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현실의 사정 (182/278)

《현실의 사정》

 하룬은 돌풍 기지로 건너와 제일 먼저 식장을 찾았다. 이미 식사가 끝났는지 식당 안은 테이블을 정리하는 몇 사람과 주방 일을 맡은 사람들많이 남아 있었다.

"어머! 대장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영흥 마을 출신의 중년 부인이 그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정말 사는 것처럼 살고 있어요. 그런데 식사는 하신거에요?"

"네. 전투조 대원들을 만나려고 왔는데 벌써 식사를 마친 모양이군요,"

"네. 가장 먼저 식사를 하는걸요. 지금은 수련실에 모여 있을 거에요."

"그렇군요."

"제가 수련실로 연락을 넣을 테니 천천히 올라가세요."

 그녀는 식당 입구에 있는 홈컴의 화면 위에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수련 댸문에 혼자 식사하시는 것 같은데 이제라도 시간을 내서 식사는 같이 하도록 하세요. 함께 맛있게 식사를 하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이 풀리거든요."

"네. 그러지요."

 그녀는 기지 식구들을 위해 식단을 짜고 요리를 하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그녀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한동한 못 봤더니 이젠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사람을 잘 기억하는 하운이지만 예전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불안한 생활을 해 왔던 사람들이, 안정을 찾고 영양 높은 식사와 자신만의 일을 하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확연히 달라진 모습에 누군지를 쉬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식당에서 보낸 메시지를 보았는지 수련실에는 전투조 대원들이 열울 맞추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다들 잘 지냈습니까?"

 하룬의 인사에 로수가 부동자세를 풀었다.

"일동 차렷! 대장님에게 경례!"

"추웅~서엉! 돌풍 무적!"

 대원들은 마치 방위군이 하듯 절도 있는 동작으로 하룬을 향해 경례를 했다. 오래 연습을 했는지 모두가 한 사람처럼 동작이 일치하는 것이 아주 먹있고 강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이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도 전투조는 다른 식구들의 노력으로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성장한 것이다. 경례를 하며 대원들을 한 사람씩 훑어보는 하룬의 눈이 뜨거워졌다.

 처음 보는 얼굴의 대원들도 상당수가 보였지만 그들도 완벽하게 기존의 전투조에 녹아든 듯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총원 142명, 이상 무!"

"돌풍 무적!"

 처음 하려니까 무척 어색했지만 구호를 붙이며 팔을 내린 하룬의 가슴은 무척이나 뿌듯했다. 이제야 진짜 자신이 어떤 조직의 장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고 그들이 믿음직스러웠다.

'인원이 정말 많이 늘었군.'

 전에는 넗게 느껴졌던 수련장이 이제는 꽉차는 느낌이다. 인공수전체 출신들이 정말 많이 늘었다.

"바로!"

 대원들이 팔을 내리자 하룬은 뜨거운 눈으로 대원들을 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편히 쉬엇!"

 그의 말에 대원들은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팔과 상체를 편안하게 풀었다.

"괜찮습니까?"

 뭉클한 마음에 두루뭉술하게 물었지만 로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룬의 등장이 너무나 반가웠지만 공석이라 존대를 하는 로수였다.

"그럼요, 아무 걱정 없이 수련만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이제 겨우 돌풍 용병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룬의 말에 로수가 대원들을 대표해서 대답을 했다.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대원들의 기도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단단한 근육들과 강인한 기세 그리고 자신감이 가득찬 강한 눈빛이 하룬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쏘우가 이끄는 연구조가 개조한 캡슐은 최상급에 준하는 사양을 가지고 있어 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또 이제 유저들 사이에서 그 가치가 알려지고 있는 전사의 전달을 통해 개개인에 알맞은 무기술을 익힌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대장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군요."

 뜬금없는 철웅의 말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제 겨우 익스퍼트가 되었더니 예전에는 몰랐던 대장의 실력이 보이는 건지 아니면 그새 또 발전을 한 것인지 그 경지를 가늠할 수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철웅의 말에 다른 두 조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룬의 얼굴이 웃기 시작했다. 세 사람 역시 자부심이 드러나는 큰 미소를 지었다.

"네, 로수와 저. 그리고 대산이 기를 무기에 깃들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용을 비롯한 몇 명은 익스퍼트의 초입에 도달했고 대부분의 대원들이 기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하하! 정말 축하할 일이군요."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아 조장들은 하르그를 단신으로 상대할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현실에서도 본격적으로 용병대 고유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대장님, 건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묵묵히 서 있던 대산이 나섰다.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비욘드에 신설된 돌풍 상단의 호위대로 투입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다. 그렇게 예정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 임무를 수행해도 되지만 얼마간 더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상급 캡슐의 경우 사망 시 현실의 육체나 정신도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대원들의 전력을 더 끌어 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한 조에 적어도 3명이상은 익스퍼트가 되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룬은 주저하지 않고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려면 좀 더 있어야 했다.

"좋아, 실력이 오르면 그만큼 대원들이 더 안전해지겠디. 그렇게 해!"

 하운의 승낙에 대원들은 소리 없이 웃었다. 

 연구조가 개조해 준 특수 캡슐로 인해 비용드에서의 수련이 현실의 육체와 긴밀하게 연동되는 기이한 체험을 하고 있는 제 조장은 막 익스퍼트가 되었다고 곹 익스퍼트에 오를 조원들에게 따라답히지 않기 위해서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기를 주입한 무기들은 바위를 베고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몸에 믹을 대로 익은 무기술과 기가 결합하면서 이제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꿈과 같이 놀라운 세 조잦ㅇ의 무력을 확인한 대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쟁의식이 심화 되고 있었다.

 수련은 밤낮이 따로 없었고, 현실과 비욘드가 따로 없었다. 가족을 부양할 걱정이나 미래에 대한 근심 없이 일심一心으로 수련을 하는 사이 정신력은 더욱 강해지고 육체는 강건해져졌으며 능력은 일취원장하고 있었다. 그런 변화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대원들오서는 수련 기간의 연장이 너무 반가웠다.

"로수 조장, 혹시 전사의 전당에서 수련 검식을 배웠습니까?"

 혹시 몰라서 묻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나온 하룬이다.

 "아니요, 수련 검식이 웝니까?"

 역시나 로수는 수련 검식을 모르고 잇었다. 의아한 표정을 하는 다른 대원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들 중 수련 검식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전사의 전당에서 무기술의 형形에 속하는 것들만 배운 것이다.

"수련 검식이란 호흡과 검로를 일치시켜 검식을 펼침으로써 기를 축적하고 기의 경로를 뚫는 것입니다."

"그런게 있습니까?"

 수련 검식도 없이 기를 느끼고 축적한 세 조장의 능력은 대단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기술을 수련하면서 기를 축적하고 그 경로가 되는 혈도들을 넓혔을 것이다. 그러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도 이번에 안 것입니다. 내가 전수해 줄 테니 한번 전력을 기울여 수련해 보세요. 소드 마스터가 다듬은 수련 검식이니 효율이 뛰어날 겁니다. 수련 겸식을 익히다 보면 단전을 생성할 수도 있고, 단전과 팔을 지나 손까지 이어지는 혈도들을 효과적으로 뚫거나 넓힐 수 있을 겁니다."

 생각 같아서는 비욘드에서처럼 정제된 마정석으로 단숨에 단전을 생성시켜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 자신이 복용했던 약초들이 도움이 될 터지만 오르그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그런 약초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의 현실에선 그저 부단한 노력과 수련만이 마정석의 역할울 할 수 있었다. 하룬의 말에 대원들의 눈이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룬이 말한 수련 검식은 기가 주입된 무기의 위력을 경험했거나 부러움을 가지고 구경한 대원들에게는 지름길이나 다름없는 방법이었던 것디다.

"단전이 생성될 때까지 부단히 수련 검식을 익히세요. 일단 단정이 생성되면 의지로 기를 움직여 손까지 이어지는 형도들을 넓히는 데 최선을 다하고요. 그리고 이 수련 검식의 수련은 비용드가 아니라 현실에서 하세요."

"알겟습니다. 수련 검식이 어떤 것인지 기대가 되는군요."

 비록 기를 축적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 로수지만 단전을 만들도 혈도를 뚫는다는 이야기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런데 단전이란 정확히 어떤 지리에 위치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혈도라는 것은 가상의 길로 알고 있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유서 깊은 해무검도를 익혀 온 철웅은 단전과 혈도의 개념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한 상태였다. 다른 대원들 중에는 그런 용어 자체가 생소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린 이들도 꽤 많았다.

"일단 제가 아는 것까지 설명을 하지요."

 하룬은 대원들에게 단전과 혈도의 존재, 그리고 기가 혈도를 타고 흐른다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해무검관 출신 대원들은 이미 상당한 기초 지식이 있어 금방 이해를 했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하룬은 이어 수련 검식을 몇 차례나 동작별로 끊어서 시연하며 설명을 해 주었다.

 이미 상단한 기를 축적했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무기술이 경지에 이른 조장들이아면 수련 검식은 쉽게 배울 수 있다. 그들이 전사릐 전당에서 배운 무기술에도 수련 검식의 묘리妙理가 어느 정도는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두 시간 정도가 흐르자 이미 준비가 된 그릇인 세 조장이 수련 검식을 완벽하게 숙지 햇다. 이제는 부단한 수련이 남았을 뿐이다.

"이후 교육은 세 조장이 맡아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쩌지요?"

 과묵한 대산이 질문을 했다. 제대로 익히기는 했는데 혹시 잊거나 틀렸을까 봐 두려운 모양이다.

"벨도 알고 있으니 벨에게 부탁해."

 아리에게도 알려 줄 테지만 자신의 연인을 이 냄새나는 전투조원들의 눈길을 받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룬은 헤니가 대원들 앞에서 먼저 수련 검식을 펼쳐 보이는 것을 뒤로하고 수련실에서 나왔다. 오래만에 나왔으니 할일이 많았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마음 편하게 다시 게임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기지 살림은 맡고 있는 소장실이었다. 안에는 소장과 황 박사가 같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이구! 대장님 오십니까?"

 소장이 반갑게 하룬을 맞았다. 소장은 이제 처음 막 돌풍 기지에 왔을 떄와는 달리 무척이나 젊고 건강해 보였다, 그는 하룬을 맞은편 소파에 안내하고 금방 차를 준비했다.

"박사님도 잘 지내셨죠?"

"잘 못 지냈습니다. 아이들이 하도 말을 안 들어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습니다."

 황 박사는 아직도 아이들 교육의 일부를 직접 맡고 있는지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을 소장처럼 건강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두 분 다 신수가 훤해지셨네요."

"허헛! 그건 욕입니다. 제가 얼마나 기지 식구들에게 시달리는데 그런 말씀을."

"하하하! 아니 정말 10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거야 내가 워낙 정력적으로 일을 하나 보니......"

 하룬의 말이 싫지는 않은지 굵은 미소를 짓는 소장이다.

"허허! 우리 소장님 요새 완전히 회출했답니다. 하고 싶은 잔소리를 다 하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풀려 젊어졌다고 하던데요. 영흥 마을에서는 그렇게 많은 잔소리를 못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끼, 이사람아!"

 두 사람은 농담을 하며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두 분에게 기지를 맡겨 놓고 그동안 신경을 쓰지 못해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요, 대장. 내 아리 참모에게 대충 들었습니다. 바욘드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대장이 동분서주한다는 소리를 듣고 겨우 아아들 교육만 하고 있는 내가 미안했소."

"이번에 비욘드에서 상단이 출범했다는 소식은 다들 안고 있스빈다. 그 일을 위해 대장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잘 알고요."

 두 사람은 기지 살림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기에 대출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두 분이 계셔서 편안하게 수련도 하고 게임도 할 수 있는걸요."

"이 기지는 물론 식량이나 캡슐 구입에 이르기까지 대장이 한 일이 거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저 대장이 제공하는 것을 발판으로 영활하게 일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대장이 우리를 위해 내놓은 기반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처와 식량 그리고 할 일이 있기에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거니까요. 이 모든 것은 대장 덕분입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우리 기지 식구들 중에 대장의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듭되는 두 사라므이 덕담에 얼굴이 붉어진 하룬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놓고 사람을 구름 위로 띄우는 두 사람 때문에 은근히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아무튼 두 분이 계셔서 정말 든든합니다."

 그건 정말이었다. 탁월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기지 식구들을 휘어잡고 금방 안정을 시킨 소장이나 연륜만큼니아 뛰어난 지혜와 대화술로 상대방을 감화시키고 설득하는 황 박사 덕분에, 기지는 그 초반은 물론 속속 인공수정체 출신들이 들어오는 것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처럼 나이가 든 노인네들에게 가치 있는 일을 맡겨 주어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이가 들면 쓸모없다고 내팽겨 치는 것이 유니온의 현실이다. 노화로 인해 은퇴를 하면 저축액이 많지 않은 이상 당장 E나 F구역으로 쫓겨나 최소한의 지원으로 죽을 때까지 방에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결혼하는 대신 쉽게 헤어질 수 있는 동거를 선택하는 대다수의 가정은, 출산은 물론 양육마저도 책인지기 힘들다. 유니온의 대다수 시민들은 깊은 관계 대신 상처를 받지 않는 가벼운 만남과 섹스를 선호하는 것이다.

 직장 때문에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사회구조 탓에 각종 보욕 시설은 활성화가 되었지만 그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도 애정을 주고 받을 시간이 부족했다. 애초에 유대 관계가 없으니 후일 장성한 자식들이 자주 찾을 리가 없다. 유니온 사회는 그저 일벌레로 오랜 삶을 살아온 자들의 지혜 따위는 필요가 없는 세상인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이곳은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다. 또한 영흥마을 출신들은 그 부모가 목숨을 걸고 벌어 온 돈으로 삶을 유지했기에 노인들에 대한 가치관 자체가 유니온과 달랐다.

"그런데 요즘 기지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두 사람은 하룬의 질문에 현재까지 하고 있는 일들을 소상히 보고했다.

 기지 식구들은 이제 완전히 기지 생활에 적응한 상태였다. 나이의 유무와 성별 그리고 선호도와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배당된 일을 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었다.

 속속 인공수정체 출신들이 합류하고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전투조나 연구조 혹은 보라와 미드레가 주축이 된 활동조에 소속되어 할 일을 찾았다.

 아이들과 새로 영입된 인공수정체 식구들의 교육은 황 박사를 비롯한 교육조가 신설되어 맡았다.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하루 6시간의 정규 교육에는 심신을 단련할 수 있는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고, 유니온과는 달리 수준 높은 내용이 교육되고 있었다.

 인공수정체 출신들은 한 달간의 특별 교육 기간을 통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분야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한 소양 교육은 물론 길이 정해지면 심화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인공수정체 출신들 대부분은 힘든 생활을 해 왔던 만큼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보장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그 만족도가 상상이상이라고 했다.

"두 분이 정말 수고가 많으셨군요. 감사합니다."

 하룬이 진정을 담아 인사를 하자 두 사람은 멋쩍지만 자부심이 묻어 나오는 얼굴로 마주 인사를 해 왔다.

"이게 다 대장 덕분입니다."

"우리같은 늙은 사람도 이렇게 가치 있는 일을 하게 해 준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심 두 사람이 힘들어 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던 하룬은 마음 편하게 소장실을 나올 수 있었다. 다른 것을 떠나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어 있어 기분이 좋았다. 소장실을 나온 하룬은 상단 일 때문에 정신이 없을 보라를 찾았다. 하지만 보라는 비욘드에 접속 중이었고 마친 미드레가 나와 있었다. 

"대장!"

"하하! 잘 지냈어?"

"네, 할 일이 많아 힘들기는 하지만 요즘은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있고 신 나요."

 그 말을 증명하듯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밝았다.

"상단은 어때?"

"이제 행정적인 절차는 거의 끝나 가요. 시 당국에서 상단 본부로 쓸 건물까지 구해서 매입하는 데 도운을 줄 정도로, 전폭적인 협조를 해 주어서 많이 도움이 되고 있어요. 본부가 자리를 잡는 대로 지부의 설립 작업에 들어갈 거예요."

"다행이네."

 이벨린 황녀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표가 났다. 

"보라는?"

"보라는 가츠 노인과 함께 지내는데 허벌 시티의 외곽에 제약 생산 시설을 세우기 위해 알아보고 있어요."

 가츠가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미리 언질을 해 두지 않아 걱정으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무슨 노인네가 그렇게 정력적인지 보라와 상단원들이 힘들어서 죽으려고 해요."

"그래?"

"약초를 씻고 말리는 간단한 장치부터 시작해서 썰고 추출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두들이 필요한데, 보라를 비롯한 단원들이 대장간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주문해서 그것들을 가츠 노인이 말한 기간까지 완성해서 가져가려니 힘들 수밖에요."

 가츠 노인이 호통 치는 것이 떠오르자 하룬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안 봐도 그 장면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어쩌면 러벌 길드로서도 제약업이 태동하는 것이 대를 이은 염원이었을지도.....'

 대규모의 범용 약품이 생산되면 약초를 채집해서 제공하는 허벌 길드는 안정적인 공급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때에 따라 기후나 전쟁과 같은 상황으로 인해 심하게 요동치는 약초 가격을 생각하면, 이런 공급처의 출현은 허벌 길드에 소속된 약초꾼들과 사냥꾼들에게는 안정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준다. 남부럽지 않은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원 투입은 어때?"

"현재 약 300명 선까지 확보가 되었어요. 기지 식구가 아닌 형제들도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자원을 많이 했거든요. 본부와 직할 상점에 30명 정도를 배정하고 허벌시티의 생산 시설에 30명, 그리고 지부의 상점에는 각기 20명씩을 배정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나머지는 상점들과 창고를 지킬 호위대로 구성했어요."

"60명 가지고 될까?"

 상행 호위는 돌풍 용병대가 한다고 치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날 상점과 창도 들을 지킬 인원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차차 늘리려고요. 어차피 상인 직업보다 마법사나 전사 직업을 선택한 형제들이 많으니까 금방 모을 수 있어요. 60명은 기존 식구들의 추천을 받은 실력있는 유저들이거든요."

 내심 걱정을 했지만 미드레와 보라는 알아서 잘하고 있었다.

"우리의 안정적인 미래가 달려 있는 사업이니까 미드레가 신경 좀 써줘."

"걱정 마세요, 대장. 단순히 돈을 벌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일이라 사기도 높아서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요."

 미드레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그녀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망설이는 눈치가 보였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네. 이종족들의 물건은 언제 도착하나요? 마탑과 황실에서 사람이 몇 번 왓다 갔는데....."

 그걸 신경 쓰지 못했다. 하룬은 상단이 본격적으로 출범하려면 아직 꽤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흐음. 내가 시크릿 대원들에게 내용을 알릴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봐."

"아! 시크릿 대원!"

 헤니에게 진수 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미드레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마탑과 황실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요. 뭐가 그렇게 급하지, 원."

 하룬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탑과 황실에서 보인 반응을 평가절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오서는 큰돈이 되지 않는 약품보다는 이종족이 만든 아이템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 수고해. 종종 나와서 보고를 받을게."

"알았어요. 보라와 제가 번갈아 가며 로그아웃을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데?"

"연구조에 말 좀 해 주세요. 전투조들은 다들 개조한 최상급 캡슐을 가지고 있어서 오랫동안 게임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보급형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고요. 이래서는 능률이 오르지 않아요."

"알았어. 조치를 하지."

 하룬은 혹 하나를 달고 미드레와 보라가 맡고 있는 돌풍상단 상황실에서 나왔다.

 연구실로 향한 하룬은 한동안 쏘우읨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연구조 역시 지속적으로 충원이 되어 상당한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상당수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연구실은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캡슐을 개조하는 작업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동건이나 입자포 등 무기를 개량하는 작업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출입이 제한된 작업실이었다.

"어! 대장님!"

 한참을 돌아다녀도 아는 얼굴이 없었지만 용케 안면이 있는 인공수정체 출신 대원이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뛰어왔다.

"리크, 잘 지냈어?"

 창백한 얼굴과 왜소한 몸집에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던 리크는 하얀 연구복이 잘 어울려 보였다. 하룬의 기억에 의하면 리크는 몸이 약해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글보벌 넷으로 혼자 공부를 햇던 인공수정체 형제였다.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이 모두가 대장 덕분이에요."

 예전에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리크가 유창하게 말하는 모습에 뭔가 위화감이 들었지만 달라진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기에 기분은 좋았다.

"쏘우 형님은?"

"지금 개인 연구실에 있어요. 불러 드릴까요?"

"아, 아니야. 캡슐 때문에 잠깐 들렀는데 캡슐 쪽은 누가 책임지고 있지?"

"제가요, 원래 제가 한 캡슐 했거든요."

 뜻밖이었다. 그렇게 소극적이었던 리크가 캡슐 개조를 책임지고 있다니. 쏘우는 능력이 없으면 절대 일을 맡기지 않는 꼼꼼한 성격이니 리크가 그의 잠재력을 드러낸 것이리라.

"그래? 하하하! 그럼 잘됐네. 상단조에도 개량한 캡슐을 좀 보급해 줘. 그쪽에서 볼멘소리를 하더라고. 전투조만 너무 챙긴다고."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앟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전투조가 늘어가는 속도가 한풀 꺾여서 이제 그쪽도 챙기려는 참이었어요."

 전투조에 캡슐을 최우선으로 공급하라고 했던 것은 하룬이었는데, 대원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아무튼 곧 활동조에게도 개조된 캡슐이 공급된다니 다행이다.

"염려 마세요. 그쪽에서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거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 부탁해. 나중에 쏘우 형님에게는 내가 잠시 들렀다고 말해주고."

"알았어요. 근데 대장 얼굴도 모르는 대원들이 많으니가 회식을 한번 해야 할 것 같아요."

"조만간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지, 수고해!"

 하룬은 달라진 모습의 리크로 인해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 설 수 있었다. 자신의 작은 지원으로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적극적으로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나온 하룬은 한동안 들르지 못했던 업무실에 들렀다. 미드레의 요청이 들어온 김에 한동한 뜸했던 진수아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어! 대장, 오랜만이네."

 게임을 하고 있엇는지 조금은 기다려서야 겨우 진수와 연결이 되었다.

"얼굴을 보니 잘 지낸 것 같네요, 형."

"하하하! 나야 하고 싶은 것만 하니 언제나 잘 지내고 있지. 대쟝은?"

 그렇게 묻는 진수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여 하룬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동안 할 일이 꽤 많았어요. 정신없이 지냈지요."

"이런. 미안해서 어쩌지."

"미안하긴요,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어요?"

"며칠 전에 스카이루프 산맥에서 나와 지금은 고요의 평원 근처에 있어."

"모험은 재미있었어요?"

"흐흐흐! 놀라지 마. 나 이제 레벨이 130을 넘었다고."

"정말요?"

"후후후! 이제 돌풍 용병대에 부족하지 않은 실력이 되었다고. 그런데 대장은 어디야? 이제 나도 정식으로 같이 움직여야지."

"지금은 마츠 평원에 있어요."

 하룬은 이제까지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진수는 많이 놀라면서도 강한 흥미를 보였다.

"빨리 합류해야겠네. 조금만 기다리라고, 대장."

"아니, 그보다 형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요."

"뭔데?"

"실은 스카이루프 산맥에서 엘프들과 드워프들을 찾아야해요."

 하룬의 말에 진수는 무슨 이야기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내가 할게, 그들이 어디쯤 자리를 잡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아."

 진수는 잃어버린 왕궁의 폐허를 탐험할 때 그린 엘프를 본적이 있다는 말을 꺼냈다.

"아! 그들도 형이 가진 마법 통신구를 가지고 있으니 멀리 떨어지지만 않았으면 통신이 될 거에요."

"그렇다면 문제없어, 어차피 붉은 모루 부족의 드워프들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을 테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다행이네요.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요. 아마 그들은 식량이 많이 부족할 거에요. 거래를 하려면 식량이나 의복 같은 것이 많이 필요할 텐데........"

 험준한 스카이루프 산맥에 안전한 거처를 정했을 테지만 식량은 다른 문제였다. 물론 시간이 흐른다면 그것도 자체적으로 어떻게든 해결을 하겠지만 지금은 정착으로 인해 식량수급이 어려울 것이다.

"식량이라면 내게도 꽤 많이 있어. 원래 1년 이상을 잡고 스카이루프에 들어온 터라 꽤 많이 남았거든. 그리고 산인 직업을 택한 친구 녀석이 원주민들과 거래를 한다고 밀과 보리 같은 식랭을 잔뜩 사서 상급의 마법 배낭 두 개를 가득 채웠거든. 한데 스카이루프 산맥은 인간들이 살기에는 너무 험한 곳이라 원주민 마을은 구경도 못 했어."

 다행이었다. 도시로 나와 식량을 구입해서 가자면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뭐 엘프들이야 과일이나 채식을 많이 한다고 알려졌으니 그리 많은 양이 필요하지는 않겠지. 드워프들도 그 숫자가 많은 편은 아니니까 이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잘됐네요. 그럼 형이 친구에게 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다 사요."

"그러지. 아니, 마법 배낭도 그렇고 그것들을 구입한 비용을 내가 다 빌려 주었으니 지불할 필요도 없어."

 역시 진수였다. 친구가 필요하다고 상급의 마법 배낭 두개와 그것들을 가득 채울 식량을 구입할 돈까지 빌려 주다니 말이다. 

"그럼 그것은 나중에 용병대 자금에서 해결해 줄게요."

"우리사이에 무슨! 대장에게 도움이 된다니 다행인걸."

"붉은 모루 부족과는 정기적으로 거래를 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별문제가 없을 거고 그린 일족을 포함한 다른 엘프들도 거래를 거부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대장, 걱정하지마. 이 건은 내가 친구들과 알아서 할 테니까."

"고마워요, 형!"

"고맙긴. 그동안 같이하지 못해 내가 미안했는데 잘됐지. 그럼 거래 물품을 받아서 데모 시티의 돌풍 상단을 찾으면 되는 거지?"

"네. 상단주를 찾아 돌풍 용병대원이라는 것을 밝히면 돼요."

"하하하! 이제 자체 상단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돌풍이 날개를 달고 창천을 훨훨 나는구나. 빨리 처리하고 대장이 있는 곳으로 합류할게. 나도 그렇지만 친구들도 한동안 산맥에서만 살아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럼 조심해요, 형. 다음에는 기지로 놀러 와서 거하게 한잔해요."

"그럴게. 그럼 이 히든 대원은 특별 임무 수행을 위해 비욘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돌~풍~!"

 진수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엉성하게 경례를 했다.

'언제 봐도 참 좋아 보여."

 자신이 좋아하는 모험을 마음껏 즐길 수 있어서 그런지 언젠가부터 진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마음을 나눌 좋은 친구들과 풍족한 돈 그리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모험이 기다리는 비욘드가 있어 늘 행복하고 즐거운 진수를 보며 하룬 역시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자신도 진수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디만 지금은 워낙 벌려 놓은 일이 많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꼭 올 거야!'

 나중에 모든 것이 해결되면 벨과 아리를 데리고 정말 평범한 게이머처럼 비욘드를 즐기겠다고 다시 한 번 맹세했다.

"오빠!"

 호수 중앙 기지로 돌아온 하룬은 환하게 웃으며 품으로 뛰어드는 아리를 볼 수 있었다. 벨이 연락을 해 두었나 보다.

"아리야!"

 풍성한 옷에 가려졌던 탄력 있고 부드러운 동체가 아리 특유의 체취와 함께 하룬을 자극했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 본 하룬은 항상 두 사람을 떠나지 않던 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시고 그 순간을 즐겼다. 아리 역시 그리워했던 하룬의 듬직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과 심장박동을 생생하게 느끼며 서로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달콤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비록 대화가 없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서로에 대해 알아 온 것처럼 익숙해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워했던 만큼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순간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혀로 마른 입술을 핥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리의 입술을 느끼고 싶었지만 언제 벨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애써 그 욕구를 눌렀다. 키스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더 깊은 행위를 한 것처럼 충만함과 동시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느껴졌다. 

"잘 지냈어?"

 하룬의 말에 아리는 하룬에게 두 눈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룬은 자신을 쳐다보는 아리의 그윽한 눈빞에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아리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지 처름 느꼈다. 가족이 아닌 이성에게 말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좋아해 주는 아리의 마음이 알알이 느껴지자 그녀에 대한 감정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히잉. 자주 나온다고 해 놓고 왜 이렇게 오랜만에 나와요."

 아리가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미안. 중요한 의뢰를 받았거든."

"칫! 난 매 순가남다 오빠를 생각하는데........"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민 아리의 눈초리가 위로 휘어지며 흘겨보는 자태에 하룬은 마음이 심하게 진탕되었다.

"그, 그게........"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던 하룬은 엘리베이터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아리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부드럽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벨이 돌풍 기지에서 돌아오는 것이리라.

"나도 늘 아리를 생각해. 비록 일을 하거나 다른 동료들과 있을 때는 잊어버릴 때도 있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에는 늘 너만 생각하고 있어."

"정말?"

 아리는 이제야 만족했는지 눈이 반달로 변했다. 반달이 된 그녀의 눈은 행복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자신을 찾으러 갔었는지 식식거리며 들어오던 벨이 엉거주춤 떨어져 있는 두 남녀를 이상한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혹시 이상한 짓을 한 것은 아니지?"

"아니야!"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흠!흠!"

 벨이 몇 번 숨을 짧게 들이마시더니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근데 이 이상한 남새는 뭐야?"

"무, 무슨?"

 아리가 붉어진 얼굴로 묻자 벨의 콧들에 주름이 생겼다.

"뭐긴 뭐야? 달콤한 연인들의 뜨거운 몸과 마음이 뿜어내는 페로몬이지.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아 죽겠지? 오빠와 아리 언니 심장박동 수가 평소의 두 배로 올라갔거든."

"...... 얘는!"

 벨이 장난을 한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지만 적나라한 내용에 부끄러워진 아리가 두 손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감싸고 소파에 앉았다,

 하룬은 아리를 놀리는 벨에게 무슨 소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두 사람에게는 가장 가까운 벨이 제일 무섭고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볼일은 다 본거야, 오빠?"

"응. 대충."

"벼리가 드디어 동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어."

"그래? 그거 잘 됐네."

 벼리의 동료들이라면 현실에서도 굉장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들이 돌풍 기지에 합류한다면 크나큰 힘이 될 것이다. 꼭 그것이 아니라도 같은 인공수정체 형제들이 이제는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룬은 벨의 말에 반색했다.

"그럼 정보는 어떻게 교환하기로 했어?"

 암중에 세상을 조종하는 거대 세력 중 하나인 글로리 가이아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연구소라면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물어보는 것이다.

"그건 내 능력을 활용할 거야."

"네 능력?"

"응. 나도 잘 모르고 있다가 아즈만이 알려 주어서 알았는데 내가 다중인지多重認知 능력을 가지고 있대."

"다중인지 능력?"

 하룬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자 아리가 대신 설명을 해 주었다.

"그건 한 번에 한 가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수십 가지의 정보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벨에게 그런 능력이 잠재해 있었으니 오빠도 발휘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런 능력이 있다니.

"와! 벨, 너 정말 대단하구나!"

"헤헤! 아직 동시에 여섯 가지밖에는 인지하지 못하는걸."

 벨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감쌌지만 눈은 기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만든 초미세 웜 형 사이보그가 벼리와 그에게 설듣 된 휴먼들의 몸 안에 들어가 뇌신경으로 결합하면 벨이 실시간으로 그들을 통해 전해 오는 정보를 뇌파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흠, 그럼 벨은 꼼짝도 못 하겠군."

"할 수 없지, 뭐. 그 방법만이 적들의 눈을 피해 데드 벙커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고 배신 여부를 알 수 있으니까."

"그럼 상대방의 동의도 받지 않고?"

"벼리는 알아. 원래는 설명을 하고 동의하는 휴먼들에게만 알약을 주려고 했는데 벼리가 그러지 말래."

"그래? 괜찮을까? 나중에라도 알면 무지 기분 나빠 할 텐데."

"벼리가 책임진다고 했어. 기회를 봐서 주스류에 녹여 데드 벙커의 연구자들에게도 먹일 생각이래."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보안은?"

"응.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장형으로 설계를 한 거라 알약 하나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동시에 들어가면 체내에서 합성 과정을 통해 분화하는 형태거든. 그리고 만약의 경우 스스로 녹으면서 독성 물질을 분비해서 신경세포를 손상시켜 뇌사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보안은 걱정 없어."

 그런 것이 있다니 정말 대단했다. 하룬은 새삼 여동생 벨과 아리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든든했다. 두 사람은 마음이 변화무쌍한 여느 휴먼들과 달리 자신에게는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둘 다 고생이 많구나. 오늘은 오빠가 두 사람을 위해서 요리를 해 주지. 그다름에 기를 모으고 활용할 수 있는 수련검식을 알려줄게."

"정말?"

"호호! 기대가 되는걸요."

 비록 복잡한 요리는 못하지만 그래도 오래 혼자 살아왔던 덕에 간단한 요리는 자신이 있었다. 하룬은 자신에게 따라붙어 조잘거리며 흉을 보거나 재료를 가져다 주는 벨과 아리를 위해 열심히 요리를 만들어 오랜만에 즐거운 세 사람만의 시간을 즐겼다.

"야! 아직 제대로 된 사건 못 잡았냐?"

 막 캡슐에서 나온 아레스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없어! 요즘은 큰 건을 찾을 수가 없어. '검증의 관' 건과 제국의 분할 건이 발생한 후에는 대형 기삿거리를 찾을 수가 없네. 정보를 쥐고 있는 길드들도 정보를 오프라인에서만 다루는지 카페를 해킹해도 별다른 것을 찾을 수가 없어."

 허공에 몇 개의 홀로그램 창을 띄워 놓은 채 손톱을 손질 하던 미료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거야, 원, 아무리 찾아도 던전 공략이나 사냥터의 정보 밖에는 없으니, 돈이 안 돼요."

 장료 역시 마찬가지의 대답이라 내심 기대를 하고 나왔던 아레스가 인상을 썼다. 방송사의 정규 기자들은 물론 유저들 중에서도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이 늘면서 그런 하찮은 기삿거리마저도 심한 경쟁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비쥬얼이 달리니 특종은 아니라도 중박 정도는 칠 기삿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말이야."

 미료의 말에 아레스는 인상을 쓰긴 했지만 맞는 말이라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엄청난 미모와 늘씬한 몸매를 가진 똑똑한 여자들을 기자나 특파원 등의 신분으로 특채하면서 아레스와 같은 현장 기자들은 여간한 말빨이 아니라면 이제 프로그램의 패널로도 출연하기 힘들어졌다.

"하이 랭커의 밀착 취재 건은 어때?"

 장료의 말에 아레스의 주름살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야, 그것도 샤롯과 같은 미녀 기자들이나 가능한 거야. 누가 아레스와 같은 못생긴 사내랑 동행하며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 주겠냐?"

"하긴 그것도 그렇다. 나라도 이왕 방송에 출연할 거 미녀 기자를 파트너로 선택할 테니까."

 두 친구의 말에 속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지만 아레스는 애써 참았다. 이런 주제로 싸운 것이 거의 매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결론이 없엇다. 다만 셋의 우정에 금이 가기만 했던 것이다.

"제길! 정식 기자가 된 것은 좋은데 주급만 바라보고 살려니 정말 미치겠다."

"그러게 말이야. 씀씀이가 너무 커져서 이젠 보육원에도 줄 돈이 없어."

"이번 주만 해도 지출이 수입을 넘어섰어. 이제는 먹는 것도 줄여야 해."

 아레스는 두 친구의 말에 긴 한숨을 쉬었다. 하룬의 돌풍 용병대가 한동안 활동을 쉬겠다고 해서 1황자였던 신 테론 제국의 가르반 황제를 따라갔지만 특별한 특종은 건질 수 없었다.

"휘유! 옛날이 좋았는데."

 잘나가던 때만 생각하고 계획성 없이 마구 돈을 써 왔던 세 사람의 경제생활은 어느새 적자로 돌아섰던 것이다.

"제길! 보육원 엄마 얼굴은 어떻게 보나."

"할 수 있냐? 정 안되면 슈퍼 마그네틱 카라도 팔아야지."

"하긴. 별로 쓰지도 않고 있느니 그거라도 팔아야지."

 잘 움직이지 않는 두 친구야 마그네틱 카라도 팔아야갰다고 편하게 생각하지만 요즘 같은 방송사의 수습기자인 보드레와 연애를 하는 아레스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멋진 슈퍼 마그네틱 카가 남자의 능력을 보여 주는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한 방이 터질 때마다 수천 수억을 벌었던 작년을 떠올리는 아레스의 머릿속에는 하룬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대체 그 형님은 어디에 잇는 거야? 이럴 때 그분 옆에 달라붙어 있으면 뭔가 건질 것이 있을 텐데."

 미료와 장료도 아레스의 말에 동의했다.

"매그엄도 모른데?"

 미료의 말에 아레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은 인공수정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급속하게 친해진 매그럼이지만 녀석도 요즘은 끈 떨어진 연 꼴이 되어 기운 하나 없는 모습으로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기자나 GM이나 정보가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뫼비우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냐?"

 홀로그램 창에 드러난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미끈하고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그냥 그래."

 아레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뫼비우스가 이상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래? 돌풍 용병대가 활동을 재개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너 혹시 연락받은 거 없냐?"

"정말?"

 아레스의 눈이 갑자기 두 배로 커졌고 미료와 장료가 않은 상태로 의자를 움직여 화면 앞으로 모여들었다.

"헤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연락하려고 했더니 보라가 대신 받더라고, 걔 말이 의뢰 건으로 하룬 대장이 호출해서 데모 시티로 갔다고 하더라."

"그래서?"

 뫼비우스 녀석은 타고난 제비이지만 미끈한 외모를 훨씬 뛰어넘는 능력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정보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는 것이다. 녀석은 벌써 유니온을 아우르는 정보 조직을 만들어서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런 고급 정보를 입수하고 가만히 있을 녀석이 아니다.

"없는 꼬리가 빠질 정도로 그곳으로 날아갔지. 그랬더니 벌써 사리지고 없더라고. 보라나 미드레도 아는 게 없는 걸 보면 뭔가 큰 건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 바닥의 정보를 끌어모아 보니 파이린 황실의 실력자가 은밀하게 데모 시티를 방문했다는데 어쩌면......"

'대박이다!'

 아레스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넌 어떻게 할거야?"

"나? 나야 뭐......"

 뫼비우스 녀석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옛날처럼 다시 뭉치자! 매그럼과 나 그리고 네가 뭉치면 뭔가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아레스의 말에 뫼비우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 역시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렇담 빨리 이곳으로 와라. 난 현실의 돌풍 용병대가 투자해서 출범한 돌풍 상단의 본부에 있으니까."

"응? 동풀 상단이라고? 언제 또 그런 것까지 만들었대. 아무튼 알았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곧 갈테니까."

 어느새 아레스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장료와 미료, 두 친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아레스처럼 대박의 향기를 맡았던 것이다.

"역시 우리의 생명 줄은 위대한 하룬 대장이라니까!"

"그런 곳이 있다고?"

 여훈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응, 그곳은 휴먼답게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조직을 위해 일하다가 결국은 버려질 운명을 가진 우리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어,"

"우리 운명이야 그렇긴 하지. 네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럴 수도......."

 여훈은 혹하는 눈치였지만 완전히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는 벼리는 농담이나 헛소리는 통 모르는 재미없는 녀석이다. 겉만 보면 우직해서 오로지 앞만 보고 매진하는 타입이지만 머리 역시 비상한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널 따르는 녀석들을 설득해. 확실한 녀석들로만. 혹시라도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우리는 물론이고 조직의 다른 형제들까지 피해를 볼 테니까."

"그거야 알지."

 이전에 호위조에 속해 있던 한 친구가 휴먼 가든 쪽에 전향을 하면서 조직의 거물이 살해되고 은신처 네 곳이 드러나면서 조직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사건 이후로 인공수정체 출신들에 대한 조직의 대우가 조금은 바뀌었다. 

 공적이 뛰어나고 능력이 검증된 인공수정체 출신들은 부조장이나마 승급을 할 수 있었다. 인가에 있어 심각한 차별을 받아 왔던 인공수정체 출신들의 불만 사항을 개선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일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인공수정체 출신들은 조직의 삼엄한 감시에 점점 더 숨이 막혀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하룬 대장이 돌풍 용병대를 이끌고 이곳을 공격할 거야. 그때 상황을 봐서 그들에게 내응을 한 후 이 지옥과 같은 곳을 박상 내 버리고 떠나면 되는 거야."

 여훈은 뜻밖의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에게 그 정도 전력이 있는 거야?"

"내가 보고 들은 것만 해도 상당한 전력이었어. 무기도 개량하고 있었고, 우리와 같은 인공수정체 출신들이 속속 돌풍 기지로 모여들고 있었어. 당장은 무리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틀림없이 이 지옥과 같은 곳을 무너뜨리고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거야,"

 벼리는 이어 자신이 본 사실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정말로 그들이 헤븐 컴페니를 박살 낸 거야?"

 여훈은 이야기가 헤븐 컴페니에 이르자 깜짝 놀랐다. 벼리는 물론이고 이곳에 와서 정신을 차린 마늘 팀장의 증언으로 오르그들의 대규모 습격을 받았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응, 오르그들을 이용하긴 했지만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돌풍 용병대였어. 그것도 대장을 비롯한 10명 미만의 전력으로 말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형제와 같은 벼리의 말에 여훈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그 역시 조직에서 떠나 휴먼다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것은 다른 인공수정체 출신들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일은 수많은 형제들의 목숨이 걸린 만큼 신중하게 판단해야만 했다.

'벼리의 말대로라면 가능성이 출분하다. 그럼 헤븐 컴페니를 없앤 것도 결국 그들이 오르그를 이용했다는 말인데 그정도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면 기대를 해도 되지 않을까?'

 언제고 자신들의 힘을 길러 이 지긋지긋한 조직에서 탈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딘 했지만, 날로 심해지는 감시의 눈길에 형제들끼리 말을 주고받는 것도 쉽지 않는 상황이다.

 어쩌면 조직에서는 심복지환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없애기 위해 단호한 결정을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정도로 인공수정체 출신들은 조직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 네 말을 믿지!"

 결국 여훈은 벼리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잘 생각했어! 네 결정으로 우리는 좀 더 많은 형제들을 자유와 꿈이 있는 곳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된 거야."

 벼리는 여훈의 손을 꽉 잡았다.

"자, 이걸 삼켜! 이건 돌풍 기지의 연구조에서 개발한 기생충 타입의 사이보그야. 그 사이보그들은 네 신경조직에 결합해서 네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 그곳에서 알 수 있게 될 거야."

 여훈은 벼리가 내미는 작은 알약을 뜨거운 눈으로 잠시 바라보고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삼켰다. 비록 자신의 일상을 남에게 실시간으로 감시당하는 것이 기분 나빴지만 이제까지도 그런 삶을 살아왔다. 이왕 결심을 했으니 망설일 것은 없었다. 그러니 여훈이 단숨에 알약을 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네가 가지고 있다가 같은 결정을 한 형제들에게 먹여."

"알았어."

 여훈은 벼리가 준 스무 개의 알약을 조심스럽게 제복의 비밀 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통신 기능은 없는 거야?"

 역시 전약통인 여훈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벼리는 짐작도 못했던 효용까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있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세 번 누르고 의지를 전하면 약 3분 정도 뇌차를 이용해서 통신을 할 수 있어. 만약 바로 응답이 없더라고 나중에 뇌파를 통해 통신을 해 올 거야."

"흐음, 대단한 기술력이군. 이 정도면 굉장한데."

 뇌파 통신이 가능한 극소형 사이보그의 존재에 여훈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이것만으로도 돌풍 기지의 전력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존재에게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맡기는 일이지만 일단 결정을 내린 여훈은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안해, 친구. 네가 형제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배신행위를 하거나 이 계획을 토설할 위기에 처하면 그 사이보그가 독액을 분비해서 순간적으로 뇌를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어."

 벨은 자신에게 그런 사실까지 말해 주었지만 벼리는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한 형제나 다름없는 인공수정체들이지만 한동안 다른 임무를 맡아 떨어져 있었던 만큼 누군가 형제들을 배신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잘한거야! 배신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형제들의 지탄을 한 몸에 받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해도 휴먼이라는 존재는 과거 문명에서 뚜렷하게 알려진 대로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존재가 아닌가? 수많은 형제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만큼 안정장치는 있어야 했다.

"그나저나 본부에서 왜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지?"

 마늘 팀장을 호위해서 이곳에 온 지 꽤 시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물론 마늘 팀장마더조 할 일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 상황이 이상해서 묻는 것이다.

"그건 나도 잘 몰라. 이곳 참모부의 추측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어. 하나는 오르그들이 이곳을 습격할 것에 대비해서 유니온 외부로 파견되어 있던 대원들을 이곳으로 결집시킨다는 거야."

 가능한 추론이다. 헤븐 컴패니가 오르그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곳에서 생산했던 마약들이 약탄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이곳의 안전을 위해 조직의 무장세력을 결집시키려는 것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현재 본부가 이곳이나 이제까지 해왔던 사업들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의 큰일에 매달려 있을 수 있다는 거야. 마약이나 다른 물품들을 호송하던 조들이 이곳에 들어와 대기하고 있는 것이나 유니온 내부에서 하던 사업들을 최소한으로만 유지하는 것을 보면 현재 본부에서 사활을 걸로 추진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추측이야."

 그것 또한 설득력이 강한 추측이었다. 유니온 안팎을 오가면서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호송하는 호송조들이 헤븐 컴패니 건 이후로 이곳에 결집하는 것은 정말 이상했다. 이렇게 많은 전력이 한곳에 모이는 것은 굉장히 드문일이었다.

"은밀하게 도는 소문으로는 조직의 시크릿 요원들이 모두 한 가지 일에 투입되고 있다고 해."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굉장한 일이다. 시크릿 요원들은 글로리 가이아의 각 조직에서 뛰어난 무력과 능력을 보인 요원들이다.

 벼리도 그중 1명을 알고 있었다. 전임 조장이 그곳으로 갔던 것이다. 그의 검술 실력은 익스펖트 중상급으로, 혼자서 오르그 열 마리는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실력자였던 것이다.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부는 물론이고 총본부의 중요 인사들마저 그 일에 투입되느라 하부 조직의 일은 최소한으로만 운영한다는 소리가 있어."

"그 일이 도대체 뭘까?"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 다들 추측만 하는 거니까. 확실한 것은 거사를 하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최선이라는 거야. 이 상황이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인 진짜 이유야."

 여훈의 말대로였다. 만약 여훈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이 데드 벙커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인공수정체 형제들을 조직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만일 이 두 번째 추리가 사실이하면 우리 형제들은 조만간에 이곳에 다 모이게 될 거야."

 인공수정체 출신들은 조직의 신임을 받지 못해 거의 모두 자신들처럼 유니온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다. 소수만니 유니온 내의 마약이나 창녀들과 관련된 사업체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민두 그 자식이 휴먼 가드로 전향한 것이 조직에 남아 있던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결과를 만들어 준거구나.'

"좋아. 일단 상황을 지켜보다가 형제들이 다 모이는 시점이 되면 돌풍 용병대로 하여금 작전을 개시하라고 전할게."

 벼리의 말에 여훈이 굳은 얼굴이지만 뜨거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힘주어 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벼리 역시 주먹을 들어 올려 혀훈의 주먹과 세 번을 마주치며 뜨거운 시선을 주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면 인공수정체 출신들이 하는 일종의 맹세 의식이었다.

'형제들아, 조금만 더 기다려라! 새로운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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