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버처리비크의 합류 (173/278)

《버처리비크의 합류》

 하룬은 신전의 인사들을 쫓아낸 후 공연히 마음이 심란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장, 잘했소! 안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참이었소.”

 “그러게. 신관이면 신관이지 저들이 뭐라고 구해준 공도 모르고 식사까지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거야.”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물론이고 다른 대원들도 속이 후련한 표정이었다. 사실 빛의 신전이야 황실을 비롯한 귀족들이 주로 찾는 신전이다. 더구나 파코추 마탑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별다른 정치적 후견인이나 영향력이 없는 자유 마탑에 있었던 두 사람으로서는 만나거나 부딪힐 일이 없었다.

 “괜찮을까요?”

 마음이 약한 티노가 조금 걱정이 되는 얼굴로 딜런에게 속삭였다. 이제 티노에게 딜런은 하룬 다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제대로 된 검술을 가르쳐 준 스승이 아닌가.

 “괜찮지 않으면? 나 역시 레아 님을 믿긴 하지만 대장의 행동이 당연하다고 보네. 염치가 있어야지. 대장이 그냥 놔두었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았을 걸세.”

 그 말에 티노는 얼굴에서 근심의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활짝 폈다. 자신은 그저 하룬 대장이 하는 것을 믿으면 되는 것이다.

 “명심하게, 부대장. 우리는 의뢰를 수행하러 이곳에 온 것이지 다른 이들의 수발을 들기 위해 온 것이 아닐세. 대장의 말대로 배려를 받는다는 사실도 제대로 모르는 인간들에게는 더 이상 친절을 베풀 필요가 없는 걸세. 이 세상은 이제 신분 같은 것은 허울로 바뀌고 있네. 실력과 능력만이 그 사람이나 단체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니, 당당하게 행동하시게.”

 “알겠습니다, 딜런 경.”

 오랫동안 신분 사회에 길들여 온 티노, 그것도 가장 하층 신분이었던 노예로 태어나 험난한 삶을 살아왔던 그로서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난 자랑스러운 돌풍 용병대의 부대장 티노다!’

 티노는 입을 꽉 다물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런 티노에게 도네이스가 무한한 신뢰가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자, 우리 식사부터 합시다. 오늘은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할 것 같으니 식사를 한 다음 숙영할 준비를 하도록 하지요.”

 “네, 대장!”

 대원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물론 그 일의 대부분은 티노 부부와 마리, 그리고 헤니가 하고 있지만 하룬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 역시 바닥에 깔린 마수 카펫을 들고 나와 흙먼지를 터는 등 최소한의 할 일을 각자 찾아서 했다.

 이미 음식이 준비된 상태이기에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는 이 세계의 풍습처럼 고기 수프와 마법으로 데운 빵, 그리고 약간의 야채가 전부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지 식사는 여유롭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입이 짧고 식사량이 적은 타니엘라는 그사이 벌써 식사를 마치고 물을 가지러 밖에 나갔다가 왔다. 돌풍 용병대에서는 그 누구든 일방적으로 대접을 받기만 하는 이는 없었다. 나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필요하면 직접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타니엘라는 천막에 들어오면서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며 키득거렸다.

 “왜요, 사형?”

 “크크크! 식사 준비를 한다고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아서 말이야. 고귀한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파코추 마탑의 고위 마도사들과 황실 친위 기사단의 기사들이 직접 수프를 끓이는 모습을 내 생전에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크크크!”

 “정말요? 꿀꺽! 그런 재미난 구경거리를 사형 혼자만 보다니!”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빵 조각을 만지작거리던 미루스가 단번에 그것을 삼키더니 급하게 밖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미루스와 같이 움직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흐흐흐! 커억!”

 무슨 생각을 했는지 티노가 빵을 삼키다가 목에 걸려 컥컥거렸다. 막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던 타니엘라가 티노의 등을 두드려주며 실실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전염병처럼 천막 안으로 퍼져 금세 사람들의 얼굴을 입에 넣은 음식과 함께 기괴한 표정으로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클클클! 정말 진귀한 광경이야!”

 4서클 마법사인 프로스트야 가장 나이가 어리니 별 불만이 있을 리 없지만 다른 무리는 달랐다. 허드렛일을 할 이가 없으니 별 수 없이 그중 가장 아래 서열이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딜런이 타니엘라가 건넨 물을 마시고 하룬을 쳐다보았다.

 “대장,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할 겁니까?”

 신관들과 조우한 것은 물론 흑마법사들을 찾았으니 다음 행보가 궁금한 것이다. 흑마법사들이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근처에 놈들의 본거지 혹은 임시 주둔지가 있을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잠깐 기다려 보세요. 버처리비크가 곧 올 겁니다.”

 제국 정보 길드에서 급하게 처리할 일들을 마친 녀석들이 오늘 오후에는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오! 그 버처리비크를 제국 정보 길드에서 주었습니까?”

 고요의 땅에서 녀석들의 당당한 위용을 구경했던 사람들의 눈빛이 강해졌다.

 “준 것은 아니고 빌려 준 거지요. 아무튼 그 녀석들이 이곳에서는 큰 역할을 할 거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척후야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빠른 발을 가진 티노와 하룬이 있어 안심이지만 공중 정찰에 비할 바는 아니다. 더구나 알려진 대로라면 버처리비크는 시각은 물론 후각이 비행 몬스터 중에 최강이었다.

 “녀석들이 도착하면 정찰을 보내 길을 잡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냥 푹 쉬어도 됩니다. 물론 경계는 확실하게 해야겠지요.”

 “경계는 우리가 맡지요, 대장.”

 알람 마법은 물론 각종 트랩 설치에도 일가견이 있는 타니엘라와 미루스였다. 그들이라면 안심하고 잠을 청해도 된다. 거기에 하룬 역시 정령들로 하여금 경계를 부탁할 생각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 오늘 저녁부터는 개인 수련을 해도 되겠네요?”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레미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다른 대원들의 눈이 부담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 스켈레톤들과의 실전을 통해 새롭게 느낀 것들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응.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해.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카카카! 몸이 근질근질하다, 대장!”

 오늘 전투의 막바지에 자신도 모르게 세 가지 힘을 동시에 쓰게 되었던 옥세르가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당장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다른 대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무인에게 있어 실전은 중요했다.

 하룬은 미묘하게 표정이 바뀐 딜런에게 대원들의 수련을 부탁했다. 사실 누구보다 몸이 근질거렸을 딜런이었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도 임무로 인해 침묵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딜런 경이 좀 도와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힘의 수발이 자유로운 경지에 오른 딜런이라면 안심이다. 자신도 딜런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이제는 너무 위험했다. 정령들의 힘과 마수의 힘을 본신의 능력에 합치는 것을 연구하고 있는 그로서는 아쉬웠지만 예견할 수 없는 힘의 폭출暴出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정령들의 힘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마수의 힘은 자신의 것이되 아직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었다. 그 두 가지 힘을 본신의 힘과 합치는 것은 돌발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 시간을 두고 집중해서 수련을 해야만 했다.

 대원들이 막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하룬에게 뇌파를 통해 기이한 의지가 전해져 왔다.

 -친구, 우리 왔다!

 -나도 왔다!

 하룬은 대번에 그것이 버처리비크들이 보낸 의지임을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은 비록 조류 혹은 몬스터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뛰어난 영성靈性을 가지고 있어 뇌파를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지?

 -안다!

 -그럼 내려와! 맛있는 육포를 준비해 두었어.

 -맛있는 육포다!

 육포라는 말에 두 녀석의 뇌파는 바로 끊겼다. 배가 고팠던지 그도 아니면 일전에 길들였던 입맛으로 인해 회가 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룬은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갔다. 아득한 하늘 저편에 까만 두 점이 보였는데 금세 크기가 커지고 있었다.

 천막과 약간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하룬은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서는 버처리비크를 볼 수 있었다. 녀석들은 반가웠는지 거대한 두 발로 깡충거리며 하룬에게 뛰어왔다.

 “녀석들! 잘 있었냐?”

 하룬은 자신의 목까지 오는 거대한 덩치들의 목 아래쪽을 쓰다듬으며 녀석들을 반겼다. 그런 하룬에게 녀석들은 그의 상체를 강철과 같은 부리로 가볍게 쪼거나 비비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먼 거리를 날아온 듯 깃털 몇 개가 빠지려는 것을 본 하룬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 미리 준비한 작은 육포 포대를 꺼내 녀석들에게 하나씩 물려 주었다.

 버처리비크는 다른 맹금류처럼 아래쪽으로 약간 구부러진 부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부리 안쪽에 날카로운 이빨들이 나 있어 씹을 수도 있었다.

 한번 먹어본 이후로 각종 향료와 소금을 제대로 훈제시킨 육포는 버처리비크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오죽하면 하룬이 부러웠던 헤르쉬가 그 육포를 창고째 주문해서 녀석들과 조금은 친해졌다.

 “많이 먹어라!”

 하룬은 굳이 육포를 한 조각씩 녀석들에게 먹였다. 단순히 먹이를 주는 행위였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던 것이다. 바람을 닮은 녀석들의 기운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거니와 하늘의 제왕다운 기품과 자유로움이 느껴져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다.

 “대장! 여기 물 가져왔어요!”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헤니는 버처리비크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든 한번 만져보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아직 겁이 나서 그런지 멀찍이 물이 담긴 그릇을 놓았지만 놈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대원들이 모여 있었는데 아카족 출신 대원들의 눈은 그야말로 찢어질 것처럼 커진 상태였고 티노는 뭔가 열심히 그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아직도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마탑과 황실 그리고 빛의 신전 사제들이 경악한 얼굴로 일손도 놓은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도 마셔 가면서 먹어라!”

 끼익! 끄르륵!

 버처리비크들은 하룬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헤니가 내민 큰 물그릇에 부리를 담그더니 목을 뒤로 넘겨 물을 마셨다. 그러곤 다시 하룬의 손으로 부리를 들이댔다. 아직 부족한 것이다.

 헤니가 살금살금 버처리비크 암놈에게 접근하더니 풍성한 깃털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찌릿!

 놈은 노란 눈으로 헤니를 한번 노려보았지만 헤니는 작심을 했는지 손을 떼지는 않았다.

 “진정해! 헤니는 너희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너희들이 목이 마를까 봐 물도 가져다주었잖아.”

 하룬의 말에 암컷 버처리비크가 헤니의 손길을 허락했다.

 -친구처럼 좋은 인간이고 좋은 약초 향기가 나서 참는 거야.

 오만한 눈빛이었지만 사나운 기운은 많이 사라졌다. 하룬은 헤니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환한 웃음을 지은 헤니가 조심스럽게 버처리비크의 깃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미를 비롯한 나머지 대원들이 하나씩 다가왔다.

 “정식으로 인사하자! 여기 있는 이들은 내 가족이야. 이분은 딜런이라고 하는 엄청난 검술을 가진 어른이야. 그리고 이분은 타니엘라, 저분은 미루스인데 무려 6서클에 달하는 마법 실력을 가진 분들로 어린 대원들을 보살펴주고 계시지.”

 하룬은 마치 버처리비크가 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대원을 1명씩 제대로 소개해주었다. 녀석들의 벽록색 눈동자는 빛을 내며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개한 사람을 향해 이동했다.

 그렇게 모든 대원들의 소개가 끝나자 하룬은 두 버처리비크를 대원들에게 소개했다.

 “이 녀석들은 나와 친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과도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당한 영성을 가지고 있어 비록 언어로는 대화할 수 없지만 마음이 통하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번에 우리 일을 돕기 위해 헤르쉬가 특별히 이 친구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난 하룬은 뭔가 허전한 것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영성을 가졌으니 이름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 그런데 너희들 이름은 있냐?

 -우리끼리 부르는 것은 있지만 인간의 이름과 같은 건 없는데. 그 여자가 쪼그만 정령을 포니라고 부르는 것은 들었지만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어.

 -음, 그랬구나.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주면 어떨까?

 하룬의 말에 녀석들의 눈동자에 기쁜 빛이 일렁였다.

 -이름이 있으면 편하기는 하겠다.

 -그럼 넌 수컷이니까 미노라고 부를게. 그러고 넌 암컷이니까 수니라고 부르자.

 -좋아! 난 이제부터 친구에게는 미노다.

 -난 수니야.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하룬은 녀석들의 눈빛 속에서 만족감을 읽을 수 있었다.

 “얘는 수컷으로 미노라고 하고, 이쪽은 암컷으로 수니라고 합니다.”

 미노는 수컷답게 체고가 더 높은 것은 물론 전체적으로 강인한 모습이었고 수니는 미노에 비해 날렵한 모습이었다. 외관으로는 미노가 깃털 색도 밝고 광택이 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

 딜런이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반갑다! 난 딜런이다.”

 버처리비크들은 딜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를 감지하고는 그가 내민 손에 부리를 비볐다.

 “육포도 한번 주시지요.”

 엄청난 체구의 버처리비크가 자신의 손에 큰 부리를 비비는 것에 묘한 눈빛을 한 딜런이 하룬에게 전해 받은 육포를 몇 조각을 찢어 녀석들에게 건넸다. 미노와 수니는 그 친절을 받아들여 하룬에게 육포를 받아먹을 때처럼 날름 육포를 받아먹었다.

 다른 대원들도 1명씩 인사를 하며 선물로 육포를 손수 먹여 주었다. 버처리비크들 역시 인사인 듯 큰 부리를 대원들의 손바닥과 손등에 비비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정말 당당하고 멋진 자태를 가지고 있어. 너무 멋있어!”

 “그렇지? 난 한눈에 반했어.”

 레니는 헤니와 같이 미노와 수니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연방 녀석들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가벼운 장난까지 칠 정도로 수니와 미노는 대원들과 친근해졌다. 녀석들은 대원들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확실하게 허락했다.

 “부리와 발톱의 강도가 날개 근육의 밀도나 강건함으로 볼 때 하늘의 제왕이 확실하군요.”

 딜런의 말에 하룬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와이번과 싸워도 이길 것 같은데.”

 한동안 딜런이나 타니엘라와 함께 녀석들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던 미루스의 말에 타니엘라가 눈을 흘겼다.

 “와이번? 헤엥! 넌 몬스터 대전집도 못 봤냐? 거길 보면 하늘에서는 버처리비크를 상대할 존재가 아예 없다고 나와있어. 녀석들은 벼락을 맞고도 멀쩡한 것은 물론 정령까지 부린다더라.”

 “그런가? 그 책 뒷부분은 거의가 다 상상 속의 몬스터들만 나와서 신경도 안 썼는데.”

 타니엘라와 미루스의 대화를 듣던 하룬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령까지 부린다는 말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벼락을 맞고도 멀쩡할 리 없었다. 다만 직격을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와이번을 어렵지 않게 상대한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파악한 미노와 수니의 능력이라면 와이번에게 절대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벌써 육포 자류가 열 개나 풀렸다.

 하룬은 녀석들에게 의사를 전했다.

 -피곤할 테니 가까운 곳에 가서 쉬고 있어.

 -알았다!

 수니의 의사가 전해졌지만 미노는 여전히 육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생긴 것은 하늘의 제왕답게 당당한 풍모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 식탐은 엄청 많았다. 암컷 수니는 헤니를 비롯한 대원들에게 육포를 받아먹으며 자신의 깃털을 만지는 것을 용인하고 있는 미노를 사나운 눈빛으로 한번 쏘아보고는 날개를 펄럭였다.

 -내 의지는 어느 정도 거리에서 들을 수 있어?

 -친구의 능력이라면 어디라도 가능해. 우린 날아올 때 보아둔 가까운 숲으로 갈 거야.

 -그래, 가서 쉬어!

 쿠르르르!

 수니가 부리를 열고 목소리를 내자 한창 육포 받아먹는 재미에 푹 빠졌던 미노가 정신을 차리고 수니를 바라보았다. 수니는 화가 났는지 미노를 쳐다보지도 않고 날개를 펼쳐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고, 미노는 그녀를 따라 황급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정말 근사해요!”

 헤니와 레미는 금방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가는 웅혼한 자태의 버처리비크를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 함께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이 눈 속에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던 딜런이 하룬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국 정보 길드에서 큰 힘을 주었군요.”

 “그렇습니다. 저들이라면 정찰은 물론 공중 몬스터에 대한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이종족도 아닌 미물이 인간에 비견될 영성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고도 깊군요.”

 소드 마스터에 오른 후 딜런에게 비친 세상은 그 전의 단조롭고 틀에 박힌 것이 아니었다. 신비하고 두렵기까지 한 세상이 그에게 두려움과 함께 호기심과 열정을 주고 있었다.

 “맞아! 한 단계가 올라갈수록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경이로움에 감탄하곤 하지.”

 “이래서 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겠지요.”

 네 사람이 그렇게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두르본과 레미가 다가왔다. 다른 대원들은 이제 점으로 변해가는 버처리비크를 여전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장! 그 새, 강하냐?”

 그렇게 묻는 두르본의 눈에는 호기심과 함께 하룬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했다.

 “강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는 최강이다. 와이번도 하늘에선 저놈들을 당할 수 없지.”

 타니엘라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하룬 대신 대답을 하자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잘됐다! 저 새들이라면 바이칼족의 수호조인 스카이비클도 도망칠 거다. 이제 아카족은 바이칼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두르본의 말에 하룬의 눈빛이 강해졌따.

 “바이칼족?”

 “산맥 동쪽의 고산지대에 사는 종족이에요. 와이번의 반 정도 덩치에 기질이 사납고 날카롭고 강련한 부리와 발톱을 가진 스카이비클을 부려 우리처럼 마수들을 사냥하지요.”

 레미의 말에 하룬의 눈이 커졌다. 악마의 땅이라고 불리는 데빌 산맥에는 하룬의 단순한 생각처럼 아카족만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왜 진작 묻질 않았지?’

 전이라면 관심이 없어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이곳에 올 것이 결정된 후에는 정보 수집 차원에성라도 데빌 산맥에 대한 것을 대원들이 된 아카족 전사들에게 물었어야만 했다. 하룬은 자신의 실수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긴!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데빌 산맥에 아카족 말고 다른 인간들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룬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데빌 산맥에 거주하는 인간들은 레미가 말한 이들이 다야?”

 “아니에요. 산맥 중앙에 있는 벨제라트 암흑지대를 제외하고는 수천에서 수만에 달하는 12개의 부족이 각기 영역을 정해 흩어져 살고 있어요. 산기슭의 평탄한 곳에는 치투족이 목책으로 두른 카르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우리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드워프들과 엘프들도 우리 인간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곳에 결계를 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해요. 또 호인족이나 묘인족과 같은 수인족들도 있어요. 그들과 부딪히면 서로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요. 모두 마수를 상대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인간이 살기 힘들어 보이는 험지에, 이렇게 많은 인간들과 이종족들이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보면 후크란 산맥보다 더 위험한 지역인데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문명을 거부하고, 위험한 자연환경에 때론 순응하고 때론 도전하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하룬은 인간의 위대함을 잠시 느낄 수 있었다.

 하룬의 두 눈은 멀리 보이는 길고 높은 데빌 산맥을 향했다.

 ‘저곳은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이야! 그곳에선 또 뭐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위험천만한 지형들과 기후, 무시무시한 마수들과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지만 하룬은 왠지 기대가 되었다. 확실히 위험하거나 두려운 일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거나 숨으려고 했던 예전의 나약했던 심성은 사라진 것 같았다.

 ‘내가 왔다, 데빌 산맥이여! 네 생생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줘봐!’

 하룬의 눈에서 눈부신 광망이 터져 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미리 준비한 딱딱한 빵과 육포로 대충 식사를 한 세르파와 일룸이 건너왔을 때는 돌풍 용병대원들은 이미 모든 야영 준비를 마치고 자유 수련을 하러 나가고 하룬만 혼자 남아 있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의례적인 하룬의 인사에 세르파와 일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놀리는 것으로 생각돼서 심기가 상했던 것이다.

 “귀한 분들이니 떠나기 전에 황실과 마탑에서 철저히 준비를 해주었을 텐데 그 생각은 못하고 보잘것없는 용병들의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이 걸렸었습니다.”

 “아, 그게…….”

 두 사람은 진심이 가득한 하룬의 눈빛을 대하곤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쩌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기가 막혔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명색이 마도사들이고 친위 기사단의 부단장이 포함되었으니 파코추 마탑과 황실에서는 제대로 준비를 해주기는 했다. 다만 그 음식들을 제대로 조리하거나 각종 준비물을 설치하고 거둘 요리사와 시종들이 동행하지 않은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어느새 세르파의 말투는 무척 정중해졌다. 하룬을 대하는 시간들이 늘어날수록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는 하룬의 성격이 찍어 누르려고 할수록 더 강하게 반응하는 유형이라는 것응ㄹ 파악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성심을 가지고 대하면 그대로 돌려주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은 마탑 조사대의 행방을 추적할 생각입니다. 비록 오래되긴 했지만 그 일을 위해 후각과 시각이 무척 뛰어난 버처리비크를 데리고 왔으니 조사대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을 겁니다.”

 “아!”

 두 사람은 아까 오후에 보았던 버처리비크를 기억해 냈다. 버처리비크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는 호기심이 있어도 차가운 돌풍 용병대원들의 태도에 말을 붙여 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새가 버처리비크였군요. 정말 하늘의 제왕이라는 이름답게 당당하고 위엄이 넘치는 풍모를 가지고 있더군요.”

 “네. 생각대로라면 마탑의 의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불행한 일이 없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야지요.”

 희망을 잃지 않는 하룬의 말이지만 세르파는 조사대가 생존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신성력에도 견디는 스켈레톤들과 거대한 흑마법진, 그리고 모습까지 감추고 있었던 흑마법삳르을 직접 눈으로 본 후론 그 희망을 버렸다.

 “우리 쪽의 일은 언제 시작할 거요, 대장?”

 일룸이었다. 그는 진작부터 묻고 싶었지만 참고 있다가 이제야 질문을 던졌다.

 “그 일은 조금 더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다른 대원들이 마츠루트 요새 근처에서 조사를 하고 있으니 곧 단서가 나올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마츠루트 요새라면…….”

 일룸은 위명이 자자한 돌풍 용병대가 여기 있는 인원들이 전부일 리는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기에 다른 대원들이 따로 조사를 하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츠루트 요새라는 소리에 눈이 가늘어졌다.

 “신 테론 제국과 미노 제국에도 이상한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알려드릴 수 없지만 상당히 심각한 일인데 묘하게도 이 모든 사건이 서로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조만간 그곳으로 가서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저…… 신전의 인물들을 돕지 않을 겁니까?”

 하룬은 이제야 이 두 사람이 왜 자신을 다시 찾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하룬이 태도 변화를 할 것을 권유하러 왔던 것이다.

 조금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빛의 신전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한동안은 치료와 휴식을 취하느라 꼼짝도 하지 않다가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데 기본적인 천막을 치는 것에도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은 물론 식사 준비도 제대로 되자 않아 밖이 캄캄해졌는데 아직 식사도 못하고 있었다.

 “저희가 도울 이유라도 있습니까?”

 말을 꺼낸 일룸은 물론이고 한발 물러나 있던 세르파의 얼굴에도 식겁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하룬이 화를 낸 잉가 성자의 오만한 태도와 무시하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하고 금방 풀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설마 고귀한 사제들을 대상으로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흉악범들도 사제들을 공경하고 존중하거늘 이럴 수는 없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질수록 신전의 권위는 점점 더 올라갔던 것이다.

 “그들은 레아 님을 모시는 이들입니다. 레아 님은 강력한 신성력으로 오랫동안 제국민들의 추앙을 받아 왔습니다.”

 “그랬습니까? 그런데 왜 난 레아 님의 은혜로움을 경험한 평민들에 대해서는 주변에서 들어 본 적이 없을까요? 대지의 신인 미요스 님의 경우는 죽음의 사자를 세상에 내보내, 보잘것없는 삶을 사는 가엾은 자들을 괴롭히고 살해한, 산적으 가장한 흉악한 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성의 노리개로 삼는 악독한 자들을 처단했는데, 레아께서는 대륙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엾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그, 그건…….”

 일룸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끝내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어도 말할 자격도 없거니와 다른 반론의 근거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이 일에서 발을 빼기로 작정한 세르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레아를 믿는 빛의 신전은 황족을 비롯해서 귀족들과 기사들이 주로 찾았다. 빛은 고귀함의 상징이며 빛의 신인 레아를 믿는 것은 자신이 고귀한 이라는 믿음을 주었던 것이다.

 “난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만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난 일룸 경과 같이 빛의 신전에 대한 경건한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레아 신이라면 몰라도 기부금이 없으면 쉽게 신성력을 베풀어 주지 않는 탐욕에 찌든 신고나들은 내가 존중할 대상이 아닙니다.”

 태생이 귀족인 일룸은 하룬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성력은 남발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만약 빛의 신전이 그 신성력으로 평민들까지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다면 신관들은 제대로 살 수 없었을 겁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이들입니다.”

 “그럼 존중하는 사람들이 도우면 되겠군요. 레아 신을 믿든 아니든 그들은 저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믿는 대상이나 그 대상으로 인해 얻은 놀라운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들 자체가 고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저희와 똑같이 먹고 자고 배설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존중을 받으려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난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수행하고 안내했던 그 수많은 용병들과 시종들의 죽음을 방치한 것만으로도 그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휴우!”

 일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단호한 하룬의 태도에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하룬의 말은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신관들이 제대로 힘을 썼다면 그 많은 용병들이 모두 죽지는 않았겠지.’

 무력이 없는 시종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용병들이 몰살을 당한 것은 저 빛의 신전 일행들이 어느 정도 방치한 탓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 수련을 할 참입니다. 따로 할 이야기가 더 없으면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세르파가 먼저 나가자 그 뒤를 따라 일룸이 당황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조차 이번 일로 신심이 흔들렸던 것이다. 한없는 자애로움과 세상을 환하게 빛내겠다는 빛의 신전이 한 일치고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하룬은 천막을 나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천막에는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남아 다른 마법사들과 오늘 경험한 흑마법진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학파와 상관없이 자유로이 토론을 하는 것을 보면 마법사들이란 참 열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티노와 아카족 대원들은 오늘 낮에 스켈레톤들을 상대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수련을 통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딜런이 그들을 지도했다. 마수의 힘은 잘 모르지만 싸우는 것에 있어서는 개개인의 단점ㅇ르 지적해주고 개선할 방향을 깨닫게 해줄 능력은 차고도 넘치는 딜런이었다.

 도네이스와 마리는 오러 궁술을 수련했다. 오러 궁술은 화살이 필요 없고 그 활용이 무궁무진했기에 궁사들에게 있어서는 궁극의 스킬이다.

 레미와 헤니는 아까 현장에서 가져온 스켈레톤의 뼈를 대상으로 뭔가 실험을 하고 있었다. 치료사의 길을 걷는 헤니와 자연 치료술을 익힌 레미는 처음 만난 이래로 마치 자매처럼 붙어다녔다.

 “헤니!”

 “네, 대장.”

 “겨루에게 통신을 해봐.”

 자신이 해도 되지만 그들 간에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다. 헤니라면 잘 정리해서 용병대의 사정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겨루와 방커가 처한 상황을 잘 파악할 것이다.

 “알았어요. 그렇잖아도 걔들 사정을 마리가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하룬은 두 사람에게 몇 권의 책을 내밀었다.

 “이건 가츠 노인과 그 친구분들이 수십 년 동안의 임상 경험을 가미해서 저술한 약초학 책들이야. 잘 연구해 보면 힘 없고 돈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많은 지식들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정말요?”

 “어머! 이런 귀한 책을…… 고마워요, 대장!”

 새로운 치료 스킬에 목이 말랐던 헤니나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던 레미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바로 이 약초학 책들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장 가서 봐야겠어요!”

 “같이 가, 레미!”

 두 사람은 하룬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서둘러 자신들의 천막으로 향했다. 그녀들은 천막도 같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룬은 두 사람을 미소를 지은 채 잠시 보다가 메신저 워킹을 발휘했다. 금세 발바닥을 통해 마나가 흡수되기 시작했다.

 ‘흠. 마나의 성질이 이상한걸.’

 확실히 이상했다. 본래대로라면 발바닥으로 흡수된 마나가 허벅지를 거쳐 마나 오션으로 향하는데, 마나 오션으로 가는 것은 흡수된 것의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절반 이상이 배출되지 않고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많은 마나 중 상당수가 마나 오션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고관절 부위를 지나치면서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몸 밖으로 나간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왜 이러지? 이곳이 흑마법진이 펼쳐졌던 곳과 가까워서 그런가?’

 아까 흑마법진 안에서 본능적으로 메신저 스킬을 펼쳤을 때와 거의 비슷한 현상이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자세하게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금과 비슷했었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메신저 워킹 스킬을 펼치며 빠르게 걷던 하룬의 발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손 손등에 꽂혀 있었다.

 ‘뭐지? 설마 이곳으로?’

 흡수된 마나의 절반은 그 흐름을 느낄 수 없었기에 정확한 경로는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른손 손등의 기묘한 표식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하룬은 지금 흡수하는 마나가 그 표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슴 어름에서도 묘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던 것이다.

 ‘어! 이건 어둠의 비수?’

 어둠의 비수는 암기 벨트의 가장 위쪽, 즉 심장 어름을 가리는 자리에 꽂혀 있었다. 그 어둠의 비수로부터 익숙하지 않은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경로는 감지할 수가 없었다. 다만 오른손 손등의 표식이 급속도로 커지고 선명해지는 것이 그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룬은 워킹을 멈출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 마음ㅇ르 접었다.

 ‘분명히 뭔가 다른 힘이 잠들어 있어.’

 죽음의 사자를 가장했을 때도 경험했었다. 자신이 죽인 자들로부터 붉은 기운이 솟아나와 오른손 손등의 표식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다만 그 흡수되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그의 주변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더욱 신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호기심이 더 강했다.

 ‘어쩌면 이 힘과 내 외모가 변하는 것이 관계가 있을지 몰라.’

 하룬은 자신이 극도의 분노를 느끼면 머리 위로 세 개의 뿔이 솟아나는 것이나 눈이 붉어지는 것이 이것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둠의 비수가 흡수한 마나는 다크 마나일 텐데.’

 이상했다. 본래 다크 마나는 다른 마나를 배척하는 성질이 강해 상존할 수 없다고 지혜의 파편에도 나와 있었다. 물론 마나 오션의 마나와 섞이는 것은 아니니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이상하긴 했다.

 하룬은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 기묘한 기운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묘하게도 친숙한 느낌을 가진 기운이다. 언제 그 모습을 자신의 의지로 표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룬은 메신저 스킬을 포함해서 각종 검술과 비도술을 차례로 수련했다. 위험한 곳에 들어온 이상 가진 능력을 더 능숙하게 수련하는 것은 물론 그 경지를 올려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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