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엘프 에리피안 (204/278)

 엘프 에리피안

 "피해가 크군!"

 "그러게. 호호! 하지만 그래도 이겼잖아. 이 성은 이제 우리 코엠의 성이라고."

 부활이 가능한 이방인답게 세류는 피해 상황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거의 3분의 1이 죽었지만 그들은 곧 다시 부활할 것이다 . 길드장인 자신을 중심으로 부활 설정을 해 놓았으니 사흘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코엠 길드원들은 한창 전리품을 수거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무려 2,000명에 달하는 유저들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아이템의 숫자는 상상 이상이었 것이다. 대부분 C.P. crime point가 높아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은 물론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들까지 다 토해 놓았기에 그 숫자가 엄청났다.

 공성전을 앞두고 잔뜩 긴장했던 세류는 긴장이 풀렸는지 길드원들을 그냥 풀어 놓고 있었다. 

 돌풍 용병대원들은 한쪽에 모여 있었다. 독을 흡입한 6명의 대원과 전투 중 부상을 당한 12명의 대원들은 레미와 다쿠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고 나머지는 티노의 명령에 따라 장비를 손질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한 하룬은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딜런 경과 타니엘라 경께서는 당장 지구라트의 가장 위층을 파괴하고 쓸 만한 물건들을 수거하십시오."

 두 사람은 몸을 날려 지구라트의 경사로로 향했다.

 "겨루 조와 방커 조는 미루스 경을 호위하여 당장 지구라트의 지상 층을 수색한다. 미루스 경은 마법서나 재료 등을 따로 압수해 주십시오. 니켄은 마리 조의 호위를 받아 흑마법진의 코어를 찾아 파괴하고 마법 재료를 수거해."

 "네, 대장!"

 하룬의 명령을 받은 돌풍 용병대원들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하룬도 따로 움직였다. 그가 향하는 곳은 지루라트의 지하였다. 혹시 몰라 라이피와 위신느로 하여근 지구라트를 살피게 했는데 지하에 살아 있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것이다. 

 2층으로 향하는 경사로의 옆면에 설치된 은밀한 문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구라트는 세 번째로 보는 것이지만 거의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간 하룬은, 그의 기대대로 많은 이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하에는 세 개의 큰 방이 있었는데 그 두 개에는 수십 명의 거친 호흡 소리와 신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알람 마법과 매직 락이 걸려 있는 문은 마나를 주입한 박살에 의해 손쉽게 열렸다.

 두 문에 걸린 마법을 강제로 박살 낸 하룬은 철문을 열었다.

 "세상에!"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벌거벗은 상태로 망신창이가 되어 신음을 하고 있었다. 인체 실험용으로 잡아 온 듯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고문으로 인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른 방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쪽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산악 부족이군.'

 자신이 아는 부족은 아니었다. 어깨와 이마에 새겨진 문신의 문양과 크기가 사뭇 달랐던 것이다.

 -나이아, 이곳을 정화시켜 줘. 그리고 이들을 좀 치료해야겠어. 위신느도 나와서 좀 거들어 줘.

 -알았어요.

 -앗싸! 밖이다!

 소환된 나이아와 위신느는 힘을 합쳐 두 방을 순식간에 청소했다. 나이아가 정신을 잃고 있는 산악 부족들의 체내로 들어가 치료 진동을 하는 사이 위신느는 하룬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아 세 번째 방으로 향했다.

 세 번째 방의 문에는 이전의 두 문보다 더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번에는 마나를 최대로 주입한 박살에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위신느, 안에 뭐가 있는지 들어가 봐.

 -호호! 맡겨만 주세용.

 오랜만에 나와 기분이 좋아진 위신느가 거의 보이지도 않는 문틈 안으로 연기처럼 빨려 들어갓따가 이내 밖으로 나왔다.

 -하룬, 안에 인간이 1명 있어요. 아니, 귀를 보니 엘프예요.

 -그래?

 난데없이 엘프의 존재에 좀 날랐지만 일전에 돌성에서 드워프들도 다크니스에 의해 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터라 금방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룬은 타니엘라와 미루스를 찾아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실력이라야 문에 걸린 마법을 해제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고문을 당한 것이 분명한 산악 부족들도 지상으로 올려 제대로 치료를 해야만 했다.

 엘프는 하루가 꼬박 지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허억!"

 눈을 뜬 엘프는 옆에서 앉아서 졸고 있는 레미를 보고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이내 다시 침대에 등을 댔다. 힘도 없었거니와 이불이 미끄러지며 자신의 알몸이 드러났던 것이다.

 "아! 깨어났군요. 잠시 기다려요."

 레미는 준비해 두었던 물을 엘프의 입에 조금씩 흘려주었다. 엘프의 갈라진 입술을 적시는 물의 양이 늘어날수록 그 엘프의 잿빛 얼굴은 점차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루므스다인 밀비치카 데닉카인?"

 조금 기운이 난 엘프가 입을 열자 레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잠시 기다려요. 우리 대장을 불러올 테니까요."

 레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멀뚱히 쳐다보던 엘프가 눈을 돌려 실내를 살폈다. 자신이 갇혀 있던 그 냄새나는 지하실이 아니었다. 넓게 뚫린 창을 통해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실내에는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를 제외하고는 탁자 하나와 의자 3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혹시 구함을 받은 건가?'

 그런 것 같았다. 방금 나간 그 여자는 분명 공용어를 구사했지만 얼굴에 새겨진 문신으로 보아 간간히 보아 왔던 사악 부족이 틀림없었다.

 그때 밖에서 굵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렸다고?"

 "네, 대장."

 "강인한 전사인가 보군. 몸 상태로 보아 며칠 더 걸릴 줄 알았더니."

 문을 열고 들어온 인간을 본 엘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길게 늘어뜨린 앞머리 때문에 얼굴 전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뺨에 작은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산악 부족이 틀림없었는데 풍기는 기운은 일족의 그것과 비슷했다.

 "일어났군. 기분은 어때?"

 "헉! 어떻게?"

 엘프는 귀에 들리는 엘프어에 깜짝 놀라 긴 눈썹을 위로 올리며 눈을 치켜떴다. 그녀는 여태까지 엘프어를 구사하는 인간에 대해 어디서고 들어 본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하룬은 그녀가 놀라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난 하룬이라고 한다. 돌풍 용병대의 대장이지. 어제부로 이 성을 접수했다. 넌 이제 안전하다."

 하룬의 말에 엘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자신이 흉악한 인간들의 손에서 벗어난 것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난 에리피안, 블루 듀 일족의 엘프랍니다."

 에리피안은 하룬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청량하고 익숙한 기운에 쉽게 마음을 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상대의 기운을 잘 읽을 수 있는 주술사였다.

 하룬은 그녀에게서 짙은 정령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흠! 주술사였군. 반갑다."

 "비슷하긴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된 건가요?"

 하룬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녀의 의문부터 해소시켜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까지 의식을 잃고 있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로서는 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된 거다."

 "그렇군요. 감사드려요. 꺄약!"

 에리피안은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상체를 들었다가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후후! 부끄러워할 것 없어. 레미와 함께 널 치료한 것이 바로 나다."

 이불을 끌어 올려 홍당무가 되어 버린 얼굴을 가린 에리피안의 심장은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내 알몸을 이자가 봤구나!'

 고문을 당할 때나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안전한 상황이 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족의 비슷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부끄러웠던 것이다.

 "옷을 입히려고 했지만 외상이 너무 심해 약을 두껍게 바른 상태이기 때문에 입힐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양해해라."

 "……이해해요."

 이불을 내리고 눈을 드러낸 그녀의 긴 귀는 여전히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시 달린 채찍으로 전신을 며칠 동안 맞았던 터라 성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에리피안은 왜 이곳에 잡혀 있었던 거지? 엘프들의 거처는 산맥 깊숙한 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하룬의 물음에 이곳까지 끌려오게 된 사정이 떠오르자 에리피안은 눈물부터 쏟았다.

 "흐흑!"

 하룬은 그녀를 채근하지 않고 속이 풀릴 때까지 그냥 울게 놔두었다. 그런 에르피안의 모습을 보던 레미가 의하한 표정으로 하룬에게 속삭였다.

 "대장, 엘프들은 감정의 폭이 무척 좁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보네요?"

 그런 소리는 그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과 같이 아인종에 속하는 엘프라고 슬픔을 모르는 것은 아닐 터였다. 자신만 하더라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감정이 메마른 편이지 않은가.

 "이럴 만한 일이라도 있는가 보지."

 하룬의 말이 맞았다.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에리피안의 말을 들으니 그녀가 살던 마을의 일족 280여 명의 엘프들이 느닷없이 쳐들어온 다크니스들에 의해 전멸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이 왜 엘프들을 공격한 거지?"

 마을을 침략한 다크니스들의 경우 5,000명에 육박하는 사상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을 강행한 이유가 궁금했다. 하룬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다크니스가 굳이 무리해서 엘프들을 공격할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건 우리 일족이 가지고 있던 마왕의 눈 때문이었어요."

 "마왕의 눈?"

 "네. 아득한 고대에 마계가 열리고 마왕이 마신들과 마족들을 이끌고 물질계로 넘어온 때가 있었어요. 마왕은 맹수와 몬스터 들에게 마기摩氣를 주입해서 마수를 만들어 내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지요. 물질계를 수호해야 할 신들은 마왕의 강력한 신력을 당해 내지 못하고 천계로 도망을 치고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말살될 위기에 처했어요. 그때 애정문제 때문에 태양신 라에 의해 대지의 심연으로 쫗겨났던 어둠의 신 발몬이 나타났어요."

 하룬은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에리피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놀랍게도 인간들보다 더 수명이 길고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엘프족의 전설도 아카족 전설과 흡사했던 것이다.

 "발몬은 순수한 어둠의 힘으로 마수들을 길들이거나 없애고 마기를 흡수하는 한편 곳곳으로 흩어진 마족들과 마수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데빌 산맥 밖으로 나간 모든 마왕의 권속들을 해치운 발몬은 산맥 깊숙한 곳에 있는 '발락의 대지'에서 마왕과 최후의 성전을 벌였어요. 이때 대지의 여신 미요스의 화신이었던 아란도 참전을 했는데 그녀는 발몬을 사랑하던 다섯 아내 중 1명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어요."

 "아란?"

 묘하게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아리, 아랑 등 주로 코원 유니온 쪽에서 많이 붙이는 이름인 것이다.

 "네. 우리 블루 듀 일족의 선조인 그분은 데빌 산맥에 사는 엘프족들을 이끄는 하이 엘프이자 위대한 구세주 발몬 신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어요. 다만 마왕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한 발몬 신이 위중한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미요스 여신이 거처하는 대지의 심연으로 갈 때 동행하지는 못했지요. 발몬은 사랑하는 아린을 지상에 남겨 놓은 것을 슬퍼하며 그녀에게 마왕의 힘과 마력이 담겨 있는 마왕의 눈을 주었어요. 그것만 있으면 마왕이 물질계에서 발휘했던 순수한 마력을 이용해서 강력한 무력을 가진 전사들을 양성할 수 있으니까요."

 "다크니스는 그 보물을 노린 거로군."

 "맞아요. 하지만 그들이 어디에서 그 정보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블루 듀 일족은 더 이상 그 보물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 보물을 노리는 흑마법사나 마족 들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모종의 장소에 숨겨 버린 거지요. 대대로 로드만이 그 행방을 알고 있는데 그것도 2,000여 년 전의 로드가 북쪽으로 여행을 갔다가 실종되는 바람에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해요."

 "그렇군. 그럼 다른 일족들은?"

 "모두 죽었어요. 다크니스가 흑마법진을 중첩해서 우리의 자연 결계를 무너뜨리고 쳐들어왔을 때 맞아 용맹하게 싸우다가 3분의 2가 죽었고 나머지는 마왕의 눈이 있는 곳을 알아내려는 그들의 고문에 죽었어요."

 "에리피안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지?"

 하룬의 말에 에리피안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전 본래 전사였지만 하이 엘프의 피를 타고나서 로드 후보로 선정되어 일족의 비밀 장소에서 각종 비전을 전수받고 있었기에 그 참극이 일어나고 난 한참 후에야 잡혔어요."

 "쯔쯔!"

 하룬은 혀를 찼다. 한순간에 모든 혈족을 잃어버린 그녀가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잡힌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다.

 "본래 두 달에 한 번씩 로드께서 식량을 가지고 들르시는데 석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마을로 갔다가 그만 잠복하고 있던 적들에게 잡히고 말았어요. 그들 중에는 제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다크 엘프 정령사들이 있었어요."

 "흐음! 그렇게 된 거로군."

 "놈들에게 잡힌 날부터 수치스럽고 지독한 고문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는 것이 없으니 털어놓을 것도 없이 몸과 마음은 점점 망신창이가 되었지요. 우리 일족 비극은 날 측은하게 여기고 몰래 도와준 다크 엘프 정령사에게 들었어요. 로드께서 미리 빼돌린 어린 엘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었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고문을 가해도 제가 모르는 눈치이자 그들은 더 높은 자들이 거처하는 성전이라는 곳으로 절 보낸다고 했어요. 이곳에 도착한 것은 이틀 전이었는데 거의 자지 못하고 다시 고문을 받았어요."

 그래도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다행이다. 그나마 이방인들이 주축인 다크니스의 무리들이 성교를 할 능력이 없어 더 험한 꼴을 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엘프들에게도 주술사의 존재가 있었나?"

 그녀는 주술사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라티카에게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기운이 느껴졌기에 물어본 것이다.

 "있어요. 보통은 정령사라고 부르지만 타고는 아름다움과 청초한 기품으로 발몬 신의 사랑을 받았던 아란께서는 정령들이 발휘하는 것과 차원을 달리하는 엄청난 대지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고, 어둠의 힘도 일부 사용할 수 있었어요. 아란께서 가진 능력은 피를 통해 대대로 전승되어 내려오고 그 힘을 사용하는 주술도 같이 내려오는데 당대 전승자가 바로 저랍니다."

 "일족이 그렇게 되어 유감이다."

 "……고마워요."

 "힘들었을 테니 가벼운 음식을 먹고 좀 쉬어. 레미, 죽을 좀 먹여 주겠어?"

 "그럴게요."

 레미는 미리 준비했던 죽 그릇을 들고 에리피안의 옆에 앉았다.

 "아, 아니에요. 내가 먹을 수 있어요."

 에리피안은 고개를 흔들며 격렬하게 거부감을 표시했다. 하룬을 쳐다보는 눈길과는 사뭇 다른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도저히 혼자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먹다가 기절할 수도 있어. 레미는 치료사니까 마음을 편하게 먹고 받아들여도 돼."

 "싫어요!"

 "허, 참!"

 격렬하게 거부하는 에리피안의 반응에 하룬은 당혹스러웠다. 성격 좋은 레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것을 보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럼 내가 먹이도록 하지."

 그저 해 본 소리였는데 에리피안의 얼굴은 이내 불안감이 가셨다. 그런 에리피안의 변화에 레미의 눈이 샐쭉해졌지만 하룬은 죽 그릇을 받아 들였다.

 "대장, 전 나가 있을게요."

 살짝 화가 난 레미의 말에 하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어깨에 한 손으로 안아 자신의 어깨에 등을 기대게했다. 그 때문에 모포가 내려가 가슴까지 드러났지만 하룬이나 에리피안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알몸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온통 연고를 두껍게 바른 상태였던 것이다.

 "천천히 삼켜!"

 "꿀꺽! 알았어요."

 에리피안은 얼마나 굶었는지 모르지만 죽 한 그릇을 모두 받아먹었다. 식탐이 그리 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엘프가 허겁지겁 죽을 씹지도 못하고 삼키는 조금 우습게 보였고 그 덕분에 엘프에게 가졌던 차갑고 고결한 이미지를 버릴 수 있었다.

 하룬은 죽을 다 먹이고도 그녀를 눕히지 않고 한쪽 어깨로 그녀의 등을 받히고 있었다. 오랜만의 음식 섭취로 인해 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에리피안, 근처에 다른 일족은 없어?"

 "있지만……."

 에리피안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대답을 하려다가 말을 흐렸다.

 "설마 그들도?"

 "그런 것 같아요. 어디서 우리 일족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이곳으로 호송되면서 다크 엘프 정령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데 여섯 개의 엘프 마을이 불태워졌다고 했어요."

 "흐음! 잔혹한 놈들이군. 그럼 갈 데는 있는 거야?"

 "……없어요."

 안됐다고 생각이 들었고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과 같은 이방인들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순간도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일단 푹 쉬어. 얼마 동안 우리 용병대도 이곳에서 머무를 테니까."

 "고마워요, 하룬."

 배가 차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 그런지 에리피안의 눈은 하룬의 두드림을 자장가 삼아 스스르 감겼다. 하룬은 그런 그녀를 잠시 더 두드려 주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눕히고 밖으로 나왔다.

 성을 함락한 지 사흘이 지났다. 세류의 코엠 길드는 잔뜩 긴장을 했다. 죽은 다크니스들이 부활할 시점이 된 것이다. 모든 길드원이 새벽부터 성 안팎에 요지에 배치되어 실시간으로 상황을 주시했지만 오후 늦도록 예상했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늘은 부활하지 않을 모양이야."

 최상층의 첨탑 구조물이 파괴된 지구라트 4층 옥상에 대기하고 있던 세류가 겨우 긴장을 풀고 있었다.

 "하긴 그들도 머리가 있다면 부활할 리가 없지. 이런 상황에서 부활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비류 역시 긴장했던 얼굴을 풀었다. 그런 세류 자매의 얼굴은 하룬의 말에 다시 굳어졌다.

 "차라리 부활을 하는 것이 좋은데……."

 맞는 말이다. 언제고 이곳에서 부활할 상대를 생각하면 오히려 좋지 않은 상황이다. 항상 이런 태세를 갖출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 놓고 성을 활용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때였다.

 "마수다! 마수가 나타났다!"

 성 밖을 정찰하던 한 무리의 전투조가 성을 향해 달려오며 소리쳤다.

 "전원 제자리를 지켜! 데스크라이의 특임대가 처리해!"

 세류가 통신기를 통해 명령을 내리자 흔들리던 코엠 길드원들이 다시 안정을 찾았고 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특임조가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비류야, 3번 영상 구슬을 작동시켜 봐."

 "알았어, 언니"

 비류가 탁자 위에 올려 둔 여덟 개의 영상 구슬 중 세 번째것에 마력을 주입하자 정문 성벽에 대기하고 있는 조장의 이마에 채워진 헤드 캠 렌즈 안으로 들어오는 영상이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생성되었다.

 "슬로크들이군."

 다른 마수들에 비해 지능이 떨어지는 슬로크는 테이밍이 쉬운 편이었다.

 "하룬, 전격적인 공격일까?"

 하룬은 세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알몸뚱이로 이곳을 공격할 리가 없어. 기껏해야 부활 지점을 변경할 시간을 벌려는 거겠지."

 20%의 능력치가 하락한 다크니스들로서는 성을 제대로 공격할 수 가 없을 것이다. 제대로 방비를 갖추고 있는 수천 명의 방어 전력은 물론이고 5미터나 되는 성벽을 공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거의 모든 아이템을 상실한 상태이니 공격을 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제대로 몸에 걸칠 옷이나 있으면 다행이다.

 "맞아, 언니. 이동이 가능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부활 장소를 사망한 곳 인근의 안전한 장소에서 길드장 주변으로 변경하고 다시 죽는 것만이 저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일 거야."

 스무 마리가 넘는 슬로크들의 기세는 흉포하고 살벌했지만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실력자들로 구성된 데스크라이의 특임대는 서넛이 한 마리씩을 맡아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특임대의 절반은 대기 상태로 마수들이 쏟아져 나온 숲을 경계했지만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슬로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장이 났다. 아무리 놀라운 힘과 민첩성이 뛰어난 마수들이라도 익스퍼트 급의 전사들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마수들이 모두 죽는 것을 확인한 세류가 통신기를 들어 올렸다.

 "특임대는 사주 경계를 태세를 유지하고 주변 1킬로미터 반경을 정찰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척살한다. 제1전투단과 제2전투단이 특임대의 지휘를 받아 임무를 수행하라."

 세류의 명령이 떨어지자 성내에 대기하고 있던 1,000명 단위의 전투단 두 개가 성문을 나와 특임대를 여덟 개 조를 머리로 삼아 여덟 방향으로 움직였다. 

 데스크라이가 이끄는 특임대는 정찰과 전투 임무를 마치고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두 전투단을 이끌고 성으로 들어왔다.

 "수석 전사장, 밖의 상황은 어땠나?"

 세류는 보고를 위해 막 지구라트 위로 올라온 데스크라이에게 물었다.

 지구라트 위에서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전투를 짐작할 수 있는 비명과 병기들의 충돌음을 들을 수 있었지만 데스크라이는 순조롭게 임무를 순행하는 듯 아무린 지원 요청도 하지 않았었다.

 "크크크!"

 "으음?"

 엄숙해야 할 지휘관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은 물론 기이한 웃음소리까지 내자, 세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죄송합니다, 길마! 너무 웃겨서 그만."

 "웃겨?" 

 "반바지와 민소매 셔츠만 겨우 걸친 놈들이 나타나기 무섭게 도망치는 꼴이 너무 웃겨서 그만, 실례했습니다."

 "그런 거였군. 푸훗!"

 사정을 알게 된 세류도 평소의 근엄한 표정을 버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C.P. 가 높아 가지고 있던 옷이나 방어구는 물론 무기와 같은 필수 아이템까지 떨어뜨린 터라 영구 아이템인 반바지와 민소매 셔츠만 겨우 입은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장면을 떠올리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끝까지 추적해서 놈들을 무한 척살하고 싶었지만 마법사들과 마수들이 잠복하고 있을까 봐 참았습니다."

 "잘했어, 수석 전사장."

 이제 어둠이 내릴 시간이다. 자신들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다른 성을 공략한 길드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다크니스의 흑마법사들은 언데들까지 부린다고 했다. 공연히 놈들을 쫓다가 언데들이라도 소환한다면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피해 상황은?"

 "200명 정도의 전사들이 적을 쫓아 깊이 추적을 했다가 흑마법사들과 흑기사들에 의해 죽거나 심하게 다쳤습니다. 우리에 의해 죽은 적들의 숫자는 약 500명 정도로 추정합니다."

 "수고했어. 이제 가서 쉬어."

 제대로 무기도 없는 적 500명을 상대하는 데 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얼핏 큰 전과가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소드 마스터까지 있었던 적들의 전력을 생각하면 나름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축하해, 세류! 이제 이 성은 세류와 코엠 길드의 것이 되었군."

 하룬은 세류에게 축하를 해 주었다. 당분간 적들이 다시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변변한 장비도 없는 적들은 인근에 있는 성과 같이 보급이 가능한 곳으로 필사적으로 이동할 테니 말이다.

 "고마워, 하룬. 돌풍 용병대가 없었으면 이 성을 차지하지 못했을 거야."

 세류는 진심으로 하룬에게 감사했다. 딜런이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고 하룬이 5서클의 흑마법사가 펼친 독 마법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자신들이 적들의 꼴이 났을 것이다. 다크니스의 세력에 소드 마스터가 존재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앞으로가 중요하지. 다크니스의 전력이 예상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경계는 물론 가자를 영입하거나 키우는데 총력을 다 해야 할 거야."

 "알고 있어. 그런데 혹시 네가 해 주면 안 될까? 아니면 세 고문 중 1명만이라도."

 세류가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을 했지만 하룬은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해 놓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돌풍 용병대는 이 근처에 사는 산악 부족과 연계해서 다른 성들을 공략해야 해. 당분간은 전력을 나눌 여유가 없어."

 "하지만 우리 길드의 힘으로는 성을 방어하기가 힘든데……."

 세류는 울상을 지으며 그윽한 눈빛으로 하룬을 쳐다보았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그녀는 하룬이 인간적인 것에 약하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괜찮을 거야. 이 성과 가까운 성들을 산악 부족들이 차지하게 될 테니까. 우리 용병대도 그 성들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을 거고. 성끼리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하면 방어하기가 수월해질 거야."

 "그럴까?"

 세류는 하룬의 말에 적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방어에 대한 부담이 현저히 감소할 것이다.

 "일단 성 주변에 각종 트랩과 경계 마법을 설치하는게 우선이야."

 "알았어. 빨리할게."

 세류는 비류와 함께 지구라트를 내려갔다. 염려했던 적들이 더 이상 도발할 위험이 사라졌으니 이제부터 할 일이 태산이었다.

 에리피안도 그동안 많이 기력을 회복했다. 레미와 헤니는 그녀의 옆에 내내 붙어서 일족의 죽음과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그녀를 치료해 주는 한편 같이 수다를 떨며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하룬 대장은 고요의 땅에 사는 엘프들과도 친교가 있다는 말이네요."

 헤니에게 고요의 땅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은 에리피안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에리피안의 로드 후계자로서 공용어를 어눌하게나마 구사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자신의 말을 알아들으면서도 제대로 대꾸하지 않은 것과 자신이 먹여 주는 것을 거부한 일 때문에 레미는 에리피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맞아요. 잘은 모르지만 그린 일족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 같아요. 로드가 선물로 신분을 증명하는 목걸이까지 주었으니까요."

 "그랬구나. 난 이야기만 들었는데 대장과 스카이루프 산맥으로 들어간 엘프족들과는 정기적으로 거래까지 하기로 했다고 하더라고."

 레미와 헤니의 말을 들은 에리피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용병은 절대 아니야. 우리 엘프들과 의사가 통하는 능력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에게서는 강렬한 정령의 향기는 물론이고 이 데빌 산맥이 품고 있는 어둠의 향기까지나. 고요의 땅에 사는 엘프족들에게 인정을 받은 인간이라면 믿을 수 있을 거 같아. 혹시 전설에서 말한 인간족의 영웅일까? 그렇다면 그에게 도움을 청해 볼 수도 있는데.'

 이미 일족의 여섯 마을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엘프들이 포로로 잡힌 이상 일족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한 상황이다.

'시간이 없어.'

 이제 겨우 다크니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적들은 마왕의 눈이 있는 장소는 물론 혼돈의 땅에 있는 자연석의 존재를 알아냈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자신에 대한 고문이 멈춘 것을 보면 다른 마을의 수뇌부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발설한 것이 틀림없다.

 '먼저 가야 해. 벨제라트 화산 지대로!'

 그녀는 첫날 하룬에게는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은 로드로 부터 마왕의 눈이 숨겨진 장소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산맥의 중심부에 있는 벨제라트 화신 지대의 비처秘處에는 엄청난 자연력이 모여들어 생성된 지역이 있는데 엘프들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에 숨겨 놓았다.

 "왜 무슨 일이라도 생각났어, 에리피안?"

 그녀가 생각에 잠긴 것이 이상했는지 헤니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이럴 때는 상처 때문에 얼굴에 약초를 붙인 것과 어눌한 공용어가 도움이 되었다.

 "대장은 언제 오죠?"

 "푸훗! 왜? 설마 보고 싶은 거야?"

 "헤니!"

 헤니의 농담에 에리피안이 뾰족한 소리를 질렀다.

 "후훗! 농담이야, 농담!"

 헤니와 레미는 웃으며 그 순간을 넘겼지만 약과 딱지로 범벅이 된 에리피안의 얼굴과 몸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룬 대장은 내 몸을 다 보았어. 은밀한 곳들마저도.'

 그 생각을 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곳까지 끌려오면서 온갖 성 고문을 받으면서도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에리피안이지만 그 생각을 떠 올리면 온몸이 불구덩에 빠진 것처럼 후끈거렸다.

 "대장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

 헤니와 레미는 에리피안의 말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느꼈다. 뭔가 꼭 해야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려. 대장님을 모시고 올 테니까."

 "그래. 이제 외상 치료도 얼추 끝났으니 우리는 나가 볼게."

 헤니와 레미는 에리피안을 놔두고 밖을 나갔다.

 마침 지구라트 4층에서 내려오는 하룬이 그녀들의 눈에 보였다.

 "대장!"

 "에리피안은 이제 좀 괜찮아졌지?"

 하룬은 그녀들이 나오는 곳을 일견하고 물었다.

 "네. 외상은 얼추 치료가 되었지만 워낙 상처가 깊어 흉터는 꽤 많이 남을 거 같아요."

 "살았으면 된 거지."

 "그렇죠. 하지만 같은 마을 엘프들은 물론이고 일족들이 많이 죽어 한동안은 좀 힘들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 둘이 좀 챙겨 줘."

 "알았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도 에리피안과 같이 지내는 것이 즐거우니까요. 그런데 그녀가 대장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데요."

 "그래?"

 "혹시 사랑 고백 같은 건 아닐 까요?"

 "그런 거 같아. 얼굴이 빨갛게 변해서 대장을 찾았잖아."

 "푸훗!"

 "호호호!"

 헤니와 레미는 자신들이 한 말이 재미있는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룬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하룬은 쓴웃음을 지으며 에리피안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대장!"

 헤니와 레미가 방금 나갔기에 이렇게 일찍 하룬이 들어올줄은 모르고 모포를 들추고 침상에서 내려와 방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상처 부위를 확인하던 에리피안이 기겁을 했지만 아직 힘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알몸을 감출 수는 없었다.그녀는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8등신의 늘씬한 몸매에 나오고 들어간 데가 확실한 에리피안의 모습을 본 하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행여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민망해할까 두려워 말을 돌렸다.

 "영광의 상처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주 강인한 여전사처럼 보이는걸."

 "그, 그런 가요?"

 원래 전사였던 그녀는 고대로부터 전승되는 엘프 마법과 주술을 익히긴 했지만 강인한 모습을 가지길 선호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여자로서 소중한 부위인 유방마저도 뱀이 지나간 듯 굵은 흉터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하룬은 자신의 방어구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주고 마법 화로에 주전자를 얹었다.

 "할 말이 있다고?"

 "아! 네!"

 인간치고는 꽤 키가 큰 편인 하룬이지만 에리피안의 키도 그와 비슷한 편이라 방어구 외투는 잘 맞았다.

 에리피안은 자신의 알몸을 보고도 지난번처럼 하룬의 눈빛 속에 음탕한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의 눈에는 그저 아름다운 꽃이나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은 감탄의 감정만이 비쳤던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하룬은 의자에 앉아 그녀에게 찻잔을 건넸다.

 "고마워요, 대장."

 "별말을. 그래, 무슨 일이지?"

 하룬의 물음에 에리피안은 잠시 입술을 질겅거리다 깊은 숨을 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사, 사실 마왕의 눈이 있는 곳을 알고 있어요."

 "……"

 하룬은 그녀가 왜 이제야 사실을 털어놓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막 깨어났을 때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왜 자신에게는 말하는 걸까?

 "다크니스라는 무리가 왜 마왕의 눈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마왕의 눈은 흑마력의 보고寶庫, 아마 그것을 사용해서 수많은 언데드들과 마수들을 만들어 내겠지요. 그렇게 되면 데빌 산맥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은 다 죽게 될거예요."

 "마왕의 눈에 대해서 아는 대로 이야기를 해 봐."

 "아쉽지만 전에 이야기한 것이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예요. 하지만 추가하자면 마왕의 눈이 있으면 마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살아 있는 생물의 영혼을 장악할 수 있다는 정도예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룬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파였다.

 '어쩌면 그 정도가 아닐지도. 이미 입수한 신성석과 차원석, 그리고 마왕의 눈이라면 마계를 열 수 있을 지도 몰라.'

 도대체 다크니스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획책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너무 답답했다. 이 세계의 주민도 아닌 자들이 뭘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마계를 열면 다 죽는 사태가 올 텐데 말이다.

 '확실한 것은 놈들이 마왕의 눈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거지.'

 하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뭘 어떻게 하려는지 몰라도 그들의 행사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 마왕의 눈은 어디에 있지?"

 "데빌 산맥의 중심부인 벨제라트 화산 지대 깊숙한 곳에 있어요."

 "자세한 위치도 아나?"

 "네. 로드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전 사실 차기 로드 중 1명이었거든요. 각 마을에서 1명씩 선발된 차기 로드들은 100년에 한 번씩 공정한 경합을 벌여 1명은 통합 로드가 되고 나머지는 원로가 되는데 그 의식은 벨제라트 화산 지대에 있는 파인 홈에서 해요."

 "그럼 다른 마을에 있는 차기 로드 중에서 그 장소를 토설할 수 있다는 말인가?"

 "네. 아마 이미 그 장소를 알아낸 것 같아요. 호송하는 동안이나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고문이 없었다는 게 불안해요."

 하룬도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길!'

 일이 겹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르카족의 통신 수단인 에센을 세 마을로 날려 보내지 않았을 것인데 이미 이틀이나 지났다. 아마 늦어도 보름 안으로 아카족과 부르카족 그리고 에인족 전사들이 미리 이야기한 곳으로 집결할 것이다.

 '이쪽은 다른 대원들에게 맡기고 나 혼자 가야겠군.'

 혼자서 그 수많은 다크니스의 무리를 상대로 뭘 어쩌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다만 다크니스의 행사를 어떻게든 방해해야했기에 내린 결정이다.

 "무슨 말인지 알았다. 일단 생각을 좀 해 볼 테니 푹 쉬고 있어."

 "급해요, 대장!"

 이제 와서 급하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

 "급하면 어서 몸을 추스르기나 해. 길을 아는 것은 너밖에 없으니까."

 하룬의 말에 에리피안은 다급한 표정을 하면서도 안도했다. 하룬이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거란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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