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데빌 산맥 속으로 (202/278)

데빌 산맥 속으로

 하룬은 떠오른 생각이 있어 그 길로 잉체 산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번잡함을 피해 대원들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패스트 스킬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산 중턱의 숙영지에 도착한 하룬은 용병대 수뇌부들을 소집해서 뒤늦게 회의 결과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대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대장, 우리도 성 하나 정도는 확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소. 이번 참에 제대로 된 근거지를 확보합시다."

 타니엘라의 말에 미루스가 반색을 하며 나섰다.

 내심 돌성과 사흘 거리에 있따는 마나석 광산을 떠올리던 하룬은 그들의 반응이 반가웠지만 다른 대원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 했다. 공성전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는 전투인 것이다.

 하룬들은 다른 대원들을 쳐다보았다.

 "저도 찬성입니다. 후크란 산맥 북쪽에 있는 근거지는 점차 커지고 있는 우리 용병대가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좁습니다. 굳이 광산을 낀 성이 아니더라도 성을 차지하면 우리 용병대로서는 편한 점이 많을 겁니다."

 티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보아하니 대원들 모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다들 필요한 이유를 들어 찬성했다.

 "우리는 돌풍 상단이 있으니 굳이 광산을 낀 성보다는 통행이 편리한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을 거 같아요."

 도네이스가 돌풍 상단까지 언급하자 성을 차지하는 일이 단순히 본거지를 마련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후 돌풍 용병대와 돌풍 상단이 커가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거라는 사실을 모두들 인식하게 되었다.

 "딜런 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묵묵히 앉아 있는 딜런만이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 있으리라. 

 "나쁘지 않은 의견입니다. 후크란에 인접한 캘프란 마을보다는 향후 데빌 산맥이 정리가 되면 이쪽이 훨씬 더 좋은 입지 조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다만 우려되는 것은 성의 관리와 방어 문제입니다. 우리는 용병이니 수시로 움직여야 하는데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들떠 있던 대원들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심각해졌다. 세 제국의 통제 밖에 있는 일종의 자유 지애이기 때문에 성을 한번 차지했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다른 세력이 성을 넘볼 수 있는 것이다.

 "크흠! 잘못하다가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날 수도 있다 이거군."

 표현이 좀 경망스러워서 그렇지 미루스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큰 의뢰를 받아들여 용병대 전력 상당수가 성을 떠나게 되면 방어할 방법이 없다. 

 방금 전까지 떠들던 사람들의 말이 쏙 들어갔다.

 "……대장!"

 레미였다. 망설이기는 하지만 눈빛이 강렬한 것을 보니 좋은 수가 있는 것도 같다.

 "말해 봐."

 "일단 성을 차지한 후에 제국 측에서 정착민을 받는 대신 우리 아카족을 이주시키면 어떨까요?"

 "아카족을?"

 "네. 에센을 통해 탄툰 마을과 연락을 했는데 마수들 때문에 아카족들이 지형적으로 가장 안전한 거점 마을로 모여들고 있대요. 그 숫자가 벌써 1,000명을 육박하고 전사들만 해도 300명이 넘어가서 식량 수급이나 거주지 문제로 각 거점의 탄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나 봐요."

 하룬의 눈이 빛났다. 대대로 마수를 사냥하며 살아온 아카족들이라면 자신들이 의뢰 때문에 떠나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무력이 있다. 5미터가 넘는 단단한 성벽이 있으면 마수들은 물론 어느 침략자들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거 괜찮은 생각입니다, 대장. 만약 아카족들이 성을 차지한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의뢰를 수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안정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대원을 수급할 수 있을 겁니다. 당장 활용할 수 있는 대원은 물론이고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린 아카족 전사들을 제대로 키워 내면 뛰어난 용병이 될 테니까요."

 당장 타니엘라가 찬성했다.

 "우리 돌풍 용병대가 굳이 성의 주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아카족이 주인이 되면 됩니다. 우리는 그저 아카족의 친구로 어려움을 같이하고 서로 도우면 될 겁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대장. 이곳은 원래 아카족을 비롯한 산악 부족의 대지. 우리는 친구로서 머무르면 됩니다."

 미루스와 딜런 역시 오래 생각하지 않고 좋은 방법이라고 손을 들었다.

 '맞아! 굳이 우리가 성의 주인이 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성의 주민들이 아카족이라면 성은 그들의 것이라야 해.'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지요."

 하룬의 말에 아카족 대원들은 소리는 지르지 못했지만 활짝 웃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본 성이나 이 마츠루트와 같은 요새만 있다면 아카족들은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다. 부족의 어른들은 언젠가 만년 왕국이 일어날 풍요의 땅으로 가야한다며 단단한 쌓는 것을 꺼렸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대장, 우리 에인족은요? 저희 부족도 아카족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근처 마을에서 연일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 부르카족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룬의 결정에 당장 토르와 티탄이 조심스럽게 불만을 표시했다. 아카족만 챙기자니 다른 두 부족이 걸렸다. 하지만 자신들의 전력으로는 성 하나를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각 성으로 투입되는 다크니스의 전력이 속속 증강되고 있다는 소식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대장, 차라리 세 개를 차지하지요. 보세요. 이쪽 마츠 평야의 중앙과 인접한 곳에 있는 네 개의 성은 다른 곳들과 많이 떨어진 데다가 광산도 없고 농경지도 없는 곳이에요. 요지에 자리하고 있긴 하지만 별다른 수익처가 없으니 틀림없이 다른 세력들은 이곳을 도모할 엄두를 내지 않읗 거예요. 당연히 다크니스의 전력도 강하지 않을 테고요."

 헤니가 가리키는 곳은 탄툰 마을과 어느 정도 떨어진 산맥 안쪽이다. 그녀의 말대로 사냥으로 살아가는 산악 부족이 아니라면 별 효용이 없는 성들이다.

 하룬은 그곳이 공교롭게도 돌성과 사나흘 거리인 것을 확인하고 눈빛을 빛냈다. 그가 구해 준 타칼족으로부터 마나석 광산이 있을 법한 위치는 이미 알아 둔 상태였는데 대원들이 지적한 성들이 그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대원들이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의견을 내고 있어 남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네 개의 성은 마수들이 마츠 평원으로 나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요. 귀한 물건이 나오거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우리 산악 부족들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에요."

 레미도 헤니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직접 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간 모인 정보에 의하면 다른 성은 최대 5,000명까지 거주할 수 있도록 쌓아졌다. 그 정도면 인근 아카족들이 모두 모여 살아도 되는 것이다.

 하룬은 세 고문과 티오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그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 네 개의 성 중 세 개를 우리가 차지하기로 하지요. 다만 우리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하니 아예 근처 산악 부족을 모두 동원해야겠습니다. 그럼 상세한 작전을 짜보도록 합시다. 디온!"

 "네, 대장."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즉각 주변 경계에 들어가라."

 "쥐새끼 한 마리도 엿들을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디온은 대원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100명이 넘는 대원들이 움직이니 그 간격이 촘촘해서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철통같은 수비벽이 형성되었다.

 모든 이들의 예상대로 마츠루트 요새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포화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 세 제국의 공고를 본 수많은 이방인들이 찾아들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이 만든 대형 길드들은 모두 몰려왔어요. 덕분에 우리 정보 길드가 엄청난 정보료를 벌어들이고 있어요."

 매일이다시피 하룬을 찾아오는 헤르쉬는 조금 피곤한 얼굴이지만 오랜만에 골드화를 자루로 벌어들이는 상황이라 입가는 웃고 있었다. 제국 정보 길드는 하룬의 도움으로 주로 광산을 끼고 있는 성에 대해 상세한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역시 광산을 끼고 있는 성들이 인기겠지?"

 "당연하지요. 더구나 그 성들을 차지하면 신 테론 제국과 미노 제국에서 귀족 작위와 함께 최소 5년간의 지배권까지 주니 다들 그쪽으로 눈독을 드리고 있지요."

 "데빌 산맥 북쪽은 어때?"

 "파이린 제국 방면의 성들은 별로 인기가 없어요. 질 좋은 농토가 있는 마츠 평원의 성들이라면 몰라도 험준한 곳에 위치한 데다가 얻을 것이 거의 없는 곳이라 아마 그쪽을 생각하는 세력은 없을 거 같아요."

 역시 생각대로였다.

 "공선전의 예상 결과는 어때?"

 제국 정보 길드라면 이미 시뮬레이션을 해 봤을 것이다.

 "단번에는 힘들겠지만 시간이 흐른다면 이방인들은 성을 차지할 거 같아요. 마탑과 신전의 지원도 있고 부활이 가능한 점을 잘 활용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해요."

 비록 강자들의 숫자가 부족하긴 하지만 무려 1만에 달하는 길드원들의 숫자로 밀어붙이면 다크니스가 아무리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쉽게 막아 내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그동안 사냥터를 독접해서 평균 레벨을 많이 올린 상태였다.

 "다른 자들은?"

 "용병들과 구 테론 제국의 귀족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세력이 가세하고 있어요. 독립적인 조세 행정권을 가지고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지만 세 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따는 점이 매력적이니까요."

 "그렇군."

 말이 지배권이지 달리 표현하면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다. 물론 그 왕국이 작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데빌 산맥은 한없이 넓으니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다. 데빌 산맥 안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는 많았다. 다만 개발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하룬이 내놓은 작전은 절반은 성공했다고 봐도 되는 것이다.

 '이제 나머지는 세 제국과 마탑 그리고 신전의 몫이다.'

 총 일흔두 개의 성 중 이방인들과 이곳 비욘드의 세력들이 눈독을 들이는 곳은 총 마흔두 개. 거기에 돌풍 용병대가 공격하려는 세 곳을 더하면 모두 마흔 다섯개의 성이다. 산맥 깊숙한 곳에 건설되거나 이미 축성된 스물두 개의 성은 세 제국과 마탑 그리고 신전이 힘을 모아 처리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하룬은 목표한 세 성만 함락시키면 황실의 두 번째 의뢰인 다크니스의 본거지를 파악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이미 요새 안에서 처리할 일은 거의 다 끝낸 상태였다. 이벨린과 은밀하게 만나 먼저 이야기한 대로 정보를 거래했으며 한 가지 의뢰에 대한 대금도 다 챙겼다. 파코추 마탑은 의뢰를 깔끔하게 수행했다고 치하를 하며 대금을 스크롤과 각종 마법 아이템으로 지불했다.

 기대를 했던 용병들과 만나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부른 자유 마법사들 역시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대신 그들이 도착하면 통신을 하도록 조취를 취해 두었다.

 '빨리 처리하고 현실로 돌아가야해.'

 현실에도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데드 벙커를 없애야하는 것이다. 벼리가 제시한 거사일까지는 현실 시간으로 채 한달도 남지 않은 것이다.

 하룬은 어제 있었던 해가解家 수장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은밀하게 전해진 쪽지를 보고 변복까지 해서 찾아간 곳은 식당을 겸하고 있는 여관의 2층에 있는 화려한 방이었다.

 해바루는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호남형의 중년 남자였다. 미노 제국의 상인을 가장하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비서로 보이는 미녀 1명을 대동하고 하룬을 맞이했다.

 "그대가 유명한 돌풍 용병대의 하룬이군."

 나면서부터 사람을 부려 온 이답게 인사만으로 사람을 본능적으로 옥죄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얼굴은 여유가 묻어 나왔고 태도는 기품이 있었으며 눈은 샤벨 타이거의 그것처럼 강하게 반짝였다. 

 하룬은 자신도 알지 못할 반발심이 들어 해바루와 마찬가지로 인사 없이 대화를 시작했다.

 "코원 유니원의 수석 행정관이시라고 들었소."

 자신을 대하고도 전혀 꿀리는 기색없는 하룬의 태도에 해바루의 얼굴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자식이 큰 신세를 졌다고 들었소. 일단은 감사드리오."

 말은 감사하다면서 그저 고개만 까닥대는 모습이 영 마땅치 않다. 권위 의식이 골수까지 배인 노블의 전형적인 모습에 하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그래 봐야 댁이 고개 한번 까닥거릴 정도의 신세에 불과하오."

 하룬의 차가운 응대에 해바루의 낯빛이 조금 변하며 상체를 앞으로 끌어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이거 실례를 했군. 정말 신세를 졌을 줄은 몰랐소. 그저 하는 소리이겠거니 했는데……."

 대번에 말투까지 달라진다. 예힘이 해바루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든지 아니면 하룬을 시험했든지 둘 중 하나이리라.

 "마음에 두지 마시오.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니 인연도 길게 이어지지 못할 테니까."

 냉소적인 하룬의 반응이 뜻밖이었을까? 해바루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오. 요즘 유니온의 상황이 좋지 않아 워낙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자식 놈에게 제대로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수 있겠소이까?"

 해바루가 이제야 정중한 태도를 보이지만 하룬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일이야 나중에라도 예힘에게 들으면 되는 일이고 날 이곳에서 만나길 청한 연유나 들어 봅시다." 

 "청한 연유라? 허어, 참! 나 역시 사정을 모르고 나왔는데……."

 하룬은 실소를 짓고 말았다. 예힘이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해바루가 자신의 입으로 말한 대로 워낙 바빠서 들은 시간도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약속이 되어 있어 나온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 그쪽 세상의 지인에게 들으니 마약 문제로 시끄럽다고 하더니 그 일 때문인가 봅니다."

 "그걸 어떻게?"

 "그래, 배리어를 E구역까지 축소하기로 한 겁니까?"

 "……"

 연속된 하룬의 말에 해바루의 동공이 커지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극비 중의 극비 정보를 어떻게 이자가 알고 있는지 황당하기만 했다.

  

 "내게 그 정도 정보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이 대화를 시작합시다."

 "……"

 "의뢰를 받겠다고 하셨다 들었어요?"

 너무 놀란 나머지 입만 벌리고 있는 해바루 대신 그와 동행한 이십 대 후반의 미녀가 입을 열었다. 외모 보정을 했는지는 몰라도 어느 곳에 있어도 눈에 띄는 극히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수행 비서인 줄 알았더니 예힘의 누나였나?"

 예힘의 얼굴 윤곽이 비슷해서 해 본 말이었다.

 "맞아요. 난 해가의 수련이라고 해요."

 "알고 있겠지만 난 돌풍 용병대의 하룬이오. 이제야 제대로 된 인사를 하는군."

 하룬의 말에 해바루가 쓴웃음을 지으며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상대에 맞추어 행동하는 자로군. 강하면 강하게 약하면 약하게.'

 말이 그렇지 쉽지 않은 처신이었지만 간혹 이런 자들이 있다. 최소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런 자들 상당수는 그럴 자격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가 내린 판단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의뢰를 받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힘이 하겠다고 한 것이라오. 하지만 사안이 그가 책임지기에는 너무 큰 건이라 배후에 있는 분과 만나기를 청한 것이고."

 "사안이 크다? 우리 세계의 분도 아닌데 너무 과도한 자신감을 표출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화사한 얼굴과는 달리 차디찬 눈은 맑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크니스가 극비리에 운영하는 데드 벙커에 대한 정보와 휴먼 가드가 운영하는 광산들에 대한 정보 정도라면 큰 건이 아닌가? 이거 예힘의 말과는 다른 반응이니, 시간만 낭비한 꼴이 됐군. 뭐, 관심이 없다면 난 이만"

 하룬은 그들이 자신과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중요한 정보라면 바로 붙잡을 텐데 그가 문고리를 잡고 나갈 때까지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이들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온 하룬은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지만 그래도 자신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코원 유니온의 실세를 지척에서 보았다는 걸로 그 마음을 달랬다. 보통 주민들은 평생 동안 보지 못할 중요 인사들과 짧지만 대화까지 나누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하룬이 막 계단을 내려가려고 한 발을 내렸을 때 뒤에서 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잠깐 서시오!"

 해바루와 해수련이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달려 나왔다. 때문에 2층 복도와 1층을 꽉 메운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지만 그들은 황급히 달려와 하룬의 방어구 소매를 잡았다.

 "더 할 말은 없을 것 같은데."

 "아니오. 있소!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 하오!"

 "맞아요. 우리가 너무 뜻밖의 말을 들어 잠시 넋이 나갔었어요."

 두 사람은 하룬을 끌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하룬은 못 이기는 척 그들이 이끄는 대로 방으로 돌아갔다.

 해수련은 한발 뒤에서 방으로 들어가며 문 옆에 선 전사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 전사가 1층을 향해 수신호를 하자 손님인 양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전사들이 빠르게 움직여 문을 봉쇄하는 것은 물론 건물 전체에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를 취했다.

 "정식으로 사과하겠소!"

 방으로 들어온 해바루와 해수련은 허리까지 숙여 하룬에게 사과를 해 왔다.

 "흐음! 멀 사과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들이겠소. 앉읍시다."

 두 사람은 얼굴 상당 부분을 덮은 하룬의 긴 머리카락 때문에 그 표정을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예상한 정도의 불쾌감을 느끼지 못하자 굳었던 얼굴을 펼 수 있었다.

 "우리 서린이, 아니 예힘이 대장에게 그 정보를 의뢰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조신하게 자리에 앉은 해수련은 그것이 제일 궁금한 것 같았다. 하룬은 그녀의 말투에서 평소 예힘이 해수련에게 어떤 취급을 받아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경험한 첫인상으로도 추측이 가능했다.

 '철이 덜 큰 애로 취급해 왔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후의 옣미을 위해 어느 정도 위신을 세워 주고 싶었다. 사람이란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소. 자신은 신전을 이용해서 세력을 키우는 것도 벅찬 상황이니 내게 아버지가 맡긴 정보 부분을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소."

 "……정말인가요?"

 해수련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눈에는 한줄기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포기하고 있던 동생이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쁜 것 같았다. 해바루의 눈에도 비슷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게는 아까 이야기한 대로 당신들 세계에 대한 특급 정보를 알고 있는 지인들이 있소. 개개인이 가진 정보는 단편적이지만 취합을 하고 확인 과정을 거치면 쓸 만한 정보들이 된다오. 그들 개개인이 가진 정보로는 당신들과 접촉하려고 해도 할 방도도 없고 제대로 인정도 받을 수 없는 터라 내가 나선 것이오."

 "믿겠어요. 거래를 하기 전에 어느 정도의 정보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제 해바루는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터라 하룬의 연배를 추측하기는 힘들었지만 진중한 목소리로 판단하건대 20대 후반 이상인 확실해 보이는 바 자신이 직접 상대하는 것보다 딸에게 맡기기로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데드 벙커의 위치와 수비 상황, 방어 전력과 지휘 계통 등 세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소. 또한 휴먼 가드가 관리하는 광산 세 곳과 제련 시설이 있는 지하 기지의 위치에 대한 정보도 있소. 뭐, GG의 조직 전반에 대한 정보도 있지만 그 정도는 당시네 GPC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오."

 "……휴우!"

 "하아!"

 해바루와 해수련은 이미 충분히 놀랐지만 하룬의 말에 다시 한번 숨이 멈출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설마 자신들이 속한 조직의 이름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나마 이전에 받았던 충격이 있었기에 금세 극복하고 긴 한숨을 쉬어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 동생이 대장에게 어떤 의뢰를 했고 어떤 대가를 약속했는지부터 알고 싶어요."

 역시 영리한 여자다. 협상의기본을 잘 알고 있었다.

 "다크니스와 GG에 대한 모든 정보가 그 대상이었소. 원래는 이곳 세상에서 다크니스를 상대해 달라는 의뢰도 했지만 알다시피 다크니스의 힘과 전력은 상상이상이라 우리 용병대만의 역량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오. 대가는 아직 약속하지 않았소. 자신에게는 이 정도 정보를 해당하는 대가를 약속할 권한이 없다고 하더군. 대신 권한을 가진 댁들과의 만남을 주선한 거요." 

 " 그렇군요. 이젠 믿을 게요. 사실 이곳 사람에게 그런 정보를 들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탓에 많이 놀랐거든요."

 "……하룬이라."

 해바루는 하룬이라는 이름을 되뇌며 아들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버지, 하룬 형님이 말하길 우리 세상에도 돌풍 용병대와 하룬이라는 자가 유니온 밖에 거점을 둔 상태로 활동하고 있답니다. 그의 돌풍 용병대는 헤븐 컴패니를 없앨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고요. 다른 자들이 채 가기 전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들은 용병이니 적당한 대가를 약속하면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할 겁니다.

 '하기 싫다고 난리를 치는 비욘드를 강제로 시켰떠니 용병이니 뭐니 이상한 소리나 한다고 혼냈는데 그럼 그것도 제대로 된 정보란 말이지. 그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 녀석이 어떻게 이런 인물과 호형호제하며 사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자기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역시 자랑스러운 우리 해가의 장손이 맞구나!'

 해바루는 이기적인 성품에 욕망하는 것도 별로 없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서린이 과연 해가를 이끌 수 있을지 고민해 왔다.

 '이 한 건으로 인해 완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겠어!'

 아무리 철통가은 방어막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 위치만 알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이러기 위해서 유니온 밖에어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는 특수군을 양성하고 기존 무기를 개량해 왔던 것이다.

 '흐흐흐! 이 정보를 입수한 것만으로도 우리 해가는 GPC 내에서 중추 가문의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어.'

 호시탐탐 자신의 가문을 쓰러뜨리려고 칼을 가는 사가가 아무리 군부를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공이면 이젠 그 허황된 욕심을 버리게 될 것이다.

 "세 가지를 모두 원해요."

 잠시 고민을 하던 해수련의 말이었다.

 "흐음!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거래하는 정보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들이오."

 "어떤 거라도 상관없어요."

 그렇게 대답을 하는 해수련이나 하룬의 시선이 해바루에게 향했다. 해바루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GG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는 자신들도 알고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어서 교차 확인이 필요하던 참이다. 그나마 최근 마약인 세미롱 사태로 인해 그들의 하부 조직이 괴멸하다시피 하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좋소. 대가부터 말하지. 5중 그레핀 4평방킬로미터와 밀가루 10만 톤, 쌀 10만 톤……."

 하룬은 벨과 아리가 부탁한 내용을 그저 책 읽듯 불러 주었다. 그 안에는 기지에서 생산할 수 없거나 재고가 거의 없는 5중 그래핀을 포함한 수많은 특수 소재와 식량 그리고 각종 원자재와 무기류 들이 들어 있었다.

 하룬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는 해수련의 손이 어느 순간부터 떨고 있었다. 양도 양이지만 그 내용이 시로 놀라웠던 것이다. 오직 코원 유니온만이 생산할 수 있는 특수 소재들은 물론이고 원하는 종류와 양이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아카톤 500리터, 이게 전부요."

 "후유! 어디에 새로운 유니온이라도 세우려고 하나요?"

 식량의 양은 최소 만 명 이상이 10년 동안 살 수 있을 정도였고, 첨단 기계류와 특수 소재들은 유니온은 아니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5중 그래핀과 극세 실리콘이었다. 그래핀과 실리콘은 모두 반도체와 태양광 발전의 중요한 소재로 현재까지 알려진 소재 중에 가장 뛰어난 전자이동도와 물리적 강도 그리고 우수한 열전도성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 그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은 코원 유니온밖에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난 그쪽 사정은 모르오. 그저 그들 개개인이 모은 정보를 한데 묶어 정리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취합해서 그대들과 거래를 하는 역할만 할 뿐이오."

 "하긴……."

 종류는 무척 다양하지만 연결점이 없다. 그런 것으로 보아 하룬이 안다는 지인들의 숫자도 무척 많은 것 같았다. 말이 그렇지 인구 만명이 생활할 기지나 어떤 생산 시설을 건설하자면 빠진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다.

 '아무튼 대단한 사림이야. 어떻게 우리 서린이가 이 사람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더 없는 기회가 온 거야.'

 "방금 것들은 그들 몫기오 내 보수를 말하겠소." 

 "말씀하세요." 

 "등급별 종류별 포션 각 1,000병씩, 공격과 이동에 관련된 스크롤 1.000장, 원소석과 정령석 각 열 개 그리고 현금 100만 골드를 원하오."

 잔뜩 긴장했던 해수련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 정도라면 이 세계에 뿌리를 내린 GPC 세력에서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는 물품이며 금액이었다. 현실의 대가가 너무 엄청나서 긴장했지만 하룬이 원하는 것은 수량이 많은 포션을 제외하고는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해수련은 입을 꽉 다물고 아버지에게 시선을 주었다. 해바루는 대가가 돈이 아니라 현물이 코원 유니온이 보유한 것으로 모자라 다른 유니온들의 힘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많아서 고민을 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보만 확실하다면 우리는 받아들이겠소."

 더 이상 해수련에게 맡겨 놓지 않고 해바루가 나섰다.

 "좋소. 일단 신뢰를 위해 절반의 정보를 알려 드리지."

 하룬은 미리 준비한 영상 저장구를 건네주었다. 패트를 호크와 위성으로 촬영한 데드 벙커의 영상과 벼리로부터 입수한 기지 내부의 정보가 상세하게 들어 있는 것이었다. 중요 부분이 편집되었지만 내용을 아는 자가 보면 그 가치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해바루와 해수련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영상구의 영상과 음성을 확인했다.

 '대박이닷!'

 '중요한 부분만 채워진다면 GG의 최고 비밀 시설이자 숨겨진 힘인 데드 벙커를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유니온에서 암약하는 중간 조직까지 일망타진할 수 있겠어! 게다가 휴먼 가드가 관리하는 광산의 위치까지 안다면 차후 그들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적어지겠지.'

 두 부녀는 서로의 얼굴에 자신이 짓고 있는 환희를 미소를 볼 수 있었다.

 하룬은 물건을 받을 장소를 미리 아즈만이 알려준 좌표를 불러 주었다.

 "그곳은 F구역에 있는 폐발전소인데……."

 해수련은 좌표를 듣자마자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폐발전소는 배리어의 가장 외곽에 있었다. 그녀와 해바루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곳이라면 그의 지인들이 코원 유니온 내부에 존재한단말인가?'

 자신들이 GG와 HG를 제외하고는 코원 유니온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그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노출되지 않은 또 다른 세력이 있는 걸까?'

 잠깐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하룬은 그 의심이 깊어지도록 시간을 주지 않았다.

 "물건들을 그곳 안에 가져다 놓으면 내 지인 중 1명이 상세한 정보가 담긴 칩을 인계할 거요. 당신들은 폐발전소 반경 5킬로미터를 비우기만 하면 되오."

 비록 배리어 안에 있긴 하지만 방사능 유출 때문에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어떻게 물건들을 가져가겠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정보가 중요했다.

 "알겠소. 이번 달 24일까지 요구한 모든 물건들을 준비하겠소."

 해바루는 물픔들 속에 위치 추적 장치들을 달 심산이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이런 고급 정보를 알고 있는 자들이 코원 유니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뒤통수가 근질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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