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츠루트 요새의 풍운.
마츠루트 요새.
테론 제국 시절에는 중부와 남부를 가르는 데빌 산맥의 유일한 통행로로 몬스터들과 마수들을 막기 위해 세워진 요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파이린 제국, 신 테론 제국, 미노 제국을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변경백이었던 라일스 백작이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이래 이 요새는 자유 도시화됨과 동시에 삼국 무역의 중심지로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세 제국의 수많은 특산물들이 마츠루트 요새로 모여듦과 동시에 각국의 상인들에게 팔려 나가는 터라 이곳에는 세 제국의 내로라하는 상단들이 앞다투어 지부를 설치했고, 몬스터와 상인들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용병들도 모여들었다.
최근에는 이방인들의 실력이 올라가면서 몬스터보다 훨씬 강한 마수들을 찾는 고레벨의 이방인들마저 마츠루트를 찾고 있었다.
사람들과 물산이 모여들자 마츠루트는 급격히 풍요로워졌다. 신분제를 철폐한 파이린 제국으로 넘어가려던 신 테론 제국과 미노 제국의 노예 출신들이 대거 몰려든 탓에 인구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상행위의 활성화로 인해 할 일이 많아져 굳이 파이린 제국으로 향하지 않고 이곳에 주저앉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마츠루트 요새는 상주인구 10만에 수많은 유동 인구까지 유입되어 험준한 산맥 한가운데 자리했다는 지형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륙 그 어느 곳보다 활기차게 발전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세 제국은 물론 마탑과 신전의 요인들이 수많은 수행인들을 거느리고 이곳을 찾아오자 라일스 백작은 와병을 핑계 삼아 어디론가 숨어 버린 상태였지만 치안은 잘 유지되고 있었다.
하룬은 일행들과 함께 아침 일찍 요새 안으로 들어섰다.
"사냥은 어땠습니까?"
막 요새의 문을 열던 경비대장이 티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하하! 시원찮았습니다. 마수들이 들끓는다고 하더니 막상 잡으려고 나가니 별로 눈에 띄지 않더군요. 오우거 두 마리와 체로키 다섯 마리 그리고 브롤프 일곱 마리를 잡은 것이 전부입니다."
"허억! 정말 대단하시군요. 대단합니다."
마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는 경비대장은 티노의 말에 기함을 할 정도로 놀랐다. 특히 체로키의 경우는 용맹하기로 소문난 산악 부족들도 거의 잡지 못하는 마수가 아닌가.
"그런데 뒤에 있는 분들은?"
"우리 대원들입니다."
타림 공방에서 마수의 가죽으로 제작한 롱코트 형태의 방어구를 갖추어 입은 대원들의 기도는 경비대장이 보기에도 대단했다. 마치 요새군 중 최고의 실력을 가진 데빌 헌터의 열병식 때 느꼈던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약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 과연 돌풍 용병대!'
티노는 경비대장과 경비대가 대원들을 보며 감탄하는 것을 보며 어제 보라가 가지고 온 이 방어구들을 처음 입어본 후 대원들이 보인 열광적인 반응을 떠올렸다.
'후후! 난리도 아니었지.'
방어력은 물론 본신의 능력까지 큰 폭으로 올려 주는 방어구는 마수 가죽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이어서 새 대원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비대장은 돌풍 용병대의 선발대에 이어 후발대가 요새에 도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좋은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돌풍 용병대의 후발대가 요새로 들어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만큼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세력들이 많았던 것이다.
돌풍 용병대가 향한 곳은 상가들이 밀집한 중앙 대로에 자리를 잡은 돌풍 상단 건물이었다. 요새에 온 보라는 이 요새의 중요성을 금방 간파하고 하룬의 재가도 받지 않고 독단으로 건물을 구입했던 것이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 드릴게요."
그 자금은 하룬이 해란 자매에게 맡긴 아이템의 판매 대금이었지만 보라는 망성이지 않고 써 버렸다.
예전에 여관으로 쓰던 후원은 넓은 마당과 스무 개가 넘는 큰 방이 있어, 새 대원의 영입으로 인해 대인원이 되었지만 충분히 대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건물은 한동안 비어 있었지만 가격이 비싸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대원들에게 보라를 도와서 건물들을 청소하고 후원을 정비하도록 했다.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대원들이 100명 넘게 달려들자, 보통 사람들이 몇 날 며칠이 걸렸을 일이 반나절 만에 끝나 버렸다.
대원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어떤 일을 하건 마수의 힘을 끌어 올려 하는 것이 습관이 된 터라 청소 정도는 금방이었다. 잡초로 무성해진 후원도 레미의 지휘로 정리가 금방 끝났고 대로에 접해 위치한 2층 상점 건물도 그 외벽까지 깔끔하게 변했다.
하룬은 다른 대원들이 청소를 하는 사이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었던 겨루, 방커와 면담을 했다.
"합류가 늦어 죄송합니다, 대장."
또 다시 사과를 하는 것을 보니 둘은 따로 지낸 것이 무척이나 미안했던 모양이다.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만났으니까 된 거지. 그런데 이곳에서는 뭘 한 거야?"
"특별한 건 없습니다. 원래는 발트랑이 부탁해서 그와 동행하여 신 테론 제국까지 가르반 황제를 따라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다크니스라는 무리가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발트랑이 이곳으로 온 겁니다."
대답을 하는 겨루나 방커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발트랑은 뭔가를 노리고 이곳으로 왔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기후 조절과 관련된 고대 마법서겠지.'
이미 성자 예힘으로부터 군부를 장악한 사가가 GPC의 일원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는 하룬은 그렇게 추측했다.
"검증의 관에서 얻은 마법서가 그 목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머법서가 해석되어 그 내용을 알게 되자 무척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발트랑이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이곳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뭐, 막상 이곳에 와서는 특별히 한 일은 없었지만요."
두 대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발트랑의 호위 역할만을 한 모양이다.
"그래, 발트랑은 어디 있나?"
예전에 맺힌 인연이 있으니 시간이 나면 한번 만나볼 생각이었다.
"그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병대가 요새로 들어온 며칠 후에 저희에겐 아무 말도 없이 요새를 빠져나갔습니다."
혹시 다크니스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걸까? GPC에 대한 정보도 크로스로 체크할 겸 만나면 여러 모로 좋았을 텐데 조금은 아쉬웠다.
"아무튼 수고했다. 딜런 경에게 각별히 부탁을 해 놨으니 이제부터는 수련에 힘쓰도록 해. 곧 어려운 의뢰가 있을 테니까 부단히 노력해서 자신의 경지를 최대한 끌어 올리도록 해."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을 했지만 당장 마리만 해도 헤어질 때보다 엄청나게 경지가 올라가서 둘은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따로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도 많이 했지만 어느때는 왜 자신들을 말리지 않았는지 하룬에게 원망도 했었다.
"그런데 돌풍 기지로 옮기는 건 어때?"
두 사람은 마리와 함께 헤니로부터 돌풍 기지에 대한 이야기를 수차례 들어왔다.
"저희도 가고 싶은데……."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다.
"빨리 결정할수록 좋아. 내가 확보한 정보로는 코원 유니온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마리와 그들 둘이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캡슐 때문이었다. 셋은 특수군 시절의 각종 공적과 발트랑이 힘을 쓴 덕분에 슈퍼 캡슐을 사용하는 대신 발트랑이 부탁하는 일을 처리해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나중에 내가 발트랑을 만나면 직접 얘기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대장."
세 사람은 현실에서는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는 장애를 입은 상황에서 도와준 발트랑과의 의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룬의 말에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웃는 얼굴로 방을 나갔다.
손님이 찾아온 것은 점심을 막 먹고 난 후였다.
하룬이 며칠 먼저 이곳에 도착한 파이린 제국의 황녀 이벨린 일행이 방문했던 것이다.
황녀는 상인 복장을 하고 상단원으로 위장한 친이 기사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왔다. 둘은 소드 마스터인 듯 경지를 알 수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익스퍼트 상급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래도 있는 정 없는 정이 다 들었던 일룸은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다.
"전하,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하룬 대장."
팔뚝을 가슴에 들어 올리는 용병식 예절과 무뚝뚝한 하룬의 접대에 황녀를 수행한 기사들의 눈초리가 올라갔지만 일룸이 뭔가 이야기를 해 놓은 듯 발작을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물리고 두 사람이 마주하자 이벨린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룬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보낸 정보는 잘 받으셨는지요?"
"네, 덕분에."
이벨린 황녀는 자신을 대하고도 별반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하룬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떠받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낸 이벨린에게 황녀의 위치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룬의 태도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일룸 경으로부터 저간의 사정은 자세히 보고 받았어요."
이벨린은 드물게 짓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파이린 제국 황실이 의뢰한 한 가지는 아주 만족스럽게 처리를 해 주었어요. 이제 남은 것도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이곳으로 오면서 다크니스의 본거지에 대한 단서는 어느정도 얻은 상태였디. 자연히 자신감이 눈빛을 통해 새어 나왔다.
"혹시 돌풍 용병대의 규모를 좀 알 수 있을까요?"
"무슨 일입니까?"
"본래 용병대라면 100명 이하의 대원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돌풍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요. 지금 눈에 보이는 대원들의 숫자만 해도 100명은 넘는 것 같은데요."
당연히 궁금해할 수도 있지만 이벨린 황녀 정도 되는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직접 물을 내요은 아니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무슨 의도가 뒤에 숨어 있으리라.
"웬만한 의뢰는 처리할 정도는 됩니다. 어쨌든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이름이고 용병 길드와도 별 관계가 없어 굳이 이름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하긴. 용병 길드가 보유한 서류에는 하룬 대장이 겨우 3급으로 기재되어 있더군요."
등록할 때 이외의 용병 길드에 들른 적이 없으니 그럴 것이다. 그 때문에 돌풍 용병대가 신비의 용병대로 알려졌다.
이벨린은 묘한 눈빛으로 하룬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와 본 황녀는 앞으로 다크니스를 상대하는 데 돌풍 용병대가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길 바라고 있어요. 어때요? 돌풍 용병대에게 이 요새를 맡기면?"
"네에?"
너무 뜻밖의 제안에 하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마츠루트 요새는 본 제국의 영토에요. 지금은 힘의 균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립 선언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언제고 우리는 이곳을 손에 넣고 말 거랍니다."
그건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데빌 산맥의 한가운데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마츠 평원과 거리가 가장 가깝다. 만약에 파이린 제국이 마츠 평원을 장악할 수 있다면 다른 제국들에 비해 세 배는 빠르게 요새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제국이 요새를 중립 지역으로 놔둘 리가 없었다.
"흐음!"
하룬은 잠깐 고심했다.
중립을 선언한 성을 점령하는 것이야 이벨린 황녀가 할 일이지만, 막상 성을 가지게 되면 발생할 문제가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당장에 다크니스의 최우선 표적이 된다.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 용맹한 산악 부족의 전사들을 한데 그러모을 수 있다면 다크니스를 물리칠 수 있을까? 그들의 흑마법은 어떻게 대응할까? 마수들은 어떻게 처리를 할까? 등등의 생각이 빠르게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이벨린은 자신의 제안에 대해 고심을 하는 하룬을 보고 오해를 하고 있었다.
'칫!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렇다면 소문대로 대원의 수가 수천이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
항간에 그런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돌풍 용병대의 규모가 용병단에 해당할 정도라는 말이 있었다. 대원들 중에는 소드 마스터와 마도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심지어 엘프와 드워프 들까지 있을 거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하룬은 고심 끝에 황녀의 제안에 대답을 했다.
"그건 불가능한 입니다."
"다른 용병들까지 끌여들여도 안 될까요?"
역시 하룬은 이번 말에도 훅하는 표정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을 겁니다. 전하께서도 제가 보내 드렸던 영상을 통해 보셨겠지만 다크니스가 데빌 산맥을 쌓고 있는 성의 숫자는 일흔 개가 넘습니다. 우리가 상대했던 성들의 경우 포진한 다크니스의 전력은 마도사 급 1명에 5서클 3명을 포함해서 흑마법사들의 숫자가 30명 이상이었습니다. 거기에 익스퍼트 최상급을 포함한 흑기사들의 숫자는 100명이 넘고 흑전사들은 500명이 넘습니다. 거기에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시시각각 성으로 충원되는 인원이 늘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나중에는 소드 마스터 급의 흑기사들이 출현할 수도 있습니다."
"흑기사와 흑전사? 그들이 누구죠?"
이벨린은 생소한 이름에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아직 그들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하룬은 니켄으로부터 들은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허어! 오츠왈드 후작가의 그 사이 마법과 검술을 다크니스가 입수를 했군요."
"네. 그렇다고 합니다. 딜런 경에게 물어보니 오츠왈드 후작가의 검술이 유명해진 것은 재질에 상관없이 단기간에 익스퍼트에 오를 수 있는 어떤 사이한 비전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이벨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런 식으로 다크니스가 기사 전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흑마법사들이 이 베빌 산맥의 마수들을 잡아 테이밍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대로 놔둔다고 엄청난 전력이 될 겁니다."
마수 이야기에 이벨린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안 그래도 황실 마법사들이 저장한 영상 저장구를 통해 마수의 위력을 확인했던 것이다. 최하 레벨 120이 넘는 마수들이 모두 다크니스 진영에 가세한다면 정말 상상하기 싫은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정말 알 수가 없어요. 이제까지 우리가 수집한 정보로는 그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글로리 가이아 조직원들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네. 지구의 형제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하나 입수했습니다."
"우리 세계의 하룬 말인가요?"
"네. 그가 말하길 어둠의 길을 선택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단기간에 고레벨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회원을 모집한 카페들이 열 개나 된다고 했습니다."
"카페라고요?"
이 세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조직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각종 소스들을 뒤지고 글로벌넷과 유니넷을 모니터링 해 온 것을 잘 아는 그녀는 그런 정보는 들은 적이 없었다.
"각 카페의 모집 인원은 무려 1,000명이나 됩니다. 이미 모집 정원을 다 채웠으니 모두 합치면 1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지요. 또 다른 라인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동화율 40% 중반까지 끌어 올린 캡슐의 주인이 될 거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정보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런 움직임도 간파하지 못했다니.
'도대체 조직에서는 정보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거야? 이세계의 용병이 입수할 수 있는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대체 이 용병 정체가 뭐야? 특급 비밀인 특수 캡슐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엄청난 정보망을 가지고 있구나.'
이벨린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하룬의 말을 들었다.
"당장 이곳에서도 다크니스는 전력 강화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드워프들과 산악 부족들을 이용해서 이미 마나석 광산까지 찾아 마나석을 채굴, 가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막강한 자금력으로 이미 엄청난 숫자의 스킬북도 구해 놓은 상태입니다. 마나석과 스킬북이 있으면 5서클은 몰라도 3, 4서클의 흑마법사는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벨린은 연거푸 쏟아지는 고급 정보에 침을 삼키며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오츠왈드 후작가의 마나 연성법과 검술서를 손에 넣었으니 모르긴 해도 흑기사들도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데빌 산맥의 마수들을 테이밍해서 조종하고 전투 중 사망한 이들까지 어둠의 군대로 늘릴 것을 고려해서 전장을 데빌 산맥으로 한정한다면 그들의 전력은 제국과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입니다."
"……"
이벨린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데빌 산맥에 쌓고 있는 성들의 용도가 뭐냐 하는 거지요. 단순히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걱정입니다. 본 용병대의 마법사들은 다크니스가 쌓고 있는 광역 흑마법진을 구성하는 코어 역할을 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킬 것으로 보고 있는데, 놈들이 쌓은 성의 중심부에 세워진 지구라트라는 건물의 상단부에서 초고대 문명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룬의 말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이벨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호, 혹시 마계의 문을?"
하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사니리오로, 그들이 왜 그걸 획책하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판단하기론 그 목적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룬의 말을 들은 이벨린은 창백한 얼굴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중요한 정보를 주셨군요. 감사해요. 나는 급한 일이 생각나 일단 지금은 거처로 돌아갔다가 내일이나 모레 다시 방문해서 현실의 글로리 가이아에 대한 정보를 알려 드리도록 하지요. 아! 그리고 절반에 해당하는 대금을 가지고 왔으니 그것도 그때 와서 드리도록 할게요."
이벨린은 위풍당당하게 들어왔던 것과는 다르게 허둥대며 자리를 떴다. 그녀를 수행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걱정할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황녀 일행이 나가기 무섭게 익숙한 얼굴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신 테론의 가르반 황제와 최측근인 란트렐 황사였다.
"좋은 곳에 거점을 마련했군요."
오랜마의 해후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란트렐의 말이었다.
"하하! 이곳은 우리 돌풍 용병대가 아니라 돌풍 상단의 지부입니다."
"허허허! 돌풍 용병대와 돌풍 상단이 그 뿌리가 같은데 뭐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란트렐은 둘풍 상단의 정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돌풍 상단의 주요 거래 품목이 범용약이라는 것을 보고 받으신 황제 폐하께서는 돌풍 상단이 신 테론 제국으로 상행하는 것을 허가하셨습니다. 본 제국 상무부는 돌풍 상단이 취급하는 물품들은 무관세로 혜택을 주기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어제 보라가 보고할 때도 빠져 있었던 것이다.
"평민들이 필요로 하는 상비약을 수익도 거의 없이 판다는데 그것을 거부할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나라의 입장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 상단의 통관 허가권을 가진 영지의 경우는 아닐 수도 있었다. 상단의 분석에 따르면 마법사나 신관들의 힘이 강한 영지들은 평민들의 치료를 거의 등한시하면서도 행여 자신들의 밥줄이 끊길까봐 돌풍 상단이 취급하는 약품의 반입을 꺼리거나 혹은 판매 가격의 몇 배를 세금으로 매겨 폭리를 취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룬은 그런 나나라 영지에 대해서는 아예 상행도 보내지 말고 약품을 거래하지도 말라고 특별히 지시를 내렸다.
"물론 우리에게도 이종족들이 제작한 마법 물품들을 판매하는 거지요, 대장?"
"아! 네. 그럼요."
사실 파이린 제국에서는 돌풍 상단이 내놓은 모든 물품들을 다 구입하려고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처음에는 상단을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고객의 요구에 휘둘리고 말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하룬이 직접 황녀에게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오늘은 자신이 준 정보 때문에 충격을 받고 그냥 가 버렸지만.
"폐하께서는 어떠십니까?"
헤어진 지 오래된 터라 궁금했다. 피노세 황제야 볼 기회가 없었지만 가르반 황제는 고요의 땅에서 어느 정도 교분을 쌓은 사이였다.
"정력적으로 국정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원래는 친히 이곳으로 오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셨습니다. 하룬 대장과 고요의 땅에서 같이 보냈던 시간들은 무척 소중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소탈한 면이 있는 가르반 황제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하룬은 그를 추억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일개 용병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니 저로서는 무척 영광입니다. 폐하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현군賢君이 되실 겁니다."
그가 기억하는 가르반 황제는 황족이면서도 소탈하고 솔직한 품성을 지녔다. 수하를 아낄 줄 알며 고루 쓸 줄도 아는 명군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하! 대장도 폐하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신 테론 제국의 모든 신민들은, 모두의 삶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각종 정책들을 내놓고 무리 없이 끌어가시는 영명하신 가르반 폐하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둘은 한동안 고요의 땅에서 같이 경험한 일들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절 찾으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대장이 준 마나 통신기는 이 높고 험준한 데빌 산맥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정보길드에 대장을 찾는 의뢰를 넣었지만 우리가 늦어 이미 본거지를 떠나고 난 후더군요."
"……"
하룬은 란트렐의 말을 막지 않고 경청했다.
"사실 대장도 전보다 훨씬 더 강한 전력으로 이곳 데빌 산맥으로 들어온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실겁니다. 본 제국에서 대규모 실종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역시 생각하던 대로였다. 실종 사건은 파이린 제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신분제를 철폐한 파이린 제국으로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실종 규모가 커지며 조사를 해 보니 일부는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국 출범 초기라면 모르지만 그 이후로는 본 제국 역시 귀족제를 탄력적으로 유지하면서 노예 제도를 폐지했기에 노예 출신들은 물론이고 땅을 가진 평민들까지 사라질 리는 없었습니다."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확실하게 파악된 것만 12만 명입니다."
"후웃!"
하룬은 그 엄청난 숫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의 숫자면 파이린 제국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로 마을 단위로 실종되었는데 그 흔적이 데빌 산맥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3차에 걸쳐 파견된 조사대는 산맥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연락이 끊기는 것은 물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는 더 이상의 조사대를 파견하는 대신 대장의 돌풍 용병대에게 이 실종 사건에 대해 의뢰를 하시려고 했던 겁니다."
란트렐의 말은 미묘하게 과거 시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데 데빌 산맥과 인접한 지역에서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데빌 산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지요. 실종자들이 쌓았을 것이 분명한 그 성들은 정체불명의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성을 조사하기 위해 움직였던 영주들과 영지군들은 처참하게 살육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데빌 산맥과 마주하고 있는 제국 북부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하여 황제 폐하께서는 그들을 치기 전에 그들의 정체와 성을 쌓는 목적 그리고 그들의 전력을 조사하는 의뢰를 대장에게 맡기고자 하십니다."
"그렇군요."
하룬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라 담담하게 란트렐의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란트렐은 그의 반응이 너무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는지 대뜸 의뢰비를 꺼내 들었다.
"폐하께서는 이 일의 대가로 현금 300만 골드와 황도에 돌풍 상단의 지부를 설치할 수 있게 허가하시는 한편, 대장이 원한다면 돌풍 용병대의 본대나 지대가 머무를 장소 역시 무상으로 제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란트렐은 이 정도 조건이면 하룬이 단박에 의뢰를 수락할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왜?"
"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들이 누굽니까?"
란테를은 너무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다크니스라는 세력입니다. 300년 전 대륙을 피와 광기로 물들었던 타키닌의 후예를 자청하는 자들이지요."
"타……키……닌이란 말씀입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그 악마와 같았던 흑마법사의 후예가 나타났단 말인가요?"
"제 귀로 분명히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타키닌이 남긴 흑마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 세력에는 700년 전 마츠 평원의 영주였던 오츠왈드 후작가의 사이한 검술을 익힌 흑기사와 흑전사 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란트렐은 넋이 반 정도 나간 표정으로 연방 '어떻게 그럴 수가!'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룬은 버처리비크들이 촬영한 영상 저장구를 보여 주고 다크니스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보수는 이미 파이린 황실과 마탑에서 받았거나 받을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수많은 실종자들의 목숨이 걸려있는 일로, 또 이미 알고 있는 정보로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란트렐은 끝까지 이야기를 들은 후 침중한 얼굴로 돌풍 상단의 숙소를 떠났다.
"일단 황제 폐하께 이 정보를 전한 후 다시 오겠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딜런이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잡는 데도 한사코 뿌리칠 정도였다.
마탑은 그 다음 차례였는데 공교롭게도 빛의 신전에서 온 주교 일행과 같이 방문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많아 큰 방 하나를 급하게 회의실로 꾸몄다.
"마츠 평원에서는 수고 많이 하셨소, 대장."
"아닙니다, 탑주님. 파코추 마탑에서 보내 주신 마법사분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일이 쉬웠습니다."
"허허헛! 원래 이 친구들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 거기에 본 마탑의 중요한 의뢰이고 우리 마탑과는 절친한 하룬 대장이니 어찌 돕지 않겠는가?"
후버론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를 모시고 찾아온 세르피 등은 하룬을 향해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앉으시지요."
"내 일행부터 소개하지. 이쪽은 일루젼 마탑의 아인시트 탑주이고 그 옆은 글림 마탑의 이나반 탑주일세. 그리고 이 쪽은 틴트 마탑의 이르센 탑주이고 그 옆은 세인트 마탑의 알고리안 탑주이네."
후버론이 소개한 대륙 유수의 마탑주들은 모두 중장년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루스와 타니엘라가 경험한 각성을 순간을 거친 것이다. 아마도 실제 나이는 일흔 살이 넘었을 것이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후버룬에게 미리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탑주들은 하룬에게 호의 어린 시선을 던지며 인사를 해 왔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지만 탑주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룬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탑주들에게 하룬은 호감을 느꼈다.
"우리 마탑도 인챈트 마법에 특화된 전문 마법사들이 다수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우리에게도 이종족의 아이템을 좀 맡겨 주시게."
글림 마탑의 이나반 탑주 같은 이는 인사를 하며 은근히 선을 대기도 했다.
하룬은 예민한 오감에 그런 모습을 비릿하게 웃으며 쳐다보는 다른 무리가 들어왔다. 빛의 신전 특유의 사제복을 입은 이들이었다.
"이……분들은?"
하룬은 이미 상대의 신분을 짐작했지만 성녀나 성자 등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의문스럽게 후버룬을 쳐다보았다.
"아! 소개가 늦었네. 빛의 신전에서 대외 업무를 총괄하는 외무원 수장인 아세르 주교와 그 일행이네."
자리에 앉으며 후버룬이 소개한 아세르 주교는 머리카락과 수염은 하얗게 샜지만 피부는 팽팽했고 눈빛은 깊고 강렬했다.
하룬은 그를 주교라기보다는 관료와 같은 인상을 느꼈다. 성결함 대신 노회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돌풍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하룬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느릿하게 일어나 팔뚝을 가슴에 대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하룬에게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아마로 아세르 주교를 시봉한 신관들과 호위 전투 사제들의 것인 듯했다.
"하하하! 젊어서 그런지 예의는 좀 부족하지만 강한 힘이 느껴지는구려. 난 총교 각하의 명으로 그대를 만나러 온 외무원 원장 아세르 주교일세."
그는 하룬의 향해 자신의 손등을 내밀었다.
'뭐지? 설마 자신의 손등에 입술이라도 맞추라는 건가?'
이런 예법에 무지한 하룬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아세를 주교를 비롯해서 수행한 신관들과 사제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흉흉한 시선을 보냈다.
"이름은 났지만 그 근본은 천한 용병에 불과한 자로군. 어찌 이렇게 예의를 모르는가? 혼 좀 내줘야겠구나!"
아세르 주교가 근엄한 표정으로 소리치자 그의 호위 전투 사제들이 일제히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일부 전투 사제는 신성력까지 끌어 올린 듯 건틀릿을 착용한 팔이 파랗게 빛났다.
차앙!
하룬의 뒤에 서 있던 딜런이 검을 빼 들었다. 그가 쥔 검에서는 이내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나 천장까지 닿았다.
미루스와 타니엘라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안티 파워!"
일정 범위의 마나를 제어하는 미루스의 마법이 발현되자 전투 사제들의 팔에서 신성력이 홀연히 사라졌고 타니엘라의 주문과 함께 아세를 주교를 비롯한 사제들이 있는 공간을 빛나는 룬이 감싸며 일종의 결계를 형성했다.
"이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제들이 아니다! 어찌 날 보겠다고 방문해 놓고는 살기를 뿌린단 말인가? 대원들은 전투준비를 하랏!"
얼굴이 차갑게 변한 하룬의 외침에 숙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이 아세를 주교를 따라온 사제들을 포위했다.
"이이잇! 이게 무슨 짓인가? 감히!"
아세르 주교는 발작하며 소리를 질렀다.
"왜 내게 살기를 내뿜고 전투 사제들이 신성력을 끌어 올렷는지 납득이 가게 설명해 보시오, 주교. 만약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이곳은 당신들의 무덤이 될 거요."
하룬의 눈이 어느새 붉어지며 강렬한 살광이 터져 나왔다. 비록 낮은 음성이었지만 주교와 그 일행은 심혼이 옥죄는 압박감과 함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원초적인 공포를 경험했다.
"그, 그건……."
주교는 물론이고 신관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제대로 말을 있지 못했다.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당황했거니와 상대의 살벌한 기세에 눌린 것이다.
이미 자리에 앉은 마탑의 탑주들도 어지간히 놀란 얼굴로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굳이 나서려고 하지는 않았다.
"내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용병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까지 다해 인사를 했건만 돌아오는 건 아랫사람을 대하듯 가벼운 언사와 살기라니. 상대의 예의가 의미하는 바도 알지 못하고 뭔가 거슬린다고 대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는 그대들은, 아무리 봐도 신을 모시는 자들이 아니다. 대원들은 상대를 포박하라! 만약 반항하면 베도 좋다! 이자들이 하는 짓으로 보아 세상 만물에게 자비로운 은혜로움을 베풀며 가장 아래에 있는 자들까지 품는다는 교리를 가진 빛의 신전 사제가 아니다 사기꾼들이거나 그도 아니면 세속에 물들어 타락한 사제인 것 같으니 부담 없이 죽여도 좋다!"
"네. 대장!"
마수의 힘을 끌어 올린 대원들은 삽시간에 숙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투 사제 수집 명을 제압했다. 본능적으로 신성력을 끌어 올리고 공격을 하는 전투 사제들도 있었지만 마수의 힘에 더해 마나까지 사용하기 시작한 대원들의 가공할 움직임과 힘에 대항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세 고문은 실내에 있는 자들을 제압하시오! 아무래도 빛의 신전을 사칭하는 무리 같은데 잡아서 정체를 밝혀야 할 것 같소."
"알겠습니다, 대장."
"흐흐! 어째 지난번에 만났던 성녀와 성자 일행의 겸손하고 성결한 행동과는 달리 사제가 아니라 무슨 영주나 귀족처럼 행동하는 것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아까 방문하셨던 이벨린 황녀께서 요즘 제국에 귀족이나 사제를 사칭하는 불온한 무리가 제국민들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렇게 빨리 만나다니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미루스와 타니엘라의 말을 들은 아세르 주교의 창백한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우리를 그런 자들로 몬단 말인가? 우리는 분명히 빛의 신전에서 파견된 사제들이다."
하지만 하룬은 차가운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에게 살기를 드러냈나?"
"그, 그건 그대의 예의가 부족해서다! 감히 레아의 대리인인 본 주교에게 예의를 다하지 않다니! 그대는 레아의 신벌이 두렵지 않은가?"
아세르 주교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난 가르반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파이린 제국의 이벨린 황녀에게도 이렇게 인사를 했다. 성녀와 성자께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분들은 아무런 말이 없는데 당신은 부족하다고 말하는가? 설마 당신들이 황제 폐하나 황녀 전하 같은 혹은 신전의 성녀, 성자보다 더 높고 고귀하다고 생각하는가? 내 예법은 용병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었다."
하룬의 말에 아세르 주교와 신관들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상대가 신 테론 제국의 황제와 파이린 제국의 이벨린 황녀는 물론이고 성녀와 성자까지 언급하자 어떻게 대응할지 감이 서지 않는 모양이다.
천하다고 생각하는 용병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니 이들의 예의를 알 리가 없었다. 뒤늦게 너무 과하게 반응한 것이 후회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상대방이 너무 강경하게 나와 이성적으로 대응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후버론이 끼어들었다.
"커험! 하룬 대장!"
"네, 탑주님."
후버론이 나서자 아세르 주교의 눈빛이 조금 안정이 되어 있었다. 하룬을 향하는 그의 눈길에는 비릿한 조소가 실려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분은 빛의 신전에서 나온 주교가 맞네."
"그, 그럴 리가? 어찌 주교라는 분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폐하보다 더 높은 예의를 원한단 말입니까? 분명 신전의 외교를 전담하는 외무원 원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룬의 말에 후버론은 할 말이 궁한지 입맛을 몇 번 다셨다. 본래부터 사제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마법사였고 하룬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같이 들어와 자신이 직접 소개를 했으니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은 피해야 했다.
"그게 나도 정녕 의외라네. 이런 사람이 아닌 것으로 알고있었는데 말이야. 세 제국의 황실 고위급 인사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든 의뢰를 하려고 선을 대는 돌풍 용병대와 하룬 대장의 능력이나 위상을 모를 리도 없고. 이보시오, 아세르 주교?"
"아! 네, 탑주님!"
대답을 하는 아세르 주교의 얼굴이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
'성녀로부터 대단한 자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런 자일줄이야! 정말로 세 제국의 황제나 황녀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늘! 마탑 세력에 밀리지 않기 위해 조금 과하게 행동한 것 때문에 일을 그르치다니!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지만 당장 물러가시게. 우리 마탑들은 돌풍 용병대와 긴한 이야기를 하려고 왔는데 당신들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말았네. 우리에 앞서 이벨린 황녀와 신 테론 제국의 란트렐 황사가 다녀가는 바람에 이미 의뢰를 받았을지 몰라 초조한 상황인데 잘못하다가는 우리까지 자네들 때문에 이야기도 못해 보고 쫓겨날 판이야!"
"탑주님, 어찌 그런 말씀을?"
"내가 자네 얼굴을 알기에 망정이지 만약 몰랐다면 나 역시 빛의 신전 사제를 사칭하는 무리로 알았을 것이네. 손등에 입을 맞추라 허락할 수 있는 존재는 총교 각하나 성녀님과 성자님뿐으로 알았는데 정말 이상하군. 자네가 혹시 그 사이 총교의 직위에 오른 것인가?"
후버론의 말에 아세르 주교와 사제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원래 총교, 성녀, 성자만이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손등에 키스를 하게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고귀한 자들에 대한 존경과 숭배의 표식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서 일반 주교들이나 신관들은 심지어 일반 사제들도 자신의 교구에서는 마치 총교라도 된 양 그런 낯간지러운 짓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말 빛의 신전에서 나온 사제들은 맞는 겁니까?"
의심에 가득한 하룬의 물음에 후버론은 떨떠름한 태도를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분명 성녀와 성자, 그리고 그 수행원들은 한없이 성스러운 기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 같은 용병들에게도 소탈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는데 그 밑에 있는 자들은 왜 이렇게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
하룬의 혼잣말을 들은 사제들의 얼굴이 썩은 간처럼 검붉게 변하며 일그러졌다. 절반 이상의 사제들은 민망함과 깊은 자책의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당장 풀어 줘라!"
하룬의 명령에 회의식 밖에 구속되었던 사제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예상한 격렬한 반응은 없었다. 그저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들도 가시오. 난 성녀나 성자 분이 오시지 않으면 빛의 신전과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소."
"으으음! 분명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아세르 주교가 이를 갈며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순순히 보내줄 때 가시오. 후버론 탑주님은 신분을 확인해 주지 않았으면 지금 당신들의 몸은 흙 속에 묻혔을 테니까 감사의 인사나 하고 가시오. 당장 떠나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거요!"
딜런이 오러 블레이드를 위협적으로 움직이자 주교와 사제들은 황급히 숙소를 떠났다. 떠나는 그들의 얼굴은 착잡하기만 했다. 잘못하면 총교 사칭죄가 적용될 수도 있는 행동과 오만함 태도 때문에 반드시 의뢰를 해야 하는 상대에게 쫓겨났다.
"미안하네, 하룬 대장. 내 안면이 있긴 하지만 저런 자일줄은 몰랐네."
"아닙니다. 이 앞에서 만난 것 같은데 탑주님께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하룬은 미안해하는 후버론의 태도에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성녀와 성자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신전의 교리 계열에게 구속당했거나 혹은 본전으로 소환되었을 거라고 생각한 하룬이 일부러 세게 나갔던 것이다.
"허허허! 정말 속이 다 시원하군."
"그러게 말이오. 10년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다 내려간 것 같소이다."
마탑의 탑주들은 평소 신전의 사제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하룬에게 좀 더 강한 호감의 시선을 던졌다.
"도니, 차 좀 부탁해!"
"네, 대장님!"
미리 준비하고 있던 도네이스와 헤니가 서둘러 테이블에 찻잔을 놓았다.
"마탑 연석회의는 잘 끝났습니까, 탑주님?"
"자네 덕분에 흑마법사의 출현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찾을 수 있어 쉽게 의견을 모을 수 있었네. 우리 마탑은 공동으로 흑마법사 무리를 상대하기로 의견을 정했다네."
후버론의 말에 하룬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되었군요. 안 그래도 제가 직접 경험한 그들의 전력이 너무 강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헤겐 성인가 하는 성의 전력이라면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닌 것 같네만……."
"그때는 다크니스가 본격적으로 세력화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얼마 안 지났지만 다크니스는 타키닌이 남긴 흑마법과 오츠왈드 후작가의 마나 연성법 및 검술로 급격하게 세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정말 타키닌이 남긴 흑마법을 익히고 있던가?"
타키닌이라는 말이 나오자 후버론을 비롯한 탑주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악했다.
"이걸 보십시오. 제가 힘겹게 죽인 흑마법사의 품에서 나온 마법서입니다."
하룬은 이미 미루스와 타니엘라가 복사한 후인 마법서들을 그들 앞에 내놓았다.
"흑마법 입문서군. 흐음! 이……건?"
후버룬은 책의 마지막에 있는 서명을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분명히 타키닌의 이름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법서의 내용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다른 탑주들이 다투어 마법서를 확인했고 그 반응은 동일했다.
"분명히 타키닌 특유의 흑마법이 맞네. 어떻게 이럴 수가? 당시 유포되었던 마법서들은 모두 회수하여 폐기했거늘……."
그건 누구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타키닌이 남긴 흑마법서를 통해 정통이 아닌 사악하고 기괴한 흑마법을 익힌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흑마법사들도 문제지만 오츠왈드 후작가의 사이한 검술을 익힌 흑기사와 흑전사 들도 문제입니다. 직접 교전을 해서 그 검술을 위력을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성마다 익스퍼트 급의 흑기사 100명 이상과 소드 유저 상급 이상에 해당하는 무력을 가진 500명 이상의 흑전사 들이 배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허어! 이거 큰일이군"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느낀 후버론은 비롯한 탑주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되겠군. 자네에게 놈들의 본거지와 최종 목적을 알아 내달라는 의뢰를 하러 왔는데 이럴 시간이 없네. 당장 이 일과 연관된 이들을 만나야겠어."
후버룬은 허둥지둥 다른 탑주들과 함께 숙소를 떠났다. 어떤 이들을 만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까 쫓겨났던 신전 사람들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미노 제국에서 찾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황제의 외할아버지인 미노스 공작 본인이었다. 소드 마스터인 그는 일흔 살이 훨씬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딜런과 별 차이가 없는 외모와 강렬한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미노스 공작 역시 란트렐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하룬을 찾아왔다. 거기에 더해 검증의 관을 통해 새롭게 이름을 날리는 젊은 강자와 대한 호기심과 향후 정국을 짚어 보려고 이곳에 왔던 것이다.
미노 제국 역시 실종된 이들이 5만명이 넘었다. 실종자들은 데빌 산맥의 끝부분과 맞닿은 어둠의 숲 근처의 영지 소속이었다. 그곳은 노천 광산으로 유명하지만 데빌 산맥에서 넘어오는 마수들과 어둠의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들로 인해 제국의 손이 잘 미치지 못해 목숨을 걸고 광맥을 캐는 유민들로 인해 사설 광산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미노 제국 역시 몇 차례나 조사대를 보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연못에 던진 돌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다.
하룬은 다크니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아무 대가 없이 미노스 공작에게 털어놓았다.
"그들이 정년 그 정도로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네. 흑마법사나 흑기사 그리고 흑전사 들도 문제지만 마수들이나 몬스터들도 문제가 될 겁니다. 이미 그들은 마수들을 타키닌 특유의 흑마법으로 테이밍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노스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나중에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네. 원래는 본 제국 출신으로 자네 용병대에 소속된 딜런 백작도 만나고 자네와도 긴밀하게 의논할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이 사안이 워낙 중하니 후에 다시 오겠네."
"네, 공작 각하!"
미노스 공작이 침중한 얼굴로 돌아간 후 타니엘라가 딜런에게 물었다.
"자네, 백작이었어?"
"아닌데."
딜런도 영문을 몰라 이상한 얼굴을 했다.
"크크크! 축하하네. 아무래도 미노 제국에서 자네를 어떻게든 옭아매려고 승작을 시킨 모양이네. 백작 각하, 앞으로 잘 부탁하네."
"허허! 이런 실없는 친구하고는. 난 영원한 돌풍 용병대원으로 남을 걸세. 쓸데없이 백작이나 뭐니 놀리지 말게."
하룬은 드디어 자신이 예상했던 불길한 사태가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크니스여, 무엇을 획책하는지는 모르지만 너희들을 그냥 둘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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