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준비》
하룬은 다음 날 일찍 성안으로 향했다. 타림 공방에 들러야만 했다.
“어서 오시게.”
공방에 들른 하룬은 타림 사 부자의 환대를 받았다. 그를 반기는 사 부자의 얼굴은 그간 작업이 밤낮없이 이루어졌음을 알려 주듯 무척 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궁금해서 들렀습니다. 내일은 떠나야 해서요.”
“하하! 마침 잘 들렀네. 안 그래도 자네가 일찍 필요할 것 같아 서른 벌은 오늘 오전까지 만들어 놓았네.”
노구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훨씬 정정한 모습을 보이는 타림이다. 장인이란 진정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 때 가장 행복하고 보람을 느낀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느낌상으로는 열흘 전보다 열 살은 더 젊어 보였고 전신에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강한 활력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타림의 장자가 그를 안내한 곳은 2층이었다. 2층으로 올라간 하룬은 드디어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볼 수 있었다.
“나와 아들들의 손에서 탄생한 최고의 작품일세.”
“호오! 굉장하군요.”
타림 사 부자는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방어구를 소개했다.
빛이 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빨아들였다. 방어구는 하룬이 원하는 대로 외투형으로 만들어졌다.
하룬은 홀린 듯 벽에 걸린 방어구로 걸어가서 조심스럽게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다. 그런 그의 눈이 뭔가를 확인하고 커졌다.
색깔은 검정색으로 염색해서 언뜻 보면 하나의 가죽으로 만든 것 같지만 털의 질감이 다르게 느껴져 자세히 살펴보자 부위별로 다른 질감의 가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하하하! 처음에는 통짜 가죽으로 한 벌을 다 만들까 하다가 막내의 의견대로 부위별로 가죽의 종류를 달리해서 만들었네. 관절 부위는 부드럽고 질긴 아이콘라드 등의 가죽으로 하고 크게 드러난 앞과 뒤는 프로즐리의 가죽을 썼네. 투구는 단단하고 질긴 바얀의 가죽으로, 상의와 바지는 활동성을 고려해서 통기성이 좋고 질긴 람비 종류의 가죽으로 만들었네.”
하룬은 방어구를 직접 자신의 몸에 걸쳐 보았다.
‘역시! 정말 가볍군.’
판금 갑옷은 물론 지금 입고 있는 럼프 오크의 가죽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입지 않은 것 같을 정도였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하룬은 집중해서 방어구와 활동복을 보았다. 경지에 이른 심안 스텟으로 인해 잠시 후 눈앞에 정보가 떠올랐다.
『마수 하드 레더 세트
등급: 유니크
구성: 외투, 부츠, 투구, 건틀릿
가죽의 명장으로 알려진 타림과 그 세 아들이 마수들의 가죽으로 제작한 새로운 개념의 하드 레더이다. 각 부위별로 적합한 마수의 가죽을 사용하여 제작한 하드 레더로, 마법진을 세밀하게 새겨 그 방호력이 획기적으로 강해졌다.
내구력: 4,000/4,000
마법 방어력: 3서클 이하는 데미지 100퍼센트, 그 이상은 데미지 50퍼센트 감소
물리 방어력: 700
옵션1: 체력 +40, 민첩 +40, 지혜 +40
옵션2: 저오염, 항온, 항습』
‘굉장한 아이템이 되었구나!’
하룬은 정말 감탄했다. 아무리 마수 가죽이고 세트 아이템이라지만 어쨌거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가 유니크 등급이 되다니 말이다. 오우거의 가죽으로 만든 것도 레어 상급인데, 이것은 그것보다 더 높았다. 마법 공격을 3서클까지는 그냥 튕겨 내고 그 이상은 데미지의 50퍼센트를 감소시켜줄 정도이니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황홀한 눈으로 방어구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하룬의 모습에 타림 사 부자의 눈에 강한 희열의 빛이 어렸다.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의심할 정도로 멋진 녀석을 보고 의뢰인이 완전히 넋이 나갔으니, 장인으로서는 최상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마침내 하룬의 눈이 이번에는 바지와 셔츠 형태로 상의로 향했다. 역시 집중해서 조금 살펴보자 정보가 보였다.
『마수 가죽 바지 & 가죽 셔츠
등급: 레어
가죽의 명장으로 알려진 타림과 그 세 아들이 마수들의 가죽으로 제작한 새로운 개념의 이너 방어구이다. 관절 부위와 급소 부분, 그리고 나머지 부분의 가죽을 달리해서 제작한 이너 방어구는 통기성과 활동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방호력이 강력하다.
내구력: 2,500/2,500
마법 방어력: 3서클 이하는 80퍼센트, 그 이상은 35퍼센트 감소
물리 방어력: 500
옵션: 체력 +10, 민첩 +10』
아무리 마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내용이면 하드 레더로서는 가히 최고의 사양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판금 갑옷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사양은 나오기 힘들었다.
“제가 본 최고의 아이템입니다. 가죽으로 유니크 아이템을 만들어 내다니 정말 최고의 장인들이십니다. 그리고 이건 정말 명품이군요.”
하룬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는 타림 사 부자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하룬의 반응을 확인한 타림 사 부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주먹을 힘껏 쥐고 마음껏 웃었다.
“하하하!”
타림은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천장을 보며 대소를 터트렸다.
“드디어 우리가 해냈어!”
“그래! 우리가 해낸 거야. 우리 타림 공방이 말이야.”
“그래요. 비록 가공하는 데 엄청 힘들었지만 이런 괴물 같은 아이템이 나온 것을 보니 정말 기뻐요.”
세 아들은 끓어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끌어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이 물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타림 사 부자는 하루에 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하고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작업을 해 왔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의뢰자인 하룬이 저리 기뻐하는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에 그 이름이 쟁쟁한 돌풍 용병대의 하룬이 말이다. 그 이름만큼이나 실력이 뛰어난 용병의 평가이니 틀릴 리가 없다. 그렇기에 더욱 기쁜 것이다.
“진정해라. 아직도 마수 가죽을 많이 남아 있다.”
“그렇지요. 하룬 대장이 의뢰한 것들을 다 만들고 나면 어떤 재료라도 자신이 생길 것 같습니다.”
맏아들과 다른 두 아들이 타림의 말에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만들어야 할 마수 가죽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하룬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자리에서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로 갈아입었다. 비수 벨트와 속옷 위에 바지와 셔츠를 입은 다음 외투처럼 방어구를 걸친 하룬의 모습은, 영웅 포인트 때문인지 아니면 마수의 가죽이 품고 있는 기운 때문인지는 몰라도 강력한 기세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무척 신비하게 보였다.
마법 처리가 되어 있어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이너와 외투형 방어구들은 그의 몸에 맞게 변형되었다. 그렇게 방어구를 입은 상태에서 무릎을 굽이고 팔다리를 가볍게 움직여 본 하룬은 뛰어난 착용감은 물론 움직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룬은 진심을 담아 타림 사 부자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허허!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대장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 귀한 마수 가죽을 구경이나 했겠소. 우리야말로 대장에게 감사하지. 귀한 마수 가죽에 일거리까지 주었으니 말이오.”
타림은 하룬의 인사를 제대로 받지 않고 노구임에도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세 아들 역시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룬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하하하! 그럼 우리 서로 감사하는 사이가 되었군요.”
“그러게 말일세. 천하의 돌풍 용병대와 인연을 맺게 되다니 내 늘그막에 큰 행운을 잡았네. 자네가 우리 공방의 단골인 것만 알려져도 우리 공방은 주문이 끊이지 않게 될 거야.”
타림이 웃으며 말했다.
“알려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아는 상단에서 타림 공방에서 제작한 방어구를 전량 판매 대행을 하기로 했으니까요.”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룬의 말에 타림과 세 아들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제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상단이 곧 출범합니다. 그 돌풍 상단이 이곳에 본점을 설치하기로 했는데 그곳에서 타림 공방에서 만든 하드 레더들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판매가의 20퍼센트를 수수료로 받고 이곳 물건을 전량 판매할 예정인데 어떻습니까?”
“……정말입니까?”
공방의 재정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 제너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돌풍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돌풍 용병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단이야. 설사 돌풍 용병대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곧 세상에 그렇게 알려질 거야. 만약 그 상단에서 우리 공방에서 만든 방어구를 독점 판매한다면 우리 공방으로서는 주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이건 주문제를 고집하는 우리 공방으로서는 그야말로 대박이야.’
돌풍 용병대가 관여하는 상단이면 일반 상단과는 다를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돌풍 용병대의 이름만큼 유명해질 거라는 사실이다. 그런 돌풍 상단에서 자신들의 공방 제품을 판매한다면 자존심을 세워가며 최고의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찬성입니다!”
제너는 행여 하룬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큰 소리로 말했다. 나름 속으로 판단을 내린 타림과 두 아들도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동의해 주시니 다행이군요. 이런 물건이라면 돌풍 상단의 이름을 알리는 데도 큰 기여를 할 겁니다. 돌풍 상단에서는 제 가격을 받고 팔 예정이니 서로 도움이 될 겁니다. 며칠 후에 상단이 출범하면 상단주를 이곳으로 보낼 테니 자세한 것은 그녀와 의논해서 처리하십시오.”
“최고의 제품만 만들 겁니다. 그래서 돌풍 용병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아이템을 납품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걱정이 없습니다.”
하룬은 기꺼운 마음에 한 대답이었지만 타림 사 부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풍 상단과 돌풍 용병대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럼 나머지 방어구는 완성이 되는 대로 곧 출범할 돌풍 상단에 전해 주십시오.”
“알겠소, 대장. 걱정 마시오. 최선을 다해 만들 테니까.”
“일단 완성한 방어구에 대한 잔금을 드리지요. 중도금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하룬은 타림에게 일단 1만 골드라는 거금을 주었다.
“고맙네, 하룬 대장. 안 그래도 돈을 아끼지 않고 쓰다 보니 선금으로 받은 돈이 좀 부족할 뻔했네.”
그랬을 것이다. 아무리 마수 가죽이 마법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3서클 이하는 무조건 막아내고 그 이상은 50퍼센트의 마법 방어력을 가지게 하려면 최소 6서클 이상의 마도사가 공을 들여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작업 중에 나온 자투리로 만든 천막과 카펫, 그리고 이불이오. 무게가 가볍고 말면 부피가 확 주는데다가, 마수 가죽 특유의 항온과 방수 기능이 있고 보온성이 높은 털로 인해 노숙을 하는 데 요긴하게 쓰일 거요.”
타림은 방어구와는 별도로 만든 천막을 비롯한 각종 야영 물품까지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하룬은 기쁜 마음으로 미드레 일행을 만나러 유저 타운으로 향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은 세류의 도움을 받아 상단 창설에 관련된 업무를 하느라 자리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마법 통신으로 미드레를 호출한 하룬은 판매 아이템에 타림 공방의 가죽 제품을 추가할 것을 지시하고 대충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받았다.
번갈아 상황을 보고하는 미드레와 보라의 목소리는 활력이 가득했다.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던 일인 것은 물론 돌풍 기지의 앞날을 비출 빛이 될 자금 조달을 자신들이 하게 될 거란 사실에 그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마침 점심 먹을 시간이 되어 수련을 하러 갔던 이들이 모두 돌아와 있었다.
“모두 모여 봐요.”
하룬의 말에 대원들과 전사들이 숙소 앞으로 모였다. 봄철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입은 하룬의 차림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부대장, 이 방어구들을 나눠 주세요.”
티노를 비롯한 대원들과 전사들은 하룬이 마법 배낭에서 꺼내는 방어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예요, 대장?”
뭘 나누어 주라는 말에 티노를 도와주기 위해 앞으로 나온 도네이스가 방어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눈에도 꽤나 고급품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카족 친구들이 가져온 마수의 가죽으로 우리 용병대 전용 방어구를 만들었어요.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겁니다.”
하룬은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와 속에 입은 셔츠와 바지를 보여주면서 보통의 방어구와 다른 세트 방어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화아! 너무 멋있다!”
마리가 눈을 빛내며 탄성을 질렀따. 일반적인 하드 레더와는 달리 롱코트 형태의 방어구는 외출복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력된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날이 덥거나 노숙을 할 때는 외투를 벗어도 바지와 셔츠로 구성된 방어구가 있으니 무척 편리했다.
대원들은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와 세트 한 벌씩을 받아갔고, 전사들에게는 티노와 도네이스가 전해주었다. 여태까지 방어구를 받지 못했던 미루스는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타니엘라의 것을 보며 속으로 늘 부러워만 했던 것이다.
대원들과 전사들은 저마다 방으로 달려 들어가 방어구를 갈아입기에 바빴다. 곧 방어구와 투구 그리고 부츠까지 착용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어디!”
미루스는 자신의 왜소한 몸매에 자동으로 맞추어진 방어구 세트에 감탄한 얼굴로 걷기 시작했다.
“어? 내 몸이 왜 이렇게 가볍지?”
마치 중력이 반으로 감소한 것처럼 몸이 너무 가벼웠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로 인해 꽤나 무거워야 정상인데 오히려 평소보다 더 가볍게 느껴진 것이다.
거기에 평상시와는 다른 강한 활력이 솟구치니 의구심과 함께 호기가 일었다. 평소에 뛰는 꼴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미루스는 이내 숙소 후원의 너른 땅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바퀴를 달리던 미루스는 상기된 얼굴로 하룬의 앞에서 멈추었다.
“대장! 이거 아주 물건이오. 어디서 이런 귀물을 구한 거요?”
미루스는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물음의 형식을 취해 놀라고 기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저마다 달리거나 몸을 움직여 보면서 만면에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후후! 검사나 전사들이 아닌 이상 힘 스텟과 민첩 스텟이 40이 오르면 마치 새로운 육체를 가진 것처럼 생각될 거야.’
하룬의 생각대로 타니엘라와 미루스, 그리고 레미는 놀라울 정도로 상승한 육체적 능력으로 인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방어구는 엄청난 육체적 힘을 준 것이다.
그렇다고 딜런을 비롯한 전사들이 덜 놀란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본신의 능력이 한 단계 이상 발전한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방어구를 착용한 것만으로 이렇게 힘과 능력이 올라가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아카족 전사들의 경우 퉁방울처럼 커진 눈에 입이 귀에까지 걸려 있었다.
“흐흐흐! 돌풍 용병이 되길 잘했다.”
“람비의 발을 쓰는 것 같아. 뭐 이런 옷이 다 있지.”
“난 몸에 딱 달라붙는 이 느낌이 너무 좋다.”
전사들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하룬의 기분도 최고였다. 대원들이야 좋은 방어구엔 이런저런 부가능력을 가지게 해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카족 전사들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신기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주목!”
놀라고 좋아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하룬에게 향했다.
“이 방어구는 또 한 가지 효능이 있습니다. 이걸 만든 장인이 말하길 마법의 경우 3서클 이하는 데미지를 아예 받지 않고 그 아상의 마법은 데미지를 반으로 줄여준다고 합니다.”
하룬의 말에 전사들 대부분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몰라 눈만 굴리고 있었지만 대원들과 일부 전사들은 너무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정, 정말입니까, 대장?”
누구보다 놀ㄹ나 것은 타니엘라와 미루스였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원래 가죽에는 아무리 강력한 마법진을 그린다고 해도 3서클 이상의 마법을 막아 낼 수 있는 능력을 인챈트할 수 없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런 통설이 있는지는 하룬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타림 사 부자가 그 통설을 깼다는 것이다.
“마수의 가죽은 그 자체가 강력한 마법 방어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장인이 그렇게 장담했으니 한번 시험해 보지요. 3서클 마법 하나를 날려보세요.”
하룬의 말에 타니엘라는 주저 없이 3서클 마법 중 하나인 매직 미사일을 하룬에게 날렸다. 호기심이 강한 마법사다운 행동에 하룬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굳이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팍!
매직 미사일은 하룬이 입고 있는 긴 코트를 직격하며 작은 소음을 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하룬의 롱코트를 향하고 있었다.
“와아!”
“정말이야! 정말 아무 흔적도 없어.”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타니엘라였다. 3서클까지는 아무 데미지도 없이 막아낸다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거…… 엄청난 물건인 거군.”
자신의 롱코트를 만지는 타니엘라의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졌다.
“흐흐흐! 사형,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방어구가 무슨 등급인지 아시오?”
들뜬 가운데서도 방어구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던 미루스였다.
“등급?”
“흐흐흐! 무려 유니크 아이템이오.가죽 방어구가 유니크란 말이오. 멋지지 않소?”
“……하긴. 이 정도 방어력에 능력을 큰 폭으로 올려주는 아이템이라면 유니크 등급은 당연한 거지.”
두 사람은 그 성격대로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딜런마저도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머머! 세상에! 이런 방어구가 다 있다니.”
“뭐 더 알아낸 것이라도 있어?”
도네이스는 곁에 있던 마리가 스크롤 한 장을 찢으며 자신의 방어구를 대상으로 정보를 확인하는 것을 보았기에 궁금한 모양이었다.
“마법 방어력은 대장이 말한 게 맞고 거기에 물리 방어력이 무려 700이에요.”
“물리 방어력?”
유저들처럼 아이템의 상세한 정보를 볼 수가 없는 도네이스는 물리 방어력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설명은 그렇고, 아무튼 700이면 오러 소드가 아니면 흠집도 내지 못해요. 오러 소드로도 쉽게 자르거나 뚫을 수 없어요.”
“그래? 그럼 마나가 담긴 화살은?”
“거리가 가까우면 뚫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찌만 그것도 데미지를 상당한 폭으로 줄여줄 거예요.”
궁술에 자신이 있는 도네이스이다 보니 마나가 담긴 화살도 쉽게 뚫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 방어력을 짐작했다. 도네이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입은 방어구를 신기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그때 하룬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출발할 때까지 방어구를 몸에 적응시키도록 하세요.”
다들 무기를 다루는 사람들이라 하룬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방어구로 인해 본신의 능력이 꽤나 올라갔으니 그 상태에 적응해야만 했던 것이다. 남을 상대하기 이전에 자신의 상태와 능력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고맙습니다, 대장!”
제일 먼저 감사 인사를 한 것은 딜런이었다. 사실 소드 마스터 중급이 된 딜런에게는 다른 사람보다야 효용 가치가 덜하지만, 그는 대원들을 생각하는 하룬의 마음에 적잖이 기꺼웠다.
비록 나이도 한참 어리고 실력도 자신보다 떨어지는 대장이지만 이런 마음 씀씀이가 있기에 대장으로 모셔도 전혀 저어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저는 우리 가족들이 자치거나 죽는 것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갈 곳은 그만큼 위험한 곳이니까요.”
“최선을 다해서 대원들을 지키지요.”
“감사합니다, 딜런 경.”
하룬은 진심을 담아 딜런에게 감사했다. 사실 너무 위험한 의뢰를 받은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딜런이 제대로 신경을 쓴다면 대원들이 허무하게 다치거나 죽는 경우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헤헤헤! 대장, 정말 고맙소. 안 그래도 골골한 몸뚱이 때문에 여정이 좀 걱정되었소. 대장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이런 귀한 방어구를 구해 왔으니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소. 정말 고맙고 사랑하오, 대장.”
“후화하아! 나도 우리 대장을 너무 사랑하오.”
감동받은 얼굴로 하룬을 양옆에서 끌어안는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룬이 새 방어구를 구한 것이 데빌 산맥이라는 위험한 곳까지 가야 하는데 육체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을 배려해서라고 굳게 있게 있었다.
이런 방어구는 즉각적인 반응 능력이 떨어지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지 굳이 전사들이나 다른 대원들을 위해서라면 이전의 방어구의 사양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건…….”
하룬은 쉰내 나는 두 노인네의 과감한 감정 표현과 포옹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들의 앙상하게 마른 몸이 전하는 체온과 정은 금방 그의 가슴을 따듯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딜런과 티노가 슬며시 손을 잡아끌고 나서야 하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한데 감동을 받은 것은 대원들뿐이 아니었다. 전사들이 몰려들어 그를 에워싸고 거칠게 몸을 부딪치며 고마움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고맙다, 대장!”
“가보로 후손에게 물려줄 거다. 너 정말 최고다, 대장!”
“멋진 돌풍 용병대원이 되겠다, 대장.”
“대검에 목숨 하나, 이 방어구에 목숨 하나. 내 목숨 두 개는 대장 것이다.”
대를 이어 무시무시한 마수와 싸우며 살아온 아카족 전사들에게 강하고 잘 벼려진 무기와 본신의 능력을 올려주는 것은 물론 강력한 방호력까지 갖춘 방어구의 중요성은 대원ㄷ르에게 비길 것이 아니었다.
거칠기만 한 아카족 출신 대원들 중 상당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대장, 원하면 언제라도 같이 자 주겠다. 좋아하는 놈은 따로 있지만 그래도 대장이 원하면 난 언제든지 좋다!”
그런 식겁한 말까지 들었다. 두르본이 남다른 야성미를 가지고 있다지만 애인까지 있다는데 절대로 사양이다.
“고마워요, 대장.”
레미의 짧은 인사가 그래서 더 반가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언제부터인가 묘한 색체를 띠고 있었는데 그게 어쩐지 부담스러워졌다.
‘설마, 아니겠지?’
하룬은 이런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서 서둘러 점심 식사를 핑계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자 새 방어구를 입은 대원들이 들뜬 발길로 그의 뒤를 따랐다.
식사를 마친 후 신이 난 대원들이 수련을 하러 간 사이 하룬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살 것이 더 있었던 것이다.
‘무기를 생각하지 못했어.’
식량이나 옷 등은 챙겼지만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아카족 전사들이 사용하던 무기는 정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거나 무게중심이 안 맞는 등 노멀이나 매직 하급 정도였다.
‘이왕 거래를 하려면 최고의 품질로 해야 그들도 만족하겠지.’
굳이 큰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 역시 아카족 전사가 된 마당이니 큰 이윤을 챙길 생각은 버린 것이다. 마수를 사냥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아카족들에게 원하는 것을 모두 챙겨줄 생각이다.
오로파 대장간에 도착한 하룬은 주인을 만나 매직 상급과 레어 등급이 뒤섞여 있는 무기들을 종류별로 백 개 이상씩 구입했다. 덕분에 지하 창고 바닥에 쌓여 있던 재고들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원래 제대로 받으면 40만 골드도 넘어갈 테지만, 오랫동안 팔리지 않았던 물건이고 재고를 정리한다는 차우너의 거래이니 그 절반만 받겠네.”
오로파의 주인은 하룬이 앞으로 큰 고객이 될 거란 사실을 확신했다.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도 가격을 전혀 깎지 않는 큰 배포를 보였고, 이제는 엄청난 수량의 무기까지 구입했으니 차후로도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흐흐흐! 우리 오로파 대장간이 내 대에서 드디어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구나. 돌풍 용병대라면 우리 대장간으로서는 최고의 고객이 될 거야.’
그는 하룬이 구입한 무기들이 아카족들과 거래용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신 그 인원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돌풍 용병대의 실제 대원들이 사용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으로는 열 명도 안 된다고 하더니……. 하긴 그건 헛소문이 틀림없어. 그 정도 인원수로 그런 활약을 했을 리가 없지.’
대장간의 주 고객이던 귀족들과 기사들의 세력이 급속하게 약화된 현실에서 최대 고객층은 용병들이 될 것이다. 아직 이방인들은 큰 고객층이 아니었다. 이제 돌풍 용병대가 오로파 대장간의 무기만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최소한 용병계에만 알려져도 그는 대박을 맞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최대한의 호의를 보이는 것이다.
“좋습니다.”
하룬은 그 자리에서 보석들로 대금을 치렀다.
“하하하! 역시 시원시원하군. 마음에 들어. 좋아, 그럼 나도 서비스를 더 하지. 저쪽에 있는 석궁 100개와 쿼럴 100상자, 그리고 수리 스크롤 100장을 더 주도록 하지. 수리 스크롤을 사용하면 내구력은 물론 예기까지 단숨에 최상의 상태가 되니 편리할 걸세.”
대장간 주인은 창고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몇십 년 동안 팔리지 않았던 석궁과 쿼럴마저 치우기로 작정했다. 수리 스크롤이야 단골들에게 주려고 마탑에서 한꺼번에 구입한 터라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하룬은 무기들보다는 정작 석궁과 쿼럴, 그리고 수리 스크롤이 마음에 들었다. 무기들이야 팔 것들이지만 서비스로 ㅂ다은 석궁과 스크롤의 경우는 그 활용도가 무척 높았던 것이다.
하룬은 아공간에 모든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식량과 옷, 그리고 무기까지 구입하고 나니 마음이 뿌듯했다. 그가 구입한 물건들은 최소 천 명이 몇 개월은 생활하며 전투를 치를 수 있을 정도였다.
비록 거금을 썼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대장간을 나온 하룬은 발길을 유저 타운으로 돌렸다. 세란 자매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세란과 해란은 노점을 열고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룬이 죽음의 사자가 되었을 때 무작위로 얻은 수많은 물품들로 인해 노점이지만 네 구역이나 차지할 정도로 규모도 컸고, 둘의 수완으로 인해 가게는 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장사가 잘되는지 알바 상인까지 쓰고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장사 수완을 알아줘야 해.’
욕심만 좀 덜하면 대하기 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거래가 되는 것을 구경하던 하룬의 모습은 곧 세란의 눈에 뜨이고 말았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장사가 잘 되어서 그런지 얼굴이 밝았다.
“언제 온 거야?”
“방금.”
“왔으면 알은 척을 하지. 저리로 가자. 음료수라도 한 잔 하자.”
“그래.”
하룬은 해란과 함께 조금 떨어진 노점 카페 거리로 가서 음료수를 시켰다.
“장사는 어때?”
“뭐, 그냥저냥 되고 있어. 수리를 말끔하게 했더니 찾는 사람들이 꽤 많아.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게 책정했거든.”
“다행이네. 얼마나 팔린 거야?”
“응. 네가 먼저 맡긴 것은 거의 팔렸고 나머지는 계약한 공방에서 수리가 끝나는 대로 팔고 있어. 지금까지 거래되는 양을 생각하면 한 달 정도면 다 팔릴 거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었다. 두 번째로 전한 물건의 양이 첫 번째로 주었던 것보다 몇 배로 많긴 했지만 곧 의뢰행을 떠날 참인데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조금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좀 가격이 나간다 싶은 것들은 경매로 올려 제값을 받고 있으니까 이 누나에게 다 맡기면 돼.”
“판매 대금은 어떻게 되니?”
“음. 어제까지 계산한 거로는 총 37만 골드가 조금 넘는 금액이야. 수리해서 경매로 판 아이템들 등급이 높아 꽤 짭짤했어. 아마 다 팔게 되면 70만 골드 내외는 될 것 같아. 왜, 당장 필요한 거야?”
“응.”
“야, 하룬! 근데 그 상단 건에 대해서는 결정한 거야?”
해란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이런 경험이 많지 않은 하룬으로서는 이야기를 하기가 껄끄러웠지만 그래도 매듭을 지어야 할 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룬은 마음을 굳게 먹고 이야기를 꺼냈다.
“응. 일단 돌풍 용병대의 힘만으로 상단을 해보기로 했어. 큰돈을 벌려는 목적이라면 너와 세란에게 맡기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겠지만 식구들에게 할 일을 주고, 또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용병대를 꾸려 나간다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도 겪고, 어쩌면 적자를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만의 힘으로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어.”
“에이!”
하룬의 똑 부러지는 말에 세란이 인상을 썼다. 그녀는 꽤나 기대를 했던 것 같았다.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친구 간에도 이익을 따지는 해란 자매와 더 이상 이런 거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후회할 텐데.”
“괜찮아. 난 하기 전에는 많이 고민하는 타입이지만 일단 시작하면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아. 후회할 시간에 대책을 생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니까.”
그건 사실이다. 이전의 하룬은 후회가 많은 편이었찌만 비욘드를 하고 난 후론 많이 바뀌었다. 적극적이 되었다고 할까? 후회를 하기보다는 그 대안을 찾는 방향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상단주는 누구야? 헤니?”
“아니. 미드레와 보라가 상단의 일을 도맡아 할 예정이야. 상단주는 아마 미드레가 되겠지.”
“미드레? 못 들어본 이름이네. 에잉! 아깝다. 나에게 그 돈과 인력을 맡기면 정말 안정적으로 수입을 창출해줄 텐데.”
역시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해란의 태도에 하룬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그러더라. 친구 간에는 거래를 하면 안 된다고.”
“칫! 누가 그래? 에이! 뭐 하긴, 일단 돈이 얽히기 시작하면 좋은 꼴로 끝나기는 쉽지 않지. 알았어.”
결국에는 포기를 하는 해란이지만 미련이 큰지 무척이나 실망한 얼굴이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하룬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해했던 것이 억울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너무 다른 사람ㅇ르 배려하기만 해서도 안 되는 거구나!’
또 하나 깨달았다. 배려는 필요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게 주장을 세워야 한다. 그게 싫으면떠날 것이고 떠나기 싫으면 받아들일 테니까. 현실에서 처음 사구니 친구들이라 하룬이 너무 의식을 많이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룬은 생각 밖의 해란의 반응에 허탈하기도 했지만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다.
“며칠 안에 미드레와 보라가 올 테니까 그녀들에게 수수료를 제외한 판매 대금을 넘겨줘.”
“알았어. 그런데 어디 가려고?”
“응. 난 이제 현실로 돌아가 할 일이 많아. 그리고 이곳에 진짜 돌풍 용병대가 들어왔거든.”
“그래? 그럼 네 이름을 빌린 그 진짜 용병대장도 온 거야?”
“응. 어제 만났어. 상단 일도 그가 도와주기로 했어.”
“나도 한번 보고 싶은데.”
해란은 눈앞의 하룬이 그 하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선망의 눈빛을 보였다.
“그건 어려울 거 같은데. 새로 받은 의뢰 때문에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고 하더라. 어쩌면 벌써 성을 나섰는지도 몰라. 파이린 제국이 돌풍 용병대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거든.”
해란은 그 말에 쉽게 수긍했다. 고요의 땅에서 많은 피해를 본 파이린 제국이 돌풍 용병대에 대해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정보였다. 비록 용병으로서 돈을 받고 한 일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물건들도 팔리는 대로 미드레에게 대금을 전해줘.”
“알았어. 안 그래도 네가 판매를 위탁한 아이템들을 거래하면서 상인 레벨이나 스킬이 많이 올라 나와 세란이도 가게를 낼 생각이야. 나중에는 번듯한 상단으로 발전시켜야지.”
“너희들이라면 잘할 거야.”
하룬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녀들의 상거래 스킬이나 금전 감각이라면 절대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오빠가 한번 건너오라고 하더라. 술 한잔 하자고. 요즘 일이 없어 매일 빈둥거리고 있거든.”
“알았어. 일간 한 번 건너간다고 전해.”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일을 마무리한 하룬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저 타운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현실에서 처음 얻은 친구들인데 자신이 너무했나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잘 결정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래! 역시 친구끼리는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야. 동업도 물론 아니고.’
이익에 민감한 해란 자매와 돈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금전 감각이 별로 없는 자신이 그녀들과 계속 거래를 하거나 동업 관계가 되면 자신은 표현하진 못하지만 계속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의심과 피해 의식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설마 그녀들이 그를 속이기야 하겠냐마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계속 친구로 남으려면 관계를 해칠 소지가 있는 것은 애초에 치워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휴우!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아.’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자꾸 그걸 의식하다 보니,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도망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탑에서 파견한 마법사들과 파이린 제국 황실에서 파견한 사람들을 기다리는 이틀 동안 하룬은 강도 높은 수련과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했다. 아직 세류와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파생된 감정의 찌꺼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수시로 생각이 났던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미련이 있는 걸까?’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 후유증이 이렇게 오래가는 것을 보면 무의식중에 그녀를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괜히 아리에게 미안해지네. 에이! 수련이나 하자.’
이럴 때는 그저 몸을 괴롭히는 것이 하룬이 알고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정령들은 물론 마수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는 하룬이기에 딜런과의 대련은 정말 살벌해서,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물론이고 레미까지 누군가 다치는 이가 나올까봐 잔뜩 긴장하고 대기를 할 정도였다.
“대장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게. 왜 저러지?”
대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살벌한 대련과 함께 몸과 마음을 극한까지 몰고 가는 수련을 니틀 내내 지속하는 하룬의 상태를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손님들이 온 날에는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장, 손님들이 왔습니다.”
티노는 다른 날과는 달리 아직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하룬에게 보고를 했다. 방문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숨길 수 없는 걱정과 우려가 담겨 있었다.
“나갑니다.”
프로즐리 가죽 특유의 회색 방어구를 제대로 차려입은 하룬의 기도는 아침 공기의 상쾌함만큼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바로 어젯밤까지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던 칙칙하고 무거운 공기가 사라진 것이다.
“이분들은 파코추 마탑에서 오신 분들이고 저분들은 황실에서 나오신 분들이랍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제가 돌풍 용병대의 하룬입니다. 일단 티 룸으로 가시지요.”
하룬은 특유의 깊고 강렬한 눈빛을 보이며 손님들을 티 룸으로 안내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티노는 자신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는 따듯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인 도네이스의 손이다.
“어때요, 오늘은?”
그렇게 묻는 도네이스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묻어 나왔다. 사실 하룬의 이상한 상태 때문에 대원들은 다들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졌어. 며칠 동안 대장님을 힘들게 했던 것을 오늘은 모두 벗어던진 것 같아. 원래의 대장으로 돌아왔어.”
“어머! 다행이네요. 그럼 난 얼른 가서 차를 준비할게요.”
도네이스는 육중한 몸이지만 날렵하게 날 듯이 티 룸을 향해 달려갔다.
“오늘은 어떤가, 부대장?”
딜런이었다. 모두가 하룬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잘됐군. 뭔지는 모르지만 대장은 또 하나의 벽을 깨뜨렸군.”
“벽요?”
티노의 물음에 딜런이 최근 들어 자주 보이는 부드럽고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대장은 쉴 새 없이 성장하고 있네. 요 며칠 대장의 상태는 굉장히 심각했네. 경지가 오를수록 평정심이 중요한데 그것이 무너졌었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처럼 평생 검과 함께 검만 바라보고 산 사람은 마음이 있어도 도와줄 수 없는 그런 문제를 안은 얼굴이었네.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었지. 원래 그 경지가 올라갈수록 심마心魔의 벽은 더 두껍고 위험한 법이네. 그런데 대장은 이틀 만에 그것을 극복한 것일세.”
티노는 딜런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는지라 대충은 알아들었다.
‘여자 문제였구나!’
대장처럼 젊은 나이에 출중한 능력까지 갖추었다면 여자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그 용모가 뫼비우스처럼 출중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소양이 있는 여자라면, 능력이 있고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하룬과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긴 여자 문제라면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데브론의 노예이자 종자로 그리고 용병으로 세상을 떠돌면서 잣니의 왜소한 체구와 수준 이하의 외모, 그리고 소심한 성격 때문에 여자라고는 돈을 주고 잠자리를 같이한 창녀밖에 만나보지 못했던 티노였다.
‘아무튼 잘 극복했습니다, 대장.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티 룸을 향하는 티노와 딜런의 시선에는 굳은 신뢰와 따듯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묘하게도 보통의 아버지들이 성장통을 앓고 있는 아들을 응원하며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다.
마탑에서 파견한 마법사는 모두 네 명이었다.
“난 파코추 마탑의 대외 분야를 맡고 있는 세르파라고 하오. 여기 있는 머로이와 쉬프는 6서클 마도사로 이동 마법과 공격 마법에 능한 이들이오. 그리고 이쪽은 내 제자인 프로스트로 비록 4서클이지만 통신과 영상 저장을 담당할 것이오.”
세르파는 타니엘라와 비슷한 연배로 보기 좋은 미소로 인해 첫인상이 좋았다. 아마도 용병들과의 동행을 고려하여 실력은 물론 인화 관계에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하하하! 우리야말로 대장에게 부탁하오. 명성이 자자한 하룬 대장이니 우리 마탑의 의뢰를 멋지게 수행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룬은 나머지 세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세르파의 제자인 프로스트는 마흔 전후의 나이로 여느 마법사들과는 달리 다소 뚱뚱한 몸과 순한 눈을 가지고 있어 그 스승처럼 첫인상이 좋았다.
머로이와 쉬프는 세르파와 비슷한 연배로 전형적인 마법사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은 젊은이 못지않게 강렬하고 심유했다. 굳이 시험해보지 않아도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후버론 님과 아그레시아 황녀가 신경을 많이 썼구나.’
단순히 의뢰 수행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고위급 마도사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버론과 아그레시아는 향후 돌풍 용병대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마탑의 중요 인사들을 보내 안면을 쌓게 만드는 것이 틀림없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정령사들을 상시 소환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눈에 상대방의 능력이나 실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외 분야를 맡고 있다는 세르파나 두 마법사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파코추 마탑에서도 중요한 보직을 맡고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벨린이 파견한 황실의 인물은 모두 다섯으로 둘은 마법사였고 셋은 전형적인 기사들이었다.
“난 황실 친위 기사단의 부단주 일룸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만났으니 인사는 생략하고 내 일행을 소개하지. 밀스레드!”
“네, 1조장 밀스레드!”
일룸이 자신의 이름ㅇ르 호명하는 순간 벌떡 일어난 밀스레드는 30대 후반으로 전형적인 야전 부대의 기사로 보였다. 균형 잡힌 몸에 깔끔하게 다듬은 콧수염과 턱수염이 무척 단정하게 느껴졌다.
“타운트!”
“네, 3조장 타운트!”
타운트 역시 자신의 이름을 복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밀스레드처럼 군 출신으로 보였는데 아카족 전사들과 다름없는 장대한 체구와 우락부락한 얼굴을 가졌지만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가 호방한 성정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이 두 분은 황실 마탑에서 나오신 분들이다.”
“난 앞으로 이벨린 전하와의 통신을 전담할 베른하트라고 하네.”
“내 이름을 몰보트, 내 이름이 필요하면 부탁해라.”
파코추 마탑에서 파견한 인물들과 달리 파이린 황실에서 파견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룬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벨린을 수행했던 일룸이야 첫 만남부터 하룬을 무례하고 흉악한 용병으로 생각했으니 그렇다고 쳐도, 몰보트라는 마법사는 이 자리까지 나온 것이 불만스러운 것이지 아니면 원래 성정이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과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반갑소. 험한 곳으로 가는 만큼 준비는 잘해 왔으리라고 생각하오. 우리 돌풍 용병대의 뒤만 조심해서 따른다면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오. 이벨린 전하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댁들은 그저 우리를 따라오기만 하면 되니 알아서 자신들의 안전과 숙식은 스스로 챙기시오.”
“무, 뭐라?”
파코추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들을 대한 것과 달리 거침없이 적대감을 드러내며 심지어 무시하는 발언을 내쏟자 황실에서 파견된 다섯 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름 제국의 실세이며 자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들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접대인 것이다.
“이, 이익!”
“감히 어디서!”
너무 놀라서일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황실 인사들은 마치 벼락처럼 쏟아지는 하룬의 안광에 발작하려다 멈칫했다.
“난 황녀 전하에게 의뢰를 받았소. 댁들이 나와 내 대원들을 무시한다면 당장 계약을 파기하곘소. 난 나와 내 대원들을 산적이나 노예, 혹은 벌레 보듯 하는 작자들과는 절대로 같이 움직일 수 없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아직 계약금도 받지 않았으니 난 상관없소.”
“이 작자가 감히!”
차앙!
타운트가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을 뽑아 들었다. 나머지 네 사람의 눈에서도 흉흉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가알!”
하룬은 다섯 명을 향해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다. 인내심이 부족해진 것인지 순간적으로 노화가 치민 하룬의 투구 속에는 어느새 세 개의 뿔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눈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황녀 전하께서 직접 찾아와 의뢰를 맡길 정도로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우리에게 만나자마자 시비를 걸다니. 그대들은 과연 이 의뢰가 정상적으로 수행되는 것을 바라기는 하는 것인가? 혹시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야? 왜 시비를 걸지? 우리가 의뢰를 무사히 수행하도록 도와줘도 부족한 판에 대놓고 의뢰 자체를 파기하도록 유도하다니. 정말 간도 크군! 감히 제국의 황제와 황녀를 무시하다니! 정녕 그대들은 죽고 싶은가 보군. 어디 한번 해보자! 대놓고 시비를 거는 무리까지 용납하기에는 우리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일단 한번 붙고 나서 이 의뢰가 깨졌다는 소식을 전하도록 하지. 그대들에게 우리 용병대가 깨지면 실력이 부족한 거니 자연스럽게 의뢰가 깨질 것이고, 우리가 그대들을 이긴다 해도 고객에게 칼을 휘둘렀으니 이 경우에도 의뢰는 끝이지. 신뢰가 생명인 의뢰이니.”
대놓고 협박을 하는 하룬의 스산한 목소리에 황실 인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길!’
일개 용병대의 대장이 이 정도의 말발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룬의 말대로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의뢰는 당연히 끝이다. 아직 의뢰의 선금도 전하지 않은 마당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파코추 마탑의 마법사들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니 곤란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내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싸우는 것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하룬이 엄청난 위압감으로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흐윽!’
얼마 전 소드 마스터 중급에 올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했던 일룸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릴 정도로 강력한 기세가 다섯 사람에게 쏟아졌다. 형용하기 힘든 살기가 심혼을 압박했다.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악마를 대한 듯 몸과 마음이 오그라들고 식은땀이 솟았다.
‘이건 도대체 뭐지? 마나 방사는 아닌데.’
일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이나 마왕의 피어처럼 본능적으로 굴복하게 만드는 이 기운은 이제껏 느껴 본 적이 거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살기만이 아니었다. 언제 생긴 것인지는 몰라도 다섯 명의주위에는 수십 개의 윈드 커터가 느리게 회전을 하고 있었고 그 외곽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워터 볼과 파이어 볼이 도깨비불처럼 떠 있었다.
하룬의 심정 변화에 예민한 정령들이 공격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너무 세게 나오네.’
앞으로 꽤나 오래 동행하게 될 테니 군기를 잡으려던 것에 불과했는데 이건 완전히 그 대상을 잘못 잡았다.
베른하트가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그는 우직하고 충성심이 강한 반면 융통성과 인화력이 부족한 일룸 때문에 이벨린이 특별히 파견한 황실 마탑의 원로였다.
“지, 진정하시오. 우리는 대장과 돌풍 용병대를 무시하거나 황녀 전하께서 의뢰한 계약을 깨려는 의도는 절대 가지지 않고 있소.”
베른하트가 다급한 얼굴로 동료들을 쓸어 보았다. 인자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눈에서는 새파란 광망이 네 명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네 명은 치켜떴던 눈에 힘을 풀고 끌어 올렸던 투기를 거두어들였다.
하룬은 입술을 한번 꽉 깨물고는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도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하지만 일단 세게 나갔으니 마무리는 해야 했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이 계약은 파기라는 점을 명심하시오! 나와 내 대원들은 댁들의 상전인 이벨린 황녀가 부탁한 일을 수행할 사람이오. 또한 파이린 제국의 신민도 아니고. 다른 데도 아니고 신분제도가 사라진 파이린 제국에서 용병이라는 이유로 무시받을 이유는 전혀 없소.”
지난 며칠 동안 극한까지 몸과 마음을 혹시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응어리졌던 마음의 찌기와 상대의 무례한 태도에 하룬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런 하룬에게서 얼마 전 죽음의 사자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흡수했던 기운이 밖으로 표출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드래곤의 피어처럼 심혼을 얼려버리는 가공할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일룸은 물론이고 나머지 네 사람은 창백한 얼굴로 몸ㅇ르 움직이려고 했지만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눈에서 지옥의 겁화처럼 이글거리는 화염을 뿜어내고 있는 하룬에게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크윽! 이런 자일 줄이야!’
베른하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록 이벨린 황녀에게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말과 함께 언행에 주의하라는 당부를 듣기는 했지만 황실도 무시할 정도로 막 나가는 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에 6서클 마도사인 자신과 몰보트는 물론이고 소드 마스터에 이른 일룸과 익스퍼트 중급의 두 기사에게 두려움을 안겨 줄 정도의 기세를 가졌을 줄은 몰랐다.
하룬은 폭발적으로 쏟아내던 기운들을 거두어들였다..
“티노 부대장!”
“네, 여기 대기하고 있습니다.”
티노의 목소리와 함께 이제야 하룬의 가공할 기운에 가려져 있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황실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그들은 포위가 된 상태였다. 딜런과 티노는 검과 긴 대롱을, 그들 뒤로는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두 마법사와 각기 무기를 빼든 아카족 전사들, 그리고 시퍼런 오러 광이 반짝이는 철시를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는 도네이스와 마리가 보였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막 발작을 하려던 네 사람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하나같이 오러를 사용하는 전사들이며, 허공에 마법진을 그릴 정도의 실력자들이다. 더구나 자신들 앞에는 감당할 수 없는 살기를 띠고 언제라도 정령들로 하여금 공격할 준비를 하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본느 하룬이 있다.
‘지, 진짜 죽일지도 모른다.’
몰보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꿀꺽!
자신이 낸 소리에 놀란 몰보트였지만 다행히도 다른 이들도 거의 동시에 긴장으로 인해 침을 삼킨 것 같았다.
살벌한 대치 상황을 완전히 끝내게 만든 것은 세르파였다. 만약을 위해 실드를 연거푸 세 개나 만들 정도로 놀랐던 그였지만, 안면이 있는 사이인 베른하트의 난처한 표정을 보고 무시할 수 없어 나선 것이다.
“하하하! 그만하시지요, 하룬 대장. 이분들도 예의를 모르는 분들이 아닌데 설마 진짜로 대장과 돌풍 용병대를 욕보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저 첫 만남에 기세를 죽이려고 해본 것일 테니 진정하세요. 용병들 간에도 그런 일이 다반사로 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대장과 돌풍 용병대가 귀한 분의 의뢰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짐짓 도발해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르파가 개입하자 당장 베른하트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 그렇소. 우린 단지 대장의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오. 대장이나 돌풍 용병대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었소. 반장난으로 시작한 일에 대장이 이렇게 과하게 낭로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무척 당황스럽소. 마음이 상했다면 용서하시오.”
육체는 물론이고 영혼까지 태워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하룬의 붉은 안광이 일룸에게 향했다. 마치 그 말이 맞느냐고 확인을 하는 것 같았다. 일룸은 이를 악물었다. 다른 네 사람이 눈빛을 통해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전하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각고의 고련苦練을 통해 소드 마스터에 오른 자신이 한갓 용병의 위협에 이렇게 꼬리를 내리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부들부들 떠는 일룸을 본 베른하트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황제 폐하께서 중요시하는 일을 그르칠 수 없는 우리 입장을 헤아려 주시오, 대장. 아무려면 우리가 의뢰를 깨려고 했겠소. 어디까지나 힘을 가진 자들이 만났을 때 상대방을 확인하는 의례적인 도발이었으니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소.”
하지만 베른하트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하룬의 시선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일룸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자신이 발작을 한다면, 황제가 이벨린 황녀를 친히 보내 했던 의뢰를 자신의 손으로 깨뜨리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자각한 것이다.
첫 만남에서 황녀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 어쩌면 자신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실력을 가진 이 무례한 용병이라면 계약을 파기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되면 이 무식한 용병 놈도 무사할 수 없겠지만 황제의 심모원려를 깨뜨린 자신 역시 불충을 저지르게 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