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전》
“다들 전투준비!”
미명이 찾아온 새벽 이른 시간에 하룬은 대원들을 소집했다.
“준비는 끝났어요.”
두르본이 치료소 앞에 대오를 갖춘 대원들을 대표해서 보고했다. 반나절 정도를 푹 쉰 대원들의 눈에는 생기가 흘렀다.
“지금 가는 겁니까?”
목책을 지키던 상카가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그와 대원들을 반겼다.
“그렇소. 이제 마수들이 잠이 들 시간이니 상대하기가 쉬울 거요.”
람비를 비롯한 마수들은 대부분 야행성이다. 물론 프로즐리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는 놈들도 있지만 일반적인 생태는 맹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장의 말이 맞더군요.”
하룬의 예상대로 지난밤에는 마수의 습격이 없었다. 하지만 상카를 비롯한 카르의 전사들은 그 말만 믿고 경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밤새 긴장을 했지만 여느 밤이라면 목책 주변을 몇 마리라도 어슬렁거렸을 마수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부디 흑마법사들과 마수들을 모두 다 잡아 죽이고 마법진을 부숴 주십시오.”
육중한 목책의 문을 열어준 상카가 무운을 빌어주었다.
“가자!”
돌풍 용병대원들은 하룬을 따라 얕은 오르막의 끝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원래는 카르가 필요한 목재들과 약초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난 수 주일에 걸친 마수들의 공격으로 이제는 공포의 장소로 변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하룬 일행의 발길은 가볍기만 했다.
-친구, 맛없는 놈들은 숲을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정보가 하늘에 떠 있는 미노로부터 전해졌다. 녀석들은 하룬이 준 마정석으로 인해 그 짧은 사이에 기운을 되찾은 것은 물론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녀석들도 그런 변화에 놀랐는지 어젯밤에 근처까지 날아와 호들갑을 떨며 그 사실을 알려 왔다. 그 참에 정찰을 부탁했던 것이다.
‘내 추측이 맞았군.’
흑마법사들이 마수들을 테이밍하는 도중이기 때문에 마수들은 명령이 없으면 근처를 떠날 수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테이밍이 풀릴 테지만 지금은 흑마법사들이 펼쳐놓은 넓은 흑마법진 안을 벗어날 수가 없다.
-미노, 숲을 벗어나 도망치는 놈들을 맡아줘. 수니도 부탁해!
-육포는 얼마나 줄 거냐?
먹성 좋은 미노는 대뜸 육포를 요구했다.
-세 자루씩 주지.
-크륵! 크륵! 좋다!
미노와 수니는 만족했다.
“디온, 대원 10명을 선발해서 남쪽으로 마수들을 몰아. 출발은 십 분 후다.”
숲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치투족들을 통해 숲에 대한 여러 정보를 들었던 것이다. 가장 긴 구간도 직선으로 달리면 십 분 정도 걸려 다른 쪽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마수들도 누군가에 쫓길 때는 엄폐물이 많은 숲을 선호한다는 디온의 말이 사실이라면 중간에 숲을 벗어나는 놈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놈들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버처리비크들의 밥이 될 것이다.
“네, 맡겨 주십시오.”
탄툰 마을 최고의 마수 사냥꾼이 디온은 자신 있는 태도로 대원들을 선발했다. 그가 고르는 대원들은 모두 빠른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다.
“람비의 발과 프로즐리의 힘은 내가 말할 때까지 쓰지 마라.”
디온의 말에 막 마수의 힘을 활성화시키려던 대원들이 움찔거렸다.
“옥세르는 활에 능한 대원 셋과 함께 먼저 출발해서 숲 남쪽 어귀의 적절한 장소에 대기하고 있다가 요격해라.”
“알겠습니다.”
옥세르는 자신처럼 덩치가 크고 강한 허리를 가진 대원 둘을 선발했다. 그들은 다른 대원들에게 철시들을 더 건네받아 어깨에 메고 빠르게 움직였다.
“두르본은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빠르게 숲을 돌아서 남쪽으로 가서 대기한다. 함정을 비롯해서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해라. 난 흑마법사들과 마법진을 맡겠다.”
두르본과 나머지 대원들은 람비의 발을 활성화시켜 숲을 따라 빠르게 달려갔다.
“자, 어디 내 일도 해볼까!”
하룬은 어제저녁 내내 마법진에 대한 마법서를 읽었다. 마법이라면 몰라도 마법진은 또 달랐다. 도형과 마나에 대해서 웬만큼 지식이 있으면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카르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역오망성의 한 변 길이가 약 2킬로미터는 되겠지.’
하룬은 펼쳐져 있을 흑마법진의 크기를 대충 짐작해 보고는 라이피를 소환했다. 틀림없이 마나석들이 일정 간격으로 땅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라이피, 땅속에 묻혀 있는 마나석을 찾고 있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면서 찾아봐 줄래?
-알았어, 친구.
라이피는 순식간에 땅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땅 거죽이 파도치듯 움직이며 이동했다. 그렇게 한참 하룬의 의도대로 움직인 라이피가 드디어 마나석을 찾아냈다. 불순물이 조금 섞인 하급 마나석이었다.
‘다크니스가 데빌 산맥에서 마나석 광산이라도 찾아낸 모양이군.’
하룬은 마나석의 상태를 보고 그렇게 추측했다.
‘이렇게 되면 자금에도 문제가 없다는 거네. 흑마법사들을 대량으로 양성하는 것도 가능하고.’
마법에 관계된 물품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마나석이다. 마나석 광산은 어느 국가나 예외 없이 국가에서 관리를 하며 황실 마탑과 황실에 소속된 장인들이 그 가공을 맡는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뒤지는 터라 비싸기도 하지만 국가에서는 되도록 마나석을 시장에 많이 내놓지 않는다. 마나석으로 마탑들을 제어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어느 때나 사설 광산은 존재했다. 영주들이나 귀족들 중에는 황실에게 마나석 광산을 바치지 않고 비밀리에 채굴하는 자들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다른 광석도 아니고 마나석이라면 단숨에 막대한 재물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 제대로 가공되지 않아 불순물이 섞인 마나석이 유통되는 것이다.
하룬은 다크니스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세력이 되었음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마나석 광산까지 소유하고 있다면 앞으로 그 세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특히 마법사 전력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하룬이 생각에 빠진 사이에도 라이피는 마나석이 발견된 곳을 중심으로 움직여 드디어 다른 마나석을 찾아냈다. 전에 발견한 마나석과는 약 10미터의 간격을 두고 묻혀 있었다. 마나석들이 이어진 방향과 그 거리를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다.
마법진을 구동할 흑마법사들이 사라진 상태라 마법진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부지런히 움직여 열다섯 개의 중급 마나석과 백오십 개의 하급 마나석을 캐냈을 때 마침내 마법진을 이루는 핵심 포인트를 찾을 수 있었다.
“오오! 이건 최상급 마나석이다.”
광대한 지역에 펼쳐진 대형 마법진이다 보니 마나석의 숫자나 그 질이 상상을 뛰어넘었다.
흑마법진을 구성하던 한 축이 사라지자 카르의 모습이 엷어지기 시작했다. 흑마법진의 영향으로 깨진 결계가 다시 작동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이피는 더 빨리 움직이며 마나석들을 찾아 땅 밖으로 토해냈고 카르의 모습은 어느 순간부터 눈에서 사라져갔다.
마침내 먼 거리를 이동해서 가장 외곽에 해당하는 선을 따라 땅에 묻힌 마나석들을 모두 캐내자 드디어 높은 목책으로 둘러진 카르가 완전히 사라졌다.
혹시 중첩이 되어 있는 마법진이 있을까 봐 꽤 넓은 반경의 땅을 라이피로 하여금 뒤지게 만들었지만 더 이상 나오는 것은 없었다.
‘가장 단순한 흑마법진이었군.’
어느새 카르 상공에 넓게 퍼져 있던 엷은 먹구름도 사라지고 없었다.
“아!”
잊고 있었다. 대원들이 마수를 상대하고 있는 것응ㄹ 말이다. 다른 마수들이라면 몰라도 괴력을 가진 프로즐리는 대원들의 힘으로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놈들이 아닌가? 테이밍의 주체가 죽어 버린 터라 제대로 본신의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자칫 흉성이 터지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마수였다.
하룬은 메신터 패스트 스킬을 펼쳐 숲을 향해 날아갔다.
아까 대원들과 헤어진 숲의 입구에 들어선 하룬은 빠른 동체 시력과 연체동물처럼 유연한 움직임으로 나무를 비롯한 장애물들을 피해 빠르게 달려갔다.
숲 중앙에 도착했을 때 첫 번째 마수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철시에 맞았군.’
머리통에 철시를 박은 람비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이후로 간간이 마수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몰이를 하던 대원들이 날린 철시에 맞은 놈들이다. 워낙 사냥을 하던 아카족 대원들이라 프로즐리의 힘이 아니더라도 강탄성궁과 철시로 람비나 브롤프 그리고 슬로크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다.
숲이 끝나려는 듯 나무 사이가 훤하게 보이는 곳에 이른 하룬은 수십 마리의 마수가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몇 마리는 올무와 비슷한 것에 걸린 채 죽어 있었고 몇 마리는 깊이 파인 땅 구덩이 속이나 그 옆에서 죽어 있었다. 아마 옥세르는 그 짧은 시간에 올무와 구덩이를 팠던 모양이다.
다른 마수들은 철시에 의해 죽어 있었다. 관통된 부위가 머리나 등인 것을 보면 아마 나무 위에서 함정을 만나 당황하던 마수들을 향해 직사해서 쏜 모양이다.
마침내 숲 밖으로 나온 하룬은 모든 대원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마수들과 엉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죽엇!”
“타앗!”
크아앙!
이건 완전히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타킴을 비롯한 몇 명의 대원은 엉망이 된 모습으로 피로 흠뻑 젖은 풀 속에 마수들과 함께 누워 있었고 나머지 대원들은 사력을 다해 마수들과 싸우고 있었다.
‘제기랄!’
하룬은 자신들이 처리하고 남은 마수의 수가 목책의 정문을 공격했던 이백여 마리가 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쓰러진 마수들을 빼고도 대원들을 향해 날뛰는 마수들은 이백여 마리에 달했던 것이다.
자신이 도착한 짧은 순간에도 2명의 대원이 마수들의 앞발에 가격당해 구슬픈 비명과 함께 날아갔고 대부분의 대원들이 피범벅이 되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두르본과 옥세르 그리고 디온이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프로즐리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워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몇 명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대다수의 대원들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이건 정령들을 동화시킨 비수를 던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크흑! 내 실수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추측으로만 무모한 계획을 세운 나 때문에 대원들이 죽어가고 있어!’
하룬은 달려가면서도 가슴이 찢어졌다.
“아악!”
평소 과묵해서 아직 그도 따로 말을 나눠 본 적도 없는 해트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는데 그의 어깨는 브롤프의 커다란 아가리 속에 들어가 있었다.
“으아아아아~!”
할누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순간 마나 오션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끈끈하고 어두운 성질의 마나가 급속도로 빠져나와 마나 로드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머리 위로 세 개의 뿔이 솟아나더니 투구의 뿔 속을 채우고도 모자라 그 끝이 튀어나왔다.
전신에 새겨진 마수의 문양들이 일제히 커지며 하룬의 온몸을 뒤덮었다. 이내 그의 키가 머리통 하나는 더 커지며 덩치도 커졌다. 터질 것 같은 근육들이 마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찢어버릴 듯 압박했고 검은색으로 변한 얼굴 역시 흉신악살처럼 바뀌었다.
하룬이 지른 고함에는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을 들은 대원들은, 용케 한 줄기 투기만을 남겨 놓고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한 그들의 눈이 까무룩 감기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마수들의 몸이 갑자기 굳었다.
하지만 이내 온몸의 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하룬을 향해 흉광凶光을 토하며 접근하기 시작했다. 람비와 브롤프 그리고 슬로크와 프로즐리마저 그 행렬에 동참했다.
“카아아!”
하룬은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마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회백색 오러에 휩싸여 두 배는 더 커진 박살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싸악! 싸악!
박살의 궤적에 걸린 마수들의 사지가 마치 치즈처럼 가벼운 소성과 함께 베어졌다.
크아앙!
캐액! 깨앵!
춤을 추듯 움직이는 하룬의 손에 들린 박살은 덤벼드는 마수들을 향해 잔상을 남길 정도의 빠르기로 움직였다.
까앙!
싸악!
프로즐리 한 마리가 박살의 오러를 피에 젖은 발톱으로 쳐냈지만 어쩐 일인지 놈은 그 충격으로 넘어질 듯 물러나고 있었다. 하룬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박살을 휘둘러 두터운 허리를 반 이상 잘랐다.
크르르!
하지만 프로즐리는 자신이 베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하룬의 머리통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지만 하룬은 놈의 옆을 지나가며 목덜미를 베어 버렸다.
쿠웅!
프로즐리는 그것도 모르고 옆을 지나가는 하룬을 따라 머리를 돌리다가 그만 머리통이 몸통과 분리되어 쓰러졌다.
‘굼떠! 더 빨리 움직여 봐!’
하룬은 마수들의 움직임이 너무 느려 갑갑증이 들 정도였다. 대원들을 그렇게 피투성이로 만들었던 실력을 보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건 너무 쉬워!’
마수가 이백여 마리나 된다지만 바람처럼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며 박살을 휘두르는 하룬의 움직임을 감당할 마수는 없었다. 프로즐리만이 겨우 그의 공격을 몇 번 맞받아칠 뿐 결국은 박살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
‘모두 다 죽여버릴 거야!’
참을 수 없는 살기로 온몸이 너무 간지러웠다. 어떻게든 속에서 근질거리는 것을 배출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먼저 죽어버릴 것 같았다.
하룬은 본능적으로 얼마 전 처음으로 시도했던 마나의 폭발을 펼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마나 오션을 양분하고 있던 이질적인 두 마나를 충돌시켰다.
꽈앙!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하룬의 정면으로 쇄도하던 열댓 마리의 마수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날아갔다. 이질적인 성질의 마나를 충돌시켜서 그런지 그 위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시원해!’
이제야 뭔가 방법을 찾은 느낌이다.
하룬은 방향을 돌려 디스펄션 소드를 개량하여 익스플로젼 소드라고 명명한 스킬을 연속해서 펼쳤다.
꽈앙! 꽈앙! 꽈앙!
폭발음이 그쳤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을 가득 채운 피와 육편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남은 마수들의 숫자는 십여 마리에 불과했다.
‘큰일이다!’
미칠 듯 격렬한 감정에서 빠져나온 하룬의 이성은 텅 빈 마나 오션을 감지하고 있었다. 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쓰레기통을 뒤지던 시절 보름이 넘게 변을 보지 못하다가 한번에 다 털어낸 것처럼 속은 후련했지만 아직 상대할 놈들이 남아 있었다.
‘할 수 없다!’
이 상태로는 마수들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하룬이 막 정령들을 소환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급속도로 마나 오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살에도 어느새 짙은 회색의 오러가 솟아났다.
‘마나 스토리지?’
마나 오션을 채운 마나는 백팔 개에 달하는 마나 스토리지에 저장되어 있던 것이다. 이런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마나 오션이 가득 차자 다시 익스플로젼 소드를 펼치는 하룬이다.
꽈앙!
박살의 검첨에 생성된 회색 구슬이 폭발하여 그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짓쳐 드는 마수 네 마리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이번에는 마나 오션에 한 가닥 의식을 남겨 놓았던 하룬은 빠져나간 만큼의 마나가 거의 동시에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수들의 사체들로부터 회색 아지랑이가 솟아나와 그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다크 마나는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하룬은 쾌속하게 몸을 날려 나머지 마수들을 향해 메신저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룬은 자연스럽게 검로를 밟으면서도 발바닥과 정수리에 열감이 느껴지며 급속도로 유입되는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마나는 회색 일색인 마나와 섞이며 오러의 색을 회백색으로 바꾸고 있었다.
남은 마수들을 모두 처치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박살의 오러 날이 사라졌을 때 그의 몸은 완전히 검게 변한 정체 모를 마나의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다른 종류의 마나다. 그 성질을 보아서는 다크 마나와 비슷하지만 순수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봤을 때 그건 아니야.’
지혜의 파편에 의하면 다크 마나는 안정을 이루고는 있지만 언제든 폭발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크 마나를 다루는 자들의 화급한 성격에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며 변덕이 심하다고 했다.
지혜의 파편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 모종의 마나는 본래 후크란 산맥에서도 우연히 목격했던 럼프 오크족의 의식 중에 그들이 기사들을 제물로 해서 만들어낸 것으로 자신의 손등에 문신과 같은 문양을 남기며 자리를 잡았고 어제는 몸 전체로 커졌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마성에 젖은 존재를 죽이면 그 존재의 사체로부터 이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한 걸까?’
하룬은 마수들의 육편과 피가 널린 참혹한 전장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자신이 가지길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능력이 되어버린 정체 모를 마나에 대해서 생각에 빠졌다.
마수들의 사체에서 나온 마나는 흑마법사들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아 어느새 모두 하룬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 마나들은 이내 마나 스토리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이럴 때가 아닌데.’
문득 정신을 차린 하룬은 대원들을 향해 날아갔다.
‘제발! 제발 죽지만 마라!’
자신의 오판에 의해서 대원이 죽었다면 정말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대가를 더 받아내려고 대원들의 죽음을 운운했던 자신의 경망한 말을 떠올린 하룬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진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대원들을 전장 밖으로 조심스럽게 옮긴 하룬은 일일이 대원들의 경동맥을 짚어 생사를 확인했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다행히 모든 대원들이 살아 있었다. 비록 팔다리가 통째로 뜯겨 나가고 마수의 우악스러운 발톱에 방어구와 피부가 찢어져 내장이 밖으로 나오는 심각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한 가닥 숨결은 느껴졌다.
하룬은 서둘러 떨어져 나간 대원들의 팔다리를 찾아 한쪽에 모았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상급 포션을 되는대로 꺼내 놓았다. 상급 포션이라면 비록 절단된 것이 아니고 뜯긴 것이라 깨끗하게 붙지는 않겠지만 원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나이아, 빨리 상처 부위를 정화시키고 지혈을 해줘.
너무 급한 나머지 그냥 대화하듯 의사를 전했지만 나이아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타나 대원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상처 부위를 정화시키고 지혈을 했다.
나이아 덕분에 대원들의 상처 부위는 지혈이 되었다. 소득과 지혈이 급해 치료 진동은 하지도 못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치료를 해야만 했다.
“대장!”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보니 레미가 달려오고 있었다.
위험하니 절대 쫓아오지 말라고 카르에 남겨두었는데 기어코 나온 모양이다. 다른 때라면 뭐라고 한 소리 했겠지만 지금은 그녀만큼 반가운 사람이 없었다.
“빨리 와!”
“헉! 헉! 세상에, 맙소사!”
레미는 대원들의 처참한 모습에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설마……?”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험한 상태야. 빨리 치료해야 해!”
“알았어요. 그럼 대장은 먼저 환자들의 피를 멈추게 하고 상처 부위를 소독해줘요. 아! 이미 했군요.”
하룬은 대답할 새도 없이 서둘러 다른 대원을 찾았다.
“흑! 이걸 어째! 한쪽 갈비뼈가 다 부러지고 팔이 떨어져 나갔어. 흑! 흑!”
레미는 팔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고 옆구리가 함몰된 디볼라를 보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진정해, 레미!”
하룬이 레미의 어께를 마구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나이아에게 치료 진동을 부탁했다.
곧 디볼라의 함몰된 옆구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이아가 진탕된 내장과 제자리에서 이탈한 뼈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부러진 뼈에 찔린 장기들의 출혈도 말끔하게 치료된 상태였다.
“이제 디볼라의 팔을 가져와. 상급 포션을 꺼내 놓았으니 떨어져 나간 팔을 붙이고 그 사이에 부어! 그럼 붙을 거야. 완전하게 이전 상태로 회복되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팔을 쓸 수 있어.”
용병 아카데미에서 실습은 못했지만 그 과정은 모두 배운 하룬이다. 용병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후유증이 별로 남지 않는 치료제보다는 즉효성이 강한 대신 수명이 짧아지는 단점을 가진 포션에 많이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가능해요? 정말요?”
“그래.”
레미는 하룬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하룬이 찾아와서 깨끗하게 정화시킨 디볼라의 팔을 뜯겨 나간 자리에 맞추었다. 하지만 그 부위는 정확히 들어맞지 않았다. 어깨 근육 일부가 다른 곳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레미가 울상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을 본 하룬이 달려와 시범을 보였다. 처음 해보는 일이고 대원이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는 일이기에 부담이 컸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창백한 디볼라의 얼굴을 본 하룬이 이를 악물었다.
팔을 어깨 부위에 최대한 맞춘 하룬은 손가락 크기의 상급 포션의 코르크 마개를 뽑았다. 안에는 너무 맑아서 파랗게 보이는 포션이 아주 조금 들어있었다. 팔을 붙인 부위에 조심스럽게 포션을 붓자 금방 그 부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손상된 살 부위에 새로운 살이 생기기 시작했다.
“된다! 돼요, 대장!”
뼈와 신경을 잇고 새로운 살을 돋게 만드는 상급 포션의 효능을 처음 본 레미는 연방 탄성을 지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포션의 기능이 생명력을 미리 끌어다 쓰는 것인지……. 포션을 많이 쓰면 수명이 현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말이다. 나중에 들으면 많이 슬퍼할 것이다.
생명력과 상관없이 치료를 해주는 것은 신성력이 유일했다.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룬은 멍청한 자신을 탓하며 아공간에 넣어둔 성배를 꺼내 단숨에 성수를 만들었다. 하룬이 그 성수를 디볼라의 입을 벌리고 몇 방울을 떨어뜨리자 목을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어갔다.
하룬은 혹시 몰라 디볼라의 다른 상처 부위에 성수를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상처 부위는 금세 상처가 아물고 새로운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성수는 상급 포션만큼은 아니지만 강력한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마수에게 당한 상처라서 그런가?’
그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런 멍청한!’
어쩌면 성수는 흑마법사에게 테이밍당한 마수들을 상대하는 데도 큰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흑마법사에게 얻은 마법서에 의하면 마수를 테이밍할 때 흑마법사가 자신의 마나를 마수에게 주입시키는 과정이 나와 있었다.
모든 사악한 것에 상극인 성수라면 테이밍 그 자체를 풀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수에게 어떤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꼭 써 봐야겠다!’
흑마법사에게 테이밍당한 마수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방금 전의 전투를 통해서도 통감한 하룬은 놈들을 상대할 전략적인 무기를 찾은 것 같아 가슴이 설레었다.
‘가만, 어쩌면 나도?’
만약 정체 모를 마나가 좋지 않은 것이라면 성수의 힘과 반발을 할 것이다. 하룬은 떨리는 손으로 성배 가득 담긴 성수를 마셨다. 잠시 기다렸지만 그가 기대했던 그 어떤 반응도 일어나거나 느낄 수 없었다.
‘엥! 도대체 뭐지? 그냥 몸 상태만 좋아지는 것 같은데.’
정체 모를 마나 때문에 마음을 쓰고 있었던 하룬은 성수가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포션이에요? 상처 부위가 급속하게 아물고 새살이 돋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요.”
포션을 써서 치료했던 디볼라의 어깨 부위를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던 레미가 놀라 소리쳤다.
하룬은 생각하지 못했던 성수의 효과에 놀라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른 대원들도 빨리 치료하자.”
“네, 대장! 상급 포션만 있으면 문제없어요.”
레미는 상급 포션이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쁨에 들떠 있었다.
‘휴우! 얼마나 흉험한 싸움이었으면 이렇게 의식을 못 찾을까?’
그러고 보니 남은 대원들은 오직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며 정신력을 버틴 것 같았다. 자신을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대원들의 마음을 생각하자 가슴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레미의 적절한 치료와 포션 그리고 성수로 인해 대원들의 치료는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팔과 다리가 뜯어졌던 4명의 대원의 팔다리를 붙였고 뼈가 부러진 대원들은 나이아가 몸 안으로 들어가서 부러진 자리를 붙이고 포션을 그 부위에 부어 치료를 했다.
“에효! 이 언니는 또 흉이 지겠네.”
돌아보니 레미가 마수의 발톱에 한쪽 볼이 길게 패인 두르본의 얼굴을 매만지며 한탄을 하고 있었다.
“치첸 오빠가 또 뭐라고 하곘네.”
아무리 전사라도 여자인데 하루도 성할 날이 없으니 그 애인의 마음은 늘 걱정에 차 있을 것이다. 만약 아리가 저런 상황이라면 자신은 절대로 밖에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흉터가 보기 흉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는 것을 절대로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두르본을 마지막으로 모든 대원들의 치료가 끝났다.
“그렇게 멋졌던 방어구가 이젠 완전히 넝마 수준이네. 에고야!”
레미가 나란히 눕혀 놓은 대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한탄을 했다. 정말 아직도 성한 방어구를 입고 있는 것은 레미가 유일했다.
혹시 몰라 하급 포션을 반으로 나누어 성수 몇 방울과 함께 먹인 터라 대원들의 경과는 급속하게 좋아졌다. 포션과 성수가 조혈造血 작용까지 촉진하는지 창백하게 질렸던 대원들의 얼굴이 빠르게 제 색으로 돌아오고 있어 노심초사를 하던 하룬은 적이 안심했다.
“여기서 꼼짝 말고 대원들을 치료해, 레미!”
“왜 어디 가려고요?”
“마정석을 찾으려고.”
하룬은 처참했던 전장으로 향했다. 외투형 방어구 자락과 부츠는 아까 나이아가 깨끗하게 씻겨 주었지만 금방 풀에 흥건하게 묻어 있는 피와 육편으로 더러워졌다. 뼈와 살이 밟히는 감각은 무척이나 불쾌했지만 그래도 전리품을 챙길 생각에 하룬은 눈을 크게 뜨고 전장을 살폈다.
마정석이 뿜어내는 기운은 이제 익숙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굳이 마수의 힘을 활성화시키지 않아도 그 정도는 감지할 정도로 오감이 민감해진 것이다.
‘가죽은 쓸 만한 것이 거의 없구나.’
치열했던 전투를 말해 주듯 죽은 마수들의 가죽들은 성한 것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상대한 마수들의 경우는 더 심해서 가죽은 아예 바랄 수도 없었다. 그나마 보석만큼 견고한 마정석들은 산산조각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모종의 마나를 자신에게 빼앗겨서일까 마수들의 사체는 강렬한 햇볕에 말라붙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가죽 장인이 와서 손을 쓴다고 해도 제대로 된 상품은 만들어낼 수 없을 것같이 쭈글쭈글 말라 버린 것이다. 하룬은 자신이 괴물이 된 것 같아 가슴이 섬뜩했다.
‘휴우! 하긴 괴물은 괴물이지. 화가 나거나 이성을 잃으면 머리에 뿔이 솟아나고 죽인 상대의 사체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을 흡수하니.’
자신이 생각해도 인간 같지 않았다. 점점 더 심하게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마나 플로도 돌리지 않았는데 마나 오션에는 어느새 익숙한 자연의 마나가 정체 모를 마나와 함께 똬리를 튼 채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지? 이제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자연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게 도니 것일까?’
하룬은 정체 모를 마나에 대한 반발로 본래 쌓았던 자연의 마나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놀라운 속도로 흡수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흐업!”
“세상에!”
치투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풍 용병대를 돕겠다고 카르를 나와 숲을 따라 이동하며 주변을 뒤지던 부르카족과 에인족 전사들은 숲을 빠져나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수들의 사체가 널려 있는 전장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쉽게도 전투는 이미 끝나 있었다. 한눈에도 심상치 않은 부상들을 입은 돌풍 용병대원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줄지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의 앞쪽에는 그야말로 시산혈해가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마수가 죽어 있는 걸 본 것은 처음이야!”
“설마 이 많은 마수들을 저들이 다 죽인 거야?”
티탄은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카족들이 뛰어난 마수 사냥꾼이라는 것은 인정을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마법 스크롤이라는 것을 쓴 것 같은데.”
“맞아. 절반 이상은 강력한 마법에 의해 전신이 갈가리 찢겨 죽었어.”
그래도 아카족 아니 돌풍 용병대원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숲 안에서 ㅈ구은 마수의 숫자만 해도 마흔 마리는 넘었고, 숲 밖에도 그 정도의 마수 사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적절하게 마법 물품을 사용하는 것도 능력인 것이다.
“여긴 어떻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레미였는데 그녀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하긴 했지만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하룬의 강권에 상급 포션을 마신 레미는 걱정과 근심 그리고 치료로 인해 생긴 피로감을 모두 떨쳐 버린 상태였다.
‘설마 이렇게 많은 마수를 죽이고도 1명도 죽지 않았단 말인가?’
티탄은 얼른 놀란 표정을 지우고 레미를 보았다.
“우리도 작은 힘이나마 도우려고 나섰는데…… 이미 끝난 것 같군.”
“네, 다행히요.”
“마수들은 다 죽은 건가?”
“아마도요. 대장이 근처를 돌아보고 온다고 했으니 살아 남은 놈들이 있어도 결국 다 죽고 말 거예요.”
“으음!”
티탄은 천역덕스럽게 대답을 하는 레미에게도 또 한 번 놀랐다. 남은 마수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자신들의 대장이 다 없앨 것이라고 그녀는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도울 일은 없나?”
“있어요. 숲 안으로 들어가 보면 마수들의 사체가 있어요. 이곳에 있는 녀석들의 가죽은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벗겨낼 가치도 없지만 그것들은 달라요.”
레미의 말대로 이곳에 있는 마수들은 그야말로 넝마 수준으로 난자되어 있는 상태였다.
“가죽과 마정석을 원하는 건가?”
“네. 우리 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잡은 것들이니까요.”
“맞다. 아카족 전사들은 전리품을 취할 자격이 충분하다. 우리가 해주겠다.”
“고마워요. 그리고 간 김에 철시들을 좀 수거해 주세요. 무척 비싼 것이거든요.”
티탄은 자신의 부족 전사들과 에인족 전사들을 이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 들어가지 않아 덫에 걸리고 구덩이에 빠진 채 철시를 맞고 죽어 나자빠진 마수들의 사체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마수 사체만 해도 무려 서른 구가 넘었다.
“티탄, 이것들을 정말 아카족 전사들이 다 죽인 겁니까?”
한 전사의 말에 티탄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덫도 그렇게 구덩이를 이중으로 판 것도 아카족 특유의 방식이 분명했다. 믿기지 않지만 모든 상황이 아카족 전사들이 다른 조력자 없이 이 모든 마수들을 상대해서 죽인 것은 분명했다.
“이 화살 정말 굉장하네요. 마수의 몸을 관통한 것은 물론이고 촉도 전혀 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전사 하나가 마수의 몸통을 꿰뚫은 철시를 보고 감탄했다.
“와! 도대체 이렇게 강하고 긴 화살을 쏘려면 활이 얼마나 커야 하는 거야?”
티탄은 그 말에 철시를 살폈다.
‘강철로 만든 화살이다. 촉의 예기가 전혀 손상되지 않은 것을 보니 수백 번 정련을 한 것이 틀림없어. 아카족 전사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런 화살을 얻은 거지? 그들의 대장이 구해 준 것일까?’
다른 산악 부족에 비해 원등한 궁술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화살로 마수를 사냥하는 부르카족 전사장답게 그는 철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축을 하는 내내 철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법사도 없던데 어떻게 이 많은 마수들을 상대한 거지? 스크롤은 마수 가죽 수십 장으로도 사기 힘들 정도로 비싸다고 하던데 그게 그렇게 많은 걸까?’
마법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세상 경험이 많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주문을 외우면 머리통만 한 불덩이가 날아가고 허공에 화살이 만들어져 도망을 치는데도 쫓아가기도 한다. 바람의 칼을 만들기도 하고 불의 벽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마법사들은 용맹하기로 소문난 티탄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돌풍 용병대에는 마법사는 없었다. 대장인 하룬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카족 전사들이다. 스크롤의 가치를 생각하면 스크롤 역시 많이 보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 대장이라는 자의 실력이 엄청나다는 것이지.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아카족 전사들이 선뜻 그의 수하로 들어간 것을 보면 맞을 거야.’
아카족 전사들은 자신의 부르카족처럼 강하고 용기 있는 전사를ㅇ 숭배한다. 험악한 데빌 산맥에서 마수를 상대하며 가족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실력이 최고의 선이었던 것이다.
‘대원들에게 이런 귀한 물건들을 아낌없이 줄 수 있다면…….’
티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어쩌면 우리 마을의 전사들도 그를 따라야 할지 몰라.’
마수들의 위협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과일이나 약초를 채집하기 위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힘들여 잡은 마수의 가죽과 마정석만으로는 일족의 식량을 대기도 빠듯하다.
‘마을의 어르신들은 어려운 시간이 언젠가는 간다고 묵묵히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지만 난 기다릴 수가 없다. 내 아이들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먹을 것이 없어 고통받는 아이들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 아팠다. 아이를 낳아도 물릴 젖이 부족한 여인네들을 보는 전사들의 가슴은 피멍이 들고 있었다.
티탄은 타고난 전사인지라 아카족들이 가진 무기들과 방어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찢기고 뜯어지긴 했지만 마수들의 강력한 발톱을 무사히 견디게 해준 멋진 방어구와 잘 정련된 무기들만 있다면 부르카의 전사들도 마수들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철시와 이걸 당길 수 있는 강력한 활만 있다면 부르카족 전사들의 전력은 두 배는 올라갈 것이다. 부르카의 아이들은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활대와 시위를 가지고 노는 자랑스러운 전사들이다.
부르카족과 에인족 전사들이 숲에서 돌아오기 전에 돌아온 하룬은 레미로부터 그들이 돕기 위해 왔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이나 기꺼웠다.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고 그들은 카르에 웅크리고 있는 치투족과는 달리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돕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이제 돌아가겠다.”
“하지만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해요. 게다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는데…….”
“그럼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자. 그리고 대원들을 옮기는 것은 들것을 만들면 돼.”
“마침 부르카족과 에인족 전사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왔으니 잘됐네요.”
하룬은 숲으로 돌아가 들것을 만들 나뭇가지들을 구해왔다. 그리고 난자되어 상품 가치가 없는 가죽을 벗겨 손질해서 들것을 만들었다. 손재주가 좋은 레미는 하룬이 가죽에 구멍을 뚫어주면 마수들의 힘줄로 손봐서 나무에 고정시켰다.
그렇게 들것을 만들고 있을 때 티탄이 전사들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그들은 품에 한가득 마수들의 가죽을 벗겨 안고 있었다.
“하하하! 도와주러 왔다고 들었소. 고맙소!”
“전사는 두려움을 맞서 상대하는 자들이오. 우리는 용기 있는 아카족 친구들을 언제나 존경하고 있습니다.”
티탄은 하룬을 향해 경외를 가득 담은 눈빛을 보냈다.
“맞소. 용기 있는 전사는 존중받아야 마땅하오. 거기에 더해 죽을 위험을 알면서도 친구를 돕기 위해 안전한 곳을 떠나 이곳까지 와 준 부르카족 전사들과 에인족의 전사들 역시 진정한 전사의 자격이 있소. 진정한 전사들을 사귀게 되어 너무 기쁘오!”
죽기 십상인 상황이지만 부족의 환자를 치료해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낸 이들이다. 하룬은 진정으로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 현실에도 이런 이들이 있다면 서슴없이 친구가 될 것이다.
하룬의 말에 티탄과 에인족 전사장 토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자신들로서는 그 경지를 감히 추측도 할 수 없는 강자인 하룬이 그들을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이곳까지 온 전사들의 얼굴에 강한 자부심이 드러났다.
“부르카족과 에인족은 이제부터 이 하룬과 돌풍 용병대의 친구요!”
하룬의 말에 티탄과 토르 역시 호기와 강한 호감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났다.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는 이제부터 우리 부르카족의 친구가 될 것이오.”
“우리 에인족 역시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를 우리의 친구로 받아들이겠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하룬을 향해 두툼한 가슴을 내밀었다. 둘 다 엄청난 거구였기에 키가 맞지 않았지만 심장 부위를 두 번 강하게 마주치고 나니 그 부위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퍼졌다.
“자리가 좀 그렇기는 한데 우리 대원들이깨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니 여기서 한잔하겠소?”
“술? 술이 있소?”
술이라는 말에 토르가 펄쩍 뛰며 좋아했다.
“용병들이 최고로 치는 쓰로파이어가 몇 병 있소.”
하룬은 아공간에 쟁여 두었던 쓰로 파이어 세 병을 꺼냈다. 그리고 작은 유리잔까지.
두 전사는 물론이고 내심 기대하고 있던 다른 전사들도 작은 병과 엄지 크기의 작은 유리잔에 실망하는 얼굴이었다.
“이건 이곳 데빌 산맥의 전사들에 해당하는 용사들도 연거푸 세 잔을 마시기 힘든 술이오. 일단 한 잔씩 받으시오. 우리를 돕기 위해 와준 데에 다시 한 번 감사하오.”
하룬은 티탄과 토르를 비롯해 모든 전사들에게 쓰로 파이어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것만으로 한 병이 바닥을 보였다.
“칫! 대장, 난 안 줘요?”
“아! 잊고 있었어. 하하하! 레미도 이젠 제법인데. 먼저 술을 다 찾고.”
“아카족 전사들은 남녀가 따로 없다고요. 게다가 지난번에 그 술 두 잔 먹고 곯아떨어진 게 억울해서 오늘은끝장을 봐야겠어요.”
레미는 치료가 힘들었는지 일부러 활달하게 행동했다. 가족과 같은 대원들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처참한 꼴을 봤으니 영향이 없을 리가 없다.
하룬은 한 잔 가득 독한쓰로 파이어를 따라 주었다. 잔을 채운 레미가 이번에는 자신이 하룬의 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을 때 티탄이 끼어들었다.
“잠깐! 대장의 잔은 내가 채우겠소. 그래도 되겠소?”
“친구가 따라주는 술을 어떻게 거절하겠소. 하하하!”
티탄은 친구라는 말이 마음에 드는지 연방 친구라는 말을 되뇌며 술을 따랐다.
쪼르르.
청아한 소리와 함께 맑고 투명한 쓰로파이어가 잔을 채웠다.
“전사들도 우리 용병들처럼 마시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들었소. 하지만 우리 용병대는 거기에 더해 마지막 말을 따라하며 술을 단숨에 마시는 전통이 있소. 내가 먼저 말할 테니 뒷말을 따라 하시오.”
하룬의 말에 전사들이 잔을 높이 들었다.
“잠깐!”
그 순간 뜻밖의 소리가 건배를 방해했다.
“쓰로파이어를 날 빼놓고 마시다니! 대장,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프로즐리를 세 마리나 잡은 나 옥세르를 이렇게 눕혀 놓고.”
술을 좋아하는 옥세르답게 술 냄새가 나자 의식을 차린 것이다.
“으으. 나도 한 잔 주십시오, 대장. 프로즐리의 입 냄새를 너무 오래 맡았더니 코가 마비가 된 것 같습니다.”
디온이 악을 쓰며 상체를 일으켰지만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나올 정도로 온몸이 엉망이었지만 딱 두 번 만에 반해버린 쓰로파이어의 향에는 더 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안 돼요! 상처에는 좋지 않단 말이야.”
날이 선 레미의 말에 디온과 옥세르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부탁했다.
“레미, 제발!”
“그래, 우리 딱 한 잔만 마실게.”
어지간히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결국 하룬이 나섰다.
“그래, 디온과 옥세르야 당연히 마실 자격이 되지. 만약 상처가 덧나면 내가 책임지지. 하지만 한 잔 이상은 안 되는 거 알지?”
“하하, 커억! 윽! 당연하지요.”
“으윽!”
두 사람은 고통의 신음을 토하면서도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은 두 사람에게 쓰로파이어를 채운 잔을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덜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잡고 잔을 들어 올렸다.
“부르카족과 에인족 그리고 아카족이 진정한 친구가 된 것을 기념하며 건배를 청하오. 친구여, 영원하라!”
“친구여, 영원하라!”
“친구여, 영원하라!”
전사들은 소리 높여 건배를 청하며 단숨에 술을 목으로 넘겼다.
“카아악!”
“크윽!”
“허억!”
겁 없이 쓰로파이어를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은 사람들의 입에서 각양각색의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개중에는 레미처럼 자신의 목을 붙잡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이들도 있었다.
쓰로파이어는 입안과 목을 거쳐 속으로 들어가며 결국 온몸을 불구덩이가 들어간 것처럼 뜨겁게 달구었다. 열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지며 전신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와우!”
“후우우!”
입을 벌리자 속을 태운 열기가 빠져나오며 근심과 걱정 그리고 스트레스가 한 방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열기는 아직도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고 몽롱해지는 것이 긴장이 확 풀렸다
“멋진 녀석이군!”
“끝내주는군요!”
얼굴이 벌겋게 변한 티탄과 토르는 아쉬운 듯 혀로 입술을 핥으며 하룬을 향해 엄지를 쳐들어 모였다. 맹세코 이런 술은 처음이었다. 마츠루트 요새까지 몇 번이나 가보았던 그들이지만 이런 술은 처음 마셔본다.
“이 조그만 병이 20골드나 되니 엄청나게 비싸기는 하지만 이런 뜻깊은 자리에는 무척이나 어울리는 녀석이에요. 자, 한 잔씩만 더 합시다. 내가 가져온 것이 조금 더 있지만 그것들은 여러분의 마을로 귀환했을 때 마시기로 합시다.”
하룬이 찰랑거리는 술병을 흔들며 말했다.
“나 이 녀석에게 완전히 반했소.”
“하하! 이 조그만 병이 하급 마수 두 마리의 가치라니.”
티탄과 토르는 하룬이 따르는 술을 아까와는 달리 한 방울이라도 놓칠까 봐 조심스럽게 술잔을 잡았다. 다른 전사들 역시 사양하지 않았다. 엄청나게 독하기는 하지만 쓰로파이어만이 줄 수 있는 매력에 흠뻑 빠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건배를 청하지요.”
티탄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디온과 옥세르가 빈 잔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위로 들어 올렸다.
“아카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이웃이며 형제였소. 에인족 역시 마찬가지였소. 척박하고 위험천만한 데빌 산맥에서 우리는 이웃이며 형제들이 있었기에 살아올 수 있었소. 오늘 아득한 후대의 전사들이 다시 술잔을 높이 들고 우정을 맹세하니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라오. 형제여, 잊지 말자! 이 뜨거운 심장이 말하는 소리를!”
“잊지 말자! 이 뜨거운 심장이 말하는 소리를!”
“잊지 말자! 이 뜨거운 심장이 말하는 소리를!”
전사들은 아까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티탄의 말을 복창하며 단숨에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카아!”
“후욱! 아, 좋다!”
첫 잔보다는 훨씬 나아진 반응이었지만 여전히 그 열기는 뜨거웠기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내 그 열기가 전해주는 것들, 즉 몽롱해지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등의 반응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이거 완전히 반해버리곘어!”
“이거 마시려면 이제부터 마수들을 열심히 잡아야겠구나.”
아쉽게도 하룬이 꺼낸 쓰로파이어는 세 병밖에 없었다. 전사들은 하룬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던져 압박을 했지만 하룬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싸서가 아니라 가져온 것이 워낙 적어서…….”
전사들은 노골적으로 실망했지만 조금 식나이 지나자 몸을 옆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취기가 늘 긴장 속에서 살던 그들의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 주었다.
에인족 전사 하나가 흥이 도는지 노래를 불렀다.
「흰 모자를 쓴 포이보
우리는 그 턱수염 속에 숨어 살지
푸른 치마를 두른 데빌
우리는 그 풍만한 가슴 속에 살지
누런 띠를 두른 아이바
우리는 그 은밀한 곳에 살지」
단조롭지만 은근히 해학적이면서도 절로 몸이 들썩거리는 곡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부르카족 전사가 화답이라도 하듯 노래를 불렀다.
「숲에서 만난 프로즐리 가족은
내 형제가 쏜 화살을 엉덩이에 매달고 반갑다고 인사하네
들에서 만난 람비 형제는
내 누이에게 이불을 만들어주고 알몸뚱이가 부끄럽다고 도망치네
산에서 만난 프롤프 자매는
내 형에게 질긴 방어구를 선물하고 부끄러운지 자꾸 바위 뒤로 숨네」
역시 마수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산악 부족답게 마수들을 소재로 흥겨운 가락을 가진 노래였다.
한동안 전사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노래를 부르며 쓰로파이어가 만들어준 적당한 취기를 즐겼다.
어느새 레미와 디온 그리고 옥세르의 얼굴도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이게 사는 거 아닐까?’
꼭 뭐가 되고 많은 돈을 벌고 많은 사람을 부리는 것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거의 폐인처럼 외톨이로 살아왔던 하룬에게는 이렇게 가슴을 터놓고 서로에게 잣니을 내보이며 즐겁게 보내는 시간이 무척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