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빛의 신전 (172/278)

<빛의 신전>

"파코추 마탑의 마도사 세르파라고 합니다. 성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세르파 마도사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성자 예힘은 반갑게 세르파를 맞이했지만 성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 태도에 무시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세르파의 미간이 조금 꿈틀했다가 가라앉았다. 본래 신관들이 마법사들을 꺼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무시를 당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휘의 신전, 아니 빛의 신전 사제분들께서 이런 곳에 웬일이십니까?"

 너무 직설적인 질문이었을까? 성자는 즉답을 피하고는 잠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성녀께서는 신성력을 과도하게 사용하신 여파로 지금 사람들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혹여 마음이 상하셨다면 푸시기 바랍니다."

 단정히 앉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성녀에게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세르파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은 풀렸다.

"설마 그런 불손한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쉬시는 데 방해를 한 것 같아 오히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잠시 대화가 멈추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빛의 신전 사제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보기가 힘든 사제들을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다. 특히 빛의 신전을 대대로 황제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그 교세를 엄청나게 확장한 것으로 유명한 신전이었기에 호기심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세르파가 다시 던진 질문에 성자의 얼굴에 얼핏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저희는 신 테론 제국에 건립되고 있는 새 신전의 봉헌식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세르파 역시 그 정보를 알고 있기에 사정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이곳에서 흑마법사들의 습격을 받은 거지요. 여러분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성자가 다시 감사 인사를 하자 돌풍 용병대원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기쁜 얼굴이 되었다. 하늘과 같은 신전의 사제들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받으니 조금은 감격한 것이다.

 그때 일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희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존귀하신 분들께서 대낮에 사악한 흑마법사들에게 핍박을 받다니,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오!"

 성자가 감탄사를 터트리며 눈을 크게 뜨자 일룸을 비롯한 황실 인사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사실 한 것도 별로 없어서 조금은 계면쩍었지만 신전 사제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흑마법진에 빠지신 겁니까?"

 세르파는 빛의 신전 사제들이 흑마법진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큰 어려움에 봉착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성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50명에 달하는 호위 용병들과 시종들로 구성된 인원으로 신 테론 제국을 향해 길을 나섰다고 했다. 그런데 마츠 평원에 들어선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매일 한두 명씩 특별한 이유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용병들은 조사를 하자고 했지만 갈 길이 멀고 시한이 급해 조사를 하지 못하고 길을 서두르던 차에 어제저녁, 언제나 그렇듯 사제들이 기도를 하던 중에 식수를 구하기 위해 수로로 향했던 시종 몇 명이 실종되어 버렸다.

 그 시종들 때문에 용병들이 찾으러 나섰지만 그들마저 소식이 없자 용병들이 절반 이상 움직였다. 그러곤 결국 그들 역시 돌아오지 않자 나머지 용병들과 사제들이 사라진 자들을 찾아 나섰는데 흑마법사들은 간악하게도 함정을 파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럼 용병들과 시종들이 흑마법진의 제물이 된 거군요."

"그렇습니다. 불쌍한 분들이지요."

 그 말과 함께 성자는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흑마법사들에게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그 자애로운 마음에 찬사를 보냈지만 하룬은 성자의 눈빛이 슬픔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지?'

 샤키의 눈을 활성화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성자가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성자의 눈빛에 떠오른 감정은 슬픔하고는 무관했던 것이다.

 종교가 없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하룬은 파코추 마탑 사람들과 황실 사람들이 빛의 신전 사제들에게 보이는 무조건적인 추앙과 존경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성자의 눈에서는 말과는 다른 감정을 읽게 되자 막연히 품고 있던 사제에 대한 선입관까지 깨지고 말았다.

"아마 여러분들이 도와주지 않으겼다면 저들의 손에 고귀한 성녀님의 옥체가 상하게 되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성자는 모두에게 두손을 모은 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성자도 계시고 성녀까지 계신데 설마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정말 위험했습니다. 신성력을 견디는 스켈레톤은 신앙심으로 단단하게 정련된 저희 성기사들도 힘겨운 상대였습니다. 대체 누가 그런 괴물들을 만들었는지, 더구나 상대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법진에 빠진 터라 시간이 갈수록 지칠 뿐이었습니다."

 성자의 속직한 말과 태도에 사람들은 무척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성자로 추앙하는 존귀한 이에게 감사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얼굴에는 성자 일행에 대한 존경심이 떠올랐다.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행동을 몇 번에 걸쳐 거듭 감사를 표명하는 성자의 태도에 감명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하룬은 다른 사람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비록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신관과 성기사들이나 성자 본인은 그렇게 까지 위험한 상태를 아니었다.

'마지막 힘은 남겨 두었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 신전에 소속된 신관들 중 가히 최상위 인물이랄 수 있는 성자와 성녀가 이끄는 성기사단이다. 노신관들도 그렇고 성기사들의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신성력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 힘이 일반적인 마나와는 궤를 달리한다고 지혜의 파편은 말했다. 신심信心의 강도와 신과의 소통 능력에 따라 신성력은 한순간에 채워 질 수 있다고도 했다.

 포션을 마시는 경우를 제외하곤 마나를 채우는 데 반드시 시간이 필요한 것에 반해, 신성력은 정신적인 힘의 일종이라 시간과는 무과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성자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위험하지 않은 상태였을 가능성이 더 컸다.

 하룬은 도와주고도 사제들에게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마탑 사람들과 황실 사람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자신들을 낮추는 거지?'

 종교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하룬이라서 그런지 그는 신관이나 성기사들에 대해 여하한 존경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종말 전쟁의 배후에는 세상의 모든 인간을 개종시키려고한 종교의 그림자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하룬은, 오히려 종교에 대해서는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대화의 주체는 성자와 세르파 그리고 일룸이 되어 돌풍 용병대원들은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가 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일룸은 빛은 신전의 열성적인 신자였다.

'후후!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군.'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성자는 처음에 하룬에게 감사 인사를 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관심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 자리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면 성자치고는 자격 미달이군.'

 어쩌면 용병은 하룬이 이 일행의 주도자인 것을 짐작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하룬은 한동안 방관자가 되어 사람들을 누여겨볼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거슬리는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기사들과 신관들 그리고 성녀가 대화에 끼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신성력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성녀나 다른 사람들의 상태는 이미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역시 이상해!'

 하룬은 눈을 감고 있는 성녀를 흘끔 처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룬의 시선을 감지한 듯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분명히 주변 상황을 의식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자라는 이름치고는 너무 떠버리로군.'

 미끈한 얼굴에 밝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 성자지만 일반적인 시각에서 존귀한 인물로 보기에는 말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성기사들보다 무게감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나 할까? 게다가 대대로 앙숙처럼 지내는 마법사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성자의 모습은 좀 이질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흑마법사들의 폐해를 거쳐 많은 사람들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세상을 망치게 한다는 것에까지 이르렀지만 마탑과 황실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성자와의 대화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총교 각하께서 친히 저를 부르셔서 부탁을 하신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성자께서 신심이 가득한 성기사분들과 같이 오셨으니 악의 무리도 이제는 꼬리를 말고 물러서게 될 겁니다."

"암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저희가 그렇게 되도록 할 겁니다."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마탑과 황실 사람들은 성자의 말에 혼을 뺏긴 것 같았다. 제국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악의 상징인 흑마법사들을 없애는 데 앞장서겠노라고 입에 거품을 물 정도였다.

"그런데 식사는 안 하시나요?"

 성자는 배가 고픈 듯 슬쩍 물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성자에게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룬에게로 향했다.

 하룬은 반사적으로 천막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대원들 중에서 티노를 쳐다보았다. 티노의 고개가 살짝 끄덕이는 것이 이미 식사는 준비된 상태였다.

'이런, 제길!'

 하룬은 갑자기 자신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원들의 얼굴에는 아직도 전투의 후유증이 짙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휴식을 취해야 할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군요. 저희도 이제 휴식을 취하고 식사도 해야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기운을 차리신 것 같은데, 이제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하룬의 말에 성자를 비롯한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명백한 축객령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 하룬 대장! 어, 어떻게 그런 말은...... 이분은 존귀하신 성자시란 말이오!"

 하룬의 의도를 알아들은 일룸이 당장에 소리를 질렀다.

"맞소, 존쉬하신 분들에게 식사 대접은 당연한 일이오, 안 그래도 흑마법사들을 상대하느라 지치신 분들인데 식사는 당연히 우리가 준비를 해야지."

 세르파까지 나섰다. 다른 사람들 여기 분개한 얼굴로 하룬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 자신이 무시받은 것처럼 흥분한 얼굴들이었다.

"그렇게 대접을 하고 싶으면 댁들이 하면 되겠군요. 난 신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하룬은 그들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 무슨 그런 소리를."

"하룬 대장! 보자 보자 하니까!"

 당장에 마탑과 황실 인물들이 황당함과 함께 눈을 부릅뜨며 노화를 드러냈다. 그리고 잘생긴 성자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하룬의 눈빛이 갑자기 강렬해지며 당장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천막내부로 퍼져 나갔다.

"난 성자 일행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은 적이 없소. 오히려 나와 우리 대원들이 저들을 도왔소. 그런데 지금 상황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소? 정상적이라면 나와 내 대원들이 저들에게 식사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요. 왜 나와 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도와준 이들을 위해 유식할 자리를 빼앗기고 거기에 식사까지 대접해야 하는거요?"

 하룬의 살벌한 기세와 틀리지 않은 말에 잠시 주눅이 들었지만 일룸은 여전히 소리를 높였다.

"그, 그건...... 이분들은 빛의 신전에서 나오신 고귀한 분들이란 말이오!"

"신분제가 폐지된 마당에 존귀한 사람이 따로 있을 수는 없소. 있다면 황제 폐하 정도일 뿐."

 그 말에 일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룬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파이런 제국의 황제나 황녀는 이전의 황실 인물들과는 다르게 신전에 대해 그리 조눚ㅇ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귀족 출신 인사들의 불만 사항 중 하나였다.

"그래도 위대한 신을 모시는 분들에게 휴식할 자리와 한끼의 정성스러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오."

기세가 꺾이긴 했지만 일룸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당연한 일이면 당신들이 하면 되겠군. 나와 같은 용병들에게는 한 번도 그 은혜를 보인 적이 없는, 항상 귀족들만 상대하는 고귀한 신전이나 신관들은 내 믿음의 대상도 아니거니와 존중을 할 이유도 없소. 더구나 자신들을 도와준 이들에게 당연하다는 듯 식사를 요구하는 태도를 보니, 내 눈에는 빛의 신전 사제들은 전투에 지친 우리 대원들이 쉴 자리를 차지하고 식사까지 대접받으려는 자들로밖에는 보이지 않소."

 하룬의 말이 불경하기는 했지만 딱히 틀리지 않은 터라 일룸의 얼굴은 당황한 표정으로 변해 갔다. 세르파를 비롯한 마법사들 역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 하지만......"

"그렇게 대접을 하고 싶으면 당신들이 하면 될 거 아니오. 저분들은 존중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니 말이오."

 하룬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한번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명심하시오! 당신들은 우리의 동행일 뿐, 동료나 상사가 아니오. 안 그래도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잘됐군. 이제부터 숙영하는 것과 음식은 알아서 챙기시오. 우린 당신들의 시중이나 들어주려고 이 멀고 험한 곳까지 오지 않았으니까. 지친 우리 대원들이 쉬면서 식사를 해야 하니 당장 모두 나가주시오!”

 “……이익!”

 일룸은 화가 났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룬의 말이 그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돌풍 용병대원들이 자신들의 잠자리와 식사를 챙겨준 것도 사실이고, 굳이 따지면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들은 의뢰자에 속해 있으니 돌풍 용병대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에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시오. 의뢰자들에게 연락을 할 테니까. 그들 역시 귀하들과 같은 생각이라면 당장이라도 의뢰를 파기하겠소.”

 하룬의 단호한 말에 세르파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또 저자의 더러운 성깔을 건드렸구나!’

 불만이 있더라도 감히 이런 일로 마탑에 연락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 마탑주의 불호령이 떨어질 판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알아본 하룬은, 전대 마탑주나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아그레시아 전대 황녀와도 단단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생각해 보니 하룬의 말이 구구절절하게 맞았다. 일룸과 같은 작자들이라면 몰라도 마법사들과 신전은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가 아닌가? 자신과 동료들이 성자와 성녀라는 이름에 현혹된 것이 부끄러웠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제 이들의 영화도 파이린 제국에선 끝이다.’

 정치 세력과 결탁한 이들은 배후의 세력이 무너지면 같이 몰락하는 법이다. 비록 피노세 황제 역시 황실의 핏줄이긴 했지만 기존 황실 사람들과는 그 사고가 완전히 다른 인사이니 빛의 신전에 더 이상 특혜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이성이 돌아왔다.

 ‘허어! 이게 무슨 꼴인가?’

 성자라는 이름과 기름칠을 해 놓은 것 같은 유창한 화술에 넘어가 마치 광신도처럼 굴었던 자신의 태도가 떠오르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명색이 마도사인데 신성력이라는 다른 종류의 힘을 쓰는 신전의 인사에게 홀리다니. 만약 자신을 비롯한 파코추 마탑의 마법사들이 성자를 편드는 모습을 다른 마법사들이 봤다면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다른 것들은 그렇다 치지만 맛난 음식들과 따듯한 잠자리가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괜히 성자를 편들다가 자신들이 그간 누린 호사까지 날아갔으니 위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다들 나가시오!”

 낮지만 단호한 하룬의 말이 다시 떨어지자, 세르파를 비롯한 마탑의 인물들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 처사란 말이오!”

 일룸이 소리를 질러보지만 어느새 붉게 변하기 시작한 하룬의 안광에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몇 번이나 하룬과 붙어보는 상상도 해봤고 상대할 자신도 있었지만, 실제로 저 살벌한 눈빛을 대하면 몸이 오싹해지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서 애써 일으킨 투기를 잃어버리는 일룸과 그 일행들이다.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이 땅에 살면서 고귀하신 성자 일행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는 거지? 신벌神罰이 무섭지도 않은가?’

 그때 그의 귀에 성자의 말이 들려왔다.

 “하룬 대장, 저희 일행은 흑마법사들과 스켈레톤 무리를 상대하느라 지금 무척이나 지치고 허기진 상태입니다. 이왕 도와주신 거 식사까지 부탁하면 안 되겠소? 부담스럽다면 돈을 내겠소.”

 “흑마법사들을 죽인 것은 우리요. 스켈레톤은 우리도 상대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감사 인사도 아닌 휴식과 식사입니다. 이만 나가 주시지요!”

 일룸은 하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감히 성자에게 저런 소리를 할 이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전과는 전통적으로 좋은 관계가 아닌 마법사도 아니고 일개 용병이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정말 파격적이었다.

 ‘정말 간이 배 밖에 나온 인간이군!’

 사람들이 너무 놀라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위기는 점점 더 심각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감히! 혹시…… 귀하는 레아를 배척하는가?”

 화가 났는지 준엄한 성자의 말이 이어졌다.

 “뭘 배척한다는 소리인지 모르겠소. 믿음의 대상이 다를 뿐. 나와 같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돈이 있어야 은혜를 내리는 레아 님보다는 한없는 자애로움과 자비로운 모든 만물을 평등하게 대하는 미요스 님을 믿을 뿐이오. 그분은 믿음을 위해 돈이나 재물을 요구하지 않으시니까.”

 실제로는 무신론자이지만 굳이 믿어야 한다면 묵묵히 일하는 농부들에게 수확으로 은혜를 베푸는 대지의 신이 훨씬 더 낫다. 대지의 신은 사람들에게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 믿는 이들도 힘없고 헐벗은 하층민들이다. 때문에 제대로 된 신전과 사제도 없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미요스는 하룬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존재였다.

 하룬의 입에서 대지의 신이자 동시에 죽음의 신인 미요스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성자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하긴 용병이라면 전투의 신인 발크나 천한 자들이 믿는 미요스겠지.’

 “미요스는 레아 님의 한참 아래 서열이다! 그 신성함의 차이를 모르는가?”

 화가 난 것이 역력한 성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 말에 하룬의 눈매가 비틀리며 살벌한 빛이 폭사되었다.

 “천족이라면 모르겠지만 초월적인 존재인 신神 간에 서열이나 신성함의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오. 정말로 성자께서는 직접 지옥의 사자를 보내, 인신매매범이나 산적들로 가장하고 각지에서 살육을 벌인 도망자들을 지옥의 유황불로 끌고 들어가신 미요스 님이, 돈이 없으면 치유 기도도 해주지 않고 각종 행사의 집전도 해주지 않으면서, 예전의 그 귀족들과 기사들만 상대하던 레아 님보다 신력神力이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건 오해다! 그리고 그 사건은 누군가 미요스와 죽음의 사자를 사칭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까지 신들은 대리인들을 이 중간계에 보낸 적이 없었다. 그건 잘 꾸민 사기극에 불과해. 레아 님의 크나큰 성력聖力과 은혜로움은 우주에 가득 차있어!”

 성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천막 밖에 있는 이들까지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룬이 언급한 대지의 신으로 인해 기세가 죽은 것이 확실했다.

 “성자는 너무 오만하군요. 난 은혜를 베푸는 대상을 한정하는 편협한 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더구나 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인들을 외면하고 일부 귀족들에게만 은혜를 베푸는 신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소. 신의 은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가리지 않고 베풀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오.”

 “그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야. 배움이 부족하고 무지한 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레아 님의 은혜로움은 우주 만물에 미치고 있다.”

 성자의 말에 하룬의 한쪽 눈이 올라갔다. 성자라는 자가 하는 말치고는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난 그런 은혜로움을 가지고 있는 신이라면 무지몽매한 자들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오. 본래 내가 생각하는 신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더 이상 성자와 신과 신성에 대해 거론하고 싶지 않소. 나 역시 무지한 이에 속하는 용병이니까. 난 내가 믿는 신의 이적을 믿을 뿐이오. 그대들을 구해주고 잠시 쉴 곳을 찾아준 것만으로도 다른 신의 사도를 대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이, 이런 무식한 자!”

 성자는 급기야 화를 내며 천막을 나가 버렸다. 그 뒤를 따라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하나씩 나가기 시작했다.

 ‘흣! 이상한걸!’

 정말 이상한 일이다. 성자가 그렇게 분노했는데도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신관들의 반응이 성자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얼굴 가리개를 한 채로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심지어 하룬을 바라보는 시선에 온기와 호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도와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레아 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겠소!”

 마지막으로 나간 성기사는 그런 축원까지 해주었다.

 성녀에 앞서 마지막으로 나가던 나이 지긋한 노신관이 하룬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웠소, 하룬 대장.”

 “아닙니다.”

 “너무 노하지 마시오. 성자의 배움이 아직 일천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저희 역시 다른 분들과 달리 직접 신의 사자를 보내 이적을 행하신 미요스 님을 존경하고 숭배하니 기분을 푸시오.”

 “아, 알겠습니다.”

 ‘성자란 녀석, 혹시 배척당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관들은 물론이고 성기사들마저 그를 존중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성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마웠어요. 아직 가진 힘이 약하고 제대로 쓸 수가 없어 오래 지체하느라 못난 꼴을 보이고 말았군요.”

 “아닙니다.”

 “달레스 신관의 말대로 성자의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는 당신과 돌풍 용병대원들에게 충분히 감사하고 있답니다. 돕고서도 공연히 저희들 때문에 쉬시지도 못하게 해서 죄송하군요.”

 상대방이 이렇게 나오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차갑게 대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까지 했다. 보아하니 성자를 제외하고는 신을 모시는 자격이 충분한 이들 같아 괜스레 미안해졌다.

 하룬의 표정을 통해 그 생각을 읽은 성녀가 두 손을 모았다.

 “홀리 리커버리!”

 순간 성녀의 몸이 휘황한 빛에 휩싸이더니 그 빛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룬의 몸에 닿은 빛들은 순식간에 흡수되더니 소모된 마나를 채운 것은 물론이고 땀과 같은 노폐물까지 사라져 버렸다.

 “……이건?”

 “감사의 표시랍니다. 레아 님의 은혜로움은 성자의 말대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우매하고 능력이 부족한 저희 신관들이 그 은혜를 많은 이들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룬 대장의 말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뭘 깨달았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룬은 천막을 나가는 성녀의 등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아무튼 처음 접한 신성력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해서 마나 플로를 운용하고 난 것처럼 심신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과연 성녀답군!’

 종교를 믿지 않는 하룬이지만 성녀가 보인 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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