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만남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헤르쉬였다.
"그동안 잘 있었소?"
"네. 파이린 제국의 금제가 풀려 정신없이 바빴어요."
황도에 길드 본부를 다시 개설하고 지부망과 길드원 확충 등 할일이 아주 많았다. 수뇌부 중 상당수가 황실 정보대로 전향을 했기에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쉽지 않아 베론 자작과 헤르쉬가 직접 발로 뛰어야만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오랜만의 해후를 그간 서로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왜 빛의 신전 성녀와 성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오?"
"그들은 아세르 주교가 도착한 후부터 외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어요. 안 그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사를 시켰는데 아직 결과는 올라오지 않았네요."
안 그래도 자신을 믿고 성배까지 맡긴 터라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신전 내 반대 세력에 의해 구금된 것 같소."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해요.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최근 빛의 신전인 실세인 교리 계열이 성녀를 중심으로 한 실천 계열의 약진에 놀라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그래도 주교가 성녀와 성자를 구속하는 상황은 좀 황당하군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교리 계열 측은 권력은 물론이고 누대에 걸쳐 쌓아 온 재력까지 손에 넣고 있으니까요."
종교 쪽은 깨끗할 줄 알았는데 속을 들여다보니 실망이다. 뭐, 하기야 욕망덩어리인 인간이 모였으니 절대적으로 깨끗할 수 있는 조직은 없을 것이다. 어디에나 추악한 면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다크니스에 흑기사와 흑전사라고 불리는 작자들이 있따는데 정체가 도대체 뭐예요?"
하룬은 오늘만 해도 벌써 네 번이나 말하는 내용이지만 헤르쉬에게도 똑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큰일이네요. 잘못하다가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려는 세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게 생겼네요."
"그러게 말이오. 무고한 이들이 상하지 말아야 할 텐데 벌써 세 제국을 합해 이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들에게 납치되어 가제 노역을 하거나 흑마법의 수련 대상이 되고 있소."
서로가 아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대화를 나누던 와중에 헤르쉬가 결심한 듯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 일과 연관된 이들을 한데 모아야 할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었다. 하룬 역시 다크니스 건은 세 제국과 마탑들 그리고 신전들이 모두 모여 의논을 해야 할 중대한 사항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도 그게 제일 좋은 방법 같소. 돌풍 용병대나 헤르쉬가 속한 제국 정보 길드도 이 일에 관해서는 정보료나 대가 없이 협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흐음! 아쉽지만 그래야겠지요."
헤르쉬는 하룬의 말에 선선히 동의했다. 제국들이 절단나고 세상이 멸망하면 아무리 많은 돈을 쥐고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제가 만남을 주선하도록 할게요. 하룬이 나에게 힘을 좀 실어 줘요."
"좋소. 어떻게 하면 되겠소?"
"나 혼자의 이름으로 초대를 하면 응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하룬의 이름도 나란히 써서 초대를 하도록 하지요. 그에 곁들여서 수하들을 직접 보내 모두 모여 의논하지 않으면 날로 강성해지는 다크니스를 막을 수 없다는 사정을 설명하도록 할게요."
하룬은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경우는 어차피 남은 의뢰를 위해 지속적으로 다크니스와 부딪혀야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거대 세력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한결 쉽고 안전할 것이 분명했다.
하룬은 그 일이 마무리되자 그동안 내내 생각했던 일을 꺼냈다.
"부탁할 것이 있소."
"뭐죠?"
큰 눈을 깜박거리는 묻는 헤르쉬의 얼굴에는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다는 뜻이 강하게 우러나와 겨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미……안한 말인데 버처리비크를 내게 줄 수 없겠소? 녀석들과 같이 지내다 보니 그 능력이 너무 욕심나서 말이오."
"호호호! 하룬이 얼굴을 붉히는 것은 처음보네요. 그러니까 귀여워요"
헤르쉬는 대답 대신 깔깔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대원들이 슬며시 들어올 정도였다.
"난 버처리비크를 겨우 급한 정보를 전하는 데 썼는데 하룬은 다른 능력까지 발견한 모양이네요. 녀석들이 새끼를 낳고 다 자랐을 때 내게 준다고 약속하면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그때가 되면 우리 포니의 능력도 많이 올라가겠지요."
의외로 선뜻 허락하는 헤르쉬였다. 하룬은 기쁜 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와 수니가 허락하면 그렇게 하겠소."
"이름까지 지어 주었군요. 역시! 좋아요. 그 대신 예전에 약속한 조건은 전부 상쇄하는 걸로 해요."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만약 미노와 수니가 다 자란 새끼를 헤르쉬에게 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할 생각이다.
원래는 다크니스의 전력을 가지고 헤르쉬와 거래를 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결과가 나오니 보니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헤르쉬 역시 다크니스에 대한 정보로 큰돈을 벌거나 이득을 취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 밑지나?"
마치 하룬을 놀리듯 예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던 헤르쉬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거기에 더해 이 일이 평화롭게 잘 끝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알겠소. 그리하지요."
말로만 연락용으로만 썼다고 하지만 정보 단체의 수장이 버처리비크의 효용 가치를 모를 리가 없다. 하룬을 위해 그렇게 하룬은 그녀의 부탁이 뭐가 되었든지 최선을 다해 들어줄 생각을 굳혔다.
-아무리 우연히 만나 동행한 마탑의 탑주들을 의식해서 한 행동이라지만 정말 쓸데 없는 짓을 했군, 아세르 주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세르 주교는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차가운 말에 가볍게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룬에게 찍힌 아세르 주교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다시 하룬과의 자리를 만들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쩌자고 마탑의 탑주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해서…….'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탑주들을 따라온 마법사들이 자신이 범한 무례를 요새로 전체로 퍼트린 것이다. 워낙 보는 눈이 많아서 일을 숨기거나 따로 변명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오늘 본전의 총교로부터 비록 통신구를 사리에 두었지만 질책을 당하고 마는 사태까지 이른 것이다.
-자네의 처신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그 죄를 묻도록 하지. 한가지만 명심하게. 자네 때문에 신전의 권위가 땅에 처박혔다는 걸 말이야.
"……"
-왜 그 일에 대해서 즉각 보고를 하지 않았는지도 지금은 묻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에게 그 위중한 일을 더 이상한 맡길 수도 없고 신전 연합 회의가 있어 내정되어 있어 수석 주교가 워프를 통해 그쪽으로 출발했으니 오늘내일이면 도착할 걸세.
총교의 말에 아세르 주교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제 다크니스와 잃어버린 성물 건은 수석 주교가 책임지기로 했으니 자네는 수석 주교가 도착하는 즉시 본전으로 돌아오게. 제발! 신전에 누가 되는 오만한 행동은 하지 말고 말이야. 자네가 경유한 곳마다 총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한 자네의 소문이 쫙 퍼져 있네! 안 그래도 미요스 신의 대리인으로 인해 민심이 우리를 떠나고 있는 마당인데 아주 불난 곳에 부채질을 했더군.
아세르는 할 말이 없었다. 성녀와 성자가 포함된 실천 계열을 확실하게 처리하면 수석 주교 자리는 따 논 당상이라 조금 기분을 낸 것뿐이지만 요새의 일과 맞출려 총교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휴우!'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행여 주교 자리에서 탄핵을 당하는 날이면 귀족 신분이 부인되는 파이린 제국에서는 더 이상 그가 좋아하는 재물도 축적할 수 없고 숨겨 놓은 정부情婦들과 그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에게도 더 이상 지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젠장! 평생 모은 재물을 한 방에 다 털어 넣게 생겼군. 그래도 자리만 유지할 수 있다면 재물이야 어떻게든 모을 수 있겠지.'
다행히 주교들이 성향이야 상당수는 귀족 출신인 자신과 비슷하니 그동안 모은 재물로 회유한다면 파문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자신이 잘못한 것이야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 줄 모르고 그저 그런 용병으로 대한 것밖에는 없었다.
-아세르 주교, 성녀가 주교단과 장로원에 동시에 잃어버린 성물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보낸 것을 알지 못했소?
"네? 처음 듣는 말입니다. 성녀가 저에게 넘긴 것은 주교단으로 보내는 보고서뿐이었습니다."
-허어, 참! 곤란하게 되었네. 설마 당신, 성녀에게 심한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총교의 말에 아세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전 다만 각하께서 명하신 대로 연금만 했을 뿐입니다."
-이런! 내가 언제 자네에게 성녀와 성자 일행을 연금하라고 했나?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하, 하지만 각하께서 출발할 때 준명히 제게 따로 명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보고서를 접수한 후에 절대 외인이 접근할 수 없게 하라고……."
-정말! 당신 큰일을 낼 위인이군. 내가 언제 그렇게 말을 했나? 난 성녀 일행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성곡적으로 했으니 각별히 신경 써서 뫼시라고 말한 것밖에 없네.
대번에 차갑게 내뱉는 총교의 말에 아세르 주교는 전신은 태풍 앞에 선 것처럼 심하게 떨렸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자리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권력의 중추에 오래 앉아 있었던 만큼 그 차갑고 잔혹한 생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주교가 뭔가 착각한 것이 분명하군. 이걸 어떻게 한다? 주교 신분으로 성녀와 성자를 구속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다니!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거나 일반 사제들에게 알려진다면 신전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떨이지고 말 걸세. 당장 조치를 하게!
"아,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아세르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변변치 못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성물을 탈취해 간 무리를 찾아낸 것 때문에 지금 교단에서는 성녀와 성자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소. 인기에 영합하는 그들의 처신으로 실천 계열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고 주교단 회의에서 그런 위험한 곳을 별다른 지원없이 보낸 것에 대해 장로원의 장로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제들이 의아해하고 있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내 당신에게 각별히 부탁을 했는데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처신으로 신전과 사제들이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각오하시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어떻게든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던 아세르 주교의 얼굴이 독이 오른 것 같은 총교의 존댓말에 시꺼멓게 죽어 버렸다.
빛의 신전 수석 주교인 엘리시윰이 오새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숙소에서 나오지 않고 있던 성녀와 성자를 밖으로 청한 것이다. 하루 내내 아세르가 안달을 하며 그들에게 사죄하며 밖으로 나올 것을 청했어도 꿈적도 하지 않던 성녀 일행이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고귀하신 성체를 배알합니다, 성녀님. 성자님."
"여긴 웬일인가요, 수석 주교?"
성녀는 연방 허리를 굽혀 가며 인사를 하는 엘리시윰에게 화를 내는 대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 마치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수련을 하고 나온 듯 성녀와 성자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더 성결하게 빛나고 있어 하위 신관들은 황홀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전 연합 회의가 내일 이곳에서 열리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는 이제 본전으로 돌아가도 되겠군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회의에는 참석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그런 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원래부터 저를 그런 회의에서는 배제하지 않았던가요? 전 당장 본전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성녀의 말에 엘리시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힘들게 떴다. 다른 신전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총교나 신녀 혹은 성녀가 참석한다고 했으니 최고의 신전으로 자부하는 빛의 신전도 거기에 맞추어야 했다.
'빌어먹을! 이렇게 상황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자신은 병을 핑계 삼아 빠지고 날 보내 이 골치 아픈 상황을 감당하라 이거지!'
엘리시윰은 내심 총교에게 욕을 하며 이를 갈았다.
"그래도 각 신전을 대표하는 분들이 참석하는 자리인데 성녀님께서 빠지시면 안 되지요. 어쨌든 성녀님은 총교 각하를 빼고는 저희 신전에서는 가장 고귀한 분이 아닙니까?"
엘리시윰의 말에 성녀가 고소苦笑를 지었다.
"언제부터 본 성녀가 그런 고귀한 인물이 된 거죠? 나와 성자는 한낱 주교에 의해 자유를 구속당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요."
성녀의 말에 엘리시윰을 따라 요새로 온 사제들이 일제히 놀란 얼굴이 되었다. 고위급 사제들은 이미 성녀가 신전에서 배척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투 사제들이나 일반 사제들은 그런 상황을 모르고 있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시윰의 얼굴이 썩은 간처럼 변하고 대부분의 사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성녀와 성자가 그동안 아세르 주교에 의해 방 안에 갇혀 있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성녀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세르 주교는 성녀 앞에 엎드렸다.
"제가 총교 각하께서 내리신 며, 명령서의 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참혹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명령서를 잘못 이해했다고요? 외교원의 수장인 아세르 주교가요? 호호호! 정말 황당하군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준엄해지는 성녀의 몸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위엄과 성결함이 휘광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제가 명령서의 내용을 예전에 가지고 있던 이단 심문에 관계된 다른 서류들과 혼동했습니다."
아세르는 자신을 향해 던지는 사제들의 차가운 시선에 금방이라도 심장이 멈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억지로 힘을 쥐어짰다.
"제가 명령서의 내용을 혼동한 잘못은 있지만 감히 성녀님과 성자님의 자유를 구속했다고 하심은 너무 심한 말씀입니다. 전 다만 외인과의 접촉을 삼가고 되도록 조용히 계셔달라고 한 것뿐입니다."
그나마 이렇게 우기는 것이 최선이다. 성녀 측에서 굳이 밖으로 나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에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일반 사제들은 어느 쪽이 사실을 말하는지 모를 것이다.
"호호호! 우리를 연금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전 단지 그렇게 부탁했을 뿐입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그리고 제가 뒤늦게 잘못 처리한 것을 깨닫고 어제 성녀님을 찾아고 잘못을 빌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성녀님께서는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죄가 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오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용서해 주십시오."
아세르 주교가 엎드린 상태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읍소를 하자 지켜보던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세르의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강제로 연금한 것도 아닌 이상 평소 자애롭기로 유명한 성녀가 너무 속 좁게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성녀의 뒤에 있던 서자가 앞으로 나섰다.
"아세르 주교!"
"네, 성자님!"
"이게 뭔지 아시겠소? 이건 이방인들이 들여온 물건으로 영상과 음향을 저장하는 아이템이라오. 어디 한번 보시겠소?"
성자는 아세르가 어떻게 반응도 하기 전에 아이템을 구동시켰고 허공에 영상이 떠올랐다.
-아세르 주교, 이게 무슨 짓인가?
-주교,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리를 감금하겠다니!
-닥쳐라! 흐흐흐! 성녀와 성자라고 잘난 척하더니 잘됐구나! 비천한 출신에 신성력 좀 있다고 감히 고귀한 귀족 혈통을 타고난 우리 주교들을 무시하더니. 거기에 이방인 주제에 성자라고? 교리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제들이 받드니까 그저 짓고 까불더니 참 불쌍하게 되었구나. 이제 너희들은 신전의 죄인이 되었다. 본전으로 호송되면 이단 심문이 기다리고 있으니 기대하라. 왜 주교 회의에서 너희들에게 잃어버린 성물의 행방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겼다고 생각하나? 임무에 성공하든 실패하던 너희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상태야! 실천 계열이 부상하는 것을 총교 각하와 우리 교리 계열의 주교들이 그냥 두고 보고만 있으리라고 생각했나? 참으로 어리석은지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것도 모르고 거들먹거리더니 다니는 꼴을 생각하니 정말 우습군. 이 숙소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오면 실천 계열의 사제들 목숨은 장담할 수 없으니 알아서 해라.
성녀와 성자에게 협박을 하는 아세르 주교의 모습과 그가 내뱉은 말을 들은 일반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해지고 눈에서는 불길이 솟구쳤다. 교리 계열과 실천 계열로 나눠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제들은 어느 편도 아닌 상태다. 하지만 아세르 주교가 했던 행동과 말을 통해 이번 성녀 일행의 마츠 평원행에 담긴 음모를 알게 된 사제들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 아니야! 저건 내 의지가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 총교각하가 직접 내린 명령 때문이었어!"
"이잇! 가증스러운 마신의 하수인!"
엘리시윰은 더 이상은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곁에 서 있는 성기사의 검대에서 검을 빼네, 눈이 뒤집혀 변명을 해 대는 아세르 주교의 가슴을 찔러버렸다.
"크윽! 원……통해!"
아세르 주교의 부릅뜬 눈이 엘리시윰을 향했지만 서서히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성녀님, 이런 참혹한 일을 당하시다니 정말 송구합니다. 이자는 교리 계열과 실천 계열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총교 각하께서 왜 그런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이 일은 성물을 탈취해 간 그 다크니스라는 사악한 무리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녀는 엘리시윰의 말에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믿으십시오, 성녀님! 이자는 다크니스의 사주를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엘리시윰을 쳐다보는 일반 사제들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리 깊은 의혹이 담겨 있었다. 엘리시윰을 비롯한 몇몇 사제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리석은 아세르 주교가 충교가 연루되었다는 증거까지 남기는 바람에 유래없는 엄청난 태풍이 신전을 강타할 것을 예감한 것이다.
신전 연합 회의 내내 분위기는 심각했다. 이미 파코추 마탑에 의해 다크니스와 마수들에 대한 영상이 각 신전에 전해져서 거대한 흑마법사의 무리가 태동했고 무섭게 세력을 확장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허심탄회하게 이루어진 회의를 통해 태양을 숭배하는 라 신전에서도 성물을 의문의 무리에게 탈취 당했따는 사실이 알려졌다. 신성력과 상극의 힘을 가진 흑마법사의 출현만 해도 두려운데 신전들도 그 가치와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성물까지 탈취되었으니 심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신전 연합 회의는 만장일치로 빛의 신전 성녀를 대표로 하여 이 일을 처리할 것을 결정했다. 흑마법사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수간까지 모든 신전의 힘을 한데 모으기로 한 것이다.
중병을 핑계 삼아 회의에 불참한 빛의 신전 총교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상황이었지만 비상 상황에만 활동이 가능한 장로원이 흑마법사들의 대거 출현한 현 상황을 비상으로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개입했기에 어떤 갑섭도 할 수가 없었다.
각 신전의 사제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현역에서 물러났던 장로들 중에 주교 출신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기름기 많은 음식과 재물 그리고 여색에 탐닉했던 귀족 출신들은 맑고 깨끗한 영혼도 갖추지 못했기에 대부분 장수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자 예힘이 저장했던 영상구는 몇몇 사제들에 의해 복사가 되어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충교를 중심으로 한 교리 계열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지만 병을 핑계 삼아 수도원 깊숙이 칩거한 충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계파에 초연한 장로들이 총교를 대신해서 전면에 나서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어 신전의 신관들과 성기사들 상당수가 마츠루트 요새로 향했다.
다른 신전들 역시 최상의 전력과 마물을 상대할 성물은 물론 막대한 양의 성수聖水들을 마츠루트로 보냈다. 잘못하다가는 대륙이 다시 흑마법사들에게 정복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그동안 일반 주민의 안위에는 꼼짝도 하지 않았던 신전들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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