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의 의뢰와 비밀의 편린》
벨, 아리와 함께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비욘드로 돌아오니 벌써 이틀이 지난 아침 녘이었다. 하룬은 부지런히 헤겐 성을 향해 달렸다.
성문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티노가 빠르게 달려오는 하룬을 보고 뛰어내려 마중을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하하! 부대장님,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스킬이 벌써 많이 숙련되었군요.”
무려 5미터가 넘는 성벽 위에서 날아 내리는 것이나 착지하는 동작도 무척 안정된 것을 보니 짧은 시간에 비해 그 발전도가 더 크게 늘어난 것 같아 보였다.
“부지런히 익혀야지요.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저를 위해서 대장님이 특별히 전수해주신 건데요.”
티노는 쑥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강한 자부심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제 모든 면에서 자리에 알맞은 기도와 기품을 가지게 된 티노였다. 그런 티노의 변화가 하룬은 참 보기 좋았다.
“그래, 별일은 없었습니까?”
“안 그래도 마탑과 황실 사람들이 대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그쪽에서 연락이 온 모양입니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대장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요? 빨리 갑시다.”
하룬 역시 어떤 지시 사항이 내려왔는지 궁금했다.
티노는 성벽을 한번 박차고 새처럼 날아올라 이 시간 근무조인 타킴과 병사 출신의 한 중년인에게 잠시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다.
“가시지요.”
활짝 열린 성문을 통과해서 임시 거처로 지내는 지구라트 건물 1층까지 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왔다.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흘렀다.
“보기가 좋군요.”
“병세가 심하지 않은 환자들은 헤니와 레미가 거의 다 치료했습니다. 영양가 높은 식사와 휴식을 취하니 이제 사람 꼴이 나고 있습니다. 노약자들이 별로 없어 어느 정도 시간만 지나면 금방 건강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티노의 말대로 성은 활기에 차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지만 에너지가 가득 찬 아이들은 천진한 웃음을 터트리며 뛰놀고 있었고 집집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티노는 자신이 이야기를 하고도 노약자가 별로 없다는 표현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하룬 역시 마음이 아팠다. 1,000명 중에 겨우 절반 정도만이 살아남은 이들을 대상으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대원들은 지구라트 앞 광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딜런의 지도를 받으며 수련 검식을 펼치고 있는 대원들은 하룬이 지나가는 데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다.
하룬은 동작당 호흡의 길이를 체크하는 딜런과 눈인사를 주고받고는 자신이 썼던 방으로 향했다.
“다녀오셨소, 하룬 대장?”
“아, 네.”
황실 마법사 몰보트가 마침 밖에 나왔다가 그를 보고 깍듯하게 인사를 해왔다.
“일룸 경이 절 찾는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황실에서 새로운 지시가 떨어졌다고 들었지만 베른하트 경이 통신을 담당해서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일룸 경은 병사들과 함께 있으니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룬은 티노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대장은 세르파 마도사님을 찾아 제가 돌아왔다고 알려주십시오.”
두 사람이 움직이자 하룬은 자신이 묵던 방으로 들어가 잠시 차를 준비했다.
먼저 온 것은 일룸이었다. 수련을 하다가 달려왔는지 그가 들어오자 실내는 진한 땀 냄새로 가득 차버렸다.
“하룬 대장!”
“어서 오십시오.”
“어젯밤에 궁에서 지시가 내려왔소.”
일룸은 마음이 급한지 자리에 앉으며 바로 용건을 꺼냈다.
“모든 상황을 보고받으신 황제 폐하께서 무척 분노하시면서 마츠 평원에서 마수들과 몬스터 그리고 간악한 다크니스들을 모두 몰아내라고 국방 댇신 대리인 황녀 전하에게 명령을 내리셨소.”
“그렇군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제까지야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지만 어느 정도 체제가 안정되자 한때 제국 4대 곡창지대였던 마츠 평원을 도모하고 싶었을 것이다.
“황녀 전하께서는 마법사 부대와 다양한 병과의 대대를 포함해서 총 일곱 개 군단 7만 명을 점진적으로 마츠 평원에 주둔시킬 복안을 짜셨소. 그 첫 단계로 공병대를 포함한 한 개 군단을 선발대로 하여 다르 강과 인접한 거점에 성을 쌓도록 명령을 내리셨소. 그 거점은 우리가 평원으로 들어와 첫날 야영을 하며 잠을 잔 곳이오.”
“다른 사항은요?”
“전하께서는 간악한 다크니스 무리에게 납치당했던 이들을 귀 용병대가 그곳까지 호위해 주길 바라셨소. 데빌 산맥과 마츠 평원 그리고 다크니스가 쌓고 있는 성의 위치가 포함된 지도와 그 호위 건으로 한 가지 의뢰는 완수한 것으로 여기겠다고 말씀하셨소.”
“알겠습니다.”
하룬은 가슴이 후련했다. 무려 천만 골드의 의뢰 내용 중 하나는 이렇게 완수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전언이 있었소.”
“전언요?”
“그게…….”
일룸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2차로 파견되는 군단과 함께 전하께서 친히 이 마츠 평원으로 오신다고 하오. 대장과 마츠루트 요새에서 비밀리에 만나자고 하셨소.”
“마츠루트 요새요?”
“그렇소. 그곳은 현재 어느 제국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지역이 되었지만 사실 우리 파이린 제국의 영토요. 전하께서 그곳을 방문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하룬이 생각하기에는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곳은 어차피 가려고 했다. 겨루와 방커가 발트랑과 함께 아직 그곳에 머무르고 있을 뿐 아니라 다크니스에 대한 다른 정보들을 그곳에서 알아보려고 했다. 그곳은 중립 지역이니 다크니스의 촉수가 분명히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선발대가 마츠 평원에 도착하는 날짜는 언제입니까?”
“남부 군단에서 인원을 차출할 것이니 그렇게 많이 걸리지는 않을 거요. 내 예상으로는 빠르면 20일, 길어도 한 달이면 다르 강에 임시 교량을 만들 수 있을 것이오.”
“흐음. 그럼 어느 정도 여유는 있군요.”
“그렇소. 흑마법사들이나 마수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면 시간 여유가 있는 셈이지만 혹시 모르니 서둘러야 할 것 같소이다.”
“출발 날짜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오. 우리 병사들도 일주일 정도는 더 지나야 어느 정도 회복할 것 같으니 말이오.”
“그 정도면 일반 주민들도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는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을 때 푸석푸석한 얼굴을ㅇ 한 세르파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세르파 경.”
“이런! 어젯밤에 늦게 잠이 들어 쉬 깨지를 못했소.”
이 지구라트 꼭대기에 세워져 있던 첨탑에서 발견한 마법진을 놓고 연구를 했을 테니 당연히 늦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 얘기들 잘 하시오. 난 바빠서 먼저 가오.”
용건을 끝낸 일룸은 먼저 방을 나갔다.
“그래, 마탑에서는 어떤 지시가 내려왔습니까?”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세르파가 입을 열었다.
“마탑 본부에서는 전 마탑을 상대로 마탑주 연석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답니다.”
“마탑주 연석회의라면 마탑주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무려 300년 만의 연석회의지요. 대장도 알겠지만 흑마법사 타키닌이 일으킨 난으로 인해 대륙의 모든 마탑이 일제히 궐기를 하여 세 제국과 함께 참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연석회의는 대륙의 전 마탑은 아니지만 데빌 산맥을 경계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세 제국의 모든 마탑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그럼 장소는?”
“마츠루트 요새에서 열기로 했답니다.”
참 공교롭긴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그곳에 세 제국의 힘이 모이는 곳이면서 중립 지대이니 말이다.
“회의 날짜는 정해진 겁니까?”
“두 달 후로 잡았답니다. 이번 연석회의에는 마탑뿐만 아니라 각 제국의 실세들이 같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하룬은 이제야 이벨린 황녀가 두 달 후에 마츠루트 요새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다른 제국의 요인들과 함께 데빌 산맥과 다크니스에 대한 것을 의논하려는 것이다.
“의뢰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흑마법사가 출현한 명백한 증거를 찾아준 것으로 본 마탑에서 의뢰한 건은 완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희 역시 마츠루트 요새로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의뢰 대금 역시 그곳에서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사대의 행방은……?”
하룬읜 세르파의 말에 홀가분해졌지만 걸리는 것이 남아 있었다.
“본 마탑의 수뇌부들도 그렇게 저 역시 조사대의 행방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건에 대해서는 하룬 대장이 추후 다른 의뢰를 진행하거나 움직이면서 같이 알아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세르파는 침중한 표정을 지우며 그 건의 처리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흑마법사들이 그동안 자신들을 핍박해 왔던 백마법사들을 잡았으니 어떻게 했을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이 의뢰는 파코추 마탑이 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일루젼 마탑이 주체가 된 실종 건이나 조사대 건에 그리 큰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대신 일루젼 마탑의 요인들이 호송하던 물건의 행방을 좀 알아봐 주십시오.”
이를테면 계약 조건의 변경인 셈이다. 뭐, 그 정도야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지요. 한데 사라진 물건이 도대체 뭡니까?”
“……그건 차원석입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춘 세르파의 말에 하룬의 눈이 강렬해졌다. ‘차원’이라는 말이 묘하게 그를 흥분시켰다.
“차원석이 뭡니까?”
“정확한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전설로 전해지는 드래곤 하트에 견줄 수 있는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라고 알려졌을 뿐입니다. 사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본 마탑도 일루젼 마탑에서 그런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신성석과 차원석이라!’
이름만으로도 왠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물건들이다. 도대체 다크니스는 이런 물건들을 가지고 어떤 짓을 하려는 것일까?
어쩐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크니스가 이 데빌 산맥과 마츠 평원에서 획책하는 음모에 이 두 가지 물건이 큰 역할을 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다만 이 일은 비공식적인 의뢰…… 아니, 부탁입니다. 후버론 전대 탑주님이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신……. 그리고 이 건에 대한 사항은 절대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될 겁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다른 마탑이 분실한 보물이니 말이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황실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르파는 그것도 궁금한 모양이다.
“곧 알려질 것이니 큰 비밀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 입으로 발설하기는 좀 그렇군요.”
굳이 비밀로 할 것도 아니지만 일룸에게 듣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제가 대장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군요. 알겠습니다. 일룸 경에게 알아보지요.”
세르파는 목례와 함께 방을 나갔다.
하룬은 대원들을 불러들여 황실과 마탑에서 전해 온 내용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타니엘라가 손을 들었다.
“그럼 이 사람들을 호송해서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에휴! 연구할 것이 많은데…… 그냥 이곳으로 오면 안 되나?”
“어차피 두 달 후에는 마츠루트 요새에 도착해야 하니 우리로서는 그편이 더 낫습니다.”
“하긴 그렇지요. 그곳에서 마츠루트 요새야 일주일 정도의 거리이니 일단 요새에만 들어가면 시간은 많이 나겠군요.”
어차피 마츠루트 요새로 갈 것을 생각하면 호송에 어려움은 있을지 몰라도 그편이 나았다. 하지만 레미를 비롯한 아카족 대원들의 얼굴이 영 이상해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픔과 안타까움이 범벅이 된 그런 얼굴이었다.
하룬은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생각을 못 한 것이 있었구나!’
분명히 이들과 함께 탄툰 마을에 들르기로 약속을 했었다. 더구나 이들이 마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은 이미 많이 초과된 상태이니 말은 못 해도 꽤 초조할 것이다.
‘할 수 없지.’
하룬은 짧은 순간 모종의 일을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우리는 둘로 나뉘어 움직일 겁니다.”
“네에?”
의아한 대원들의 눈갈을 받으며 하룬이 차분하게 아카족 대원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나는 아카족 대원들과 함께 탄툰 마을에 들렀다가 요새로 갈 겁니다. 그러니 부대장이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돌아가세요.”
“하지만…….”
티노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하룬 없이 자신들끼리 가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을 호송하는 것은 제국군 출신 병사들이 있고 황실과 마탑 사람들까지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대장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미루스도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비록 빛의 신전 사제들을 노렸다지만 아무튼 언데드들과 마수들이 들끓는 평원을 지나 마수들의 소굴이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데빌 산맥으로 들어간다니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이다.
“위험하지 않습니다. 아카족 대원들의 실력은 이제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법사가 없어서…….”
그건 그렇다. 마법사가 있으면 편리한 점이 많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두 분께서는 두 달 후에 만날 때까지 마법서 해독을 마무리해 주셔야 하니 거기에 진력을 다해 주십시오.”
사실 꽤 오랫동안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마도사가 되어 육체적 능력이 크게 신장되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탈이 나도 벌써 났을 것이다.
“저는 내일 바로 출발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꼼꼼한 성격의 티노는 식량이며 각종 야영 도구들을 챙길 것이다.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당장 준비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도네이스도 티노를 돕기 위해 따라갔다.
“딜런 경,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헤니를 제외하고는 대원들 모두 누구에게 당할 걱정은 없습니다.”
딜런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하룬의 결정을 존중하기에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자, 그럼 점심 전까지 다시 수련을 하도록 한다.”
대원들은 딜런을 따라 밖으로 나가고 하룬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정리나 좀 해볼까?’
하룬은 인벤토리를 먼저 점검했다.
그동안 레벨이 꽤 많이 올랐는지 인벤토리의 저장 공간은 최초에 비해 열 배로 커져 있었다. 그 안에는 갖가지 아이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동안 흑마법사들이나 언데드들을 상대하며 자동 획득 설정으로 들어온 아이템들이 인벤토리를 가득 채울 정도로 쌓였던 것이다.
하룬은 꼭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꺼냈다.
인벤토리를 먼저 정리하고 다음으로 아공간을 살펴보던 하룬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그 크기였다. 놀랍게도 아공간은 처음보다 다섯 배 정도 커져 있었다.
그 안에도 마수 가죽을 포함한 각종 아이템들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연 마정석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얻은 마정석들이 꽤 많았다.
‘싸가지의 능력이 올라간 걸까?’
하룬은 해독약을 입에 넣고 싸가지를 소환했다. 해독약은 녀석이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녹기 시작했다.
-어! 네 모습이?
하룬의 눈이 커졌다. 싸가지의 모습이 달라진 것이다. 네 정령이 합체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던 싸가지가 어느 사이에 열 살 남짓한 귀여운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흐흐흐! 어때, 멋있지? 주인이 구해 준 원소석과 마정석 덕분에 내 능력이 올라갔어. 이제는 몇 시간 정도는 밖에서 지내도 될 거 같아.
멋있는 것이 아니라 귀여웠지만 굳이 녀석의 착각을 깰 필요는 없었다. 성별은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데리고 다녀도 될 것 같았지만, 안 그래도 노안이라 아저씨 취급을 받는데 행여 녀석을 소환해서 데리고 다니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눈에 선했다.
-음. 축하해! 아공간이 커졌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가지게 된 거야?
-능력이야 별다를 것이 있나. 다만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이 더 커진 거지. 각성을 한 것은 아니니까. 만약 각성을 한다면 아공간이 무한대로 늘어날 거야, 주인.
그럼 별거 아니었다. 그냥 능력이 조금 올라간 것뿐이다. 실망한 하룬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싸가지가 인상을 썼다.
-칫! 이제 적어도 독과 오염 물질을 아무 때나 흘리진 않는다고. 대장이 준 구슬을 이용해서 한곳에 모을 수 있게 되었단 말이야. 알아? 이제는 주인이 날 부를 때 해독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녀석은 자신이 불철주야 노력해서 이룬 성과를 하룬이 무시한다고 생각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그런 거였어? 대단하네.
녀석을 소환할 때마다 해독약을 먹어야 하는 불편함을 이제 더 이상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하룬이 새삼 놀라 감탄하자 녀석의 얼굴이 조금은 풀렸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각성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주인도 더 이상 날 괄시하지 못할걸. 헤엥!
-알았다. 기대하지.
-그러니까 부지런히 원소석이나 마정석을 모아 달라고.
-싸가지야.
하룬은 은근하게 녀석을 불렀다.
-왜, 주인?
귀찮은 투가 역력한 성의 없는 녀석의 대답에도 이제는 그리 화가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귀여운 모습으로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이거 순정석으로 바꿔 놔라. 귀찮으니까 아공간에 마정석이 들어올 때마다 네가 알아서 순정석으로 바꾸어 놔.
마정석의 불순물을 다 제거하고 순수한 마나의 성질만을 모아 재구성한 것이 바로 순정석이다. 그런 용어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하룬은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흐흐흐! 역시 주인이라니까. 안 그래도 주인의 몸속에 자리를 잡고 정령력을 흡수하는 네 꼬마 녀석들이 무섭게 따라오고 있어 걱정했는데. 고마워, 주인.
싸가지는 대번에 태도를 바꾸며 음침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녀석의 능력이 올라간 이면에는 네 정령과의 경쟁심이 한몫한 것 같다.
-그래. 빨리 각성이나 해라.
-걱정 말라고, 주인.
마정석 문제를 해결한 하룬은 다음으로 처음 보는 다양한 아이템들을 살펴봤다. 대부분 매직 급의 아이템들이지만 개중에는 유니크 급도 섞여 있었다.
하룬은 자신에게 소용이 될 것 같은 아이템들을 제외한 아이템들과 아공간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마수 가죽도 다 꺼냈다.
꺼낸 아이템들과 마수 가죽들을 더 넣어 마법 배낭 하나를 가득 채운 하룬은 밖으로 나가 레미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헤니를 불러들였다.
“헤니, 미드레에게 연락해서 급한 대로 상단을 꾸려 이쪽으로 오라고 해.”
“왜요?”
“두 달 후에 마츠루트 요새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날 거야. 어쩌면 마츠루트 요새가 상단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장소가 될지도 몰라. 일단 생산한 범용 약품들과 각종 치료 제품들을 여유 자금을 다 동원해서 사 오라고 해. 그리고 타림 공방에서 제작한 방어구도 전량 가져오고.”
헤니의 눈이 반짝거렸다. 세 제국의 중계무역 기지가 되어가고 있는 마츠루트 요새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는 하룬의 말에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알았어요, 대장. 어쩌면 우리 상단의 이름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네요?”
“아마 그럴 거야. 그리고 이것들은 그동안 모은 아이템들과 마수 가죽들이야. 중간에서 상단 반을 돌려보내는 길에 가지고 가게 해서 마수 가죽은 타림 공방으로 넘기고 아이템들은 상인들에게 알아서 판매하라고 해.”
“알았어요. 그런데 이종족의 아이템 건은 어떻게 하지요?”
그사이 로그아웃을 해서 보라와 만났나 보다. 황실과 마탑의 채근이 그만큼 심하다는 소리였다.
“그건 히든 대원에게 이미 이야기를 해두었으니 얼마 후에 그가 돌풍 상단으로 찾아갈 거야. 그렇게 말해주면 돼.”
진수라면 돌풍 상단이 완전히 활동을 시작할 예정인 두 달 후에는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만든 아이템들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이제 마음 편하게 아카족 대원들과 함께 데빌 산맥으로 여행을 떠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하룬은 막 나가려던 헤니로부터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 참! 잊을 뻔했다.”
“뭔데?”
“예힘 성자가 대장에게 은밀히 할 말이 있다고 만났으면 하더라고요.”
“성자가?”
“네. 저보고 다리를 놔 달라고 하는데 그 폼이 신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일까? 첫인상이 나빠서 그런지 성자와 따로 만나는 것이 불편했다.
“헤니는 뭐 아는 거 있어?”
헤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성자가 각성을 한 후 헤니와 몇 번 이야기하는 것은 보았지만 큰 친분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저 같은 이방인이니 이 세계에 대한 것이나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아니면 같은 이방인으로서 돌풍 용병대에 대한 정보를 물어봤을 수도 있고…….
“그럼 들어오라고 해. 주변을 좀 비워주고.”
헤니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성자 예힘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하룬이 자리를 권하고 헤니가 끓인 주전자에서 차를 한 잔 따라 내밀었다.
“독대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전혀 다른 사람처럼 개과천선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단둘이 보는 것은 좀 불편해서 바로 본론을 유도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성자가 자세를 바로 하고 하룬에게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동안 저지른 무례한 행동을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제가 철이 없어서 멋모르고 한 행동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말씀을……. 지난번에 사과를받고 이미 마음에서 털어 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좀 풍족하고 모두가 떠받드는 환경에서 자라 사려가 부족하고 철이 없었습니다.”
거듭해서 사과를 하는 성자의 눈에 어린 진심을 보자 남은 앙금마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진정으로 부끄러워서 그럽니다. 얼마 전까지 제가 한 말이나 행동을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지금의 성자는 신의 의지를 세상에 널리 전할 자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엷은 미소까지 띤 하룬의 태도에 성자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직도 배울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잘못이야 누구나 저지르지요. 문제는 스스로 그 잘못을 인지할 수 있는 도덕관을 가졌느냐와 반성을 통해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동생처럼 여기셔서 제가 실수를 하면 따끔하게 혼을 내주십시오.”
그 소리에 하룬은 내심 실소를 터트렸닫. 자신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 보인다지만 이십 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성자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웃으면서도 가슴이 쓰렸다.
정말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다.
“하하! 성자를 어찌 동생으로 여기겠습니까? 신전에서 알면 절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비록 성자이긴 하지만 이방인입니다. 그렇다 보니 신전에서의 제 위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성자라면 신전의 표상이나 다름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성자의 눈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사실 신전 내부에 수백 년 동안 쌓여 온 알력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이야 제 입으로 발설할 수 없지만 아무튼 하룬 대장이 저를 동생으로 대하셔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마음을 먹은 것인지 성자는 자꾸 자신을 편하게 대해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어느 정도 경험한 하룬은 상대가 바란다고 해서 마냥 해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건 나중에 봐 가면서 천천히 합시다. 그건 그렇고…….”
“아! 사과를 하느라고 다른 용건을 잊었군요. 사실은 대장이 꼭 들어주셨으면 하는 부탁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아직 용서를 받지 못한 것 같아 제가 많이 불편합니다.”
“허허, 참! 그래 말해 보게.”
알아서 동생이 되겠다는데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하룬은 편하게 말을 하기로 작정했다.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자조 섞인 결정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방인입니다. 헤니에게 들으니 하룬 대장은 우리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하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정보는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웬만큼 파악한 사실이다.
“전 코원 유니온이라는 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흐음!”
코원 유니온 출신이라는 사실을 들은 하룬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
“전 코원 유니온에서 이 세상의 귀족에 해당하는 노블 가문 출신입니다. 제 가문은 해가家라고 코원 유니온에서 꽤 알아주는 가문입니다. 할아버지 대부터 유니온을 다스리는 원로원의 원로 자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
하룬은 내심 크게 놀랐다. 하룬도 코원 유니온 출신이다 보니 해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성자 예힘의 가문은 유니온을 지배하는 원로원의 아홉 가문 중 하나이고 행정 계통을 장악하고 있으며 원로원 수장까지 역임한 최고의 가문이다.
“사실 전 대학에서 아직 공부를 하는 중이기도 하지만 이런 게임…… 아니,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별로 취미가 없었습니다.”
사실 노블들은 현실에서 즐길 것이 많아 가상현실 게임을 그렇게 즐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비욘드를 하면서 유난히 많은 노블들을 본 것이 이상했었다.
“그런데 왜 이곳으로 넘어온 것인가?”
“그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명령?”
“네. 사실 이것은 우리 세계에서도 극비 사항인데 유니온들은 원로원 가문들이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낮춘 예힘의 말에 하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가 암중에서 조종을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건가?”
“어, 어떻게 그걸……?”
예힘은 하룬의 말에 놀라 자빠질 뻔했다.
아무리 그가 현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설마 그런 정보까지 꿰고 있을 줄은 정녕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가 빅 유니온들을 암중에서 지배하기 위해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과 원로원까지 그 마수를 뻗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네.”
“……그럼 그들의 목적이나 조직 그리고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행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는지요?”
“알 만큼은 알고 있네. 휴먼 가드는 각종 원자재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고 글로리 가이아의 경우는 각종 폭력 조직을 만들어 마약을 생산 유통시키는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더군.”
“……놀랐습니다.”
예힘은 질린 얼굴로 하룬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내가 생각하던 단순한 용병이 아니군. 현실 세계에서도 이 정도의 정보를 알고 있는 휴먼은 거의 없을 텐데. 마탑과 황실에서 의뢰를 받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것도 놀라운데 이런 뛰어난 정보력이라니. 무섭군! 성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룬 대장은 난세를 헤쳐 나가며 많은 사람들을 이끌 존재가 틀림없겠구나.’
비록 기초 부분이 사라진 기형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과학 문명 속에서 지배 계층으로 살아온 예힘은 누구보다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정보는 돈이라고 말하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정보가 곧 힘인 시대다.
정보와 무력을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자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유니온의 지배 계층들은 대부분 뛰어난 정보 조직과 무력을 소유하고 있다. 돈이나 권력은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다시 본 하룬의 모습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커져 있었다. 흐트러진 긴 앞머리와 문신 그리고 날카롭고 깊은 두 눈만이 보일 뿐이지만 지금 하룬의 모습은 자신이 현실과 이곳 세상에서 만나본 그 누구보다 더 신비한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미 상당한 정보를 알고 계시니 이야기하기가 편하군요. 사실 오래전부터 그 두 조직에 속하지 않은 유니온의 세력들은 연합체를 구성하고 공동으로 대처를 해왔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지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내용이었다. 유니온을 지배하는 가문들이라면 그 능력으로 두 조직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두 조직은 그들의 권력을 심하게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인 것이다.
“저의 가문 역시 그 연합체인 GPC(Global Prosperity Committee)에 속해 있습니다. 코원 유니온 GPC 대표인 우리 가문의 어른들이 제게 내린 명령ㄹ은 이 세상에서 세력을 만들어 두 조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타격을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 가능해진 이래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곳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 목적이 무언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전력이 이곳에 집중된 상황은 GPC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염된 환경으로 인해 배리어로 고립된 현실 세상에서는 그들을 한순간에 뿌리 뽑을 수 없지만 이곳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판단한 거지요.”
‘흠! 역시 내 추측이 맞았군. 그들이 이곳에 전력을 투입하고 있다 이거지.’
이러면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편해진다.
“그렇지만 자네들 이방인은 부활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변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계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장치가 필요합니다.”
“캡슐이라고 불리는 것 말인가?”
“네, 맞습니다. 그 캡슐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진짜 몸은 그곳 세상에 머물러 있고 이 세상에는 신들의 은총을 받아 아바타를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캡슐마다 본체와 아바타 간의 동화율이 차이가 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슈퍼 캡슐을 사용한단 말인가?”
“헉! 그건 아니지만…… 슈퍼 캡슐의 존재를 어떻게?”
예힘은 하룬이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듯 혀를 내둘렀다.
“내가 알기론 슈퍼 급 캡슐은 아직 상용화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GG와 HG는 코원 유니온 최고의 캡슐 과학자를 통해 그 제작 기술을 이미 획득했습니다.”
“혹시 그가 청일 박사인가?”
“헉!”
예힘은 이제 하룬을 마치 귀신을 보는 것처럼 질린 얼굴이 되었다. 하룬이 알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그런 건 묻는다고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룬이 침묵을 지키자 예힘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아시는지 모르지만 다 털어놓지요. 우리 세계가 가진 문제점은 아마 아시고 계실 겁니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20년 전 우리는 신적인 능력을 가진 마더컴으로부터 희망적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하룬은 이제까지 알고 싶었던 사실을 듣게 되자 목이 말랐다. 예힘 역시 흥분을 했는지 차를 한 모금 넘기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현실 세계가 가진 문제점을 타개할 해결책이 이곳 세계에 있으며 두 세계가 곧 연결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상현실 게임 비욘드의 출시가 무려 20년 전에 예고되었다는 말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다. 하룬은 불현 듯 자신을 포함한 인공수정체들의 탄생이 이 일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지만 예힘의 말에 다시 주의를 집중했다.
“그 메시지로 인해 각 유니온들은 물론 GG와 HG는 캡슐 제작에 모든 역량을 기울였습니다. 그 일에 있어서는 과학자들을 대거 포섭한 GG가 가장 유리했지요. 그들은 이미 각 유니온 직영의 캡슐 제작 회사들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HG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특히 캡슐 기술을 보유한 과학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세 조직은 치열하게 암투를 벌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코원 유니온에는 캡슐에 관한 한 세계최고라고 자랑할 수 있는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청일이었지요. 청일 박사는 원래 글로리 가이아 즉 GG라는 조직에서 연구 자금을 지원받으며 캡슐을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GPC에서 그를 회유했지요. 우리는 그를 유니온 밖에 있는 모종의 장소로 보내고 캡슐 제작에 필요한 것들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필요로 하는 장치들과 재료들을 충분히 공급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들 중에는 우리 힘으로 구하기 힘든 것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는 우리 모르게 GG와 심지어 HG와도 거래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파악했을 때는 그가 사망하고 그간의 지원에 대한 대가를 유니온으로 보내 주었을 때였습니다.”
“으음.”
하룬은 뜻밖의 인물에게서 양부 청일 박사의 과거를 듣게 되자 기가 막혔다. 정말 세상에 비밀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자세한 것을 듣지 못해 가슴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 답답했다.
“청일 박사는 죽기 전에 각 조직에 20대의 슈퍼 급 캡슐과 제작 기술을 보냈습니다. 그가 완성시켜 보낸 캡슐은 놀랍게도 동화율을 최대 60%까지 올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자동 영양 공급 장치를 비롯해서 분할 수면 장치, 배변 처리 장치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그 캡슐은 사용자가 이 세계의 주민처럼 생활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총 60대밖에 만들지 못한 최초의 제품을 자신이 사용했다니 놀라웠다. 양부가 보낸 메시지대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이고 GG와 HG도 청일 박사가 남긴 제작 기술을 그대로 실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이론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예컨대 이곳의 고위 마법사들만이 사용하는 아공간과 같은 공간 확장 이론이라든가 뇌파 연결 방식을 초월해서 전신의 신경조직 연결 방식과 같은 기술을 구현하기에는 우리의 지식이나 기술 수준이 미흡했습니다.”
과학적인 것이야 잘 모르겠지만 천재 과학자로 불렸던 쏘우도 그것과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천재이긴 했던 모양이네.’
쓸데없는 곳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을 보면 양부에 대해서 미움만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세 조직은 은밀하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공동 연구를 하기로 한 것이지요. 우리 세계에서는 각 유니온마다 임페리얼 컴패니라는 캡슐 제작 회사가 있는데 그곳에서 세 진영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힘을 합쳐 청일 박사가 남긴 캡슐을 제작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 비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늘 반목만 해왔을 것으로 생각한 세력들이지만 공동의 목표 앞에서는 야합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청일 박사가 개발한 캡슐 기술은 완벽하게 구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대한으로 구현한 것이 공간 확장 기술을 빼고 연결 방식도 주요 신경조직만 연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탑재한 인공지능도 원래의 것보다는 몇 단계 아래의 것이고요.”
“그럼 동화율이 좀 떨어지겠군.”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캡슐을 스페셜 캡슐이라고 부르는데 그래도 동화율을 최대 52%까지 올려줍니다. 그 정도면 이 세계의 주민들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슈퍼컴 정도 사양의 인공지능 컴퓨터 숫자가 부족해서 세 진영에는 각각 100대 정도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 한계였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예전 문명이 남긴 것들을 우연히 발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럼 슈퍼컴이 총 삼백 대? 혹시 모하비 사막에서 발견되었다던 그 슈퍼컴들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 슈퍼컴들이 비욘드라는 가상현실 게임을 운영하는 보조 컴퓨터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도대체 뭐야? 마더컴들은 그 기능을 상단 부분 상실했다고 하던데.’
어차피 하룬은 이 비욘드의 세상이 가상현실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다른 차원이든지 아니면 다른 은하계의 행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했던 것이다.
“그럼 그게 끝인가?”
“아닙니다. 비록 동화율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에 세 조직은 앞다투어 최상급 캡슐을 능가하는 것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성능은 어느 정도인가?”
“최대 동화율 46%를 구현할 수 있는 캡슐입니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그럼 그 정도의 동화율이라면 부활 문제는 어떻게 되나?”
하룬이 가장 궁금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힘 역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하룬을 괴물 보듯이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을 했다.
“이곳에서 사망하게 되면 십중팔구는 뇌사 상태에 빠집니다.”
‘그렇단 말이지!’
하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런저런 제약으로 인해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글로리 가이아를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그 캡슐은 무한정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각 세력이 보유하고 있는 인공지능 컴퓨터나 각종 재료의 양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최대 1만 대가 한계입니다.”
적지 않은 숫자다. 세 곳을 합하면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능력자들이 양성된느 것이다.
“아무튼 이 캡슐들의 등장은 우리에게 배리어로 인해 각각의 유니온이 따로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그럼 이곳이 자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찾기 위한 세 거대 세력의 각축장이 된다는 말이군.”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예힘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자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야. 우리 세상의 신들이 이방인들의 존재를 허락했을 때는 무슨 이유나 대책이 있지 않겠나?”
“그건 그렇습니다. 레아께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저와 같은 이방인의 존재를 용납하신 것은 결코 아닐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내가 너무 많은 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아닐까? 아니야! 내가 보기엔 하룬 대장은 나보다 더 많은 극비 정보를 알고 있어. 이런 인물에겐 솔직히 털어놓고 도움을 청해야만 해. 거짓은 안 돼.’
‘비욘드라는 가상현실 게임에 이런 비사秘史가 존재했다니, 이럴 때는 차라리 진수 형처럼 단순하게 게임을 즐기는 유저라면 좋으련만……. 아니지!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무능력했던 내가 이런 힘과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 나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있어서일 거야.’
하룬은 희미하게 자신이 해야만 하는 어떤 소명召命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예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저는 가문 어른들의 비밀 지시를 받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네. 하나는 마더컴이 알려준 대로 이 세계에서 우리 세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은 어떤 단서를 잡았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았나?”
“아니요.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오염되고 가혹한 환경을 정화시켜줄 수 있는 마법이지요. 우리가 배리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전 시대에 있었던 무시무시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오존층이 파괴되어 태양의 빛과 열이 50% 가까이 지표면에 도착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정상적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배리어가 사라진 후의 우리 미래는 절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마법을 통해 환경을 바꾸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타니엘라나 미루스에게서도 그런 마법의 존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난 그런 마법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떤 마법인가?”
“전설에 의하면 라 제국이 태동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마법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전란 시대 혹은 마탑 시대라고 표현되는 시대의 말에는 우리 세상의 종말 시대처럼 극단으로 치달은 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현재 상황과 유사한 환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열 개의 태양이 뜬 것처럼 메마르고 타 버렸으며 마나석의 폭발로 인해 대기에는 위험한 마나가 가득해서 기형아들이 속출하고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어갔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라 제국의 마도사들이 광역 기후 조절 마법을 펼쳐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광역 마법진을 사용해서 기후를 임의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배리어가 사라져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행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마법진이 존재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그걸 펼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마법진이라면 당연히 마나석과 마나석 가루 혹은 미스릴 가루가 들어가야 하고 그걸 구동시키기 위해서 마법사가 필요하다.
그런 의구심을 해소시켜 주겠다는 듯 예힘이 뜨거운 눈빛을 하고 말했다.
“우리 세계는 이곳의 마나에 해당하는 기氣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저희 GPC가 수없이 실험을 해본 바에 의하면 기는 마나와 유사한 개념과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존재하는데 우리 세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는 바로 전기입니다. 다른 기의 경우는 느끼는 것부터 타고나거나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중 자연의 기가 바로 이곳의 마나와 아주 유사합니다. 자연의 기를 몸 안에 축적한 검사는 이곳의 검사처럼 오러, 즉 검사나 검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건 하룬도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몸으로 그걸 느끼고 사용까지 하고 있었다.
“우리 세계에는 마나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마법을 발현시킬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나석은 결국 마나라는 에너지를 저장한 물건입니다. 우리는 마나석 대신에 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 저장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발전소라는 것입니다.”
“발전소라면 전……기를 발생시키는 곳인가?”
“그렇습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열에너지를 집적시켜 전기라는 새로운 힘으로 가공시키는 곳이지요. 전기에너지는 축전지라는 장치를 통해 축적이 가능하고 비교적 다루기가 쉽습니다.”
그런 것까지 연구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존재는 어떻게 할 텐가? 그리고 마법은?”
“그것 때문에 수만 명이 넘는 GPC 연구 요원들이 수년간에 걸쳐 연구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곳 세상에 존재하는 주술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주술을 사용하여 병을 치유하거나 사악한 동물을 막고 때로는 인위적으로 공간을 비틀어 결계를 치기도 하는 등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룬은 주술사인 레미와 깊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어 그건 잘 모르고 있었다. 하룬이 생각하는 주술사는 단조롭지만 묘한 운율을 가진 주문을 외워 전사들의 사기와 능력을 끌어올리고 병증을 치료하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그 이상의 효용 가치를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주술사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우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유전적이거나 혹은 환경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마나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고 마나가 풍부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머리 뒷부분, 즉 후두엽 근처에 특이한 형질의 마나를 축적한 이들이 바로 주술사들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주술사들은 다른 보통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난 지적 능력과 지능 그리고 특이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겁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과 유사한 존재들이 우리 세계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거지요.”
“으음. 설마…… 이능력자?”
신음하듯 내뱉은 하룬의 말에 예힘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정말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머릿속이라도 열어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어떻게 자신들보다 이방인과 그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정말 대장은 대화가 통하는 분이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세계에 간간이 나타나는 이능력자들이 바로 주술사와 비슷한 존재들입니다.”
예힘은 그렇게 인정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주술사들은 자신의 뇌 부분에 축적된 마나를 일종의 정신 에너지로 변환하여 말과 음절에 운율과 길이를 조절하여 그 에너지를 싣는 방법으로, 혼합 상태로 존재하는 자연의 마나를 각 성질별로 분리시키고 다시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원하는 마법적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주술의 경우는 정신 에너지를 사용해서 그런지 마법과는 달리 무생물보다는 생물에 강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잃게 하거나 폭주를 하게 하는 등 정신을 제어하는 효과는 탁월했지만 마법처럼 무생물을 다루는 것에는 취약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흐음.”
굉장히 신선한 이론이다. 만약 그의 말이 맞는다면 주술사들은 언령을 통해 마법을 발휘하는 원시적인 마법사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주술의 발달 과정 중에 보다 더 쉽게 주술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물이 다양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짐승들의 피라든지 신체의 일부 혹은 마나를 품은 광석이나 식물들이 그것이지요. 그런 매개물들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마법과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었고 주술의 최고 발전기에는 주술로 수만의 적을 제압하거나 지반을 수십 킬로미터나 뒤집는 등의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기후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했지요. 하지만 주술은 문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말로 전달하기가 어려웠기에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쟁이나 질병 혹은 전승자를 찾지 못해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마법이 극도로 발달한 라 제국에서는 마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다만 미개한 원주민들이나 사용하는 저급한 정신 마법 정도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마나 고리를 만들지 않아도, 마나석이 없어도 주술로 마법을 펼칠 수 있으며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그 편이 활용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런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이들은 얼마나 많은 연구와 실험을 했던 것일까? 새삼 GPC의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마법 주문을 주술 특유의 주문으로 변환하는 것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수천의 연구 인력이 그 일에 매달리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능력을 가진 이들도 선발해서 계속 수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기후 조절 마법이 수록된 마법서를 찾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그것을 구해야만 우리가 생각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라 제국의 유물일 테고.”
“맞습니다. 반드시 우리 GPC가 그 마법서를 구해야 합니다.”
예힘은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하룬은 예힘의 사정을 이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마법서를 구하는 일에 각 유니온은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얻는 자가 결국 향후 세계를 지배할 GPC를 장악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노블 중의 노블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직접 이곳에 온 것이다.
“대가는 무엇이든 지불하겠습니다.”
하룬은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
“검증의 관에서 나온 마법서는 확인해 봤나?”
“알아보고는 있지만 기후 조절 마법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하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정보 길드를 통해 알아보지 그러나?”
“물론 의뢰는 해둔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런 마법서의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 경험이 많은 성기사들에게 들으니 돌풍 용병대가 고급 정보에 있어서는 제국 정보 길드에 못지않다고 하더군요. 대장께서 좀 알아봐 주십시오.”
생각보다 자신이나 돌풍 용병대가 세상에 많이 노출된 것이 의외이긴 하지만 그건 별로 관심 없다. 유명해지는 것 따위는 원래 꿈꾸지도 기대한 적도 없었다.
“좋아. 그 의뢰는 접수하도록 하지. 대가는 그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나?”
“네. 물론 저희 GPC가 할 수 있는 한도라는 제한이 있긴 하지만요.”
이로써 거래는 성립되었다.
“처음에는 두 가지 부탁이라고 했는데 다른 한 가지는 뭔가?”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예힘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내용을 꺼냈다.
“저희 GPC가 GG와 HG를 제거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 이들 세 무리는 세상의 모든 권력과 금력을 오로지 자신들만이 독차지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들의 행태는 가진 놈이 더 밝힌다는 것을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이곳은 저희 세상과는 달리 배리어로 격리되지 않은 세상입니다. 또 각 세력의 중심인물들은 스페셜 캡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전장으로 택할 생각인가?”
하룬의 직설적인 말에 예힘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상에 있는 GG와 HG의 세력들은 대부분 점조직화되어 있고 암흑가를 기반으로 숨어 있어 제거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화력을 포함한 개개인의 전력 역시 우리 GPC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HG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GG의 경우는 그가 일기로도 F구역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암약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도 장점은 있지요. 그들에게 없는 엄청난 인적자원이 그것입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모르겠지만 이곳이라면 그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계획대로 이곳으로 온 저들의 핵심 세력만 분쇄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각 유니온의 군부를 장악한 GPC가 상대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렇겠군.”
“그 때문에 각 유니온의 핵심 GPC들은 많은 인원을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아직 세력을 키우는 중입니다. 그들은 우리에 비해 월등한 전력과 세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아직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베타테스터라서 그런가? 자네들 쪽에도 먼저 이쪽 세계에 발을 내딛은 이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힘은 금세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이젠 내성이 생겼는지 두어 번 고개를 흔들고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말 하룬 대장은 무서운 분이군요.”
하룬은 대답 없이 예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예힘은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 조직에 속한 이들이 월등하게 많습니다.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