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카르의 아카족들 (186/278)

《카르의 아카족들》

 4층 건물을 내려온 하룬은 다시 공화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원들은 노화가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하룬은 걸음을 옮기며 곁에서 걷는 레미를 쳐다보았다. 아까 레미가 자신을 말린 이유를 눈으로 물어보는 것이다.

 “이곳에는 우리 아카족 피난민들도 있어요. 전 그들이 혹시 우리 때문에 피해를 볼까 두려워서…….”

 옳은 판단이다. 하룬은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일단 공화당에 자리를 잡으면 아카족 사람들부터 찾아. 갈 수 있는 상황이면 데리고 가자.”

 하룬의 말에 레미와 대원들은 금세 노화를 날려 버리고 밝은 얼굴로 변했다.

 ‘참, 순진한 사람들이군.’

 이렇게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대원들의 순수함은 하룬의 기분마저 가볍게 만들었다.

 공화당으로 향하는 거리는 여전히 부상자들과 그들을 부축하거나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본 하룬은 아까는 몰랐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회당 옆 건물에서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수용하는 모양이다.

 막 공회당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일행의 끝에서 따라오던 타킴이 소리를 질렀다.

 “다루미!”

 그 소리에 대원들이 발길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응? 정말 다루미네!”

 갑자기 대원들이 웅성거렸다. 하룬이 돌아보니 타킴이 누군가와 깊은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상대 여인은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여 둘 사이는 가족으로 짐작되었는데 두 사람은 격하게 해후를 나누고 있었다.

 “다루미는 타킴의 사촌이에요. 3년 전에 보툰 마을로 시집을 갔는데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네요.”

 레미가 설명을 해주었다. 이제 대원들도 다루미와 타킴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던 타킴이 다루미를 이끌고 하룬에게 왔다.

 “대장, 제 사촌인 다루미입니다.”

 “다루미라고 해요. 전사로서 모든 면이 부족한 우리 타킴을 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다루미는 타킴의 사촌 누나로서 인사를 해 왔다. 두르본과 같은 전사가 아니라 레미와 같은 차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타킴은 여러모로 뛰어난 전사입이다. 우리 돌풍 용병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대원입니다.”

 하룬의 말에 타킴은 얼굴을 붉히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다루미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보기 좋은 사촌지간의 모습에 아직도 이곳 치앙 카르 사람들에게 화가 가라않지 않은 하룬이지만 가슴이 따듯해졌다.

 “오랜만이네, 언니. 여긴 어쩐 일이야?”

 하룬의 곁에 남아 있던 레미가 뒤늦게 인사를 하자 다루미의 큰 눈에 반가움이 가득 넘쳤다.

 “레미, 너도 돌풍 용병대원인 거야?”

 “응. 아직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고 있어.”

 “잘됐다. 이제 탄툰 마을 사람들은 위험한 마수 사냥을 하지 않아도 잘살 수 있게 되었네.”

 다루미는 다행이라는 듯 활짝 웃음을 지었다.

 “우리 마을은 열흘에 걸친 마수들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어 버렸어. 마수들을 피해 도망을 친 사람들은 뿔뿔이 헤어졌고 난 다리를 다친 남편과 함께 이곳으로 피난 왔어.”

 다루미의 얼굴이 갑자기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말에 레미와 전사들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어, 언제?”

 “벌써 두 달이 지난 일이야. 마수들을 피해 도망치던 도중에 카르로 향하던 부르카족 전사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부부와 다른 마을 사람들도 먼저 간 사람들처럼 모두 마수들에게 잡아먹혔을 거야.”

 “세상에!”

 “우리 가여운 주루는 그 와중에 열병에 걸리고 말았어. 그래서 남편과 주루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어서 머무르고 있는 중이야. 난 식량 배급을 위해서 목책을 받칠 지지대를 쌓는 공동 노역을 하다가 두 사람이 너무 걱정이 되어 일찍 나와 치료소로 가는 길이야.”

 이제까지 별말이 없던 두르본이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이를 악물더니 다루미의 어깨를 잡아챘다.

 “빨리 가 보자!”

 “그, 그래.”

 갑자기 일행의 발길은 공회당 옆 건물로 향했다. 아까는 유심히 보지 않았던 큰 건물이었다. 건물은 통풍을 위해서인 듯 벽을 제외한 사방이 뻥 뚫려 있었고 그 안에는 나무 침상에 누운 환자들로 가득했다.

 주술사로 보이는 몇 명이 처녀티가 나는 여자들의 도움을 받아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보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다. 늙은 주술사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지저분한 천으로 환부를 감싸고 무언가 먹여 주는 것이 전부였다.

 ‘마약이군.’

 하룬은 한눈에 주술사들이 환자들에게 먹이는 액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고통을 잊게 만드는 최후의 약재가 바로 마약이었다. 한마디로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약재가 부족한 거군.’

 마수들에 의해 카르가 봉쇄당한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었다고 하니 비축했던 약재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이곳은 물론 근처 건물의 그늘에 눕혀진 환자들의 숫자는 물경 200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다루미가 그들을 이끈 곳은 가장 구석진 곳으로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땀을 흘리는 청년이 옆구리에 세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를 안고 누워 있었다.

 “피체크!”

 한걸음에 달려가 청년의 이름을 불러 보는 타킴이지만 문신의 선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청년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아이가 힘겹게 큰 눈을 떴지만 동공에서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체크는 열이 심해서 이틀 동안 정신을 잃고 있어. 주루도 시하게 열이 나고 아무것도 먹지를 못해. 날 두고 둘이 죽을까봐 무서워 죽겠어! 흑! 흑!”

 다루미의 말에 타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크흑!”

 “비켜 봐!”

 레미가 황급히 타킴을 밀어내고 청년의 환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짚이는 데가 있는지 모포를 걷어냈다. 얇은 모포를 걷어내자 드러난 그의 왼쪽 다리는 퉁퉁 부어 있었다. 상처 부위는 허벅지였는데 그곳에 피와 고름으로 지저분해진 천이 둘둘 감겨 있었다.

 레미는 소드를 꺼내어 천을 잘랐고 조심스럽게 피와 고름이 굳은 천을 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드러난 상처 부위는 끔찍했다. 손바닥 크기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시꺼멓게 변색된 살들 사이로 뼈가 드러난 상처 부위는 마수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 어때?”

 다루미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지만 레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몇 개의 물건을 꺼냈다. 그녀는 그중 작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소도의 날을 잠시 담갔다가 꺼내 검게 썩어 들어간 살점을 소도로 과감히 베어내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살들 사이로 검붉은 피와 거름이 새어 나왔지만 레미는 익숙한 솜씨로 살들을 떼어 내고 흐르는 피와 고름을 닦았다.

 시간이 잠시 흐르자 환자의 상처 부위에서는 선홍색 피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레미의 칼질이 멈추었다. 피와 고름이 튀어 소도를 잡은 오른손이나 천을 잡은 왼손 모두 엉망이 되었다.

 레미의 시술이 끝나자 하룬은 강한 박하향이 나는 유리병을 열어 그 안에 든 가루를 환부에 뿌리기 시작했다. 약초학을 나름 많이 접한 하룬이라 그 가루가 소독과 지혈에 효과가 좋은 민트 계통의 잎을 말려서 부숴 만든 가루임을 알고 있었다. 레미는 흘러나오는 피를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고마워요, 대장.”

 하룬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레미를 향해 포션을 꺼내주었다.

 “지혈이 다 된 후에 반은 상처 부위에 뿌리고 반은 복용시켜. 죽지는 않을 거야. 이 친구는 너희들처럼 강한 생존 의지를 가진 아카족 전사니까.”

 “그럴 거예요. 피체크는 보툰 마을에서도 소문난 마수 사냥꾼인걸요.”

 그 말에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고 마음을 졸이던 다루미가 주르르 눈물을 쏟아 냈다. 이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좀 놓였던 것이다. 레미는 뛰어난 치료사이며 대장이라는 사람이 준 것은 귀한 포션임을 그녀 역시 알아봤던 것이다.

 곁에 있던 타킴이 스스로 포션을 넘기지 못하는 피체크의 상체를 들어 올리고 조금씩 입안에 흘려 주었다.

 “아이를 좀 보자.”

 그 말에 레미 대신 다루미가 청년의 팔에서 아이를 떼어 하룬에게 들어 올려주었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과 팔다리 그리고 철철 끓어오르는 열로 보아 영양실조, 혹은 다른 이유로 인한 열병이 틀림없었다.

 얼굴을 들어 아이의 상태를 확인한 레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같은 주술사들은 외상 치료는 몰라도 이런 증상에는 특별한 치료제나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레미의 몸짓에 다루미의 큰 눈이 질끈 감겼다.

 하룬은 할 수 없이 나이아를 소환했다.

 -나이아, 이 아이의 몸 안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줘.

 나이아는 군말 없이 아이의 몸 안으로 들어가 곳곳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었다. 그것만으론 안심할 수 없었지만 약초의 생김새와 효능 그리고 복용법은 알아도 병증에는 밝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이아가 아이의 몸속에서 뭔가 발견했는지 그에게 의지를 전해 왔다.

 -하룬, 아이 핏속과 장기를 비롯한 세포에 불순물들이 있어요.

 -불순물?

 -아주 쪼그만 벌레도 있고 뭔가 뭉쳐진 것들도 있는데 이것이 이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 같아요.

 -없앨 수 있겠어?

 -네. 한번 진동을 해볼게요. 예전에 하룬의 몸속에서도 진동을 해서 굳어 가는 근육을 푼 적이 있었잖아요.

 확실히 그런 적이 있었다. 후크란의 캠프에서 기사들을 구하려다가 흑마법사의 석화 마법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이아가 하룬의 체내에서 진동을 해서 마법을 해제시킨 일이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기쁨에 찬 나이아의 말이 들렸다.

 -돼요! 불순물들을 녹이거나 체외로 배출시켰어요.

 그래서일까 펄펄 끓던 아이의 열이 어느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만 고약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나이아, 정말 수고했어! 굉장한 능력이야. 앞으로는 그것을 치료 진동이라고 해야겠다.

 -후훗! 내 능력이 올라간 것이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어서 정말 기뻐요.

 어느새 아이의 몸속에서 나온 나이아가 환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평소 소극적인 그녀의 성격을 고려하면 극히 드문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강한 성취감과 만족감이 환한 미소로 나타나 있었다.

 -이제 부상을 입으면 우리 나이아만 믿어야겠네.

 -푸훗! 하룬이 다치면 어떻게 해서라도 고쳐 줄게요.

 나이아는 진심이 담긴 그윽한 눈빛으로 하룬을 보았다.

 -그래. 믿어!

 하룬은 나이아에게 신뢰가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몸 안으로 돌려보냈다.

 ‘다 나은 건지 모르겠지만 열은 다 떨어졌다.’

 “열은 내렸으니 일단 좀 씻기고 깨어나면 부드러운 음식을 먹여 보세요.”

 “네에? 아, 네! 정말 열이 내렸어! 흑! 흑! 정말, 정말 감사해요. 감사해요!”

 다루미는 하룬이 건네는 아이를 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연방 하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기를 안고 뭔가 이상한 표정과 행동을 하더니 놀랍게도 그가 잠시 안고 있었던 것만으로 며칠 동안 계속 아이를 괴롭혔던 고열이 사라진 것이다. 아이는 열이 떨어져서 그런지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사이 포션으로 피체크를 치료한 레미가 깨끗한 천으로 환부를 정성스럽게 감쌌다. 타킴의 도움으로 반 정도의 포션을 복용한 피체크의 얼굴은 어느 정도 혈기가 돌고 있었다.

 “환자의 열이 떨어지고 있어요.”

 “일단 밖의 그늘로 가자. 이곳은 무엇보다 아이에게 좋지 않아.”

 하룬의 말에 타킴과 다른 대원들이 나서서 침상을 밖으로 옮겼다. 다루미가 주루를 안고 연방 눈물을 훔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을 급하게 불렀다.

 “잠깐만요!”

 돌아보니 십 대 초반의 소녀가 다급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저도 아카족이에요. 제…… 아빠가 죽어가요. 좀 봐주세요.”

 눈물이 맺혀 있는 소녀의 눈길이 닿은 곳은 피체크의 침상과 몇 개 떨어진 곳에 놓인 침상이었다. 그곳에는 얼굴 반쪽을 천으로 감싼 장년인이 누워 있었는데 그 곁에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의 중년 여자가 애절한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부부의 얼굴 한쪽에 새겨진 문신은 그들이 아카족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어느 마을에서 왔니?”

 레미가 측은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츠툰 마을에서요. 우리 마을도 한 달 반 전에 이곳처럼 마수의 습격을 받았어요. 마수들을 몇 번 막다가 포기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탄툰 마을로 피난을 갔는데 우린 아빠가 이웃 몇 분과 함께 사냥을 나가 떠나지 못했어요. 다행히 아빠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탄툰 마을로 가는 중에 프로즐리를 만나서 그만…….”

 그러고 보니 창백한 얼굴로 남편을 돌보고 있던 소녀의 엄마 역시 환자였다. 그녀의 오른팔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 도망을 치긴 했는데 어른들이 모두 다쳐서 가까운 이곳으로 왔어요. 이곳까지 오다가 6명이나 마수에게 죽고 말았어요. 제 동생도……. 흑! 흑!”

 소녀는 결국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소녀의 오열에 대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몇 명은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비록 먼 혈연관계이긴 하지만 일족의 비극에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걱정 마렴. 자, 울음을 그쳐! 아카족 여자는 쉽게 울지 않아. 우린 아카족의 미래잖아.”

 애써 눈물을 참은 레미가 소녀를 안고 달래자 이내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디온, 몇 명과 함께 근처에 잠시 치료에 쓸 만한 건물이 있는지 찾아봐!”

 자신들이 묵을 공회당도 나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방치를 한 터라 환자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하룬의 말에 디온이 몇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급하게 흩어졌다.

 “옥세르, 아카족 환자들을 찾아서 밖의 그늘로 옮겨.”

 “네, 대장!”

 옥세르와 다른 대원들은 대부분 의식을 잃은 환자들 중에서 일족 특유의 문신을 새긴 아카족 사람들을 찾아 침상째 밖으로 내왔다. 그런 와중에도 생기를 잃은 치료사들은 관심 없다는 듯 피로에 절어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하룬은 깊은 눈을 가진 소녀에게 물었다.

 “이라하예요.”

 “좋은 이름이구나, 이라하! 넌 여기서 잠시 기다렸다가 주루 엄마처럼 일을 마치고 치료소로 돌아오는 마을 사람들을 우리에게 안내해주렴.”

 “알았어요, 아저씨.”

 “아저씨는 아닌데…….”

 하룬은 아저씨라는 호칭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타고나길 노안인 것을 어쩌랴. 무서워하면서 피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룬은 일행들을 따라 빈 건물로 향했다.

 밖의 그늘로 옮긴 아카족 환자들의 숫자는 23명이나 되었다.

 하룬이 먼저 나이아를 소환해서 환자의 상처와 몸 내부를 소독, 정화를 시키고 치료 진동을 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환자들의 환후는 많이 좋아졌다. 그 다음에는 레미가 환부를 돌봤다.

 환자들은 대부분 이곳으로 피난을 오는 와중이나 이 카르를 지키다가 마수들에게 부상을 입었다. 물론 여자 환자들의 경우에는 병구완과 공동 노역을 하다가 피로 때문에 생긴 평을 앓고 있었다.

 남자 환자의 대부분은 제대로 된 치료도 없이 오랫동안 방치된 터라 외과적 수술이 급한 경우가 많았다. 레미는 대원들 중 막내인 타킴과 레온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거나 증상에 맞는 약재를 준비했다. 레미를 제외하고는 약재에 가장 밝은 하룬도 도와야만 했다.

 그렇게 치료가 일단락이 되었을 때는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대장,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원들과 우리가 묵을 공회당을 급한 대로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아무래도 피난을 오거나 거래를 위해 왔다가 이곳에 억지로 머무르게 된 이들 때문에 그런 거 같다. 아쉽지만 그래도  청소를 했다니 다행이다.

 “수고했어! 일단 환자들을 안으로 옮기자.”

 환자들을 공회당 안으로 옮기고 나니 시장기가 엄습해 왔다. 생각해 보니 점심을 거른 것이다.

 “두르본, 수프를 준비해. 환자들과 보호자들도 먹어야 하니까 고깃가루와 야채 가루 그리고 버섯 가루도 많이 넣어서 끓이도록 해. 사람들이 많으니 넉넉하게 준비해야 할 거야.”

 “알겠어요.”

 두르본은 몇 명의 대원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고 온 마법 배낭에는 각종 취사도구는 물론이고 다양한 식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헤겐 성을 나온 이래 일행의 식사는 그녀가 책임지고 준비를 해 왔고 도네이스로부터 몇 가지 레시피를 전수받은 덕분에 제법 먹을 만한 음식도 만들 줄 알았다.

 한창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환자들의 가족들이 공동 노역을 마치고 돌아왔다. 대부분이 여자들과 아이 티를 갓 벗은 소년 소녀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계속된 병간호와 식량을 얻기 위한 공동 노역으로 인해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대원들 몇 명은 그들 중에서 제법 혈연관계가 가까운 이들을 찾을 수 있었다.

 “옥세르, 여긴 어쩐 일이야?”

 “티나, 여기 있었던 거야?”

 티나는 옥세르와 같이 자란 오랜 친구였지만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간 이후 처음 만났다. 그녀는 콧수염이 거뭇거뭇 자란 소년 둘과 함께 한 침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여길?”

 “마수 가죽을 도시까지 가서 팔고 식량을 구해 돌아가는 길이야. 그럼 너희 마을까지?”

 “응. 마을 주변에 마수들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 너희 마을로 피난을 가다가 아이들이 잠시 사라지는 바람에 그만 우리 가족만 따로 떨어지게 됐어. 산열매를 따러 갔던 아이들이 돌아와 뒤따라가려고 했는데 어느새 마수들이 길목을 막고 있더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이곳으로 오게 된 거야.”

 “네 남편은?”

 “야르만은 여기 있어. 목책 위에서 치투족과 함께 마수들을 막다가 허벅지와 옆구리에 큰 부상을 입었어. 흑! 흑! 여기 주술사들은 더 이상 약이 없어서 치료를 할 수 없대. 며칠째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어쩌면 좋니?”

 티나는 결국 남편 야르만의 품에 고래를 묻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뒤에 선 두 소년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으으.”

 그녀의 머리가 무거웠던 걸까? 환자가 신음을 흘렸다.

 “야르만, 맙소사! 야르만이 눈을 떴어!”

 야르만이 눈을 뜨고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한 티나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의 눈은 이전과는 다르게 힘과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남편의 허벅지와 옆구리의 상처 부위를 감싼 깨끗한 천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대장과 레미가 네 남편의 상처를 치료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세상에! 오!”

 티나는 자신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남편의 얼굴을 부여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빠!”

 “아버지!”

 험상궂은 인상의 옥세르와 엄마의 대화 때문에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던 두 아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침상으로 달려들었다.

 공회당 곳곳에서 이런 장면이 일어났다.

 “어둠의 신 발몬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급기야 신을 찾으며 감사를 올렸다. 소중한 가족이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된 상황이지만 당장 먹을 식량이 급해 의식을 잃은 환자를 두고 공동 노역을 하고 돌아왔던 아카족 사람들에게 이것보다 더한 선물은 없었다.

 “자! 맛 좋고 영양 많은 두르본의 수프와 따듯하고 하얀 밀 빵입니다.”

 두르본이 몇 명의 대원과 함께 완성된 수프의 빵을 의식을 찾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밀 방이다!”

 “이건 고기 수프야!”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음식에 달라붙었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지만 노역에 시달린 소년 소녀들은 고소한 수프 냄새를 맡고 이성을 잃은 것처럼 환장을 했다. 순식간에 나눠준 수프 그릇을 비운 아이들에게 두르본은 넉넉하게 수프를 더 주었다.

 “수프는 얼마든지 않으니까 빵이 식기 전에 같이 머 ㄱ으렴.”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던 두르본이지만 같은 일족의 아이들을 대하는 눈은 따스했고 그 손길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했던 공회당은 어느새 정신없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웃음과 밝은 대화로 채워졌다. 이렇게 맛 좋은 수프의 빵은 처음 먹어 본다는 듯 사람들의 손길이 바삐 움직였다.

 “대장도 한 그릇 하세요.”

 레미가 하룬 몫의 수프와 빵을 받아 그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은 연속된 치료로 인해 피로에 젖어 있었지만 그 표정만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이럴 때가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통하는 상황이지만 하룬은 억지로 수프와 빵을 먹었다. 어쩌면 오늘 밤에 마수들을 볼 수도 있고 여차하면 놈들을 상대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 배는 채워야 했다.

 데빌 산맥에 자리를 잡고 사는 일족이니만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다 연결되는 사이였다.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대원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감사 인사를 받은 것도 그렇지만 일족의 생명을 구했다는 자긍심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만 혼자로군.’

 그러고 보니 자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헤니라도 데리고 오는 건데 그랬다는 가벼운 후회를 해본다.

 식사를 마친 하룬은 마침 자신을 보는 디온과 옥세르를 불렀다.

 “카르 구경이나 해보자.”

 “안내를 하겠습니다.”

 어릴 때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는 디온과 대장의 호위는 자신이 맡겠다는 옥세르가 하룬을 따라 나섰다.

 카르 곳곳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어 어둠을 밝혔다. 식사를 준비하는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전투를 앞에 둔 긴장감이 카르 전체에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지금 카르는 전시 상황이라 구경할 것이 없네요. 그래도 탄이 거주하는 곳에는 상점들이 여러 개 있는데 지금은 문을 닫았을 겁니다.”

 디온의 말에 더 이상 카르 안을 구경할 생각이 사라졌다.

 ‘어디 목책이나 구경해 볼까?’

 하룬은 괜히 치투족과 엮이기 싫어 환하게 불을 밝힌 남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향했다.

 “대장, 그곳에는 문이 없습니다.”

 “알아.”

 그가 향한 서졲에는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이 었었다. 카르의 입구는 오로지 데빌 산맥을 바라보는 남쪽이었기에 문도 거기밖에는 없었다.

 하룬은 앞을 가로막는 목책을 단숨에 뛰어올랐다. 그를 따라 디온과 옥세르도 목책을 발끝으로 한두 번 차고 따라 올라왔다.

 ‘이 정도면 유사시에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겠군.’

 거주지를 보호하는 내부 목책ㅇ근 장정이 두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굵기의  통나무로 세워져 있었는데 그 높이가 5미터 정도였고 그 밖에는 폭 5미터 정도의 물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리고 내부 목책 너머로 400~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외부 목책이 보였다. 두 목책 사이에는 갖가지 작물이 심어진 경작지가 있었다. 채소들은 물론이고 보리와 밀이 구획별로 심어진 경작자의 면적은 상당히 넓었다.

 ‘그렇다면 이 카르는 반지름이 600미터 정도 된다는 이야기군.’

 실로 엄청난 넓이였다.

 “대단하지요? 이곳에서 생산되는 작물의 양은 엄청납니다. 치투족은 여기에서 생산한 작물들로 우리 산악 부족을 상대로 거래를 합니다.”

 디온의 말대로 생산량이 엄청날 것 같다. 사시사철 기온 변화가 별로 없는 온난한 지역이라 마음만 먹으면 삼모작도 가능할 정도였다. 지력地力만 유지시킬 수 있다면 연중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게 다 저 목책과 결계 주술 덕분입니다. 그래서 항상 식량이 부족한 우리 산악 부족들은 언제나 카르 안에서 살 수 있는 치투족을 부러워해 왔습니다.”

 목책은 어지간한 몬스터들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고 높았다. 이 정도의 목책을 두르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내부 목책으로 보호받는 거주지의 크기도 상당한데 외부 목책까지 합하면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었을 것이다.

 ‘이러니 엄청난 폭리를 취할 수 있었겠지.’

 산악 부족들 입장에서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곳과 거래를 했을 것이다. 아카족처럼 직접 거래를 위해 도시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그나마 아카족들은 자신들을 찾아왔던 상인들 때문에 마수 가죽과 마정석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았기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지 다른 산악 부족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폭리를 취하는 카르와 오랫동안 거래해 왔을 것이다.

 목책에서 뛰어내린 하룬은 물구덩이를 넘어 착지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메신저 스킬을 펼치며 느긋하게 외부 목책으로 향했다.

 ‘호! 상당한데.’

 가까이에서 외부 목책을 본 하룬의 눈이 커졌다. 목책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목책에 붙여 4미터 정도의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린 것이다. 벽돌 사이에 진흙을 채워 단단히 굳힌 폭 3미터의 벽은 목책을 굳건히 지지해줄 뿐 아니라 경계병이 그 위에 올라 효과적으로 목책을 넘어오는 적을 상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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