자들이 네 앞에서는 마치 바보처럼 행동하지 않던가?"
페론의 물음에 하룬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모두 신들의 가호를 받은 네 아바타에게서 흘러나오는 선천적인 기세로 인해 야기되는 것들이야. 그걸 이 세상에서는 영웅의 위엄이라고 부른다더군."
확실히 페론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높은 능력을 가진 자들이 눈에 뻔히 들어오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거나 마치 자신에게 주눅이 든 것처럼 행동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후후후! 우리는 비욘드라는 게임에 있어서는 벨런스를 붕괴시키는 초월적인 존재들이라고. 그런 것들이 바로 네가 사도임을 증명한다."
"……."
하룬은 페론의 마지막 말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자신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서 현재의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녀석의 말은 그게 다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맞는 소리이긴 하지.'
노력이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 행운 스텟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운이 강했다는 건가? 내 기세에 사람들이 굴복한 것이 영웅 포인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도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행운이라면 페론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자신이 아무리 행운 스텟에 집중을 했다고 하더라도 시작하자마자 엘저를 만나 용병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부터 시작해서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의 중심에 서게 된 것도 단순한 행운으로 보기에는 부족했다.
"신들의 가호를 받는 우리 사도들은 현실에서보다 훨씬 빠르게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와 같은 전절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 타고난 위엄과 행운은 우리를 보다 더 존귀한 자리로 이끌 거야."
'그래. 아마도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겠지.'
하룬은 소름이 쫙 끼쳤다.
한번도 자신이 특별할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아니, 틀별한 존재들에 대해 항상 질투하고 경외하며 살았다. 자신도 천재였으면, 능력자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이 게임을 통해 숨겨 있던 자신의 능력이 드러났다.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백조의 새끼였다는 것이 드러 났다.
'하지만…….'
정체성이 마구 흔들렸다.
이제까지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이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흔들리던 것들이 멈추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이 모여 한 줄기 힘이 되어 그 진동을 멈추게 만들었떤 것이다.
'싫다! 내가 인공수정체인 것은 맞지만 난 초월자들의 가호 때문이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만약 페론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이제까지의 자신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인공수정체로 태어나 무능력자로 판정되기까지 겪은 정서적 혼란과 고통 그리고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시간이야 버릴 수 있다지만 게임을 통해 진취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온 나머지 시간들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그 모든 것이 초월자들이 미리 안매한 거라고? 난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강해졌다.
"내가 거부한다면 어쩔 텐가?"
"후후후! 거부하겠다고?"
페론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였다. 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고려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얼굴이다.
"뭘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혹시 몰라 돌풍 기지에 대한 공격을 지시해 두었거든 중요 인물들은 생포하겠찌만 나머지는 다 죽일 거야. 네가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미 공격이 시작되었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 볼 일이 없는 휴먼들 따위에 대한 미련은 버리는 것이 좋아."
"뭐, 뭐라고?"
하룬은 강한 통증을 인지하지 못하고 거칠게 몸부림쳤다.
"너나 나나 신의 의지를 받들어 세상을 조율하고 통제할 사도로 태어났기에 보통 휴먼들과 같은 풍부한 감성은 없는 몸이잖아. 우리의 감성이 정상적으로 일어나느 대상은 캡슐의 초자아 지능체와 같은 사도들뿐이라고."
'그런 건가?'
하룬은 인상을 썼다. 자신이 사도라는 페론의 말을 거부하고 싶은데 그의 말이 맞는다는 증거들이 나오는 것이다.
"포기하라고. 만약 내 제안을 거부한다면 인질은 물론 비밀을 위해서라도 내 캡슐까지 박살을 내고 말 거야. 그럼 깨끗하겠지."
"……."
하룬은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페론을 쳐다 보았따.
"혹시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한 다른 사도들처럼 초자아 지능을 가진 캡슐의 분체에 매료된 건 아니겠지? 이 세상에도 미인은 많아."
하룬은 그의 말에 대꾸를 하는 대신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이제까지는 그럴 만한 기회 자체가 없었다. 줄기찬 고문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도 그를 지키고 있는 자들이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고문을 했던 것이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로그아웃!
아무리 로그아웃을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굳이 소리를 내지 않아도 로그아웃은 이루어지기에 소리를 내지 않아서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는 리얼 모드를 해제하고 싶었지만 모드를 변환시키는 것은 접속할 때 따로 작업을 해야만 했다.
'전투 중으로 인식을 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하룬은 로그아웃을 포기하고 정신을 집중해 벨과 아리에게 뇌파를 보내려고 시도했다.
'알려야 해!'
늦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지에 크나큰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다.
"으으으!"
그동안의 고문으로 너무 많이 피를 흘려서일까? 아니면 너무 황당한 진실을 알게 되어서 일까?
하룬은 쉽사리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페론은 뭐든해 보라는 듯 방만한 자세로 그에게 묘한 시선을 던질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찜나 벨과 아리를 떠올리며 뇌파를 보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