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파인 홈의 다크니스 (213/278)

                                                      [[파인 홈의 다크니스]]

"으으응."

하룬은 신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왜 이렇게 눈을 뜨는 것이 힘들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가까스로 눈을 뜬 하룬은 너무나 생소한 주위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는 파인 홈으로 올라가는 숲의 오르막길에 있었는데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건물의 실내였다.

'왜 이렇게 힘이 없지?'

고개를 돌리는 것도 힘에 겨울 정도로 전신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가출한 후 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무지막지마게 폭행을 당하고 쓰레기통 옆에 누워 있을 때가 떠올랐다. 워낙 뼈밖에 남지 않은 몰골을 하고 있던 터라 인신매매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처음 사회의 어둠을 경험했다.

옛날, 그것도 현실의 기억을 떠올리는 자신이 마치 늙은이가 된 것 같아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햇빛이 들어오는 창 밖을 쳐다본 하룬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지……구라트?"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지구라트가 맞았다. 다크니스가 건설한 성에는 어김없이 있는 5층의 건물과 특유의 첨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왜 내가 다크니스의 성에 와 있는 거지? 누가 날 발견하고 텔레포트라도 한 건가?'

하지만 하룬은 이내 그 가능성을 부인했다. 데빌 산맥은 통신이 자주 끊길 정도로 마나의 유동이 심하고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텔레포트나 워프는 이런 지역에서는 펼칠 수 없는 마법인 것이다.

'그럼 뭐지?'

아무래도 창으로 가까이 가서 밖의 풍경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지금은 지구라트의 5층과 첨탑 이외의 성벽이라든가 다른 건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멀리 산이 보이는 것을 보니 지대가 상당히 높은 것 같았다.

쩔그렁!

"으윽!"

몸을 움직이려던 하룬은 쇳소리와 함께 심한 통증을 느끼며 부지불식중에 신음을 토했다.

하룬은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는 상태가 아니라 벽에 쇠사슬로 고정이 되어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과 발에는 벽에 고정된 쇠사슬과 연결된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고 몸은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었다.

팔과 다리에 접하는 구속구의 안쪽에는 날카로운 강침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약간의 움직임에도 격통과 함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는 구속구의 외면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 있었다.

하룬은 고통을 참으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오는것은 지구라트가 보이는 작은 창과 자신의 앞쪽에 긴 테이블과 몇개의 의자 그리고 구석에는 한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자신의 방어구와 무기 그리고 암기 벨트가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보기만 해도 용도를 알 수 있는 철제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고문실로 보였다.

'일단 출혈부터 막아야겠다.'

하룬은 본능적으로 마나를 이끌어 혈관을 막으려고 했지만 마나 오션의 마나는 아무리 의지를 강화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나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마수의 힘을 끌어 올리려고도 해 봤지만 그것 역시 활성화되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한동안 마나와 씨름을 하던 하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혹시 이 구속구가 마나 봉인구?'

그 생각이 떠오르자 하룬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한 번도 이런 경우를 당한 적이 없어서 빨리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우아악! 왜 내가 이 꼴이 되어 있는 거지?"

실내에는 아무도 대답해 줄 대상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답답한 마음에 고함을 질러 보았다. 팔목과 발목에서 끔찍한 통증과 함께 피가 철철 흘러나왔지만 하룬은 계속해서 고함을 질렀다.

끼익.

마치 그의 고함에 대답이라도 하듯 철문이 열렸다.

"흐흐흐! 이제 깨어났군."

"……니켄?"

하룬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던 니켄이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서 그에게 음침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안죽었나?"

"크크! 죽을 리가 있나? 명색이 6서클 흑마도사가 말이야."

음침한 니켄의 목소리와 얼굴을 보던 하룬은 그의 분위기와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고 그간 때때로 떠올렸던 의문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룬의 시선이 니켄이 입고 있는 검은 로브를 향했다. 가슴팍에 새겨진 황금색 원이 그려진 로브를 입은 흑마법사를 본 적이 있었다. 틀림없이 다크니스 소속의 흑마법사, 그것도 고위급 마법사가 틀림없었다.

"다크니스였나?"

"흐흐! 이제야 알았군."

이럴 수가!

니켄이 이방인이었다니. 정을 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오면서 죽음의 길을 함께 걸은 동료였던 것이다.

"그럼 내게 슬립 마법을 펼쳤던 건가?"

니켄은 대답 대신 비릿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은 이제야 자신이 정신을 잃은 이유와 환상으로 생각했떤 장면이 실제였음을 깨달았다.

"일부러 죽은 척한 것은 아니고 기절을 했었지, 깨어나 보니 대장이 비실대고 있더군."

니켄은 그동안 보아 왔던 밝고 따듯한 표정을 지워 버린 음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의 분위기가 너무 생경했다.

'본색을 숨기고 있었다?'

분명히 자기 입으로 5서클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6서클의 흑마도사라고 했다.

"넌 누구냐?"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 하룬 대장. 난 다크니스의 일리오츠 전투단 단주인 나이켄이야."

하룬은 이제야 그가 다크니스에 의해 고문을 받던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성을 방문했다던 중요한 손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의 옆에 떨어져 있던 부서진 마나 봉인구는 그가 차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이켄? 이름까지 속였군. 설마 네놈이 그 돌성을 방문했다던 손님이었나?"

"역시 머리는 좋군. 그런 자가 어떻게 그 순간 날 포로로 생각햇을까?"

머리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던 놈의 옆에 떨어져 박살이나 있던 마나 봉인구가 아니었다면 쉽게 알아차렸을 것을 너무 쉽게 판단했다.

"흐흐흐!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포로 한놈의 마나 봉인구를 풀고 한창 고문하는 재미를 즐기던 순간에 성이 사태에 무너졌으니까."

이제 어찌 된 영문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런 비……. 윽!"

분노가 치밀어 올라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하룬은 다시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마나 봉인구이자 구속구 안에 박힌 강침이 살을 파고들어 뼈와 신경을 건드렸던 것이다.

"워워! 조심하라고. 피를 빨아먹는 강철 가시가 박힌 귀중한 물건이니 흥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으드득!"

하룬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화만 낼 때가 아니었다. 왜 자신을 살려 두었는지 알아내야 놈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딘가?"

"역시 금방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군. 좋은 자세야. 그 정도야 알려주지. 이곳은 엘프들의 고향이라는 파인 홈의 중간, 즉 달의 신전의 결계 밖에 세워지고 있는 파인 성이야."

나이켄은 순순히 하룬의 물은 것을 알려 주었다.

"날 굳이 살려 둔 이유는?"

"후후! 왜 이러실까? 대장은 그 엘프 년에게 결계를 통과 할 수 있는 모종의 방법을 들었잔아."

그거였다. 그걸 알기 위해서 그를 살려 둔 것이다.

하룬은 이들이 아직 마왕의 눈이 봉인된 달의 신전을 감싸고 있는 결계를 뚫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방법만 알려 준다면 대장은 살려 보내 줄 의행도 있어. 그래도 우리는 한동안 동료였잖아."

나이켄의 눈빛을 보면 그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는 용병인 하룬이 엘프와의 의리를 위해 그것을 끝내 발설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난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다."

마왕의 눈이 다크니스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한 상황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이 비욘드의 세상이 인공지능 컴퓨터가 창조한 가상 세계가 아니라면 자신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사라질 수 있었다.

"그간 쌓은 정을 생각해서 쉽게 가려고 했더니……."

하룬의 단호한 대답에 나이켄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눈이 세모꼴로 변하며 흉흉한 빛을 발산하는 것이 그동안 자신과 동행을 했던 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로도 그 외양과 기세가 변했다.

"그 엘프 년의 시체에선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으니 죽기전에 은밀히 네게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을 거야. 그렇지?

"그런 거 없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나이켄은 하룬의 말에 잠시 말을 멈추고 확인이라도 하듯 날카로운 시선을 고정했다. 사실 은밀하게 하룬과 에리피안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한 번 엘프어로 대화할 때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의심할 만한 것은 듣거나 본 적이 없다. 있다면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뿐이다.

"아니, 있어! 반드시 알고 있을 거야."

에리피안과 하룬의 소지품을 모두 뒤졌지만 에리피안이 주었을 법한 것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켄은 하룬이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방법만은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난 모른다."

"흐흐흐. 자신이 뭐라도 되는 걸로 생각하는 자들은 꼭 페인이 되고서야 분다니까. 쯔즈!"

험악한 얼굴로 변한 나이켄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도구들 중 채찍을 손에 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채찍의 말단 부위에는 날카로운 강침들이 박혀 있었다.

차악! 차악! 짜악! 짜악!

나이켄은 대각선으로 채찍을 내 번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르는 채찍질이었지만 하룬은 낮고 억눌린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부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악문 이 사이로 신음을 토하게 만들었다.

"크억!"

한차례의 가벼운 채찍질이 지나간 하룬의 상체는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쇄골부터 허벅지까지 대각선으로 훑은 채찍은 시뻘건 자국과 함께 아랫배와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흐흐흐."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나이켄은 금방 피투성이로 변한 하룬에게 번들거리는 시선을 던졌다.

"기대해. 널 고문하고 싶어 하는 잘들이 밖에 널렸으니까. 이런 오지에 배치받아 한동안 즐기던 손맛을 못 본 늑대 같은 녀석들이 선사할 짜릿한 선물을 기대하라고."

나이켄은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대기를 하고 있었던듯 3명이 안으로 들어왔는데 피투성이가 된 하룬을 쳐다보더니 광기 어린 눈빛으로 침을 흘렸다. 남을 괴롭히며 최상의 쾌락을 느끼는 변태임이 분명했다.

곧 실내에는 잔혹한 고문이 시작되었고 하룬은 피투성이가 되어 연방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백셀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뭔가 고심을 하던 나이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어떻게 되었나?"

"그, 그게……."

고문에 미친놈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고문의 방법과 도구에 빠삭해서 이제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백셀은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더듬었다.

"역시 쉽지 않은 상대지?"

백셀에게는 다행히도 나이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따.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질책을 받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노블 출신이 아니면서도 다크니스가 자랑하는 일곱 개의 전투단 중 하나를 이끄는 나이켄은 종잡을 수 없는 이중성격의 소유자였다.

"네.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채찍질과 매타작은 물론 손톱과 발톱을 빼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최고의 고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 기침을 했을 뿐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럴 거야. 그러고도 남을 작자지."

나이켄의 스산한 눈빛에 가벼운 감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경험해 본 하룬은 상당히 무미건조한 인간이었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자신의 대원들 앞이 유일했다. 게다가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더 강해지는 천성을 가진 터라 고통 따위에 굴복할 인간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내 친구로 삼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

이제껏 살아오며 친구라는 존재를 한 번도 가져 본 적도 없고 가지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나이켄이 처음으로 감탄한 존재가 바로 하룬이다.

"정말 이방인이 아닌 것 같나?"

어제 본부와 통신을 했을 때 들은 정보에 의하면 놀랍게도 하룬이 이방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동안 하룬과 같이 생활을 했던 나이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만 했다.

"네. 저나 고문을 한 다른 단원들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아바타로 보기에는 감각의 전달 속도가 너무 빠르고 또한 그 수용 능력이 너무 뛰어납니다."

"으음. 본부에서 잘못 판단한 걸까?"

하지만 본부의 판단도 일리는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점은 바로 아룬이 가진 정보력이었다. 지구인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극비의 정보를 한 손에 쥐고 있는 하룬이다.

"하긴, 그가 보인 능력이라면 적어도 레벨 180은 넘었겠지."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소드 마스터가 레벨 200 전후이니 그 정도는 될 것이다. 이방이든 아니든 서른 정도의 나이에 익스퍼트 최상급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믿기 힘들 정도의 진경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비수들은 레전드 급의 아이템이다. 거기에 중급 이상의 정령들까지 부리며 검술의 경지는 익스퍼트 상급 이상이다. 

'내가 본 하룬 대장의 실력이면 소드 마스터 초급이랑 붙어도 안 밀릴 거야.'

절령술과 비도술까지 갖춘 하룬의 능력이라면 높이 봤을때 소드 마스터 초급에 해당한다.

소드 마스터는 초인이다. 인간으로서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상회하는 능력자이니 수하들이 놀랄 정도의 감각 전달 속도나 수용 능력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조직이 막강한 힘을 지원해서 키우는 전사나 마법사 중 최상에 속하는 슈퍼 캡슐 사용자들의 레벨이 이제 160대에 진입한 상황인 것을 생각하면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하룬이 이방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된다.

레벨 100 이상이 넘어가면 레벨 업 속도가 극악에 가깝다. 거대 조직에 소속되어 집중적인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1년은 족히 플레이해야 레벨 20 정도를 올릴 수 있을 뿐이다. 하물며 레벨 150대 이상이라면 상상이 안 될 정도이다.

'상관없겠지.'

어차피 곧 죽을 놈이다. 육체적인 고문으로는 원하는 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고 보고를 올리자 본부에서는 따로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가 알고 있는 조직이라면 어떤 방법이든 사용해서 하룬에게 원하는 정보를 알아낼 것이고 그런 다음에는 폐기 처분이 될 것이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네. 하지만 고문하는 와중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곧 죽을 것 같습니다."

곧 죽을 정도로 출혈량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는 파미르가 수장으로 있는 율법 조원들이 어지간히 고문을 한 모양이다. 

"본부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고문은 멈추고 목숨은 붙여놔. 잘못해서 죽기라도 하면 우리 단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단주님."

그때였다.

다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가?"

"실패했습니다. 브리앙 부단주님과 다른 마법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결계가 이상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근처에 있던 단원들 중 백여명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제기랄! 그 병신 같은 새끼! 자신이 있다고 난리를 치더니."

나이켄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6서클 비기너에 오른 부단장 브리앙은 공격 마법에 전념한 자신과는 달리 마법진을 집중적으로 연구했기에 그래도 얼마간 기대를 했었던 것이다.

"가 보자!"

"네."

결계로 향하는 나이켄의 뒤에 그의 호위조가 따라붙었다. 

지구라트와 세 건물이 들어찬 좁은 성을 나온 나이켄은 일렁이는 결계가 펼쳐 있는 파인 홈을 볼 수 있었다. 결계의 안쪽은 흐릿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 밖에는 백여 명의 마법사들과 300명에 달하는 흑기사들이 낭패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과 함께 자신이 이끄는 일리오츠 전투단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경지가 가장 높은 마법사들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죽은 놈들이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아이템들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본 나이켄의 눈에서 흉흉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나이켄의 시선은 마법사들에게 향했는데 그들의 오공에는 이제 새까맣게 굳어 가는 가느다란 핏자국이 선명한 것을 보니 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중 얄미운 놈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부단주이자 자신의 위치를 호시탐탐 엿보는 브리앙 이었다. 눈, 코, 귀와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굳어 시푸르죽죽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의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지만 다른 단원들이 보고 있으니 표정 관리를 해야만 했다.

"뭐야? 자신 있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단장님. 중첩한 흑마법진의 힘이 결계로 향하게 했지만 마법사들이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뿐 결계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브리앙의 말에 나이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마법진에 관한 한 다크니스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브리앙은 흑마법진의 힘을 한 방향으로 집중해서 끌어내는 데 성공을 했다. 그렇기에 자신만만하게 결계를 부수겠다고 장담을 했었던 것이다. 

"중첩 흑마법진에도 변화가 없었다고?"

이곳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아낸 알카이드 전투단에서도 결계를 열거나 해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브리앙처럼 한곳으로 중첩 마법진의 힘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겠지만 별에 별수를 다 써 봤을 것이다.

'빌어먹을! 에리피안과 하룬 때문에 자청해서 왔건만…….'

생각 같아서는 귀중한 시간을 투자하고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브리앙의 얼굴을 갈겨 버리고 싶지만 사안이 중대하고 놈의 뒷배가 만만치 않아 겨우 참았다.

"코어를 찾아 파괴하면 될 거 아니야? 결계라는 것도 결국 마법진의 일종이라며."

"그, 그게……."

언제나 토를 달며 자신의 위치를 넘보던 브리앙이 말을 더듬으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놈의 높은 콧대가 어느 틈에 납작해진 것이다. 며칠 전에 큰소리를 쳤던 것과는 달리 시커멓게 죽은 얼굴이다.

"흑마법진을 중첩해서 펼친 것도 모자라 한 방향으로 그 모든 힘을 쏟아지도록 했는데도 해체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차원이 다른 결계인 것 같습니다."

눈 밑에 생긴 다크 서클이나 추레해진 형색을 보면 놈이 얼마나 발악을 하며 흑마법진을 펼쳤는지 알 수 있었다.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던 놈이니 일을 허투루 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조직에 동정이나 인정은 필요 없는 감정이다. 조직은 성과에 따른 상과 벌로 운영되는 차가운 존재이다.

"쓸모없는 놈! 네놈이 하도 자신하기에 본부에도 그렇게 보고했거늘! 책임져, 이 새끼야!"

놈이 하도 자신하기에 그렇게 보고했다.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미운 놈이지만 그 능력은 자신에 뭇지않고 특히 마법진 분야는 자신보다 낫기에 일을 맡겼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끝내 이 결계를 풀지 못한다면 자신까지 무능하다고 문책을 당할 판이다.

사실은 에리피안과 하룬의 존재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조직의 일이란 어떤 일이건 보상이 아니면 처벌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희생양을 만들어 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단장 역시 그 용병 놈에게 결계에 대한 비밀을 토설받지 못했잖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브리앙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다. 하지만 꼬투리를 잡았으니 박살을 내야만 했다. 그게 다크니스에서 자리를 보전하는 암목적인 법이다. 

"뭐야?"

나이켄의 눈이 얼굴과 함께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결계 탓이라고 항변하는듯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브리앙의 얼굴을 향해 그의 주먹이 날아갔다.

빠악!

"크흑!"

브리앙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개새끼! 네놈이 가능하다고 해서 본부에 그렇게 보고까지 했는데 이제와서 그딴 소리를 해? 너, 이 새끼! 나 물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지?"

나이켄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기괴한 광채를 쏟아 내고 있었다.

빡! 빠악! 빠직!

나이켄의 주먹과 발이 쓰러진 브리앙에게 쏟아졌다.

브리앙처럼 마법진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전투 마법사로 게임을 시작했던 나이켄인지라 육체적인 능력은 훨씬 더 뛰어났다.

"차라리 죽어버려, 이 개새끼야!"

퍼억! 빡! 빠악!

"크악! 컥!"

브리앙의 몸은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하는 나이켄의 주먹과 발은 가리는 곳이 없었다. 결국 십여 분이 흐르자 브리앙은 혼절을 하고 말았따.

"헉! 헉!"

때리는 것도 일이라 숨이 터까지 차올랐따. 하지만 손으로 이를 갈고 있었던 상태를 마음 놓고 패서 그런지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나이켄은 피로 물든 주먹과 부츠를 보며 미친놈처럼 히죽였다.

"누가 이 새끼 끌고가서 숨을 붙여 놔!"

"넷!"

평소 브리앙을 신봉하던 패거리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놈의 사지를 붙잡고 옮기기 시작했다.

"멜던, 우리 피해는?"

수석 대장인 멜던을 향하는 나이켄의 시선에는 아직도 광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마법사가 21명과 흑기사가 42명 죽었고 그 두 배 정도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개새끼!"

희생이 너무 컸다. 이번에 난 희생자까지 합치면 마법사 300명에 흑기사 700명으로 구성된 알리오츠 전투단의 절반 가까이가 이 화염 지대에서 죽어 버린 것이다. 단원들은 모두 최상급 캡슐의 사용자라 현실에서도 뇌사 상태에 빠졌거나 죽었을 것이다.

그중 3할은 마수들에게 당한 것이지만 7할은 이번처럼 결계를 해제하거나 파괴하려다가 결계에서 나온 엄청난 힘에 당한 것이다.

목숨만 살아 있다면 포션으로 어떻게든 치료를 하겠지만 죽어 버린 놈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한동안 자신들의 행사를 놓쳤던 HG와 GPC가 최근에 눈에 불을 켜고 정보를 캐고 있다니 한동안 단원들의 충원도 힘들 판이다.

"제기랄!"

욕을 해 보지만 어느새 힘이 빠졌다. 끓어오르던 화는 어느 정도 풀었지만 마땅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이! 시벌!'

어찌해서 마왕의 눈을 찾아 돌어간다고 하더라고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 이번 임무로 인해서 후계자 경쟁에서 일단 한참 뒤로 밀려 버린 것이다.

"결계를 부수거나 통과할 수 있는 방안을 내지 못한다면 다들 각오해!"

나이켄의 차가운 말에 회의장은 얼어붙었다. 단원들의 치료 마법으로 겨우 정상으로 회복한 브리앙은 원독에(?) 찬 눈으로 나이켄을 흘끗 쳐다 보았지만 이내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회의에 참석한 대장 10명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브리앙이 자신하던 변형 중첩 마법진에도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결계를 생각하면 방법이 없었다.

임무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단장인 나이켄은 물론이고 다들 승진할 생각은 꿈꾸지 말아야 했다. 일곱 개의 단이 후계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속한 단이 몰라하면 그 자신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또 다른 부단장인 볼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중첩된 흑마법진으로도 소용이 없느 것으로 보아서 이 엘프들의 신전은 코어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전 안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볼락의 말에 대장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30대 중반인 볼락은 브리앙과 같은 6서클 마도사지만 인화가 뛰어나고 지략이 출중해서 현실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따라서 결계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는 머리가 돌아가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결계 안으로 들어갈 방도가 있어 꺼낸 소리겠지?"

나이켄의 말에 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이라는 용병이 정령사라고 들었습니다."

볼락의 말에 나이켄의 차가운 얼굴이 살짝 움직였다.

"이 결계가 엘프들만 통과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하나의 가능성이 나옵니다. 엘프들이 가진 특성이라면 아무래도 정령 친화력일 겁니다. 따라서 하룬이라는 용병 역시 결계를 통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볼락의 말을 들은 나이켄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본부에 또다른 엘프들을 생포해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회신의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엘프 건을 맡은 메라크전투단의 무식한 놈들이 엘프들을 다 죽여버리고 그들을 통해 흑마력을 흡수해 버린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또 다른 엘프 놈들을 생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살아남은 엘프들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수중에 있는 그 하룬이라는 용병을 어떻게든 설득해야만 합니다."

"흐음! 고문이 아니라 제대로 된 협박을 하자는 건가?"

나이켄의 말에 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땅한 협박 수단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으음."

만신창이로 변한 하룬의 모습을 떠올린 나이켄의 얼굴이 잔뜩 찌그러졌다. 포로가 된 주제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놈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놈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이 솟구치는 것이다.

'만인 본부에서 의심한 대로 놈이 이방인이라면 돌풍 기지로 놈을 위협할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이번에 오는 본부의 요인들이 그 해답을 가지고 올수도 있었다.

"모두 본부에서 귀한 분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성가시지 않도록 1대와 3대는 숲 잎구까지 마수들을 소탕해. 백셀은 놈의 고문을 멈추고 운신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시켜. 나머지는 마수들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도록 기존의 마법진을 더 넓게 확장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라."

"네!"

나이켄의 명령이 떨어지자 회의 참석자들은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 막사를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두 부단주 중 1명 이자 그의 수족인 볼락뿐이었다.

"가능할까?"

"본부에서 판단한 것처럼 하룬이 이방인이라면 현실의 지인들을 사로잡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곳 세상의 돌풍 용병대를 사로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단장님의 말을 들어 보니 하룬이라는 용병이 그래도 가까운 자들에게는 끔찍하다니 고문보다는 그 편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이켄이 하룬과 같이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파악한 것이 몇 가지있었다. 그중에는 하룬이 자신의 대원들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사실도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나이켄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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