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은 에테메난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세르파를 필두로 마탑 인물들과 대원 셋이 티노와 함께 돌아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야 뭐 어려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들의 행색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우려 어린 시선에 세르파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별거 아닙니다. 마나석들을 다 회수하고 마법진의 문양을 지우고 있을 때 마수들이 공격을 해왔습니다.”
“괜찮은 겁니까?”
하룬은 놀란 얼굴로 그들의 행색을 다시 세밀하세 살폈다.
“저희가 상대한 것은 몇 마리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마수들은 버처리비크들이 처리했습니다. 돌풍 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저희를 지켜주어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막사 밖에 서 있는 세 대원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방어구 이곳저곳은 찢어지고 마른 피의 흔적이 선명했다.
하룬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파투가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우린 괜찮다. 아니, 괜찮습니다. 브롤프와 람비들은 버처리비크들이 대부분 죽였고 우리는 겨우 열 마리만 상대했습니다. 그것도 마법사분들이 무서운 마법으로 다 죽였습니다.”
다행이었다. 마수에 대해서 세밀한 대응 전략을 세우지 않은 것이 큰 실수였다. 버처리비크들이 아니었으면 예상치 못한 큰 피해가 날 뻔했던 것이다.
‘나중에 육포를 제대로 챙겨 주어야겠구나! 헤르쉬가 버처리비크들을 빌려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수고한 파투를 비롯한 세 대원에게 노고를 치하한 하룬은 그들을 레미에게 보내고 거대한 건물을 쳐다보았다.
“이 건물을 저들은 지구라트라고 부르더군요.”
“지구라트?”
사람들은 모두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이었지만 베른하트는 뭔가 아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른하트 님, 뭐 아시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하룬의 물음에 베른하트가 기억을 더듬는 양 잠시 시간을 두고 입을 열었따.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저건 에테매난키라는 건축물입니다.”
이야기에 갑자기 끼어든 베른하트의 입에서 이상한 건물의 정체가 밝혀졌다.
“에테메난키?”
생소한 이름에 타니엘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소, 타니엘라 경. 고대 라 제국이 제국을 열기 전에 대륙에는 저런 건축물들이 많이 존재했답니다.”
“호오! 초고대 시대의 유물이라.”
마법사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하룬 역시 흥미로운 눈길로 베른하트를 쳐다보았다.
“전설에 의하면 초고대는 마법의 전성시대였는데, 그 당시에는 마탑들이 왕국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즉 마법사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 다스렸다는 이야기지요. 아직 라 제국이 태동하기 전이라 마법의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당시 라 제국의 마법과 그 체계를 달리하는 수도 없을 정도의 다양한 마법이 발전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런 역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물론 라 제국 시대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일 뿐 현세와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였겠지요. 그 당시는 신성력도 마력의 일종으로 분류하던 시절이었고, 지금의 신전 역할을 하던 마탑들도 다수가 존재했으니까요.”
“호오! 흥미롭군요.”
세르파의 반응에 베른하트는 눈을 빛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당시 마탑들은 산이나 강으로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대부분 평지에 세워져 그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왕국이나 제국처럼 크고 작은 영토와 수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마법의 힘을 무리 없이 사용하기 위해 그 영역에 수많은 중계 기지를 세웠습니다. 벽돌로 쌓아 올린 계단식 건축물이 바로 그 중계 기지의 중심마다 세워졌는데, 그것을 고대인들은 에테메난키라고 불렀습니다. 그 기지들은 지금의 성이나 도시에 해당하는데, 그곳에는 어느 곳도 예외 없이 벽돌로 5층이나 7층에 달하는 계단식의 거대한 건축물인 에테메난키를 세웠지요. 에테메난키의 꼭대기에는 첨탑을 세우고 그 안에는 최상급 마나석들과 마법진을 설치하여 일정 지역을 방어하는 결계를 생성하는 것은 물론 각 지역 간에 통신이 원활하도록 했습니다. 대신 대형 마탑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높은 9층에 달하는 엄청난 높이의 에테메난키를 세우고 그 꼭대기 층에 신전들과 통신 시설을 비롯한 중요한 건물들을 배치했답니다.”
베른하트의 말을 듣던 하룬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정확히 기억을 할 수 없었다.
‘현실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사이 베른하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에테메난키로 인해 한 마탑의 영역 내에 거주하는 인간들은 실시간으로 영상이 포함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고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답니다. 현재의 마법 수준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일이지요. 당시는 마법사가 지배하던 정치체제였지만 마법사들은 신으로 추앙을 받았고 교육체계는 전인교육을 지향해서 어느 누구도 원하는 만큼 무엇이든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휴우!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군.”
몰보트의 말에 베른하트 역시 동조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죠. 거기에 전설에 따르면 그 당시는 마나가 그 어느 때보다 농밀하던 시대여서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자질과 잘 짜여진 교육체계, 그리고 산과 강을 경계로 형성되어 수백 년 이상 몬스터를 제외하고는 인간끼리의 전쟁이 없는 안정된 사회체제로 인해 마법은 급속도로 발달한 거지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베른하트 역시 전설이라고 말하듯 그런 사회는 정치체계가 발달한 현세에 이르러서도 이루기 힘든 사회였다.
“하지만 마르소라고 부르는 작지만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마탑이 이 에테메난키들을 이용해서 광범위 마법진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이후로는 카오스 시대라고 불리는 혼란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르소 마탑은 광범위 마법진을 이용해서 그동안 자연스럽게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산과 강을 넘어 다른 마탑을 공격했는데, 그들이 사용한 공격 마법 중 한 가지가 바로 메테오 소환 마법입니다. 그 마법 공격에 당한 마탑의 영역은 아예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버릴 정도였지요. 이 마르소 마탑이 급속도로 다른 마탑들을 흡수하고 점령하여 영역을 넓혔지만 다른 마탑들 역시 연맹을 결성하고 공동 연구를 통해 경쟁적으로 에테메난키들을 이용한 대규모 공격 마법이나 수비 마법을 개발했고, 이 때문에 한동안은 서로 침공을 할 수 없는 시기를 보냅니다. 워낙 파괴력이 강한 마법들이 개발되자 다른 마탑을 침공했다가는 서로 공멸하는 결과밖에는 얻을 수 없었기에 이루어진 불안한 평화기가 수백 년이 지나자, 마탑들은 마나를 이용해서 인간의 타고난 육체적 능력을 개량시키거나 인간의 내부에 마나를 축적하여 그것을 외부로 발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키메라 제조법과 같은 수많은 흑마법들이 탄생하게 된 거지요. 그리고 괄목할 만한 결과가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마나를 발현할 수 있는, 즉 정제된 마나인 오러를 사용하는 익스퍼트 급의 기사들이 출현하게 된 겁니다.”
이건 완전히 한 편의 역사 스토리였다. 전설이긴 하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 이야기이기도 했다.
“오러로 마법에 대항할 수 있는 기사들과 언데드들을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흑마법의 출현은 이제까지 원거리 마법만을 사용해왔던 전쟁 양상을 바꾸었습니다. 광대한 지역에 걸쳐 펼쳐 놓은 결계를 뚫는 것은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들에게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출현은 곧 대규모 정복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이미 각 마탑에서 서로 첩자들을 수대에 걸쳐 양성해 놓은 마탑들은 곧 기사들과 흑마법사들을 대거 양성하여 전쟁에 돌입했고 대륙은 순식간에 전화戰禍에 휩싸여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해 갔습니다. 수많은 마탑이 멸망하고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 전쟁과 병 그리고 기아에 죽어 갔습니다. 이때 태양신 ‘라’를 추종하는 라 마탑이 나타났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진 다섯 영웅을 앞세운 그들은 파죽지세로 마탑들을 점령해 갔고 채 30년이 되지 않아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다른 마탑들이 믿는 신들은 태양신 ‘라’와 함께 봉헌된 신전에 자리했고 마탑들은 라 마탑의 학파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이로써 위대한 태양의 제국으로 불리는 라 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세상은 비로소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진정한 평화의 시대에 들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이야기군요.”
마법사들은 물론 베른하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막연히 모든 문물이 현세보다 훨씬 뛰어난 고대 문명이라고만 생각했던 라 제국 시대에 그런 역사가 숨겨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베른하트 경의 높은 식견에 정말 감탄했습니다.”
사람들의 찬사가 이어지자 베른하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허! 이 이야기는 300여 년 전 진리를 찾아 고요의 땅을 탐사했던 저희 딥블루 마탑의 마도사가 발견한 한 비석에 새겨진 비문碑文을 해석한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번에 고요의 땅에서 입수한 마법스를 해독하는 가운데 새로 알려진 고대어로 인해 밝혀진 거지요.”
사람들은 과연 딥블루 마탑이라고 생각했다. 파코추 마탑과 그 역사를 같이하는 유서가 깊은 딥블루 마탑이었다.
“그렇다면 어서 저 에테메난키를 조사해 봅시다.”
마법사들은 흥분했다. 고대 문명에 존재하던 신비한 건축물 에테메난키에 어떤 비밀이 들어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새롭고 높은 지식을 갈망하는 마법사들에게 계단식으로 5층 높이로 쌓은 벽돌 건축물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룬은 사람들과 함께 에테메난키를 조사하기로 했지만 바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레미가 막사로 달려왔던 것이다.
“대장, 웬 노인들이 대장을 만나고 싶어 해요. 여기 주민들인 것 같아요.”
“노인들?”
전투가 끝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집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나오리란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페일론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데리고 올까요?”
“아니, 우리가 직접 가야지. 어디에 있어?”
“우물가에 모여 있어요. 한 1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하룬은 지체하지 않고 막사를 나섰다. 다들 궁금한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광장의 서쪽에 있는 우물로 향했다.
“페일론!”
하룬은 우물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페일론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성 주변의 음침한 기운도, 하늘에 늘 떠있던 옅은 먹구름도 사라져서 그런지 환한 햇빛에서 본 페일론은 레미가 노인이라고 여길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대장님, 결국 성공했군요!”
하룬에게 달려온 페일론의 해골 같은 얼굴은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의 모습도 페일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죽만 남아 앙상한 뼈가 드러난 초췌하고 가련한 모습의 주민들은 불안함과 기대의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하룬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페일론 덕분입니다. 제대로 된 정보 덕에 큰 피해 없이 사악한 자들을 처치할 수 있었습니다. 아! 그보다 먼저 저분들을 소개시켜 주시겠습니까?”
하룬은 사람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페일론이 하룬 일행을 우물가로 안내했다.
“이분들이 저와 함께 이곳 주민들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노인으로 보이는 대표자들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눈과 검게 탄 얼굴에는 굵은 주름살이 가득했고 드러난 손발은 뼈에 거죽만 입혀 놓은 것처럼 마른 모습이었다.
“저는 황실의 의뢰를 받고 실종자의 행방을 찾기 위해 데빌 산맥으로 가던 돌풍 용병대의 대장 하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룬이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하자 노인들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저, 정말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의 영웅 하룬 대장이란 말입니까?”
“페일론의 말이 사실이었군요.”
사람들의 검게 탄 얼굴에 패인 굵은 주름살들이 극심한 놀람으로 인해 요동쳤다.
“그렇습니다. 이게 제 신분을 증명하는 용병대장의 팔찌입니다.”
하룬은 동요하는 노인들의 태도에 대해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부드러운 얼굴로 팔목을 내밀었다. 새벽에 페일론이 그랬든 주민들 중 1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팔에서 팔찌를 벗겨 안쪽에 써진 내용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야! 정말 하룬 대장이 맞아!”
한 노인의 말에 다른 노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격동의 빛이 넘실거렸다.
“정말 저희를 찾으러 온 겁니까? 그것도 황실에서 의뢰를 했다고요?”
“네.”
하룬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 일행을 소개해 드리지요.”
하룬이 소개라는 말을 했지만 먼저 나선 이가 있었다.
“난 파이린 제국 황실 친위 기사단 부단장 일룸이오!”
“오오! 저는 제국군 남선 군단 7지단 8특수대 십장 페일룬입니다. 장군의 위명은 들은 바가 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충!”
페일론이 감격한 얼굴로 무기도 쥐지 않은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며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렸다.
“……수고했다!”
일룸은 경례를 받으며 목이 메었다. 피골이 상접한 꼴로 변했지만 여전히 군인의 기상이 느껴지는 병사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던 것이다. 뒤에 서 있던 밀스레드와 타운트도 어느새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파이린 제국군의 근간은 북부 초원 지대에서 몬스터들과 야만인들을 상대하던 북부 군단이어서 군기가 엄정한 대신 상하 그리고 동료 관계가 끈끈하기로 유명했다.
제국군은 페일론이 전부가 아니었다. 주민들 대표라고 나온 이들 중 상당수가 제국군이었던 것이다.
“충! 제국군 남서 군단 7지단 8특수대 수석병 한스입니다.”
“충! 제국군 남서 군단 7지단 4특수대 수석병 바일입니다.”
제국군 출신 주민들이 앞다투어 일룸에게 경례를 했다.
“제군들, 살아남아 주어 고맙다!”
일룸은 경례를 받으며 결국 눈물을 흘렸다. 병사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호송하던 사람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해 온 것과 그 노고를 생각하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던 것이다.
“흑!”
“정말이었어. 우리와 같은 노예들을 찾으려고 황제 폐하께서 돌풍 용병대에 의뢰를 한 거야.”
남은 세 명의 주민들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이마에는 생후 한 달 만에 인두로 지져서 강제로 만든 노예 표식이 있었다. 그들은 파이린 제국의 황실에서 자신들을 잊지 않고 그 유명한 돌풍 용병대에게 의뢰를 했다는 사실에 격한 감동의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하룬은 말없이 그들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들이 지금 어떤 감정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순한 감동을 받은 것은 아닌 것 같기에 건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룬 대장, 난 옛 수하들과 따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아마 군사기밀에 속하는 사정을 모두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군인인 그들끼리만 통하는 뭔가가 있으리라. 그들이 아니더라도 사정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룸과 두 기사는 제국군 출신 주민들을 데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진정하고 차를 드세요.”
눈치 빠른 헤니가 차를 준비해서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윽고 사람들이 더러운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헤니가 준비한 오미차를 입에 댔다. 다양한 맛을 가진 오미차로 인해 잠시 격한 감정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1명씩 자신을 소개했다.
“전 오미르 영지에서 살던 알칸이라고 합니다.”
“저는 세르발도 남작 영지에서 농노로 살아온 테르입니다.”
“저 역시 세르발도 남작 영지에서 대장장이 노예로 살아온 타할입니다.”
분분히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모두 노예 출신이었다. 그것도 지금은 신 테론 제국이 건국된 남부 영지 출신들이었다. 다시 보니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해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일 뿐 사오십 대로 보였다.
“어찌 된 일입니까?”
하룬인 이제까지 미루었던 질문을 꺼냈다. 그러자 셋 중에서 아까 제일 먼저 나섰던 알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파이린 제국이 저희와 같은 노예들에게도 사람처럼 제대로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영지를 탈출했습니다. 하나둘 가족들을 이끌고 도망쳐 파이린 제국으로 넘어가는 마츠루트 요새에 모였습니다. 저희가 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불안했지만 요새를 지키던 군인들은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피노세 황제 폐하께서 저희와 같은 노예들을 평민으로 만들어주고 귀족 제도를 폐기했다는 것도 확인했고, 저희와 같은 노예들에게도 정착할 수 있게 일정한 땅을 나누어 준다는 것도 확인하곤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습니다.”
알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1만 단위가 되면 제국에서 파견한 약 500명의 군대가 호위해서 제국으로 출발했다. 높은 산을 몇 개나 넘어야 하는 이동이어도 예전부터 꾸준하게 상행이 이루어진 안전한 길이었기에 그리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데빌 산맥을 다 넘어 마츠 평원의 끝자락으로 진입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시꺼멓게 변하고 공기가 이상해지더니 앞뒤와 양옆을 오가며 저희들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쓰러졌습니다. 저희 중에서도 쓰러지는 이들이 나오고, 어린아이들과 여자들부터 시작해 급기야는 건장한 청년들까지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가진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뭐라고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을 돌보려 했지만 그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들처럼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독이군!”
곁에서 듣던 타니엘라의 말에 알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타니엘라가 방어구 위에 걸친 마법사 특유의 로브를 본 알칸이 경의의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마법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영주관에서 약초 채집과 사냥을 해왔던 노예였기에 그걸 알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허벌 길드에도 속해 있었기 때문에 평소 가지고 다니던 해독약을 급하게 먹었지요. 하지만 조금 늦었는지 의식은 있었지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보고 들을 수는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알칸은 모든 사람들이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괴물, 다 삭은 뼈만이 남은 스켈레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켈레톤들을 조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흑마법사들과 검은 방어구를 입은 기사들, 그리고 검은색 하드 레더를 입은 전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마차를 가지고 와서 쓰러진 사람들을 마차 안에 짐짝처럼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차에 실려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흐음. 그럼 전부 이곳으로 온 겁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그 숫자와는 큰 차이가 있기에 하는 질문이었다.
“아닙니다. 이곳에는 1,000명 정도만이 왔습니다.”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수십 명의 흑마법사들에 의해 다시 노예가 되었다. 그들에게 맡겨진 일은 농사를 짓고 성을 축조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어디서 잡아왔는지 드워프들까지 데리고 와 설계를 맡겼고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려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도 나뉘어 이곳처럼 성을 건설하는 일에 동원된 거로군. 그럼 이곳과 같은 성이 적어도 열 개나 된단 말이네.’
“그들이 왜 이런 곳에 성을 쌓는지는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저희는 그저 짐승처럼 하루에 두 끼 배식하는 멀건 죽을 먹으며 그들이 시키는 대로 농사를 짓고 벽돌을 만들고 성을 쌓았을 뿐입니다. 행여 빠져나가기라도 하면 흑마법사들이 길들이고 있던 마수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었기에 탈출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알칸은 그동안의 고생이 서러운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다른 두 사람도 눈이 벌겋게 변해 버렸다.
“저 이상한 건물이 5층까지 올라가는 사이 나날이 늘어나던 흑마법사들은 작업을 하다 쓰러진 사람들을 죽여 좀비와 구울로 만들고 어린아이들의 몸에 마수의 팔다리를 붙이는 실험을 했습니다.”
“끅! 끄윽! 그 저주받을 흑마법사들은 젊고 어린 여자들을 밤마다 강간했고 생사람에게 독을 먹여 살점이 썩어 들어 고통스럽게 죽는 것을 웃으며 즐겼습니다. 구울이 된 저희의 가족들은 심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간 동료나 가족들의 시체를 통째로 씹어 먹었고 그 피를 마셨으며 그렇게 죽은 자들의 영혼은 미요스 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스켈레톤이 되었습니다.”
“1,000명에 달하던 사람들은 이제 겨우 절반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저희처럼 피골이 상접한 꼴로…… 흑흑!”
어느새 세 사람은 통곡을 하고 있었다.
‘흐유!’
하룬은 눈을 꽉 감았다. 어떤 비극이 이곳에서 펼쳐졌는지 눈앞에 선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개새끼들! 같은 하늘 아래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악마들!’
왜 현실이나 이곳 비욘드나 그런 악마와 같은 존재들이 활개를 치고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현실은 그렇다고 치지만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는 이 비욘드의 세상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신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이렇게 죄 없는 가련한 생명들이 끔찍하게 죽어 가게 놔두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도대체 신은 존재하기는 한 겁니까? 사람답게 살고 싶은 것이 죄입니까?”
감정이 너무 격해졌는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알칸의 말에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빛의 신전 사제들 중에 붉어진 얼굴로 서 있던 성자가 뭐라 입을 벌리려는 것을 성녀가 황급히 막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정하십시오. 이제 흑마법사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어둠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물론 흑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구울들과 스켈레톤들도 처리를 했고요. 다행히 저희와 동행한 신관들이 있으니 억울하게 이곳에 떠도는 영혼들에게 안식을 주는 의식을 치를 수 있을 겁니다.”
하룬의 말에 세 사람은 겨우 진정을 했다. 그들은 평생 노예로 살면서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갖가지 억울한 일들을 수없이 경험해 왔기에 체념하는 데 너무 익숙했다.
하룬은 그토록 쉽게 진정하는 이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이들은 마음 놓고 분노를 터트릴 정도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평생 도구처럼 마음 놓고 부릴 수 있는 길들인 동물로 살아왔던 것이다.
“일단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십시오.”
“고, 고맙습니다. 저희를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이제야 겨우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들은 흑마법사들이 주는 공포에 잠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네이스!”
“네! 식사 준비를 할까요?”
눈치가 빠른 도네이스는 하룬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고 각종 노동과 핍박에 시달려 왔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해줄 것은 기력을 되찾는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대원들을 데리고 식량 창고를 찾아봐. 제대로 된 것이 없으면 우리 것을 사용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도네이스는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아카족 대원 몇 명을 데리고 한창 노인들을 중심으로 모여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식량 창고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헤니와 레미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면 돌아다니면서 다치거나 병이 든 사람들을 찾아 치료를 해 줘. 타니엘라 경과 미루스 경은 증세가 심한 이들을 좀 봐 주십시오.”
굳은 얼굴을 한 타니엘라가 세 사람을 데리고 황급히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도 돕겠습니다.”
세르파를 비롯한 마법사들도 나섰다. 쉬는 것도 중요했지만 저간의 사정을 들은 그들은 실종자들에게 강한 연민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룬이 감사 인사를 하자 마법사들은 그의 인사를 차마 받지 못하고 몸을 빼 타니엘라의 뒤를 따랐다.
하룬의 시선이 성녀에게 향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빛의 신전 일행들도 이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던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달래 안식에 들도록 하는 의식을 접전하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저도 가끔은 과연 레아께서 저희 곁에 함께하시는지 의심도 하고 원망도 한답니다.”
성녀의 말에 성자는 질색을 하는 얼굴이었지만 다른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말없이 의식을 펼치기 위한 제단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부대장, 다른 대원들을 데리고 혹시 살아남은 적들이 없는지 수색을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자, 가자!”
티노는 남은 아카족 대원들을 데리고 성안의 건축물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딜런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만약 아직도 살아남아서 숨어 있는 흑마법사가 있다면 티노와 대원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사람들이 저마다 일에 집중하는 사이 광장 한쪽에 높이 쌓여 있는 사체와 인골 더미로 향했다. 격렬했던 전투를 증명하듯 구울의 사체와 이제는 뼈다귀의 모습으로 변한 스켈레톤들의 잔해가 그곳에 쌓여 있었다.
‘다시는 흑마법사들에게 이용되지 말기를…….’
하룬은 피닉스를 소환했다. 그전보다 훨씬 더 덩치가 커진 불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피닉스는 하룬의 무겁고 슬픈 마음을 짐작하는 듯 반가운 티도 내지 못하고 그의 의사가 전해지기를 기다렸다.
-이곳에 있는 것들을 가루로 만들 수 있을까?
-쉬운 일이죠. 모두 다 태워 버릴까요?
-응. 그랬으면 좋겠어.
날개를 활짝 편 피닉스의 입에서 청백색의 화염이 뿜어지자 시야에 닿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가루로 변해버렸다. 전에만 해도 백색 화염을 뿜더니 이제는 희미하지만 청색을 띤 청백색 화염을 뿜어내는 것으로 보아 한 단계 더 발전한 것 같았다.
하룬은 피닉스와 함께 성안을 돌아다니며 구울과 뼈다귀들을 다시는 흑마법사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가루가 될 때까지 태워버렸다. 피닉스가 뿜어내는 화염의 온도가 워낙 높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엉망으로 변한 곳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린 하룬이 막 피닉스를 돌려보냈을 때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 땡! 땡!
“다들 식사하러 오세요! 맛있는 고기 스튜와 하얀 밀 빵이 가득하답니다!”
멀리서 외치는 도네이스의 목소리에 하룬은 미소를 지었다. 격렬했던 전투가 끝나고 긴장이 풀리기 시작해서인지 안 그래도 시장하던 참이었다.
에테메난키라는 이름의 거대한 건축물 1층은 다크니스에 소속된 흑마법사들과 전사들의 숙소와 창고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2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3층에 올라갔을 때였다. 3층은 네 방향에 문이 하나씩만 있었는데 앞장섰던 타운트가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더니 금방 눈살을 찌푸리며 도로 뛰어나왔다.
“크윽!”
타운트가 코를 잡으며 비명을 토했다. 그 뒤를 이어 열린 문 안쪽을 본 사람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개새끼들!”
“천벌을 받을 놈들!”
에테메난키의 3층에는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지가 잘린 사람들과 몬스터 그리고 마수들이 정신을 잃고 한데 엉켜 있었던 것이다. 키메라를 제조하려고 했었는지 하나같이 제대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는 없었다.
잘린 부위의 지혈도 제대로 하지 않아 안에은 검게 굳어 버린 피와 함께, 지독한 피비린내와 방치된 생명체들이 공포로 인해 배설한 오물들이 엉켜 지독한 악취로 가득 차 있었다. 그뿐 아니라 거의 썩어가는 절단된 부위에는 구더기들이 우글거렸다.
성자를 비롯해서 여러 명이 벽을 잡고 구토를 하거나 눈을 질끈 감고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흑마법사들이 왜 사악한 자들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흑마법사들은 사람을 사람이아니라 그저 장난감이나 실험체로만 보는 악독한 존재들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시체를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지만 3층 안은 토악질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끔찍했다. 모두들 일그러진 얼굴이 되어 더 이상 쳐다보기를 포기했지만 성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토악질을 하면서도 그 지옥도를 헤치며 살아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흐윽! 흑! 아무도 없어. 다 죽었어!”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사지가 절단되어 몸통만이 남은 사체들의 심장박동을 확인했다. 하룬은 몇 번 가볍게 토악질을 한 후 시큼한 위액의 냄새를 맡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굳다가 만 피 때문에 부츠가 금방 더러워지고 몇 번이나 미끄러워질 뻔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반쯤 정신을 놓은 성녀를 강제로 안아 데리고 나왔다.
“먼저 4층으로 올라가 보세요.”
하룬의 말에 딜런이 긴 한숨과 함께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안 돼요! 의식을 해 줘야 해요.”
잠시 정신을 놓았던 성녀가 성자의 부축을 받으며 몇 걸음 옮기다가 마침내 제정신을 찾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불쌍하고 가련한 삶을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하룬의 말에 성녀를 비롯한 사제들이 모두 3층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뭔가 잘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로 기도를 하더니 귿르이 모은 두 손에서 성결한 빛무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무리는 한데 모아져 머리통 크기로 변하더니 참혹한 내부로 향했다. 그러고는 사지가 잘려 죽은 생명체들의 몸을 일일일 감싸고 천천히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마치 지옥과 같았던 실내 풍경이 조금은 맑아진 것 같았다. 음습한 기운은 어느 정도 사라진 상태가 된 것을 보면 원한과 분노에 차 있던 영혼들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 같았다.
“이제 됐어요!”
성녀는 파김치가 되어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났다.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 롭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 힘없이 일어나는 신고나들의 상태로 보아 그들은 상당한 신성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그들이 4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사라지자 하룬은 피닉스를 소환했다.
-피닉스, 나와!
피닉스는 다시 나왔지만 얼굴이 좋지 않았다. 하룬에게 귀속된 정령이기에 그가 느끼는 기분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다 태울까요?
-그래 줘. 피까지 모두.
피닉스는 청백색 화염을 내뿜어 실내에 가득했던 사체들과 벽과 바닥에 고여 굳어가는 피들을 한순간에 다 태워 버렸다. 실내에는 어느새 회색 뼛가루만이 남았다.
-위신느, 이 뼛가루들을 하늘 높이 날려 줘.
-알았어요.
사방 벽에 겨우 나 있는 작은 창을 통해 뼈를 태운 가루가 위신느의 옷자락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곤 멀리 보이는 평원으로 날아갔다.
‘부디 영면하시길.’
성녀처럼 영혼을 정화시키고 안식에 들게 할 능력은 없지만 억울하게 죽어 갔을 생명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기원해 보는 하룬이다.
다행히 4층은 끔찍한 것은 없었다. 그곳에는 실험에 쓰일법한 각종 기구들과 무기들, 그리고 그 쓰임을 알 수 없는 재료들이 가득했다. 3층의 그 지옥도를 떠올린 사람들이 문 열기를 주저한 탓에 하룬이 갔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문을 연 상태였다.
“이것들은 흑마법진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재료들이오.”
“이쪽 선반에 있는 것들은 주술에 사용되는 것들이에요.”
먼저 안으로 들어간 타니엘라와 레미가 그것들의 정체를 밝혀냈다.
“다 흑마법의 증거가 되는 것들이니 프로스트는 아까처럼 이곳 영상을 저장하고 대원들과 같이 이것들을 챙기세요.”
“알겠습니다.”
아직도 창백한 얼굴로 프로스트가 품속에서 영상 저장구를 꺼내 저장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금세 환하게 빛나는 수정 구슬을 들고 실내를 꼼꼼하게 저장하던 프로스트는 그 일이 끝나자 아카족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미리 가져온 마법 배낭 하나에 실내에 있는 것들을 담기 시작했다. 이 모두가 흑마법사들의 대거 출현을 알리는 증거가 될 것이다.
5층은 다른 층과 달리 공간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하늘 높이 솟아오른 첨탑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지만 탑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마법사들은 첨탑에 새겨진 문양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대장, 고대에 사용하던 마법진이 확실합니다. 현재 사용하는 마법진과는 달리 코어Core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마법진의 일종입니다.”
첨탑의 네 기단부와 각 단의 벽을 세밀하게 살펴봤던 타니엘라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대답을 들은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포기하고 다른 것을 물어봤다.
“어떤 결과를 생성하는 것인지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문양과 코어에 박힌 극소형 마나석의 숫자로 보아서는 하나의 마법진이 아니라 열 개 이상의 마법진을 중첩 혹은 서로 연계되도록 한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마법진을 몇 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일단 마법진의 영상을 저장해서 나중에 연구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다크니스가 이 비욘드에서 획책하는 음모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극소형 마나석이 뭡니까?”
“저기 첨탑 기단부에 새겨진 문양을 잘 살펴보면 좁쌀 크기의 작은 돌들이 있습니다. 뭔가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문양을 통해 마나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배출하고 있었습니다. 저건 라 제국 시대에도 간간이 쓰였다는 극소형 인공 마나석이 틀림없습니다.”
흥미로웠다. 초고대 문명과 고대 문명에만 사용되었던 마나석이라니, 거기에 인공 마나석이다. 마법에 문외한인 자신도 흥미가 이는데 마법사라면 흥미를 안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혹시 첨탑이 통째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물론 아닙니다. 저장된 영상과 극소형 마나석만 있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으니 두 분이 수고를 좀 해주십시오.”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마법 실력은 어떨지 모르지만 마법진 분야에서 우리 사형제를 능가하는 마법사는 별로 없을 겁니다.”
타니엘라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타니엘라는 마탑과 황실, 그리고 비의 신전 사람들이 하룬을 향해 다가오자 슬며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대장, 이곳에는 별거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주의가 하룬에게 쏠렸다.
“제 생각에는 이 첨탑이 저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층은 몰라도 이 첨탑은 없애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도 그래요. 사악한 기운은 감지할 수 없지만 뭔가 위험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어요.”
성녀는 하룬의 말에 동의를 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을 가진 이도 있었다. 세르파였다.
“첨탑에 새겨진 문양은 일종의 마법진 같소. 현재 저희가 사용하는 것과 다른 마법진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베른하트 역시 세르파의 의견을 지지했다.
“맞습니다. 여러모로 연구해보고 싶은 열망이 들게 만드는 마법진입니다.”
두 사람은 타니엘라가 알아차린 극소형 인공 마나석의 존재는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의뢰인 측 사람들이다. 어느새 타니엘라와 미루스를 뺀 나머지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 생소한 마법진의 존재에 강렬한 관심을 가진 것이다.
마법사들은 차례로 발언권을 얻어 마법진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토로했다. 아는 것이 많은 마법사들답게 모두의 의견을 듣고 나니 거의 20분 이상이 지난 후였다.
“난 대장의 말대로 이곳을 부숴버리는 것에 찬성하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쁘고 신경에 거슬리는군.”
일룸 역시 하룬의 의견을 동의했다.
하룬은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플라이 마법까지 써가면서 남모르게 인공 마나석을 다 수거한 것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실실 웃는 얼굴로 은밀하게 마법사들의 뒤에 합류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마법사분들의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작용을 하는 마법진인지 확인하지 못한 이상 그냥 놔두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여러분들의 영상 저장 마법으로도 연구는 가능할 테니 그냥 부수도록 하지요.”
세르파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3층의 참상을 보고 난 후라 그들 역시 이 건물과 첨탑이 찜찜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결정이 나자 마법사들은 앞다투어 첨탑에 새겨진 마법진 문양을 영상 저장 마법으로 저장했다.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가십시오. 만약을 위해 타니엘라와 미루스 경은 실드 마법을 펼쳐 주십시오. 딜런 경, 부탁합니다.”
하룬의 부탁에 딜런이 말없이 검을 뽑아들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딜런은 자세를 잡고 검에 마나를 최대한도로 주입했다.
화르르!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검신을 통해 쑤욱 빠져나왔다.
“타앗!”
꽈앙! 꽈앙! 꽈앙!
오러 블레이드의 궤적이 닿은 곳마다 폭음이 터져 나왔다. 역시 심상치 않은 마법진이 보호를 하고 있는 듯 오러 블레이드에도 단숨에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마나석이 빠진 이상 소드 마스터 중급의 오러 블레이드를 견딜 수는 없었다.
꽈앙! 꽝! 꽈앙!
열 번이 넘는 폭음이 울린 후에야 첨탑이 완전히 부서졌다.
“이 첨탑 자체가 괴물이군요. 전력을 다한 검격에도 이렇게 버틸 수가 있다니.”
오러 블레이드를 거두고 하룬 쪽을 돌아보는 딜런은 살짝 질린 얼굴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경도 내려가십시오. 마무리는 제가 하지요.”
딜런을 내려보낸 하룬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완전히 파괴된 첨탑을 바라보았다. 위신느를 소환해서 방패를 만들어 날아오는 파편을 막고 서 있던 하룬은 파편의 양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속이 비어 있었군. 그렇다면 드러나지 않은 숨은 문이 있고 뭔가 숨겨진 방이 있었다는 이야기네. 아쉽군.’
하지만 이미 첨탑은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다.
‘어! 저건 뭐지?’
하룬은 파편과 벽돌 가루 사이로 오감이 아닌 느낌으로 뭔가 농축된 기운을 품은 것들이 있는 것응ㄹ 감지했다.
-위신느, 너도 느껴져?
-정령석은 아니고 마나석이네. 조그만데 꽤 많은 마나를 품고 있어.
타니엘라가 말한 초소형 마나석이 틀림없었다. 하룬은 위신느에게 그것들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파편과 벽돋ㄹ 가루 속에서 그것들을 모아 왔는데 한줌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
‘크기는 싸가지가 정제한 마정석하고 비슷한데. 어! 성질까지 비슷해. 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불안정한데.’
하룬은 그것의 성질을 느끼는 순간 극소형 마나석의 실체가 다름 아닌 정제된 마정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 마정석을 가공해서 쓰고 있단 말이지.’
마법진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