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원들의 합류》
숲을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다음 날까지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 성수와 포션 그리고 이제 경지에 이른 레미의 치료술로 다쳤던 환자들은 다음 날에는 혼자서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체로키를 마지막으로 다른 마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길을 재촉한 하룬 일행은 다음 날 오후 늦게 티탄의 악스란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중간에 자연적으로 뚫려 있는 동굴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만 제대로 지키고 있으면 마수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천혜의 장소였기에 마을 사람들의 수도 상당히 많았다. 농사를 지을 땅이 없어 밖에 나가 사냥을 해야 하고 멀리까지 나가서 곡류를 정기적으로 구해야 하는 일만 없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곳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마을 주민들에 비해 세 배는 그 인구가 늘어난 상태였다. 마수들 때문에 근처 마을에서 피난을 왔던 것이다.
안 그래도 식량이 부족했던 마을 사람들은 몇 주째 곡류를 먹지 못하고 과일과 말린 고기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다행하게도 피난을 온 다른 마을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래서 배를 주린 것은 아니지만 마을의 주축인 전사들이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하룬 일행은 티탄과 전사들의 소개로 족장을 비롯한 부르카족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비록 민머리 때문에 인상은 다른 산악 부족들처럼 험악했지만 순박한 성품을 가진 부르카족은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하룬 일행에게 나름대로 극진한 대점을 했다.
할누은 그들을 위해 자신이 가져온 물건들 중 곡식들과 무기 그리고 의복 일부를 선물로 주었다. 곡식의 양은 티탄과 전사들이 카르에서 구해온 것과 비슷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의 평상복은 더우나 추우나 평생 가죽옷만 입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부르카족의 눈을 끈 것은 강탄성궁과 철시였다. 활을 주로 쓰는 그들에게 있어 카르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의 상등품 무기는 순박한 그들도 탐욕을 일으킬 정도였다.
“고맙소. 이것은 우리의 답례품이오. 너무 흔한 것이라 주기도 민망하지만 우리에게 값어치 있는 물건이라고는 이것들이 고작이오.”
부르카족의 부족장은 그동안 간직해 온 고급 마수 가죽과 상급의 마정석을 답례로 내놓았다. 하룬은 이들의 형편을 생각하고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받기로 했다.
“나중에 데빌 산맥이 안정되면 제가 아는 상단으로 하여금 이곳을 정기적으로 들르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이라면 카르처럼 폭리를 취하지 않고 제값에 이 물건들을 구입해줄 겁니다.”
“정말요?”
상단의 방문이 2년 전부터 끊겼기에 할 수 없이 카르와 더 많은 거래를 해왔던 마을 대표 탄이 반색을 했다.
“네. 돌풍 상단이라고 우리 돌풍 용병대의 자본이 투자된 상단이 늦어도 6개월 안에 다양한 물건들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할 겁니다. 저 역시 마법 배낭에 식량을 가득 채워 왔으니 떠나기 전에 거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고맙소. 정말 고마워!”
탄은 한시름 돌렸다는 얼굴로 하룬의 손을 한동안 놓지 않았다. 부족한 식량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일족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탄과 원로들 입장에서 하룬은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거래를 책임지고 카르에 다녀온 티탄이 마을의 대표인 탄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냐? 아니,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되겠느냐?”
개인적으로 가까운 혈족인 터라 심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창 손님과 대화를 하는 도중에 티탄이 끼어든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하룬 대장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나온 말에 마을의 수뇌부인 탄과 원로들 그리고 하룬 일행마저도 눈을 크게 떴다.
“아카족 탄툰 마을 전사들이 하룬 대장이 이끄는 돌풍 용병대원이 되었습니다. 전사 20명이 용병 일을 하는 조건으로 탄툰 마을은 그 다섯 배인 100명이 1년 동안 먹을 곡물을 포함한 식량과 의복 그리고 각종 생필품을 받기로 했답니다.”
“그래? 정말이오, 하룬 대장?”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인상이 굳었던 탄은 티탄이 말한 조건을 듣고는 눈을 빛내며 하룬에게 그 내용을 확인했다.
‘어느 놈이 입을 놀린 거야?’
하룬의 눈이 대원들을 향했지만 범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뭐, 그 정도야 친하게 지내는 사람끼리 할 수도 있는 내용이기는 했다.
계약 조건이 그렇게 된 것은 간단했다. 아카족 대원들이 금전 감각이 없어 돈으로는 약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입니다. 마수를 사냥할 정도로 뛰어난 전사는 험한 일을 하는 우리 용병대로서는 같이하고 싶은 대상이니까요.”
“우리 마을의 전사들을 이끌고 저 역시 돌풍 용병대원이 되고 싶습니다. 어차피 똑같이 위험한 일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배우고 대장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용병이 되고 싶습니다.”
촌장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대장에게 뭔가를 배운다?”
“이제 갓 성인식을 치른 아카족 대원들은 혼자서 능히 람비를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디온의 경우는 세 마리도 넘게 해치우더군요. 이들은 용병이 된 지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티탄의 말에 촌장과 마을 원로들의 얼굴 표정이 급변했다. 식량을 구하는 일이야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카르와 거래를 하면 된다지만 전사들이 강해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수많은 마수들과 몬스터들이 횡행하는 이 데빌 산맥에서 강함이란 그 무엇보다 강조되는 미덕인 것이다.
자신이 아끼는 부르카족 전사들은 강하다. 하지만 람비 한 마리를 상대하자면 적어도 서넛은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용병이 된 지 한 달밖에 안 되는 아카족 전사들은 실력이 급상승했다.
“디온!”
“네, 탄.”
디온은 한때 부르카족 최고의 전사 중 1명이었던 탄을 잘 알고 있었다. 탄은 디온의 아버지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지금은 마수의 힘을 몇 개나 쓸 수 있나?”
“총 다섯 개를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쓸 수 있는 것은 세 개가 한계입니다.”
“헛!”
탄은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을 토해냈다. 그 정도라면 자신이 한창 때 자웅을 겨루던 아카족 최고 전사보다 더 강한 실력인 것이다.
“강해진 비결은?”
“대장과 선배 대원들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족이 다치는 것은 볼 수 없다고요.”
“흠! 가족이라…….”
탄과 원로들의 눈길이 하룬을 향했다.
“하룬 대장, 우리 전사들에게도 아카족 전사들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실 수 있겠소?”
결국 이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이런! 왜 이런 상황이 되었지?’
아직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용병대의 전력을 확충하는 문제를 생각하면 더없이 좋은 선택이다. 비록 세상 물정에는 어둡지만 그만큼 순수한 사람들이다. 이미 아카족 전사들을 통해서 산악 부족의 심성과 그 잠재력은 확인한 터였다.
‘하지만…….’
단박에 결정하기에는 뭔가 꺼려지는 것이 있었다. 대원들이 많아지만 그만큼 신경 쓸 일도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도 다크니스를 생각하면 수가 많은 것이 좋겠지. 게다가 닳고 닳은 일반 용병들보다는 더 나을 것이고.’
하룬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맡겨 주신다면 최대한 가족같이 돌보겠습니다.”
하룬ㄹ의 말이 떨어지자 긴장했던 티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자신도 모르게 입이 귀까지 걸린 그의 눈이 디온을 향했다. 디온은 불끈 쥔 주먹을 들어 보였다.
“고맙소. 안 그래도 마수들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 사냥을 하는 것도 위험한 상황이라 고심을 하고 있었소.”
“껄껄! 그럼 이제 우리도 티탄이 이끈느 젊은 전사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편하게 살 수 있겠군.”
“그렇지. 이참에 아예 도시라는 곳으로 이주를 할까?”
“예끼, 이 사람아. 그런 곳은 지나가다 코가 베여도 모른다지 않나. 아서게, 우리 부르카족에겐 데빌 산맥이 고향이야!”
탄과 마을 원로들은 갑작스러운 결정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일이 풀리자 개운한 얼굴이 되었다.
“다만 지금 당장 많은 대원들을 받을 수 없으니 일단 30명만 받겠습니다.”
“그러시오. 전사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빠져나가면 우리 말을 입장에서도 어려운 상황이 되니.”
타당한 결정이다. 티탄이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전사장이지만 용병 생활은 아직 경험을 하지 못했다. 그가 먼저 경험을 하고 판단한 바에 따라 미래에 더 많은 전사들을 돌풍 용병대에 보낼지 결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탄이 티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젊어서 잠깐 마츠루트 요새의 용병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용병들의 세계는 군대와 같아서 상명하복이 철저한 집단이다. 대장의 말에 절대복종하고 선배 대원들에게 진정으로 대하면 반드시 너희들은 인정을 받을 것이다. 알겠느냐?”
“네, 탄!”
티탄은 기쁨을 숨기지 않은 채 대답을 했다. 드디어 이 갑갑한 곳을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고 설레었던 것이다.
“하룬 대장, 언제 떠나시려오?”
“일정이 빡빡해서 내일 일찍 떠나야 합니다.”
탄은 하룬의 말에 서운한 얼굴이 되었다. 너무 급하게 일이 진행되어 그조차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 오늘 저녁은 작게나마 축제를 열어 볼까? 티탄, 전사들을 소집해라. 먼저 너와 함께 돌풍 용병대원이 될 전사들을 뽑아야겠다. 제대로 된 실력이 없는 전사들은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이곳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티탄은 탄의 지시에 지체 없이 움직였다.
티탄이 나간 후 하룬은 탄과 원로들에게 치앙 카르에서 얻은 결계 주술을 알려주었다.
“정말 대장은 우리 부족에게 감당하기 힘든 은혜를 베푸는군요. 이 결계주술은 오래전부터 우리 산악 부족 모두가 얻고 싶어 했던 주술입니다. 일족을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아무 대가 없이 결계 주술을 알려주자 감격한 탄과 원로들은 자세를 바로 하고 하룬에게 최고의 감사 인사를 했다.
에인족 전사장 토르는 결심을 했다.
“모여 봐.”
부르카족 마을에는 수많은 횃불과 큰 모닥불이 피워졌고 많은 음식을 마련해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지만 에인족 전사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음식과 춤을 즐기며 마음에 드는 상대를 유혹해서 뜨거운 밤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축제에 앞서 하룬의 돌풍 용병대에 들어갈 전사들을 선발하는 과정을 지켜본 이후 에인족 전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제 마수를 사냥하던 때는 지났다. 오히려 우리가 놈들에게 사냥당하는 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는 이 데빌 산맥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토르의 말에 전사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치앙 카르에서 대규모의 마수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톡톡히 경험한 바가 있었다.
“나와 너희들은 일족을 지키고 돌봐야 하는 전사들이다. 우리의 가족들을 굶게 만드는 것은 전사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치! 나는 부르카족 전사들처럼 용병이 되고자 한다. 너희들의 의견은 어떠냐?”
토르의 말에 전사들의 눈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결정을 한 겁니까?”
“그렇다!”
“저 역시 전사장처럼 용병이 되겠습니다.”
“저도 용병이 되겠습니다.”
전사들은 모두 토르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런데 하룬 대장이 우리를 용병으로 받아 주겠습니까?”
한 전사의 말에 토르의 이맛살이 일그러졌다. 그게 토르가 내심 걱정하고 있는 문제였다. 그들은 아카족 전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심지어 활에 능하고 장대한 체구에 힘이 센 부르카족들에게도 조금은 손색이 있었다.
“우리는 데빌 산맥의 지형을 꿰뚫고 있으며 어느 부족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비록 무력은 약하지만 일단 돌풍 용병대원이 된다면 우리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내가 듣기론 아카족 전사들이 한 달 만에 실력이 두 배 이상 높아졌다고 한다. 우리 에인족의 특기인 인내와 부단한 노력으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 이야기는 모든 에인족 전사들이 다 알고 있었다. 아카족 대원 중 가장 막내인 타킴은 천성이 밝고 사교성이 좋아서 그를 통해 들었던 것이다.
“마을로 복귀하면 탄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게 부탁을 해야 한다. 탄이 부탁하면 하룬 대장도 들어줄 것이다.”
그들이 보는 하룬 대장은 예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부르카족의 탄과 원로 등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다.
“무엇보다 하룬 대장은 우리 에인족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탄까지 나서서 부탁을 하면 꼭 들어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마을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미리 마을로 출발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어릴 때부터 자신을 잘 따르는 라돈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내 말에 따라 주어 모두 고맙다.”
토르는 한마음으로 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전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누구는 자신에게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했지만 자신은 모두의 의견을 감안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선호했다.
“아닙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고 일족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어딘들 가리겠습니까?”
“안 그래도 아카족 전사들이 부러웠습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보다 늦게 용병이 되겠지만 언제고 에인족 전사들이 얼마나 쓸모가 많은지 꼭 보여 주고 말겠습니다.”
한마음이 된 에인족 전사들의 눈빛이 뜨겁게 빛났다.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 사이 하룬은 마을의 수뇌부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거래를 했다. 이후로는 돌풍 상단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거래를 할 거란 사실에 부르카족 마을은 보유하고 있는 마수 가죽과 마정석들을 모두 내놓았다. 다음 거래를 위한 것들은 이제부터 모으면 된다.
그동안은 마수들의 숫자에 비해 전사들 숫자가 부족해서 자제하고 있었지만 결계로 안전을 확보했고 인근 일족들이 모여들어 전사의 수가 몇 배로 늘었으니 이제부터는 마수 사냥이 가능한 것이다.
부르카족 마을을 떠나며 그곳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30명의 전사가 합류했다. 티탄을 비롯해서 선발된 대원들은 하나같이 장대한 체구에 엄청난 힘을 가진 전사들이었다.
아카족 대원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부르카족 대원들을 받아들였고 분위기도 무척 좋았다.
나흘을 더 가며 부르카족 대원들은 하룬에게 받은 강탄성궁과 철시에 적응했고 그 결과 때때로 나타나는 마수들과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이 무척 수월해졌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면 부르카족 대원들이 철시를 날렸고 가까워지면 아카족 대원들이 상대했다.
하룬은 순수한 힘과 궁술로 치면 도네이스보다 더 뛰어난 부르카족 대원들에게 만족했다. 도네이스와 마리라면 이들에게 마나 궁술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에인족 전사들은 그런 돌풍 용병대원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험준한 산 중턱의 폭포와 절벽으로 교묘하게 감추어진 곳에 위치한 에인족의 파트라 마을은 악스란트 마을처럼 인근에 있는 에인족들이 피난을 온 상태였다.
파트라 마을에 도착한 하룬은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 반나절 먼저 마을로 출발한 라돈과 세 전사가 이미 모든 사정을 알린 터라 따로 보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하룬은 몇 명의 대원들과 함께 에인족 탄을 비롯한 마을 원로들과 식사를 같이할 수 있었다.
전사들이 마수 가죽과 마정석으로 구해온 곡물로 조리한 소박한 음식과 신선한 과일 그리고 오래된 약초주로 식사를 마칠 때 에인족 탄이 용건을 꺼냈다.
“먼저 온 전사들에게 다 들었소.”
“뭘 말입니까, 탄?”
인자한 인상을 한 탄의 눈이 살짝 웃고 있었다.
“아카족과 부르카족 전사들이 하룬 대장이 이끄는 돌풍 용병대에 가입했다고 하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듣고 우리 마을도 돌풍 용병대에 전사들을 보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네에?”
하룬으로서는 너무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물과 창을 능숙하게 다루는 에인족 전사들의 실력은 아카족이나 부르카족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아 그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우리 에인족은 다른 산악 부족들에 비해 용맹하거나 강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끈기와 지구력이 강하고 한번 상대를 정하면 절대 놓치지 않는 집요함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소. 한번 써 보고 판단을 해주시오.”
“그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당장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우리 전사들은 다른 어떤 산악 부족들보다 데빌 산맥의 지리를 잘 알고 있소. 우리는 마수 사냥보다는 약초 채집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데빌 산맥은 훤히 잘 알고 있으니 대장에게 도움이 될 거요.”
약초라는 말에 하룬의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미 허벌 길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하룬이다.
“그럼 혹시 허벌 길드에 대해서 아십니까?”
“잘 알고 있소. 비록 우리는 그곳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을 통해 약초를 처리하기도 한다오. 뭐, 주로 그들이 원하는 희귀 약초를 구해주는 형태지만…….”
허벌 길드의 보물인 상세 지도책에는 데빌 산맥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버처리비크들이 공중에서 정찰한 것으로는 상세한 지형이나 지질을 파악할 수 없어 앞으로 데빌 산맥을 부대로 한동안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서 걱정을 했었던 하룬이기에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저 역시 허벌 길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룬은 지리를 잘 안다는 것을 감안해서 에인족 전사들을 대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호오! 그렇소? 이거 정말 인연이군.”
그 이야기가 나오자 자리의 분위기는 급격히 좋아졌다. 에인족들은 대부분 약초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름 약초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룬이나 레미와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날 오후 에인족 마을에도 작은 축제가 시작되었다. 무사귀환한 전사들뿐 아니라 마수들을 피해 살아남은 일족들을 환영하는 축제였다. 하룬도 참석해서 귀한 약조주를 즐기며 에인족 사람들이 추는 춤과 노래를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에인족 마을을 떠나는 하룬 일행은 142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곳에 남을 사람들을 놓고 에인족 전사 30명이 합류한 것이다.
“잘하신 거예요.”
환대를 받으며 탄툰 마을로 출발할 때 레미가 한 소리였다.
“뭘?”
“에인족보다 데빌 산맥에 대해서 더 잘 아는 부족은 없어요. 그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물론이고 맹수들이나 마수들이 다니는 길도 꿰고 있어요. 같은 장소라도 에인족 사람들과 동행하면 두 배는 빨리 갈 수 있다고들 말을 해요.”
“그래?”
레미의 말을 들으니 자신의 선택이 더 마음에 들었다.
부르카족 마을에서처럼 선금조로 150명의 1년분 식량과 의복 그리고 각종 무기를 마을에 내놓은 하룬은 산더미처럼 많은 각종 희귀 약초를 선물로 받았다. 더불어 마을이 보유한 마수 가죽과 마정석을 식량과 거래를 했다.
-마수들이 떼거리로 날뛰는 바람에 약초를 채집해도 상인들이 찾아오지도 않고 카르에 가도 제값을 받을 수 없어 쌓아둔 것이오. 부담 없이 받아주시오.
하룬은 사양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범용 약품 사업까지 벌린 터였다. 이곳 데빌 산맥에서도 희귀한 약초라면 많은 생명을 구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입이 귀에 걸리는 레미를 봐서라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