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류와 돌풍 상단》
이벨린의 의뢰를 받아들인 하룬은 다음 날 아침을 먹고는 헤니와 함께 성 안의 유저 타운으로 향했다. 유저 타운의 한 카페에서 세류는 물론 인공수정체 형제들을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일찍 와서 그런지 한참이 지나서야 보라와 미드레를 비롯한 인공수정체 출신 이방인들이 도착했다. 모두 열세 명이나 되었는데 헤니의 설명을 들으니 그들은 각기 상단의 지부를 맡을 것이라고 했다.
“반갑소. 현실의 내 형제에게 들었겠지만 같은 이름을 쓰는 하룬이라고 하오.”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강조하자 그들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언뜻 본 순간 현실의 하룬 대장을 보는 것 같았지만 그에 비해서는 어딘지 노숙하면서도 절로 경의를 일으키는 기도를 가졌던 것이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전 보라라고 해요. 저희 대장과 비슷하다는 말은 헤니에게 들었지만 듣던 것보다 더 멋지세요.”
“저는 미드레랍니다. 정말 우리 대장과 비슷한 외모와 분위기라서 한 형제라고 해도 믿겠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 다퉈 인사를 하는 나머지 인원은 하룬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니 나중에 합류한 인공수정체 형제들인가 본데, 모두 맑고 강한 눈빛을 가진 것을 보고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내 형제를 많이 도와주시오.”
자신을 도와 달라는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이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굳이 정체를 드러낼 상황이 아니니 할 수 없었다.
“저희들이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돌풍 용병대의 힘과 도움이 없으면 난립하고 있는 타 상단들이나 이미 기득권을 가진 상단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파이린 제국의 황실에서도 투자를 했으니 누구도 함부로 못 건드릴 거요.”
“정말요?”
그런 사실은 들은 바가 없었기에 다들 깜짝 놀랐다. 심지어 헤니조차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룬은 이벨린 황녀와 약속한 것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럼 다른 상단의 견제나 위협은 문제가 되지 않겠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미드레를 비롯한 기지 식구들은 한숨을 돌렸다. 최근 이방인들이 상계에 끼어들면서 기존 비욘드의 상인들과 심각한 마찰을 겪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따.
“이건 최초 자본금 중 400만 골드에 상당하는 보석들이오.”
하룬은 미리 준비했던 보석 주머니들을 꺼냈다. 묵직한 주머니가 무려 다섯 개나 되었는데 그중 하나의 주둥이를 열자 굵고 잘 가공된 보석이 휘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감사해요! 이건 제가 아공간 주머니에 잘 보관할게요.”
다행히 미드레는 그 비싸다는 아공간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안에 해란이라는 이방인이 현금으로 가져올 거요. 100만 골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현금으로 일을 진행시키도록 하시오. 나머지는 내가 이번에 맡은 의뢰를 다녀와서 주도록 하겠소.”
헤니는 해란이라는 이름에 눈을 빛냈지만 미드레 일행은 하룬이 해란이라는 이방인에게 뭔가 거래를 맡겼다고만 생각했다.
“현실의 우리 대장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 돌풍 상단의 주력 품목은 두 개라고 하더군요. 하나는 약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종족의 아이템.”
“그렇소. 이종족의 아이템은 수익을 내기 위한 품목이고 범용 약품은 이 세상의 많은 헐벗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업이오.”
약재를 거래한다는 소리에 나름 기지 식구들과 많이 토론을 했었지만 이런 내용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헤니 일행이 당장 질문을 해왔다.
“그럼 약품의 생산과 판매는 어떻게 하지요?”
“허브 시티에 가면 가츠라는 뛰어난 제약사가 있소. 내 편지를 써줄 테니 그분에게 약품 조제와 각종 약재 공급에 대한 것을 맡기시오.”
하룬은 가츠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가츠는 허벌 길드의 길드원을 위해 헌신하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약을 효과적으로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었다.
“허브 시티는 각종 약재들이 거래되는 곳이니 생산 시설을 그곳에 마련하면 아주 편할 거요. 아무튼 그분이 약품을 생산하면 돌풍 상단은 상단 운영비나 인건비 정도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이익만 챙기고 평민들에게 판매를 하면 되는 거요. 물론 차후에는 약을 파는 상점을 곳곳에 만들어 그 상점들만 거래해도 좋소. 다만 그 이익은 적정해야 하오. 안 그러면 약을 살 수 있는 평민들이 없을 테니까.”
미드레와 보라를 비롯한 기지 식구들은 이 세계에 현실과 같은 편리한 약들이 널리 유통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사업을 한다면 굉장한 수익 사업이 될 수 있는데 거의 원가나 다름없이 판매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속이 상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 세계의 백성들은 그대들의 세상과는 달리 간단한 질병에도 신전이나 마탑에 갈 돈이 없어 하루에도 수없이 죽어가고 있소. 수익은 이종족이 만든 아이템들을 통해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니, 이 세상에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진행해주길 바라오. 이 건에 대해서는 그대들의 대장과 충분히 이야기를 했소.”
“알겠어요, 대장.”
헤니는 이런 인물이 현실이 아니라 이 비욘드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현실 세계를 이끌어가는 노블들 중 이런 인물이 있었다면 세상은 다른 모습일지도 몰랐다.
‘하룬 대장도 이분과 다름없는 사람이니 우리는 행복한 거지.’
헤니는 현실의 하룬을 생각하고는 희망을 가졌따. 비록 이곳의 하룬 대장ㄷ보다는 아직 연배도 아래고 포스도 떨어지는 것은 물론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된 생활과 미래에 대한 꿈을 주고 있었다.
이들은 하룬이 비욘드의 세계에서 쌓아 온 영웅 포인트로 인해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기도에 억눌려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미드레, 이것을 가지고 있다가 노수 일행이 오면 전해주시오. 내 동생의 부탁이오.”
하룬은 마정석 중 남은 것을 모두 미드레에게 맡겼다. 시간만 된다면 노수를 비롯한 현실의 돌풍 용병대원들에게도 이곳의 대원들처럼 기연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룬은 시간을 내서 현실에서 그들에게 수련 검식을 가르치고 힘을 가질 준비가 되면 그것들을 복용시킬 생각이었다. 의뢰 때문에 마수의 대지로 들어가는 자신들 대신에 돌풍 상단의 일을 도와주려면 그들도 빨리 강해져야만 했다.
“아마 당신들의 세계로 돌아가면 동생이 뭔가 이야기를 해줄 거요.”
하룬의 말에 미드레는 다른 말 하지 않고 마정석이 든 주머니를 받아 아공간 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했다.
그렇게 기지 식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세류 일행이 도착했다. 세류는 비류와 함께 왔는데 상단의 인물로 보이는 몇 명이 호위를 위해 따라온 듯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하룬은 일단 다른 테이블로 그녀와 비류를 안내했다.
“오랜만이군요.”
“네. 굉장히 오랜만이에요.”
세류는 하룬이 내미는 손을 마주잡으며 복잡한 눈빛을 보였다.
“둘 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헤헤! 대장은 예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졌어요. 중후하고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네요.”
비류는 하룬의 손을 마주 흔들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중후하다는 이야기는 자신이 최소 30대 정도로 보인다는 말과 같아 내심 속이 상했지만 그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충 넘어갔다.
“그런데 웬 타투예요?”
세류는 입을 꼭 다물고 하룬의 얼굴을 복잡한 눈으로 살피고만 있었고 비류가 대화를 주도했다.
“아, 이거! 대원 중에 타투를 잘 새기는 친구가 있어서요.”
처음 새긴 것보다는 엄청나게 작아진 상태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가 싶다.
“뭐랄까, 거칠고 야성적인 분위기가 풍기네요.”
“고마워요.”
웬일로 이렇게 좋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세류가 이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니 비류의 말이 고맙기도 해서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어색한 상황이라 작심을 하고 세류를 보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일단 새로 출범한다는 상단 일을 먼저 처리하고 싶어요.”
“그럽시다. 상단을 운영할 이들은 옆 테이블에 있으니.”
“그럼 대충 이야기가 끝나면 제게 시간을 잠시 내주세요.”
왠지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말에 하룬은 답답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몰라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룬은 대원들이 있는 방으로 세류를 안내했다. 비류는 굳이 자신이 낄 데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 상단 식구들이 있는 테이블에 남았다.
“주목! 이분이 코탑 상단의 상단주인 세류입니다. 여러분은 이분의 도움을 받아 상단 설립이나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배우게 될 겁니다. 바쁜 분이라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전심전력으로 배우기 바랍니다.”
이미 세류와 안면이 있는 헤니를 제외한 기지 식구들은 상인들 중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유명 인사를 면전에서 대하자 무척 흥분된 얼굴로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코탑 상단을 이끌고 있는 세류라고 해요. 하룬 대장과는 후크란 산맥과 고요의 땅에서 동행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답니다. 그 인연으로 여러분과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모두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멋지세요!”
대부분 상인으로 전직한 이들이기에 짧은 시간에 상계의 거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세류를 대하는 태도는 하룬을 처음 만날 때보다 더 열광적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하룬이야 현실의 하룬이 아니고 게임에 존재하는 후견인이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세류는 우아한 태도로 인사를 하면서 기지 식구들의 환호와 칭찬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대충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현실에서 하룬씨와 만났을 때 대충 얘끼는 들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할게요. 자본금과 상단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 생각인가요?”
세류의 질문에 하룬은 미드레와 보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앞으로 상단을 운영할 수뇌부이니 그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눈치가 빠른 미드레가 그의 생각을 읽고 입을 열었다.
“저희 돌풍 상단의 최초 자본금은 500만 골드에요. 일단 본점 한 곳과 지점 열두 곳으로 시작할 생각인데, 주 거래 품목은 약재이고 특별 거래 품목으로는 명장들이 만든 몇 가지가 명품들과 이종족이 만든 아이템이 될 거예요.”
약재라는 말엔 별 변화가 없었지만 이종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대번에 세류의 눈이 달라졌다. 현실에서 하룬을 만났을 때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비욘드의 하룬 대장과의 인연 때문에 도움을 준다고는 했지만, 사실 내심 귀찮은 마음도 상당했었는데 뜻밖의 내용에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이종족이라면 드워프인가요?”
그녀의 시선은 하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요의 땅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분명히 그는 그곳에서 이종족인 드워프가 만든 강탄성궁과 철시를 사용했었다.
“맞소. 엘프들이 만든 아이템도 추가될 거요.”
하룬의 대답에 세류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이건 대박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이종족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것이 확실한 하룬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현재 이곳 비욘드에서 유통되고 있는 드워프제나 엘프제 아이템이 극히 희귀하고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건 대단한 사업이었다.
“거래량은 어느 정도로 추정하고 있나요?”
“이종족들이 만든 아이템은 돌풍 용병대를 통해 한 달에 한 번 100개 정도를 구해올 생각이에요. 때문에 평상시 돌풍 상단의 주 거래 품목은 약품이 될 겁니다.”
“약품의 종류와 형태는 어떤가요?”
비욘드는 현실과는 달리 마법사나 신관이 존재하고 그 치유력이 강력한 세상이다. 그 때문에 약품의 경우는 주먹구구식으로 조제한 형태이고 그 종류도 그다지 많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평민들이 주로 사용하기에 가격이 높지 않고 마진도 크지 않았다.
“일단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상비약이 될 테니 종류는 십여 종에 불과할 거예요. 그 형태는 주로 환약이나 연고제, 그리고 추출제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 일을 위해 따로 생산 시설을 만들 생각이니 그 종류도 늘어나고 형태도 다양해질 거예요.”
“이 세상의 약은 주로 민간약 수준으로 알고 있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할 건가요?”
“우리 대장이 잘 아시는 분이 제약製藥 분야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분께서 그 효험이 확인된 약들 중 일반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들을 골라 조제를 전담할 예정이라, 입소문을 통한 광고만 제대로 한다면 금방 손익분기점은 넘어설 수 있을 거예요. 다만 하룬 대장님의 의지가 약재에 대해서는 이익을 챙기지 말라는 것이기에, 최소한의 마진만 붙여서 판매할 거예요.”
세류는 보라의 설명을 들으며 나름 품목 선정에 감탄하고 있었다. 비록 마법사들과 신관들의 치유 마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적이고 일관된 약품을 유통시킨다면 무주공산인 제약 업종을 선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 비욘드에서 병자들은 마탑과 신전을 제외하면 찾을 곳이라곤 치료사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치료소밖에 없다. 그나마 치료소가 가장 저렴하기에 많이 찾긴 하지만 일단 효과가 검증된 약품이 나온다면 그 매출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세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룬을 보았다.
‘무심한 분!’
저렇게 머리카락으로 얼굴 상당 부분을 가리고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신분은 이 세상에서조차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용병이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부인할 수 없는 영웅이다.
누가 있어 제대로 된 치료나 약도 먹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약자들을 챙긴단 말인가? 거죽은 비록 돈에 움직이는 비루한 용병이지만 그가 품은 뜻은 만인의 추앙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목 선정에는 무리가 없네요. 지점이 열두 곳이라면 일단 도매점 형태로 가겠군요.”
“네. 우리 주 고객은 일반인이 아니라 마을을 찾아다니는 군소 상단이 될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상인들을 대상으로 약품을 무료 제공할 생각이지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약품의 효과는 자신을 하고 있으니 일단 입소문만 퍼진다면 매출과 수익은 자신하고 있어요.”
비록 세류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는 있지만 인공수정체 형제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대도시 인근의 소도시와 마을들을 순회하는 소규모 상단까지 만들 생각도 있었다.
“좋아요. 가능성이 충분하겠네요. 그럼 제가 도울 일은 뭐지요?”
“상단 설립에 대한 것과 상단 운영이나 타 상단과의 관계 등에 대한 전반적인 도움이 필요해요. 열심히 배울게요.”
미드레와 보라는 물론 이 일을 맡은 인공수정체 출신 유저들은 돌풍 기지의 생활과 형제들의 일자리가 걸린 일이라 그 각오가 대단했다.
“그런 거리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럼 그 건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따로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요. 필요하다면 우리 상단의 지점에 들러 배워도 되니까 여유를 가지고 하도록 하지요. 전 잠시 하룬 대장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알겠어요. 그럼 기다릴게요.”
세류는 하룬을 끌고 옆방으로 향했다. 무료했는지 꼬고 앉아 한 다리를 흔들고 있었던 비류가 재빠르게 방 안까지 따라붙었다.
“바쁠 텐데 이렇게 흔쾌히 도와주어 고맙소.”
하룬은 진심으로 세류에게 감사했다. 자신의 사업만으로도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니에요. 대장과 생사의 위험을 두 번이나 같이한 인연이 있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요. 거래 품목이 겹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코탑과는 우호 상단이 될 테니 괜찮아요.”
세류가 그윽한 눈길로 하룬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는 그 눈길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대충 눈치를 챈 하룬이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 하룬이라는 걸 눈치 챈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곳 주민으로 알고 있는 자신에게 저런 시선을 던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룬은 왠지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그렇게 말해주니 더 고마워지는군.”
“대장은 모르죠?”
“뭘 말이오?”
세류는 하룬의 물음에 빙긋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비류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대장은 너무 눈치가 없어요.”
“……눈치?”
“언니가 대장을 많이 좋아했어요. 아니, 지금도 좋아해요.”
비류의 말은 충격이었다.
‘설마 내가 유저라는 사실을 안 건가?’
대뜸 그 생각이 들었다.
“비록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결혼도 할 수 없는 비욘드 주민과 이방인 사이지만 언니는 대장에게 연모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요. 설마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겠죠?”
“…….”
하룬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던 것이다. 세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언니가 남자를 보는 눈이 좀 특별해요.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사업을 해서 그런지 언니는 자유분방하게 연애를 하고 관계를 즐기는 나와는 달리 순수한 면이 강하죠. 그렇다고 대장이 부담 가질 건 없어요. 언니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대장을 좋아하는 거니까요. 원래 우리 언니가 좀 특별해요. 이제까지 남자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거든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린 하룬의 시선이 세류에게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하룬의 시선을 피하는 대신 부드러우면서도 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상도 한참 연상인 여자가, 그것도 이방인인 이곳 주민을 좋아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정말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나마 문신과 긴 머리카락 때문에 표정이 쉬 드러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 비류가 또 물었다.
“대장, 혹시 결혼했어요?”
하룬은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세류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아뿔싸!’
자신은 이미 아리에게 마음을 준 터였다. 사실 그에게 있어 세류는 큰 존재감이 없었다. 다만 그가 홀과의 풋사랑을 통해 마음속에 세운 이상형과 어느 정도 겹치는 점들이 있기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결혼했다고 할걸.’
해란 자매와의 관계를 통해 마음이 없다면 단호하게 그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은 하룬이다. 물론 좋아하는 마음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깊어지만 나중에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휴우~!’
하룬은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정신없이 바빠 잊고 있었던 아리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헌신적인 그녀에게 결국 마음을 열기는 했지만 비욘드에 접속하느라 제대로 둘만의 시간도 갖지 못한 상황이기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중이다.
하룬은 굳게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나도 세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자로서도 그렇지만 동료나 친구로서도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오. 하지만 이 감정은 남녀 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에게 느끼는 호감과 관심이오. 게다가 내겐 약혼녀가 있소. 난 세류를 좋은 친구로, 좋은 동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룬의 말에 세류의 얼굴색이 변했다. 파르르 떠는 긴 눈썹이 애처로워 뭔가 큰 죄를 지은 기분이었지만 무심하려고 노력했다.
“쯔쯔!”
비류가 혀를 찼다.
“거봐, 언니. 내가 그랬지? 대장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사귀는 사람이 없으려고? 게다가 두 사람은 이방인과 여기 주민이라는 명백한 신분의 한계까지 있으니 나중에 다치지 말고 그 마음 접으라고 했잖아.”
가만히 들어보니 다른 분야는 몰라도 남자관계에 있어서는 비류가 세류보다 고수인 모양이다. 아마도 몇 번 그녀에게 충고를 한 모양인데 세류가 듣질 않았던 것 같다.
“괘, 괜찮아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걸요.”
무척이나 처연하게 느껴지는 세류였다.
“철모르는 여자라면 모를까, 하룬 대장과 같은 분에게 여자가 없을 리가 없지요. 전 다만 대장과 같은 남자라면 굳이 성관계를 하지 못해도, 결혼할 수 없다고 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고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 특이하게도 대장처럼 존경할 수 있는 남자에게 마음이 가거든요. 후훗! 정말 멋지게 차였네요. 아니 당연한 것을 혼자서 상상하고 있었던 거지요.”
세류의 말을 듣는 하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외모나 분위기가 아니라 존경할 수 있는 남자여서라고? 도대체 내가 어딜 봐서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하룬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절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무척 위안이 되는군요. 생전 처음 좋아한 남자가 다른 방식이라도 날 좋아해 준다니 기뻐요!”
“세류는 좋은 여자에요. 분명히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하룬이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고마워요. 그래도 날 친구로 생각해줘서.”
“무슨 말을. 아마 약혼자 이전에 세류를 만났다면 다른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세류는 스스로의 외모나 품성, 그리고 매력에 자신감을 가져도 돼요.”
“후훗! 거칠기만 한 줄 알았더니 여자 달래는 것도 제법이네요. 고마워요. 정말 큰 위로가 되었어요.”
정말 그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세류의 얼굴은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다만 물기 젖은 눈이 표현해내는 감정은 여전히 슬펐지만 말이다.
“호호호! 두 분이 이방인과 주민을 뛰어넘어 친구가 되었으니 남들이 알면 많이 놀랄 거야. 근데 대장, 뫼비우스는 왜 안 보여요? 난 대장을 따라다닐 줄 알았는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비류가 마치 여동생처럼 변하게 발을 놓았다. 그 덕분에 하룬은 이상한 감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그 세계에서 정보를 취급하는 사업을 벌인다고 무척 바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군요. 그런데 친구 동생에게 아직도 그런 딱딱한 말투를 쓰면 어떡해요. 앞으로는 오빠로 깍듯하게 모실 테니까 편하게 대해 줘요.”
“그, 그럴까?”
“그럼요. 오빠, 앞으로 이 철없는 동생 좀 많이 도와줘요. 난 그래도 철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매일 나보고 철 들으라고 야단만 쳐요.”
비류가 샐쭉한 표정으로 마치 이르듯 속삭였다. 분명히 자신의 또래일 텐데도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하하하!”
“얘는!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랬잖아. 오늘도 나 때문에 분위기가 깨질지 모른다고 가만히 있으라고 그렇게 구박을 해 놓고는. 봐! 내가 안 따라왔으면 언니는 오늘도 가슴앓이만 했을 거잖아. 이런 일은 원래 제3자가 개입해야 붙든 깨지든 빨리 결판이 나는 거라고.”
혀를 날름 내미는 비류의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 소녀 같아서 하룬과 세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덕분에 무거워야 할 분위기가 많이 가벼워지고 밝아졌다.
“난 의뢰가 있어 가 봐야 해.”
하룬이 편하게 말을 놓았다. 비록 엄연한 나이 차이가 있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세류와는 친구 사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두어야 나중에 편해질 것이다.
“알았어. 잘나가는 용병이라서 그런지 정말 바쁘네.”
“……나중에 만나면 근사한 식사라도 대접하지. 기억나? 후크란 산맥에서 노숙한 거.”
“응. 생각해 보면 그때가 좋았어. 눈앞으로 쏟아져 내리던 수많은 별들도 그렇고, 왠지 포근하게 느껴졌던 밤공기도 그렇고.”
“나중에 후크란 산맥에 있는 우리 본부로 초대할게. 온천도 있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너라면 좋아할 거야.”
“고마워. 꼭 갈게. 아무튼 이렇게 감정 정리를 하게 돼서 다행이야. 대장, 아니 널 다시 못 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후후후! 우리가 친구라, 친구! 후후! 정말 좋아!”
친구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는 세류의 얼굴은 많이 밝아졌다.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마. 내가 제대로 상단이 돌아갈 때까지 신경 쓸 테니까. 우리 세상에 있는 그 친구도 걱정하지 말라고 해.”
“데모 시티의 시장이 편의를 봐주기로 했으니까 조금 도움이 될 거야. 그래도 가르칠 것들이 많을 텐데 바쁜 사람 시간을 너무 빼앗는 것 같아서 걱정이네. 그럼 부탁해.”
“걱정 말라니까! 내가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도 슬퍼 보이는 세류의 눈망울에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이 잘한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성장기를 힘들게 보내게 된 것도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 양부모의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당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 언제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겁니다.’
또 하나의 인연을 정리한 하룬은 왠지 쓸쓸한 마음이 되었다.
“이제 우리 확실하게 친구가 된 거 맞지?”
하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묘한 눈빛을 던졌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날 한번만 안아 줘.”
“…….”
하룬은 당황스러웠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눈빛을 통해 새어 나갔나 보다. 세류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하룬은 너무 순수해. 나도 연애 경험은 없지만 너도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자를 잘 몰라. 하지만 사려가 깊지. 그 거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하룬이 나중에 우리가 서로 다칠 것을 생각해서 이렇게 정리해 준 것을 난 잘 알아.”
그것까지 짐작할 줄은 몰랐기에 하룬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정말 고마워! 어쩌면 이런 결과를 오래전부터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오랫동안 당신을 좋아한 여자로서 당신의 품에 한번 안기고 싶어.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어. 내 순수했던 마음을.”
하룬은 금방 대답할 수 없었지만 거부할 마음도 의지도 없었다. 이 순간만은 그녀가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눙력이 있는 여자가 나같이 별 볼일 없는 남자를 좋아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 정도야.’
하룬의 눈빛이 부드러워지자 세류가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꽈악!
그녀가 이제껏 품어온 감정의 강도를 알려주려는 듯 박치기를 하는 것처럼 뛰어들어 안겨 하룬의 허리를 감는 세류의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갔다. 단단한 하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세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남들은 10대 초반이면 경험하는 첫사랑을 그녀는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경험했다. 그것도 같은 유저도 아닌 게임 속 NPC에게 말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하룬을 만나 충분히 행복했고 많이 고통스러웠다.
꼼꼼하고 완벽한 성격과 아버지의 과한 기대로 인해 늘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그녀였다. 동생인 비류처럼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접속한 비욘드에서 만난 하룬이라는 무뚝뚝하고 거친 용병은 어느 순간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떠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었고, 맺어질 수 없는 사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슴 시리게 좋아했던 사람이다. 자신을 쳐다봐주지 않아도 행복했고, 자신을 생각해 주지 않아도 외롭지 않았다.
‘안녕, 늦게 찾아온 환상과 같은 내 첫사랑! 이제는 사랑 대신 우정으로 당신을 내 마음에 담을게요.’
그녀는 오래도록 하룬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 어름ㅇ르 축축하게 적신 후에야 겨우 마음을 정리하고 눈물 젖은 눈으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갔다.
‘미안해요, 세류.’
자신이 이럴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룬은 아리나 자신이 아니라 세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빨리 선을 그은 것이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똑같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만 세류는 나이아나 위신느와 같은 정령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귀속된 정령으로 그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와는 아예 대화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마음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상황이기에 그녀들에게는 유혹과 충동을 느낄지라도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세류는 아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격과 기회를 가진 능력과 뛰어난 미모의 아름다운 여성인 것이다. 또한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령들에게 그러하듯 그 마음을 즐기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지만 자신을 좋아해 준 여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은 미안하고 또 미안한 일이었다.
하룬은 세류가 합류해서 시끄러워지는 옆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숙소로 향했다. 이젠 자신이 없어도 헤니가 알아서 잘할 것이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세류를 볼 자신이 없었다.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하룬의 발걸음은 유독 무거웠다.
무거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온 하룬은 로그아웃을 했다. 캡슐 내부의 확장된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누워 기다리던 하룬이 캡슐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 오빠!”
벨이 그를 반겼다. 아리는 돌풍 기지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벨이 홀로그램 영상을 대여섯 개 띄워 놓은 채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웬만해서는 나오지 않는 하룬인지라 벨이 눈을 크게 떴다.
“하하! 아니야.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나왔지.”
“핏!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시지. 아리 언니 보러 나온 거지?”
벨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는데 삐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지난번에 아리와 데이트를 한 후 어색한 상태로 비욘드에 접속한 터라 아직 그 감정이 남아있는 하룬으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니야. 사실은 대원들이 모두 수련하러 나가서 너와 아리도 보고 기지 사정도 알아볼 겸해서 나온 거야.”
“풋! 어울리지 않게 변명은. 칫, 다시 한 번 더 둘이서만 데이트하면 그때는 정말 삐칠 줄 알아. 오빠나 아리 언니 둘 다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좋아하더라도 내 앞에서 좋아하라고. 질투 같 것은 하지 않을 테니까.”
“……알았어.”
하룬은 공연히 주눅이 들어 마지못해 대답을 했지만 속마음은 무척 심란했다.
‘젠장! 이거 아리랑 진도도 많이 나가지 못하겠네.’
세류로 인해 뭔가 허탈하면서도 외로움 비슷한 감정을 느낀 터라 오늘은 아리를 통해 그런 감정들을 떨쳐 버리고 싶었는데 벨은 둘만의 시간을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잠깐 나 샤워 좀 하고 나올게. 야! 그만 쳐다봐!”
자신의 알몸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훔쳐보는 벨의 시선이 부답스럽다.
“칫! 보는 게 뭐 어때서? 하나밖에 없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을 일에 파묻히게 만들었으니 오빠 몸으로라도 성교육을 시켜줘야 할 거 아니야.”
“얘가 갑자기 왜 이래.”
하룬은 아랫도리를 감추고 황급히 옷을 입었다. 이제는 캡슐 내부에 부착되어 있는 샤워기의 샤워로 만족하고 아예 캡슐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동생이라도 다 큰 남자의 알몸을 물끄러미 보게 만드는 것은 오빠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옷을 입은 하룬은 캡슐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래, 기지는 어떻게 돌아가니?”
“응. 별문제는 없어. 조금 있으면 아리 언니가 올 거니까 언니에게 브리핑해 달라고 해.”
벨과 아리는 각기 캡슐과 아즈만과의 뇌파 공유를 통해 하룬이 캡슐 밖으로 나오는 것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구기지에 가있던 아리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이곳으로 건너올 것이다.
“그래. 근데 넌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정찰 호크를 통해 벼리의 동선을 확인하고 있어.”
“벼리?”
“오늘 새벽에 기지를 떠났거든.”
그 말을 듣자 마늘 팀장이라는 여자가 생각났다.
“아! 그럼 GG의 정보는 어떻게 됐어?”
“그건 다 빼냈어. 아마 그 여자는 데드 벙커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게 상태를 세팅해두었거든.”
“다행이다. 벼리가 의심을 받으면 안 되는데.”
“괜찮을 거야. 다른 유니온의 GG 조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수시로 자장풍이 생성되고 그 규모도 커서 자장 이상 현상이 계속 지속되는 코원 유니온의 GG는 유성도 사용하지 못하고 정찰기를 운용하지도 못하니까.”
하룬은 벨의 말에 걱정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역동적으로 삶을 개척한 강인한 의지를 가진 인공수정체 친구에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치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위험한 곳을 찾아들어가는 길이니 만약 잘못된다면 마음이 꽤나 아플 것 같았다.
“그녀를 통해 알아낸 정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줘.”
“응. 일단 이쪽 영상을 봐, 오빠. 내가 그 여자의 무의식에서 추출한 정보를 바탕으로 만든 조직도야.”
하룬은 벨이 새로 띄운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꽤 복잡해 보이는 조직도가 있었다.
“GG는 최소 54개 유니온에 지부를 가지고 있어. 코원과 같은 빅 유니온들은 예외 없이 지부가 설치되어 있어. 그들 조직의 본부 위치는 마늘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직은 대충 알고 있더라고. 이들의 조직은 본부와 지부 공히 열세 명의 원로들이 구성하는 지도부와 그 대표인 원로원장이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어.”
언제부터 원로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GG는 아홉 명의 원로들이 지배하는 유니온과 유사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전 세계의 GG 조직을 지배하는 원로들 역시 한 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문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유니온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중 코원 유니온의 GG 지부장이 세계 본부의 한 원로인데 해시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조사를 해 봤는데 가명인지 그런 이름을 가진 인물은 없었어. 그 정체는 코원 지부 수뇌부인 열세 원로 중 한 가문의 적자인 마늘도 알지 못하고 있어. 대충 짐작만 할 뿐이지.”
“당연히 노블이겠지?”
“응. 유니온의 재정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이가家 출신 원로인 비유가 마늘이 GG 코원 지부장으로 추측하고 있어.”
하룬은 이가나 비유에 대해서는 잘 알ㅈ리 못했다. 다만 이가李家가 유니온의 예산을 다루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재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가문이라는 정도만 알 뿐이다.
“코원 유니온 지부는 GG에서 막강한 발언권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데드 벙커라는 시설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래.”
“그래? 그렇다면 데드 벙커를 반드시 파괴해야겠군.”
아직 무력이나 세력을 포함해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이기에 정면 승부를 할 수 없어 특정 시설을 공격해서 피해를 입히는 수밖에는 없었다.
“도대체 GG의 목적이 뭐야?”
“세계 단일 정부에 의한 세계 경영!”
“뭐?”
정말 황당한 목적을 가진 조직이다. 일개 조직이 감히 세계를 경영하겠다니. 정말 꿈의 크기만은 인정해줘야 했다.
“아마 휴먼 가드가 없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몰라. 초기 유니온들의 과학자들과 기업가들 중 상당수가 글로리 가이아에 속해 있었거든.”
“그래?”
그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확실한 것은 나도 몰라. 다만 그 여자는 그렇게 알고 있더라고.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는데, 종말 시대 말에 어둠 속에서 숨어 분쟁을 조장하고 막대한 부를 쌓았던 거대 자본가들의 후예들이 그걸 방해했다고 그녀는 알고 있었어.”
“거대 자본가들의 후예라고?”
“응. 종말 시대 말의 분쟁은 거의 그 그룹이 막후에서 일으키거나 조장했어. 주로 무기와 제약, 그리고 에너지 분야의 사업을 하던 그 자본가 그룹은 강대국의 정치가들을 막대한 자본으로 길들여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긴장을 고조시켜 군비 경쟁을 하도록 만들었대.”
“완전히 망종들이군. 다른 것도 아니고 전쟁을 일으켜 돈을 벌 생각을 하다니.”
이제 GG와 HG의 정체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글로리 가이아는 휴먼 시대를 연 과학자 그룹들과 일부 기업가들이 그 주축이고, 휴먼 가드는 종말 시대 말부터 세상을 막후에서 조종하던 자본가 그룹의 후예들이다.
“그럼 그 마늘이라는 여자는 휴먼 가드의 목적이 뭐라고 알고 있었니?”
“그 두 조직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같은 것 같아. 다만 HG는 선택받은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GG는 신인류를 창조하고 전 세계를 직접 통치하는 거야.”
“완전히 정신병자들이구나!”
하룬은 어이가 없었다. 전 세계를 통치하겠다는 거야 역사적으로도 그런 꿈을 꾼 이들이 적지 않으니 그렇다고 치지만, 신인류 창조라든가 선택된 휴먼들만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라니.
“둘 다 우리 휴먼들에게는 독과 같은 존재들이군.”
하룬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자신에게 더 강한 힘이 생기고 적절한 기회만 온다면, 이 두 단체를 세상에서 말살시켜 버리고 말 것이다. 자신들이 세상의 모든 휴먼들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휴먼 가드나, 신인류를 탄생시켜 휴먼들을 통치하겠다는 꿈을꾸는 글로리 가이아 둘 다 휴먼들에게는 존재해선 안 될 해로운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데드 벙커에서 휴먼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거군.”
“그런 거 같아. 아마 유전자 변형 실험이나 세포 조작 실험 등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다른 데는 몰라도 그곳만은 반드시 없애야겠다. 참, 코원 지부의 위치나 조직 상황은 알아냈지?”
“아니!”
뜻밖에도 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제가 걸려 있었어.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특정 단어와 정보를 대상으로 미리 최면술과 정신 금제를 가해 놓았더라고.”
“젠장, 아쉽네.”
물론 코원 지부의 위치를 안다고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쉽기만 했다. 하룬은 위성을 통제하고 운용할 수 있는 능력과 정밀 기기로도 검출이 되지 않는 극소형 생물 사이보그를 통해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두 조직 간에 싸움을 붙이려고 했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아리가 돌풍 기지에서 황급히 달려왔다.
“오빠!”
아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하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리 특유의 체향과 함께 뭉클하고 자극적인 감각이 그의 전신 세포를 흥분시켰다.
“아리야, 잘 있었어?”
“네. 보고 싶었어요.”
“후후후!”
벨 앞에서 이런 말을 직접 듣는 것은 좀 창피했지만 기분만은 최고였다. 마음을 열어서일까 그녀의 작은 표정이나 행동 하나하나에도 그의 마음은 금방 반응했다.
“칫! 정말 꼴사나워! 쳇! 쳇!”
부둥켜안고 다정한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보며 벨이 연방 입술을 삐쭉거렸다. 아리는 지난번에 벨을 쫓아갔을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라도, 벨의 시선이나 태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룬만이 어쩔 줄 몰라 당혹스러울 뿐이다.
“고생이 많았지?”
“고생은요. 기지 식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같이 일을 하는 것도 재미있는걸요. 기지 식구들이 많이 챙겨줘서 힘들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다. 벨이나 아리에게 힘든 일을 맡겨 놓고 나 혼자만 재미있게 보내는 것 같아서 늘 미안해. 나중에 좀 한가해지면 우리 셋이 같이 비욘드에 가서 여행을 하자.”
“호호호! 기대할게요.”
“쳇! 만날 공수표만 남발하고 있네. 아리 언니, 믿지 마! 오빠의 저 소리는 나한테도 한참 전부터 하던 거니까.”
“어머, 그래? 오빠, 정말 공수표에요?”
하룬을 바라보는 아리의 눈이 토끼의 그것처럼 커졌다.
“아, 아니야! 할 일이 많아서 그래. 절대 공수표 아니야. 반드시, 꼭, 절대로 약속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호호호! 알았어요. 기대할게요.”
“치잇! 나도 조금 더 기다려볼게.”
당황한 나머지 붉어진 얼굴로 쩔쩔매는 하룬의 꼴을 본 벨의 콧등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웃는 것이다. 이제야 하룬에게 서운했던 것이 좀 풀어진 것 같아 하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룬은 아리를 안은 채 소파에 앉아 벨에게 한 손을 뻗었다.
“칫! 애인이나 안아주지 동생은 왜 챙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냉큼 달려와 한쪽 팔에 안겨 드는 벨의 얼굴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변해 있었다. 물론 새로 가족이 된 기지 식구들도 있지만 하룬에게는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벨과 아리를 한 품에 안고 있으니,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체온을 나누며 두 사람이 자신을 위해 한없이 주는 따듯한 정을 음미하려던 하룬은 눈을 감은 채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대고 있는 아리를 흔들었다.
“기지 상황은 어때?”
“잘 돌아가고 있어요.”
아리는 아직 달콤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싫은 듯 대충 대답했다. 하룬 역시 언제까지라도 두 사람과 이렇게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지만 비욘드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하룬은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캡슐은 가져온 거지?”
“네. 기존 무력조들은 쏘우 조장과 연구조들이 개조한 최상급 캡슐을 이용해서 수련을 시작했어요. 새로 무력조에 들어간 이들은 기초 체력을 다지는 훈련을 하고 있어요. 캡슐의 사양이 높아서 수련 결과가 좋은가봐요. 요즘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캡슐과 연무장에서 살 정도예요. 무력조를 선택한 인공수정체 출신 식구들이 많아 바란 오빠에게 캡슐을 더 구입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다행이었다. 이렇게 유니온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니 힘이 없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모두가 생존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영흥 마을 사람들이 주축이 된 기존 기지 식구들은 이제 완전히 안정을 찾았어요. 모두 할 일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어요.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있어요. 건강 상태도 많이 좋아졌고요. 아, 그리고 기지 식구들이 많이 늘었어요. 많은 인공수정체 출신들이 캡슐을 가져올 때 따라와서 이제는 그 숫자가 삼백 명이 넘어요. 다들 젊은 휴먼들이라 기지 분위기도 더 활기차게 변한 것 같아요.”
“그래, 그 친구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여든네 명은 무력조, 서른세 명은 연구조에 배정했어요. 그리고 요리와 작물 재배 혹은 라나두 길들이기와 같은 특정한 일에 관심이 있어 따로 일을 배우기로 한 스물한 명은 기존 식구들의 조수로 배치를 했고 그 나머지는 헤니와 미드레를 따라 게임에 접속해 상단 일을 통해 비욘드에서 돈을 벌기로 했어요.”
생각보다 무력조와 연구조를 선택한 친구들이 많았다. 하룬은 다들 게임을 하면서 돈을 버는 일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의욕들이 아주 대단해요.”
아리는 감명이 깊었던 모양이다.
“그럴 거야. 유니온에서는 제대로 꿀 수 있는 꿈이나 희망이 없기에 노력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휴먼이란 존재는 예전 종말 시대에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능성이 보이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루려고 노력하는 기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대신 꿈을 꿀 수 없으면 한없이 나약해지고 만다. 보더러에 무능력자 판정을 받았던 하룬은 누구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만 보통 휴먼이라면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지.’
뭔가 이룬 이들은 쉽게 말한다.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면 새로운 길이 보인다고. 하지만 그걸 볼 수 있는 이들은 흔치 않다. 교훈이라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튼 기존 기지 식구들과 인공수정체 형제들이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벼리와 함께 온 친구들은 어때?”
“벼리가 떠나기 전 하루를 꼬박 같이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지 기지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어요. 부상도 아직 완전히 회복하려면 몇 주는 걸리겠지만 지금까지는 경과가 좋아요. 나중에 오빠가 시간을 내서 한번 만나봐야 할 거예요.”
“그러지.”
어찌 보면 대다수의 인공수정체 형제들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삶을 살아온 친구들이다. 이곳에 마음을 붙이고 이제부터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줄 생각이었다.
“황 박사님은 요즘 뭘 하시나?”
하룬의 시선이 벨로 향했다. 벨은 하룬의 어깨에 뺨을 대고 그의 체취라도 맡는 것 같더니 이내 맑고 또렷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박사님은 기지 식구들의 교육을 총괄하고 계셔. 직업 훈련은 물론이고 새로 온 인공수정체 식구들의 적응 교육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까지 맡았는데도 의욕이 아주 대단해. 덕분에 강사로 선발된 사람들이 좀 힘들어하고 있을 정도야.”
하룬은 모든 기지 식구들에게 감사했다. 구체적으로 뭐가 고마운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배움도 짧고 많은 면에서 부족한 자신을 믿고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며 스스로의 삶을 가치 있게 개척해 나가는 것은 그에게 강한 자부심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다.
“벨과 아리에게도 정말 고마워! 내가 살아가면서 평생 이 고마움을 갚을게.”
“헤헤! 동생에게 무슨 그런 말을 해!”
“호호호! 그러게 말이야. 손발이 오글거린다.”
두 사람은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이 전달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렇게 굳이 어색한 것을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 형제나 부부라고 하더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되거나 오해할 수 있어.’
말이란 것은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게 하는 것이 미덕도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하룬이다. 과묵한 것이 남자답게 보일 수도 있고 좋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오해를 하거나 소통이 되지 않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룬은 다시 비욘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리랑 데이트를 하려고 나왔지만 벨 때문에 그건 힘들 것 같았다. 아리는 벨이 보는 가운데서도 거침없이 자신을 향한 따듯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자신은 아직 어색하고 불편해서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오겠지.’
하룬은 비욘드에 돌아가기 전에 아리의 볼륨감 넘치는 몸을 힘껏 안고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비욘드로 돌아온 하룬은 헤르쉬와 연락을 하기 위해 마법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그녀는 지난번에 하룬에게 통신기 하나를 받아 갔던 것이다.
“헤르쉬!”
-하룬! 호호. 이거 감도가 아주 좋은데요.
헤르쉬의 목소리는 밝았다.
“이벨린 황녀가 다녀갔어요.”
-역시 그 건이었나요?
“네. 실종 사건의 조사와 다크니스라는 조직의 행방을 의뢰하더군요.”
-조건은요?
“헤르쉬의 부탁대로 처리했으니 조만간에 황실 쪽에서 연락이 갈 거요.”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헤르쉬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비록 목소리만이지만 하룬은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 덕분에 이제야 제국 정보 길드가 제자리를 찾게 되었네요.
“헤르쉬의 능력이라면 이전보다 훨씬 더 크게 키울 수 있을 거요.”
-고마워요. 하지만 전 정보 길드를 더 키울 생각은 없어요. 통제 가능할 정도로만 유지할 생각이에요. 다른 정보 길드들의 존재도 용납할 생각이고요.
마침 조직이 슬림화되었으니 이참에 방만했던 조직 운영을 탈피하고, 돈이 되는 고급 정보의 거래에만 매진하겠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대장을 찾는 곳이 있어요.
그건 지난번에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대장이 용병 길드를 이용하지 않으니 우리 길드를 통해 의뢰가 들어왔어요.
“의뢰?”
-네. 원래는 세 군데였어요. 그런데 빛의 신전은 무슨 일인지 의뢰를 철회했어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신전이 자신을 찾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이미 철회를 했다니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럼 두 군데는 어디요?”
-데빌 산맥을 경계로남부 지역을 양분한 신 테록 제국의 가르반 황제와 미노 제국의 미후론 황제가 비밀리에 하룬 대장을 찾고 있어요.
“무슨 일이지?”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아무튼 굉장히 중요한 일인 것만은 확실해 보여요. 대장에게 그들이 찾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무려 50만 골드를 걸었으니 말이에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들과 만날 때가 아니었다. 이미 두 건의 의뢰를 받은 상황이다.
-공교롭게도 양측은 파이린 제국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츠루트 요새에서 대장을 기다리겠다고 하네요. 일방적으로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아주 중요한 일인 모양이에요.
마츠루트 요새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곳은 데빌 산맥을 넘어 남부의 신 테론 제국과 미노 제국으로 연결되는 대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지도가 필요해요.”
-후훗! 그럴 줄 알고 이미 버처리비크를 통해 만들어 놨어요. 워낙 버려진 땅이라 변변한 지도조차 남아있지 않거든요.
역시 뛰어난 감각을 가진 여인이다.
-그런데 새로 지도를 만들다 보니 예전 자료와는 다른 점들이 상당수 있네요. 성과 비슷한 이상한 구조물들이 몇 군데 있었고 일부 지역들에서는 상당수의 인간들이 목격되었어요. 더 자세하게 정찰을 하고 싶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포니가 잔뜩 겁을 먹어서 버처리비크들이 높은 상공에서만 머물렀기에 자세한 것은 알아내지 못했어요. 데빌 산맥이나 마츠 평원에는 조직원들이 직접 들어가기 곤란한 지역이라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했어요.
헤르쉬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낀 점들에 대해 상세하게 말을 해주었다. 한때 원수 사이였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하룬에게 넘겨주었다. 단순한 거래라면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헤르쉬도 세류처럼 나에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잠시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먼저 그 생각을 내비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스스로 생각해도 과도한 상상이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얼마 후에 돌풍 상단에서 찾아갈 겁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좀 부탁해요.”
-걱정 말아요. 내 유일한 친구가 공을 들이는 상단이니 최대한 신경을 쓸게요.
너무 선선하게 부탁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튼 그녀가 신경을 써 준다면, 이벨린의 비호와 세류의 도움이 더해져 돌풍 상단은 빠른 시간 내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참! 데빌 산맥으로 버처리비크를 보내줄 테니까 잘 쓰세요.
“그래도 괜찮겠소?”
특급 정보의 경우 버처리비크가 처리하는 것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