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聖杯》
하룬 일행은 성녀의 초대를 받고 오긴 왔지만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세운 막사 앞에는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성자와 성녀 그리고 3명의 노신관들까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아까 신성한 빛이 이들의 막사를 한참 동안 머물더니 그들의 상태는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이유는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따듯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서요.”
성녀의 온화한 대답이 있었지만 선뜻 믿는 사람은 없었다. 사제들 특히 성자 때문에 그 말을 믿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하하! 제가 직접 끓인 수프랍니다. 다들 맛보세요. 맛은 없겠지만 정성을 다해 끓였으니 성의를 생각해서 맛봐 주십시오.”
성자가 성기사 1명과 함께 큰 냄비를 들고 왔다. 그 안에는 보글거리며 거품이 터지고 있는 수프가 맛있는 향을 풍기고 있었다.
3명의 노신관들이 다른 성기사들과 함께 말린 과일과 데운 빵 그리고 먹기 좋게 잘게 찢은 육포를 얻은 접시들을 일행의 앞에 놓았다. 그러곤 국자로 수프를 푸는 성자를 도와 수프 그릇을 나르기 시작했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하룬 일행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접에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보다도 하룬 일행에게 심한 거부감을 주었던 성자의 태도가 너무 뜻밖이었다. 성자 예힘은 정말 기뻐하는 얼굴로 수프를 푸고 있었다.
비록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앞에는 따듯한 수프와 자리가 모자라서 몇 사람이 같이 먹어야 하긴 하지만 음식이 놓였다.
먹을 준비가 되자 성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이 자리는 그 은혜에 약소하게나마 감사하고자 마련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음식도 아니지만 저희의 성의를 봐서 맛있게 드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초대와 식사 대접이 뜻밖이긴 하지만 이렇게 나오니 인사를 안 받을 수도 없었다. 일룸과 세르파 쪽을 흘끗 쳐다본 하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렇게 따듯한 음식을 준비해 주시니 감사하게 먹겠습니다.”
이런 일을 해 봤을 리가 없는 사제들이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이미 본 터라 진심으로 그들의 성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도네이스, 대접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 우리는 포도주를 좀 꺼내지.”
하룬의 말에 도네이스와 마리가 막사로 달려가 마법 배낭에서 아이 머리통 크기의 포도주 통 몇 개를 가져왔다.
“화아! 포도주다!”
기름진 식사와 술을 멀리하는 사제들이긴 하지만 포도주는 예외였다. 물론 과음은 안 되지만 포도주 몇 잔은 그들도 즐기고 있었기에 사제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네이스와 마리가 사람ㄷ르 앞을 돌며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고귀한 사제들이 준비한 식사와 포도주에 식사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건배를 하시지요.”
이 비욘드에서는 좌중의 우두머리가 건배를 외치는 것이 풍습이다. 그러기 전에 포도주나 음식을 입에 대는 것은 대단한 무례로 여겨졌다.
“아닙니다. 대장이 하세요.”
“아닙니다. 이 자리는 빛의 신전에서 마련하신 것이니 성녀께서 하셔야지요.”
“그럴까요?”
성녀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포도주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 마츠 평원에 올 때까지만 해도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레아 님을 향한 신심이 두터운 성기사들과 신관들의 힘이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것으로 생각했던 거지요.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언데드들은 신성력을 일정 수준까지 견딜 수 있는 존재들이라 저희와 함께 온 시종들과 용병들의 소중한 생명을 헛되이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들 역시 여러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모두 죽어 사악한 자들에 의해 나쁜 일의 도구로 쓰였을 겁니다.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원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평소에 음식을 전혀 만들어 보지 못한 저희들이라 제대로 맛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맛있게 드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식을 앞에 놓고 말이 너무 길었군요. 레아께서 여러분들의 앞길을 환하게 밝혀 주실 거라 굳게 믿습니다.”
성녀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을 한참 넘겼고 사제들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사라졌기에 사람들은 식사를 맛있게 할 수 있었다.
사제들의 식사는 원래 조용했다.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준 신에 대한 감사함으로 시작하여 식사를 하면서 그 감사함을 떠올려야만 하기에 대화가 없었다. 자기만의 연구에 주로 빠져 사는 마법사들의 식사나 규율과 절도를 중시하는 기사들의 식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용병들의 식사는 달랐다. 그들의 식사는 살아남은 것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목숨을 걸고 의뢰를 수행하는 용병들에게 있어 식사는 그 무엇보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시간이었기에 웃고 떠들며 즐기는 시간이었다.
“하하! 성자께서 직접 끓인 수프라서 그런지 수프에도 신성력이 담뿍 담겨 있는 것 같은데.”
“그러게. 혹시 이거 다 먹고 나서 언데드들이랑 싸우면 놈들이 촛농처럼 녹는 거 아닐까?”
“내 살다가 사제들이 직접 준비한 음식은 처음 먹어 보네.”
“흐흐흐! 난 그랬다는 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네. 우리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을 먹고 있는 거라고.”
돌풍 용병대원들은 거리낌 없이 웃고 떠들며 식사를 즐겼다. 마탑과 황실 사람들 역시 그동안 같이한 시간 때문인지 슬슬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관 어른, 그쪽에 있는 포도주 통 좀 주세요.”
“아! 드리지요.”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말린 살구가 피부에 아주 좋대요, 성녀님.”
대원들은 사제들에게도 말을 붙였다. 그런 용병들에게 사제들은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대꾸를 했고 차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모두가 같이 경험한 전투와 언데드들에 대한 것이 화제로 떠오르자 이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하는 성녀는 식사를 하는 내내 그런 식사 분위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갓난아기였을 때 신적으로 들어왔던 그녀로서는 처음 보고 경험하는 식사 분위기였지만 레아에 대한 불경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잘하면 좋은 포교 방법이 될 수 있을 거 같아.’
오히려 레아의 의지를 대중에게 설파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제들은 지금처럼 사람들의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대중의 삶 속에 녹아들어 가지 않으면 그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을 진심으로 감화시킬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누구도 중요시하지 않는 오래된 교사敎史에는 간혹 고위급 사제들이 헐벗고 누추한 대중들과 함께 생활을 하며 그들을 도와주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물론 귀족들을 포교의 주 대상으로 하는 현재는 그런 내용은 어느 누구도 종요시하지 않지만 말이다.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둘러본 성녀는 하룬이 막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뭘 하려는지 자신의 막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성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잡았다.
“어딜 가십니까?”
“아, 네. 물이 다 떨어진 것 같아서 물주머니를 가지러 가려고요.”
생각해 보니 식사를 마친 후 마실 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수프를 끓이느라고 중간의 수로에서 준비했던 물을 다 쓴 것이다.
“그런 일을 대장이 직접 하시네요?”
“하하! 꼭 누가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저희 용병대원들은 누구나 일이 없으면 자신이 할 일을 찾아 합니다.”
성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크든 작든 조직이 생기면 그 수뇌는 가진 권력과 위세를 드러내기 마련인데 돌풍 용병대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가족과 같다고나 할까?
“사과하겠어요.”
“네?”
뜬금없는 성녀의 말에 하룬이 놀랐다.
“더없이 큰 은혜를 조건 없이 베푼 분에게 그동안 저희가 많은 무례를 저질렀어요.”
“아닙니다.”
그동안 사제들의 태도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사과를 받으니 조금 쑥스러웠다.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과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어요.”
성녀의 눈은 진심으로 가득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마워요. 사실 저희도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닌데 남들이 떠받드니 생각 없이 무의식중에 스스로 존귀한 존재라 잘못 생각하고 살아온 거 같아요. 허례허식에 얽매여 제대로 해야 하는 말이나 행동도 눈치를 보고 머리를 굴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생명의 은인들에게 무례한 꼴을 보이고 만 거지요.”
“성녀께서 그런 열린 사고를 가지고 계시니 빛의 신전을 통해 앞으로 이 대륙인들은 레아 님의 따듯하고 밝은 빛 속에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고마워요. 큰 격려가 되었어요.”
성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신전의 사정을 모르는 하룬으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뒤에서 성자 예힘이 다가왔다.
“말씀을 나누고 계셨군요. 전 물주머니를 빌리러 왔습니다.”
“그거라면 여기 있습니다.”
하룬이 도네이스가 음식 준비를 하려고 꺼내 놓은 물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이리 주십시오.”
“아니, 제가 가지고 가지요.”
“아닙니다. 주십시오. 이렇게라도 해야 그동안 행한 무례함과 무지에서 나온 부끄러운 행동에 조금이라도 속죄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룬은 성자 예힘의 말에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며 쳐다보았다. 그가 이제까지 보아 왔던 그 성자가 맞는지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부끄럽습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십시오, 하룬 대장. 이제야 겨우 레아께서 절 왜 종으로 선택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무례하게 행동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 네.”
하룬은 판이하게 달라진 성자의 태도가 여전히 믿기지 않아 그의 사과를 제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여부도 판단할 수 없었다.
“사과를 받아 주세요, 하룬 대장. 진심이랍니다. 성자는 저희와 달리 이방인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곳도 신분 사회인데 성자는 상당히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 이곳의 귀족 출신들과 생각하는 것이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무례와 실례를 저질렀던 거지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성자는 레아께서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아!”
하룬은 이제야 성자 예힘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노블이었구나.’
노블들이야 이곳 비욘드의 귀족들보다 더 특권 의식에 젖어 있는 부류이다. 그랬으니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했으리라.
“그런데 어떻게 이방인이 성자로…….”
신관이라면 모르겠지만 성자는 너무 뜻밖이었다. 현실은 종교도 없는 세상이 아닌가?
“모든 것은 레아께서 안배하신 일입니다. 성자 예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그 선택이 틀림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자신과 같이 행운 스텟에 올인을 한 경우도 있고 다른 유저들보다 앞서 게임을 한 유저도 있다. 이들이 믿고 있는 신, 즉 마더컴이 비욘드에 어떤 안배를 했는지, 왜 했는지 알려고 한다 해서 알아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알겠습니다. 성자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룬 대장. 태어난 이래 계속하서 제 눈 위를 덮고 있던 장막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지만 한 가지가 내내 저의 마음ㅇ르 괴롭혔습니다. 이제야 새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무례함을 그렇게까지 마음에 걸려 하고 있었다니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성자 예힘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오는 것이 느껴져 참 보기가 좋았다.
“이따가 따로 들르실 수 있나요?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지요.”
하룬은 성녀의 은밀한 초대를 수락했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어떤 이야기든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을 먹은 후 사람들은 무리별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마법사들은 여느 때처럼 마법 토론에 들어갔고 대원들은 딜런의 인솔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련을 주로 한 수련을 시작했다.
그 수련에는 이제껏 합류하지 않았던 일룸과 두 기사도 끼었다. 그들은 용병대원들의 실력을 인정했던 것이다.
레미와 헤니가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는 것을 본 하룬은 성녀의 막사로 건너갔다. 그가 막사로 들어가자 휴식을 취하던 성기사들이 일제히 대련이 벌어지는 곳으로 향하며 자연스럽게 자리르 비켜주었다.
“어서 오세요.”
막사 안에는 성자 예힘과 3명의 노신관들이 성녀와 함께하고 있었는데 이제까지완 뭔가 다른 분위기가 흐렀다. 그에 대한 적대감이나 거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하룬은 그들이 권하는 자리에 앉아 찬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본론을 꺼냈다. 이전과는 달라졌다지만 아직 이들과 한곳에 머무는 것은 불편했던 것이다.
“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여러모로 고민을 했는데 이제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희 일행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역시 뜻밖의 말이었다. 이들이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신 테론 제국으로 간다는 사제들이 단순히 용병들과 시종들의 복수를 위해 위험한 마츠 평원으로 진입한다는 것도 그렇게 흑마법사들이 그들을 노리는 것도 이상했다.
“곤란하시다면 말씀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만.”
“아니에요. 대신 비밀만 지켜주세요. 그리고 혹시 가능하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고요.”
스멀스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다크니스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들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더 강했다.
“알겠습니다. 비밀은 엄수하지요. 다만 부탁은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이전에 말했다시피 저희들은 지금 의뢰를 수행하는 중이니까요.”
“알아요. 그럼 저희가 이곳에 오게 된 연유부터 설명하지요.”
하룬은 눈을 빛내며 성녀를 주시했다.
“사실 빛의 신전은 본전을 신 테론 제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본전을요?”
거의 수백 년이나 한곳에 위치하던 본전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은 모르지만 거의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빛의 신전은 300여 년 전에 당시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으로 황도 인근에 대신전을 짓고 대대로 황제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구 테론 제국 제일의 신전이 되었다.
“현재 빛의 신전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들은 주교들입니다. 그런데 그 주교들이 대부분 귀족 출신들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 역시 귀족가에 두고 있어요. 때문에 빛의 신전은 신 테론 제국으로 본전을 옮기려는 거지요.”
사정을 알만했다. 파이론 제국은 신분제를 철폐했으니 신전을 떠받들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지할 세력이 사라진 것이다. 또한 피노세 대공은 신분 세습이 아니라 능력으로 관리를 등용하는 혁신적인 정책을 펼침으로써 자신들의 출신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인물이었다.
“이주 명분이야 정통성을 가진 신 테론 제국의 가르반 황제를 지지한다는 것이지만 실상 그 속내는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사실 본전에서는 이미 그 의사를 가르반 황제에게 전하고 신전 설립을 비롯한 제반 사전 작업을 이미 매듭지은 상태입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신전의 성물 중 하나인 신성석을 먼저 보내기로 했고요. 그런데 성물을 그만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탈취당하고 만 겁니다. 20명으로 이루어진 성기사단과 30명의 전투 사제, 그리고 주교 3명이 이 임무를 맡았는데 동행한 상단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바로 이 마츠 평원에서 말입니다.”
“흐음.”
놀라운 일이지만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너무 공교롭다! 마탑도 그렇고 빛의 신전마저 보물을 탈취당하다니.’
“이 사건으로 인해 본전은 난리가 났어요. 본전에서는 이 사실을 눈치 챈 파이린 제국에서 일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해서 저희를 조사대로 파견하게 된 거예요.”
“겨우 이 인원으로 말입니까?”
조사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전력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룬의 말에 사제들은 일제히 얼굴을 붉혔다.
그때 성자가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다 저의 불찰 때문이었습니다. 제대로 준비를 갖추어야 했는데 오만하고 경솔한 제 성격 때문에 주교 회의에서 그만 자신이 있다고 헛소리를 한 거지요. 레아 님에 대한 신앙심은 물론 교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레아께 성자로 선택되었다는 것만 믿고 설친 탓에 주교들과 말싸움까지 벌이고 얼굴을 붉히게 되어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현실, 아니 저희 세계에서 아는 이방인들이 주축이 된 무리에게 호위를 부탁하면서 전력이 더욱 약해졌습니다.”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성결한 기운을 성자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잠시 생각을 하던 하룬이 한 말에 사제들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성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애초 성물을 가지고 출발한 이들의 전력을 생각하면 본진에서는 여러분들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룬의 말에 사제들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성녀 역시 눈매를 좁히며 물어 왔다.
“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신전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물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성자께서 경망스러운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처음의 전력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으로 조사대를 꾸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마치 신전에 여러분을 적대하는 파벌이 있어 이번 성물 실종에 대한 책임을 여러분에게 전가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제 말은 빛의 신전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당사자라서 잘 모를 수 있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마치 실패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아닙니까?”
“그…….”
성녀를 비롯한 사제들은 순간 뭔가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뭔가 감이 잡히는 것이라도 있는지 성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달레스 신관 역시 눈을 번뜩이며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룬 대장의 말이 맞습니다. 본전에서는 저희에게 성물 분실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성자의 말과 행동이 좀 경망스럽기는 했어도 이런 식으로 처리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흐음.”
사제들은 순간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생각할수록 하룬의 말이 옳았다. 이 일은 확실히 이상했다. 교단에서 총교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이랄 수 있는 성녀와 성자가 동시에 출행하는 길에 전투 사제도 아닌 연구 사제 3명과 20명의 성기사라니.
“생각해 보니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우린 이런 상식적인 것도 모르고 성자만 원망했으니…….”
딜레스 신관이 무거운 표정으로 눈ㅇ르 감았다. 마치 회개라도 하듯 모은 그의 마른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일은 본전을 신 테론 제국으로 옮기기 전에 눈엣가시와 같은 저희 실천 계열을 완전히 숙청하려는 총교와 주교들의 계략임이 틀림없습니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총교와 대다수의 주교들이 주축이 된 교리 계열은 이전의 성녀들과는 달리, 높으신 신성력으로 낮은 데로 임해 많은 이적을 직접 행하며 대외적으로 빛의 신전을 대표하는, 존경과 사랑을 받아 온 성녀님이 부담스러웠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직 수행 중이지만 이제까지 세 번밖에 현신한 적이 없는 성자님의 출현도 부담스러웠을 거고요.”
무즈힐 신관과 라엘 신관의 말에 성녀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최근 일반 신관들과 수련 성기사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지지도가 급증했다는 동향이 주교단 측으로 올라갔다더니 그 결과가 이것인가?’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모든 상황은 하룬이 한 말로 귀결되었다. 교단의 재정과 행정 그리고 의교 조직 등을 장악한 교리 계열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파이린 제국이 개국한 후 일반 민중들에게 좀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고 역설해오고 그걸 실천해 온 자신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던 것이 틀림없었다.
‘교단을 개혁해야 해!’
이미 굳게 마음을 먹고 있었던 성녀지만 이제 마음을 확실하게 굳힐 수 있었다. 교단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실천을 중시하는 계열이라도 교단에서 독립해서 나와 레아의 의지를 실현해야만 했다. 마음을 굳힌 성녀가 눈을 떴다.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는 강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당장 돌아가야겠어요!”
“당연하신 결정입니다. 돌아가서 총교 각하와 교리 계열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기회에 앵무새처럼 외운 교리만 말하고 제대로 된 신성력도 갖추지 못한 자들을 모두 솎아 내야만 합니다.”
“교단을 참다운 레아 님의 뜻이 펼쳐질 수 있는 곳으로 바꿔야 합니다.”
성녀의 결정에 신관들이 당장 일어날 것처럼 흥분했다. 성자는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감에서 벗어났는지 한층 밝아진 모습이었지만 지은 죄가 있는 터라 감히 동조하지는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잠깐만요!”
하룬의 말에 사제들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여러분이 무사히 돌아오는 경우를 상정했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라면 만약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 놓았을 거 같은데요.”
“그, 그건…….”
사제들은 하룬의 말에 또다시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따.
“여러분이 안전하게 본전으로 돌아가려면 일정한 정도의 결과물을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예컨대 성물의 행방이나 탈취한 자들의 정체 정도는 파악해야 할 겁니다. 그러고 나서 전력이 너무 약해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었다는 핑계가 있어야 안전하게 신전으로 귀환할 수 있으며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죄를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사제들은 하룬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휴우! 이들은 너무 순진하군. 노블인 성자도 그렇고.’
세상 경험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너무 순진하게만 여겨졌다.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주어서 그런지 이들이 사지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못 볼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휴우!”
생각 같아서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쏘아붙이고 싶을 정도로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하룬은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했다.
“마츠루트 요새 쪽으로 가서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보든가요. 그곳이라면 어쩌면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수백 명이 대로를 타고 움직였으니 목격자나 이 일의 단서를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룬의 말에 사제들은 고심을 했다. 그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이대로 가면 자신들을 노리는 자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은 것이 확실한 결말이었다. 성녀는 눈을 감은 채 한동안 거심을 하다가 지루함이 느껴졌을 때가 되어서야 임을 열었다.
“조금만 더 동행하게 해주세요.”
“네?”
의외였다.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면 마츠루트 쪽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곳으로 가거나 본전으로 돌아가는 길도 저희에겐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저희가 기댈 수 있는 분은 하룬 대장밖에 없답니다. 도와주세요!”
하룬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불길했던 예감이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차라리 나서지나 말 것을.
“저희가 성물의 행방이나 탈취한 자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때까지만 동행해 주세요. 비록 지금은 가진 것이 없지만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를 때까지 그 약속의 징표로 이것을 맡기지요.”
‘차라리 다크니스에 대해서 말해 주자.’
하룬이 마음을 굳힌 순간 성녀는 작심을 한 듯 품속에서 한 물건을 꺼내 하룬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나무잔이었다. 어른 주먹 크기의 나무잔은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성결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교단의 3대 성물 중 하나인 성배聖杯랍니다. 대대로 성녀들에게 내려오는 성물로 전설에 의하면 지금은 그 이름도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 한 성녀께서 벼락을 수백 차례나 맞으면서도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라흐드라스 나무로 깎아 만든 물 잔으로 여기에 물을 담으면 모든 사악한 기운을 정화시키는 성수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전설이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성배는 성수를 만듭니다.”
그 볼품없는 외관으로 보아서는 성배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녀가 곁에 있던 물을 잔에 붓자 그 신성력을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연푸른 성수로 변하고 말았다.
“이 성배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성물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 일을 받아들였지요. 그 비밀은 잃어버린 성물인 신성석의 행방을 이 성배가 알려준다는 거예요. 보세요. 성배로 인해 변한 성수가 신성석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잔 밖으로 흘러넘칠 듯 솟아오르고 있어요.”
성녀의 말 그대로였다. 성배에 채워진 성수는 원래 수평을 이뤄야 하는데 놀랍게도 잔이 기울어진 것처럼 그 높이가 달랐던 것이다. 성수의 위쪽은 마츠 평원의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신성석 역시 성배의 행방을 알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성녀의 말에 하룬은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거나 알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하룬은 문득 전장의 상공 위를 날고 있었던 이름 모를 새들을 떠올렸다.
‘혹시 패밀리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5서클이 넘는 흑마법사들이라면 패밀리어 마법은 당연히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라도 확인해 볼 소지는 충분했다. 다른 동물들이라면 몰라도 공중 정찰이 가능한 새라면 효과적으로 패밀리어 마법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룬은 고심을 했다.
‘성가신 일이긴 하지만 굳이 나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야.’
어차피 마탑과 황실의 의뢰와 맞물리는 일이다. 하룬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다크니스가 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상황이다. 앞길의 상황이나 적들의 전력을 모르는 상황에선 신성력을 사용하는 이들의 가세는 짐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전력의 상승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하룬은 짧은 순간이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심사숙고했다.
“좋습니다. 잠시 더 동행하기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성녀는 기대를 하긴 했지만 하룬이 이렇게 흔쾌하게 승낙을 할지는 몰랐던지 기뻐하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성자와 신관들 역시 안도하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