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
레미는 아침 일찍 환자들의 환부를 돌보기 시작했다. 옆에는 타킴이 아직도 벌건 얼굴로 연방 눈을 비비고 있었다. 어젯밤에 모처럼 회식을 했는데 막내라고 타킴이 가장 많은 잔을 받았던 것이다.
타킴을 비롯해서 이제 갓 성년이 된 전사들이 이제는 한 사람의 전사로 충분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는 형과 누나들이 권하는 술이라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타킴은 레미를 보조하는 임무를 기억하고 있었다.
레미는 취하도록 마시고 싶었지만 환자들 때문에 자제를 했기에 맑은 정신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격렬한 전투의 후유증과 술기운에 아직도 뻗어 있었다.
‘포션으로 치료를 하니 이럴 때는 참 좋아.’
포션 치료로 인해 대원들의 상처는 급속하게 아물었고 그 덕분에 도수가 낮긴 하지만 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술은 모든 힘을 소진시킬 정도의 격전을 치른 대원들의 긴장과 정신적인 피로를 말끔하게 날려주었다.
‘그때처럼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면서 술을 마셨으면 좋겠다!’
처음 돌풍 용병대원이 된 날 벌였던 작은 축제를 레미는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작은 소녀가 보였다.
“잘 잤니, 이라하?”
“네, 언니. 어제는 엄마 아빠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서 오히려 못 잤어요. 헤헤! 아니, 잘 잤어요.”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다가 레미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본 이라하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어린애가 얼마나 불안했을까?’
치료를 받았다지만 늘 열이 끓어올라 수시로 깨어나 헛소리를 하던 부모가 한 번도 깨질 않았으니 이라하는 오히려 불안해서 자지 못했을 것이다.
“내일이면 움직일 수도 있을 거야.”
“정말요? 정말이에요?”
“그럼. 아빠는 자랑스러운 아카족 전사이고 엄마는 강인한 아카의 딸이잖니?”
“맞아요.”
비록 충분히 자지 못해 충혈이 되었지만 이라하의 눈빛은 자부심으로 반짝였다. 마수를 잡아 그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강한 전사들과 험한 환경에서도 억척스럽게 생활을 일구는 아카족 여자들은 자신의 부족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우리를 데리고 갈 거죠?”
이라하는 행여 자신들의 가족을 떼어 놓고 떠날까 봐 두려운 눈을 했다. 레미는 오늘 떠나기로 한 것을 떠올렸지만 이라하를 불안에 떨게 만들 수 없어 거짓말을 했다.
“그럼. 걱정 마렴. 우리는 같은 아카족이야. 아카족은 가족을 사지에 놓고 도망치지 않아.”
“고마워요!”
이라하의 큰 눈망울에 물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눈물이 방울 지어 흘러내렸다.
“이런! 엄마 아빠는 오늘도 하루 종일 자야 하니 너도 이제 자렴.”
“알았어요.”
이라하는 엄마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달음박질해서 얇은 모포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곳에는 레미 언니처럼 강인하며 정이 많았던 엄마의 따듯한 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미, 일찍 일어났네.”
“대장!”
돌아보니 하룬이었다. 모든 대원들이 한 잔씩 권했기 때문에 제일 많이 술을 마셨으면서도 그는 멀쩡했다. 벌써 수련을 하고 씻었는지 그의 옷차림은 언제나처럼 말끔했다.
“이따가 방어구를 벗어줘요, 대장.”
레미의 시선이 찢어진 방어구로 향했다. 그녀는 주술사 후계자가 되기 전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바느질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마수의 가죽이 질기고 두껍지만 엄마가 물려준 바늘이라면 문제없이 수선할 수 있었다.
“하하! 우리 레미는 정말 다재다능하구나.”
하룬의 칭찬에 레미는 얼굴을 붉혔다. 과묵한 대장이라 여간해서는 칭찬하는 법이 없기에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이 좋았다.
“그래, 환자들의 상태는 어때?”
“아주 좋아요. 포션을 사용해서 그런지 상당수가 며칠만 지나면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을 거 같아요.”
“그거 다행이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곳에 놓고 갈 환자들이 마음에 많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대장, 저기에 있는 환자들은 어떻게 하죠?”
레미는 치료소 쪽을 향해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카족 사람들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다른 환자들에게까지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당장 어떻게 될 사람은 없었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밖으로 나가는 하룬의 등을 보며 레미는 환하게 웃었다.
“왜 웃어요, 레미 누나?”
타킴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역시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된 다른 사람들이 계속 눈에 밟혔던 것이다. 하룬의 말은 그런 환자들까지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홋!”
레미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고로 용병은 대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법이야.”
“그럼 젇르이 대가를 지불하고 치료를 부탁할 때까지 기다린단 말인가요?”
“응. 치투족은 우리와 같은 산악 부족들을 상대로 엄청난 이득을 취해 왔잖아. 대장도 우리 이야기를 통해서 그걸 잘 알고 이번 참에 제대로 챙길 모양이야.”
“흐흐! 그건 통쾌한 일인데…….”
“그래서 대장이 말했잖아. 당장 죽을 사람은 없다고. 대장은 나보다 뛰어난 치료사야. 그런 상태는 이미 확인한 거지. 저들은 모두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럼……?”
“만약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죽을 환자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치료를 했겠지. 저 집에 있는 환자들처럼.”
그러고 보니 공회당 한쪽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었다. 팔다리가 마수들의 입으로 들어가고 씹혀 불구가 된 상태에서 상처를 통해 감염된 마수의 독에 의해 죽어가던 환자들인데 아카족은 분명 아니었다.
“저 환자들은 우리 부족이 아니야. 당장 죽어가는 환자들인데 대장이 나한테 눈치를 주어서 이곳으로 데리고 와 치료를 한 거지.”
“아하!”
타킴은 이제야 사정을 짐작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우리 대장은 생각보다 무섭지 않네요.”
“무서워, 대장이? 호호호! 우리 대장은 마음이 아주 여린 사람이야.”
“그래요? 난 아직도 대장의 눈이 무서워서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겠던데.”
“그런 녀석이 어제 술에 취해 대장에게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고백했니?”
“예에?”
타킴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오만상을 찡그렸다.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레미의 말을 듣고 보니 비슷한 행동을 누군가에게 한 것도 같았다.
아침 식사는 요란했다. 환자들을 위한 수프와 함께 속을 풀기 위해 스튜를 끓였던 것이다. 식용 약초를 제외하고는 향신료를 거의 접해보지 못했던 아카족 대원들이 도심으로 나와 가장 열광하게 된 음식이 바로 고기와 야채 그리고 각종 향신료를 넣고 넉넉하게 육수를 끓여 낸 스튜였다.
“카카! 역시 스튜가 최고야!”
“내가 도네이스 선배에게 이 레시피를 배우느라고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알아?”
어느새 돌풍 전용 요리사가 된 두르본이 으스대며 말했다.
어느새 걸쭉한 스튜 국물에 빵을 찍어 먹는 맛에 길들여진 대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이라하를 비롯해서 몇몇 아카족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이미 환자들을 위한 수프는 끓여 대원들이 직접 먹여주거나 나눠 준 뒤였다.
“안녕하십니까?”
손님이 찾아왔다. 어젯밤에 놀라운 활 솜씨로 프로즐리를 죽인 부르카족 전사 티탄이었다. 식사 도중의 손님이라면 거리낄 것이 당연하지만 산악 부족은 인심이 좋았다.
“일단 앉으시오. 한 그릇 하겠소?”
끌혹 있는 스튜에서 국자를 꺼내 잡은 옥세르가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린 부르카족 전사들에게 물었다.
“주시면 감사히 먹지요.”
구수하고 향긋한 음식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던 티탄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하하! 아주 근사한 맛일 거요.”
옥세르는 스튜를 넉넉하게 그릇에 담아 건네주었다. 그 옆에서는 두르본이 밀 빵 두 개를 건네주었다. 중년 전사를따라온 3명의 전사들 역시 스튜 그릇과 빵을 받아 앉을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빵과 스튜를 받은 부르카족 전사는 안면이 있는 디온에게 향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고 옆으로 밀착해서 빈자리를 만드는 것을 본 것이다.
“친구, 오랜만이네.”
“이렇게 살아서 얼굴을 다시 보니 반갑군. 어서 오게.”
티탄은 빈자리에 앉아 일단 스튜부터 그릇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
“후우!”
입에 짝 달라붙는 진하고 매콤하며 따듯한 육수가 빈속으로 들어가자 그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했다. 혀를 길게 내밀어 입술을 핥은 티탄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음식인가?”
“하하! 어때, 먹을 만한가?”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눈이 확 뜨이네.”
“이건 우리 돌풍 용병대 비전의 스튜 요리일세.”
“돌풍 용병대? 자네 마을 전사들이 용병이 되었단 말인가?”
용병이란 말에 전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존심 강한 마수 사냥꾼이 용병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디온의 말은 당당했다.
“그렇다네. 이제 마수 사냥은 그만두고 대륙을 돌아다니기로 했네.”
“부럽군. 마을 어른들의 허락은 받았고?”
“그건 아니지만 허락하실 걸세. 우리 대장만 따라다니면 마수 사냥을 하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고 벌이도 좋을 테니 말이야.”
“그런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하룬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는 티탄이었다. 하룬은 그를 향해 목례를 하고는 다시 식사를 하며 레미와의 대화에 열중했다.
“일단 식사 중이니 이따가 따로 소개를 하겠네.”
“알았네. 그런데 자네 억양도 많이 부드러워지고 공용어가 무척 능숙해졌군.”
“하하! 앞으로 도시에 들어갈 일도 많은데 고쳐야지.”
“그렇군.”
티탄은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스튜를 먹는 데 집중했다. 혀가 아릴 정도로 매콤하면서도 자꾸 당기는 것이 참 희한한 맛이었다. 물을 끓여 고기를 삶아 먹는 것이 고작인 식습관에서 육수를 마시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속을 후끈하게 만드는 육수를 먹다 보니 금세 머리며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솟아났다. 스튜 그릇이 바닥을 드러낼 때가 되어서야 겨우 빵을 떠올린 전사는 남은 스튜 국물에 빵을 찍어먹기 시작했다. 디온이 하는 것을 본 것이다.
‘이것도 정말 맛있군.’
빵이야 가끔 먹지만 밀과 옥수수 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넓적하게 펴서 불에 덥힌 돌 위에 올려 굽는 그들 고유의 음식인 ‘탁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스튜 국물을 찍은 빵은 전혀 달랐다. 부드러운 데다가 향미까지 더하니 언제 먹어 치웠는지 모르게 입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평소 식탐이 있는 편이 아닌데도 깨끗하게 빈 그릇이 왠지 원망스럽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 자신이 데리고 온 부르카족 전사들을 보니 그들 역시 빈 그릇을 쳐다보며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잘 먹었네.”
이제야 디온을 바라보며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티탄이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게. 역시 우리 용병대가 자랑하는 차가 나올 테니.”
“차?”
차라는 말에 전사가 의아한 표정이다. 원래 산악 부족은 차를 즐기지 않는다. 대신 유일하게 가축으로 키우는 산양 나르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치즈를 끓는 물에 녹여 아침저녁으로 마시는 것이 전부다.
디온이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손에서 손으로 차가 담긴 컵이 전해져 왔다.
후루룩!
“윽! 뜨거워!”
“하하!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게. 맛을 음미하면서…….”
디온이 아주 점잖은 얼굴로 전사에게 조언했다. 그 역시 티탄처럼 굴었던 때가 얼마 되지 않았다.
티탄은 디온의 말대로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입안에 머금었다. 쓰고 시고 맵고 짜고 단맛이 두루 느껴지는 것이 참으로 희한한 맛이었다.
꿀꺽!
찻물을 목으로 넘기고 나자 입안이 허브를 씹고 난 것처럼 개운해졌다. 그리고 더운 날 시원하게 계곡물에 머리를 넣은 것처럼 땀이 솟아나던 머리통이 시원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거 완전히 끝내주는군!”
“그렇지? 하하!”
디온은 티탄에게 새로운 맛의 세계를 알려주는 것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그의 표정 변화가 너무 재미있었다. 선배들이 왜 자신들을 보며 가끔 웃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차를 마시며 대원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화제는 어젯밤에 일어난 마수들과의 전투였지만 레미의 경우는 환자들에 대한 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자유롭다!’
사냥을 나왔을 때는 긴장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고 사소한 소음도 낼 수 없기에 대화가 없었고 마을로 돌아갔을 때는 너무 지쳐 대화를 할 기운도 없었고 그럴 기분이 나질 않았다. 그나마 마수 사냥이 희생자 없이 성공해서 돌아왔을 때 마을에서 여는 작은 축제가 마음을 밑바닥까지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묘하게도 긴장을 모두 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긴장의 끈을 조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유롭게 대화하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보기가 좋다.
‘바뀌었다!’
사냥을 나가면 종종 마주치는 아카족 전사들이 달라졌다. 어젯밤 목격했던 그들의 실력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라웠다. 일대일로 람비나 브롤프를 상대해서 죽이는 것은 물론 마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가며 마수를 상대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어젯밤에 전투를 목격한 티탄은 이들 아카족 존사의 막내들이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인상을 받고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자신과 사냥 능력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디온 같은 경우는 혼자서 마수를 대여섯마리나 해치울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 변화가 저 남자 때문인가?’
티탄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음미하는 하룬을 흘끗거렸다.
마침내 차를 다 마시자 디온이 티탄의 손을 잡아끌어 하룬에게 다가갔다.
“대장, 이 친구는 부르카족 최고의 마수 사냥꾼이자 전사장 중 1명인 티탄이라고 합니다. 티탄, 이분이 우리 돌풍 용병대의 대장님이야!”
티탄은 엄청난 거구였지만 균형이 잘 잡힌 몸이었다. 얼굴은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눈이 깊고 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티탄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룬이라고 합니다. 디온은 우리 대원들 중 가장 노련하고 뛰어난 마수 사냥꾼입니다. 내가 믿는 디온이 친구라고 자부하는 분이니 나 역시 친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룬이 먼저 상대의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들이댔다. 티탄은 산악 부족 특유의 인사를 능숙하게 하는 하룬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활짝 웃으며 가슴을 들이댔다.
툭! 툭!
“하하하! 마음에 드는 분이군요.”
“앉으세요. 차나 한잔 더 마시며 이야기합시다.”
“네.”
둘을 소개시킨 디온이 차 주전자를 가져와 빈 잔에 따랐다.
“그래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희는 부족한 식량을 구하려고 마수 가죽을 가지고 거래를 하기 위해 카르에 왔습니다. 그런데 거래를 끝내고 돌아가려고 나섰는데 이틀도 가지 못하고 출몰하는 마수들 때문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곳에 갇히고 만 거지요.”
“그렇군요.”
상카의 말과 다루미의 말을 이미 들었던 터라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이곳에 계속 머무를 겁니까?”
티탄은 기대 어린 얼굴로 물어보았다. 이걸 묻기 위해 꽤 참은 얼굴이었다.
“아니요. 오늘 오후에 거동이 가능한 아카족 사람들을 데리고 탄툰 마을로 갈 생각입니다.”
“휴우! 다행입니다. 저희도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디온이 말했는지 모르지만 저희 마을은 탄툰 마을과 나흘 거리에 있습니다.”
“그럽시다.”
하룬은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어젯밤에 본대로라면 부르카족 전사들은 미처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길에 큰 전력이 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빨리 도착하지 못하면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독초라도 먹어야 하는 사정이었습니다.”
이제야 힘든 사정을 토로하는 것을 보면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내였다.
“부르카족 전사는 몇 명입니까?”
“18명입니다. 그중 셋은 마수들이 목책을 넘는 것을 막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어 치료소에 있습니다.”
“그래요? 빨리 데리고 오십시오. 디온, 대원들을 데리고 가서 부르카족 전사들을 옮겨 와.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데리고 올 것을…….”
“감사합니다, 하룬 대장.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티탄은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티탄을 디온이 이끌고 치료소로 달려갔다.
부르카족 전사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못하고 방치를 한 터라 자칫했으면 상처를 입은 팔다리를 잘라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포션의 양은 충분했다. 워낙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전사들이라 레미가 가지고 있는 약초들과 하급 포션으로도 충분히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세 전사가 시시각각 찾아오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가 레미의 수술과 포션 치료로 제대로 된 얼굴색이 되어 정신을 차리자 티탄을 비롯한 부르카족 전사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별말씀을. 아까 말한 대로 티탄은 디온의 친구이니 우리 돌풍 용병대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친구, 우린 친구지요. 저 역시 디온처럼 대장으로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마을로 돌아가면 크게 잔치를 벌여 대접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또 다른 손님들이 찾아왔다. 에인족 전사장이 포함된 그들은 안면이 있는 각 대원들을 통해 하룬을 만나기를 청했는데 모두 데빌 산맥의 기슭에 있던 마을에서 마수를 피해 도망을 쳐온 사람들이었다.
하룬은 잔사의 경우처럼 그들의 동행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그들 부족의 환자들도 모두 치료를 해주었다. 때문에 치료소는 환자의 삼분의 일가량이 빠져나가 빈자리가 많이 생길 정도였다.
손님은 계속해서 찾아왔다. 그 마지막은 이 카르의 수뇌부들이었다.
“어제는 상황이 좋지 않아 그만 몰라보고 실례를 했소. 다시 인사를 하겠소. 난 이곳 치앙 카르의 주인 바타라고 하오.”
“돌풍 용병대의 하룬입니다.”
바타는 꽤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하룬은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같은 사람과 두 번이나 같은 인사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쓸 만하다고 느껴지자 태도를 바꾸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쪽은 하룬 대장을 이곳으로 오게 한 내 둘째 아들 상카요. 그리고 이쪽은 카르의 원로들인 베크와 앙투요.”
하룬은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지만 힘을 주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이들은 별로 사귀고 싶은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어제는 정말 큰 활약을 하셨습니다.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상카가 너스레를 떨며 하룬의 기분을 띄우려고 애를 썼다.
“맞소. 내가 만나본 용병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났소.”
“나 역시 용병들이나 다른 부족의 전사들을 많이 보았지만 돌풍 용병대처럼 마수를 쉽게 상대하는 경우는 처음 보았소.”
베크와 앙투라는 이름의 중년인들은 호감을 드러내며 웃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이곳은 어쩐 일이오? 이곳에 머무를 정도의 값어치는 했다고 생각하는데.”
“아, 그게 말이오. 어제 큰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식사라도 같이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으면 해서 말이오.”
바타의 노회한 눈이 빛을 발했다.
“내 대원들 중에 아카족 출신들이 있어 그들을 위해 나선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오후에 이곳에서 떠날 테니 같이 의논할 일도 없을 것이오.”
바타를 비롯한 카르의 수뇌부들은 단호한 하룬의 대답에 얼굴이 굳었다.
“하, 하지만 하룬 대장은 마수를 막아달라는 상카의 의뢰를 받고 이곳에 왔지 않소?”
“그것은 어제 분명히 당신이 거부하지 않았소. 그 옆에 계신 분들 역시 같은 의견이어쏙. 설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요?”
하룬의 말에 바타와 두 원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바쁜 와중에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탓에 억지로 맡았던 의뢰였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된 거지요.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바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의뢰금을 올리기 위한 수작인가? 아니면 어제 그 일로 기분이 상해서 이러는 것일까?’
바타의 눈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이제껏 보아 왔던 용병들을 생각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입을 열었다.
“의뢰금은 원하는 대로 주겠소. 난 그 정도의 능력은 있소.”
할 수 없는 일이다. 잘못하다가는 수대에 걸쳐 누려왔던 카르의 ‘탄’에서 밀려날 판이다. 자신처럼 계승되는 원로 가문의 후예인 베크와 앙투가 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후후후! 전에 상카에게도 말했지만 우리느 현재 의뢰를 수행 중이오. 돈을 더 중하게 여기는 용병들도 있지만 우리 용병대는 돈보다는 약속을 더 중요시합니다.”
하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르의 수뇌부들은 단박에 실망한 얼굴로 변했다. 나름대로는 하룬이 의뢰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탁합니다, 하룬 대장! 대장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우리 카르는 며칠을 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겁니다. 이 카르에는 2,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마수들의 아가리에 들어가게 그냥 보고 계실 겁니까?”
상카는 피를 토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룬에게 매달렸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부상자와 노약자들을 제외하고도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는데 카르가 쉽게 무너지겠소? 외부 목책은 몰라도 내부 목책은 그 인원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소. 한마음으로 마수들을 상대한다면 막지 못할 리가 없소.”
“그, 그게…….”
하룬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려던 상카는 아버지와 두 원로의 눈치를 보며 차마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했다. 실제로 아버지와 두 원로는 아직도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사의 각오를 한다면 감히 마수들이 카르를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이곳을 떠날 생각을 굳히고 있단 말입니다!’
고함이라도 쳐서 세 사람의 굳은 생각을 깨고 싶었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카르의 지배권을 놓고 평생을 다투어 온 세 사람은 카르가 무너진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며칠만이라도 머무르면서 마수들의 숫자를 좀 줄여 주십시오.”
상카의 말에 바타와 두 원로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밝아졌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마냥 카르를 보호해 달라고 할 바에는 그쪽이 돈도 덜 들어가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나 원하시오?”
“적어도 백 마리 정도는 줄여 주십시오. 특히 목책에 위협적인 프로즐리를 부탁합니다.”
어제 돌풍 용병대가 죽인 마수의 숫자가 백 마리 정도이니 돌풍 입장에서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도합 이백 마리가 사라진다면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마수들은 절반 이상 줄어든다.
하룬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가 떴다.
“좋소. 프로즐리 열 마리, 슬로크와 브롤프, 그리고 람비를 서른 마리씩 잡겠소.”
하룬의 말에 네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정도면 이제까지 카르를 공격했던 마수들의 절반이 넘는 숫자인 것이다. 게다가 가장 위협적인 프로즐리는 거의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의뢰금은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제 하룬과의 대화는 상카가 주도하고 있었다. 하룬 일행에게 축객령과 다름없는 부당한 대우를 했던 세 사람은 하룬이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태도로 반응하는 바람에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얼마나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하룬은 제대로 대가를 산정할 수 없어 상카에게 되물었다. 상카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바타와 두 원로를 쳐다보았다.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판단을 믿는다는 듯.
“마수 한 마리당 백 골드씩 쳐서 1만 골드면 어떻겠습니까?”
상카의 말에 바타와 두 원로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 정도까지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1만 골드면 제국의 상인들이 가져오는 밀이 무려 2만 포대였다.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서 카르를 찾는 산악 부족들에게 5골드 정도에 구입하는 하급 마수의 가죽과 마정석이라고 해봐야 오래 거래해온 상인들에게 넘기더라도 30~40골드가 고작이다.
게다가 어젯밤에 목격했던 것에 의하면 돌풍 용병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프로즐리의 경우는 힘이 좀 들겠지만 그래도 돈이 아까웠다.
하룬은 그런 세 사람의 반응에 무척 불쾌해졌다. 얼마 전까지 얼마든지 돈을 내겠다던 자들이 맞나 싶었다.
“후후후! 그 정도면 탄툰 마을로 가는 동안 몇 마리씩 잡아도 벌 수 있소. 그냥 출발하겠소.”
“하, 하지만 그건 돌풍 용병대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질 않소?”
결국 속내를 드러내는 바타였다.
“그렇게 쉽게 보였소? 이상하군. 우리 대원들은 레미의 치료와 포션이 아니었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게다가 프로즐리를 열 마리나 잡으려면 대원들 중 몇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고작 1만 골드에 그런 위험한 일을 왜 하겠소. 그 돈으로는 포션 값도 나오지 않소.”
하룬의 말에 바타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사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투가 마무리되었을 때였어. 하긴 포션을 먹었으니 그렇게라도 움직였지 아니었다면 마수들과 싸우고 그 정도로 팔팔(?)할 리가 없지.’
바타와 두 원로는 나름 어젯밤에 보았던 충격적인 상황을 자기들식으로 이해했다.
‘귀한 포션을 그렇게 쓰는 것이나 1만 골드를 정말 가볍게 여기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통이 큰 자거나 이런 모습이 가식이라면 엄청난 사기꾼이겠지?’
포션은 이곳에서는 정말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다. 치료사가 있기는 하지만 즉효성이 있는 포션의 가치는 몬스터나 마수들이 설치는 이 험한 곳에서는 그야말로 여벌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 얼마면 되겠소?”
결국 보다 못한 바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룬은 두 손을 들어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십…… 설마 10만 골드?”
바타를 제외한 두 원로와 상카는 상상외의 금액에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소. 대신 마수 이백 마리를 책임지고 없애주겠소.”
하룬의 말에 네 사람의 얼굴은 몇 번이나 급변했다.
“가, 가능하겠습니까?”
상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돌풍 용병대의 숫자는 겨우 20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무려 열 배에 달하는 마수를 모두 죽이겠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공격 마법을 쓸 수 있는 스크롤이 있소. 이번에 데모 시티에 들렀을 때 마탑에서 구해온 스크롤들과 우리 실력이라면 어느 정도 피해는 있겠지만 그 정도 마수들은 없앨 수 있소. 물론 그 가격에는 최소 중급 포션 20병 가격이 포함되어 있소.”
처음에는 너무 큰 금액에 ‘악’ 소리가 났지만 하룬의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그리 터무니없는 액수는 아니었다. 마법 스크롤의 가격은 개당 수백 골드가 넘어가고 중급 포션 역시 귀한 물건들이다.
네 사람은 은밀하게 눈길을 교환하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대금에 얹어서 환자들을 치료할 약재를 좀 주시오.”
원로 베크는 다른 조건을 얹어 수락을 할 생각이었다.
“불가不可!”
“왜입니까?”
상카가 대번에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약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오. 환자들이 너무 오래 방치되어 포션을 포함한 각종 약재뿐 아니라 레미의 치료 주술과 내 비전의 치료술이 더해져야만 회복될 수 있소.”
하룬의 말에 네 사람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 사람이 하룬을 만나기 전에 확인했던 놀라운 일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팔이 통째로 뜯겨 나가고 상처 부위가 썩어 들어가 죽기만 기다리던 환자가 하루 만에 멀쩡하게 깨어나서 앉은 상태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으니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레미가 가지고 있는 약재나 내가 보유한 포션 그리고 내 비전 치료술의 재료는 그리 많이 남지 않았소. 이곳에 있는 환자들을 다 치료하고 나면 데빌 산맥으로 들어갈 우리가 쓸 것이 없소. 그것들은 우리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이네……. 10만이 아니라 100만 골드를 준다고 해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소. 이 건은 절대 받을 수 없는 의뢰요.”
하룬의 강경한 말에 치투족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길! 카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환자를 치료해야만 하는데…….’
바타는 목이 말랐다. 카르 주민들, 특히 환자를 가족으로 둔 전사들의 동요는 무척이나 컸다. 이제껏 카르 수뇌부가 방치하던 환자들 중 치투족이 아닌 다른 부족의 환자들은 돌풍 용병대의 치료를 받아 그 환후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마수들 때문에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는 치투족 전사들이 환자 문제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면 수대에 걸쳐 이룩한 자신들의 영화는 끝장이 나는 것이다.
-아버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사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상카의 귀엣말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바타였다. 환자 모두 비록 심각한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말끔하게 낫는다면 경험 많은 전사로 탈바꿈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숫자가 무려 100명이 넘으니 카르의 전력도 최상이 될 것이다.
“조, 좋소! 원하는 게 뭐요?”
바타는 환자들의 치료까지 포함해서 총액 20만 골드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비록 현금은 많이 부족했지만 용병들이 탐을 낼 희귀한 보물이나 마정석은 충분했다. 카르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제국의 상인들로부터 들여온 각종 물건을 산악 부족들에게 팔아 수대에 걸쳐 모은 재물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하룬은 고심하는 척 잠시 연기를 하다가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이러면 우리가 나중에 힘들어지는데…….”
“우리 사정도 봐주시오.”
바타가 안쓰러운 얼굴로 하룬에게 부탁을 했다. 거의 다 넘어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카르의 결계를 치는 주술을 알려주시오.”
“그건 안 되오!”
이번에는 치투족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만약 그 주술까지 알려준다면 마수들을 조종하는 흑마법사들까지 없애 주겠소.”
“흑마법사요?”
그렇게 되묻는 상카나 다른 사람들의 눈빛이 미묘해진다. 그들은 이제야 마수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크니스라고 부르는 흑마법사 무리가 있소. 그들은 파이린 제국에 쫓겨나 이 데빌 산맥으로 들어왔소. 뭘 노리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마수들을 조종해서 이 마츠 평원과 데빌 산맥에 분탕질을 치고 있소.”
“끄응!”
바타와 두 원로는 서로의 눈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조직적으로 카르를 공격하는 마수들의 행동과 가끔 들었던 주문 소리와 종소리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배후가 있었군. 우리의 추측이 맞았어.’
“자신 있소?”
“후후후! 나중에 밖에서 상인들이 오면 우리 돌풍 용병대에 대해서 물어보시오. 우리는 아직 받은 의뢰를 실패한 적이 없소.”
굳이 자신감 넘치는 하룬의 말이 아니더라도 치투족 수뇌부는 하룬과 돌풍 용병대를 믿고 있었다. 어젯밤에 본 실력만 하더라도 엄청났던 것이다.
“흑마법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카르의 결계도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 거요. 즉, 치투족이 애지중지하는 결계 주술은 다크니스의 흑마법사들에 의해 언제든지 깨질 수 있소. 이미 그 가치를 상실했단 말이오.”
하룬의 말이 옳았다. 그들은 잠시 뒤로 물러나 의논을 했다.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타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좋소. 결계 주문을 내놓겠소. 어차피 결계를 유지 보수할 주술사가 죽었으니 우리도 다시 또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다른 카르로 이주하는 수밖에 없으니. 그런데 문제가 좀 있소.”
“뭡니까?”
“우리에게 지금 10만 골드의 현금이 없소. 한동안 상인이 찾아오지 않은 데다가 우리는 현금보다는 현물을 더 중요시하오. 그래서 대금은 식량과 같은 현물로 지불했으면 좋겠는데…….”
바타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말했지만 하룬은 반색을 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하하! 그거 잘됐군요. 안 그래도 나 역시 그렇게 요구할 생각이었습니다. 현금이라면 이번에 의뢰 착수금으로 받은 것이 많아 우리도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까요.”
바타는 하룬의 말에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조금 인상을 썼다.
“그런데 마수가 연일 공격해 오는 바람에 제대로 농사에 신경을 못 써서 식량이 많이 부족한데 이를 어쩌나?”
바타는 아카족의 탄툰 마을로 가는 길이니 식량을 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룬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그거 잘됐군요. 우리도 식량은 부족하지 않게 마법 배낭에 챙겨왔습니다. 그럼 아카족을 비롯한 산악 부족과 거래를 할 때 적용하는 가격으로 환산해서 마수 가죽과 마정석으로 대금을 받겠소.”
“그건…….”
바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식량의 가치를 올려서 되도록 적게 지불하려고 했던 바타의 꼼수가 애초부터 어그러진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이오. 어떻게 우리가 구입한 원가로 계산을 한단 말이오?”
원가로 계산을 하면 애초에 하룬이 부른 10만 골드가 문제가 아니다. 이미 약정한 10만 골드의 세 배 내지 네 배 이상 지불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흐음. 그건 너무 심했나? 좋소. 내 아카족 대원들이 말하길 당신들은 마수 가죽과 마정석을 구입하여 한 배의 이득을 붙여 상인들에게 넘긴다고 하더이다. 디온, 내 말이 맞나?”
하룬은 곁에 있던 디온을 불러 확인은 했다.
“네, 맞습니다. 분명히 마수 가죽과 마정석을 구입할 때 원로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이득이 나야 카르를 유지할 수 있다고요. 그래서 불만이 있다고 참은 겁니다.”
“그래. 사실 비옥한 토양과 3모작이 가능한 날씨를 고려하면 식량을 빌미로 카르가 산악 부족들에게 취하는 이득이 좀 많긴 하지만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겠지.”
하룬과 디온의 말에 네 사람의 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딱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분명히 모든 산악 부족과 거래를 할 때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당장 부르카족이나 에인족 전사들에게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양보하지. 상인들에게 넘기는 가격으로 받겠소. 레미, 어떻게 계산을 하면 되나?”
하룬이 레미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채 똑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람비와 같은 하급의 경우 가죽과 마정석을 우리에게 구입할 때 5골드씩 쳐 주었으니 10골드로 하면 됩니다. 프로즐리와 같은 중급의 경우에는 그렇게 계산하면 40골드가 되겠군요. 하급 마수의 가죽이나 마정석으로 계산하면 1만 장 혹은 1만 개가 되고 중급의 경우에는 2,500장이나 그 개수를 받으면 되겠네요. 그런데 대장, 너무 봐주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 대원들이 몇이나 죽어 나갈지도 모르고 가지고 있는 하급이나 중급 포션과 치료약 그리고 무려 3만 골드나 주고 산 마법 스크롤을 생각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다.”
“맞습니다, 대장. 다시 한 번 생각을 해주십시오. 이들 치투족은 워낙 거래를 잘해서 모아 놓은 재산도 많습니다. 굳이 이 카르를 지킬 필요가 없이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마츠루트 요새나 다르 강을 넘어 파이린 제국으로 건너가서 살아도 됩니다.”
“나도 반대다…… 아니, 반대합니다. 그깟 마수의 가죽이야 오랫동안 상인들이 찾지 않아 산악 부족의 마을 열 군데만 들러도 그 정도 수량은 얻을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을 수행하다가 덧없이 죽어갈 대원들의 목숨을 생각해서 제발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왜 우리가 그동안 우리의 물건으로 배를 불려 온 치투족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그것도 목숨 걸고 잡아와도 겨우 개당 5골드밖에 받지 못할 마수 가죽이나 마정석 때문에요.”
이제까지 잠자코 지켜만 보던 대원들이 불같이 일어났다. 레미의 말을 필두로 디온과 옥세르를 비롯해서 모든 대원들이 의뢰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치투족 수뇌부들의 얼굴에는 금방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떼 지어 대원들이 대장의 결정을 반대하고 나서는 상황이니 잘못하다가는 계약이 결렬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용병들이야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당연한 반응일 수 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네 사람의 속은 바짝 타들어 갔다.
‘마수 가죽이나 마정석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이야 다시 모으면 될 일이다. 돌풍 용병대가 다른 부족들을 데리고 떠나 버리면 자신들의 현재 힘이나 사기를 고려할 때 마수들에게 카르를 내주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제만 해도 돌풍 용병대가 측면을 막아 주지 않았더라면 카르의 외부 목책은 이미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허험! 자고로 단체란 위계질서가 있어야 하는 법. 어찌 대장이 내린 결정을 대원들이 왈가왈부한단 말이오!”
바타는 급한 마음에 헛기침과 함께 준엄한 목소리로 아카족 대원들을 향해 충고를 했다.
“탄의 말이 맞소! 대원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마라! 아무리 우리 목숨이 중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죽어가는 환자들과 목책이 뚫리거나 무너지면 마수들에게 죽어갈 생명들을 못 본 척하겠는가? 이 일은 이미 결정이 났다. 더 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다!”
“……네!”
대원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하룬의 말에 대답을 했지만 그나마 대답하는 이도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
“결정이 내려졌으니 일단 날 따라오시오. 착수금에 해당하는 마정석을 드리겠소.”
바타는 행여나 하룬의 마음이 바뀔까 봐 두려워 서둘러 그를 잡아끌었다. 상카와 두 원로 역시 상기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히!’
‘흐흣!’
‘크크크!’
뒤에 남겨진 대원들은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런 그들의 일그러진 눈과 얼굴이 이상했는지 이라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두르본의 방어구를 잡아당겼다.
“뭐 잘못 먹었어요, 언니?”
“푸흡! 낄낄낄! 아, 아니야! 카카카!”
결국 두르본은 가까이 있는 옥세르의 등에 얼굴을 묻고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소리가 날 수도 있어 냄새나는 방어구에 입을 아예 대고 말았다.
하룬이 3만 5천 골드에 해당하는 마정석을 착수금으로 받아 온 후 대원들은 지체하지 않고 치료소로 자리를 옮겼다.
하룬이 먼저 대원들로 하여금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공회당으로 옮겨 치료소를 비우게 했다. 치료를 하기에는 치료소의 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곪은 곳에서 나오는 진물은 물론이고 상처 부위가 썩어 들어가서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런 곳에 이틀 정도만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길 지경이다.
제일 먼저 레미는 보호자들로 하여금 집 안에 있는 깨끗한 천과 품이 넉넉한 옷을 가지고 오게 했다. 붕대를 쓰기에는 필요한 양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하룬은 나이아를 소환해서 먼저 치료소부터 정화시켰다. 그러고는 위신느와 피닉스를 소환해서 물기를 말리고 혹시 모를 병균을 모두 태워버린 후에야 다시 환자들을 치료소로 들였다.
그사이 대원들은 몰려온 환자들의 보호자들과 함께 환자들을 조심스럽게 씻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상태였다.
대원들이 위급한 차례대로 환자의 침상을 들고 들어오면 하룬이 환자의 환부를 청격하게 정화시키고 치료 진동으로 몸 내부의 병증을 호전시키면 레미가 4명의 조수와 함께 상처 부위를 치료했다.
레미는 조수 두 사람이 상처 부위를 잡아 압박하면 능숙한 솜씨로 썩은 곳을 잘라내고 지혈제를 뿌렸다. 피가 멈추면 포션을 반은 뿌리고 반은 직접 먹였다. 치료가 끝나면 다른 2명이 붕대로 상처 부위를 익숙한 솜씨로 감싸거나 필요하면 부목을 대서 고정시켰다.
치료소에 남은 환자들의 대부분은 치투족 전사들이어서 상당수는 목책 위로 넘어 오려는 마수들을 막다가 놈들의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에 뜯기거나 파이는 상처를 입었고 제대로 소독하지 못해서 중독 현상까지 있었기에 나중에는 싸가지까지 불러내야만 했다.
어쨌든 점심 식사를 하기 전까지 환자들 대부분의 급한 병증은 치료를 할 수 있었다. 환자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 창백했던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고 약재가 떨어져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했던 늙은 치료사들은 연방 함박웃음을 지으며 환자들의 환후를 돌보았다.
대원들이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환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에 카르의 세 수뇌와 상카가 치료소로 찾아왔다.
“오! 벌써 대충 치료를 했군요.”
상카는 몰라보게 깨끗해진 치료소의 환경과 한결 좋아진 환자들의 환후를 느끼고 탄성을 질렀다. 바타는 아직도 입이 쓴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지만 확연히 달라진 치료소의 모습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제?”
네 사람은 마치 다른 장소를 보는 듯 커진 눈으로 놀랍도록 달라진 치료소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맡기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살 썩는 악취도 더 이상 나지 않았고 고통과 고열에 지르는 신음도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호나자들은 풍성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벌써 이렇게 치료를 한 겁니까?”
“후후! 우리 레미는 주술뿐 아니라 치료에도 일가견이 있지요. 다른 대원들도 한몫은 너끈하게 하고요.”
네 사람은 하룬의 말에 뿌듯한 눈길로 환자들을 쓸어 보았다. 한눈에도 아침보다 한결 나아진 환자들의 상태였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을 위해 거금을 쓴 탄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했다.
“이제 바타 ‘탄’이 큰돈을 들여 우리에게 구입한 포션을 한 병씩 더 마시고 잘 먹이기만 하면 며칠 안에 상태가 급속하게 좋아질 거예요.”
레미의 말에 네 사람 주변으로 몰려든 환자들의 보호자들이 감격한 얼굴이 되었다.
“역시 우리 탄이 최고다!”
“그 귀하다는 포션까지 구해 환자들을 치료하다니. 정말 대단해!”
“바타 만세!”
“원로원 만세!”
보호자들은 네 사람을 둘러싸고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 대번에 바타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두 원로는 어쩐지 기분이 조금 나쁜 듯했지만 이내 그 표정을 지우고 바타와 함께 그들의 환호를 즐겼다.
“하하하! 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오. 다행히 여기 돌풍 용병대가 이번에 이곳에 오면서 대량으로 구입한 포션이 있어 구입할 수 있었소. 난 치투족의 전사 1명도 헛되이 죽게 놔두지 않을 거요. 치투여, 영원하라!”
“치투여, 영원하랏!”
“치투의 영광이여, 영원하라!”
치료소 앞은 졸지에 열광적인 환호의 장이 되었다. 어느새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치료소 앞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에효! 결계가 아깝다고 환자들을 치료하지 않았으면 탄의 자리까지 뺏길 뻔했군. 흐흐흐! 이렇게 되면 상카가 내 자리를 무사히 이어받을 수 있겠어.’
바타는 두 손을 높이 올리고 카르 주민들에게 그의 넓은 마음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