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블레이저 (211/278)

 <블레이저>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마수들의 숫자는 많아졌다. 샤룻트는 물론이고 파빗이라고 부르는 곤충형 마수까지 일행을 공격했다.

파빗은 평소에는 길이 1미터 정도의 거대한 애벌레 형태를 하고 아그다왓트 나무 위에서 지내지만 먹잇감이 나타나면 변이를 한다. 변이를 한 놈은 두 쌍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나비 형태로 날개를 비빌 때마다 빛을 내는 가루가 떨어지는데 그 가루는 독이 함류되어 있었다.

위험한 것은 독 가루뿐이 아니었다. 놈은 마치 창처럼 긴 주둥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주둥이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강했으며 네 쌍의 날개는 공기를 타고 자유로운 비행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 공략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처음 나타났을 때 마리를 비롯한 일행들은 휘황한 색채에 갖가지 문양이 그려진 파빗의 날개에 매료되었다. 거대한 아그다왓트 나무 위에서 날아오는 바핏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대한 나비였기에 위험성도 별로 인식하지 못했다.

일행의 머리 위까지 날아온 수십 마리의 파빗들은 마치 빛의 향연이라도 보여 주듯 햇빛을 받아 갖가지 색으로 빛나는 가루까지 뿌리고 있었다. 하룬 일행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의 향연에 입을 벌리고 푹 빠졌다. 감정의 폭이 좁은 하룬까지도 감탄할 정도였던 것이다.

-주인, 독이야.

-뭐?

갑자기 전해지는 싸가지의 의념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저 가루에는 강한 마비독이 들어 있어. 조금이라도 흡입하면 바로 신경이 마비되고 말 거야.

하룬은 싸가지의 경고에 정신을 차렸다.

"숨을 멈춰! 독가루닷!"

하룬의 외침에 다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일행이 무기를 빼들었다. 그래도 마법사인 니켄이 가장 먼저 쓸모가 있는 마법을 펼쳤다.

"윈드 스톰!"

마법 주문과 함께 일행이 있는 곳을 기점으로 강력한 바람이 생성되더니 사방으로 불어 나갔다. 그 바람으로 인해 파빗이 독가루와 함께 멀리 날아갔지만 놈들은 강력한 날갯짓으로 공기를 타고 금방 다시 날아왔다.

"타앗!"

가장 먼저 겨루가 검기를 생성시켜 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은 파빗의 몸통과 날개가 그 검에 잘려 나갈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경지에 이른 겨루의 검은 엄청난 빠르기로 나아갔던 것이다. 

"헉!"

겨루는 작은 날갯짓으로 공기를 타고 검을 피한 파빗의 움직임에 경악성을 토했다. 마치 검이 일으킨 검풍만으로 검의 궤적을 벗어난  것 같았다.

슈욱! 슉! 슉!

마리가 철시를 날렸다. 가장 가는 굵기를 가진 철시였다. 거리도 가까웠기 때문에 놈들이 철시를 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마리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입을 벌려야만 했다. 작은 날개짓만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화살을 피했던 것이다. 방커와 겨루 그리고 에리피안이 무기를 휘둘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파빗은 무기가 일으킨 바람을 타고 표홀하게 날아 공격을 피했던 것이다.

하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기가 일으킨 공기의 파동을 타는 파빗을 마땅히 상대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험삼아 자신이 던진 비수 역시 마찬가지로 헛수고였던 것이다. 일행의 공격이 주춤하자 파빗들은 작정하고 덤벼들었다. 몇 놈은 일행의 위쪽에서 독 가루를 날렸고 나머지 놈들은 빠르게 움직여 무기를 피하며 기다란 주둥이로 일행을 공격했다.

푸욱!

간발의 차이로 주둥이 공격을 피해낸 마리는 주둥이가 아그다왓트 나무 깊이 박힌 것을 보니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 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겨루가 메신저 무빙 스킬을 펼치며 날린 검을 파빗 하나가 피하지 못하고 주둥이로 받아 낸 것이다.

까앙!

"빌어먹을!"

겨루는 질린 얼굴로 자신의 검을 쳐다보았다. 검기까지 주입한 검이었지만 파빗의 주둥이는 부서지거나 베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 주둥이가 몸속에 박히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끔찍하기만 했다.

그래도 이럴 때 제 역활을 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니켄이었다. 니켄은 다시 한 번 윈드 계열의 마법으로 일행의 머리 위까지 떨어진 독 가루를 날려 보내고 화염 계열의 마법을 날렸다.

"파이어 윌!"

화르륵 피어나는 불의 벽이 솟아나자 파빗들은 기겁을 하고 불을 피해 날아갔따. 워낙 빠르게 비행을 하는 놈들이라 그마저도 큰 효과는 없었지만 그나마 가까이 다가온 놈들을 뒤로 물릴 수 있었다.

하룬은 그 가운데에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이고 전 방향을 지향하는 비행 능력은 뛰어나지만 직진하는 비행 속도는 빠르지 않다.'

공기의 흐름을 탈 수 있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지만 공격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다.

"다들 에리피안의 뒤를 쫒아서 무조건 앞으로 달려!"

아무리 무기를 휘둘러도 공기의 흐름을 타고 날 수 있는 파빗을 더 이상 상대할 수는 없다. 일행은 하룬의 명령이 떨어지자 지체하지 않고 그에 따랐다.

당연히 파빗이 일행의 뒤를 따라 날아왔다. 비행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하룬을 제외한 일행을 따라잡을 정도여서 뿌리치기는 힘들었다.

-피닉스, 뒤를 맡아줘.

-알았어요. 문제없어요.

피닉스는 앞을 향해 달려가는 하룬의 어깨에 앉아 화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화르르!

피닉스의 목이 움직이자 화염 역시 그에 따라 움직이며 일행의 뒤를 따라 날아오던 파빗을 위협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화염이 더욱 강해지자 파빗의 날갯짓이 점차 약해졌다. 한참을 달리자 놈들은 점차 멀어졌다. 놈들의 날개 구조와 날개짓의 양식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직진으로 비행하는 능력은 무척 취약했던 것이다.

"휴우!"

한참을 도망친 일핸은 파빗의 종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다들 식겁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이렇게 도망을 치지 않았다면 힘이 빠질 때까지 무기를 휘두르고 마법을 난사하다가 놈들의 그 창과 같은 주둥이에 찔려 온몸의 체액을 다 빨리고 말았을 것이다.

일행은 한숨 돌리며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흇ㄱ을 취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나가 거의 다 소진될 정도로 무기를 휘둘렀던 탓에 일행은 많이 지쳐 있었다.

"이번에도 대장 덕분에 살았네요."

식사를 마친 니켄이 하룬에게 감사 인사를 했지만 하룬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니켄은 하룬의 굳은 얼굴을 보며 영문을 몰라 했지만 하룬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을 둘러싼 공간이 질식할 것 같은 살기에 휩싸인 것을 감지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은 자꾸 위험하다느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태도가 이상해지자 다른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룬의 얼굴을 보니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날카롭게 주변을 쏘아보던 하룬이 소리를 질렀다.

"전투준비!"

하룬의 말에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든 일행은 아그다왓트 나무들 뒤에서 나타나는 검은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르릉.

크르릉.

언제 다가온 것일까? 기이한 생김새의 마수 수십 마리가 일행을 포위하고 있었다. 외형은 인간과 비슷했지만 얼굴에는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과 구멍만 드러난 코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었따. 시꺼먼 피부에는 단단한 각질의 비늘이 돋아 있었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는데 그 끝에는 길고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이 솟아나 있었다.

"블레이저?"

에리피안이 놀라 소리쳤다.

"어떤 마수야?"

"인간과 흡사한 외모에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어 섀도우 맨이라는 별칭이 있는 마수에요. 성정이 포악한 데다가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 이곳에 거주하던 우리 선조들도 두려워 하던 마수라고 했어요."

하룬은 에리피안의 대답을 들으면서 라티카 칸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블레이져라는 상급 마수는 짧은 거리에 불과하지만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마수입니다. 놈의 능력이 바로 마법사들이 쓰는 블링크와 비견할 정도의 공간 이동술 이지요.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놈들이 입으로 화염을 발사하는데 그 화염이 마치 화살이나 짧은 창처럼 생겼다는 겁니다.

블레이저의 문신을 활성화하면 20미터 거리에서는 마음먹는 대로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엄청나게 빠른 놈들이니까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해!"

하룬의 말에 일행은 경각심을 높이고 전투를 준비했다.

쉬익!

"흠!"

에리피안이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빤히 눈으로 지켜보고있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블레이져가 단검에 비견되는 손톱을 찔러 왔던 것이다. 에리피안은 검을 휘두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슉!

휘리릭!

하룬이 날린 단검이 방금 전까지 에리피안의 앞에서 공격하던 블레이저가 있던 자리를 가르고 날아갔다.

"휴우!"

에리피안은 꼭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채 긴장과 두려움으로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고, 고마워요, 대장."

에리피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전대 로드로부터 상급에 해당하는 마수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듣기는 했지만 이런 정도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방금도 하룬이 아니었다면 벌써 블레이져의 손톱에 몸이 난자되고 말았을 것이다.

"실드!"

빠직!

니켄의 주문에 이어 실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블 실드!"

파악!

니켄의 경악성과 함께 그의 앞에 있던 블레이져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사라졌다.

"매직 미사일!"

니켄의 주문과 함께 서른 개나 되는 매직 미사일이 나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일행을 포위한 블레이저를 향해 날라갔다. 유도 기능이 있는 매직 미사일이라면 놈들이 아무리 빠른 움직임을 가지고 있더라도 효과적인 공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놈들의 몸이 매직 미사일에 맞는 순간 희끅하는가 싶더니 피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니켄은 아직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날린 매직 미사일의 유도 기능을 믿는 것이다.

꽈앙! 꽈앙!

유도 기능이 있다지만 목표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놈들이 빠르게 이동하며 교란시키자 매직 미사일은 자기들끼리 부딪쳐 충돌하고 말았다. 니켄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 졌다. 이런 빠른 움직임과 교란을 시킬 수 있는 높은 지능까지 가지고 있으니 제대로 쓸 수 있는 마법이 거의 없는 것이다.

"조심해! 블레이져는 블링크처럼 공간 이동을 하는 마수야!"

마치 환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블레이져의 빠른 움직임을 경험한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정도의 빠르기라면 무기를 휘두른다고 맞아 줄지 의문이었다.

이제 블리이져들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할 태세였다. 겨루와 방커는 눈앞이 시커멓게 변하는 순간 무기를 휘둘렀지만 헛되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가를 뿐이었다. 마리의 철시역시 제대로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룬 일행은 긴장으로 인해 방어구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허깨비를 상대하는 듯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였지만 놈들의 무시무시한 손톱이 가하는 공포는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배후는 확보 했다는 것이다. 니켄의 화염계 마법이 인챈트된 스크롤을 아끼지 않고 쓴 덕분이다.

"파인 홈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하룬이 주변을 경계하며 물었다.

그런 그의 손에서 연방 단검과 비수가 날아가 일행의 큰 움직임에 따른 빈틈을 파고드는 블레이져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에리피안의 눈빛이 뭔가 발견한 듯 반짝이며 금세 얼굴에 생기가 어렸다. 아그다왓트 나무 사이로 반가운 수종이 보였던 것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여기가 파인 홈의 입구에요."

다른 나무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나무지만 아그다왓트에 비하면 일행들이 아는 정상적인 나무처럼 보이는 마그 나무는 계획적으로 식생을 한 듯 멀리까지 보이는 잘 뚫린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럼 저 좁은 길을 따라 달려! 모두 에리피안을 따라 뛰어! 뒤는 내가 책임진다."

하룬은 마수의 힘을 모두 끌어 올린 상태에서 메신저 스킬을 극성으로 펼쳤다.

파리릿!

바닥을 박차고 에리피안을 선두로 달리는 일행의 후미에 자리를 잡은 하룬은 마나를 전력을 끌어 올려 박살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 줄로 늘어선 대여섯 명의 하룬이 동시에 박살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캐르르륵!

박살은 쉴 새 없이 블레이져들의 손톱과 부딪혔다. 공간 이동에 가까운 엄청난 동체 속력을 가진 블레이져들과 하룬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서로에게 무기를 휘둘렀던 것이다. 

'허억! 몸을 뺄 여유가 전혀 없구나.'

일행이 어느 정도 피한 후에는 전력을 다해 도망을 칠 계획을 하고 있었던 하룬은 수십 마리의 블레이져들이 마치 해일처럼 덮쳐 오는 것을 간신히 막아 내고 있었다. 마수의 힘에 메신저 패스트 스킬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탓에 자신 역시 블레이저에 맞먹는 빠르기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자신은 혼자였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땅에 발바닥 대신 엄지발가락만 딛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관계로 메신저 스킬을 펼칠 수가 없어 마나 소모가 심했다. 검기를 유지한 채 지속적으로 마나를 흡수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마나 오션의 마나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었찌만 하룬이 생성한 방어막에도 틈은 있었다. 일부의 블레이져들이 나무 뒤나 나무를 등에 대고 옆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놈들의 빠르기라면 헐레벌떡 달려가는 일행의 뒤를 금방 잡을 것이다.

비수로 처리하기에는 블레이저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모두 나가!

하룬의 다급한 의념에 다섯 정령이 모두 나왔다

-알아서 싸워!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는 정령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정령술을 아는 것도 아니니 상당한 정도까지 각성한 녀석들에게 맡겨야만 했다.

-크크크! 딱 내 스타일이군.

싸가지는 블레이져를 향해 시커먼 독연을 내뿜었다. 비록 안개였지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블레이져들을 향해 날아갔다.

피닉스는 잠시 공중으로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일행의 뒤를 쪽으려는 블레이져의 등으로 화염을 내뿜었다.

등 뒤에서 몰려오는 화염에 놀란 블레이져의 몸이 순식간에 옆으로 이동했다. 화염이 얼마나 뜨거운지 등이 붉게 변해 있었다.

캐륵! 캑!

화가 난 블리이져는 공중을 향해 길게 몸체를 늘이며 입으로 붉은색 물체를 발사했다. 그 붉은색 물체는 마치 짧은 창처럼 보였다.

화르륵!

피닉스느 화염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휘둘러 화염 창을 날려 버리고 다시 부리를 열어 화염을 쏟아 내었다.

키악! 킷킷킷!

공중에 날고 있는 피닉스의 지척까지 이동했던 블레이져는 화염을 피해 급하게 움지였지만 몸은 이미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놈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몸을 굴려 불을 끄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이아는 블레이져 5마리를 자신의 막 안에 가두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수막 안에 갇힌 블레이져들은 특기인 공간 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넓게 퍼진 수막에 갇힌 놈들은 화염 창을 쏘아 내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막은 천천히 범위를 좁히고 있었다.

키악!

블레이져 1마리가 느닫없이 땅에서 솟아오른 소일 스피어에 의해 발바닥이 관통되는 상처를 입자 비명을 지르며 한참 떨어진 곳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크크크!

라이피의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놈이 이동한 곳이 나무 위가 아니라는 것이 실수였다. 어느 틈에 우람한 근육질의 인간형 모습을 드러낸 라이피의 손에 블레이져의 발이 잠힌 것이다. 

으드득! 빠드득!

끼악! 끼아아아!

라이피의 가공할 힘에 의해 붙잡힌 블레이져의 몸이 발과 다리부터 시작해서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라이피는 블레이져의 목을 부러뜨린 후에 다른 대상을 찾아 땅속으로 사라졌다.

다들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지만 그중 발군은 위신느였다.

그녀가 만들어 낸 윈드 커터의 숫자는 백 개가 넘었다. 윈드 커터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빠르게 공간을 이동하는 블레이져들을 향해 날아가 천천히 한곳으로 몰고 있었다.

까가강! 그그그그!

윈드 커터가 놈들의 손톱과 부딪히는 충돌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따. 위신느가 상대하는 블레이져의 숫자는 무려 12마리나 되었다. 12마리의 블레이져들은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윈드 커터를 공간 이동하며 손톱으로 받아 냈지만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윈드 커터는 블레이져의 손톱 공격에 계속 부서졌지만 끝없이 생성되고 있었다. 어느새 한곳으로 몰리고 있는 블레이져의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 죽어 버려!

위신느는 죽음의 위기를 느낀 하룬의 격하게 뛰는 심장박동에 폭주한 모양이다. 나이아와 함께 운명의 실로 맺어진 하룬에게 담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위신느는 마치 미친 것처럼 자신의 모든 힘을 한꺼번에 폭출하고 있었다.

끼아아아!

강철보다 더 단단한 블레이저의 손톱이 부러져 나가고 비명과 함께 허깨비처럼 흔들리던 몸이 난자되기 시작했다. 위신느의 모든 힘이 담긴 윈드 커터의 강도나 그 빠르기를 튼튼한 마수의 가죽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신을 노리는 윈드 커터 앞에는 화염 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라이피와 피닉스는 하나씩 차근차근 블레이져를 죽여 가고 있었다. 나이아의 수막은 어느새 공처럼 작아졌고 그안에는 익사당한 블레이져들의 몸이 하나로 뭉쳐 있었다. 위신느의 윈드 커터는 그 숫자가 서른 개 미만으로 줄어 있었지만 블레이져의 숫자는 이제 겨우 넷밖에 남지 않았다.

싸가지에 의해 당한 블레이저의 사체가 가장 처참했다.

어떤 독을 썼는지 모르지만 새까만 몸에 수없이 많은 수포가 생겼다가 터진 상태로 죽은 블레이져의 몸에서는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 공격은 단순하지 않았다. 모든 정령의 속성을 다 샤용할 수 있는 싸가지는 전투가 길어지자 독액으로 형성된 막을 만들거나 독 안개를 만들어 놈들을 가두어 죽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동족의 비명을 들은 블레이져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룬이 상대하던 여섯 놈의 기세가 한순간에 수그러들었다.

'이제 이놈들만 처리하면 되겠군.'

하룬은 사방에서 들리는 동료들의 비명에 집중이 흔들린 블레이져들을 향해 박살의 검극을 내밀었다. 태극 문양을 이루고 있던 어둠의 마나와 자연의 마나가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왼손과 오른손으로 모여들었다.

"익스플로젼 소드!"

꽈아앙!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아그다왓트 나무들이 몸살을 앓았다.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공중에서는 수없이 많은 나뭇잎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룬은 순간적으로 마나 오션이 텅 비자 힘을 읽고 바닥에 주저않고 말았다. 아직 제대로 수련을 하지 못한 터라 마나량을 조절할 수 없어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눈에 힘을 주어 흙먼지가 가라앉고 있는 전방을 보자 살아 움직이는 블레이져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그 많던 블레이져들이 모두 죽은 것이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하룬은 자신의 품을 향해 날아오는 한 줄기 바람을 안았다.

-아유! 힘들어.

위신느였다. 그새 나머지 놈들을 다 처리한 것이다. 몸의 이곳저곳이 누군가 파먹은 젤리처럼 사라져 있고 탈진된 목소리를 들으니 전력을 다한 모양이다.

-수고했어. 나중에 부를 테니까 들어가서 쉬고 있어.

-헤헤! 나중에 꼭 불러 줘요.

어지간하면 뽀뽀를 하고 들어갔을 위신느지만 이번에는 정말 지쳤는지 그것마저 하지 못했다.

-친구, 나도 지쳤어.

-지치긴 했지만 끝내줬어요.

라이피와 피닉스도 지친 목소리로 하룬의 인사를 받으며 사라졌다.

-하룬, 괜찮아요?

나이아도 힘들었는지 몸체의 선이 흐릿했다.

-난 괜찮아, 고생했어.나이아.

-내가 치료 진동을 해 줄까요?

-아니야, 내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마나가 소진되었을 뿐이야. 힘들었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고 있어.

-그럼 그럴게요.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아공간에 들어가서 소모한 정령력을 보충할 테니 기운이 나면 불러 줘요.

-알았어.

나이아가 사라지고 가장 나중에 돌아온 것은 싸가지였다.

-주인, 내가 지켜 줄까?

하얗게 질린 하룬의 얼굴을 본 싸가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제 귀여운 소년의 형상으로 변한 싸가지가 그런 말을 하니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기분이 느껴졌다.

-괜찮아. 금방 괜찮아질 거야. 너도 힘들었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

-뭐, 이 정도쯤이야. 날 저 저금한 정령들과 같이 취급하지 말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싸가지에 의해 죽은 블레이져의 숫자가 스물이 넘으니 안 지쳤을 리가 없다. 그 증거로 녀석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알아, 네가 최고야!

-흐흐흐, 주인이 칭찬을 하다니 이거 정말 기분 좋은데. 

싸가지는 드물게 짓는 미소와 함께 아공간으로 사라졌다. 정령들이 모두 자신들의 아공간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하룬은 마지막 힘을 끌어 올려 마정석을 수거했다.

알뜰하게 마정석을 다 수거하고 죽은 블레이저의 몸에서 붉은 기운을 흡수한 하룬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마나를 흡수한 상황이었지만 긴장이 풀려서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

문득 뒤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일행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대장!"

자신을 놔두고 도망을 친 줄 알았더니 걱정되어 멀리 가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래도 의리는 있는 녀석들이군.'

꽤 멀리서 달려온 듯 숨을 헐떡이는 일행의 눈은 다양한 모습으로 죽어 넘어진 블레이져들의 사체를 보고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어, 어떻게 이많은 놈들을…….?"

니켄이 침을 삼키며 물으면서도 감탄의 눈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방어구는 넝마가 된 지 오래였고 드러난 부위의 상처와 굳어 버린 피로 인해 하룬의 꼴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엉망이 되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강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놈들이었어. 이젠 힘이 하나도 없어."

니켄은 그런 소리를 하는 하룬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더 무섭소. 대장. 거죽만 인간이지 능력이나 하는 짓은 완전 마수에 버금가니.'

"어떻해요, 대장?"

겨루나 방커와는 달리 같이한 시간이 많았던 마리지만 하룬이 이렇게까지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룬은 자신의 앞에 철퍼덕 앉아 울먹거리는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조금 쉬면 될 거야. 포션 좀 줘 봐."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하룬은 마리가 준 상급 마나 포션과 체력 포션을 연달아 마시고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상급이라서 그런지 빠른 속도로 마나가 채워지고 극한까지 사용한 근육이 피로물질을 배출하고 있었다.

"대장도 그렇고 다들 지친 상태지만 이곳은 위험한데 어떻게 할까요?"

에리피안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많이 지쳐 보이는구나.'

에리피안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정상을 회복하고 나서는 하늘을 향해 삐죽하니 솟아올랐던 큰 귀는 어느새 반으로 접혀 있었고 방어구는 성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얼굴이 깨끗할 리가 없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마법사인 니켈이 걸친 로브가 꽤 좋은 아이템인 듯 때나 먼지가 없었찌만 그의 얼굴 역식 피로에 찌들어 있었고 머리칼은 떡이 져 미끈했던 얼굴은 어느새 거지처럼 변해 있었다.

"니켄, 혹시 잠시 몸을 감추고 피로를 회복할 수 있는 마법진을 펼칠 수 있나?"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니켄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긴 미세한 소음과 냄새만으로도 사냥감을 찾은 상급 마수들이 득실대는 곳이니 마법진을 펼친다 하더라도 온전히 믿기는 힘든 상황이다.

"그럼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안쪽 깊숙이 들어가자, 에리피안.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이 나오나?"

그러고 보니 파인 홈까지는 들었짐나 자세한 사정은 들은 적이 없었다.

"있어요. 발몬 신의 아내였던 아란 님을 기려 건축한 달의 신전이 우리 일족 특유의 결게 안에 있으니 그 안에만 들어가면 마구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에리피안은 혹시 몰라 두려운지 하룬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엘프어로 대답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결계는 어떻게 통과를 하는 거야?"

"두가지 방법이 있어요. 전대 로드의 신물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발몬 신이 세상에 남겨둔 특별한 마나를 쌓은 존재에게는 결게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어요."

"흐음! 그럼 에리피안이 그 신물을 가지고 있는 건가?"

"네. 신물인 목걸이는 워낙 급해서 그만 삼켜 버리고 말았어요."

"아!"

그녀는 다크니스에게 붙잡히기 전에 뺏길까 두려워 무식하게 그걸 삼킨 모양이다. 요컨대 그녀의 말은 신물이 그녀의 뱃속에 있다는 것이다. 목걸이라면 그 크기나 재료를 생각할 때 음식을 소화하거난 움직이는 데 무척 불편했을 텐데 용하게 견디고 있었다.

"빼 낼 방도는 있는 거야?"

"그게……. 사실은 없어요. 단지 제 몸속에 신물이 들어 있으니 통과를 할 수 있을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에요."

안타까웠다. 멀쩡히 살아 있는데 배를 가를 수도 없으니 말이다. 신물을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이 가상했다. 어쨌든 그녀만 결계를 통과할 수 있다고 해도 별문제는 없었다.

"아무튼 일단은 가 보자."

포션을 마셔서 그런지 제법 몸에 힘이 돌아왔으니 다른 마수들이 더 나타나기 전에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한 겁니까?"

니켄이 묘한 눈빛을 하고 물어왔다.

"별거 아니야.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니 조금만 더 힘을 내도록 하자. 자, 출발!"

하룬의 말에 니켄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끄응! 한 발짝도 못 빼겠는데……."

방커는 긴장이 풀려 바닥에 누워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힘을 내, 방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현실로 돌아가서 쉬는 게 나아."

부드럽게 자신을 격려하는 마리의 말에 방커는 해벌쭉 웃으며 발걸음을 때었다.

"이구!"

겨루는 닭살이 돋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연애는 조용한 곳에 가서 해라."

그 말에 방커와 마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예전처럼 격하게 부인하는 대신 보란 듯이 손을 잡고 하룬의 뒤를 따랐다. 함께 위기 상황을 겪으며 숨겨 두었던 서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한 모양이다.

"정말 눈꼴시어 못 봐 주겠네. 나도 빨리 여자 하나 잡든지 해야지."

그래도 커다란 덩치를 가진 두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발을 재게 놀리는 겨루의 눈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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