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
"대장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왜?"
"흐흐흐!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수련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밥값은 하시오."
하룬은 흔쾌히 니켄의 동행을 받아들였다. 흑마법사라 약간 꺼려졌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상황이고 다크니스를 상대하려면 흑마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편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명색이 정통 흑마법을 수련한 마법사입니다. 백마법을 익힌 자들이 알지 못하는 희귀 치료제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제법 돈이 될 겁니다."
하긴 온갖 것들을 마법 재료로 사용하는 부류가 흑마법사다. 고대에는 흑마법사들이 치료 계열에서 백마법들보다 현저히 높은 능력을 보여 오랫동안 각광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흑마법의 '흑' 소리도 하지 마시오."
"전 바보가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이 흑마법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세상에 나와서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이왕 세상에 나왔으니 좀 놀다가 마탑에 돌아갈 테니 그때까지만 동행하겠습니다."
"알았소."
니켄은 대원들에게 자유 마법사로 임시 고용했다고 소개했다. 흑마법사라면 음침하고 잔학한 성정을 가졌을 거라고 믿었던 하룬의 생각과는 달리 폐쇄된 마탑에서 오래 지내서 그런지 장난이나 농담도 좋아하고 먹을 거에 꽤 집착을 하는 등 밝은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의 마을로 돌아가기로 한 타칼족 전사들과는 당분간 동행을 하기로 했다.
그들의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고 에인족 대원들이 아는 길에 의하면 그들의 마을로 가려면 닷새 정도 마츠루트 요새로 향하다가 산맥 안쪽으로 꺾어지는 것이 빠르다고 했다.
돌성을 지나친 후의 여정은 아주 순조로웠다. 지름길을 통해 가는 것이니만큼 길의 험난함이야 이제까지 다니던 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일행 중 능력이 떨어지는 무리는 몸 상태가 아직 완전히 정상을 회복하지 못한 타칼족밖에 없었다.
새벽에 출발해서 정오까지 이동하고 잠시 식사와 낮잠을 즐긴 다음, 해가 지기 전까지 다시 이동하여 식사와 수련을 하는 일과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닷새가 지나 타칼족과 헤어진 후에도 일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대원들은 수련 경과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순정석과 수련 검식에 적당한 경쟁 상황까지 주어지자 그 발전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모든 신입 대원들이 마나 오션을 생성하고 마나 로드를 뚫기 시작하자 두르본을 비롯한 기존 대원들과의 격차가 빠르게 좁아지고 있었다.
니켄은 문신을 통해 마수의 힘을 사용하는 대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 문신의 모양을 연구하는 한편 약초 치료술에 푹 빠져 있는 주술사 대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치료법들을 전수했다. 비전이 아니라 약초를 이용한 범용 치료술에 불과했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지식이라 배울 점은 많은 것 같았다.
흑마법사답지 않게 성격이 쾌활하고 유머 감각까지 갖춘 니켄이 비전 약초술과 치료술까지 알려 주니 주술사들은 그를 한 일행으로 받아들였다.
에인족 전사들은 정말 길을 잘 찾았다. 도저히 없을 것 같은 숲 가운데서도 마수들이나 맹수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꿰고 있었다. 그들은 그 길이 예민한 초식동물들이 다니는 길이며 험한 반면 빠른 길이라고 했다.
100명이 넘는 하룬 일행이었지만 모두 자신의 부족에서는 최고의 전사라고 자부하는 이들이었기에 별다른 사고도 없었다. 수련과 마정석의 도움으로 인해 능력이 큰 폭으로 올라간 덕분에 날로 그 이동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헤겐 성을 출발한 지 오십일 만에 마츠루트 요새를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저 협곡을 따라 절벽 사이로 난 협소한 길을 꼬박 하루를 걸어 올라가면 마츠루트 요새가 나옵니다."
토르가 가리키는 곳은 3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부 보며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절벽 사이의 협곡이었다. 협곡 아래는 풍부한 수량의 다르 강물이 세차게 흘러가며 양옆을 깎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하는 기기묘묘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바닥에 바위들이 많은지 다르 강에서 흘러 내려온 강물이 석양빛에 물들어 누런 비늘을 가진 뱀처럼 요동울 치며 빠르게 깊은 협곡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로 요새로 가실 겁니까, 대장?"
디온의 물음에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정보부터.'
하룬은 대원들에게 숙영 준비를 시키고 마나 통신기를 가동시켰다.
-티노 부대장!
-대장님!
목걸이형 통신기를 통해 반가움에 겨워 소리를 높이는 티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감도가 좋았다.
-지금 요새 안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딜런 경이 요새 안은 답답하다고 해서 수련을 겸해서 마수 사냥이나 할까 하고 걸어서 하루 거리에 있는 잉체 산에 와 있습니다.
-그래요. 별일은 없습니까?
-네. 대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빼고는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실종자들을 호송할 때도 그렇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마수를 두어 차례 만난 것 외에는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다행이군요.
하긴 대원들의 능력이나 동행한 이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대장님은 지금 어디십니까?
-저도 요새와 하루 거리까지 와 있습니다. 요새로 들어가기 전에 대원들과 따로 만나고 싶어서 연락을 한 겁니다.
-그럼 저희가 대장님 쪽으로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가도록 하지요. 정확한 위치가 어떻게 됩니까?
-잉체 산 중턱에 있는 틸러스 숲입니다. 체로키라는 마수가 서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보이지 않는군요.
-알았습니다. 오늘은 좀 늦었고 내일 그쪽으로 움직이지요.
-그럼 이곳에서 기달리겠습니다. 겨루와 방커도 저희와 합류해서 한창 수련 검식을 익히고 있습니다. 대장이 왔다고 하면 돌풍 상단에서 온 보라 양과 그 호위대도 이곳으로 올 겁니다.
-그쪽은 아직 연락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티노와 통신을 끊은 하룬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숙영지를 만들고 저녁을 준비하는 대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본격적으로 용병 일을 해 보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움직에는 노련한 용병과 같은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마수를 사냥하며 대대로 이곳 데빌 산맥의 주인으로 살아온 터라 그런 것 같았다.
'잘한 거야!'
원래 하룬 성격으로는 적어도 부대장인 티노와 세 고문에게는 의견을 들어 보고 결정을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밀어붙였다. 그만큼 강인하고 순수한 성정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산악 부족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마수들에게 혈족들이 지속적으로 죽어 가는 데도 선조의 유훈을 지키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데빌 산맥 밖에 사는 인간들은 편하게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마수들을 막고 있다는 것을 문명인들이 알건 모르건, 그저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들을 바보 같다고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보고 그런 삶을 살라고 하면 못 살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너무 우직하고 순진하게 살아왔다고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싶지도 않았다.
비욘드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무능력자의 대명사처럼 살아와서 그런지 하룬은 이런 순박한 사람들이 좋았다. 적어도 이런 사람들과 동료가 되는 것이 훨씬 더 높은 능력을 갖추었지만 닳고 닳은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에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
"내일은 선배 대원들과 만날 수 있을 거다."
하룬의 말에 두르본 일행은 기대와 설렘을 드러냈지만 새내기 대원들은 잔뜩 긴장 모습이었다. 두르본 일행이 기존 대원들을 단순한 선배라기보다는 거의 스승으로 받아들인터라 그들 역시 그런 사고가 깊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토르, 잉체 산에 대해서 아니?"
"네, 대장. 가 본적은 없지만 근처 지리는 알고 있습니다."
"잘됐군. 그들은 지금 체로키 사냥을 하러 잉체 산 중턱에 있는 틸러스 숲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체로키를요?"
이전에도 대원들이 말했다시피 체로키는 여간해서는 잡기가 힘든 마수였기에 놀라는 것이다.
"그깟 체로키들은 우습지. 소드 마스터 중급인 딜런 경이나 6서클 마도사인 타니엘라 경과 미루스 경이 있는데, 뭐. 세 고문분들이 아니더라도 티노 부대장은 우리 대장처럼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체로키는 정도는 우습게 잡을 수 있을거야."
두르본의 말에 새내기 대원들은 아직 만나지 못한 선배 대원들이 더욱 존경스러웠다. 마수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체로키를 사냥한다는 말만으로도 그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도사가 둘이나 있다고?"
이제껏 용병대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니켄이 놀라 소리쳤다.
"네, 니켄."
레미의 대답에 니켄은 하룬에게 시선을 돌렸다.
"돌풍 용병대에 소드 마스터와 마도사 둘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대장?"
"그렇습니다."
니켄은 하룬의 담담한 대답에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눈알을 굴렸다.
"그런데도 용병단도 아니고 용병대란 말입니까?"
"명칭이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뭐, 그야……. 젠장! 내 경지가 가지고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이거 잘못하다가는 영영 용병이 되고 마는 거 아니야?"
니켄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하룬은 그런 그에게 관심을 끊고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잉체 산으로 이동할 것이다. 숙영 준비를 하도록."
하룬은 대원들에게 숙영 준비를 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로그아웃을 할 준비를 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자 이제서야 벨과 아리를 만나러 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룬은 잠시 혼자 다녀올 곳이 있다는 말을 레미에게 남기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일단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못견디게 벨과 아리가 보고 싶어 식사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칫! 거짓말쟁이!"
캡슐에서 나온 하룬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벨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자주 나온다며!"
"그게……."
하룬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나오려고 하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에 빠지면 다른 것은 잘 생각하지 못하는 그의 성격으로 인해 벨을 서운하게 만든 것이다.
"언니랑 내가 얼마나 오빠를 기다렸는지 알아? 우리에게는 일만 잔뜩 시키고. 칫!"
당연히 감수해야할 잔소리지만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하룬은 결국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방법을 택했다.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는 거야. 자꾸 이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허리에 양손을 얹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는 벨이지만 하룬의 눈에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이 녀석은 그 말이 어떤 경우에 쓰는 건지 알고나 하는걸까?'
하룬은 처음 보는 벨의 색다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 자신도 모르게 벨의 몸을 껴안고 말았다.
"왜 이래? 나 아직 화 안 풀렸다고!"
벨을 소리를 빽 질렀지만 하룬의 품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하룬은 벨을 껴안은 채 의자에 앉았다. 하룬의 무릎에 앉은 벨의 눈이 하룬의 눈높이와 맞았다. 어느새 키도 좀 큰 모양이다.
"우리 벨은 화내는 것도 귀엽고 예쁘네. 쪼옥!"
벨의 뺨에 몇 번이나 뽀뽀를 하자 녀석의 쇳소리가 가라앉았다.
"칫! 칫!"
뭐라고 더 퍼붓고 싶은 눈치인데 겨우 누르는 벨의 몸을 하룬은 이전보다 더 풍만한 감촉을 느꼈다. 성장기라서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는 것이다.
"벨이나 아리에게 일만 잔뜩 맡겨 놓고 오빠가 너무 무심했나 보다. 미안해, 벨. 하지만 사건들이 좀 많아서 그랬어."
하룬은 이번에 새로 알게 된 GPC의 존재와 그들의 의도 그리고 세 조직이 비욘드에서 대규모 충돌을 할 거라는 예상까지 말해 주었다.
하룬이 말하는 내용의 중요성을 인식한 벨의 얼굴에는 이미 원망스러운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세 조직에 대해서 다시 알아볼게."
"그래. 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도 좀 같이 조사해 주었으면 좋겠어."
"뭔데?"
하룬은 돌성을 살필 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 한번 확인해 보자, 오빠."
벨은 글로벌넷과 유니넷에 뇌파로 접속해서 수십 개의 홀로그램 창을 띄우고 '다크니스', '흑마법사'와 같은 다양한 단어를 넣고 검색을 했다.
"있어, 오빠."
벨이 찾아낸 것은 열개의 카페였는데 회원 모집이 이미 끝나서 회원을 제외하고는 접속이 되지 않는 생타였다. 하지만 벨이 몇 개의 프로그램을 돌리자 자연스럽게 접속이 되어 그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정말이네. 이렇게 노골적으로 모집을 했는데도 단 사흘사이에 정원이 다 채워졌네."
벨이 가리키는 문구는 이랬다.
「하이 랭커가 되고 싶은가? 그대 내면에 숨겨진 파괴 본능을 마음껏 풀고 싶지 않은가? 현실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와 마음껏 섹스를 즐기고 멋진 스포츠 마그네틱 카를 소유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오라! 음차원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 그대들은 노블처럼 살게 해 주겠다. 우리에게 게임상의 목숨만 주면 된다. 그럼 그대가 현실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놀라운 것은 아니야. 유니온이 넓다고 해도 한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은 아주 좁고 답답하니까."
거리를 떠돌던 시절 그 자신도 그랬지만 그때 만난 많은 주민들은 모든 것이 능력으로 결정되고 평생 이어지는 유니온 체제를 뒤엎고 싶어 했다. 마치 하늘처럼 군림하는 노블들은 다 죽이고 싶어 했다.
많은 보더러 청소년들과 주민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의 감옥이나 구속구와 같은 유니온 사회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억제하기 힘든 파괴 본능에 휩싸여 밤이면 밤마다 거리를 떠돌며 집단 패싸움을 벌이거나 약자를 찾아가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는 등 광기에 찬 유희를 벌이기 일쑤였다.
그건 보더러들만의 사정이 아니다. 생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자유를 구속당하고 사는 유니온 주민이라면 모두가 내면 깊숙한 곳에 강한 파괴 본능과 광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무려 1만 명이나 되는 회원 모집이 이미 수개월 전에 끝난 것을 생각하면 다크니스의 전력이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
"그러게. 걱정이네."
이번에 모집한 1만 명의 유저들 대부분은 동화율을 46%까지 올려 준다는 특수한 캡슐로 게임을 하게 될 것이다. 확실히 다크니스는 비욘드의 세계에서 획책하는 것이 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문이 벌컥 열리며 아리가 달려 들어왔다.
"오빠!"
"아리야!"
하룬은 안고 있는 벨 때문에 자세가 불편했지만 아리는 용케 벨을 옆으로 밀어내고 그의 한쪽 무릎을 올라타고 안겼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요? 많이 기달렸잖아요."
그리움과 원망이 섞인 아리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얼마나 그를 보고 싶어 했는지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가슴에서 가슴으로 그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미안해, 아리! 일이 좀 많았어."
늘 하는 핑계지만 그것밖에는 말할 거리가 없었다.
"나도 나지만 벨이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아요. 오빠가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울었단 말이에요."
"칫! 내가 언제? 나 운 적 없어!"
아리가 자신을 걸고넘어지자 벨이 발끈했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에 떠오른 민망해하는 표정은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말이야? 울기까지 한 거야?"
하룬이 놀라 물었다.
"쳇! 좋아하지 마! 오빠가 보고 싶어서 운 건 아니니까."
벨은 하룬의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룬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를 향했다.
"그러는 언니는 안 울었어? 나랑 같이 울어 놓고는. 난 아직 성년이 안 되었지만 언니는 어른이잖아."
그 말에 아리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변했지만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너무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으니 눈물이 나는 것은 역시 당연한 거고. 난 그래서 울었는데 너는 왜 울었니?"
예상하지 못한 아리의 대답에 벨이 울상이 되어 버렸다. 딴에는 아리를 놀리려고 한 말인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자연스럽게 맞받아치자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 그거야……."
당차게 잔소리를 퍼붓던 벨이 더듬거리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해 내려고 궁리하는 모습을 본 하룬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비틀렸다.
"하하하! 이거 영광이네. 아니, 영광이 아니라 무지 미안한 걸. 내가 이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두 숙녀를 울리다니. 충분히 반성하고 있으니까 이만 용서해 줘."
하룬은 벨과 아리를 안은 팔에 지긋이 힘을 주었다.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세 사람은 그런 자세로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호흡과 체온과 체취를 음미하며 회포를 풀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서로 안고 있는 것만으로 오랜 공백의 시간을 없앨 수는 있는 것이다.
벨이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본 하룬은 아리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뜨거운 불에 댄 듯 화들짝 놀라는 아리의 예쁜 반달 눈이 그의 눈을 찾으려는 순간 하룬의 뜨거운 입술이 아리의 입술을 찾았다.
후끈!
마주 댄 입술에서 발생한 뜨거운 열기는 마치 벼락처럼 두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녹여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둘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진 듯 서로의 감정들이 알알이 느껴지는 이 기막힌 감각에 하룬도 아리도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떼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살짝 눈을 뜬 하룬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곁눈질을 해서 벨을 보았다.
'후후! 자는 모습이 정말 천사같네.'
벨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설핏 잠을 들었음을 확인했다. 마치 변화한 거리에서 유일한 보호자인 오빠를 잃어버리고 진종일 울며 찾아 헤매던 소녀가 마침내 오빠를 찾아 안기고 그 포긴함과 안온함에 잠이 든 것 같았다.
아리는 눈을 감은 채 얼굴이며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랐있었다. 키스가 주는 열정에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몸이 주는 기쁨과 행복감은 이제껏 살면서 누구도 주지 못한 엄청난 것이다.
-아리, 사랑해!
하룬은 입을 조금 벌려 아리의 입안에 혀를 밀어 넣으며 생각으로 그녀에 대한 감정을 전했다. 따듯하고 부드러우며 축축한 아리의 입안을 음미하는 혀는 기어코 부끄러움에 그저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아리의 혀를 찾아내었다.
-나도 사랑해요, 오빠!
뇌파를 통해 전해 오는 건지 아니면 마음으로 전해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부끄러워 떨리는 그녀의 고백이 전해져 왔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달콤하며 행복했다. 이 순간은 하룬의 마음속에 아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아리의 코를 빠져나오는 뜨거운 숨결이 그를 자극했다. 삽시간에 전신이 불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드럽게 그의 가슴을 자극하던 아리의 가슴이 딱딱해지는 것이 느껴졌고 그의 하복부가 맹렬하게 반응을 했다.
'위험해!'
둘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벨이 바로 옆에 있다. 아리를 자극하는 것은 이제 그만 멈추어야 한다. 조금만 더 지나면 자신도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숨을 크게 마신 하룬은 아리의 잇몸이며 입천장 그리고 이빨까지 애무하던 혀를 천천히 빼기 시작했다.
쑤욱!
갑자기 아리의 혀가 그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늘 수동적이기만 했던 아리였는데 놀라운 변화였다. 아리는 하룬이 자신에게 했듯이 그의 이빨과 위아래 잇몸 그리고 입안 구석구석까지 혀로 느끼려고 했다.
온몸이 혀와 입으로 변한 듯 다른 부분의 감각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걱정했던 몸의 변화도 이제는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았다. 입과 혀밖에 없는 생물들이 온몸을 다해 서로를 느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혀를 통해 서로의 내밀한 곳을 샅샅이 느꼈다.
어느 순간 동시에 눈을 뜬 두 사람은 서로를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척이라서 서로의 동공에 맺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느끼고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니 정말 사랑의 감정은 대단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뜨거웠던 두 사람의 숨결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줄 거죠?
떨리는 아리의 의념이 전해져 온다. 아직도 확신을 하지 못하는 걸까? 하룬은 불안한 듯 떨리는 아리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제나! 아리는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거야. 난 아리 곁에 있을 거고.
-하아!
아리는 감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가벼운 탄성을 의념으로 보냈다.
-영원히 이렇게 안겨 있고 싶어요.
목을 감은 아리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지만 하룬은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도 그러길 바래.
말하지 안하도 서로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모든 연인들이 다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정말 놀라운 감정이었다.
격한 감정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벨이 부러웠던 걸까? 어느새 아리는 벨과 똑같은 얼굴로 잠이 들었다.
'이거 곤란한걸.'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 달콤한 잠에 빠진 벨과 아리를 깨울 수 있기 때문에 불편했지만 두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게 바뀌었는지 잘 알기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룬은 멀뚱멀뚱 눈을 굴리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의념으로 아즈만을 불렀다.
-아즈만!
-네, 마스터.
역시 생각대로 아즈만과도 의념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의 능력인지 아니면 아즈만의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이럴 때는 정말 편리했다.
-현재 유니온의 상황은 어떤지 혹시 알아?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물어보는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리가 유니넷과 기지 식구들을 통해 계속 정보를 수집하고 있거든요.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하룬의 눈이 빛났다. 그러고 보니 아즈만은 두 사람과 언제든 뇌파를 통해 대화를 할 수 있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좀 이야기해 줄래.
-일단 정치적인 상황부터 보고를 하지요. 최근 유니온의 최고 기구인 원로원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원로들 중 한두 명이 축축되거나 교체된 것으로 보입니다.
비욘드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세 겨루기가 시작된 것일까?
-또한 유니온의 군부를 장학한 사가史家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특수팀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는 한편 무기 보강에 힘쓰고 있는데 오르그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어 다른 가문에서 견제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가라면 발트랑의 가문이다. 성자 예힘의 말에 의하면 군부를 장악한 사가는 GPC의 일원이다. 뭔가 변화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혹시 마약 공급이 끊기고 난 이후에 유니온에서 일어난 변화가 있어?
마약인 세미롱의 생산 기지인 헤븐 컴패니를 박살 냈으니 뭔가 변화가 있지 싶어 묻는 것이다.
-네.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코원Co-One, 코투Co-Two, 차원Cha-One, 차투Cha-Two, 차쓰리Cha-Three 유니온 하층 주민들, 특히 보더러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보더러들이?
보더러들은 유니온의 가장 외각에 사는 무능력자들을 말한다. F구역에서도 배리어와 인접한 가장 외각에 거주하며 능력이 없어 유니온 정부의 얼마 안 되는 보조를 받거나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일용 노동자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보더러들이 아니라 폭력 조직과 연관되어 살던 보더러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세미롱에 중독이 된 상태인데 공급이 극단적으로 줄자 극도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약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을 관리하던 폭력 조직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 금단증상으로 인해 벌이는 강도, 폭행, 방화 사건이 줄을 있고 있습니다.
하룬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결과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보더러지만 최소한 마약에 빠져 살지 않기를 바랐었다.
-마약의 공급이 극단적으로 줄어든 현상으로 인해 GG의 하부조직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미롱을 통해 GG의 통제를 받던 창녀들과 거지들은 물론 하부 조직원들까지 마약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상부 조직은 물론이고 조직의 각종 창고를 공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유니온 정부와 군부는 아예 손을 놓고 있습니다.
GPC 입장에서는 굳이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들로서는 적인 GG가 막강한 자금의 원천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을 굳이 막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른건?
-F구역의 소요 사태는 좀 있으면 폭동 수준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마약중독의 결과 뇌 손상이 심하게 일어난 자들은 환청과 환각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마약이나 대체적인 약품을 찾기 위해, 약품과 알코올 종류를 판매하는 쇼핑물이나 마트를 공격할 겁니다.
-예상되는 유니온의 대처는?
-F구역을 폐쇄하고 배리어를 축소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르그들을 상대할 무기를 위해 에너지를 확보하려고 배리어를 E구역까지 축소한다는 소문이 유니온 내에 빠르게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폭동이 한차례 일어난 차원 유니온의 경우 F구역의 중간에 방벽을 쌓아 배리어응 축소시켰습니다. 만약 F구역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다면 해당 유니온 정부로서는 부담 없이 배리어의 축소를 시행할 수 있게 됩니다.
-빌어먹을!
비록 무능력자들이지만 F구역에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다른 유니온은 어떤지 모르지만 코원 유니온의 경우 F구역에는 총 주민의 4분의 1이 넘게 살고 있다. 비록 하루하루 살아가는 많은 주민이 있는 것이다.
헤븐 컴패니를 박살 낸 것이야 사실 오르그들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관여한 일로 인해 수많은 보더러들이 배리어를 잃고 오염된 환경과 오르그의 공격에 직접적으로 노출이 된다는 사실에 하룬은 심한 마음의 부담감을 느꼈다.
-GG의 피해 상황은 알 수 있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데드 벙커에 침투한 벼리와 그에게 포섭된 인공수정체들을 통해 그쪽 수뇌부들도 크게 동요할 만한 수준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아즈만의 보고를 듣다 보니 데드 벙커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벼리는 어때? 아! 벨이 관장하고 있어서 모르나?
-아닙니다. 벨과 제가 같이 작업을 하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현재 벼리에게 포섭된 인공수정체는 총 42명입니다. 그 밖에도 경계 병력과 관리 요원들 중에서도 GG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23명도 포섭했습니다.
-벼리가 능력이 좋군. 다른 상황은?
-데드 벙커에 모여든 전력들 중 직급이 높고 조직의 신뢰를 받는 소수의 강자들이 은밀하게 GG 코원 본부의 명령으로 모처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세미롱으로 인해 촉발된 일련의 사태로 인해 본부의 지원은 서서히 끊기고 있어 데드 벙커의 요인들은 물론 조직원들까지 동요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얼마 후면 연구원들의 일부도 포섭해서 연구 시설 내부의 정보를 입수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벼리는 약 한 달 후에 작전을 시작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한 달 후?
굳이 공격시점을 지정한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입수한 정보를 보면 한 달 후에 본부의 중요 인사들이 방문을 한답니다. 그렇게 되면 경계 인력의 상당수가 움직이게 되고 안에서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중요 인사의 방문이라.
언뜻 생각하면 경계가 더 강화될 것 같지만 철통같은 수비망은 흔들릴 것이 분명했다. 데드 벙커의 수뇌부들이 방문자들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이용하자는 것이 벼리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로 우리가 공격했을 때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지?
-저희 돌풍 기지의 순수 전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데드 벙커는 4킬로미터 범위의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광범위 생체 감지기를 운용하고 있으며, 사방에 지뢰를 깔아 놓고 있습니다. 거기에 총 1,500명이 넘는 방어군이 수십 문의 양자포나 입자포, 광범위 고폭탄 등 족히 수십만을 상대할 수 있는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양자포는 물론이고 일전에 대형 입자포의 위력을 본 적이 있는 하룬은 수십 문이 넘는다는 말에, 기가 죽고 말았다. 더구나 1,500명이 넘는 방어군이라니. 정말 대단한 비밀이 있는 곳인 것 같았다.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군. 역시 처음에 생각한 대로 오르그들과 HG, 그리고 GPC들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어.'
아쉽지만 보유하고 있는 전력으론 상대가 안 되니 다른 수를 써야만 했다.
-다른 보고 사항이 또 있어?
-네. 휴먼 가드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하룬은 휴먼 가드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애기해 봐.
-영흥 마을 출신의 기지 주민과 오랜 안면이 있는 아우터들 몇 가족이 기지에 온 것은 아십니까?
-아니.
그런 정보는 들은 적이 없었다.
-닷새 전의 일인데 아리가 아직 보고를 안 한 모양이군요. 기지 수뇌부 회의에서 기지 식구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잘했군.
아마 자신을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에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잊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소식 중에 휴먼 가드에 대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척추 산맥 깊숙한 곳에 많은 광산과 제련소가 있으며 많은 아우터들이 그곳에서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중에 사는 아우터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했던 하룬은 이제야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약초를 채집해 유니온과 거래를 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HG가 관여된 광산이나 제련 시설에서 일을 하면서 삶을 유지해 온 것이다.
-흐음! 휴먼 가드가 원자재를 독점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런 식이었군.
-네. 변종 생물들과 맹수들 그리고 오염된 환경으로 인해 일반 주민들이 배리어 밖을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휴먼 가드는 광산을 개발하고 아우터들을 고용해서 각종 광석을 캐고 제련하여 유니온들에게 고가로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휴먼가드가 어떻게 유니온에 강대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기지 식구로 받아들여진 아우터들에 따르면 최근 동광과 희토류 광산 주변에 오르그들이 출몰하고 수시로 공격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광석을 코원 유니온으로 이송하는 길에 오르그들의 습격을 받아 겨우 살아남은 이들로, 이참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고 합니다.
-설마 오르그들이 광산에 욕심을 내는 걸까?
-아마도 그런 것으로 파악됩니다. 휴먼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납치한 휴먼들과 혼인 관계를 통해 피를 섞는 빈번해지며 최근 등장한 오르그들은 아인종으로 분류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과 가까운 외모에 뛰어는 지능과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르그들이 아즈만이 말한 대로 아인종으로 분류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도 자신들이 납치하거나 회유하여 받아들인 휴먼들을 통해 알게 된 각종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의 문명을 일으키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니 그들 역시 막대한 양의 식량과 광물 등의 원자재가 필요할 것이다.
-좋아. 그건 그렇고 아즈만도 내가 말한 GPC에 대한 것은 들었지?
-네, 마스터.
-좋아. 휴먼 가드와 GPC 그리고 오르그들을 이용할 계획을 한번 짜 봐. 오르그들의 엄청난 숫자와 힘이라면 뭔가 방법이 나올 것도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하룬은 아즈만에게 데드 벙커의 정확한 좌표와 시설, 그리고 방어군 편제 등 벼리와 그와 뜻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외워 두었다. 휴먼 가드의 재원이 되는 광산과 제련소에 대한 정보 역시 머리에 새겨두었다.
필요한 정보를 모두 습득한 하룬은 다시 벨과 아리에게 주의를 돌렸다.
'후후!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
달콤한 미소를 지은 채 달게 자고 있는 두 사람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하룬의 눈도 스르르 감겼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으로 마음이 푸근해져서 그런지 늘 팽팽하게 당겨져있던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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