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위험들>
뫼비우스는 화려한 실내를 보며 잠시 눈을 찡그렸다가 한쪽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비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비류는 코원 유니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유리창가에 앉아 있었다.
"자기야, 빨리 왔네."
"누구 명령인데."
비류는 이제 공식적인 연인이 된 뫼비우스의 부드러운 말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잡아 같이 앉았다.
"다른 친구들은?"
"아직. 워낙 늦는 친구들이잖아."
뫼비우스는 얼마 전에 소개를 받은 비류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같이 비류처럼 시간 많고 돈 많고 여유 많은 족속들이다. 자칭 쿠원 유니온의 신4공주라고 부르는 팔자 좋은 아가씨들과 그 애인들의 모임이다.
그나마 비류가 출신으로는 가장 달리는 편이다. 비류의 경우 노블로 편입된 시간이 가장 짧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비류는 다른 친구들보다 권위 의식이 별로 없는 편이다. 워낙 성격도 좋았다.
"이번에 성을 차지했다고?"
뫼비우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방금 들은 소식을 꺼냈다.
"호호! 어떄, 우리 길드의 실력이 정말 끝내주지?"
뫼비우스의 놀란 얼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비류였다. 대형 길드도 아니고 상단까지 운영하느라 무력을 가진 길드원이 그리 많지 않은 코엠 길드가 다크니스로부터 성을 함락한 것은 그야말로 사건 중에 사건이었다.
"정말 대단해. 나오기 전에 확인해 봤는데 너의 길드 홈피와 카페가 완전히 다운되었더라."
첫 번째로 다크니스의 성을 함락시킨 길드가 나왔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없다. 이미 십여 차례나 대형 길드들이 목표한 성을 공격했지만 막대한 피해만 입고 퇴각하고 만 상황이다.
"호호호! 그럴 거야. 다들 놀랐을 테니까."
비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어떻게 성공한 거야? 미러쥐 길드와 중원 길드가 연합을했는데도 실패했던데."
뫼비우스는 정말 궁금했다. 지금 코엠 길드가 아카 성이라고 이름 붙인 성을 차지한 일로 비욘드는 물른이고 현실에서도 난리가 난 것이다. 누구도 상단을 운영하는 중형 길드가 막강한 전력을 가진 다크니스와의 공성전에서 이길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기에 그 반향이 더 컸다.
"쾌속과 막강이라고 하면 알아들을까?"
"쾌속? 막강?"
"응. 한마디로 압도적인 무력으로 정신없이 밀어붙인 결과지."
뫼비우스는 비류의 말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코엠 길드의 전력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었던 것이다.
"누구야?"
"뭘?"
비류는 뫼비우스의 눈치 빠름에 감탄을 하면서도 의문스럽게 반문했다.
"너희 길드의 힘으로는 쾌속과 막강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어. 그건 너도 인정하잖아. 누가 도와줬는데?"
"칫! 왜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 길드의 자금력은 이방인길드 중에서는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데."
"무엇이든 돈으로 다 살 수는 없으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돈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유요한 도구 중 하나이긴 하지만 돈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그건 이제 꽤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뫼비우스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다크 게이머 시절에도 어느 정도 느낀 것이지만 정보 길드를 직접 운영하다 보니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맥이었다. 세상은 끼리끼리 살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도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말해 봐. 누구야?"
성공하는 자와 동행해야만 자신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류는 그가 버릴 수 없는 여자이기도 했다. 감정적으로도 그렇고 이성적으로도 그렇다. 그렇기에 인정받기 위해, 성공한 자들의 세계인 노블에 편입되기 위해 이렇게 안감힘을 쓰며 사는 것이다.
"풋!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 맞아!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지."
비류는 그가 애타는 것을 즐기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뫼비우스는 그녀의 말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비류로인해 많은 노블들과 안면을 트긴 했지만 그중에서 그 정도의 역량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비류가 친하게 지내는 노블 연놈들은 하나같이 부모를 잘 만난 재수 없는녀석들뿐이었다.
하지만 비류의 언니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거기에 세류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인연을 가진 강자는 자신도 잘 아는 인물이다.
"역시 하룬 대장이구나."
"빙고!"
"이런!"
돌풍 용병대와 코엠 길드가 비슷한 시기에 요새를 떠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코엠 길드가 황도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돌풍 용병대의 목적을 어느 정도 아는 터라 그들이 정말로 코엠 길드를 도와 공성전에 참가했을 줄은 몰랐다.
"대가는?"
"없어. 그냥 언니와의 인연을 보아 참가한 거야."
"그럴 리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뫼비우스는 금방 이해를 했다.
"뭐, 하룬 대장이라면 그럴 수도."
그가 겪은 하룬은 겉보기에는 차갑고 무정한 편이다. 용병이라서 그런지 돈거래도 상당히 철저했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 다른 면도 알게 되었다. 하룬은 실상 알고 보면 꽤 속정이 깊은 사내였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여간해서는 져버리지 않는다.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가 성 주변에 포진된 마법진을 제거하고 마수들을 처리했어. 그리고 성주를 비롯한 성의 고위급 인사들을 해치워 줬지.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 길드의 힘으로 어떻게 성을 차지했겠어."
비류는 이제야 진실을 말했다.
"그렇구나."
자신으로서는 능력을 헤아릴 수 없는 하룬과 돌풍 용병대라면 능히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소드 마스터인 딜런 경과 마도사 2명이 포함되어 있고 그능력을 예상할 수 없는 하룬 대장과 대원들이라면 전격적으로 공격해서 다크니스의 혼을 쏙 빼놓았을 거야."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알고 보니 코엠 길드가 주력이 아니라 돌풍 용병대가 주력이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행을 하는 건데 그랬다. 다크니스의 본부를 찾으려고 데빌 산맥 깊숙한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들었지만 설마 코엠 길드가 따라붙어 결국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성까지 차지했을 줄이야.
'아무튼 대단한 용병대라니까. 아마 코엠 길드가 없었어도 그들만으로 성 하나 정도는 우습게 차지했을 거야.'
새삼 돌풍 용병대를 따라가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크크크!"
"왜?"
"매그럼과 아레스가 불쌍해서 그러지. 녀석들은 공성전을 취재한다고 대형 길드들을 따라갔잖아."
"푸훗! 그러네. 우리와 동행했으면 아주 생생한 공성전 장면을 취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으면 그야말로 대박을 치는 건데."
"그러게. 지난번에 이어 연타석으로 대박을 치면 완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둘이 이갸리르 하는 사이 회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비류야. 너희 길드가 성을 차지했다며?"
"응. 운이 좋았지."
이번 모임의 화제는 당연히 공성전에 성공한 코엠 길드에 관한 것이었다. 다들 비욘드를 즐기고 길드와 알게 모르게 인연을 맺고 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류는 다소 뻐기는 티를 내기는 했지만 친구들의 물음에 나름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아까 뫼비우스와의 대화와는 달리 이번에 돌풍 용병대는 코엠 길드가 고용한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역시 아이언 프린세스라는 별명답네."
"그러게. 얼마 안 있어 그룹을 이어받는다고 하더니 대단한 전략 전술과 용병술을 가진 것 같아."
세류 이야기였다. 이전이라면 언니에 대한 피해 의식과 질투심으로 인해 화를 냈을 비류가 이번에는 조용했다.
"풋! 아이언 프린세스는 무슨."
하룬을 짝사랑하다가 퇴짜를 맞은 언니의 인간적인 모습을 본 후로 생긴 변화였다. 뭐든지 잘하고 완벽한 언니에게 주눅이 들었던 비류는 그 모습을 통해 언니에게 마음을 열고 언니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공성전이 화제가 되었다가 이내 그 대상이 돌퓽 용병대로 향했다.
"일개 용병대가 정말 대단하네!"
"비욘드 주민들이 영웅으로 떠받들더니 뭔가 있기는 있는 용병들인가 봐."
모두 공성전이 성공한 이면에 돌풍 용병대의 막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소리였다.
"돌풍 용병대 때문에 용병들의 주가가 하늘을 찌른다나봐. 자존심 높은 기사들도 돌풍 용병대 이야기가 나오면 한수 접어준다고 하더라."
뫼비우스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심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쓰렸다. 자신도 하룬에게 잘 부탁했으면 돌풍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뭐 이렇게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으니까.'
작은 세력이라도 이렇게 노력해서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도 재미는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할 수 없이 자신의 미모와 약간의 의도적인 작업(?)이 필요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그런데 그 용병대가 현실에도 있다며?"
원로원에 속하는 고귀한 노블 가문인 황가黃家의 방계 가문에 속하는 미실의 말에 뫼비우스의 눈이 반짝였다.
"누가 그래?"
비류 역시 강한 흥미를 보였다. 현실의 돌풍 용병대에 관한 사항은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알려졌다면 암시장과 연관이 있는 기업가나 상인 들이 고작일 것이다.
"확실한 정보원은 공개할 수 없지만 현실에도 돌풍 용병대가 있다나 봐. 주로 유니온 밖에서 활동한다지 아마.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무력이 특수군에 맞먹을 정도로 굉장하다고 해."
"정말?"
다들 강한 흥미를 보였다. 현실에도 용병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비욘드에서 유명한 용병 단체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용병대가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특수군과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야?"
다들 같은 의견인 것 같았지만 미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보통 휴면들은 30분도 제대로 견디기 힘든 배리어 밖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정도로 완벽한 전투 슈트와 무장을 갖춘 것이나 본거지를 마련했다는 점은 그들이 가진 기반이 그 정도로 크다는 거야."
"하긴. 오염된 환경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슈트 가격이나 그 재료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네. 보나마나 엄청난 제략까지 갖추고 있는 거야."
한 달 전부터 미실의 애인이 되어 그녀와 같이 지내고 있는 과학국 출신 연구원 호비가 맞장구를 쳤다.
"거기에 그들은 사막이나 황무지에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특수한 바이크는 물론이고 개량한 입자건과 휴대용 입자포를 가지고 있었대."
"정말?"
"응. 그건 확실한 정보야."
"으음. 그런 세력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출현한 거지? 혹시 다른 유니온에서 파견한 세력은 아닐까?"
호비의 말대로 돌풍 용병대의 존재는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유니온에서도 보유하지 못한 휴대용 입자포라니!"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거지. 게임 속의 돌풍 용병대도 대단하지만 현실의 돌풍 용병대도 그에 못지않게 대단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거같아."
미실과 호비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일행의 얼굴에는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혹시 사가의 비밀 세력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의 비호를 받아 은밀하게 키워졌던지?"
누군가 무심코 꺼낸 말이지만 뫼비우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 말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개량 무기를 지닐 수 없을 거야. 무기에 관한 한 유니온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작자들이니까."
군부를 장악한 사가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는 판단이 대세였다.
"그놈들의 무슨 의도로 그런 세력을 만들어 낸 것일까?"
"그거야 모르지. 곧 F구력을 폐쇄한다는 말이 있던데 이기회에 유니온을 장학하려는 음모를 위해 만든 전투 세력이 아닐까?"
미실과 또 한 친구는 돌풍 용병대가 군부의 별도 세력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가와 함께 군부에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 도가都家의 방계인 새리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아닐 거야. 지금 사가는 특수군을 확충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 말을 들으니까 그렇네. 거참 어떻게 그런 막강한 세력이 갑자기 어디서 뚱딴지처럼 나타난 거야."
"확실한 것은 우리 노블들에게 잠재적인 적이 등장했다는거야."
"배리어 밖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력 조직이라면 정말 그러네."
일행은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지만 실체를 모르니 오래 가지는 않았다.
"대장의 이름도 그렇고 용병대의 이름도 같은 것을 보면 비욘드의 그 돌풍 용병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겠네?"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아무튼 군부는 물론 원로원에서도 주시를 하고 있는 거 같아."
"그래? 그럼 곧 정체가 밝혀지든지 아니면 사라지겠네."
돌풍 용병대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더 이어지다가 결국 화제는 다른 것으로 바뀌었지만 뫼비우스의 얼굴은 본인도 모르게 심각해지고 있었다.
'노블들이 돌풍 용병대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는 걸까? 원로원의 주시를 받는 것은 좋지 않은데. 거기에 전력까지 노출이 되다니. 이렇게 되면 GG나 HG 혹은 군부 쪽에서 감시가 이루어질 거야.'
좋은 일은 절대 아니다. 이 철모르는 친구들의 귀에까지 전해질 정도면 이미 코원 유니온의 노블 세력은 거의 모두 이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대화를 통해 막연한 적대가까지 감지한 뫼비우스의 얼굴은 절로 심각해졌다.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까지 알려졌다면 분명 거대 세력의 감시 내지는 제거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대장과 친구들이 위험해!'
자신은 할 일 때문에 합류하지 않았지만 많은 인공수정체 친구들이 머무르고 있는 돌풍 기지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벌레처럼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다가 그곳에 가서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은 친구들이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가 아는 노블들이라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절대로 두고 볼 리가 없어.'
그건 확신이었다. 그렇기에 혼자 힘으로 기업을 일구고 결국 하원 의원이 되어 노블 세계에 편입된 비류의 아버지가 대단한 것이다. 기존 노블들의 견제와 위협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고 위험했다.
'알려야 해!'
뫼비우스는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의 테라스로 나왔다. 낮에 데워진 공기를 타고 솟아오른 먼지로 금방 옷이 누렇게 변했지만 마음이 급했다.
아레스와 매그럼은 마츠루트 요새로 들어서자 바로 돌풍상단으로 향했다.
"보라야!"
마침 보라가 매장에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온 물품들은 이미 동이 나서 매장 안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어? 웬일이야?"
매그럼을 보자 눈을 빛내며 반갑게 맞이하는 보라는 상단원들과 노닥거리는 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아레스는 입맛이 썼다. 자신들은 공성전 취재를 위해 미노 제국과 인접한 노르딕 성까지 다녀오느라고 피곤해 죽을 지경인데 그녀는 우아하게 차를 즐기며 놀고 있으니 말이다.
아레스와 매그넘은 상단원들이 일어나 양보한 의자에 앉으며 가게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손님이 없네. 아니, 물건이 아예 없구나."
"호호호! 다 팔았지."
공성전으로 인해 물품의 수요는 많은데 데빌 산맥에서 그것들을 구할 장소는 이곳이 유일하니 당연한 일이다. 돌풍 상단의 상점뿐 아니라 다른 상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추가로 주문한 물건이 올 때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노르딕 성 공성전은 어땠어?"
"처참하게 짓밟혔지."
매그럼은 머리를 흔들었다. 대형 길드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악스 길드가 3차에 걸쳐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노르딕 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미스릴 광산에서 공격해 봤지만 그곳도 이미 요새화되어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세?"
"엄청나더라. 4서클 이상의 흑마법사들이 1,000명은 넘는 것 같아. 거기에 흑기사들의 실력은 그냐말로 악스 길드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어. 최하가 익스퍼트 중급은 되는 것 같더라고."
"그런 괴물들이 2,000명도 넘어. 그놈들은 도대체 어떻게 4서클 이상의 흑마법사나 익스퍼트 검사 들을 찍듯이 만들어 내는 건지 몰라."
아레스와 매그럼의 말이 아니더라도 보라는 이미 노르딕 성은 물론 십여 개의 성을 공략하는 이방인들이 공성전에 많은 곤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연속된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예비 전력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거야."
"그래? 그럼 성안에 예비 전력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건가?"
"그것 때문에 말이 많아. 일부는 다크니스가 진짜 이방인인지를 의심할 정도야."
세 사람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공성전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코엠 길드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코엠 길드가 성을 함락시켰다던데 사실이야?"
아레스와 매그럼의 용건은 그거였다.
"맞아."
"어떻게 함락시킨 거지? 우리가 직접 경험한 다크니스의 전력은 엄청나던데."
"그거야 나도 잘 모르지. 내가 아는 건 우리 대장과 돌풍 용병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뿐이야.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아 길게 들을 수가 없었어."
"그럴 줄 알았어."
아레스의 말에 매그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두 사람은 이 일에 돌풍 용병대가 관여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제길! 대장을 따라가는 건데."
"그러게. 내가 그러자고 했잖아."
보라의 말에 아레스와 매그럼은 입맛을 다시며 한탄을 했다.
"누가 성을 공략할 줄 알았나? 다크니스의 본거지를 찾으러 간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지. 에구! 대장을 따라갔으면 초대박인데. 정말 아깝다."
"다음부터는 네 말 안 듣고 무조건 대장만 쫒아다닐 테다."
매그럼은 아레스에게 눈을 흘겼다. 자신은 하룬의 돌풍 용병대를 쫒아가려고 했는데 아레스의 꼬임에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
아레스는 볼멘 표정으로 자책했다.
공성전 건 기사로 엄청난 원고료와 함께 방송사 수뇌부들까지 직접 나서서 격려를 해 주었다. 순진하게 하룬 대장의만만 믿은 것이 잘못이다. 굳이 같은 날 돌풍 용병단을 따라나선 세류나 비류 자매가 어떻게든 하룬 대장을 꾀어 도움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아무튼 생생한 영상은 못 건지겠지만 공성전에 대한 것은 알아봐야지. 아카 성까지 가는 길을 좀 알려 줘."
"부탁해. 보라야."
아레스와 매그럼이 서둘러 요새로 돌아온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공성전에 대한 영상은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성공항 공성전의 전술이니 다크니스의 약점을 알아낸다면 그야말로 대박 기사가 될 것이다.
"늦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벌써 세 무리의 기자들이 용병들을 고용해서 아카 성으로 출발했는데."
"정말?"
아레스와 매그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오긴 했지만 한발 늦고 만 것이다.
"제길! 길 좀 알려 줘. 빨리 가야겠어."
마음이 급한지 아레스와 매그럼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서두르지 마. 어차피 너희들은 하룬 대장이나 코엠 길드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으니 늦지만 않으면 제대로 취재할 수 있을 거야. 마침 도 고문님을 찾아가는 마법사들이 있으니 같이 동행하면 되겠네."
"마법사라고?"
아레스는 뜬근없는 마법사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예전 마탑에서 타니엘라 경과 미루스 경에게 지도를 받던 마법사들이 찾아왔어. 두 고문께서 부른 모양이야. 5서클이 4명에 4서클이 12명, 3서클이 무려 20명이야."
"그래?"
아레스는 보라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매그럼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물었다.
"그런데?"
"두 고문의 연락을 받은 마법사들이 돌풍 용병대에 들어가기 위해 찾아왔어. 데빌 산맥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지.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아 오래 통화는 못 했지만 돌풍 용병대와 산악 부족들이 힘을 합쳐 또 다른 성을 공략하려고 한다고 했어. 어쩌면 이미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통신이 안 되지만 곧 연락이 될 거야. 아무튼 그분들을 모시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너희들이 바라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거야."
"아!"
거절할 일이 아니다. 비록 데빌 산맥이 위험한 곳이긴 해도 마법사들을 호위해서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생생한 공성전 영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아무도 공성전에 성공하는 영상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니 잘하면 지난번에 못지않은 대박을 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둘의 힘으로는 호위는 무리인데……."
무리 정도가 아니라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즉각적인 상황 대처가 힘든 마법사들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늘까지 올라갔던 아레스의 기분은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호위는 고사하고 자신을 지키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 어비스 용병단이 동행할 거야."
"아!"
하룬의 돌풍 용병대와 무척 친한 어비스 용병대라면 잘 알고 있다. 그들이라면 실력은 믿어도 된다. A급 이상의 용병들로 이루어진 실력 있는 용병대니 말이다.
"하지만 숫자가……가만, 용병단이라고?"
아레스의 미간에 주름 몇 개가 생겨났다.
"그간 어비스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용병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야. 용병들을 받아들이고 훈련을 시키느라고 이곳에도 늦게 도착했다고 하더라. 총인원이 400명이 넘는데 풍기는 분위기를 보면 실력은 믿을 만한 것 같아. 의뢰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하룬 대장을 찾아 데빌 산맥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대장이 준 지도를 복사해서 주기로 했어."
"그럼 됐어."
자신들과 마법사들의 조합이라면 죽을 것이 명백한 상황이지만 400명이 넘는 인원을 가진 어비스 용병단과 함께라면 얘기가 다르다. 다른 곳이라면 모르지만 몬스터나 마수와 상대한 경험이 풍부한 A급 이상의 용병들이라면 데빌 산맥에서는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도 쉽게 상대할 수 없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아레스는 당장 보라를 안을 듯 상체를 숙이며 좋아서 방방뛰었다.
"고마워, 보라야."
"후후!"
보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매그럼을 향해 은밀하고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숫기가 없는 매그럼은 그런 보라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싫지는 않은듯 얼굴이 붉어졌다.
벼리를 통해 포섭된 데드 벙커 연구원들의 몸속에 주입한 웜형 사이보그를 통해 연구 시설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에 바빠 기지에 한동안 얼굴도 내밀지 못했던 벨은 급하게 자신을 찾는다는 헤니를 만났다.
헤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뫼비우스가 전해 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뫼비우스의 판단으로는 우리 기지에 대한 감시가 진행되고 있을 거래."
걱정스러운 헤니의 말이 이어지자 벨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지금 우리 용병대에 대한 정보가 코원 유니온의 노블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중이라는 거지?"
"그래. 어찌 보면 위험할 요소가 없는 것 같지만 노블들은 자신들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절대로 그냥 두지 않는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벨은 헤니의 그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룬의 경험을 일정 부분 경험하는 벨이지만 하룬이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터라 사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별로 없어 그녀 역시 노블들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아리는 어디 있는 거야?"
헤니닌 왠지 벨이 자신의 경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아리를 찾았다.
"언니는 오빠가 내린 중요한 명령 때문에 한동안 보기 힘들 거야."
아리는 태가사남매를 비롯해서 사이보그 대원들을 데리고 코원 유니온 S구역 지하의 폐쇄된 폐기장으로 간 상태였다. 마그네틱 카를 이용해서 수많은 정밀기계들을 가지고 간 아리는 그곳에서 타이탄 워커들을 복원할 생각이었다.
다크니스의 정체와 공성전에 대한 정보를 통해 아레스를 비롯한 이들이 방송사에서 받은 거액의 정보료와 얼마 전 해가와의 거래로 타이탄 워커의 복원에 필요한 물품들은 모두 확보했던 것이다.
장차 기지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서 타이탄 워커는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뇌파를 통해 사정을 알린다면 아리가 바로 돌아올 터이지만 정신이 없을 아리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흐음. 일단 경계를 강화해야겠어."
"그걸로 될까?"
"안 그래도 오빠가 수련을 떠나면서 뭔가 불안하다고 나한테 준비시킨 것이 있어."
"그래?"
모종의 장소로 수련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는 하룬 대장이 이런 경우를 예상했다는 사실에 헤니는 어느 정도 불안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헤니의 정보만으로 위험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햇던 계획을 발동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모든 내용을 같이 들은 아즈만이 헤니가 모르게 뇌파로 의사를 전해 왔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아즈만의 판단에 동의를 하는 벨이지만 육감은 그렇지가 않았다. 최근 들어서 불안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엇던 것이다.
"상황만으로는 기지가 크게 위험할 것 같지 않지만 오빠도 그렇고 나도 왠지 불안해. 언니, 수뇌부 회의를 소집해 줘."
"그럴게."
헤니는 다행이다 싶었다.
헤니가 명령 계통을 제대로 거친 터라 수뇌부 회의는 신속하게 소집되었다. 중요한 실험을 하다가 도중에 나와야만 했던 쏘우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금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회의실에 모인 참석자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잇었다. 한창 수련 중에 나온 전투조의 세 조장들은 얼굴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황 박사와 소장 그리고 헤니의 얼굴은 나름 심각했다.
벨은 참석자들과 시선을 일일이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다들 오랜만이군요. 대장이 자리를 비운 후 업무별로 모인 적은 있지만 다 같이 모인 적은 꽤 오래되었죠. 이번 회의는 헤니 대원의 제청으로 소집되었습니다. 일단 헤니 대원의 보고를 먼저 듣기로 하겠습니다."
벨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헤니는 말라 버린 입술을 축인 후 뫼비우스로부터 전해 받은 이야기를 참석자들에게 전했다.
"흐음! 그게 큰 문제가 되나? 어차피 우리 존재는 드러낼 생각이 아니었나?"
쏘우는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는 반응이었다. 헤니는 그런 쏘우를 향해 매서운 눈길을 주면서 말했다.
"그건 상관이 없는데 너무 일찍 우리의 패를 드러낸 것이 문제가 되었지요. 저들은 우리 대원들이 착용한 전투 슈트와 개량형 입자건 그리고 결정적으로 휴대용 입자포를 보고 우리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왜? 그런 것을 봐야 놈들이 우리에게 함부로 하지 않을 거 아니야."
하지만 그건 쏘우만의 생각이었다.
당장 황 박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음! 평소에는 모래알처럼 나누어 싸우기에 골몰하는 작자들이지만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잇어서는 힘을 합치는 노블들이 우리의 존재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겠군.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적으로 보고 잇을 거야."
"유니온만이 아니에요. GG나 HG들도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거에요."
그건 확실히 심각한 문제였다. 하룬이 정보의 공개를 허락한 터라 이미 기지 식구들은 세계를 암중에서 조종하는 세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세 조직이 합세해서 우리를 없애려 들겠군."
소장의 말에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전투조의 조장들은 물론이고 쏘우까지 뜨악한 얼굴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겁니까?"
"처음이야 경쟁 조직에서 양성한 비밀 세력이 아닐까 의심하겠지만 서로 일정량의 정보를 공유하는 세 조직은 우리가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거요. 그럼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우리를 자신들 산하로 영입하거나 혹은 아예 없애려고 하겠지. 그런데 여태까지 세조직에서 취한 행동들을 보면 우습게도 자신들 이외의 세력은 용납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되고 있소. 새로운 가문이 출현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노블들의 생리와 똑같지. 적이긴 하지만 기존의 적들은 공존共存을 인정하지만 신흥 조직은 힘을 합해 가차 없이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생리라네."
"빌어먹을!"
쏘우는 이제야 자신이 강권하다시피 완전무장을 시킨 것이 엄청난 실책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일찍 자신들의 힘을 보여 준 것이다. 자신 역시 노블이었으니 그 생리를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연구에 전념하고 살다 보니 그점을 등한시한 것이다.
"제 실수입니다. 전 그저 우리가 일개 용병으로 막 부려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뿐인데……."
쏘우는 침통한 얼굴로 참석자들에게 허리를 굽혀 사과를했다.
"허어! 대장도 안 계신 상황에 이런 일이 터지고 말았으니……."
소장이 답답한지 지그시 눈을 감고 한탄했다.
"이번에 오빠가 수련에 들어가면서 제게 남긴 말이 있었어요."
벨의 말에 참석자들의 눈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왠지 불안하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나인이도 최근 들어 불안감을 호소하던데. 그것 참 신기한 일이군."
"헛! 레이스도 그렇다던데."
소장과 황 박사의 말이 이어지자 참석자들은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룬은 몰라도 나인과 레이스는 이능력을 보유했고 그래서 수련도 황 박사의 지도를 받아 특별히 개인별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즈만이 찾아내어 그녀들에게 전한 수련법은 종말 시대에 연유하는 것으로 명상과 호흡에 연관이 있는 집중력 강화가 그 내요이었다.
"우리 대자잉 이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간 내가 지켜본 나인이와 레이스의 육감은 무섭도록 발달해 있으니 일단 우리 기지에 위험이 닥쳤다고 생각을 하고 대책을 마련해 봅시다."
황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이곳은 힘들게 세상을 살아오면서 천신만고 끝에 얻게 된 그들 모두의 집이었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피붙이와 다름없는 가족들인 것이다.
"그럼 이것을 봐 주세요. 오빠의 지시로 저와 언니가 마련한 비상시 대책인데 토의를 통해 다듬을 필요가 있을 거 같네요."
벨은 미리 준비했던 홀로그램 화면을 띄웠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방안이 다각도를 감안해서 들어 있었다.
"오! 역시 참모들이야."
"하하! 그러면 그렇지."
참석자들은 이미 이런 상황에 대비한 플랜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 감탄을 하며 그 내용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