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탄툰 마을 (193/278)

《탄툰 마을》

 탄툰 마을은 티탄의 마을처럼 절벽에 뚫린 동굴을 통해 들어가야만 했다. 구불구불한 동굴을 한참 걸으니 밖이 보였는데 그 정경이 실로 절묘했다.

 “와아!”

 이곳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마치 거대한 벽 네 개로 이루어진 천연의 거대한 방을 보는 것 같았다. 경사가 높아 마치 절벽처럼 보이는 사면의 한가운데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굴과 하늘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가 없겠구나.’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는지 하룬 역시 감탄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넓은 지면이 흙이 아니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안정적인 식량 수급보다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서 잡은 보금자리였다.

 집들은 대부분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진흙과 작은 돌을 섞어 벽을 만든 구조로 무척 단단해 보였다. 대충 눈에 들어오는 호수戶數는 70호 정도였다.

 이미 동굴을 지키던 전사들의 통보를 받았는지 마을 사람들이 동굴 입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타킴의 가족도 있었다.

 “타킴, 돌아왔구나!”

 “엄마!”

 이제는 당당한 전사의 풍모를 가지게 된 타킴이었지만 언제나 그리워했던 엄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억세고 단단한 엄마의 팔뚝을 느끼는 순간 언제나 놓지 않았던 긴장의 마지막 끝을 놓아 버린 타킴의 눈에서는 어느새 굵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언제나 계속되기를 원했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 새끼, 어디 얼굴 좀 보자!”

 피리엘은 눈물범벅인 아들의 얼굴을 잡아 이모저모를 살폈다. 얼굴 전체에 걸쳐 새겨져 있던 문신은 크기가 크게 줄었고 대신 작은 흉터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을을 떠날 때 두려움이 가득했던 눈에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차지하고 있었다.

 재료를 알 수 없고 몇 번 기운 흔적이 있었지만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코트 형태의 방어구는 그동안 아들이 치렀을 살벌한 전투를 드러내 주었다.

 타킴은 어느새 노련한 전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엄마랑 내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타킴의 동생 살케가 뒤늦게 달려와 타킴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남편을 마수 사냥에서 잃은 후 두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강인한 모습만 보였던 피리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품 안에서 내놓기가 겁이 나 마을을 떠나보낸 후 눈물로 밤을 새웠던 그녀는 이제 아들에게서 생전의 남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잘 돌아왔구나, 내 아들!”

 “엄마, 다루미 누나 식구들도 같이 왔어요.”

 “다루미가?”

 타킴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다루미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다루미!”

 “이모!”

 피리엘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다루미를 마주 달려가 꼭 끌어안았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맏언니가 남긴 유일한 자식이 바로 다루미였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다루미를 그녀가 키웠기에 맏딸이나 마찬가지여서 그 정은 아주 각별했다.

 두 여인은 어떤 사정을 물어볼 생각도 없이 마주 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었다.

 그 시각 두르본도 애인인 치첸의 품속에 안겨 열렬한 키스를 나누고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귀염둥이, 어디 상한 데는 없는 거야?”

 “응. 흉터가 하나 더 생기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작은 거야.”

 “이런!많이 아팠지?”

 “응. 치첸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많이 아팠어.”

 옥세르보다 더 덩치가 큰 치첸이라 그의 품은 넓고 푸근했다. 결혼을 약속한 치첸은 마을 최고의 전사 중 1명이다. 마을을 지켜야 했기에 그는 이번 여행에 동행하지 못했었다.

 “이건 무슨 방어구야? 다들 같은 것을 입고 있네.”

 “아!”

 두르본은 치첸의 말에 문득 자신이 할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장! 대장을 마을 어른들에게 소개하는 걸 잊고 있엇어.”

 두르본은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치며 황급히 달려갔다.

 “두르본, 대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뒤에서 치첸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지만 그녀의 발길은 더욱 빨라졌다.

 하룬은 한동안 환희와 눈물바다에 빠졌던 만남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아카족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엇다.

 “그러니까 이분이 너희들과 계약한 용병대장이고 너희 20명이 앞으로 용병이 되어 돈을 벌어 오겠다?”

 “네, 아빠. 아니, 탄.”

 언제나처럼 씩씩한 두르본의 대답에 한동안 괜찮았던 머퍼스의 머리가 다시 아파졌다.

 “네 결혼은 어떻게 하고?”

 “한 몇 년 세상 구경하고 돌아와서 하려고.”

 “뭐!”

 “너 미쳤니?”

 천연덕스러운 두르본의 대답에 머퍼스와 부인은 목덜미를 잡고 비틀거렸다. 곁에 치첸이 있었지만 그 역시 넋이 빠진 듯 넘어지려는 두 사람도 붙잡을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풍경은 이곳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반가움과 기쁨에 가득한 해후를 나눈 가족들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탄툰 마을의 탄인 머퍼스는 고개를 몇 번이나 움직이고 눈을 꽉 감았다가 뜨는 등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보아하니 두르본만 이렇게 결정을 내린 것 같지는 앟ㄴ았다.

 “내가 딸내미가 한 말에 너무 놀라 그만 실례를 했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딸을 비롯해서 이번에 도시로 나갔던 전사들 모두가 관련된 일이니 신중하게 처리를 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나저나 이 녀석 실력이 전에 비해 월등하게 올랐어.’

 머퍼스는 딸의 전신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온 전사들 모두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따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대장이라는 자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걸까?’

 머퍼스는 하룬을 마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다른 마을에서 마수를 피해 도망쳤던 어카적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다른때라면 귀중한 곡물을 구해 온 전사들의 노고와 마을의 복을 기원하는 축제가 시작되었을 시간이었다.

 마을의 공회당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이번 여정에 대해 보고를 하는 레미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

 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사정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아이들의 실력이 두 달여 만에 몰라보게 올라가서 안 그래도 궁금해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대원들이 스스로 노력했기에 이룬 성과지요.”

 “피곤하실 텐데 너무 시간을 끌었군요. 일단 좀 씻으시고 식사를 하도록 하지요. 두르본, 하룬 님을 모셔라.”

 하룬은 아직 이들만의 이야기가 남아 있음을 알아채고 군소리 없이 두르본의 뒤를 따랐다. 사실 피곤하기도 했던 것이다. 탄은 부르카족 전사들과 에인족 전사들에게도 쉴 곳을 안내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할누과 두 부족의 전사들이 눈에서 사라지자 탄은 다른 세 원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흐음. 일단 이 건은 나중에 의논하기로 하고 우리를 찾아온 일족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오?”

 “이 사람들이야 우리 일족이니 마땅한 거처를 찾아 줍시다.”

 “나 역시 찬성이오. 갈 곳도 없는데 우리가 품어야 합니다.”

 원로들은 모두 마을을 잃은 이들을 품자고 입을 맞추었다. 사실 이 문제는 논의하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었다. 식량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부족도 아닌 같은 일족이니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누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탄은 하룬을 안내하고 돌아오는 두르본을 쳐다보며 본 건을 꺼냈다.

 “아이들 문제는 어떻게 하시겠소, 탄?”

 한 원로의 말에 탄이 하룬을 안내하고 막 돌아온 두르본을 쳐다보며 물었다.

 “바깥 세상에 나가 죽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그럼요. 이제 마수 두세 마리는 혼자서도 거뜬한걸요.”

 두르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돼!”

 치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불과 두 달 만에 그런 실력이 되었다고? 너무 과장이 심하잖아.”

 하지만 두르본을 비롯해서 이번 여행에서 돌아온 전사들은 미소만 지을 뿐 그의 말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이야. 막내인 타킴도 혼자서 람비를 상대할 수 있는걸.”

 “뭐라고!”

 치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두르본의 말에 경악하며 타킴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타킴은 평소 부끄러움을 많이 탔지만 이제는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전사치고는 왜소한 몸을 가졌고 성격도 유약했기에 이번 여행을 보내며 모두가 걱정을 하던 타킴이었다.

 다른 대원들의 눈짓에 실린 의미를 읽은 타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리릭!

 타킴의 몸이 바닥을 박차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공회당 지붕 위에 내려섰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타킴의 몸은 모두가 보는 가운데 엄청난 빠르기로 마을 곳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람비의 힘을 끌어 올린 그의 몸은 마치 묘기를 부리듯 집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말도 안 돼!”

 치첸을 비롯한 마을 전사들이 타킴이 마수의 힘을 끌어올리고 벌써 백 호흡이 지났지만 여전히 표홀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나이에는 서른 호흡이 한계였지만 타킴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팟!

 어느새 공회당 앞에 나타난 타킴은 잘 정련된 검을 뽑아들었는데 그 검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바위를 향해 내리쳤다.

 “앗!”

 누군가 경호성을 질렀다. 틀림없이 검이 부러지리라. 자칫 파편이라도 튀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싸악!

 검은 바위를 두 뼘이나 가르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타킴은 노련한 전사처럼 검을 다시 거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표홀하게 움직이며 마을의 목책까지 달려나갔다가 돌아왔다.

 “세상에 프로즐리의 힘까지……!”

 전사들은 누을 부릅떴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갓 전사가 된 타킴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두 개나 되는 마수의 힘을 연속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그것도 람비의 힘의 경우 백 호흡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다 하룬 대장과 용병 선배들이 가르쳐주고 수련시켜 준 덕분입니다.”

 두르본의 말에 머퍼스는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두…… 너희들 모두의 실력이 이런 거냐?”

 “당연히 아니지요.”

 그 말에 머퍼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겨우 수긍하는 얼굴이 되었다. 모두가 이렇게 실력이 급상승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하지만 타킴의 경우는 아주 의외구나. 뼈가 잘고 근육양이 적어 걱정을 했더니 몸의 한계를 잘 극복했어. 다른 전사들은 어떠냐?”

 “디온과 옥세르는 동시에 세 가지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저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 경지에 오를 거고요.”

 “뭐? 그게 정말이냐?”

 한때는 마을 최고의 전사였던 머퍼스는 쉽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두 개를 동시에 끌어 올리는 것이 한계였던 것이다.

 “금방 탄로가 날 거짓말을 왜 하겠어요.”

 그 말은 맞다. 그리고 아카족은 원래 거짓말을 모른다.

 “어, 어떻게……?”

 “대장이 우리에게 마수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특별한 것을 주었어요. 그리고 마수의 힘을 제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고급 검술을 전수했지요. 우린 그저 대장과 선배 대원들이 시키는 대로 수련하고 전투를 했을 뿐이에요.”

 두르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이제 아무런 반론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룬 대장은 타키야의 재림일지도 몰라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레미?”

 마을의 수뇌부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말없이 기이한 눈빛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주술사 라티카가 자신에게만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뜻밖의 사실을 전하는 레미에게 물었다.

 “하룬 대장은 제가 아는 열 개의 문신을 모두 새겼어요.”

 “저, 정말이냐?”

 “네. 게다가 대장은 그중 무려 다섯 개의 힘을 동시에 쓸 수가 있어요. 그……는 마치 괴물처럼 문신을 받아들였고 며칠 만에 그 힘을 모두 다 완벽하게 흡수했어요.”

 “그……럴 리가!”

 라티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장 그에게 가 보자!”

 라티카는 레미의 손을 잡고 하룬이 들어간 통나무집으로 달려갔다. 주술사인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확인을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난 믿을 수가 없다. 타킴, 이리 나와 나랑 한번 겨뤄 보자.”

 치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비록 눈으로 확인을 했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마음은 자리에 있는 전사들 모두가 같았다. 시기나 질투를 떠나 도저히 믿거나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내가 확인시켜 주지.”

 치첸의 도발에 일어난 것은 옥세르였다.

 프로즐리의 힘을 끌어 올린 옥세르의 전신 근육이 폭발할 것처럼 솟아올라 꿈틀거렸다. 그는 람비의 발을 사용해서 가볍게 날 듯이 공터로 이동했다.

 “……정말이군.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어.”

 원로들이 탄성을 질렀다. 공터를 쳐다보는 치첸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굳어 있었다.

 ‘어쩌면 정말 사실인지도 몰라.’

 안 그래도 예민한 오감 때문에 본의 아니게 공회당 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눈으로 보듯 알고 있는 하룬이었다. 제대로 쉬기는커녕 행여 대원들이 마을에서 좋지 않은 대우를 받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룬은 레미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분은 제게 주술과 치료술을 가르쳐주신 라티카랍니다.”

 라티카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아카족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른 몸이지만 맑고 깊은 눈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 걸음이 가볍고 빠른 것이 힘을 중요시하는 전사들과는 또 다른 힘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반갑습니다. 돌풍 용병대를 이끄는 하룬입니다.”

 “먼저 우리 레미를 짧은 기간에 이렇게 키워준 하룬 대장에게 감사드리오.”

 안으로 들어온 라티카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산악 부족은 별로 쓰지 않는 과한 예의였다.

 “별말씀을요. 레미는 똑똑하고 부지런한데다가 사려까지 깊은 대원입니다. 주술에 대해서는 잘 몰라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최소한 최고의 치료사가 될 자질과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허허허! 그건 나 역시 동감입니다. 우리 레미는 어릴 때부터 치료사의 재능을 보였지요. 하지만 스승이라고 아는 것이 주술을 이용한 사이비 치료술과 약초 이름 몇 개를 아는 것이 고작이어서 부끄러웠습니다. 약초학도 가르치셨다고요?”

 “아! 그건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저와 안면이 있는 분이 허벌 길드의 요인이시라서 선물로 받은 약초학 책을 빌려준 것에 불과합니다. 공부는 레미가 스스로 했습니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라티카는 다시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그것이 부담스러웠던 하룬은 숙이려는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는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두 분 일단 자리에 좀 앉으세요. 계속 서서 이야기를 나누실 거예요?”

 레미의 말에 두 사람은 쑥스러운 얼굴로 탁자에 앉았다. 손이 빠른 레미는 벌써 작은 화로를 뒤져 불씨를 살렸고 곧 그윽한 오미차 향이 실내에 가득 찼다.

 “하룬 대장, 진짜로 모든 마수의 힘을 다 쓸 수 있습니까?”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묻는 라티카의 눈빛이 주름진 엉ㄹ굴과는 달리 빛을 발했다.

 “그렇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별 어려움 없이 쓸 수 있더군요.”

 “오오! 그럼 혹시 어둠의 일족이십니까?”

 하룬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둠의 일족? 그런 건 모릅니다.”

 하룬의 부인에 라티카는 무척 실망한 얼굴로 변했다.

 “그럴 리가! 어둠의 일족이 아니고서는 다섯 가지도 쓸 수 없는데…….”

 “어둠의 일족이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하룬의 물음에 라티카는 기이한 눈빛으로 하룬을 살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잘 모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몇 개 있지만 너무 오래된 거라…….”

 라티카의 말에 하룬은 강한 흥미를 느꼈다. 전설 속에는 진실이 들어있는 법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야기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하룬의 부탁에 라티카는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떠올린 후 입을 열었다.

 “아득한 옛날 신들이 인간과 함께 살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신들 중에는 레아와 발몬이라는 신들도 있었습니다. 그 둘은 이계에서 온 신들로 각기 빛과 어둠을 관장하는 신력神力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가진 두 신은 부부가 되어 빛과 어둠을 조화롭게 관장해서 세상의 평화에 일조했습니다.”

 “이계에서 왔다고요?”

 어느 세계에나 있는 신화일 수도 있지만 특이한 점이 귀에 들려왔던 것이다. 자신이 바로 이계에서 온 존재가 아닌가.

 “네. 그렇다고 전해집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여러 개의 세상이 연결되어 있었고 신들은 여러 세상을 오갈 수 있었답니다.”

 어느 날이었다.

 이계에서 온 레아와 발몬은 창조신의 부탁으로 낮과 밤을 맡은 관계로 새벽녘과 초저녁에 잠깐 만날 수밖에 없어 둘 사이는 서서히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건너온 후 심한 외로움을 느끼던 빛의 여신 레아는 지속적으로 구애를 하던 태양신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둠의 신 발몬은 분노해서 두 신을 공격했다. 하지만 두 신을 당해내지 못하고 대지의 여신 미요스의 도움을 받아 빛과 태양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세상에는 어둠이 사라지고 오직 뜨거운 햇빛만이 작렬하게 되었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제대로 쉴 수도 없고 잘 수도 없어 말라갔고, 물질계는 조화를 잃어 파괴가 될 위기에 처했지만 신들의 다툼에 실망한 창조신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발몬 신이 대지 깊숙한 심연으로 사라지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물질계의 에너지가 균형을 잃어버리자 세계는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인간들은 물론이고 신들도 균형과 조화를 잃게 되자 세상은 파괴와 살육이 넘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불행한 사건은 마계가 열린 것입니다. 마계의 다섯 마왕은 수많은 마신들과 마수들을 이끌고 물질계로 넘어와 수많은 물질계의 신들과 신의 피조물들을 몰아붙였습니다. 조화를 잃어버리고 편중된 사고와 힘만 가지게 된 신들은 마왕들은 물론이고 마신조차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신들은 일찍이 마련해 둔 세상으로 도망을 쳤는데 그곳이 바로 천계입니다. 세상을 돌보아야 할 신들이 사라지자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의 생사가 경각을 달리고 세상이 파괴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때 어둠의 신 발몬이 홀연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그는 마계에서 넘어온 마수들을 마신보다 더 익숙하게 부렸고 그들의 힘을 흡수할 수 있었다. 마계에서 유래된 이십 종의 마수들의 힘을 한 몸에 가진 어둠의 신은 마왕과 마신, 마족들을 하나씩 처리했고 마수들을 자신의 권속으로 삼거나 혹은 죽여버렸다.

 발몬은 혼자서 그 많은 적들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자신이 건너온 세상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인간 12명을 소환했다. 그들은 발몬처럼 마수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해 발몬이 가진 어둠의 힘까지 어느 정도 쓸 수 있었다.

 발몬과 발몬을 추종하는 인간들은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마계에서 건너온 마수들에게 거의 장악당했던 세상을 조금씩 해방시켰다. 공포에 질려 있던 인간들과 이종족들도 발몬의 군대와 합세했다.

 “발몬 님은 마왕들을 상대해서 치명상을 입혀 마계로 돌려보냈지만 그 자신도 소멸되기 일보 직전까지 다쳤습니다. 하지만 태양의 신 ‘라’가 지배하는 천계는 끝내 그를 위해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둠의 신 발몬은 가련한 피조물들을 위해 다시 이 세상에 어둠의 힘을 풀었지만 천계로 가는 대신 자신을 포근하게 안아 준 대지의 여신 미요스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창조신은 천계의 신들에게 실망하여 다시는 그들이 직접 물질계에 현신할 수 없도록 제약을 걸었습니다. 신의 사자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미요스와 발몬으로 한정했지요. 하지만 발몬은 너무나 큰 부상을 당했기에 미요스의 깊고 따듯한 품속에서 깨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전설이다. 하지만 보통의 유저들이 비욘드를 시작할 때 튜토리얼에서 듣는 것과는 무척 다른 창세기전이었다. 유저든 아니면 이곳 비욘드의 주민이든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하고 어둠만이 있던 세상에서 고통받는 피조물들을 위해 빛의 신 레아와 태양신 라를 보내 균형을 잡도록 했다는 것이 창세기전의 내용이었다.

 “다시 균형을 찾은 세상의 인간들은 많은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달콤한 말로 레아와 라를 칭송하는 사제들의 꼬임에 넘어가 어둠의 신 발몬을 마계의 마왕과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둠의 신 발몬과 대지의 여신 미요스의 은혜를 입고 마신들의 부하인 마수들과 오랫동안 싸워 왔던 이계출신의 인간들은 그 두 신을 잊지 않고 대대로 믿어 왔습니다. 그 12명의 전사들이 바로 우리 산악 부족의 선조들입니다. 산악 부족들은 발몬 님이 직접 가르쳐 준 마수의 힘을 쓰는 방법을 익혀 마계의 침공에 대비해서 세상에 남은 마수들을 사냥하며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라티카의 얼굴에는 스스로와 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드러났다.

 “비록 인간들이 살기에는 너무 척박한 데빌 산맥이지만 우리 산악 부족들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마수의 힘을 사용해서 마수들을 사냥하며 세상을 지켜 왔습니다. 마법을 만들고 문명을 이루어 도시와 국가를 건설한 인간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을 탓하지 않고 발몬 님이 내린 소명을 대대로 가슴 깊이 간직해 왔습니다.”

 정말 대단한 부족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마수의 힘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강건한 체력과 강인한 기질을 봤을 때는 한 국가를 건설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번영과 소멸을 거듭하며 어둠의 신 발몬이 내린 소명을 잊어버릴까 봐 굳이 이 데빌 산맥을 떠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발몬께서는 대지의 심연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 조상들에게 두 번에 걸쳐 자신의 대리인을 보낸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꽤 오랜 옛날 데빌 산맥의 중심에 다시 마계와 이어지는 작은 틈이 열린 적이 있습니다. 데빌 산맥에는 다시 마수가 들끓었지요. 산악 부족들은 마수들에 의해 수없이 많이 죽어가고 마침내 그 수가 열에 하나까지 줄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것이 타키야 님입니다. 영광스럽게도 아카족 출신인 타키야 님은 산악 부족들이 전승하며 간직해온 모든 마수의 힘을 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마수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마계와 이어진 틈을 막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그럼……?”

 “그렇습니다. 저는 하룬 대장이 두 번째 발몬 님의 대리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우! 안타깝지만 그것은 아닐 겁니다.”

 이들에게 밝힐 수는 없지만 자신은 이곳 주민이 아니다. 슈퍼 캡슐이 아니었다면 정해진 때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건 모릅니다. 최근 들어 마수들이 다시 준동하고 활동을 멈추었던 화산이 폭발하는 등 데빌 산맥이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레아를 비롯한 천계의 신들이 과도한 신력을 사용해서 이방인들을 이 세상에 건너오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력의 과도한 사용은 물질계의 균형을 깨뜨려 다시 마계의 문을 열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었다. 라티카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계는 물질계를 이루는 에너지가 균형을 잃을 때 열린다고 했다.

 “물론 전해져 오는 것과 하룬 대장의 외모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외모요?”

 “네. 사실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지만 발몬 님의 대리인인 어둠의 일족은 발몬 님과 똑같은 아주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는데, 발몬 님은 마왕과 거의 비슷한 외형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마수들을 길들이거나 놈들의 힘을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타키야 님 역시 발몬 신처럼 머리에 뇌전이 흐르는 뿔들이 솟아 있고 화염을 뿜어내는 듯 붉고 뜨거운 눈빛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다음에 올 발몬 님의 대리인은 자신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나 미요스의 신력까지 이어받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가공할 힘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흣!”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을 토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자신이 폭주할 때면 그런 외형으로 변하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라티카는 오해를 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요. 저 역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요. 머리에 뿔이 솟은 인간이 말이 됩니까? 마왕이나 마족이라면 모르겠지만 뿔이라니…….”

 하룬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혹시 후크란 산맥에 사는 럼프 오크족을 아십니까?”

 “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뿔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먼저 정정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럼프 오크족은 오크족이 아닙니다.”

 “네?”

 놀라운 소리였다. 럼프 오크가 오크 종족이 아니라니.

 “럼프족은 엘프나 드워프와 같은 이종족 중 하나입니다. 생김새가 오크와 비슷하다고 인간들은 그들을 오크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오크 따위는 가질 수 없는 지능과 능력을 가진 이종족입니다. 뭐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산악 부족 역시 라 제국 시절에는 이종족으로 불렸으니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 럼프족과 우리 산악 부족은 사촌 관계입니다.”

 사촌이라니. 그럼 혈연관계가 이어져 있다는 말일까?

 “발몬 신께서 마계의 마왕군과 싸울 때 발몬 님을 따르는 군대에는 우리 산악 부족 말고도 럼프족들이 있었습니다. 럼프족 여왕은 발몬께서 총애하던 여인으로 그들의 후예는 대대로 바몬 신의 권능 중 하나인 어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 럼프족과 우리 산악 부족은 서로를 한 형제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후크란의 악마로 불리는 럼프 오크들이 발몬과 관계가 있을 ㅈ루이야.

 ‘그럼 내가 의도하지 않게 얻은 이 힘이 바로 어둠의 힘이란 말인가?’

 “혹시 럼픚고들이 어둠의 힘을 어떻게 얻고 사용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하룬은 내심 크게 기대했지만 라티카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것은 후크란 산맥 어딘가에서 발몬께서 남긴 어둠의 힘이 발원하며 그 힘을 얻은 자가 럼프족의 로드가 된다는 것뿐입니다. 우리 산악 부족과 마찬가지로 럼프족 역시 발몬 님의 후예가 언제고 현신하여 자신들을 이끌고 미요스의 은혜가 깃든 땅에서 만년 왕국을 건설할 거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에이! 그럴 리가 없어!’

 하룬은 언제고 시간을 내어 럼프족들을 만나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힘을 돌려주든지 아니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한 가지를 더 묻고 싶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전설만 믿으며 이 험한 산중에서 위험하고 불안한 삶을 유지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룬은 마수들의 위협을 받으며 식량 부족에 시달리면서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믿음이지요. 언젠가는 발몬 님의 대리인이 우리 산악 부족을 이끌어 만년 왕국을 건설할 거라는…….”

 “만년 왕국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흥미가 생겼다.

 “오래전에 열두 개의 산악 부족은 발몬 님을 사랑하는 대지의 신 미요스께서 친히 산을 무너뜨리고 물길을 터서 만들어낸 풍요로운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 땅은 산맥의 중심부 근처에 있는데 낟알 하나를 뿌리면 백 개를 주는 그런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라 제국에 버금가는 풍요롭고 발전된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발몬 님의 유지를 지키며 평화롭게 살아오던 어느 날 당시 대륙을 양분하고 있던 큰 인간 국가 두 개가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이룩한 문명 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높아서 치명적인 무기를 발사하면 수십만이 잿더미가 될 정도였습니다. 하늘이 불타고 땅이 통곡을 할 만큼 치열했던 그 전쟁으로 인해 세상은 살아있는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문명의 윤회라는 것인가?’

 지구의 경우에도 그런 비공식적인 역사가 있었다.

 전기 사용으로 대표되는 과학 지식과 기술을 가진 고도의 문명이 남긴 흔적은 시대를 달리하여 여러 곳에서 발견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 문명은 단절되고 말았다. 종말 시대의 인간들은 그들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역사를 이어 왔다고 생각했지만 한쪽에서 구석기 문명이 일어나고 있을 때 다른 곳에서는 핵전쟁을 떠올리게 만드는 전쟁의 흔적이 나타났다.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마계로 이어지는 틈이 열렸습니다. 그곳으로 마수들이 물밀 듯이 우리 세상으로 나왔고 우리는 멸망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타키야십니다. 그분은 마수들의 힘을 써서 마수들을 제압했고 마신과 마족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 땅을 되찾기 전에 그분은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막기 위해 길을 떠났고 통로는 결국 막혔지만 그 땅은 다시 되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수백 명 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며 사는 산악 부족이 예전에 그런 영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는 않지만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타키야께서는 자신의 뒤를 이어 나타날 어둠의 일족은 손님으로 찾아올 것이며 우리 열두 부족이 빼앗긴 그 풍요로운 땅을 되찾아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 어딘가에는 뛰어난 문명을 이루어 낸 우리 선조들이 기록하고 보관해온 수많은 고급 지식들과 힘이 숨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그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땅이 어디인지는 확실하게 알고 계십니까?”

 “산맥의 중심 지역 근처라는 것은 알지만 확실하게는 모르고 있습니다. 데빌 산맥의 모든 곳을 꿰뚫고 있는 에인족 전사들도 그곳만은 가지 못하니까요. 다만 그곳에는 산맥 전체에 퍼져 있는 마수들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많은 마수들이 있으며 마족의 피가 섞인 상급 마수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룬은 문득 자신이 어둠의 일족이 맞는다면 이들을 위해 그곳을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보금자리 없이 불안하게 사는 것은 자신도 이미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반드시 그땅을 찾아 산악 부족들이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라티카나 듣고 있는 레미나 눈빛이 아주 뜨거웠다.

 “그런데 절 보고자 하신 게…….”

 “아! 이런.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군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아는 열 개의 문신을 대장에게 더 새겼으면 해서요.”

 “으음. 전 타키야께서 말씀하신 어둠의 일족이 아닙니다.”

 “지금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떤 산악 부족에서도 마수의 힘을 열 가지나 사용한 전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장이 어둠의 일족이 아니더라도 모든 마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습니다.”

 “그건…….”

 하룬은 굳이 거절할 이유는 느끼지 못했지만 타키야니 어둠의 일족이니 하는 말에 부담감을 느껴 단박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스무 개나 되는 마수 문신을 새길 수 있는 부족은 이제 우리 아카족이 유일합니다. 다른 부족들은 삶에 적응하면서 전승되어 오던 문신을 잊어버렸습니다.”

 “같은 산악 부족이 아닌 외인에게 해도 되는 일입니까?”

 하룬의 말에 라티카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그런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대장이 우리 산악 부족의 어느 전사도 사용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타키야 님처럼 발몬 님의 대리인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마수의 힘을 쓸 수 있는 전사의 탄생을 간절히 고대해 왔습니다. 부디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게…….”

 이미 레미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또 탄툰 마을에 가면 모든 마수의 문신을 새기기로 약속도 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꺼려진다. 행여 이들이 자신을 발몬이 보낸 대리인으로 여길까 겁이 나는 것이다. 쓸데없이 일에 빠지긴 싫었다.

 “전설 때문이라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역시 모든 것을 다 믿지는 않으니까요. 만약 하룬이 모든 마수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우리 아카족이나 다른 부족들에게 어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도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확실한 것은 하룬 대장이 나…… 아니, 역대 주술사들이 감히 다른 전사들에게 펼칠 수 없었던 문신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겁니다.”

 하룬은 잠시 고민을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번 시험을 해 보지요.”

 “감사합니다. 내 죽기 전에 소원을 이루게 되었군요. 우리 레미가 정말 복덩이입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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