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아그다왓트 숲 (210/278)

 <아그다왓트 숲>

 슐레츠는 시작에 불과했다.

 화염 지대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반은 물론이고 대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숨 쉬는 것도 어려울 정도의 열기에 사람들의 입술은 쩍쩍 갈라졌고 걸음은 갈수록 느려졌다.

 그런 와중에 슐레츠는 수시로 나타났다. 첫날만 해도 네 차례나 습격을 받았다. 놈들은 가벼운 땅의 진동으로 생물의 접근을 감지하는 것 같았다.

 "재수 없고 지겨운 놈들!"

 니켄은 나름 도움이 되고 싶어 수시로 탐지 마법을 펼쳤지만 마력의 양 때문에 그리 오래는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탐지 마법을 펼쳤을 때는 슐레츠를 감지할 수 없어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라이피를 소환하면 비교적 쉽게 슐레츠의 접근을 감지하고 피할 수 있지만 하룬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상급 마수의 마정석과 가죽이 탐이 났던 것이다. 슐레츠 가죽의 강도와 신축성은 강철 플레이트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이다.

 '이것으로 대원들의 방어구를 만들어야지.'

 하룬은 그런 생각밖에는 없었다. 이런 가죽으로 방어구를 해 입는다면 이제 거대한 다크니스와 어떤 식으로든 싸울 수 밖에 없는 대원들의 귀중한 생명을 지켜 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슐레츠를 기다린 하룬은 첫날 26마리. 둘째 날 27마리나 잡았다. 갈수록 하룬이 슐레츠를 사냥하는 것은 쉬워졌다. 물론 하룬의 메신저 검술도 한 단계 더 도약했다.

 "대장, 그 비수들 레전드 급 아이템이죠?"

 "저 붉은 안개는 도대체 뭡니까? 대장이 펼친 주술입니까?"

 "대장은 마나량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대장의 보법과 검술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이 세계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니켄이 몇 번이나 물었지만 하룬은 그저 묵묵히 자기 일만을 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 자식은 이런 질문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자고로 마법사건 검사건 자신의 비전을 동문이 아닌 외인外人에게 발설하는 법은 없다. 더구나 그런 것을 묻는 것 자체가 예의에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세인의 지탄을 받는 흑마탑인지라 녀석이 유일한 후계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상식이 없을 리가 없다.

 '귀족 출신인가? 가만히 보면 하는 짓이 꼭 노블과 같네. 아니 어릴 떄 마탑에 들어갔다고 한 것 같은데…….'

 안하무인인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말하면 상대방이 꼭 원하는 반응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흘째가 되는 날 오후 늦게 하룬 일행은 드디어 에리피안이 말한 간헐천을 볼 수 있었다. 매캐한 유황 냄새와 함께 수십 개의 열천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이, 냄새야!"

 마리가 코를 붙잡고 오만상을 찡그렸다. 다들 유황 냄새로 인해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에리피안은 옷으로 자신의 코를 틀어막고는 입으로 간간히 숨을 쉬면서 간헐천 사이로 일행을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진짜 열화의 강이네요."

 겨루난 마르다 못해 허옇게 변해 버린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룬 일행은 수백 도가 넘는 간헐천들이 마치 강처럼 이어진 사이의 땅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면과 호수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나이아와 위신느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앗지만 하룬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피닉스 때문이었다.

 -놀라워요. 이렇게 순수한 열기라니.

 피닉스는 전과 달리 각성을 하고 나자 열기를 직접 흡수하고 있었다. 지금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피닉스는 하룬의 어깨 위에 앉아 온몸으로 열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하룬이 느끼는 열기는 일행보다 훨씬 더 강했고 온몸이 익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간간이 입을 열어 폐부 가득히 찬 열기를 뱉어 내는 것을 제외하곤 오가던 대화도 끊겨 버렸다. 겨우 눈만 내놓은 채 천으로 노출된 곳을 모두 가린 상태로 걷고 있는 일행들은 땀도 흘리지 않았다. 땀이 솟아나는 즉시 말라 버렸던 것이다.

 '이건 마치 처음 유니온 밖으로 나갔을 떄와 같잖아. 어디 한 번 해 볼까?'

 하룬은 그때를 떠올리며 마나 플로를 운용했다. 비록 죽기 일보 직전의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 그런 상황에서 마나플로를 스스로 꺠우쳤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흐흡!'

 놀랄 정도로 엄청난 마나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데빌 산맥에 진입하고 나서 마나가 농밀해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은 농밀한 정도가 아니라 마치 젤리처럼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마나 플로에 집중을 해서 그런지 더 이상 열기는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하룬은 의식을 나누어 열 중 여덟은 자신의 내부에 그리고 열 중 둘은 외부 상황을 살피면서 마나 플로를 운용했다.

 마나 오션은 순식간에 마나로 가득 찼다. 아무리 회전을 해서 밀도를 높여도 더 이상을 무리였다. 더 밀어 넣으면 폭발할 것 같은 위기감에 마나 플로를 멈추려던 하룬은 마나가 방향을 바꾸어 전신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마나플로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내겐 아직도 채워지려면 한참 먼 108개의 마나 스토리지가 있었지.'

 슐레츠를 상대하면서 어둠의 비수가 흡수한 마수의 정혈이 마나 스토리지를 채우긴 했지만 그 양은 미미했다. 거기에 뜨거운 열기 속에 녹아 있는 자연의 마나를 채우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마나 스토리지 역시 마나 오션의 마나처럼 어둠의 마나와 태극 문양을 그리며 채워지기 시작했다.

 일행의 이동속도는 갈수록 느려졌다. 익스퍼트에 이른 일행의 능력으로도 그나마 상상을 초월하는 열기에 간신히 견디는 것이 최선일 정도였던 것이다. 그나마 니켄이 수시로 쿨링 마법을 펼쳐 주었기에 겨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떄라도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식사하는 것도 귀찮아 육포에 소금을 탄 물로 대충 먹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땀을 배출하는 것을 고려해서 식염수는 되도록 많이 마셨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이동한 하룬 일행은 드디어 화산 지대의  중심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성한 숲을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렇게 염원하던 우드캐슬에 도착한 것이다. 우드캐슬 깊숙한 곳에 파인 홈이라고 불리는 엘프들의 고향이 있을 것이다.

 "휴우! 살 것 같다!"

 "이 청량한 공기라니!"

 30미터의 키에 지름이 3~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헤캣츠 나무들의 무성한 가지와 잎이 열기를 막아주는 숲에 들이서자 하룬 일행은 비로소 얼굴을 가렸던 천을 풀고 마음껏 호흡할 수 있었다.

 '조금 아쉽군!'

 하룬은 열천 지대를 무사히 통과한 것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자연의 마나를 축적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겨우 이틀에 불과했지만 자연의 마나는 그동안 축적된 어둠의 마나의 반 정도에 해당할 정도로 빠르게 쌓였던 것이다.

 -난 이제 들어갈게요.

 피닉스는 더 이상 열기를 느끼지 못하자 하룬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더 커졌군.'

 겨우 이틀 동안 피닉스의 덩치는 예전의 버처리비크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거의 두 배 정도는 커진 것 같았다. 아마 그 능력도 꽤 많이 올랐을 것이다.

 "우리 일족의 탄생지는 파인 홈으로 불리며 이 해캣츠 숲을 지나 아그다왓트 숲 깊숙한 곳에 있어요. 로드의 말이 맞는다면 하루 이틀 정도만 가면 될 거에요."

 에리피안의 말을 하룬이 전하자 일행은 그게 그렇게 반가웠는지 다들 만세를 불렀다. 사실 숲 안의 온도 역시 다른 곳보다 높앗지만 방금 전에 통과했던 화산 지대에 비하면 청량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던 것이다.

 "조심해야 해요. 우드캐슬이라고 불리는 해캐츠 숲과 아그다왓트 숲에는 많은 포식 동식물들은 물론이고 마수들이 득실대는 위험한 곳이에요. 파인 홈으로 가는 길에는 특히 열독熱毒을 가진 써모비라는 마수 벌과 육식을 하고 사는 독거미 마수인 실크루가 살고 있다고 했어요.

 "써모비? 실크루?"

 써모비와 실크루는 라티카가 말한 상급 마수였지만 에리피안의 말을 들으니 벌과 거미의 외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크기가 크고 대단한 독침을 지녔다지만 벌과 거미가 마수라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도 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두 마수는 강력하고 치명적인 독과 함께 수백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공격을 하여 뼈까지 먹어치울 정도로 강력한 이빨과 탐욕스러운 식욕을 가지고 있대요. 우리를 공격한 슐레츠도 써모비에게 걸리면 1분안에 뼈도 남지 않을 정도로 변한대요."

 하룬은 쉬고 있는 일행에게 에리피안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헉! 벌이 육식을 한다고요? 거미야 원래 그러니까 이해를 하지만 정말 괴이한 마수들이군."

 마리가 질색을 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마수겠지. 아무튼 조심해야 해.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출발하도록 하자."

 "네, 대장."

 하룬의 말에 일행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 며칠 동안이나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 터라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하루 더 쉬어 가고 싶지만 그런다고 피로가 다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오래 쉬지 못할 상황이라면 그냥 내일 출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니켄이 알람 마법을 꼼꼼하게 펼치고.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는 트랩을 설치해, 그 이후 경계는 내가 맡을 테니까 푹 쉬어."

 "대장도 좀 쉬셔야 하지 않겠어요?"

 마리가 걱정을 했지만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하긴 하룬은 그 지독한 화산 지대를 통과하고도 별로 변화가 없었다. 마리를 비롯한 일행은 하룬의 그 모습에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강철 체력이었던 것이다.

 별일은 없었다.

 숲의 초입이라 상대적으로 안쪽보다 뜨거워서인지 아니면 써모비라는 마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람 마법이나 트랩을 건드리는 기척은 전혀 나지 않았다.

 저녁부터 시작해서 기온은 큰 폭으로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열화 지대를 통과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기가 몰려 왔던 것이다. 그 진원지는 바닥이었는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잠을 자던 일행이 모두 꺨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무슨 기온 변화가 이따위야!"

 바닥에서 냉기가 느껴져 잠에서 깬 일행은 서둘러 마수 가죽을 꺼내 몸에 둘둘 말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룬은 거의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나 플로를 운용해서 흡수한 마나를 순수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두 가지 성질의 마나를 함꼐 축적하는 것이 좀 불안했지만 이제 별도리가 없었다. 두 마나의 세력에 평형을 이루게 만드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둠의 마나가 자연의 마나와 반발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마나량만 따지면 어둠의 마나가 자연의 마나보다 훨씬 더 많이 축적된 상태였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오랫만에 스튜를 끓여 빵과 함께 든든하게 아침을 먹은 하룬 일행은 숲의 중심부에 있다는 엘프의 고향 파인 홈으로 향했다.

 헤캐츠 숲은 다른 종류의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해캐츠 나무들뿐이었다. 대신 해캐츠 나무에 기생하는 덩굴 식물들과 나무 사이의 땅에 자라는 몇 가지 종류의 식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열기가 확연하게 수그러들었다.

 "정말 살 것 같네.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그러게.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만 해도 몸이 날아갈 것 같아."

 대원들은 점차 긴장을 풀고 해캐츠 숲이 주는 신선한 환경을 즐겼다. 하지만 앞장선 에리피안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정찰에 신경을 많이 쓰는 에리피안 때문에 일행의 발걸음은 느렸고 나중에는 겨루가 자신이 정찰을 맡겠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앞장서서 걷던 에리피안이 갑자기 멈추더니 노면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 위로 훌쩍 올라간 것이다.

 "전부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해요. 스트림 보그에요."

 일행은 황급히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거대한 해캐츠 나무는 바닥에서 3미터 정도의 높이 까지는 뿌리였고 그 위로 급격하게 굵기가 줄어드는 몸통을 가지고 있는 형태였기에 짐승의 허벅이 뼈들이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뿌리는 지름만 해도 4미터가 넘었다.

 일행은 긴장한 에리피안의 경고를 의식해서 모두 3미터 높이의 나무뿌리 위로 올라섰다.

 일행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이 걷고 있던 길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작은 요동을 일으키며 이동했다. 마치 아이 머리통만 한 해캐츠 열매를 발견한 니켄이 그걸 바닥으로 던졌다.

 스르르.

 열매는 순식간에 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땅에 자라고 있던 풀들은 멀쩡했고 열매를 삼킨 부위도 이내 복원이 되었다. 그걸 본 하룬 일행은 마른침을 삼키며 놀랐다.

 "땅 거죽 바로 아래로 스트림 보그가 움직이고 있어요. 일정한 무게가 넘으면 바로 스트림 보그로  빨려 들어가게 돼요. 언제 어디까지 움직일지는 알 수 없어요."

 하룬이 에리피안의 말을 번역해 주자 사람들은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럼 어떻게 이동을 하지요?"

 "조금 기다려 보자."

 니켄의 말에 그렇게 대답을 한 하룬이지만 이 흐르는 늪이 언제 사라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 흐르는 늪을 발견한 에리피안도 그건 모르는 눈치였다.

 "언제 이 흐르는 늪이 멈출지 모르니 일단 몸을 단단히 고정한 상태로 휴식을 취해."

 할 수 없이 가진 휴식은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차라리 나무 위로 이동을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무리였다. 자신과 티노 정도라면 모르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이용하려면 균형 감각은 물론 몸놀림이 빠르고 가벼워야만 했다.

 밤이 되자 바닥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코가 시릴 정도의 냉기는 순식간에 체온을 떨어뜨렸고 에리피안부터 시작해서 다들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하룬은 박살에 마나를 주입해서 거대한 뿌리를 파내어 제대로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 위에 마수 가죽을 깔고 등을 대고 앉으니 올라오는 냉기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다.

 하룬이 하는 양을 지켜본 일행은 저마다 무기로 자신이 쉴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마수 가죽을 꺼내 몸에 걸쳤다. 등을 대고 앉으니 살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 눕질 못하니 불편하기만 했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밤을 보낸 일행은 몇 번이나 해캐츠 나무의 파편이나 열매를 던져 확인을 한 끝에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정말 기분 나쁜 곳이네."

 과묵한 방커가 인상을 찡그렸다. 땅바닥은 어제와 비교해서 외관은 별로 별하지 않았지만 허연 냉기로 인해 풀들 위에는 서리가 맺혀 있었다. 그러다가 햇살이 무성한 잎 사이로 비치기 시작하자 녹으며 이슬처럼 변했다.

 "자, 다시 출발하자."

 하룬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밤새 굳엇던 몸을 푼 다음 출발했다. 한 시간 정도를 움직인 후 가볍게 아침을 먹은 일행은 또다시 발을 옮겻지만 정오가 넘은 시간에는 다시 흐르는 늪은 만나 멈추고 말았다.

 일행은 다시 근처의 나무뿌리에 올라 어제처럼 쉴 장소를 손수 만들었다.

 "젠장! 이렇게 가다가 언제 도착하지?"

 니켄은 짜증이 나는 모야잉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 저 꽃 너무 아름답다!"

 마리의 탄성에 일행의 시서닝 모인 곳은 몇 그루 떨어진 해캐츠 나무 위였다. 일직선으로 자라는 다른 해캐츠 나무와는 달리 10미터 정도 높이에서 두 개로 나눠진 가지 사이에 보는 이의 눈을 홀리는 손바닥 크기의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나무에 뿌리를 내린 것인지 아니면 가지 사이에 흙이나 부식토가 날아들어 뿌리를 내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송이의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흐읍! 무슨 향기가 이렇게 좋지?"

 자고로 향이 너무 진하면 거부감이 드는 법이지만 이 꽃의 향기는 그렇지 않았다. 맡을수록 황홀한 기분이 들면서 좀더 많이 들이마시고 싶게 만들었던 것이다.

 "흐흐! 내가 하나 따다 줄까?"

 "정말이요? 그래 줘요."

 마리는 니켄의 제안에 반색을 했다. 에리피안도 뚫어지게 그 꽃들을 바라보는 폼이 무척 가지고 싶은 눈치였다.

 "플라이!"

 니켄은 플라이 마법을 펼쳐 그 꽃들이 피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밧줄에 싸가지를 동화시켜 몇 송이 따 가지고 올까?'

 이 정도 향기라면 차로 만들어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하룬은 아공간에서 밧줄을 꺼냈다. 싸가지가 동화한다면 어렵지 않게 저 아름다운 꽃을 따 가지고 올 수 있었다.

 막 니켄이 손을 뻗어 꽃송이를 따려는 순간이었다.

 "악!"

 니켄이 비명을 질렀다.

 "무, 뭐야?"

 니켄의 머리가 순식간에 꽃들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수십 개의 꽃들이 한꺼번에 움직여 마치 거대한 입처럼 변하더니 삽시간에 그의 머리를 삼킨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꽃들이 점점 더 커지며 그의 상체까지 삼키기 시작했다.

 파바랏!

 하룬이 던진 밧줄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여 니켄의 허리를 감았다.

 "타앗!"

 하룬은 기합성과 함께 밧줄을 끌어당겼다. 끄는 힘에 대항하는 강력한 인력引力도 잠시 니켄의 머리와 상체가 꽃들 사이를 빠져나와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돌아와!"

 하룬의 명령에 밧줄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니켄을 감은 상태로 날아 그에게 돌아왔다.

 "어때요, 대장?"

 경동맥을 짚어 보니 느리지만 확실한 박동이 느껴졌다.

 "살아 있어."

 하룬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니켄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황홀한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얼굴과 목 그리고 어깨에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상처가 수십 군데나 나 있었다. 틀림없는 흡혈吸血의 증거였다. 살까지 먹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시무시한 식물이 아닐 수 없었다.

 '향기로 유인해서 목표물로 하여금 극도의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 사이에 잡아먹는 식물이군.'

 이게 에리피안이 말한 포식 식물의 실체였다.

 "무시무시하네. 사람을 잡아먹는 꽃이라니!"

 "향기는 이렇게 좋은데 ……."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니켄과 꽃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일단 해독부터 해야겠군.'

 하룬은 나이아를 소환하려고 하다가 혹시 몰라 싸가지를 소환했다.

 -수고했어.

 -흐흐. 뭐 이정도야.

 -그런데 이 녀석이 흡입한 향기에는 뭐가 같이 들어 있는 거지? 독인가?

 -독은 아니야. 저 꽃이 주기적으로 사방에 분사하는 꽃가루는 흡입한 상대방의 코 점막의 신경세포와 반응해서 극도로 쾌감을 느끼게 해 주는 일종의 마약이지. 양만 잘 조절해서 쓰면 진통 작용은 물론 강정과 최음 효과까지 있는 최고의 물질이야.

 녀석의 설명에 의하면 정말 진귀한 약재였다.

 -그래? 이 친구의 정신이 돌아오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코 점막에 잔뜩 붙은 꽃가루를 뗴어 내고 한동안 그냥 놔두면 돼. 그래도 강렬한 자극을 받은 상태라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아마 유사 반응으로 인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게 될 거야.

 -일단 꽃가루부터 회수해서 따로 모아 놔.

 싸가지는 연기처럼 변해 니켄의 콧솟으로 사라지더니 금세 다시 빠져나왔다. 다시 모습을 나타낸 녀석의 손에는 꽃가루를 뭉쳐 만든 작은 구슬이 생겨나 있었다. 하룬은 그 구슬을 인벤토리에 넣고 눈빛을 빛냈다.

 하룬은 일단 꽃 한 송이만 채취해 보기로 했다. 허벌 길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하룬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고 싶은 식물이었던 것이다.

 -가서 뿌리까지 뜯어 와.

 -그 정도라면 문제없어, 주인. 다만 저놈은 어디서든지 살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으니까 조심해서 다뤄야 해.

 싸가지는 그답지 않은 걱정까지 하며 밧줄과 동화되어 날아갔다. 가지 사이로 파고든 밧줄은 그 식물을 둘둘 감아 마치 공처럼 만든 상태로 다시 날아왔다. 그것이 가까워지자 향기가 짙어지며 정신이 아득해지고 아랫도리가 불끈하는것이 정말로 강력한 최음 효과를 가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룬은 일단 그 식물을 아공간에 넣었다. 아공간에 넣는 순간부터 시간이 정지되니 죽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꺼내 차근차근 연구를 해 볼 생각이었다.

 포션까지 마신 니켄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정말 황홀했는데."

 니켄은 아직도 최음의 극치를 느끼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온 후에는 좀 떨어진 곳으로 가 축축하게 젖은 속옷부터 갈아입었다.

 하룬은 니켄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싱긋 웃어 주었다. 조심스럽게 다른 일행의 표정을 살핀 니켄은 그들이 모르는 눈치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으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들은 니켄은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뇌가 녹아 버릴 것 같은 극도의 쾌감을 느낀 것이 전부라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한낱 꽃조차 마수에 버금갈 정도로 무서우니 정말 조심해야겠어요."

 애초에 꽃을 따 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자신을 위해 꽃을 따러 갔다가 봉변을 당했기에 마리는 니켄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니켄이 정상을 되찾자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새벽에 마수 가죽을 두르고 입을 호호 불면서 출발할 일행은 해가 하늘 높이 솟으면 흐르는 늪 때문에 할 수 없이 쉬어야만 했다.

 그렇게 사흘을 꼬박 이동한 하룬 일행은 드디어 목적지로 짐작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그다왓트 숲이에요! 이 숲 안에 파인 홈이 있어요."

 나무 한 그루의 크기가 현실의 5층 건물이나 되는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아그다왓트는 속껍질을 보호하는 겉껍질이 엄청나게 두꺼운데 그 재질이 연하면서도 적당한 수분을 품고 있어 엘프들이 그걸 파서 집을 만든다고 했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져 수만 년은 족히 살 수 있는 아그다왓트는 주변의 생명력을 끌어들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숲의 정령들이 많이 머문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아그다왓트는 엘프들이 주식으로 삼을 수 있는 열매를 맺고 겉껍질은 실로 짤 수 있는 하왓트 섬유가 나온다.

 '죽어 가는군.'

 아그다왓트 숲을 본 하룬 일행의 한결같은 인상이었다.

 무성해야 할 잎은 누렇게 변색됐을 뿐 아니라 그 수도 무척 적었고 나뭇가지는 가늘었다. 원래의 색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거무튀튀한 색으로 한눈에도 병이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규모 화산 폭발 때문에 이렇게 변했어요. 화산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폭발로 인한 분진으로 햇빛이 오랫동안 들지 않았고 지하에 뜨겁고 차가운 물이 번갈아 흐르면서 숲이 엉망으로 변했어요. 동물들도 다 떠나고 몇 종의 식물 외에는 다 죽어 버리자 우리 일족들은 할 수 없이 이곳을 떠났답니다. 그래도 아직 이렇게 살아 있으니 정말 고마워요."

 에리피안은 눈물을 흘리며 숲 초입에 서 있는 거대한 아그다왓트 나무를 만지며 뭔가 속삭이더니 한참 만에 일행에게 돌아왔다.

 "파인 홈은 아직 무사하대요."

 파인 홈은 아그다왓트 숲 깊숙한 곳에 있다고 했다.

 "설마…… 대화를 한 거야?"

 "네. 기운이 없긴 하지만 아셈은 오랫동안 우리 일족과 정을 나눠 온 친구거든요."

 진짜 대화를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물에 정령이 있다는 생각은 지구에서는 미신 혹은 고대의 토템으로 여겨지는 데 반해 이 세계는 그게 실재實在하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지?"

 "하루는 꼬박 걸릴 거에요. 전에 없던 마수들이 돌아다닌다고 하니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몰라요."

 에리피안의 말을 들은 하룬은 일행을 모아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제 목적지가 코앞이니까 절대 긴장을 풀지 마. 마수들도 많다고 하니까 조심해서 이동해야 해. 오늘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일찍 안쪽으로 들어간다."

 잘 곳은 에리피안이 찾아 주었다. 얼마나 오래전에 쓰던 거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셈이라는 이름의 아그다왓트의 몸체에는 먼지가 쌓인 몇 개의 방이 있었던 것이다.

 대충 청소를 하고 나니 누울 자리가 마련되었다. 흐르는 늪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누워 자지 못했던 일행은 하나둘 마수 가죽 위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참! 팔자 한번 좋군.'

 쉬라는 말에 아무런 경계도 없이 눕자마자 곯아떨어진 일행을 보던 하룬이 밖으로 나와 아그다왓트의 편평한 가지 위에 걸터앉았다.

 아셈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그다왓트 나무에서 하룻밤을 보낸 하룬 일행은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하룬이 정찰을 맡기로 했다. 일행들이 그간의 여정을 통해 너무 많이 지쳤던 것이다.

 -위신느, 정찰을 부탁해.

 -걱장 마요, 하룬.

 하룬은 정찰을 위해 위신느를 소환했다. 위신느와는 의념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기에 즉각 상황에 대비할 수 있었다. 다만 이동하면서 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했기에 예기치 않은 상황에는 대처하기가 좀 힘들 뿐이었다.

 아그다왓트 숲은 마수들 천지였다. 오래전에 엘프들의 주식이었을 정도로 당분과 수분이 풍부한 아그다왓트 열매 때문인지 수많은 초식동물들이 살아가기에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는 맹수들과 마수들도 많았다.

 위신느의 정찰을 바탕으로 이동하자 숲 안에 돌아다니는 마수를 어느 정도는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신느의 정찰이 사방을 다 커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행의 후미에서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따라온 마수들이 있었다. 그것도 거의 근접한 상태에서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친구, 뭔가 뒤에서 다가오고 있어!

 라이피가 전해 온 의념에 하룬은 화들짝 놀라 위신느를 불러들였다.

 "뭔가 다가온다! 몸을 숨겨!"

 하룬의 낮은 외침에 일행들이 아그다왓트 나무 위로 뛰어오르거나 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후 억센 근육질이 특징적인 마수들이 나타났다.

 체고 2미터에 체장 3미터 정도는 되는 거대한 마수는 억세보이는 턱과 마치 톱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어 샤벨 타이거나 비슷한 외모를 가졌지만 털이 없는 대신 시꺼먼 가죽을 가지고 있었고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헉! 샤롯트다!"

 얼마나 놀랐는지 에리피안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낮은 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두에 있던 샤롯트의 큰 귀가 쫑긋하더니 그녀가 숨어 있는 아그다왓트를 향해 뛰어올랐다.

 "헛!"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거의 5미터 높이를 뛰어오르는 것이나 착지할 때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마치 표범을 보는것 같았다.

 마리와 겨루가 낮게 경악성을 토하자 뒤에서 따라오던 샤롯트 2마리가 그들이 올라간 아그다왓트를 향해 도약했다.

 "죽엇!"

 이미 발각된 것을 느낀 겨루가 뛰어오르는 놈을 향해 떨어지며 대검을 휘둘렀다. 대검에는 마나가 잔뜩 주입되어 검기가 발현된 상태였다.

 까앙!

 깨앵!

 샤롯트는 바로 위에서 떨어지는 대검을 앞발의 발톱으로 간신히 받아 냈지만 바닥에 맨몸으로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금방 몸을 일으켰는데 투기가 솟았는지 전신의 근육이 폭발적으로 불끈거렸다.

 노란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눈 전체로 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체가 두 배로 커졌다. 

 원상태로도 충분히 위험한 놈이 변이까지 하자 하룬 일행의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놈은 이제 막 착지를 하는 겨루를 향해 피어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크아아앙!

 저주파의 피어를 듣자 겨루는 본능적으로 생기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순간적으로 전신의 힘이 쑥 빠져나갔다.

 "위험해!"

 마리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날아간 철시 덕분에 샤롯트가 덮치는 것을 겨우 막았지만 철시는 어느새 부러져 있었다. 달려들던 와중에도 날렵하게 몸을 틀며 철시를 받아쳤지만 앞발톱 하나가 부러진 샤롯트는 이글거리는 화염을 뿜어내며 마리 쪽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놈이 막 도약하려는 찰나 니켄의 주문이 들렸다.

 "블랙 레인!"

 샤롯트를 둘러싼 지경 5미터의 공간에 검은 비가 내렸다. 그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떨어진 블랙 레인을 샤롯트는 피할 수가 없었다.

 끄아앙!

 블랙 레인은 강력한 접착성을 가진 듯 도약을 하려던 샤롯트의 두 발을 간신히 지면에서 떼엇지만 이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크 필드!"

 니켄의 주문과 함께 샤롯트가 발을 딛고 있던 지역이 시꺼멓게 변하더니 순식간에 놈의 몸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샤롯트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검게 변한 바닥은 마치 살아 있는 늪처럼 놈의 거대한 동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니켄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음 주문을 외웠다.

 "타깃 제어!"

 니켄의 눈이 섬광처럼 빛나는가 싶더니 샤롯트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검은 안개가 그 빛을 다시 감쌌고 샤롯트는 더 이상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멈추었다.

 "타깃 지배!"

 샤롯트의 머리 앞에 생성된 휘황한 빛덩어리가 빙글빙글 돌며 그 외곽부터 실처럼 풀어져 샤롯트의 코와 입 등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마법에는 문외한이지만 일전에 입수했던 오츠왈드 학파의 마법서는 대충 본 하룬이다. 이런 정신계 마법은 4서클이나 5서클도 펼칠 수 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이어 펼치는 것은 6서클에 올라야 한다.

 자신만 해도 딜런 등을 제외하고는 능력을 숨기는 터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동행을 하면서 뭔가 수상한 면을 자꾸 보게 되었지만 지금은 그의 실력이 높을수록 하룬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라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쪽에는 이미 에리피안과 방커가 샤롯트 1마리를 상대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겨루가 빠르게 움직이며 다른 1마리를 상대했다. 마리는 그 양쪽에 번갈아 철시를 날려 보조를 하고 있었다.

 처음 모습을 보였을 때와는 달리 체고가 4미터에 체장은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체로 변한 샤롯트가 날뛰자 5명의 힘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순간적으로 동체가 두 배 정도 커지는 것이 놈의 능력이군.'

 놈의 힘이 새겨진 문신이 활성화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자신의 몸이 두 배로 커진다면 어떤일이 일어날까?

 하룬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마나가 주입된 방커의 대검이 놈의 몸통을 몇 번 베었지만 놈의 가죽은 잠시 혈선이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가죽 자체의 방호력이 높다기 보다는 빠르게 회복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하룬은 흑마법으로 샤롯트를 제압하는 니켄 쪽을 잠시 보다가 에리피안과 방커가 상대하는 놈들에게 주의를 돌렸다.

 '더 몰려오기 전에 끝장을 내자! 뇌전의 힘이여, 가랏!'

 하룬이 의지를 세우자 암기 벨트가 외투 밖으로 개방되며 전격의 대거가 빗살처럼 날아갔다.

 크앙!

 블리츠 대거에 맞은 샤롯트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놈의 몸에 시퍼런 뇌전이 흐르며 방전되었다. 하지만 놈은 쓰러지는 대신 발광을 하면서도 하룬을 향해 노란 살광을 담아 쏘아보고 있었다.

 "호오! 뇌전의 힘을 견딘단 말이지. 어디 이것도 한 번 견뎌 봐라."

 하룬은 발광을 하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고 겨루가 상대하는 샤롯트를 향해 피치 스킬로 어둠의 비수를 던졌다. 어둠의 비수는 바닥의 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날아가다가 목표물 앞에서 빠르게 솟아올랐다.

 푹!

 어둠의 비수는 겨루에게 집중하고 있던 샤롯트의 이마에 깊숙히 박혔다. 매번 보면서도 신기한 일이지만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가는 어둠의 비수를 제대로 막아 내는 대상을 본 적이 없었다.

 크허어엉!

 샤롯트는 고통이 큰지 숲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포효를 하며 그 거대한 동체를 힘없이 바닥에 눕히고 말았다.

 '역시 괴물 같은 비수라니까.'

 블리츠 대거조차 겨우 손톱 한 마디가 들어간 것이 고작이었지만 어둠의 비수는 단단한 가죽과 뼈를 뚫고 자루가 겨우 보일 정도로 깁숙히 박힌 것이다.

 "안 돼!"

 뒤에서 니켄의 절규가 터지는 순간 마리가 나무 위에서 날린 철시 세 발이 연속해서 하룬의 뒤로 날아갔다.

 놀라 몸을 돌린 하룬은 니켄의 흑마력장을 빠져나온 샤롯트가 그를 향해 덮치다가 철시 공격을 받자 몸을 둥글게 말아 착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놈의 샛노란 눈에서는 연방 흉광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정신 제어 마법을 벗어났다고?'

 아마 그런 것 같았다. 자신의 마력장이 깨진 것에 망연자실한 상태로 주저앉은 니켄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니켄, 피햇!"

 하룬이 넋이 빠져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니켄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피닉스를 불렀다.

 -피닉스!

 하룬의 손에서 화염의 비수가  떠났다.

 깡! 깡! 깡!

 깨앵!

 샤롯트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날렵하게 몸을 뒤집거나 도약하며 비수를 피하며 강철 같은 발톱으로 몇 번인가 비수를 튕겨 냈지만 정령과 동화된 비수의 공격을 막지는 못했다. 놈의 뱃속 깊이 박힌 화염의 비수는 이내 고열을 발산해서 놈을 통째로 익혀 버렸다.

 피닉스의 능력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여실하게 알 수 있었다.

 놈의 코과 입 그리고 귀로부터 뜨거운 연기가 빠져나오더니 노릿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내장을 비롯한 살들이 익기 시작한 것이다.

 -가죽 상할라. 피닉스, 그만 돌아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샤롯트의 몸통에서 화염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놈의 몸에 들어 있는 지방이 타기 시작한 것이다.

 화염 지대에서 화기火氣를 흡수해서 그런지 피닉스의 능력이 엄청나게 올라가는 바람에 상급 마수의 가죽 1장이 날아가 버렸다.

 -캬하하!

 피닉스는 달라진 자신의 능력을 직접 확인하고는 평소에는 들을 수 없었던 기괴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하룬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블리츠 대거, 돌아와!'

 놈의 몸 전체를 감싸고 방전하던 시퍼런 뇌전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블리츠 대거가 암기 벨트로 돌아왔다. 어퍼 오션으로 돌아오는 뇌전의 양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꽤 많이 증가해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점청 흡수하는군.'

 어둠의 비수도 그렇고 이 전격의 비수도 그렇고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상대의 몸에서 필요한 것을 흡수하는 것은 비슷했다.

 어느새 어둠의 비수에 맞은 놈의 몸은 서서히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어둠의 비수가 정혈을 흡수하는 것이다.

 -그만! 더 빨아먹으면 가죽이 상한단 말이야. 이제 됐으니까 돌아와!

 어둠의 비수는 미련이 남는지 겨우 보이는 자루가 들썩거렸지만 포기를 한 듯 암기 벨트로 돌아왔다. 암기 벨트로 돌아온 어둠의 비수는 흡수한 어둠의 마나를 하룬의 몸속으로 전해 주었다.

 그때 갑자기 하룬의 눈이 커졌다.

 '뭐야?'

 하룬은 자신이 어둠의 비수에 정령을 동화시킨 줄 알고 무심코 의념을 보낸 것인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돌아왔다고?'

 그렇다면 어둠의 비수 속에 자신의 의념에 반응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젠가 정령들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오래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대장, 빨리 이동해야 해요! 샤롯트는 군집성 마수에요."

 에리피안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고기 익는 냄새가 났으니 마수들이 모여들 것은 분명했다.

 하룬은 에리피안에게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고는 일행에게 소리를 질렀다.

 "서둘러! 마수들이 몰려들 거야. 에리피안의 뒤를 따라 달려."

 하룬은 서둘러 마수의 머리통을 부수고 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마정석을 빼내 위신느가 안전하다고 말했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샤롯트는 정말 끈질긴 놈들이었다. 그렇게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이동을 했지만 결국 놈들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두 번이나 꼬리를 따라잡혀 격력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두 번 모두 하룬이 마무리를 하기는 했지만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쫒는 터라 상대할 방법도 찾지 못하고 정신없이 도망치기만 했던 것이다. 떄문에 어느새 에리피안은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하룬은 엉망이 되어 버린 일행에게 측은한 시선을 주었다. 그들 4명의 얼굴은 창백했다. 거친 숨결도 그렇고 느려진 동작까지 세 번에 걸친 샤롯트와의 격전에서 심한 피로감을 느낀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혼자 상대할 테니 모두 나무 위로 올라가서 쉬고 있어."

 더 이상은 쫒기고 싶지 않은 하룬은 놈들과 정면으로 붙을 작정을 했다. 그래서 넓은 공터를 찾았다. 이참에 메신저 검술의 끝을 보고 싶었다.

 "저도 한 놈은 맡지요."

 니켄은 가지고 있던 중급 마나석 다섯 개와 미스릴 가루를 꺼내 흑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샤롯트를 테이밍하지 못한 것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던 니켄은 이번에야 말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겠다는 각오로 세심하게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위험 상황이 되면 지원 사격을 하겠습니다."

 겨루와 방커는 허리에 스크롤을 몇 장씩 차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는 철시를 시위에 걸고 화살통은 에리피안이 들고있었다.

 준비를 모두 끝낸 하룬 일행은 하룬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그다왓트 위로 올라갔다. 하룬이 미끼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하룬은 니켄이 그린 흑마법진의 가장자리에 서서 놈들을 기다렸다.

 크르르!

 위협적인 샤롯트들의 피어가 들려왔다. 나무 위로 올라간 이들은 오금이 저렸지만 하룬은 무심한 얼굴로 놈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놈들은 나무 뒤에서 쉽게 나오지 않고 하룬을 관찰했다. 이제까지완 달리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된 모양이다. 상당한 지능까지 갖춘 놈들이고 보니 상대하기가 쉽지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특별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한놈을 필두로 1마리씩 넓은 공간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꽤 넓은 공터였음에도 불구하고 12마리의 샤롯트가 들어서자 공간이 꽉 차 버렸다.

 으르릉!

 낮으면서도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피어를 내는 샤롯트들은 혼자 서 있는 하룬을 포위했지만 쉽사리 달려들지 않았다. 뭔가 꺼리는 것이 있는지 자꾸 하룬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설마 놈들이 나에게 겁을 먹은 걸까?'

 지난번 슐레츠도 그렇고 샤롯트들도 자신에게 먼저 공격을 하지 않았다. 아카족 대원들에게 듣기론 마수들을 적의를 보이는 대상에게는 가차 없이 덤벼든다고 했는데 조금 달랐던 것이다.

 "안 오면 내가 먼저 가지."

 하룬은 박살에 마나를 주입하고 바닥을 박찼다.

 파앗!

 검풍이 일며 박살의 푸른 오러 날이 샤롯트의 이마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지만 목표한 놈은 어느 틈에 몸을 날려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하룬의 몸은 잔상을 남기며 놈을 끝까지 따라갔다.

 까앙!

 끄응!

 박살을 받아 낸 샤롯트의 강철 같은 발톱이 부러졌다. 통증이 심한지 놈은 본능적으로 앞발을 든 채 뒷발로 바닥을 박차 뒤로 날아갔지만 하룬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속하게 앞으로 날아가며 박살의 푸르스름한 검첨을 놈의 목덜미로 꽂아 넣었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짜릿한 느낌이 전해졌을 때 사방에서 그를 향해 덮쳐 오는 샤롯트를 감지한 하룬은 검을 쥔 상태로 몸을 거꾸로 회전시켜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놈의 머리위로 뛰어올랐다.

 파앗!

 하룬이 있던 바닥은 어느새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샤롯트 3마리는 하룬 대신 바닥을 발톱으로 강하게 판 상태로 동료의 머리 위에 올라선 하룬을 향해 흉광을 뿜어냈다.

 크르르!

 '역시 이상하군. 왜 변이를 하지 않는 거지?'

 하룬은 자신에게 흉광을 쏟아내는 샤롯트 중 1마리의 눈을 응시했다. 다른 의도는 없었지만 하룬은 놈의 이글거리는 흉광 가운데 한 가닥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날 두려워 해? 마수가? 왜지?'

 크와아앙!

 하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샤롯트의 붉은 안광이 전신으로 퍼지더니 이내 동체가 두 배로 커졌다. 그와 동시에 다른 녀석들도 변이를 일으켰다.

 "그래, 그래야 싸울 맛이 나지."

 하룬은 왠지 마수들이 두렵지 않았다. 프로즐리와의 전투를 겪고 난 후부터는 그랬다. 아무리 강력한 마수들이라도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타앗!"

 하룬은 한 줄기 기합과 함께 시퍼런 오러 날을 생성한 박살과 함께 몸을 날렸다.

 깡! 까앙! 가깡!

 커다란 공터는 순식간에 강력한 충돌음과 휘날리는 풀 조각 그리고 흙먼지로 엉망이 되었다. 무려 11마리나 되는 샤롯트를 상대하는 하룬의 몸은 마치 분신술을 쓴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박살을 휘두르고 있었다.

 "더 빨라졌어."

 "그러게, 완전 괴물이 되어 가는 거 같아."

 겨루와 방커는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크게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대장이라면 어떻게든 놈들을 다 죽일 수 있을 거란 근거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는 하룬은 신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놓쳐 버리고 마는 인간과 마수들의 공방은 엄청났다. 두 배로 커진 거대한 샤룻트들이지만 그 움직임은 재빠르고 기민했으며 무섭도록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격돌의 와중에 공터를 둘어싼 나무들이 몸살을 앓았다. 껍질은 물론 속살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베이고 잘려나간 나무들은 물론 바닥을 뒤덮었던 물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붉은 표도가 보이는가 싶더니 그마저도 강렬한 바람에 이끌려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나무 위로 올라가 불안하게 인간과 샤룻트 간의 격전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일행의 눈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랏!"

하룬의 고함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것일까? 

샤룻트들은 하룬이 벼락처럼 고함을 지를 때마다 폴짝 뛰어 올랐다가 갖가지 모습을 보이며 죽어 가고 있었다.

어느 놈은 화염에 휩싸여 발광을 하다가 죽었고, 어느 놈은 시퍼런 뇌전의 방사 속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격렬한 경련과 함께 죽었다. 또 어느 놈은 몸의 정혈이 다빨려 나간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박살에 의해 급소가 찔리거나 베여 죽은 놈들의 사체는 깨끗했다. 그렇게 1마리씩 죽이니 결국 12마리 모두 바닥에 그 육중한 동체를 누이고 말았다.

빠직! 콰직!

"저 소리는 정말 적응이 안돼."

마리는 치를 떨었다.

"마정석을 척출하기 위해서 그런 거니까 참아."

방커는 그렇게 마리를 위로하면서도 마수의 머리통이 통째러 짓밟히는 끔찍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짙은 눈썹을 꿈틀 거리며 몸을 움찔했다.

"후우! 내가 보기에는 우리 대장이 더 마수 같다."

기껏 마법진을 그려 놓았지만 결국 소용이 없게된 니켄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형 말이 맞아. 우리 대장은 인간으로 보기에는 좀……."

겨루는 굳이 뒷말까지 하지 않았지만 다들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수를 잡고 나면 여지 없이 엷은 적무에 휩싸여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하룬의 모습은 그야말로 마계에 사는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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