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상카와의 조우 (184/278)

《상카와의 조우》

 다음 날 일찍 하룬은 아카족 대원들을 이끌고 데빌 산맥을 향해 길을 나섰다. 황실과 마탑 그리고 신전 사람들은 하룬이 그들과 함께 이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한 모양이지만 그가 따로 할 일이 있다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여정은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신전의 사제들과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더 이상 언데드나 마수를 부리는 흑마법사를 만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상대한 거라곤 인간들이 사라진 후 이 기름진 마츠 평원을 차지한 흑색 오크들과 맹수들이 고작이었다.

 딜런을 비롯해서 여러 선배 대원들의 도움을 받은 아카족 대원들의 능력은 데빌 산맥을 떠날 때에 비해 적게는 두 배 이상 높아진 상태이기에 오크 정찰대 정도는 가벼운 운동거리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

 티노의 각별한 관심을 받고 그의 스카우트 스킬을 전수받은 타킴은 척후 임무를 아주 훌륭하게 수행해 냈다. 티노가 그랬듯 무력은 좀 약한 편이지만 발도 빠를 뿐 아니라 주의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체력 안배를 위해 정해진 거리를 이동하면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물론 휴식 시간에도 누구 하나 빠짐없이 수련 검식과 마수의 힘을 사용하는 훈련을 하며 나날이 달라지는 자신을 능력을 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어느새 멀게만 보였던 데빌 산맥의 하얀 산봉우리들이 가까워졌고 대원들은 마치 벌써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활기차게 움직였다.

 헤겐 성을 떠난 지 일주일이 되는 날 오전이었다.

 일행과는 약 백 걸음 정도 앞서 척후를 보던 타킴이 긴급한 수신호를 보냈다. 앞에 마수들이 보인다는 신호였다.

 “가자!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단숨에 처리하자.”

 지금의 아카족 대원들 실력이면 브롤프나 람비 정도의 마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더구나 사기까지 높으니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와아!”

 “가자!”

 대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전방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타킴이 있는 곳까지 달려간 대원들이 본 것은 기대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대장님, 마수들이 누군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타킴의 보고를 듣지 않아도 이미 눈으로 보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작은 숲의 입구에서 10여 명의 원주민 전사들이 스무 마리가 넘는 브롤프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저들은 치투족이에요.”

 곁에 서 있던 레미의 설명이었다.

 “치투족이라면?”

 “카르라고 부르는 높고 단단한 목책을 세워 거주지와 경작지를 보호하며 사는 부족이에요. 카르는 치투족 주술로 그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결계가 쳐져 있기 때문에 마수들이나 몬스터들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이에요. 산악 부족들과는 달리 작물을 직접 재배하고 상인들과도 오랫동안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물물교환을 하지요.”

 이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곡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산악 부족들이 자주 거래를 하는 부족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원들의 치투족에 대한 생각은 무척 부정적이었다. 당장 몇 대원이 그들을 성토했다.

 “나쁜 놈들이다.”

 “우리를 직접 찾아오던 상인들보다 더 돈을 밝히는 놈들이다.”

 “마수 가죽 한 장에 밀가루 한 자루밖에 쳐주지 않는 욕심 많은 놈들이야.”

 하룬은 대원들의 말을 들으며 치투족이 그간 산악 부족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치투족이 이곳까지 나온 거지?”

 “그러게. 저 녀석들은 겁쟁이라서 카르 밖에는 함부로 나다니지 않는데.”

 대원들은 도울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하룬은 대원들의 반응을 보며 그동안 이들이 치투족에게 얼마나 당해왔는지를 여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마수 따위가 인간을 해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가자! 저들에게 우리 돌풍 용병대의 위용을 보여주자!”

 대원들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하룬의 명령에 지체 없이 땅을 박찼다.

 하룬 일행이 숲과 가까워지자 브롤프 열 마리가 머리를 돌려 일행을 향해 달려왔다. 늑대를 닮은 머리통을 가진 브롤프는 송아지 크기로 엄청난 강도의 발톱과 이빨을 가진 마수였다.

 “1조부터!”

 “끼야악!”

 “후로오옷!”

 후미에서 레미와 함께 따라오던 하룬의 명령에 두르본이 이끄는 9명의 대원들이 한발 앞서 달려갔다. 그들은 기성奇聲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마수의 힘을 끌어 올렸다.

 붉은 안광을 한 놈들이 허연 침을 흘리며 달려오는 모습은 무척 살벌했지만 겁을 먹은 대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살아 있는 놈들뿐 아니라 스켈레톤 마수들과도 싸워 본 대원들은 더 이상 마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드디어 1조 대원들과 브롤프들이 부딪혔다.

 빠각!

 써억!

 둔탁한 타격음과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일행을 향해 짓쳐 들었던 마수 열 마리는 어울리지 않는 비명을 토하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깨앵!

 캐액!

 바위까지 부수는 괴력을 지닌 프로즐리의 힘을 끌어 올린 대원들이 휘두른 무기를 맞받는 무모한 공격을 가했던 브롤프들은 앞발이 부러지고 머리통이 날아가는 등 처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2조가 마저 처리해!”

 두르본의 1조는 그대로 치투족들을 공격하는 브롤프들을 향해 달려가고 마찬가지로 프로즐리의 힘을 끌어 올린 옥세르의 2조가 엄청난 힘이 실린 무기로 급소를 가격해서 상처를 입고 발광을 하던 놈들의 숨을 끊었다.

 “하하하! 가자!”

 옥세르는 찌릿한 손맛을 느끼며 람비의 힘을 더 끌어 올려 1조를 따라 달렸다.

 작은 숲 입구에서 브롤프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던 치투족 전사들의 상황은 무척 위태로웠다. 이미 상당한 전투를 치렀는지 입고 있는 방어구들은 그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찢어진 상태였고 그 사이로 뼈가 훤히 드러난 상처를 입은 전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끄아악! 살려 줘!”

 그중 몇 명은 이미 브롤프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사지가 뜯겨 나간 채로 처참한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몸으로 그런 부상자들의 앞을 가로막고 브롤프들의 이빨과 발톱을 안간힘을 쓰며 막아내는 전사 여섯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끼요옷!”

 “호로로롯!”

 이제 마지막 공격을 가하려던 브롤프들은 뒤에서 들려오는 기성에 자극을 받은 듯 일제히 머리를 돌리고 빈틈을 드러냈지만 치투족 전사들은 그걸 노릴 기력도 없었다.

 크르르르!

 크아아앙!

 브롤프들은 뒤늦게 나타난 인간들을 상대하러 갔던 일족이 모두 죽은 것을 발견하고는 분노의 포효와 함께 아카족 전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 브롤프의 숫자는 열두 마리였고 그중 두 마리는 다른 녀석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몸집도 다 자란 들소처럼 거대했다.

 “디온, 옥세르, 우두머리를 맡아!”

 하룬의 말에 두 전사가 브롤프 우두머리 두 마리를 향해 달려갔다. 한 번에 무려 5미터씩 뛰는 브롤프인지라 금세 인간 둘과 마수 둘은 공중에서 아주 격렬하게 마주쳤다.

 꽈앙! 꽈직!

 디온은 브롤프 수컷과 함께 뒤로 튕겨졌지만 옥세르는 암컷 브롤프의 발톱을 부러뜨리고 놈의 머리통에 대도를 박아 넣었다. 역시 힘에 있어서는 옥세르가 한 수 위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끼요옷!”

 착지를 하자마자 자세를 바로잡은 디온이 자존심이 상한 듯 기성을 지르며 다시 도약했다. 브롤프 수컷 역시 지체 없이 아가리를 벌리며 디온을 향해 뛰어올랐다.

 막 디온의 검이 브롤프의 앞발과 부딪히려는 순간 디온의 허리가 오른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꺾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퍼런 오러 광에 휩싸인 그의 검은 몸과 함께 거의 불가능한 궤적을 그렸다.

 써걱!

 깨앵!

 서늘한 절삭음과 함께 브롤프가 비명을 토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진 놈의 왼쪽 어깨가 갈라져 있었다. 놈은 다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안타깝게도 디온의 검이 놈의 노출된 심장을 파고들었다.

 푸욱!

 깽!

 놈은 단말마 비명과 함께 경련했다. 디온의 검이 놈의 심장을 헤집었던 것이다.

 놈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검을 거둔 디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머지 브롤프들은 1조 대원들과 뒤이어 달려온 2조 대원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한 상태였다.

 ‘정말 우리 실력이 엄청나게 올랐구나!’

 찰과상을 입은 대원을 제외하고는 다들 멀쩡한 것을 본 디온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 정도면 데빌 산맥의 산악부족 전사들 중에서는 거의 수위에 들어가는 실력자들이 된 것이다.

 “두르본, 가죽을 벗기고 마정석을 회수해라.”

 “넷! 들었지? 빨리 움직여!”

 대장과 두르본의 대화를 두르며 디온과 옥세르는 자신의 무기에 묻은 마수의 피를 닦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대가리니까 마정석도 큼직하겠지?”

 “아무렴!”

 디온과 옥세르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눈으로 웃으며 익숙한 솜씨로 자신들이 처음 잡은 브롤프 우두머리들을 도축했다.

 “발리 마무리해라! 바로 출발할 거니까.”

 “네, 대장.”

 하룬은 대원들의 도축 작업도 끝났고 치투족 전사들의 부상을 응급 처치하는 레미의 작업도 거의 끝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떠나려고 했다. 대원들 중에 누구도 이들과 안면이 없는 터라 공치사나 감사 인사를 듣는 것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때 레미에게 응급 처치를 받은 전사들 중 1명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하룬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그 모습이 뭔가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오?”

 “시, 식사라도 대접을 하고 싶은데요.”

 하룬은 그의 말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인사도 없이 이런 상황에서 식사라니……. 다급한 나머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아닙니다. 저희도 갈 길이 멀어서요.”

 그건 사실이었다. 마츠 평원에서 몇 차례나 마수들과 언데드들을 부리는 흑마법사를 상대했고 데빌 산맥에 걸쳐 많은 성이 건축되는 것을 확인했기에 아카족 대원들은 한시라도 빨리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아! 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전 치앙 카르를 다스리는 탄의 둘째 아들로 치투족 전사를 지휘하는 전사장 상카라고 합니다.”

 “난 하룬이고 저들은 내가 이끄는 돌풍 용병대의 대원들입니다.”

 두르본을 위시한 대원들이 상카에게 눈으로 인사를 했다. 아카족 대원들을 훑는 상카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마침 근처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뿐입니다.”

 귀찮다는 듯 인사를 받는 하룬의 태도에 상카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변했다.

 “어,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우리 대원들의 고향인 탄툰 마을로 가는 길입니다.”

 하룬의 말에 상카는 이제야 대원들이 아카족인 것을 알아차렸다.

 “아! 그렇군요. 전신에 새긴 그 문신들이 어쩐지 눈에 익었습니다.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금방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대화를 나눌수록 상카는 진정이 되는지 피범벅이 된 얼굴을 엉망이 된 방어구 조각으로 닦아냈다. 여전히 남아 있는 피로 인해 붉게 보이긴 했지만 상카의 나이가 이십 대 후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잘됐습니다. 탄툰 마을을 가는 길에 우리 치앙 카르가 있습니다.”

 상카의 말에 하룬이 사실을 확인하듯 레미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 길도 있기는 하지만 지름길이 있습니다, 대장.”

 레미 대신 차갑게 느껴지는 두르본의 말에 상카가 자신도 모르게 피가 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 그렇지만 우리 카르에는 여행에 필요한,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물이나 식량 그리고 무기까지 없는 것이 없습니다. 저희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꼭 갚고 싶으니 잠시 쉬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대원들이 메고 있는 배낭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짐이 없는 것을 확인한 상카의 말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하룬의 말은 그의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아니요. 별로 필요한 물건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치지도 않았으니 쉴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마법 배낭에 탄툰 마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이 가득한 터라 특별히 그들 마을에 들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상카는 하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도, 도와주십시오!”

 “네?”

 그때 부상자들을 응급 처치한 레미가 하룬 곁으로 와 물었다.

 “카르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네.”

 레미의 물음에 상카가 다급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우리 카르 주변으로 람비와 브롤프를 비롯한 마수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었습니다.”

 “마수들요?”

 “네. 마수들이 출몰하는 일이야 이곳에선 흔한 것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결계까지 깨져 카르가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요?”

 “결계가 약해지고 카르 주변에 마수들이 모습을 보인 것은 석 달 정도 되었습니다. 깨진 결계를 수리하려고 나간 전사들과 주술사가 마수에게 죽는 일이 일어난 것이 그때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카르로 주변의 산악 부족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카족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을이 마수들의 습격을 받아 이리저리 흩어져 피신을 왔다고 하더군요.”

 상카의 말에 대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비록 탄툰 마을이 안전한 곳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이다.

 “마수들은 하루가 다르게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결계가 파괴되어 모습이 드러난 우리 카르는 마수들의 목표가 되고 결국 카르는 한 달 전부터는 마수들에 의해 완전히 봉쇄가 되었습니다.”

 상카는 목이 타는지 억지로 침을 넘기고 말을 이었다.

 “세를 불린 마수들은 카르를 둘러싼 목책을 넘으려고 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동안은 그래도 카르의 전사들이 애써 준 덕분에 근근이 막아낼 수 있었지만 마수들의 숫자가 늘어 이제는 더 이상 막아내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프로즐리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지지대로 보강한 목책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이 마츠 평원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대원들이 모두 둥글게 모여 상카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다들 걱정이 되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부르카 부족의 수호조인 에쎈을 몇 마리나 날려 다른 카르나 다른 부족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기 부족장인 제가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오래전에 뚫어 놓았던 땅굴을 통해 빠져나왔지만 밖에는 이미 마수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카르를 나온 이래 마수들과 세 번이나 싸웠습니다. 서룬이 넘던 전사들이 이제 저희밖에 남지 않았고요. 이렇게 마수들이 날뛰는 것을 생각하면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다른 카르들 역시…….”

 상카를 비롯한 치투족 전사들의 눈빛은 암울했다. 그러고 보니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전사들이 없었다. 팔 한 짝이 뜯겨 나가고 어깨 부위의 살점이 푹 파인 부상자는 수면 약초의 도움으로 잠이 든 상태였다. 그나마 레미의 응급치료로 인해 사망자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까 용병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의, 의뢰를 하겠습니다. 우리 카르를 방어하는 데 힘을 좀 거들어 주십시오. 아니, 카르를 둘러싸고 있는 마수들을 좀 처치해주십시오.”

 상카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아카족 대원들과는 달리 상인들이나 다른 산악 부족들이 자주 출입하는 카르의 전사답게 용병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대뜸 의뢰를 요청해 왔던 것이다.

 하룬은 대답 대신 두르본을 비롯한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대원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대원들의 마음은 이미 탄툰 마을에 가 있었다.

 하룬이 대원들의 얼굴을 살피며 침묵을 지키자 그의 마음을 읽은 레미가 나섰다.

 “심각한 상황이군요. 별일 없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 의뢰를 받아들여야겠지만 우리는 이미 다른 의뢰를 받아들여 수행하고 있는 중이에요. 미안해요.”

 “크윽!”

 레미의 단호한 거절에 상카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런 몸으로 다른 카르까지 가는 것은 무리야.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을 거야. 카르로 향하는 땅굴의 입구까지 가는 도중에 죽기 십상이야.’

 자신도 그렇지만 여기까지 동행했던 카르의 전사들 상태는 최악이다. 지난 이틀간 제대로 쉬지도 자지도 못하고 마수들을 피해 도망치거나 상대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이들을 붙잡아야 해!’

 상카는 자신이 아는 얼굴은 없었지만 이들의 실력만은 확신했다.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전사 두셋으로도 상대하기 버거운 브롤프들을 이들은 일대일로 상대한 것은 물론 모두 죽여 버렸다. 대장이라는 자는 아무 손도 쓰지 않았다.

 ‘이들이라면 마수 백 마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를 할 수 있어. 설사 마수들을 모두 처리하지 못하고 카르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최악의 경우 우리 치투족의 아이들은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상카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지막으로 부탁을 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들어 드리겠습니다. 카르가 무너지면 2,000명이 넘는 생명이 마수의 먹이가 될 겁니다. 마수들로부터 카르를 지켜 달라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치투족 아이들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허어, 참!”

 상카는 결국 무릎까지 꿇었다. 그를 따라 치투족 전사들까지 힘겹게 무릎을 꿇고 애원을 했다.

 하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카르에 머무는 인원이 2,000명에 달한다는 말을 들으니 단호하게 거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희들이 결정해.”

 하룬은 대원들에게 그 결정을 맡기기로 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꼴은 볼 수 없어 끼어들기는 했지만 이들 부족 간에 오랫동안 쌓여 온 사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카르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2,000명이 넘는 인원이 있는 곳을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이라면 마수의 수는 적어도 수백 마리는 될 것이다. 그런 마수들을 상대하다 보면 대원 중에서도 사상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이 사안은 자신의 독단으로 처리할 일이 아닌 것이다.

 대원들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낮은 소리로 의논을 했다. 금방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을 보니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잘 은폐된 곳에 건설되었다고 해도 마수들이 카르 단위를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일 정도로 횡행하니 안심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잠시 후 두르본이 다른 대원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대장, 치앙 카르로 가요.”

 결론이 났다.

 “그럼 이들에게 받을 것은?”

 하룬이 묻자 두르본은 강렬한 눈빛으로 상카를 주시했다.

 “치투족의 보물을 받아야겠……어요, 대장.”

 두르본의 말에 상카를 비롯한 치투족 전사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건?”

 “결계를 칠 수 있는 주술이 필요하다. 그걸 줄 수 없다면 다른 자들을 찾아봐라.”

 “……!”

 조건이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상카는 금방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카르를 유지하는 것은 목책이긴 하지만 그 전에 시각과 후각을 포함한 감각을 흩어 놓는 결계를 유지하는 주술이 그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무릎을 꿇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소. 주겠소. 대신 의뢰 조건은 바꾸겠소. 우리 아이들은 반드시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주시오. 아카족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 주시오.”

 상카는 돌풍 용병대의 이름이 아니라 아카족의 명예를 들먹였다. 그것이 그에게는 더욱 믿을 만한 징표일 것이다.

 “알겠다. 아카족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지키겠다.”

 두르본의 맹세에 상카의 눈빛이 밝아졌다.

 “고맙소. 그럼 갑시다.”

 상카는 일어나려다가 휘청했다. 힘이 풀렸던 것이다. 재빨리 그를 잡은 것은 디온이었다.

 “전사의 복수는 급한 것이 아니다. 피로부터 풀어야 제대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상카는 이를 악물었지만 근육은 무력했고 뼈들은 비명을 질렀다. 피로가 한계점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것을 먹어요.”

 레미가 품에 넣고 다니던 조그만 상자를 열고 손톱 크기의 약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치투족 전사들에게도 주었다.

 “주문을 외울 테니 동조시켜요.”

 레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운율은 단조로웠지만 묘하게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것을 알아본 상카의 눈이 커졌다.

 “모두 지체하지 말고 먹어! 그리고 몸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풀어. 자도 되니까 편한 자세를 취해. 이질적인 느낌이 엄습하더라도 우리에게 좋은 것이니 그냥 받아들여!”

 그는 다양한 산악 부족들을 접해 봤기 때문에 주술도 잘 알고 있었다.

 레미가 말한 ‘동조’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하룬은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주술의 힘으로 약 기운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리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술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상카를 필두로 치투족 전사들은 일제히 약을 복용하고 저마다 편한 자세를 취했다. 상처 때문인지 대부분 그 자리에 누웠지만 상카는 양다리를 꼬고 명상하는 자세를 취했다.

 “……아르보리쿰 아니바스할 나다 이스림다쿤스뎁니…….”

 낮지만 묘한 힘을 가진 주문은 금세 레미를 중심으로 몇 미터 정도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룬은 레미의 입을 통해 나온 진동파가 상카를 비롯한 치투족 전사들의 몸을 향해 퍼져 나가는 것과 어느 순간 치투족 전사들의 몸이 진동파를 받아들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종의 진동파로 약 기운을 녹이고 활성화시키는 거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젠 자연스럽게 집중을 하면 샤키의 눈이 활성화되어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것들까지 인지할 수 있게 된 하룬이다.

 잠시 더 지켜보던 하룬은 대원들을 향해 물러섰다.

 “이들을 보호하는 자세로 편하게 쉰다!”

 레미를 방해할까 싶어 될 수 있는 대로 낮게 말한 하룬의 의도를 읽었는지 대원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제자리에 앉거나 서서 쉬면서 명상의 전 단계로 들어갔다. 크게 힘을 쓴 느낌은 없었지만 딜런이 가르친 대로 싸움이 끝나면 항상 그 싸움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 방법을 찾는 명상을 하는 것이다.

 딜런에게 이것을 배운 전사들은 대련이나 실전을 거칠 때마다 전과는 달리 큰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본신의 힘이나 마수의 힘을 사용하여 싸우는 것과 자신의 전투 장면을 회상하며 전투 시 자신의 장단점이나 다른 방법을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빠르게 실력이 올라가고 있었다.

 하룬은 아직 의식을 나누지 못하는 상태인 대원들을 위해 경계를 섰다. 대원들의 수준으로 한 가닥 의식을 분리해서 주변 상황을 경계하는 것은 아직 무리인 것이다.

 한참이 지나자 레미의 낮은 주문이 끊어졌다. 그녀를 쳐다보자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 됐어요!”

 짱짱한 그녀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저마다 편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고 있었던 치투족 전사들이 눈을 떴다. 그런데 그들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리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신기하군.’

 주술로 사기를 올리거나 잠재력을 격발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치료를 할 수 있는지는 몰랐다. 물론 치료 그 자체가 아니라 보조 역할이었지만 아까 레미에게 치료를 받았던 치투족 전사들의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있었고 상태도 며칠 푹 쉰 것처럼 활력이 느껴졌다.

 “고맙소.”

 전사들과 함께 감사 인사를 하는 상카의 말에선 진한 놀람의 감정이 느껴졌다.

 “별말씀을요.”

 “우리 치투족 주술사들은 결계를 치고 거두는 것에는 능하지만 이런 놀라운 재주는 없소. 최고요!”

 상카가 엄지를 들어 보이자 레미는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받으며 몸을 돌렸다.

 사실 다른 부족을 위해 치료 주술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주술은 해당 부족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쉽게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ㅈ라했다, 레미.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주술을 사용하네.”

 디온을 비롯한 동료들은 놀란 눈으로 레미의 주술 실력을 칭찬해 주었다.

 탄툰 마을을 떠날때까지도 약초 치료술은 몰라도 치료 주술은 쓰지 못했던 레미였다.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능력이 큰 폭으로 올라간 것이다.

 “자, 그럼 출발합시다!”

 하룬의 말에 상카와 치투족 전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안내를 하려는 것이다.

 “그 땅굴의 입구는 여기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해가 지는 방향으로 반나절 거리에 있는 키크랄 관목 숲 한가운데 있습니다.”

 키크랄은 가시를 가진 관목으로 강력한 독성이 있어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마수들도 꺼린다. 당연히 안전했을 것이다.

 “혹시 당신의 의사를 상징하는 신물信物이 있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물어보는지는 몰라도 이 목걸이가 카르의 수호 전사장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상카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끌러 하룬에게 주었다. 세 가지 색이 외곽에서 안쪽으로 결을 두고 나뉘어 있는 틀이한 보석이 팬던트 역할을 하는 목걸이였다.

 “우리가 걸음이 빠르니 먼저 가겠소. 당신들은 충분히 쉬면서 따라오시오.”

 “네에? 무슨?”

 상카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하룬은 그에게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들은 대로 키크랄 관목 숲이 우리의 1차 목적지다. 척후는 아까처럼 타킴이 맡고 선봉은 디온이다. 출발!”

 하룬의 말에 타킴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마수의 힘을 끌어올린 그의 날렵한 몸이 바람처럼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그 뒤로 디온을 선두로 대원들이 땅을 박차자 금방 그들의 몸은 마른 풀 사이로 튀어나가며 진한 풀 냄새를 뒤에 남겼다.

 “허엇!”

 “어떻게?”

 뒤에 남은 치투족 전사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한두 명도 아니고 모든 대원들이 질풍처럼 질주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마수의 힘을 쓰는 건가?”

 마수의 힘이 아니면 말이 안 되는 빠르기였기에 상카는 상황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수의 힘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던데.’

 상카는 이제까지 알아왔던 아카족 전사들에 대한 정보를 수정해야 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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