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불편한 동행 (175/278)

《불편한 동행》

 아침 식사를 한 후 하룬 일행은 길을 나설 채비를 갖추었다.

 그때 어제 하룬의 분노를 샀던 성자가 일행과 함께 그들에게 다가왔다. 얼굴 가리개까지 착용한 성기사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신관들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밤을 편하게 보내지 못한 것 같았다.

 하룬 일행은 신관들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로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신관들과 성기사들 역시 같이 인사를 해왔지만 성자 예힘은 금방 자세를 풀고 입을 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갑니까?”

 예힘의 시선이 향한 것은 일룸 쪽이었지만 그는 성자의 시선을 피하고 하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성자를 편든 것으로 인해 딱딱한 육포에 맛응ㄹ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수프와 빵을 먹고, 제대로 바람을 막지도 못하는 불편한 천막에서 자야만 했던 그로서는 성자의 관심이 불편했던 것이다.

 예힘의 시선이 세르파로 향했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하룬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것이다. 6서클의 벽을 깨면서 육체가 강건해졌다고는 하나 평균 60세가 넘는 나이에 이런 노숙은 별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마법사들은, 하루 사이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식사와 잠지라에 아직도 뼈가 시리고 아플 정도였다.

 예힘도 아예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 듯 하룬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하룬 대장, 어디로 가시오?”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군요.”

 하룬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같은 방향이면 동행하려고 그러지요. 같이 가면 서로 도울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별로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까칠한 하룬의 대답에 결국 예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말았다.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는 예힘의 입에서 무슨 날이 나올지 모두가 궁금해할 때 성녀가 앞으로 나섰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 모두가 신전에만 갇혀 살아서 세상 물정에 어두워 한 실례이니 마음에 담아 두시지 않길 바랍니다.”

 신성 치료까지 해주었던 성녀가 직접 나서 그렇게 까지 말을 하니 하룬도 더 이상 대거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저희는 수로를 따라 마츠 평원 안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대장 일행은 어디로 가십니까?”

 “저희 역시 수로를 따라 평원 안으로 진입할 생각입니다.”

 하룬의 대답에 성녀의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쪽으로 20명 내외의 사람들이 움직인 흔적이 발견되었기에 가려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저희가 껄끄러운 것은 알지만 동행을 했으면 합니다. 평원 안쪽에서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 기세가 자못 거칠고 위험해서 저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성녀가 이 정도까지 숙이고 들어오는데도 동행을 거절하는 것은 무례인 것 같아 하룬은 결국 따로 가려는 마음을 버렸다.

 “알겠습니다. 하루 이틀은 맹수나 마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위험은 없을 것 같으니 그렇게 하지요.”

 “하루 이틀이라면? 이미 정찰을 해봤다는 말인가요?”

 “네.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하룬의 말에 신관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흘렀다. 얼굴 가리개 사이로 보이는 성기사들의 날카로운 눈빛도 당장 그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다행이네요. 모든 일에 서툴러 기사들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거든요. 말도 다 도망친 상황이라 홀리 플레이트를 입은 채 걸어야 하는데 긴장까지 한다면 더 피로할 테니까 말이에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하룬의 말에 당장 티노가 앞을 향해 내달렸다. 질풍처럼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금세 먼지 사이로 작아지고 있었다.

 “헉!”

 노신관들은 물론 성기사들도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눈빛으로 경호성을 터트렸다. 전력 질주를 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도 마치 새처럼 가볍게 바닥을 박차고 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우리 부대장이 앞길을 정찰할 테니 최소한의 긴장만 유지한 채 이동하면 되실 겁니다.”

 “그러지요. 역시 돌풍 용병대는 대단하군요. 난 인간이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과찬이십니다.”

 성녀는 작심을 한 듯 하룬의 발과 보조를 맞추어 움직였다. 아무래도 귀찮은 혹을 달게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수로는 붕괴되었지만 그 흔적을 따라 물을 좋아하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기에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룬 일행은 이틀 동안 별다른 일 없이 수로를 따라 마츠 평원의 안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꼬리에 빛의 신전 사제들을 붙인 채, 하룬 일행은 적당한 속도로 이동을 했지만 마탑과 황실의 마법사들, 그리고 신관들은 무척 힘들어 했다.

 야영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이동하는 것도 그렇지만 먹고 자는 것 때문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이제 돌풍 용병대는 전혀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일룸과 세르파가 몇 번이나 눈치를 살피는 것은 물론이고 노골적으로 도움을 호소했지만 하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다른 이들을 위해 수고를 하는 사람들의 노고가 얼마나 큰지 온몸으로 실감한 그들은 지난 이틀을 후회로 보냈다. 그들은 어떻게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돌풍 용병대원들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미루스 님, 생각보다 체력이 아주 좋군요.”

 세르파는 이틀을 꼬박 걷고도 여유로운 타니엘라와 미루스에게 감탄했다. 그들은 연방 헉헉거리며 땀을 흘리는 자신들과는 달리 별로 지친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이 용병 마법사라서 체력이 강하다고 판단했지만 그래도 생각 이상이었던 것이다.

 “흐흐흐! 돌풍 용병대에 약골은 없소이다.”

 “그렇군요.”

 세르파는 으스대는 미루스의 말에도 고까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진심으로 두 용병 마법사들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같은 마도사지만 체력적인 면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마법사들뿐만 아니다. 일반 대원들의 체력도 기사들에 못지않았다. 마법 배낭이겠지만 돌풍 용병대원들은 큰 배낭을 메고도 사주경계를 하느라 자신들보다 훨씬 피로도가 심할 텐데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일행의 앞에서 걷던 하룬의 팔이 위로 올라갔다. 척후를 맡은 티노와 타킴이 이상 신호를 보낸 것이다.

 “정지!”

 이미 행군상의 주의 사항을 들었던 마탑과 황실 사람들은 하룬의 말을 듣자마자 자세를 낮추었지만 꼬리에 붙은 빛의 신전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티노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진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곳은 악명 높은 마수의 대지인 것이다.

 “전방에서 람비들 다수 출현! 대원들은 반원을 만들어 사람들을 보호하라!”

 하룬의 명령에 대원들은 마탑과 황실 사람들 앞으로 뛰어 나와 전방을 향해 일정 거리를 두고 무기를 뽑아 들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던 신전 사람들이 세르파와 일룸 일행에게 합류했다.

 티노와 타킴이 200여 미터 거리를 단숨에 뛰어와 일행과 합류했을 때 전방에서 처음 보는 마수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한 감색 가죽에 송아지만 한 덩치를 가진 람비 수십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후읏!”

 누군가 경호성을 토했다. 비록 먼 거리지만 잘 발달된 근육을 가진 람비의 머리에 솟은 작은 뿔과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던 것이다. 시뻘건 안광을 토해내며 접근하는 놈들에게서는 흉포한 기세가 흘러나와 마수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원초적인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좌측에 센 것으로 한 방 날린 다음 방어 마법을 준비하세요. 대원들은 2인 1조로 놈들을 상대하고, 도니와 마리는 철시에 마나를 실어 우측을 공격하도록! 이번에는 딜런 경이 자유로운 화살이 되세요!”

 “넷!”

 대원들이 힘차게 대답을 하고 각자 맡은 것을 준비하는 사이 람비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슈웅! 슈웅!

 어느새 강탄성궁에 시위를 건 도네이스와 마리가 마나 광이 흐르는 철시를 날리기 시작했다.

 쿠우왕! 크아앙!

 철시가 날아간 곳에서 람비 두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달려오던 속도와 몸을 꿰뚫은 철시의 힘이 충돌했던 것이다. 보통 화살이나 쿼럴로는 흠집을 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마나를 머금은 철시는 놈들의 머리통을 단숨에 뚫어 버렸던 것이다.

 슈웅! 슈웅!

 다시 두 발의 철시가 더 날아가서 람비 두 마리를 쓰러뜨렸을 때는 이미 놈들은 50미터 거리까지 달려온 상태였다. 철시에 마나를 주입해서 발사하는 마나 궁술의 위력은 뛰어나지만 그 과정에서 섬세한 마나 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에 200미터 정도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두 발을 날리는 것이 그 한계였다.

 “파이어 볼트!”

 “파이어 레인!”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날린 마법 공격이 드디어 놈들의 머리 위에서 발현되었다. 뜨거운 화염으로 만들어진 볼트와 화염 덩어리가 일행의 좌측 전방으로 쇄도하고 있던 람비들에게 쏟아졌다.

 꾸아악! 꾸어억!

 화염 볼트와 화염 덩어리를 뒤집어쓴 랍비 대여섯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뒹굴었다. 털에 붙은 불을 끄려는 본능적인 행동인 것이다.

 “타앗!”

 딜런이 기합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가자 아카족 대원들이 그 뒤를 따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사이 마리와 도네이스는 강탄성궁을 거두고 그보다는 작지만 탄성이 뛰어난 복합궁에 시위를 걸기 시작했다.

 딜런이 이끄는 아카족 대원들은 나머지 람비 무리와 부딪혔다. 양쪽 다 가속도를 받은 터라 온 힘을 다해 무기와 발톱을 휘둘렀다.

 빠악! 꽈앙! 까앙!

 다양한 충격음이 터져 나왔지만 뒤에서 보고 있는 인물들이 생각하는 일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놈들의 발톱은 능히 강철과 비견될 정도의 엄청난 강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에게 거리를 주지 마라!”

 검신에 마나를 주입한 티노가 마수를 상대하며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룬이 말한 대로 2인 1조를 이루어 람비를 공격했다. 유연성이 극히 뛰어나고 발톱에 실린 힘이 바위를 부술 정도의 람비지만 프로즐리의 힘과 람비의 힘을 동시에 끌어 올린 대원들의 힘과 민첩한 동작은, 공격을 위한 도약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놈들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딜런은 작정을 한 듯 2미터에 가까운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람비에게 휘둘렀다. 아카족 대원들의 검을 튕겨 내던 람비의 발톱이 사정없이 잘려 나갔다. 딜런의 오러 블레이드는 마치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게 대원들의 무기를 피하는 람비들의 몸통을 사정없이 가르고 찔렀다.

 삽시간에 세 마리의 랍비가 피투성이로 난자되었다.

 크왕!

 놈들의 대장인 듯 거의 물소 크기의 엄청난 거구를 가진 람비 한 마리가 대원들의 머리를 뛰어넘어 달려왔다. 엄청난 탄력과 도약력을 가진 놈이었다. 그 뒤로 두 마리의 랍비가 대장처럼 아카족 대원들의 머리와 무기를 뛰어넘었다.

 하룬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풀어 헤친 셔츠 안쪽의 암기 벨트에 닿더니 비수 세 자루가 날아갔다.

 쌔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뒤따를 정도로 가공한 빠르기였다. 세 자루의 비수는 순식간에 세 마리 람비의 머리통에 도착해서 꿰뚫을 것 같았다. 마치 환상처럼 펼쳐진 비수의 비행에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지만 상황은 그리 쉽지 않았다.

 빠악! 빠지직! 빠지직!

 람비 세 마리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똑바로 날아오는 비수들을 발톱으로 잡아채고 힘을 주어 박살내 버렸다.

 “미, 미친!”

 일룸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눈으로도 감히 그 궺거을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비수를 잡아챈 것도 놀라운데 그걸 발톱으로 박살을 내 버리다니!

 “마수가…… 맞구나!”

 타운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검을 한번 쳐다보았다. 소문으로만 접했던 마수의 무서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야 왜 돌풍 용병대원들의 무기와 놈들의 발톱이 마주쳤을 때 이상한 충격음이 났는지 이해한 것이다.

 람비의 우두머리인 세 놈이 잠시 멈추었을 때, 마리와 도네이스의 2차 공격이 감행되었다.

 슈앙! 쓩! 피융!

 석궁의 쿼럴처럼 가늘지만 긴 철시가 한창 원들에게 발톱과 이빨 공격을 하고 있는 마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꾸아앙! 꿔어억!

 대원 2명을 동시에 상대하느라 주의력이 떨어진 마수들이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날아오는 가늘고 긴 철시를 알아챌 수는 없었다. 놈들이 질기고 두터운 가죽을 뚫고 박힌 철시로 인해 고통 어린 신음을 지르는 순간 대원들의 무기가 파고들었다.

 푸악!

 프로즐리의 힘이 깃든 대검에 람비 한 마리의 옆구리가 꿰뚫렸다. 놈은 발버둥을 치며 위협적으로 피어를 흘렸다. 그 와중에 일부 대원들은 놈들의 발톱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그 정도로는 방어구를 약간 손상시켰을 뿐이다.

 옥세르 역시 도네이스가 쏜 철시에 넓적다리가 꿰뚫린 마수가 충격으로 튕겨지는 순간, 대검을 람비의 몸통 깊숙이 박아 넣었다. 하지만 마수의 생명은 그걸로 끊어지지 않았다. 놈이 위협적으로 포효했다.

 으릉! 으르릉!

 “이놈! 넌 이 옥세르의 밥이다!”

 옥세르는 대검을 잡은 손목에 힘을 주어 돌렸다. 워낙 덩치가 크고 무게가 나가는 놈이라 힘은 좀 들었지만 대검은 놈의 내장을 통째로 자르며 한 바퀴 돌아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끝이닷!”

 옥세르는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 어린 신음을 지르고 있는 람비의 목에 대검을 찔렀다.

 크아앙!

 금방 죽을 것 같았던 람비가 포효를 하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놈이 목을 베어 오는 대검을 무시하고 옥세르를 향해 도약하는 순간, 그와 같은 조를 이룬 샤비르의 거대한 도끼창의 예리한 도끼날이 놈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끄르륵!

 막 도약하려던 람비는 도끼날에 실린 프로즐리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머리통을 땅에 박아버렸다. 얼마나 강력한 힘이 실렸는지 놈의 단단한 두개골이 쩍 벌어져 뇌수와 피가 그 도끼날을 따라 흘러내렸다.

 푸욱!

 옥세르의 대검이 놈의 목을 파곧르더니 몇 바퀴 회전하며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이번에는 저놈이다!”

 아직도 넘치고 있는 마수의 힘을 느끼며 옥세르가 디온의 조를 동시에 공격하는 람비 두 마리를 가리켰다. 둘의 발꿈치가 대지에 깊숙한 흔적을 남기며 도약했다.

 하룬이 날린 비수 세 자루를 발톱으로 박살 낸 세 마리의 람비는 비록 막아내긴 했지만 비수에 실린 강력한 힘을 받아낸 충격으로 인해 발을 잠시 절룩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흉흉한 살광을 하룬과 다른 인간들에게 뿜어내면서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가랏!”

 하룬은 놈들이 능히 마나가 실린 비수를 잡아채 부수는 것을 보고 비도지존의 비수들을 피치 스킬로 던졌다. 다른 놈들보다 덩치가 큰 대장 녀석에게는 블리츠 대거가 날아가며 시퍼런 뇌전을 방사했다.

 지지직!

 크와앙!

 놈은 제자리에서 수 미터를 도약해 블리츠 대거를 피했지만 하룬의 눈썹이 꿈틀하자 대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방향을 바꾸었다. 공중에 떠 있는 자신을 향해 다시 블리츠 대거가 날아오자 식겁해서 황급히 뒷발의 발톱으로 쳐 냈다.

 까앙!

 지지직!

 끄아악!

 놈은 비수를 쳐내는 순간 전신을 관통하는 전류에 부르르 떨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멀리 튕겨 나갔던 블리츠 대거가 독 오른 뱀처럼 머리를 들고 순식간에 놈의 뱃가죽을 뚫고 들어왔다.

 풀썩!

 지지지직! 지지지직!

 전격으로 인해 제대로 자세도 잡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람비의 우두머리는 온몸을 휘감아 도는 전격으로 인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경련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놈의 새빨간 눈 속에 자신이 사랑하는 암컷 람비 두 마리가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나는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발광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오그라들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이미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인간을 죽여 피를 빨고 살을 남김없이 뜯어 먹어라!

 죽어가는 람비 우두머리의 뇌를 지배했던 강력한 사념邪念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우리도 도와주겠소!”

 일룸의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염이 솟구쳤다. 명색이 기사에 소드 마스터인 그로서는 벌써 두 차례나 살벌한 싸움에서 국외자局外者가 된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룬의 눈이 전장으로 향했다.

 이미 전황은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살아 날뛰는 람비의 숫자는 열 마리가 넘었다. 물론 그마저도 마리와 도네이스의 철시 공격으로 한 마리씩 정리되고 있었다.

 “좋습니다.”

 하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룸은 타운트와 밀스레드를 이끌고 한창 마수와 대원들이 싸우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도니와 마리는 그만 쉬어도 돼! 지금부터는 대원들에게 맡겨 둬. 실전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알았어요!”

 “괜찮을까요?”

 도네이스와 마리는 대원들이 입은 방어구가 마수들의 발톱에도 쉽게 찢기지 않는 것을 본 터라 군말 없이 시위를 내렸지만 그녀들의 눈 속에는 아직 걱정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딜런 경도 있고 일룸 경도 강자니까 알아서 잘할 거야.”

 “네!”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경계는 하고 있어.”

 두 사람에게 경계를 당부한 하룬은 천천히 자신의 비수에 의해 죽은 람비들에게로 걸어갔다. 암컷 람비 한 마리는 털이 완전히 타 버린 상태였다. 워낙 가죽이 질기고 단단해서 그렇지 그 내부는 완전히 익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놈의 벌려진 입과 코 그리고 귀에서는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화염의 비수를 회수한 하룬의 시선이 다른 사체로 향했다.

 다른 한 마리는 마치 미라처럼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다. 털은 말라붙어 흉하게 변했고 가죽은 거뭇하게 변색된 것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하룬은 발에 마나를 실어 놈의 머리통을 부수었다. 예상한 대로 놈의 부서진 머리에서는 피나 뇌수가 보이지 않았고 마정석도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어둠의 비수는 상대의 정혈을 남김없이 흡수하는군.’

 자신이 사용하는 비수이긴 하지만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둠의 비수를 암기 벨트에 장착하자 비수로부터 예의 그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와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무런 의지를 끌어올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운들 중 일부는 마나 오션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룬은 마지막으로 람비 우두머리의 사체를 살폈다.

 지직! 지지직!

 블리츠 대거는 아직도 뇌전을 토해내고 있었다.

 ‘돌아와!’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블리츠 대거의 뇌전은 하룬의 어퍼 오션과 연결이 되어 있었기에, 순식간에 블리트 대거와 뇌전은 암기 벨트와 어퍼 오션으로 되돌아왔다.

 ‘갈수록 더 많아지는군.’

 따로 뇌전을 더 흡수하는 것도 아닌데 블리츠 대거를 사용할수록 뇌전의 양은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어쩌면 상대의 체내에 존재하는 전기를 흡수하는지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뇌전의 양이 더 증가할수록 자신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니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 뇌전을 제어하는 것이 갈수록 조금씩 힘들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하룬이 비수들을 모두 회수한 직후에 람비 특유의 비명과 신음이 끊겼다. 이제 모두 처리한 것이리라.

 ‘이 정도가 하급 마수이니 쉽지 않겠군.’

 이번에 람비를 상대해보니 지구력은 몰라도 순간적인 반응이나 민첩성은 익스퍼트 기사들의 그것과 비슷할 정도였다. 10센티미터는 족히 넘어가는 안쪽으로 휜 발톱들은 강철검의 강도에 비견되고, 몸의 유연성은 연체동물과 비견될 정도의 람비가 하급 마수라는 사실에 하룬은 입맛이 썼다.

 잠시 후 티노가 대원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대장, 모두 처리했습니다.”

 하룬은 티노의 보고에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피에 젖어 있었지만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심한 상처를 입은 이는 없었다.

 “레미와 헤니는 빨리 부상자를 돌봐 줘! 부상을 입지 않은 대원들은 람비의 가죽을 벗기고 마정석을 빼내!”

 두 사람이 부상을 입은 대원들에게 달려가고 다른 대원들이 도축을 준비하는 사이 하룬은 졸지에 구경꾼이 된 사람들에게로 돌아왔다.

 “사정이 이러니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이참에 식사까지 하도록 하지요.”

 마침 키 작은 나무 몇 그루가 근처에 서 있었다. 하룬의 지스를 들은 도네이스와 마리가 쉴 자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그곳으로 향했다. 그녀들의 뒤로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빠르게 걸어갔다.

 “우리도 돕겠소!”

 웬일로 세르파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돕겠다고 나섰다. 마도사나 되는 귀한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아마 기함을 할 테지만 이미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다른 대원들과 맟나가지로 함께 일을 하는 것을 보아온 그들에게는 못할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숙식을 자신들이 직접 해결하면서 그들에게 돌풍 용병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절실하게 알게 해주었다.

 “그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른 대원들은 마수 가죽을 벗기느라 한참 걸릴 테니까요.”

 하룬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디온과 옥세르를 비롯한 몇 명의 대원들이 마수 가죽을 벗겨 내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도네이스와 마리를 도운 덕에 마법사들은 매콤하면서도 개운한 스튜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빵, 그리고 뛰어난 향을 가진 차까지 즐길 수 있었다. 일룸과 두 기사 역시 마무리에 손을 거든 것에 불과했지만 마수를 해치우고 뿌듯한 마음으로 식사를 즐겼다.

 딱딱한 빵에 굳은 육포와 냄새나는 물로 배를 채우던 빛의 신전 사제들은 그런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볼 뿐이었다. 돌풍 용병대는 그들을 여전히 일행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묵묵히 식사를 했지만 성자는 인상이 내내 좋지 못하더니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룬에게 따졌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뭐가 너무하오?”

 하룬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짜증이 났던 것이다.

 “이왕 준비하는 김에 조금만 더 양을 늘리면 우리도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우리를 홀대하는 겁니까? 아무리 미요스 신을 믿는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는 일입니다.”

 성자는 마치 편을 들어 달라는 듯 파코추 마탑과 황실 사람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먹는 것에 열중했다. 한 번의 경험으로 그들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조금만 더 양을 늘리면 된다? 참, 내 어이가 없어서. 댁들의 인원이 도대체 몇 명이오?”

 “그, 그야…….”

 성자는 잔뜩 성이 난 표정이었지만 그 말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은 거의 하룬 일행과 맞먹는 대인원인 것이다. 조금만 더 양을 늘려서는 해결도리 수 없는 인원인 것은 자신이 봐도 확실했다.

 “댁들이 마수를 잡는 데 도움을 주었소, 아니면 식사 준비를 하는 데 도와주었소? 그도 아니라면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었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르 하는지 모르겠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면서 우리에게 뭘 바라는 거요?우리는 당신이 원하면 뭐라도 다 주어야 한다는 거요?”

 “그,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움직이면서 이렇게 따로 식사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한 말이오.”

 “같이 움직인다고 다 일행은 아니오. 당신들과 우리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이인데 무슨 일행이오? 정 우리가 걸리면 먼저 이동하시오. 우린 내일 출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갈 테니까.”

 어차피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방향을 좀 달리한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룬의 단호한 선언에 성자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사실 아까 전투가 끝났을 때 성녀를 비롯해서 신관들이 치료를 돕기 위해 일어서려는 것을 그가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남들이 다 우러러보는 자신들을 홀대한 하룬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따로 갑시다. 우리는 여기서 하루를 쉬고 갈 테니 그대들이 먼저 가시오. 하는 일도 없으면서 대접을 받으려는 말도 안 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댁들하고는 더 이상 얽히기 싫으니까.”

 하룬의 차가운 말에 성자는 입을 자물쇠로 채운 것처럼 닫은 채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식사를 대충 마친 하룬이 흘긋 쳐다보니 성자가 성녀와 신관들에게 뭔가 한 소리를 듣고 있는 듯 냉랭한 장면이 보였다.

 ‘왜 저런 친구가 성자인 거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현실에는 종교가 사라진 지 오래되어서 원래 성직자들이 저런 성품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성자라면 신전에서도 최고위급일 텐데 왜 저런 철부지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하룬에게 레미가 찻잔을 전해 주었다.

 “대장, 차 드세요.”

 “아! 고마워, 레미.”

 하룬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레미에게 궁금했던 사항을 물었다.

 “참, 레미. 내가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원래 람비라는 마수가 이번처럼 무리를 지어 대낮에 공격을 하는 습성을 가진 거야?”

 하룬의 말에 레미가 큰 눈을 몇 번 굴리더니 기이한 눈빛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요. 브롤프라면 몰라도 람비는 이렇게 무리를 짓는 마수가 아닌데. 람비는 보통 수컷 하나에 암컷 두세 마리, 그리고 번식기에는 새끼 두어 마리까지 군집 생활을 하는데 그 수가 열을 넘지 않아요. 새끼들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바로 영역을 나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람비는 자기 영역을 철저하게 지키는 놈들인데…….”

 “그런데 아까 우리를 공격했던 무리는 새끼들은 아예 없고 다 성체였잖아?”

 “그러게요. 정말 이상한 일이네.”

 레미가 갸웃거리는 걸 본 하룬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레미, 마수들이 평소에도 저런 모습이었어?”

 “모습요? 아! 그러고 보니 람비들의 눈이 너무 새빨갛게 변해 있었지. 평소에도 안광이 강하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붉은 상태는 아니에요. 꼭 사냥당하다가 막바지까지 몰린 것처럼 흉성이 터진 상태였어요.”

 하룬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누군가가 마수들을 조종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 목표는 누구지? 우리인가? 아니면 빛의 신전인가?’

 하룬은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빛의 신전이 목표라면 자신들은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서 위험을 자초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없는 하룬이다.

 ‘성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겠군.’

 하룬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마음을 굳히고 빛의 신전 사제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룬이 가까이 다가가자 성기사들이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성녀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성기사 1명이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무슨 일입니까?”

 하룬이 가까이 온 것을 본 성자 예힘이 대뜸 용건을 물어왔다. 불쾌한 감정이 절로 드러나는 목소리에 하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애써 감정을 누른 하룬은 성기사가 안내한 성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성녀님.”

 하룬은 대상을 정하고 말했다.

 “말씀하세요.”

 “신을 모시는 분들은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네. 맞아요.”

 성녀의 혜안이 기묘하게 빛났다.

 “신 테론 제국으로 가려면 대로를 타고 마츠루트 요새를 통과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꾸 마츠 평원 안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성녀를 비롯해서 신관들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으음. 꼭 알고 싶다면 말씀을 드리지요.”

 뭔가 고민을 하던 성녀가 대답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성자 예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할 필요 없습니다. 읻르은 저희 일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말한다고 도움이 될 자들도 아니고요.”

 성녀는 무례하게 대화에 끼어든 성자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긴 했지만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닫았다. 3명의 노신관들 역시 눈매를 좁히며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하룬은 더 이상 대화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숨기는 것이 많은 자들과 동행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잠시 동행을 했지만 더 이상은 어려울 것 같군요. 미리 성자에게 말한 대로 저희는 내일 일찍 출발하겠습니다. 먼저 출발하십시오.”

 “…….”

 말을 마치고 일어나 주저 없이 등을 돌리는 하룬의 단호한 기세에 성녀와 신관들의 입매가 꿈틀거렸지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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