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처리비크와의 동화》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니 레미와 헤니가 하룬이 잘 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찰을 겸해 근처로 산책을 나갔던 티노 부부와 하룬의 경호를 자청하는 딜런은 돌아왔지만 다른 대원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모두들 어지간히 오늘 언데드들과의 전투에 자극과 흥분이 된 모양이다.
“대장, 겨루와 통신을 했어요.”
“그래? 지금 어디 있대?”
“마츠루트 요새에 있대요. 통신이 자꾸 끊기는 등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아 길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알려 달라고 하네요.”
“마츠루트 요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어?”
“들은 적이 있어요. 마츠루트 요새는 데빌 산맥의 중간에 있는 유일한 요새로, 파이린 제국과 미노 제국 그리고 신 테론 제국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요. 이전에는 데빌 산맥을 넘는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1만 명의 레인저 군대를 거느리는 변경백이 머무르고 있던 곳이죠. 하지만 지금은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들어가지 않아요.”
“그래?”
“네. 정변 당시 변경백이던 라일스 백작이 중립을 선언했거든요. 각 군단을 돌아다니며 검술을 익히고 다양한 실전을 거쳐 소드 마스터가 된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도력으로 마츠루트를 완전히 장악했거든요. 요새에 머물고 있던 군대만 해도 1만 명에 가까울 정도이고 용병들의 숫자도 그 절반은 될 거예요.”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립 도시를 세운거로군.”
“그렇죠. 이방인들 중 실력이 높은 자들은 용병으로 혹은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많이 몰려드는 곳이죠. 그곳은 위험한 마수들보다는 몬스터들이 많은 곳이니까요. 세 제국에서 요새로 가기 위해서는 짐마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정도의 좁고 험한 길밖에 없으니 세 제국도 그곳을 도모하지는 못해요. 난리를 피해 그곳으로 도망친 사람들 상당수가 머무르고 있어서 요새의 인구만 해도 지금은 족히 5만 명은 될 거예요.”
“5만 명이라고? 요새가 그 정도로 큰 거야?”
“네. 원래 군수물자를 저장하기 위해 처음부터 엄청난 규모로 건축했거든요. 지금은 삼국의 자유무역 중계기지가 되어 그 규모와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어요.”
“흐음.”
하룬은 헤니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겨루와 방커가 데빌 산맥 인군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거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걸까?
“레미도 그곳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마츠루트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레미가 각별한 흥미를 보이고 있어서 묻는 것이었다.
“스승님과 함께 주술 재료를 사기 위해 두 번 정도 가본 적이 있어요.”
“어떤 곳이지?”
“무척 거칠면서도 번화한 곳이에요. 데빌 헌터라고 불리는 용맹한 군인들이 그곳의 주인들이죠. 그들이 지키는 요새는 장기 고용을 한 용병들이 득실거리고 상인들도 아주 많았어요. 다만 물가가 무척 비싼 곳이에요.”
삼국의 경계이자 통로가 되는 곳으로 마수가 득실거리는 데빌 산맥에 위치한 곳이니 용병들과 헌터들이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위험한 곳에 위치해 있으니 물가가 높은 것도 이해가 가고 말이다.
‘그런데 왜 거기에 있는 거지?’
이방인이 왜 거기에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겨루와 방커는 틀림없이 발트랑의 의뢰나 부탁을 받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이방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레벨 업을 위한 사냥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티노, 흔적을 찾았나요?”
도네이스와 산책을 한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주변 땅을 정찰했던 티노였다.
“네. 오래되어 어렵기는 했지만 대규모 인원이 대로를 타고 마츠루트 요새 쪽으로 이동한 것은 알아냈습니다. 그쪽 방향의 땅이 잘 다져진 것을 보니 한두 차례가 아니라 상시로 이동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마츠 평원으로 진입한 흔적도 발견했는데 남은 흔적으로 볼 때 20명 남짓의 소규모였습니다. 혹시 몰라 내일 새벽에 근방을 살펴볼 생각입니다.”
척후는 물론 추적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티노의 판단이니 확실할 것이다.
“마탑의 의뢰가 먼저입니까, 아니면 황실의 의뢰가 먼저입니까?”
딜런이 물었다. 황실의 의뢰는 수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의 실종이니 마츠루트로 가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츠 평원에 마수들이 출몰한다고는 하지만 다르 강을 따라서 난 대로 주위로는 그 출현 빈도가 낮아 상인들의 이동이 빈번하게 이루어져왔다. 그 정도 인원이 웁직이는 데 목격자가 전혀 없다고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명 정도가 움직인 흔적은 마탑 조사대가 남긴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뭔지 모를 단서를 바탕으로 마츠 평원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으리라.
“내일 티노 부대장과 버처리비크의 정찰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일단 푹 쉬도록 하세요.”
천막에서 나온 하룬은 바로 휴식을 취하러 가지는 않았다.
‘휴우!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대기가 그래서인지 아니면 이곳의 마나가 다른 곳과는 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쉬이 안정되지 않았다.
‘오늘은 밤을 새워 수련을 해볼까?’
이제는 나름 경지에 오른 마나 플로로 잠을 자신하는 것은 그리 불편한 것이 아니다. 만족감이 좀 떨어질 뿐이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무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파앗!
하룬은 패스트 스킬을 펼쳤다. 그의 몸이 마치 새처럼 빠르게 달빛 가득한 들판으로 날아갔다..
새벽에 정찰을 나갔던 티노가 돌아왔을 때는 마탑과 황실 사람들이 모두 기상해 대형 천막으로 모여든 상태였다.
“수고했소, 부대장! 다른 흔적이 있었소?”
딜런이 티노에게 수건을 내밀며 물었다.
“네, 딜런 경. 이제는 거의 매립 상태인 수로를 따라 수십 명이 움직인 흔적이 있었습니다. 일부 진흙 지대에서 발견한 발자국의 깊이와 크기를 고려하면 무술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 끼어 있는 무리로 보입니다. 그들에 앞서 그곳을 지나간 흔적 역시 흐릿하지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건 일루젼 마탑이 주축이 된 조사대가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마탑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수로를 따라 평원으로 진입한다는 소식을 끝으로 실종되었습니다.”
세르파가 티노의 말에 신빙성을 부여했다.
날아드는 흙으로 인해 곳곳이 채워져 다르 강물을 끌어들이는 본래의 목적은 상실했지만 수로는 황폐화된 드넓은 마츠 평원에 남아 드물게 평원 안쪽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창 제국의 4대 곡창으로 이름을 떨칠 때 건설된 거미줄 같은 수로는, 워낙 견고하게 건설되었기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상당수가 그 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장님은요?”
“새벽에 나간 것 같은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아마 버처리비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티노는 동이 트기도 전에 움직였지만 하룬은 보지 못했다. 부지런한 도네이스와 다른 대원들이 그 무렵 새벽 수련을 위해 일어나는 기척을 느꼈던지라 하룬이 자신보다 더 일찍 일어나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자, 일단 세안을 하고 식사 준비를 합시다.”
티노의 말에 사람들이 부지럭히 움직였지만 마탑과 항실 사람들은 돌풍 용병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괜히 빛의 신전 사람들을 편드는 바람에 식사도 따로 하게 된 그들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노동응ㄹ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세르파는 도네이스가 데우려고 꺼낸 빵의 양을 보더니 실망한 얼굴로 변했다. 입맛이 너무 썼다. 아무래도 공연히 참견을 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우리도 식사 준비를 합시다.”
이래저래 곤란해진 것은 각 진영에서 가장 어린 프로스트와 두 기사였다. 프로스트는 마탑에서, 밀스레드와 타운트는 대공 기사단 시절부터 수련만 한던 촉망받는 인재들이었으니 이런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으음.”
“제길! 이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샤벨 타이거 코털은 뽑아 가지고…….”
세 사람은 투덜거리며 식사 준비를 했다. 그래도 아침 식사이니 수프라도 끓여야 했던 것이다. 출발할 때 마탑과 황실에서 챙겨주긴 했지만 뭔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마법 배낭 안을 이제라도 자세히 살펴봐야만 했다.
그 시각 하룬은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해독약을 미리 먹인 버처리비크에게 싸가지가 동화되고 하룬 역시 싸가지를 매개로 동화되었던 것이다.
찬 새벽 공기를 가르고 빠르게 하늘을 나는 느낌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끝내주는군.
-큭큭!
싸가지 역시 기분이 좋은지 기괴한 웃음을 토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싸가지와 하룬의 동화를 허락한 수컷 버처리비크 미노가 하강 기류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하늘을 날면서 물었다.
-오늘은 이 근처를 살펴보자.
미노는 포니로 인해 동화 현상을 많이 경험한 터라 별 불만 없이 하룬의 의견을 따랐다.
-정말 넓군.
-그러게. 그런데 대지도 그렇고 하늘의 마나도 이상하게 끈적거리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안한 상태고.
싸가지는 며칠 전부터 하룬이 느낀 것을 그대로 감지하고 있었다. 그건 하룬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확실히 이질적인 기운이 마츠 평원을 장악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룬은 버처리비크의 눈을 통해 멀리 아래쪽에 보이는 평원을 살폈다.
평원에는 많은 초식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사슴 종류와 물소 종류가 눈에 많이 띄었고, 짙은 색 피부를 가진 오크들도 드문드문 자리한 숲을 중심으로 자주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막 사냥을 하러 나온 고양잇과의 맹수들과 토끼와 쥐 종류도 많이 보였다.
‘별거는 없는데.’
이곳에 오면 바로 볼 것으로 기대한 마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양육강식의 자연 섭리에 따라 평화롭게(?) 살고 있을 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수백 년 전에는 인간들로 들끓었던 곳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인간의 흔적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평원은 언제 농사를 지었나 싶게 숲과 초원으로 변해 있었지만 수로의 흔적만은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수로는 평원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바람에 날린 흙에 의해 메워진 곳과 군데군데 빗물이 고인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상공을 낮게 날면서 마츠 평원을 정찰하던 하룬은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해 돌아갈 생각을 했다. 대충 생각하기에 이 정도의 거리면 하루를 꼬박 움직일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그때 동화된 미노를 통해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뭔가 이질적인 대기의 파동이 머리 위쪽에서 감지된 것이다.
-이상한 놈들이 나타났다!
한순간에 활짝 펼쳐졌던 미노의 날개가 안쪽으로 조금 당겨지며 속도가 줄었다. 그러곤 몇 번 힘차게 날개짓응ㄹ 해서 날아올랐다. 그러자 눈을 통해 미노가 말했던 이상한 놈들이 보였다.
회색 날개의 크기는 미노의 절반 정도에 독수리의 동체와 와이번의 부리와 발톱을 가진 이상한 생물이 눈에 들어왔다. 열 마리가 되는 놈들은 떠오르는 햇빛을 받으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날아왔다.
-이상한 놈들이야!
-아이콘라드?
하룬은 일전에 들었던 마수들 중에 이런 놈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곳에 사는 놈들인가? 무지 못생겼다. 날개 크기도 작고.
미노는 긴장감 없이 자신의 의사를 전해왔다.
하룬은 보는 순간 아이콘라드의 이름ㅇ르 떠올렸는데 아마 맞을 것이다. 데빌 산맥에 사는 마수들 중 대표적인 놈들로 빠른 비행 능력을 갖추었지만 몸에 비해 날개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많은 시간을 지상에서 지낸다는 놈들이다. 아침 사냥을 나온 것으로 보였다.
끄르르! 끄르르!
놈들은 목청을 기이하게 올려 위협성을 토해 내더니 이내 다섯 마리씩 갈라져 포위를 했다.
‘헉! 포위를 해? 거기에 저렇게 자연스럽게 체공을 하다니.’
하룬은 놈들이 상당한 지성을 가졌다는 것을 공중에서 자연스럽게 멈추어 다섯 방위에서 포위를 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상대할 수 있겠어, 미노?
-크크! 하늘에서 우리를 상대할 존재는 없다! 저놈들에게선 이상한 냄새가 나서 맛이 없을 거 같다.
미노는 물론이고 수니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미노는 360도 회전이 가능한 목을 돌려 자신을 포위하며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 아이콘라드를 보았다.
키익!
짧은 울음과 함께 막 목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사이 뒤쪽에 있던 아이콘라드가 두 발톱을 치켜든 상태로 날아들었다. 정상적인 비행 자세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크악!
미노는 위협성과 함께 몸을 돌려 덤벼드는 아이콘라드를 맞이했다.
빠악! 빡! 빠바박!
발톱들이 부딪히자 마치 쇳덩이들이 충돌하는 소리가 났다.
미노는 아이콘라드의 강철과 같은 발톱 공격을 자신의 발톱으로 막아내더니 한순간 힘차게 날갯짓을 해서 공격한 놈의 위로 올라갔다. 전체적인 몸집에서 미노가 아이콘라드보다 한 배 반은 더 컸고 가진 힘은 훨씬 더 강했다.
그리고 바로 부리와 발톱 공격이 동시에 가해졌다. 순식간에 아래쪽에 놓인 아이콘라드가 날개를 펄럭이며 미노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 가진 힘을 다 끌어내기가 힘들었다.
팍! 팍! 팍!
강철과 같은 미노의 부리가 몸통과 날개가 연결된 부위를 연속해서 쪼았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한 번 쪼일 때마다 아이콘라드의 동체가 1미터씩은 아래로 떨어졌지만 미노는 능숙하게 날갯짓을 해서 놈을 놓치지 않았다.
파악! 파악!
결정적인 공격은 발톱이었다. 아래쪽에 놓인 위치 때문에 발톱을 무기로 쓸 수 없는 녀석의 몸통에 미노의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몸통이 날카로운 발톱에 찢긴 놈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끄아아악!
비명과 함께 날개를 펄럭여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아이콘라드의 머리통을 미노의 발톱이 단단하게 그러잡은 것이다.
꽈지직!
얼마나 힘이 좋은지 아이콘라드의 머리통이 찌그러지면서 뼈가 부서지는 기성이 흘러나왔고 이내 놈은 힘없이 날개를 떨어뜨렸다.
미노는 놈을 놔주고는 막 자신을 향해 네 방향에서 날아오는 아이콘라드를 향해 기성을 터뜨렸다.
끄륵! 끄르륵!
마치 맹수의 피어인 것처럼 네 마리 아이콘라드의 날갯짓이 멈추는 순간 미노의 날개가 힘차게 펄럭였다.
휘익!
아이콘라드보다 훨씬 육중한 몸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날갯짓으로 단숨에 수십 미터를 움직인 미노의 발톱은 아이콘라드 한 마리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단숨에 멱을 따 버렸다.
‘이런, 완전히 어른과 애 싸움이군.’
몸집은 물론 비행 능력이나 이동속도에서 현저히 차이가 나니 몇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하면서도 미노는 전혀 당황하거나 위축이 되지 않았다. 하룬이 느낄 수 있는 미노의 감정은 조그만 것들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광포한 살기뿐이었다.
미노는 순식간에 아이콘라드 두 마리를 더 죽이고 도망을 치는 두 마리를 차례로 쫓아가 목덜미에 발톱을 틀어박고 목줄을 뜯어내 버렸다. 수니 쪽을 보니 그녀는 뭔가 씹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거칠게 날개를 흔들며 뱉고 있었다.
삽시간에 시야에서 열 마리의 아이콘라드들이 사라져버렸다.
‘허! 이거야, 원!’
아카족들은 마수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모르지만 같은 비행 능력을 가진 존재를 상대하는 미노와 수니의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 괜히 하늘의 제왕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아래로 내려가자! 저놈들을 가지고 가야지.
마수의 가죽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잘 아는 하룬은 부산물을 챙기기로 했다.
-맛도 없고 가죽도 얇은 놈들인데?
미노는 일단 날아오른 이상 아래로 내려가기를 주저했다. 이제 태양도 제법 높이 올라와서 밤사이 이슬을 맞은 날개가 마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인간들은 좋아해. 저놈들 가죽을 팔아 너희들에게 맛있는 육포를 많이 사줄게.
-그렇다면야.
하룬은 미노를 설득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가지고 갈지 걱정이 되었다. 두 마리 정도야 미노와 수니에게 발톱으로 잡고 가자고 하겠지만 나머지가 너무 아까웠다.
‘일행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려면 하루는 꼬박 걸릴 텐데.’
대충 생각한 거리가 하루지 막상 이동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때까지 아이콘라드의 사체가 남아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미노는 그 거대한 동체에 맞지 않게 부드럽게 활강해서 바닥에 내려섰다. 하지만 날개를 활짝 펴고 기류를 탄 상태로 비행하는 수니는 날개를 말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래로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룬이 뭘 어떻게 하라고 부탁하기 전에 미노가 깡충거리며 아이콘라드의 사체로 가더니 대뜸 부리와 발톱을 이용해서 놈의 몸통 가죽을 가르고 내장과 뼈 그리고 살점을 발라내었다.
순식간이었다. 부리와 발톱이 얼마나 날카로고 예리한지 열 마리나 되는 아이콘라드의 몸통 가죽은 너무나 쉽게 갈라졌고 순식간에 해체되어 날개와 머리통이 가죽뿐인 몸통과 붙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꾸륵! 꾸르륵!
미노는 먹기 좋게 먹이를 발라놓고 수니를 불렀다. 하지만 수니는 배가 고프지 않은지 아니면 녀석의 성의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 미노는 이내 그중 심장만 골라 단숨에 삼키기 시작했다. 워낙 먹성이 좋은 녀석이라 순식간에 아이 머리통 크기의 심장 열 개가 미노의 부리 사이로 사라졌다. 그러고도 모자라 부드러운 살점 부위를 먹기 시작했다.
-이런! 심장 안에 뭐 이상한 것 없었니?
하룬은 마정석을 떠올리고 혹시나 싶어 물었던 것이다.
-이상한 것은 없는데, 왜? 혹시 불안한 상태로 만들어진 돌이 가지고 싶은 거야?
하룬은 미노가 말하는 것이 마정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 그것은 내가 필요한 거야.
-그건 머리통에 있어.
-혹시 머리통과 가죽들을 여기까지 가져올 수 있겠니?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룬은 미노가 열 마리의 사체를 한곳에 모아 단번에 두 발톱으로 움켜쥐자 할 말을 잃었다. 인간에 못지않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 처리가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말끔했던 것이다.
-자, 이제 가자!
-너희들 먹을거리는 어떻게 할 거니?
-어제 물소 한 마리씩을 먹었다. 앞으로 사흘은 먹지 않아도 된다. 대신 약속한 육포는 꼭 줘야 해.
-알았어.
그거야 쉬운 일이다. 밀과 보리 같은 곡류를 살 때 잘 훈제된 육포들을 재료별로 수십 자루씩 사 놓았던 것이다.
미노는 꽤 무거울 것으로 생각되는 아이콘라드 열 마리의 사체를 움켜쥔 채로 몇 번 껑충거리며 날갯짓을 하더니 단숨에 수니에게 날아올랐다. 미노와 수니는 공중에서 몇 차례 부리를 마주쳐 애정을 확인하더니 하룬 일행이 야영하는 곳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풀썩!
하룬은 동화가 풀리는 순간 중심을 잃고 앉은 자세에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왜 이러지? 아!’
생각해 보니 동화를 한 지 거의 한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싸가지가 매개가 되긴 했지만 동화 스킬은 정신력과 마나를 많이 필요로 하는지 급속하게 피로감과 무력감이 찾아왔던 것이다.
‘앞으로는 시간을 잘 조절해야겠구나.’
이런 상태에서 마수라도 맞이한다면 무척 위험해진다. 늘 자신을 지키던 딜런 경도 없는 상태라 더욱 위험했다. 잠시 의식을 마나 오션으로 돌려보니 거의 텅 빈 상태였다.
하룬은 조심성과 주의력이 떨어지는 자신을 자책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 마나 플로를 운용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텅 빈 마나 오션으로 대기에 가득한 마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코를 통한 호흡이 아니라 전신 피부를 통해서 마나를 흡수할 수 있는 상태가 된 하룬이다. 때문에 상체의 정중앙을 도는 마나플로의 속도도 눈 깜박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금방 비었던 마나 오션으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역시 마찬가지군.’
밤새 메신저 스킬을 수련했던 하룬은 어제 수련을 할 때 느꼈던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츠 평원에서는 흡수한 마나의 절반은 마나 오션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감지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오른손 손등의 표식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졌다.
마나 플로를 수십 번 돌린 후 마나 오션을 가득 채운 정순한 마나에 포만감을 느낀 하룬은 더 이상 마나를 축적하는 것을 포기하고 곧장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버처리비크를 기다렸다. 녀석들이 아득한 상공의 점으로 보였다가 금세 커지기 시작했다.
‘정말 무섭게 빠르군.’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샤키의 눈을 통해 마치 몸을 화찰처럼 만들어 공기저항을 극소화시켜 날아 내려오는 버처리비크가 보였다. 다른 때와는 달리 그 활약상을 똑똑히 봐서 그런지 녀석들의 모습이 더욱 늠름하고 멋있게 느껴졌다.
쿵! 쿵!
부드럽게 땅으로 내려선 녀석들에게 다가간 하룬은 미노의 수니의 목 아래를 쓰다듬어 주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을 해주었다.
“수고했다!”
꾸르륵! 꾸르륵!
녀석들은 하룬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듯 눈을 감고 부드럽게 목 아래를 쓰다듬는 손길을 즐겼다.
하룬은 미리 꺼내 놓은 육포를 잘게 찢에 녀석들의 입에 직접 넣어주며 미노가 챙겨 온 아이콘라드 시체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머리통이 짓이겨진 한 마리를 자세히 살핀 하룬은 뇌수 사이에서 손톱 크기의 마정석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간식으로 준 육포의 맛에 흠뻑 빠진 미노와 수니의 도움을 받아 아이콘라드의 머리에서 마정석들을 모두 찾아낸 하룬은 날개와 몸통 가죽만 남은 사체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미노, 수니. 가서 좀 쉴래 아니면 좀 더 먼 곳까지 날아볼래?”
-날고 싶다!
-나도 더 날고 싶어.
비행 본능이 강한 버처리비크들은 더 날기를 희망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좀 힘들 것 같아서…….
-뭐냐?
-말해라! 우린 할 수 있다.
미노와 수니는 자존심이 상한 듯 하룬을 노려보았다.
“데빌 산맥이 이렇게 생겼잖아.”
하룬은 땅바닥에 길쭉하게 누운 형태의 데빌 산맥을 그렸다.
“난 데빌 산맥 전체를 세밀하게 살피고 싶어. 그러니까 말이야, 이렇게 범위를 좁혀 가며 세 번 정도 정찰을 해줬으면 좋겠어.”
하룬은 땅바닥에 그린 데빌 산맥을 중심으로 세 개의 타원을 그렸다. 가장 큰 것은 데빌 산맥이 다 들어가도록, 그리고 나머지 두 타원은 그 범위를 좁혀서.
-그건 어렵지 않은데 시간이 걸린다. 지난번에도 이틀이나 걸렸다.
-맛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잡아먹지도 못했다.
녀석들은 지난번 헤르쉬가 부탁을 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시간은 관계없으니까 쉴 때 쉬면서 정찰만 해서 돌아오면 돼.”
-그럼 문제없다.
-여기는 향기로운 약초들이 많고 야들야들한 새끼들도 많아서 좋다.
“좋아. 그럼 목에 이걸 매어 줄게. 너희들이 나는 동안 아래쪽 풍경을 저장하는 거야.”
하룬은 헤드 캠을 꺼내 미노와 수니의 목에 달아주었다. 일전에 아레스에게 받은 것으로 연속해서 열흘까지 영상을 저장할 수 있는 최고급 헤드 캠이었다.
“위험하면 높이 올라가도 좋지만 되도록 지면과 가까이 날았으면 해. 가능하겠니?”
-우린 하늘에선 가장 세다!
-문제없다!
미노와 수니는 목에 건 헤드 캠이 성가신지 목을 몇 번이나 비틀면서 대답했다.
-갔다 오면 또 육포를 줄 거냐?
“그래, 주지! 지금보다 더 많이 줄게.”
꾸륵! 꾸륵!
미노와 수니는 육포를 더 준다는 소리에 신이 나 바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헤르쉬가 정말 큰 선물을 했군.’
버처리비크들이 아이콘라드를 잡는 것을 직접 목격한 하룬이다. 마수 열 마리를 순식간에 처리한 녀석들의 능력은 인간으로 치면 초인이라 불리는 소드 마스터나 6서클 마스터 경지의 마도사에 다름없었다.
헤르쉬야 포니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고 포니 역시 능력이 약해 미노와 수니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지만 하룬은 아니다. 비록 싸가지를 매개로 동화할 수 있는 형편이지만 자유로이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버처리비크들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그 활용은 무궁무진했다.
하룬은 어느새 점으로 변해 버린 미노와 수니를 잠시 눈에 담고는 일행들이 숙영하고 있는 곳을 향해 패스트 스킬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