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벨제라트 화염 지대 (209/278)

 <벨제라트 화염 지대>

 중간에 길을 바꾸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하룬 일행은 코엠성을 떠난 지 보름이 되었을 때 드디어 벨제라트 화산 지대의 초입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늘을 가린 무성한 숲은 힘겹게 통과해서 산 정상까지 올라왔을 때 벨제라트 화산 지대는 마치 그림처럼 그들의 눈 앞에 모습을 보였다.

 "과연 화산 지대 답군."

 앞이 툭 터진 산봉우리에 선 하룬은 멀리 보이는 높고 험준한 산이 연이어 솟아오른 높은 지대로부터 날아오는 뿌연 분연은 물론이고 매캐한 유황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수시로 터지는 산정의 분화구들이 즐비하다는 반증이었다.

 "수고했어, 다누!"

 "후후! 아닙니다, 대장님."

 다누 덕분에 브롤프 30마리를 만난 것을 빼고는 마수를 피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몬스터들 역시 흑색 오크 정찰대와 몇 번 조우했을 뿐이다. 물론 맹수들은 끊임없이 나타났지만 이 중에서 맹수를 두려워할 이는 없었다.

 "이제 돌아가라."

 "아닙니다. 제가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다누는 하룬의 말에 펄쩍 뛰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개인적으로 지도를 받아 메신저 무빙 스킬이 중급에 오른 터라 다누는 하룬을 단순히 단체의 대장이 아니라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에리피안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대원들이 우리 소식을 궁금해할 테니 어서 가서 무사하다고 전해."

 산맥의 외곽 쪽은 마법 통신기가 그나마 간간이 작동을 했지만 안쪽으로 들어서자 심한 마나 유동으로 인해 전혀 작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누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공성전이 어떻게 되었으니 궁금하니 갔다가 푹 쉬고 여유가 나면 다른 대원들과 함께 다시 와서 이곳에서 대기해."

 그 말이 끝나고 난 후에야 다누의 얼굴이 환해졌다.

 "알겠습니다.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다누는 잡을 새도 없이 올라왔던 숲으로 사라졌다.

 '대원들이 다 온다면 좀 낫겠지.'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기에 이렇게 단촐하게 온 것을 내심 후회하고 있던 하룬이었다.

 '미노와 수니도 순정석의 기운을 흡수하느라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버처리비크들과 동행할 걸 그랬다. 녀석들이 있으면 마수들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지. 지금보다 많이 강해져야 진짜 내게 도움이 될거야.'

 하룬은 버처리비크에 대한 아쉬움을 애써 털어 냈다.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아 부활이 가능한 이방인 대원들만 끌고 왔으나 갈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자. 일단 여기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산을 내려가자."

 "네. 대장."

 대원들은 분분히 배낭을 내려놓고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식사 당번인 겨루가 니켄과 장난을 치며 빵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던 하룬은 문득 벨과 아리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래서 일행과는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벨이 알려 준 대로 정신을 집중한 다음 벨과 아리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들의 얼굴을 강하게 떠올렸다.

 -벨!아리!

 뇌파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동안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간이 날 때마다 본능적으로 수련에 매진했었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워낙 집중하는 데는 익숙한 하룬이라 오래 걸리지 않아 통신이 이루어졌다.

 -오빠!

 -오빠아!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으로 벨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아리의 다정하고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세상에 잇으면서도 그녀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

 -이제 벨제라트 화산 지대에 도착했어.

 -칫! 하여튼 무슨 일만 하면 정신을 쏙 빼놓는다니까. 그동안 연락 한 번 안 하고!

 대뜸 벨이 삐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미안해!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미안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것 같다.

 -괜찮아요, 오빠. 큰일을 하는데 작은 일까지 신경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아리는 벨과는 달리 자신을 충분히 이해해 주니 다행이다. 아리라고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을 텐데도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하! 날 알아주는 건 아리밖에 없다니까!

 -칫! 언니는 아주 여우야! 방금까지도 나와 같이 오빠 흉을 잔뜩 보고 있엇으면서 막상 연락이 되니까 그렇게 안면을 바꾸다니!

 -얘, 얘는 내가 언제?

 -으이그! 나랑 통신할 때마다 오빠한테 먼저 연락할까 하면서 칭얼거리는 것을 내가 괜히 신경 쓰게 한다고 말렸더니 이젠 완전히 딴소리네!

 -말도 안 돼!

 사정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것도 하룬에게는 마냥 좋게만 느껴졌다. 마치 두 사람과 함께하고 있는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지금은 별로 시간이 없어서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어.

 하룬의 말에 둘은 말싸움을 그쳤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불러 본 거야. 별일 없지?

 -응.

 -네.

 아리는 현재 기지에 없었지만 별다른 위험이 없는 터라 굳이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간결하게 대답을 했다.

 -유니온에서 보낸 물품은 받았어?

 -네, 오빠. 저들의 눈을 의식해서 일부러 바이크로 물품들을 옮겨 왔어요.

 아리의 대답에 하룬이 안심했다.

 -잘했어. 이제 부족한 건 없지?

 -한동안은요. 하지만 쏘우 오빠가 워낙 재료를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리의 말에 하룬은 미소를 지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연구실에 틀어박혀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물건들을 만들고 연구에 전념하는 쏘우의 모습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쏘우는 태생적으로 과학자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위치는 노출되지 않았겠지?

 -당연하죠. 일정 거리를 움직인 후에는 자장풍을 발생시켜 저들의 촉수를 차단했어요. 그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어요.

 하룬은 안 봐도 눈에 선해 자신도 모륵 ㅔ미소를 짓고 있었다. 특수군을 비롯해서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치로 감시를 했을 텐데 거센 자장풍이 불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것이다.

 이제 자장풍까지 인위적으로 생성시킬 정도라니 정말 뿌듯했다. 돌풍 기지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벨과 아리 그리고 아즈만 덕분이다.

 -무슨 장치를 해 두었을 텐데.

 -물건들 사이에 장치한 위치 추적 장치나 우리의 종적을 알릴 만한 것들을 모두 제거했으니 안심해도 될 거야, 오빠.

 아마 벨이 꼼꼼하게 챙겼을 것이다. 갈수록 감정이 풍부해지는 벨의 목소리에 의기양양함이 느껴졋다.

 -다행이다. 둘 다 수고했어. 아! 식사가 다 준비된 모양이야.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하룬은 둘과 작별 인사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나눈것만으로도 만족해하며 뇌파 통신을 끊었다.

 "어휴! 더워."

 땅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열기에 견디다 못한 방커가 기어코 방어구 외투를 벗어 왼손에 둘둘 말아 버렸다.

 "대장. 목적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힌 겨루도 견디기 힘든지 숨을 헉헉거리고 있었다.

 "에리피안. 아직 멀었나?"

 하룬의 질문에 일행의 앞에서 걸어가던 에리피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화산 지대의 초입에 불과해요. 제가 로드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틀 정도는 더 가야 '끓어오르는 호수'가 나타날 거에요. 그곳을 지나 사흘을 더 걸어가야 우리 일족의 고대 거주지였던 아그다왓트 숲에 도착해요. 최종 목적지는 숲 깁숙한 곳에 있는 파인 홈이라는 지역이에요."

 "우왁! 정말 죽겠군."

 니켄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화산 지대로 들어와 꼬박 사흘을 내리 걸었는데도 초입이라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주변 기온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햇볕의 열기뿐 아니라 지열地熱까지 가세한 것이라 어떻게 피할 방도도 없었다.  일행이 것고 있는 검붉은 암반 지대에 보이는 거라고는 이글거리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밖에 없었다.

 "잠시 저 바위 밑에서 쉬고 가자."

 아직 쉴 때는 아니었지만 더 강행하다가는 일행들의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룬의 말에 사람들은 힘을 내어 높이가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가 만들어 낸 그늘로 향했다.

 검붉은 바위가 만들어 낸 그늘은 무척 커서 모두가 들어갈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조차 앉거나 바위에 기댈 수가 없었다. 바닥과 바위가 모두 너무 뜨거웠던 것이다.

 일행은 선 자세로 가죽 물통 안에 있는 뜨거운 물을 조금씩 마셔 마른입을 적셨다.

 "정말 지옥과 같은 곳이네요."

 지난 사흘 동안 별말이 없엇던 마리조차 얼굴을 찡그렸다.

 "지표 가까이에 마그마가 흐르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화염 지대라더니 정말 엄청나게 뜨거운 곳이네요."

 니켄의 말에 겨루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꾸를 했다.

 순간 하룬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뭔가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곳에서도 마그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나?'

 하지만 그 의혹은 곧 사라졌다.

 "레인지 쿨링!"

 니켄의 주문과 함께 주변 대기가 금방 차가워진 것이다. 마치 열탕 속에 있다가 얼음 굴에 들어간 듯 서늘하다 못해 한기까지 느껴졌다.

 사람들은 코를 벌렁거리며 차가워진 대기를 폐부 깊숙이 마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열 때문에 다시 대기의 온도는 올라가 벌써 차가운 기운이 사라졌지만 더 이상은 올라가지 않았다. 니켄 쪽을 보니 선 자세로 수인을 아직 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니켄이 하룬에게 말했다.

 대장, 앉아서 쉬셔도 됩니다. 제 마력을 주입하면 10분정도는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럴까?"

 바닥은 차가운 대기와는 달리 지열 때문인지 벌써 많이 데워진 상태지만 마법으로 인해 온도가 한결 내련간 덕분에 모처럼 한낮에 바닥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니켄 덕분에 이런 호사를 다 누려 보네."

 "하하하! 제 마법이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정통 흑마법을 5서클까지 마스터했다더니 마력을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가운데서도 어렵지 않게 말까지 하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이 앞다투어 니켄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바닥에 앉아 예상하지 않았던 서늘한 대기를 즐겼다.

 방커와 마리는 아예 눈을 감기까지 했다. 밤에도 너무 더워 잠을 설쳤던 것이다. 겨루는 하룬의 충고대로 로그아웃을 하고 두 시간 정도라도 눈을 붙였지만 그들은 그렇게 자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자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니켄 덕분에 제대로 쉬던 하룬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 쪽으로 어떤 존재가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에 전면을 쓸어 보던 하룬은 라이피의 의념을 들을 수 있었다.

 -친구. 이상한 놈들이 이쪽으로 온다.

 라이피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지하를 통해 뭔가가 다가온다는 소리였다.

 "니켄, 마법 해제시켜! 다들 일어나서 바닥을 경계해!"

 하룬의 다급한 지시에 니켄은 마법을 해제시켰고 나머지는 무기를 빼 들고 바닥을 주시했다.

 드드드.

 경미하지만 주의력을 끌어 올린 일행 모두가 충분히 감지할 수 잇는 진동이 바닥으로부터 느껴졌다.

 "피햇!"

 하룬이 고함치는 순간 일행은 마치 메뚜기처럼 자신의 능력을 다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순간 방금 전까지 하룬 일행이 앉아서 쉬던 큰 그늘의 땅이  솟구치며 검붉은 흙과 돌들이 하늘로 비산했다.

 끼르륵!

 방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지반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고 그 속에서 대기를 요동치게 만드는 저음파와 함께 거대한 몸집을 가진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간 외피는 털이 없엇지만 헤아릴 수 없는 돌기가 나 있었고 작은 머리에는 눈은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톱날처럼 생긴 이빨이 무수히 난 입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뒷발로 선 놈의 동체는 체고가 4미터에 이르렀고 몸길이는 얼추 3미터는 되었는데 단단하게 보이는 어깨에 달린 앞발은 꼭 삽처럼 생긴 세 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엇다.

 "슐레츠에요. 도망쳐요!"

 에리피안이 뾰족한 소리로 경고를 하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기이한 괴수의 모습에 정신을 놓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도 몸을 돌려 뛰려고 할 때 에리피안의 앞쪽 땅거죽이 멀리서부터 갈라지며 다가왔다.

 "끼악! 틀렸어!"

 에리피안은 절망과 공포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다시 하룬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기 시작했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에 이제야 정신을 차린 니켄이 처음 자리에 나타난 괴수를 향해 마법을 펼쳤다.

 "다크 매직 미사일!"

 검은 색의 매직 미사일 열두 개가 니켄의 가슴 앞에 생성되더니 이내 엄청난 빠르기로 괴수를 향해 날아갔다. 괴수는 반응속도가 늦는 것인지 아니면 매직 미사일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인지 가만히 있었다.

 팍! 팍! 팍!

 본래대로라면 쓰러지거나 비명이라도 질러야 정살인데 슐레츠라는 괴수는 그냥 서 있었다.

 "이럴 수가!"

 니켄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두 개의 매직 미사일에 직격당했지만 슐레츠의 외양은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느새 마리가 화살을 날렸던 것이다. 철시 3발이 슐레츠의 거대한 동체를 향해 날아갔다.

 팅! 턱! 턱!

 철시는 슐레츠의 검붉은 외피에 튕기거나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날린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가공할 방어력을 가진 외피였다. 오러가 깃든 철시는 마법사의 실드도 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 방어력을 알 만 했다.

 당황한 표정을 짓던 니켄과 마리가 다시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주문 영창과 시위를 당기는 대신 고통스러운 얼굴로 귀를 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슐레츠가 아까와는 다른 소리를  냈는데 놀랍게도 그 소리는 일종의 피어였다.

 끄르르르!

 성대가 아니라 코로 내는 것처럼 들리는 저주파는 사람들의 얼굴을 단숨에 일그러뜨리게 만들었다. 일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처럼 강력한 통증을 유발했던 것이다.

 "마수들이 또 온다!"

 어정쩡한 상태로 사태들 주시하던 일행들을 향해 마수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땅거죽이 수십 개의 선을 만들며 연속적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모두 바위 위로 올라가! 당장!"

 하룬은 자신의 품으로 달려드는 에리피안의 허리를 감고 바위 위로 솟아올랐고, 니켄은 어느새 플라이 마법을 펼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사이 세 대원은 미처 피할 틈이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무기를 뽑아 들고 막 땅 밖으로  솟구치는 마수의 머리를 공격했다.

 파앗!

 근접전에 약한 마리는 공격도 하기 전에 위로 솟구치는 흙과 돌멩이 들로 인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지만 전문 궁사답게 그사이 철시 4발을 연속적으로 날렸다.

 틱! 틱! 틱! 틱!

 제대로 시위를 당겼다가 놨지만 오러를 머금은 철시는 힘없이 괴수의 가죽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까앙! 깡!

 창졸간에 찌르고 벤 공격이지만 이미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겨루와 방커의 무기가 괴수의 괴이하게 생긴 손을 맞고 튕겨 나왔다.

 "큭!"

 "헉!"

 두 사람은 무기를 통해 전해지는 반탄력에 경호성을 토하며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손톱도 아닌 살이 마치 거대한 강철 덩어리 같았다.

 그사이 한 번의 도약으로 10미터 높이의 바위 위로 오른 하룬은 에리피안을 내려놓고 아공간에서 밧줄을 꺼냈다.

 "밧줄을 꽉 잡아!"

 휘리릭!

 플라이 마법으로 공중으로 떠오른 니켄과는 달리 세 이방인 대원들은 처음 나타난 슐레츠가 바위로 가는 길을 막고 있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타앗!"

 하룬은 세 대원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밧줄을 단단히 잡은 것을 확인하고는 힘껏 끌어당기며 몸을 돌렸다.

 끄르르륵!

 플라이 마법으로 떠올라 바위 쪽으로 이동을 하던 니켄이 슐레츠가 터트린 저주파 피어에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가 간신히 마법을 유지했다.

 파밧! 파악! 파밧!

 세 대원이 있던 자리에 슐레츠들이 솟구친 순간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하늘로 떠올랐다. 하룬이 밧줄을 잡아채며 몸을 돌린 탓에 그들의 몸 역시 허공에 뜬 상태로 움직였다. 하룬은 계속 밧줄을 앞으로 잡아채며 천천히 몸을 멈추고 팔로 밧줄을 돌렸다. 프로즐리의 힘을 끌어 올린 탓에 세 대원과 밧줄의 무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대원들은 무사히 바위 위로 안착할 수 있었다.

 "후아! 살았다!"

 "고맙습니다, 대장님."

 "뭐 저런 괴물들이 다 있어!"

 죽다가 살아난 세 대원은 겨우 숨을 고르며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놈 이름이 슐레츠라고?"

 비록 엘프어는 모르지만 에리피안이 녀석이 나타났을 때 소리쳤던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룬이 에리피안에게 물었다.

 "네, 대장. 상급 마수 중 하나에요. 불을 뿜으며 대상자에게 공포와 고통을 주는 피어를 사용하고 오러로도 어쩔 수 없는 단단한 가죽을 가지고 있어요. 눈이 없는 대신 후각과 청각이 극도로 발달한 슐레츠들은 주로 화산 지대처럼 뜨거운 땅속에 살지만 서늘한 것을 좋아한다고 해요. 특히 온도가 낮은 동물의 피를 무척 좋아한다고 전해지는 무서운 놈이에요."

 에리피안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녀 역시 처음 보는 마수인 모양이다. 10마리가 넘는 놈들은 눈이 없어 일행이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한 듯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마리, 오러를 최대로 주입해서 공격해 봐!"

 "네, 대장."

 마리는 방금 전에 당했던 수모를 생각하곤 이를 갈며 등에 메고 있던 강탄성궁을 풀어 시위에 철시를 걸었다.

 화르르.

 마리가 마나를 주입하자 철시는 빠르게 푸른색으로 변하며 마침내 촉에 오러광이 생겨났다.

 파앙!

 있는 대로 마나를 주입한 철시는 시퍼런 뇌전처럼 가만히 서 있는 슐레츠를 향해 날아갔다.

 "맞았다!"

 철시가 슐레츠의 머리통에 맞자 방커가 펄쩍 뛰며 기뻐했지만 마리는 오만상을 짓고 있었다. 예상했던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저 괴물은?"

 슐레츠의 머리통에는 철시가 박혀 있기는 했지만 촉이 겨우 박혔을 뿐이었다. 철시는 놈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자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놈들은 철시가 날아온 곳을 찾으려는 듯 평소에는 얼굴 옆쪽에 찰싹 붙은 상태로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 귀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오러도 통하지 않는 가죽을 가지고 있다니."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법도 통하지 않습니다. 저 정도면 본 서클의 마법이 아니라면 생채기를 내는 것도 어렵겠는데요."

 니켄도 머리를 흔들었다. 같은 마법 공격이라도 흑마력을 기반으로 펼친 흑마법은 백마법보다 한 단계 이상의 위력을 보인다. 무생물을 대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살아 있는 생물체에게는 죽음과 관계가 있는 흑마법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5서클 흑마법사를 보통 마도사라고 칭하는 것이다.

 에리피안이 울상을 하며 하룬을 쳐다보았다.

 "어쩌지요, 하룬 대장?"

 "뭘?"

 "슐레츠들은 복수심이 강하고 보통 10마리가 같이 사냥을 하는 마수라고 해요. 한 번 목표를 정하면 마지막 1마리가 죽을 떄까지 공격을 하는 것은 물론 절대 물러나는 법이 없는 놈이라고 했어요."

 "일단 좀 생각을 해 보자."

 하룬은 무심코 바위에 앉았다가 금방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바위는 땅보다 훨씬 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원들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연방 발을 바꾸고 있었다.

 아무리 거대한 바위라고는 해도 오랫동안 지열로 데워진 상태에 한낮의 강렬한 열사에 의해 최고조로 온도가 올라가있는 상태였다.

 "젠장! 뭐 이런 곳이 다 있어!"

 방커가 오만상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사이 마법 아이템이 분명한 부츠를 신은 니켄이 연방 깡충거리고 있었다. 그리거 보니 가죽 타는 냄새가 여기저기에서 나고 있었다.

 "이곳도 오래 머무를 수 없겠군."

 하늘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높이 솟아 있었지만 하룬 일행의 눈빛은 암울하게 변하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쿠웅! 쿵! 쿠웅!

 굉음과 함께 땅속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을지 모르는 높이 10미터. 상단부의 넓이가 50제곱미터나 되는 거대한 바위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슐레츠 몇 마리가 바위의 옆쪽 땅을 파고 있었고 나머지는 바위를 그 거대한 동체로 밀어 대고 있었다.

 "설마 이런 거대한 바위가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니켄이 불안한 얼굴로 말하자 대원들의 얼굴에도 진한 두려움이 떠올랐다.

 오러로도 제대로 공략할 수 없는 마수라니!

 "괜히 상급 마수가 아니군."

 하룬은 처음 만나는 상급 마수의 능력에 감탄했다.

 "아! 이제 생각났다. 라티카 칸이 말하길 무적의 방어력을 주는 것이 슐레츠의 문신이라고 했지."

 에리피안에게 이름을 듣고 낯설지 않다 했더니 들은 적이 있었다. 과연 무적의 방어력이라고 할 만 했다.

 '하지만 거죽이 단단하다고 못 죽일 건 없지.'

 하룬은 조금씩 흔들림이 더 커지고 있는 바위 위에 서서 너무 커서 잘 닫히지 않는 놈의 입안을 공략할 방도를 궁리했다.

 해답은 금방 나왔다. 그가 가진 비수들 중 전격의 대거와 어둠의 비수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정령들이라면 상대가 가능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놈들의 숫자였다. 

 '어차피 비수들은 격전 중에 사용해야 효과가 극대화되니까. 어쩌면 좋은 대련 상대가 될지도……."

 메신저 검술이라면 놈들은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와중에 틈을 보아 비수를 쓰기로 작정한 하룬이 바위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대장님!"

 "대장!"

 갑자기 바위 아래로 뛰어내린 하룬의 모습에 일행은 깜짝놀라 바위 끝으로 달려와 아래를 내려다봤다.

 청각이 뛰어난 슐레츠들은 하룬이 땅바닥에 내려앉는 기척을 알아채고는 빠르게 달려왔다. 나름 지능이 뛰어난지 바위를 몸으로 밀던 놈들 중 세 놈만이 달려들었고 나머지는 여전히 같은 움직임을 지속했다.

 "타앗!"

 하룬은 메신저 스킬을 펼치며 마나가 주입된 박살을 휘둘렀다.

 까앙!

 역시 생각대로 삽처럼 생긴 앞발의 위력은 강철의 강도를 넘어섰다. 마치 개가 뒷발로 선 모습과 비슷했지만 놈들의 팔은 가공할 정도의 빠르기로 움직였다. 움직일 때는 자세를 바꾸는 대신 깡충거렸지만 앞뒤 좌우로 빠르게 이동했다.

 퓌앙!

 세 개의 삽처럼 갈라진 녀석들의 앞발은 무시무시한 풍압과 파공성을 내며 하룬의 몸을 짓쳐 왔지만 시퍼런 오러가 일렁이는 박살은 그의 몸과 함께 놈들보다 한층 더 빠르게 움직였다.

 여섯 개의 앞발과 하룬의 박살은 연방 부딪히며 충돌음을 내기 시작했다. 하룬은 포위되지 않도록 발을 빠르게 놀리며 놈들의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대장의 팔이 열 개는 되는 거 같아!"

 "그러게. 나도 대장의 검술은 처음 보는데 엄청나다. 세 놈과 맞붙었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어."

 바닥이 뜨거운지도 모를 정도로 흥분한 겨루와 방커가 몸을 낮춘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마리는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언제라도 철시를 날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 봐야 동수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인데……."

 니켄은 아무도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하며 언제 꺼내 든것인지 스크롤 한 장을 만지고 있었다.

 '제길! 이곳은 마나의 유동이 너무 심해서 텔레포트 스크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불안하게 흔들리는 니켄의 눈이 어느 사이에 커지고 있었다.

 '뭐야? 검에 마나를 주입한 상태에서 저 정도의 빠른 보법과 쾌검을 구사하다니!'

 동시에 3명의 하룬이 떨어진 곳에서 박살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자 니켄은 결국 입까지 벌리고 말았다. 그의 동체시력이 3명이 1명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인데 이런 자가 있다는 것은 니켄은 들은 적이 없었다.

 '암기술과 정령술만이 밑천이 아니었군. 저 정도면 검술실력으로도 용병계의 영웅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그와 맞붙어서 진다고는 절대 인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저 정도의 빠른 보법과 검술을 펼치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저 정도라면 소드 마스터와 맞붙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놀란 그의 눈에 뭔가 번쩍하는 것이 스쳐 갔다. 하룬 쪽에서 터진 섬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슐레츠에게 이어지더니 잠시 후 그놈이 바르르 떨며 급기야는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무, 뭐지?"

 "그건 비수에요. 대장의 특기지요."

 마리의 말에 눈에 힘을 더 준 니켄은 또다시 하룬에게서 터져 나온 섬광과 슐레츠에게 이어지는 빛의 선을 볼 수 있었다.

 "또 던졌다!"

 신이 나서 소리치는 방커에게 잠시 눈길을 주다가 다시 하룬 쪽을 본 니켄은 다른 1마리의 마수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비수이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비수는 그저 비수일 뿐 저렇게 거대한 동체를 가진 마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마법적인 힘이 담긴 비수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랬구나! 비수들이 마법 아이템들이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겨우 이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헉! 비수가 저절로 움직여!"

 놀란 방커의 말이 그가 떠올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바다겡 쓰러진 슐레츠의 입으로부터 빛나는 어떤 물체가 빠져나와 하룬에게로 날아가더니 이내 빠르게 방향을 틀어 나머지 1마리에게도 날아갔던 것이다.

 "전격이닷!"

 이번에는 1마리만 상대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부르르 떨며 천천히 쓰러지는 슐레츠의 몸에서 시퍼런 뇌전이 흐르는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설마 에고를 가진 아이템인가? 아니지, 그런 건 들어 본적이 없어. 하지만 저 정도의 위력이면 최소 레전드 급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저렇게 살아 잇는 생물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제까지 그렇게 빨리 움직이고도 전혀 지친 기색 없이 몰려드는 나머지 마수들을 상대하는 하룬의 움직임이었다.

 하룬의 패턴은 유사했다. 놈들에게 포위당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슐레츠를 상대하다가 빈틈을 발견하면 비수를 던졌는데 놀라운 점은 전투가 시작된 지 벌써 꽤오래 지났는데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마나량이 얼마나 되기에……?'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살에 솟아난 검기는 물론이고 잔상이 또렷하게 남을 정도의 가공할 빠른 움직임과 쾌검을 구사하는 것을 보면 익스퍼는 확실했지만 이렇게 오래 유지하는 것을 보면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진 것 같기도 했다.

 같은 패턴이지만 다른 어떤 공격을 하지도 못한 채 슐레츠는 1마리씩 쓰러지도 있었다. 지루하지만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자신이 아는 어떤 검사도 저렇게 오래 검기를 유지한 상태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바위 위의 사람들은 이제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슐레츠가 다 하룬에게 몰려들었기에 점차 더 강하게 흔들려 불안하게 만들었던 바위의 요동도 멈춰 있었다.

 하지만 위기도 찾아왔다.

 다른 놈들을 해치우고 세 놈이 남았을 때였다.

 갑자기 놈들이 그 커다란 입을 크게 벌렸다.

 화르르!

 어마어마한 화염이 놈들의 입속에서 폭사되었다. 세 놈이 뿜어낸 화염은 이내 하룬의 몸뿐 아니라 큰 공간을 모두 채워 버렸다. 화염은 놈들의 입속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고 하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 돼!"

 "대장! 대장!"

 "안 돼요. 대장!"

 세 대원이 비명처럼 하룬을 불렀고 에리피안은 알아들을수 없는 말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제길!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단 말이야!'

 니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플라이!"

 내려간다고 무슨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펼친 마법이었다.

 "익스플로……."

 플라이 마법을 펼친 상태에서 마법을 펼치려던 니켄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화염 속에서 세 줄기 섬광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살아 있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니켄의 몸이 한순간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으윽!"

 다행이 지면과 4미터 정도를 남겨 놓았을 때여서 머리와 엉덩이에 지지는 것 같은 격통을 제외하고는 다른 고통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니켄은 어느새 화염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3마리의 슐레츠가 차례로 쓰러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쿵! 쿠웅! 쿠웅!

 따잉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니켄은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은 하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 대장!"

 갑자기 하룬의 몸 뒤에 휘광이 생겼다. 순수한 감탄에서 우러나온 눈물이 빛을 굴절시켰던 것이다.

 "걱정했나, 니켄? 난 괜찮다."

 묵직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니켄은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 긴장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떨어질 때 머리를 바닥에 찧어서 그런 것일까? 니켄의 의식은 어느새 흐려지고 있었다.

 하룬은 죽은 슐레츠의 몸에서 정혈이 빠져나와 변한 엷은 적무赤舞에 휩싸여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또 뿔이 솟아났던 것이다. 갈수록 이런 변화는 빠르고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정혈을 흡수하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빨라진 것이 다행이다. 이전에는 다른 대원들에게 이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적이 없엇는데 이곳에서는 다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어서 그런지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은 그에게 두려운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데.'

 그나마 투구로 인해 머리에 솟은 뿔들을 보지 못해 다행이다. 만일 그것까지 보았다면 필경 자신을 마계의 마왕이나 그 권속인 마신으로 보았을 것이다.

 정혈을 모두 흡수하고 뿔이 솟았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하룬은 바위 위를 쳐다보고 소리쳤다.

 "모두 무사한가?"

 하룬의 말에 밧줄을 이용해서 내려온 이들이 그에게 달려왔다.

 "괜찮습니다."

 괜찮은 것치고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기에 하룬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가 이내 정상을 찾았다.

 에리피안과 세 대원이 뭔가 물으려는 순간 하룬이 선수를 쳤다. 그들이 뭘 물으려는지 잘 알지만 하룬도 어떻게 설명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쉬고 있어."

 하룬은 비수에 마나를 주입해서 검기를 생성해 슐레츠의 가죽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본래 마수의 가죽을 벗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하룬은 그동안 본 것이 꽤 많아 처음에만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 갈수록 빨라졌다.

 하룬이 가죽을 벗기는 동안 기절을 한 니켄과 나머지 4명은 바닥이 뜨거운지도 모르고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빠악!

 마나가 주입된 하룬의 부츠가 슐레츠의 머리통을 박살 내자 커다란 마정석이 나왔다. 죽은피처럼 검붉은 색깔의 마정석은 하급 마수들의 것보다 네댓 배는 더 크고 기분 나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룬은 마정석을 아공간으로 집어넣으며 싸가지에게 의념을 보냈다.

 -싸가지. 새로운 마정석이다.

 -으흐흐흐! 이렇게 큰 마정석이라니. 주인, 나만 믿어! 내가 제대로 순화시킬 테니까.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음침한 웃음까지 흘리며 좋아했다.

 하룬의 행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가죽을 다 벗겨 낸 그가 무자비하게 마수의 버리통을 밟아 깨트리고 그 속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을 보며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마정석을 처음보는 대원들로서는 끔찍한 광격이었던 것이다.

 무엇을 적출하는지는 몰라도 마수의 피로 인해 방어구며 손 전체에 피가 흥건한 하룬의 모습은 마치 흑마법사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하룬이 일을 마치고 그늘 속에 들어가 서 잇는 이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왜?"

 "대……장, 그 피 좀 어떻게 하세요."

 두려움이 물씬 흘러나오는 마리의 말에 자신의 행색을 확인한 하룬은 쓴웃음을 지으며 나이아를 소환해 몸과 방어구를 정화시켰다.

 "충분히 쉬었을 테니 그만 가자!"

 잠시 산책을 다녀온 것처럼 평온하게 말하는 하룬을 보는 이들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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