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신전 사제들과 불편했던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한 하룬 일행은 하나로 뭉쳐 다시 마츠 평원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하룬은 티노와 타킴을 번갈아 척후로 세우고 이동하는 내내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이상했는지 타니엘라가 하룬을 따라 몇 번 하늘을 쳐다보고는 결국 물어왔다.
“버처리비크를 기다리는 겁니까?”
“아니요.”
“그럼……?”
궁금한 것은 어지간해서는 참지 못하는 타니엘라는 집요하게 물었다.
“흑마법사들이 빛의 신전 사람들을 노리는 것이 우연한 결과가 아닌 것 같아서요.”
하룬의 말에 타니엘라의 눈이 빛을 발했다.
“아! 그럼 혹시 패밀리어 마법으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겠군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성녀와 성자가 상기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정말 그럴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처음은 모르겠지만 지난번에는 하늘에 독수리처럼 보이는 새들이 한동안 선회하는 것을 분명히 봤습니다.”
“흐음.”
하룬의 말에 사람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얼마나 더 이동했을까? 이동하면서 간간이 하늘을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에 먼 하늘의 작은 점 몇 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휘이익!
하룬이 휘파람을 불자 척후인 티노가 제법 큰 나무 아래로 몸을 감추었다.
“우리도 몸을 숨깁시다.”
사람들은 하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근처의 작은 관목 아래로 파고들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관목은 키는 작았지만 무성한 나뭇잎으로 인해 아래로 들어간 사람들의 몸을 감추어 주었다.
철시를 시위에 메긴 마리와 도네이스가 얼굴을 조금 내밀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아이콘라드다!”
아카족 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일행의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이 온 것은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가 아니라 마수인 아이콘라드였다. 목부터 가슴에 이르는 붉은색 털들이 선명한 아이콘라드의 숫자는 열 마리나 되었다.
“칫! 거리를 주지 않네!”
아이콘라드는 뭔가 미심쩍은 듯 스쳐가지 않고 일행이 숨어 있는 관목들의 상공을 몇 번이나 선회하고 있었지만 고도를 더 낮추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도네이스와 마리는 몇 번이나 시위를 당겼다가 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정은 마법을 날릴 준비를 하던 타니엘라와 미루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원거리 마법도 통하지 않을 텐데.”
“그러게. 아주 영악한 놈들이야.”
난감한 상황이었다. 의심을 품은 듯 떠나지 않는 아이콘라드를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때 문득 하룬의 뇌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돌아올 때가 된 거 같은데.’
하룬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미노와 수니에게 의지를 보냈다.
-미노! 수니!
실망스럽게도 버처리비크들은 아무런 대답도 보내지 않았다. 아직 하룬의 부탁을 다 수행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룬은 답답했지만 높은 상공을 날고 있는 아이콘라드를 상대할 마땅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십여 분이나 지속되자 갑갑함을 견디지 못한 옥세르가 제 딴에는 소리를 죽인다고 하지만 모두의 귀에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의사를 전해 왔다.
“내가 놈들이 내려오도록 유도할까…… 아니, 할까요, 대장?”
이들은 아이콘라드를 잡아 본 경험이 있으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의 사냥법이 있을 테니 기대해 볼만 했따. 하지만 뭐라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반가운 목소리가 뇌리를 통해 전해 왔다.
-이제 다 와 간다!
-미노가 물소를 잡아먹느라고 늦었다.
하룬이 보낸 의지를 책망으로 받아들였는지 수니가 미노를 탓아며 의지를 보내왔다.
-잘 왔다, 미노, 수니!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상공에 아이콘라드 열 마리가 날고 있는데, 보이니?
-보인다. 저 맛도 없는 놈들은 왜 거기 있는 거냐?
미노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하게 물었다. 하룬은 그런 녀석의 태도에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저번에 너희들이 죽인 놈들의 복수를 하러 온 거 같다.
-감히 먹잇감에 불과한 날파리 같은 녀석들이 우리에게 복수를!
-다 찢어 죽이겠다!
뇌파로 전해지는 미노와 수니의 의지는 강렬한 살의로 가득 차 하룬에게도 가볍게 두려움을 줄 정도였다.
크아아아!
미노가 피어를 발산했다. 그러자 하룬 일행이 있는 상공의 대기가 마치 파도처럼 출렁였다. 순간 오금이 저리고 온몸의 털이 거꾸로 솟으며 식은땀이 흘렀다.
“뭐, 뭐냐, 이건?”
“뭐가 나타난 거야?”
“혹시 드래곤이 잠에서 깼나?”
사람들이 배를 납작하게 바닥에 깔고 두려움에 떨었다. 버처리비크의 피어가 대기를 통해 강력한 공포를 전달했던 것이다.
잠시 후 그 공포를 이기고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것은 몇 명에 불과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압도적인 기세와 파괴적인 힘으로 단숨에 아이콘라드들의 목을 발톱으로 찍어 버리고 부리로 눈알을 파는 버처리비크 두 마리가 보였다.
데빌 산맥 인근에서는 강력한 마수로 유명한 아이콘라드들은 마치 독수리 앞의 참새처럼 버처리비크 두 마리에게 처참하게 찢겨 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버처리비크의 발톱은 마나가 실린 검이 아니면 베지도 못하는 아이콘라드의 가죽은 물론이고 바위도 부순다는 발톱까지 부숴버릴 정도로 강력했던 것이다. 거기에 날개를 휘저어 만든 바람만으로 아이콘라드들은 제대로 균형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
“저게 우리가 봤던 그 버처리비크라고?”
좀체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딜런까지 눈을 부릅뜰 정도로 버처리비크들은 하늘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네 마리가 찢겨 죽자 혼비백산한 나머지 아이콘라드들이 각기 방향을 달리해 맹렬하게 날갯짓을 했다. 흉포하기로 소문난 마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아이콘라드들은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버처리비크가 한 번 날갯짓을 하면 아이콘라드는 세 번 이상을 해야만 했으니 도망을 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나머지 아이콘라드 중 세 마리가 녀석들의 발톱과 부리에 갈기갈기 찢겨 난자된 상태로 땅으로 추락했다.
다시 녀석들이 한 마리씩 찢어 죽이는 것을 본 하룬이 급하게 의사를 전했다.
-미노, 수니, 한 마리는 남겨!
-싫다!
-다 죽일 거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에 이렇게 분노할 줄은 몰랐다. 미노와 수니는 자신들이 하늘의 제왕이라는 것을 한 점도 의심하지 않았다.
-부탁해!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룬의 그 말에 미노와 수니가 잠시 날개를 편 상태로 활강했다.
-친구는 맞는데, 그게 나와 수니 사이와 같은 거냐?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해. 너와 수니가 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내가 도와준다. 육포처럼 맛있는 것이 있으면 너희들과 같이 나눠 먹는 거지. 그리고 내가 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너희들이 도와주는 거야.
-서로 돕는다고? 그건 가족인데.
역시 영성이 뛰어나긴 하지만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무리인가 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잠시 후 녀석들은 하룬의 부탁들 들어주었다.
-어차피 맛도 없어 먹지도 못할 놈들이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바람을 닮은 인간 친구의 부탁이니까 들어준다.
미노와 수니는 고도를 높여 구름에 닿을 정도로 올라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아이콘라드의 뒤를 유유히 뒤쫓기 시작했다.
“이제 나와도 됩니다.”
하룬은 관목 아래에서 나왔다. 버처리비크의 웅자를 본 사람들은 감탄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벌써 아득한 곳까지 날아간 작은 점 두 개를 응시했다.
“디온, 옥세르, 대원들과 함께 추락한 아이콘라드의 가죽과 마정석을 수습해!”
“네, 대장!”
“대장의 친구는 정말 최곱니다!”
디온은 대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지체 없이 땅으로 떨어진 아이콘라드의 사체로 달려갔지만 옥세르는 크게 감동을 받았는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대단하군요. 저 새가 전설로 전해지는 버처리 윙이군요.”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돌아보니 성녀였다. 그녀를 비롯한 사제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과 경탄의 빛이 아직도 선연했다.
“네. 일부러 한 마리는 살려두고 뒤쫓으라고 했으니 잘하면 흑마법사들의 본거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성녀는 상상 이상의 힘을 가진 버처리비크가 하룬의 지시에 따르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탄성만 질렀다.
‘정말 모르겠군!’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도 하룬과 돌풍 용병대에 대해서는 소문으로 접한 적이 있었지만 실제 모습은 소문보다 더했다. 소문은 절반도 표현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자가 왜 용병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하룬 대장의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지.’
무뚝뚝하고 까칠한 성격에 거친 인상 그리고 깊은 눈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눈빛을 가진 이 용병은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무력을 가졌다. 거기에 냉철한 판단력과 단호함으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같은 편일 때는 한없는 믿음과 든든함을 주는 사람이야!’
성녀는 그에게 진실을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거기에 가지고 다니다가 만일의 경우 교리 계열에 빼앗길 성배를 하룬에게 맡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다.
버처리비크를 통해 아이콘라드를 추적한 결과를 바탕으로 흑마법사들이 머무는 근거지로 추정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두 번이나 아이콘라드가 흑마법사들의 본거지에서 나왔지만 제대로 열 받은 버처리비크들이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았다.
하룬 일행은 버처리비크를 통해 알아낸 흑마법사들의 본거지를 향해 강행군을 했다. 행여 놓칠까 두려워서 내린 결정이었고 일행은 군소리 없이 그의 지시를 따랐다.
잠과 식사를 해결하는 최소한의 시간을 빼고 움직인 결과 꼬박 이틀이 지난 오후 늦은 시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메신저 스킬을 가진 하룬과 티노, 그리고 소드 마스터인 딜런과 일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고 말았다.
“저기다!”
버처리비크의 놀라운 정찰능력으로 인해 따로 척후를 둘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한발 먼저 달려가던 티노의 말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람들은 바닥까지 내려간 체력에도 불구하고 발에 힘을 주었다.
작은 숲을 통과한 그들의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들어왔다.
“이게 뭐지?”
세르파는 눈앞에 보인 구조물을 보며 얼이 빠진 얼굴이 되었다. 뒤이어 숲을 빠져나온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황혼에 물든 대지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마치 사막에 존재한다는 신기루처럼 거대한 규모의 성이 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얼추 보아도 1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큰 성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에 웬 성이지?”
누군가의 말대로 이 버려진 땅에서 성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런 거대한 성이라니!”
비록 마츠 평원이 몬스터들과 마수들이 횡행하는 땅이라지만 아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데빌 산맥보다는 안전한 땅이기에 호기심이 강한 인간들, 특히 수련 여행을 하거나 강자들을 찾아다니는 유랑 기사들 중에는 이곳을 방문한 이도 적지 않다.
“흐음. 최근에 쌓기 시작한 성이군.”
“맞아! 저쪽에는 아직 성벽을 채 올리지도 않았네.”
매직 아이 마법을 펼친 마법사들의 말에 하룬은 샤키의 눈을 활성화시켰다. 마치 줌 기능이 있는 보안경을 쓴 것처럼 거대한 성의 모습이 눈앞으로 크게 다가왔다.
‘정말이다!’
그들의 정면과 후면 쪽 성벽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지만 양 옆은 아직 쌓고 있는 도중이라는 것을 말해주듯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성벽 중 2미터 정도만이 올라간 상태였다. 곳곳에 쌓여진 벽돌들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지만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헤르쉬를 통해 이미 데빌 산맥에 몇 개의 성이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츠 평원에까지 건축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짓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실종된 사람들의 행방은 확실하군.’
실종자들은 틀림없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성을 건축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황량한 곳에 성을 쌓고 있을까?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일까?
‘그들이 이방인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지.’
데빌 산맥의 북쪽에는 한때 제국의 4대 평야 중 하나로 꼽혔던 마츠 평원이 있다. 또한 산맥의 남쪽 즉 신 테론 제국의 영토 안에는 마나석 광산을 비롯한 광산들과 원시림이 펼쳐져 있다. 동쪽인 미노 제국 쪽으로는 다르 강이 데빌 산맥에서 흘러나온 지류들과 합해져 바다로 흐른다.
‘나라를 세워도 충분한 땅이지.’
하지만 문제는 하룬이 이번 사건들의 배후라고 확신하고 있는 다크니스가 이방인이 주축을 이룬 세력이라는 점이다.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때 휴식을 취하던 마법사들의 대화가 귀에 들려왔다.
“성안에 웬 탑이지?”
“그러게. 보통은 영주관이 들어설 자리에 이상한 모양의 첨탑이 있네.”
마법사들의 대화가 들려오자 하룬은 사색에서 깨어나 성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면에 있는 성벽이 높아 그 안쪽의 아래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대로 이상하게 생긴 첨탑의 상부는 볼 수 있었다.
‘피라미드? 아니 그것과는 달라.’
기단은 보이지 않지만 눈에 들어온 부위는 위를 향해 좁아지는 구조였고 꼭대기가 편평했다. 다만 기이한 것은 그 편평한 꼭대기에 수십 층에 달하는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탑의 가장 꼭대기에는 마치 안테나 접시처럼 생긴 은색의 물건이 황혼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이 언덕 아래에서 야영하도록 하지요.”
언덕 아래쪽에 있는 거대한 성이 궁금했지만 이곳이 흑마법사들의 본거지로 확인된 만큼 조심스러웠다. 한낮에도 흑마법진에 의해 어둠의 소환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곳이니 밤이면 더욱 조심해야 했다.
일행은 숲 안으로 이동해서 가급적 소리를 죽여 식사와 야영 준비를 했다.
뭔가 거대한 비밀의 편린을 엿본 기분이 들어 분위기는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모두가 대화를 자제하고 마른 음식과 물로 빠르게 식사를 한 다음 각자 할 일을 찾았다.
마법사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알람 마법을 촘촘히 깔았고 다른 사람들도 오늘은 수련을 자제하고, 일이 생기면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물건들을 미리 챙겨 두었다.
불침번도 두 시간에 3명씩 배정했다. 타니엘라가 패밀리어 마법으로 성안을 정찰하겠다는 의견을 냈지만 하룬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까지 마츠 평원으로 들어와서 상대하던 흑마법사들이 이 성안에 있다면 그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정찰을 하더라도 내일 하도록 하지요. 잘못하면 당장 사단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이틀 동안 강행군을 하느라 지치고 힘들었을 테니 오늘은 푹 쉬어야 합니다. 더구나 내일은 힘든 날이 될 것 같으니 최상의 몸 상태가 되도록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하룬의 말에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편안한 자세로 휴식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하룬은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사위는 어둠이 짙게 깔렸고 언덕 아래의 성도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츠 평원으로 들어오면서 느껴지던 끈적거리면서 불쾌한 기운이 낮게 깔려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이곳이 정말 다크니스들의 본거지일까?’
생각을 해보니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성의 규모가 크긴 하지만 아까 본 상황을 생각하면 경계 태세도 허술하고 무엇보다 하룬이 생각하는 다크니스들의 세력을 품을 정도는 아니었다.
‘새벽에 잠입을 해봐야겠다.’
하룬은 그 자리에 바르게 자세를 취하고 앉아 마나 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진한 마나가 활짝 열린 전신 모공과 호흡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느낌은 여전히 이질적이었지만 이곳의 마나는 굉장히 농밀한 상태인 데다가 유독 하룬에게는 엄청난 마나 축적이 가능했다.
단순한 경로였기에 이제는 굳이 의식을 집중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룬은 아직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지혜의 파편 내용을 떠올리며 명상에 들어갔다. 신체에 대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마나에 대한 내용은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룬이 명상에서 깨어난 것은 아직 세상이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였다. 몸을 일으켜 굳었던 근육을 가볍게 풀어준 하룬은 정찰을 맡은 타킴이 숲의 가장자리에 배를 깔고 누워 매서운 눈길로 성 주변을 살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머지 둘은 야영장 근처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을 것이다.
“별일 없나?”
“네, 대장! 전초들이 성 밖을 어슬렁대는 스켈레톤들과 좀비들을 봤다고 했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난 성 주변을 가까이에서 정찰해보고 올 테니까 특별한 징후가 있으면 뿔 나팔을 불어.”
그 말에 타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아. 주변만 살필 생각이니까.”
하룬은 타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아직도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달은 떠 있었지만 낮에 흑마법진이 활성화되었던 것처럼 그 어떤 기운이 이곳 상공에 두텁게 깔려 있어 밝지는 않았다.
그것은 하룬처럼 민감한 오감을 가지고 있는 침입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숲과 성 사이에는 은폐물로 쓸 수 있는 키 큰 풀들과 키 작은 관목들이 무성해서, 설사 성벽 위에서 누가 정찰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두운 곳만 찾아 기척도 없이 움직이는 하룬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름 조심스럽게 이동을 했지만 실제 거리는 2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해서 하룬은 얼마 걸리지 않아 성벽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성벽 위에는 아무 경계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룬은 조심스럽게 성벽을 따라 이동했다. 5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오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하룬은 성벽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성 주변을 돌며 이동했다. 성벽을 쌓는 도중인 구간에 도착했지만 성 안쪽은 볼 수가 없었다. 성벽의 폭이 무려 5미터가 넘었고 피라미드와 비슷한 거대한 건물만이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군. 그럼 성 안에는 저 건물만 있다는 소리인가?’
궁금했지만 애써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성벽을 따라 후면까지 이동한 하룬의 눈이 커졌다.
‘호! 경작지까지.’
성의 반대편에는 넓은 경작지가 펼쳐지고 있었고 일부는 작물이 섬어진 상태였고 그중에는 수확을 한 모양인지 땅을 갈아엎은 곳도 보였다.
이렇게 되면 이곳에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음이 확실해졌다. 경작지 근처에는 벽을 세우기 위해 쌓아 둔 벽돌들이 가득했고, 그 한쪽에는 벽돌을 생산하던 작업장이 보였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 같은 흔적이 확인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성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죽어버린 것처럼 스산하고 음산한 기운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자꾸 뭔가 걸려!’
하룬은 돌아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잠시 성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굳혔다. 성벽을 따라 이동한 하룬은 쌓다가 만 2미터 정도 높이의 벽 앞에 섰다. 이상하게도 경계가 전혀 없는 점이 걸려 몇 번이나 벽의 외고나을 확인했지만 오감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들어가 보자!’
성벽 가까이 접근한 하룬은 단숨에 성벽을 뛰어넘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가지런하게 쌓아 올린 벽돌 사이로 은은하게 빛나는 이상한 문양이 보였던 것이다.
‘마법진?’
종류는 알 수 없지만 성벽을 이루는 벽돌 안쪽에 선을 그리며 새겨진 문양은 분명히 마법진이었다. 경계도 없는 것을 보면 경계 마법진일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타니엘라와 동행할 것을 그랬다.
‘마법진의 범위가 얼마나 될까?’
하룬은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다시 마음을 정하고 힘차게 도약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10미터가 넘게 치솟아 5미터 폭을 가진 성벽 위를 넘어갔다. 다행하게도 아무런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마법진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무사히 성벽을 넘은 하룬의 눈에 성안 풍경이 들어왔다.
‘웃!’
하룬은 내심 경악성을 토했다. 성안의 수많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 하룬은 다음 순간 놀라 하마터면 경호성을 터트릴 뻔했다. 성안의 지면은 성 밖 지면과 높이가 꽤 많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무심코 착지하려던 하룬이 팔을 휘저어 손바닥을 통해 미약한 마나풍을 분출했다. 적어도 10미터 정도는 차이가 났기 때문에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가까스로 자세를 잡은 하룬의 몸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착지를 하고 본능적으로 한 건물이 만들어 낸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후읏!’
하룬은 눈앞의 건물군에 탄성을 토했다. 거의 완벽한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압권은 성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건물이었다. 그 높이가 무려 20미터에 달할 정도였다. 피라미드는 마치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상자를 쌓아놓은 것처럼 생긴 구조물이었는데, 그 꼭대기에는 아까 언덕에서 본 첨탑이 있었다.
잠시 그 위용을 감상하던 하룬은 건물의 벽에 귀를 붙이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확인했다. 무슨 소리가 귀에 들려왔던 것이다.
크르릉! 쿠우! 쿠르릉! 쿠우!
안에는 누군가 거칠게 코를 골고 있었다.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곤하게 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벽을 쌓는 일에 동원된 이 성의 주민이리라.
하룬은 안을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찾았지만 이 건물은 담장은 물론 창문도 없었다. 마치 유니온의 F구역에서도 가장 열악한 원룸과 같은 구조를 지닌 듯했다. 살짝 문 앞으로 움직여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안에서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정령들이 있다. 하룬은 위신느를 소환했다.
-너무 오랜만이잖아요!
위신느는 소환되자마자 그의 몸을 한 바퀴 돌며 가볍게 불만을 토로했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 그래. 앞으로는 소환할 일이 많을 거니까 부지런히 정령석의 기운을 받아들이라고.
-이번 한 번만 믿어볼게요. 칫! 피닉스는 가끔 소환하면서.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환된 것이 기쁜지 연방 하룬의 얼굴을 매만지며 몸을 비비대는 위신느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열어 줄래.
-그거야 간단하지요.
위신느의 옷자락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 문틈으로 스며들더니 이내 찰칵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문을 연 것이다.
하룬은 위신느를 돌려보내고 최대한 천천히 문을 열었다.
“누, 누구요?”
뜻밖에도 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이 그 기척을 알아챘다. 심하게 코를 골다가 작은 소음에 깨는 것을 보면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쉿!”
하룬은 그가 소리 지르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 어둠이 깔린 실내지만 어느 정도 어둠에 적응된 하룬의 눈은 누군가가 이불을 둘러쓴 채로 방의 구석에서 숨죽이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구요?”
“난 돌풍 용병대의 하룬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돌풍…… 정말이오?”
어둠에 가려진 인물은 무척 놀랐는지 소리를 높였다.
“쉿!”
“아!”
하룬은 그 사람을 자극하지 않을 요량으로 방의 중앙에 있는 화롯가에 앉았다. 그곳에는 불씨를 품은 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하룬은 일단 발광석을 꺼내 들었다. 잣니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헉!”
희미한 빛에 비친 하룬의 얼굴에 놀랐는지 자그마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 신분은 이것으로 확인하십시오.”
하룬은 구석에 있는 사내가 경계를 풀지 않았음을 감지하곤 팔찌를 풀어 그쪽으로 밀었다. 조심스럽게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팔찌를 받아 드는 사내의 얼굴이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훅!’
하룬은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것 같은 사내의 몰골에 내심 침음성을 터트렸다. 윤기를 잃은 머리카락과 해골 같은 외관 때문에 하마터면 스켈레톤으로 착각할 뻔 했던 것이다.
“그 빛나는 돌은 이제 치워도 되오. 당신이 돌풍 용병대의 하룬 대장이라는 것은 확인했소.”
사내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는지 이불을 둘러쓴 상태로 가까이 다가와 팔찌를 전해 주었다.
“이곳은 어떻게 왔소?”
잠시 망설였던 하룬은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느낌으로는 사악한 흑마법사이거나 혹은 그 무리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황실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실종자들의 행방을 조사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 대공, 아니 황제 폐하께서…….”
사내는 감격한 목소리로 피노세 황제를 언급하더니 이내 울컥했는지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흑마법사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쫓다 보니 이곳이 나왔습니다.”
“그렇군요. 난 제국군 남서 군단 7지단 8특수대 십장 페일론이라고 합니다.”
하룬의 눈이 커졌다. 운 좋게도 단박에 실종된 사람들을 호송하던 병사를 만난 것이다. 그는 하룬의 신분을 확인하곤 적잖이 적의를 거두고 절도가 느껴지는 태도를 보였다.
“반갑습니다. 저희는 내일 이곳을 공격할 예정입니다. 참고할 것이 있다면 부탁합니다.”
하룬의 말에 페일론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간절히 원하던 구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그가 예상한 제국군은 아니지만 그가 들은 소문이라면 실력만은 믿을 만한 용병단이다.
“아는 게 많지 않아서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 잠깐만요.”
페일론의 말을 끊은 하룬은 급하게 아공간을 뒤져 헤드 캠을 꺼내 활성화를 시켰다.
“이곳은 저희를 납치한 무리 중 일부가 건설한 성입니다. 이곳을 다스리는 자는 헤겐이라는 흑마법사입니다. 그는 언데드들을 부릴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마수까지 부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흑마법사들이 말하길 헤겐은 성의 사방 30킬로미터 영역을 관할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을 지키는 자들이 없던데요.”
하룬의 말에 페일론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이상하군요. 오늘은 헤겐과 그 부하들이 깊이 잠이 든 건가? 아닌데. 언데드들은 소환자의 의지로 멈추게 할 때까지 수행하는 존재인데.”
하룬은 페일론의 말과 표정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눈치 챘다.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를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래요? 혹시 제가 스크롤을 이용해서 성벽을 한참 높이 뛰어 날아 들어와서 그런 걸까요?”
“아! 그렇다면 이해가 갑니다. 밤이 깊어지면 언데드들이 성벽의 벽돌 사이에 은밀하게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가지요. 그러고는 주변에서 생기生氣를 느끼는 순간 밖으로 뛰쳐나오게 되지요. 성벽이 다 올라가지 않은 곳은 대낮에도 가끔 맹수들이 들어오는데 그때마다 언데드들이 뛰쳐나와 처리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몇 명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이곳에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이곳에는 30명이 넘는 흑마법사와 70명이 넘는 전사들 그리고 200명 정도의 일반 병사가 있습니다. 헤겐이라는 흑마법사가 이곳의 성주인데 그는 자신을 마도사라고 칭했습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마수를 부릴 정도로 마력이 높습니다. 그 외 마법사들은 대충 3서클에서 5서클은 된느 것 같고 전사들은 대부분 소드 유저 상급 이상입니다. 그중에 10여 명은 익스퍼트 급이니 조심하십시오. 습격을 당할 당시 저희 기사들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강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병사들의 수준은 소드 유저 중급 정도로 전사들이 지휘를 합니다. 그리고 놈들은 성안의 거대한 건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말로는 무슨 라트라고 부르더군요.”
“그럼 밤에는 자는 건가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건물 안에서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거지요. 건물 안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끔찍한 비명만이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으드득! 이들은 악마의 무리입니다.”
페일론의 해골 같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혹시 그 건물에 특수한 점이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 건물을 쌓는 데 투입이 되었지만 내부 공사를 담당했던 사람들 중 살아서 밖으로 나온 이는 없었습니다.”
사내는 이를 갈았다.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는 그의 눈이 활활 불타는 화염을 뿜어내고 있는 것을 보니 못 볼 꼴을 많이 본 것 같았다.
“혹시 성 밖에 마법진이 설치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자세한 위치는 모르지만 마나석이 묻힌 곳은 대충 기억하고 있습니다. 50명의 피로 그려진 그 마법진이 가동되면서 저희는 매일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악마 같은 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마법진의 범위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외에 또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을 공격하려면 꼭 파괴해야만 하실 겁니다.”
하룬은 자신의 경우에는 마법진이 발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했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그가 침입한 사실을 흑마법사들이 파악하고 수색에 나설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대충이라도 위치를 좀 짚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텐데…… 아쉽군요.”
“괜찮습니다. 저희 측도 마도사들이 대여섯 명이나 되니 대충의 위치만 알면 파괴할 수 있을 겁니다.”
하룬의 말에 페일론이 거죽만 남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바닥에 성과 마법진의 모습을 대충 그리고는 마나석이 묻힌 곳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헤겐을 위시한 흑마법사들은 중앙 건물에서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오가 지나서 일어나고 뭔가 일을 시작해서 새벽 무렵에 잠을 자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잔혹한 성정을 가진 가인발츠가 대표하는 사악한 전사들이 저희의 작업을 감독하고 감시합니다.”
“낮에도 밤처럼 아무 경계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병사는 아니지만 경계를 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대략 10미터 간격으로 성벽에서 성안과 밖을 경계합니다.”
“밤늦게 예고 없이 방문해서 놀라셨을 텐데도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이곳의 흑마법사들과 전사들을 모두 해치ㅇ누 후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아, 참! 저희가 공격하게 되면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식사 시간을 노리십시오. 저들은 저희와 마주치는 것을피합니다. 식사도 자기들끼리 거대한 건물 옆에 있는 배급소에서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식사 시간이 되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합니다. 그러니 싸움이 시작되면 아무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을 겁니다.”
“아주 좋은 정보군요.”
하룬은 슬슬 돌아갈 준비를 했다.
“꼭 이곳의 사악한 자들을 처단하고 저희들을 구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절 믿으십시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하룬은 페일론의 손을 힘주어 잡아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성벽 근처로 이동한 하룬은 성벽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벽돌이 비어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크기로 보아 족히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였다. 페일론이 말했던 언데드의 비밀 공간이 틀림없었다.
‘이곳에 언데드들이 숨겨져 있단 말이지. 그런데 왜 내 기척은 알아채지 못했을까? 정말 내가 높이 뛰어 성벽을 넘는 바람에 알아채지 못한 것일까?’
위험하긴 하지만 확인을 해볼 필요는 있었다. 하룬은 조심스럽게 성벽으로 접근을 했다. 점점 성벽과 가까워지자 심장이 무섭게 고동치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성벽에 완전히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페일론이 나에게 거짓말을?’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는 없다.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는 그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룬은 오랜만에 라이피를 소환했다. 벽돌은 흙과 모래가 주재료이니 라이피가 재격이다.
-라이피, 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 줄래?
소환된 것이 기분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지은 라이피의 손가락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어두운 공간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아니 죽은 자다. 뼈만 남은.
언데드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감지할 상황인데도 깨어나지 않는 것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하룬이 샤키의 눈을 활성화시키자 어두운 공간에 숨겨 있던 스켈레톤 세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구의 워리어와 두 구의 솔저였는데 무기를 쥐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고민하던 하룬은 성배를 사용하기로 작정했다. 성배를 꺼낸 하룬은 나이아를 소환해 잔을 채웠다. 그런자 금방 성배 안에 담긴 물은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하며 아주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어디!’
이곳에서 겪은 스켈레톤들에게 항성력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성수를 맞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궁금했다.
하룬은 성수 몇 방울을 누워 있는 스켈레톤 워리어의 이마와 심장 등에 뿌렸다.
치지지직!
놀랍게도 스켈레톤 워리어는 깨어나지도 못한 상태로 녹아내렸다.
‘효과가 있는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룬의 존재에 반응을 하지 않았고 항성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스켈레톤은 성수에는 무력했다. 적들의 전력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언데드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으니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하룬은 나이아와 라이피의 도움을 받아 언데드들을 성수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무척 빠르게 움직였지만 아쉽게도 성의 왼쪽 성벽에 있는 언데드들을 모두 처리했을 때는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그의 예민한 오감에 성안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아쉽지만 이 정도로만 하자. 나머지는 사제들이 처리할 수 있을 거야.’
하룬은 소환했던 두 정령과 회포를 나누지도 못하고 돌려보낸 후 빠르게 성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