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벨린 황녀》
새벽부터 시작된 수련은 아침 식사가 준비되기 바로 전까지 이어졌다. 마정석의 도움으로 경지가 올라간 기존 대원들은 새롭게 가진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라 식사 시간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돌풍 용병대원이 된 아카족 전사들은 하룬으로부터 순수한 마정석을 받아 복용했다. 처음에는 그들도 수련 검식을 통해 마나 오션을 만들어 주려고 했었지만 이미 마수의 힘을 운용하고 있는 그들을 고려하여 일단 복용부터 시킨 것이다.
하룬은 샤키의 눈을 활성화시켜 먼저 마정석을 복용한 옥세르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들여다보았다.
‘호오! 이런 경우도 가능한 거군.’
옥세르의 경우는 특이했다. 마나 오션이 없는 그는 순수한 마정석의 기운이 마수의 힘을 가지고 있는 문신 부위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당장 문신의 크기가 작아진 것은 기본이고 마수의 힘을 사용하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은 물론 연거푸 몇 번이나 마수의 힘을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하하! 우리 대장 최고다! 나 이제는 두 개까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두 개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려고 노력하던 옥세르는 단숨에 두 개의 힘을 동시에 발휘하고도 아무런 후유증을 느끼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마수의 힘이 새겨진 문신이 마나 오션에 축적된 마나의 역할을 하는 거구나. 마정석의 마나가 이들에게는 기사나 마법사의 마나처럼 마수의 힘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어.’
더 고무적인 사실은 마정석의 힘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보충이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의 선조는 이런 방법을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몇 개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물론 오랫동안 마수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것을 확인한 하룬은 나머지 아카족 전사들에게도 마정석을 주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사들은 대부분 그 능력이 두세 단계 이상 올라가 버렸다.
주술사인 레미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마정석이 기운이 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그녀의 주술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해져서 사기를 끌어올리는 주문을 외우면 전사들의 능력은 한순간에 두세 배가 증가할 정도였다.
물론 싸가지가 정제한 마정석이 큰 역할을 했지만 하룬은 대원들의 큰 진전이 마정석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카족 대원들은 물론 마리와 헤니까지도 이미 상당 부분 그 기초가 되어 있었기에 마정석을 매개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꿈을 꾸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원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법이지.’
하룬도 짧은 기간의 수련이지만 얻은 것들이 꽤 많았다.
아카족 출신 대원들의 경우를 참조해서 열 개의 마정석을 흡수해 마나 오션에 갈무리하지 않고 열 개의 문신의 핵심적인 부위에 축적했다. 그 결과 세 개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거의 한 시간 이상 그 힘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레미가 새길 수 있는 문신을 통해 마수의 힘을 모두 얻은 것도 큰 수확이지만 무엇보다도 정령들을 박살과 동화시킨 것이 생각하지 못한 힘을 주었다. 그동안 정령들의 능력도 엄청나게 올라갔던 것이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피닉스를 박살에 동화시키자 믿기지 않게도 오러 블레이드와 비슷한 플레임 블레이드가 솟아났던 것이다. 플레임 블레이드는 그 열기는 물론이고 강도와 절삭력에 있어서도 딜런의 오러 블레이드를 견딜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나이아는 물로 이루어진 아쿠아 블레이드를, 위신느는 윈드 블레이드를, 그리고 라이피는 소일 블레이드를 생성시킨 것이다. 그 각각의 위력은 플레임 블레이드와 동일하면서도 약간씩 차이를 보였다.
아쿠아 블레이드는 치유의 힘과 함께 다수를 상대하는 데 강점을 보였고, 윈드 블레이드는 대상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파괴했다. 그리고 소일 블레이드는 절삭력보다는 강력한 타격에 강점이 있었던 것이다.
마정석의 마나를 마저 흡수하기 위해 부단히 마나 플로를 운용하는 것은 물론 메신저 스킬과 검술의 수련에 이어 마수의 힘, 그리고 정령검까지 두루 수련을 해야 하는 하룬의 일과는 하루가 몇 시간처럼 짧았다.
오늘도 하룬은 오전 수련을 한 후 대원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바로 숙소로 건너와 마당에 있는 큰 바위 옆에 앉아 휴실을 즐겼다. 그의 눈은 휴식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무기를 휘두르는 전사들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할 일이 많구나.’
타림 공방에 의뢰한 방어구 문제도 챙겨야 하고 세류가 도착하면 상단 일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황녀인가 하는 여자는 안 오려나?’
헤르쉬의 정보가 틀릴 리가 없다. 그렇다면 벌써 왔어야 정상인데 소식이 없으니 마음이 좀 조급해졌다.
‘상단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오지 않으면 그냥 마탑의 의뢰만 수행하자. 그것만 성공해도 한동안은 의뢰를 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마음을 정한 하룬은 자신의 새 무기를 한참 휘두르다가 다가온 두르본을 볼 수 있었다.
“대장! 나랑 대련하자.”
“대련?”
“응. 대장 무지 세다고 딜런 경이 그랬다.”
두르본의 눈은 기대와 흥분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디온과 옥세르도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니 그들 간에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았다. 오로지 검술만을 익힌 딜런은 요즘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는 하룬과의 대련을 통해 전투력을 배가하고 있었다.
“대장이 익힌 것들을 제대로 조화시켜 사용한다면 소드 마스터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딜런은 변칙적이면서도 강력한 위력을 가진 하룬의 다양한 공격에 감탄을 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강력한 위력을 가졌던 것이다.
두 사람의 대련은 워낙 주변 환경을 많이 파손해 멀리 가서 따로 하기 때문에 대원들은 누구도 하룬의 진짜 실력을 알지 못했다. 다만 딜런이 하는 소리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좋아!”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 참이다. 이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는 대련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기를 들고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딜런과 같은 실력은 없었다.
전사들이 살벌하게 대련하는 모습을 본 하룬은 그들에게 단단한 노간주나무로 만든 목검이나 목도를 추천했었다. 특히 마수의 힘을 사용하는 경우 대련이 위험해지는 것을 자주 봤었던 것이다.
당장에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딜런을 비롯한 기존 대원들도 흥미로운 눈을 하고 모였다.
“딜런 경, 소란스러워질 수 있으니 주변 좀 챙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희는 후원으로 가 있겠습니다.”
대련은 흥미로웠지만 그들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티노와 도네이스, 그리고 마리는 마정석의 마나를 아직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출발하기 전까지는 한시도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딜런은 그들을 지도하는 한편 자신의 수련도 해야만 했다. 타니엘라와 미루스 역시 마법서 해독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기존 대원들이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이자 하룬은 마당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목검들 앞으로 갔다.
“난 이걸로 하지.”
현실에서 쓰는 박살과 비슷한 길이와 무게를 가진 목검 하나를 고른 하룬은 마치 꼬챙이처럼 생긴 목검을 들고 자신에게 투기를 보이는 두르본과 마주 섰다.
“간다!”
슈욱!
말과 동시에 두르본의 발이 폭발적으로 하룬을 향해 쏘아졌다.
‘이크!’
발에 새긴 람비의 발 문신을 활성화시켰는지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목검의 끝이 인중을 향해 날아왔다. 다소 방심했던 하룬은 급하게 머리를 뒤로 눕히는 것과 동시에 목검으로 위로 쳐 올렸다.
슈슈슉!
첫 공격을 놓쳤지만 두르본의 목검은 마치 세 개로 늘어난 것처럼 목과 양 가슴을 찔러왔다. 비록 찌르기 공격이었지만 검봉에는 강력한 파괴력이 느껴져 그 부위가 저릿저릿했다.
‘프로즐리의 힘까지?’
틀림없다. 두 개의 힘을 동시에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힘이 충돌할 수 있기에 노련한 상급 전사들만이 가능한 능력을 두르본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두르본 사이의 공간이 세 개의 검봉에 의해 뚫리는 감각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하룬의 몸이 마치 허깨비처럼 흔들리더니 몇 걸음 뒤로 사라졌다.
‘빠르기에는 빠르기로!’
두르본을 어떻게 상대할지 감을 잡은 하룬의 몸이 연기처럼 흔들리더니 순간적으로 두르본에게 이어졌다. 너무 빨라 잔상이 남아 그렇게 보인 것이지만 그걸 본 순간 두르본의 얼굴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차앗!”
폭발적인 근력으로 마치 수십 개의 팔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두르본의 움직임은 가공할 속도로 두르본을 덮치는 하룬의 전면에 수십 개의 검봉을 나타나게 만들었다.
‘제법이군.’
디온과 옥세르를 비롯한 전사들은 프로즐리의 가공할 괴력을 단지 힘으로만 쓰는 데 반해 두르본은 그 힘으 빠르기로 변환까지 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힘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 속도는 쉽게 제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공격을 지켜보는 전사들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동안 뭔가 따로 수련을 하는 것 같았는데 이런 공격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람비의 발과 프로즐리의 힘을 적절하게 결함한 두르본의 공격은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비록 마수의 힘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본신의 능력만으로도 그녀의 빠른 움직임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하룬은 막 그녀의 검봉에 닿으려는 순간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타다다땅! 따다다당!
검과 검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환상처럼 보였던 수십 개의 검이 모습을 감추었다. 하룬은 두르본이 프로즐리의 힘을 이용해서 펼친 연속 찌르기 공격을 하나씩 막아낸 것이다.
너덜거리는 검봉을 본 두르본의 눈빛이 강해졌다.
‘이것으로도 안 되는 건가?’
얼마 전 세 개의 힘을 한꺼번에 사용하는 하룬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결연한 각오로 자신을 다그친 끝에 두 개의 힘을 동시에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들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자신의 장기인 연속 찌르기 공격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정도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허탈했다. 상대는 마수의 힘을 끌어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공격을 일일이 다 막아낸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가지.”
하룬은 아직도 활활 불타고 있는 그녀의 강렬한 눈빛을 보면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압!”
그의 목검은 빌로우 검술을 펼쳐내고 있었다. 비록 목검에 불과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며 파도를 일으키더니 이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해일이 되어 두르본을 덮쳤다.
따앙!
“흐윽!”
목검에 실린 힘은 무척 무거웠다. 프로즐리의 힘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검을 빠르게 휘둘러서 만들어낸 파도가 합쳐진 큰 파도의 거대한 힘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두르본은 빠르게 검을 휘둘러 파도를 막아내는 것과 동시에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 힘을 분산시켰다. 막 자세를 잡았을 때 이전보다 더 큰 검의 파도가 밀려왔다. 파도는 그녀를 삼킬 컷처럼 맹렬한 기세로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이를 악문 두르본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프로즐리의 힘과 람비의 발을 끌어 올려 빠른 속도로 검을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수십 개의 검이 나타났다가 합해지며 파도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빠바바박! 빠악!
강력한 타격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술 취한 사람의 그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순식간에 상대의 검이 자신의 검을 수십 차례 이상 가격한 것이다. 그 힘은 검과 함께 그녀의 몸까지 흔들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 빠르게 움직인 하룬의 검이 만들어 낸 파도는 더욱 커져 그녀를 향해 몰려왔다.
우우웅!
진짜 파도처럼 수십 자루의 검이 만들어낸 파도는 주변 대기를 흔들며 두려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두르본은 모든 힘을 끌어올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빠르기로 파도의 밑단을 찔러 갔다. 근원을 차단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꽈직!
두르본의 가는 목검이 중간 부분부터 뚝 부러져 버렸다. 의도는 좋았지만 상대의 검에 실린 역도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세 번째 검의 파도를 막을 수 없었다.
“제기랄!”
반 토막이 난 검을 빠르게 휘두르며 뒤로 물러나는 두르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감당하기 힘든 힘이 목검을 통해 그녀를 짓눌러 온 것이다. 이럴 땐 찌르는 속도를 올리기 위해 가늘게 만들었던 검이 원망스러웠다.
‘헛!’
그러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크고 강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분명히 상대와 검을 겨루고 있는데 왜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덮친단 말인가. 상대는 자신들처럼 일격필살의 검초가 아니라 제대로 수련한 기사의 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두르본이지만 이번 파도는 정말 막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내가 간다!”
갑자기 디온이 그녀를 대신해 앞으로 뛰어들었다.
수십 자루의 검이 만들어 낸 검파를 향해 넓적한 면을 가진 대도를 횡으로 휘두르는 디온이다.
꽈아앙!
진검과 목검이 부딪혀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흙먼지 속에 뒷걸음질치는 디온과 다시 생성되고 있는 검파가 얼핏 보였다.
우우우웅!
검을 휘두르는 하룬의 팔이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미처 다 가라앉기도 전에 검파는 이전보다 더 커진 모습으로 변해 디온을 덮쳤다.
“끼야앗!”
디온이 기합성과 함께 자신의 전력을 다해 대도를 휘둘렀다. 프로즐리의 힘을 대도에 담아 단숨에 거대한 파도를 가를 심산인 듯했다.
꽝!
폭음과 함께 주위에 있던 전사들이 비틀거렸다. 흙먼지와 함께 몸의 중심을 흩뜨려 놓을 정도로 강력한 진동파가 덮쳐왔던 것이다.
“다시 또 온다!”
누군가의 비명과 같은 소리에 안력을 집중해서 보니 하룬의 팔이 또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백 개의 팔을 가진 괴이한 모습의 하룬이 보일 뿐이다.
잠시 후 수백 자루의 검이 만든 파도가 쌓이고 쌓여 거대한 검파가 만들어져 디온을 향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하룬보다 훨씬 더 장대한 체구를 지닌 디온이 오히려 거인 앞에선 인간처럼 작아 보였다.
“나도 간다!”
아까부터 부들부들 떨며 투기를 간신히 누르던 옥세르가 자신의 무기를 휘드르며 전장에 끼어들었다. 이를 악물고 자신의 대도를 쥐고 있는 디온과 마찬가지로 프로즐리의 힘을 잔뜩 머금은 그의 대검이 감당하기 힘든 괴력에 부르르 떨고 있었다.
꽈아앙!
디온과 옥세르의 몸이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 충격의 여파는 숙소까지 미처 건물이 웅웅 소리를 내며 떨었고, 흙먼지를 포함한 먼지들이 공터 주변으로 춤을 추었다.
그 틈을 이용해 두르본이 자신의 애검을 잡더니 싸움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공격을 하룬은 어렵지 않게 받아내는 것은 물론 확연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레미의 눈이 강렬해졌다.
‘세 사람의 합공을 혼자서 받아내다니! 좋아, 과연 대장이 타키야의 재림인지 확인해 보자.’
탄툰 마을만이 아니라 아카족을 통틀어서 상급 전사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옥세르와 디온이다. 더구나 두르본은 나이를 생각하면 상급 전사를 뛰어넘는 실력과 가능성을 가진 차세대 부족의 지도자가 아닌가.
레미는 그런 세 명을 목검으로 혼자 상대하면서도 우세한 하룬의 능력에 놀람과 동시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낮지만 뇌리를 강하게 자극하는 웅얼거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카족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용기를 북돋는 이야기’가 레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세 명의 기세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
안 그래도 투기가 끓어오르던 전사들이 무기를 힘주어 잡고는 몇 번 망설이다가 급기야는 전투에 끼어들었다.
“나도 간다!”
바위라도 부숴 버릴 기세로 하룬을 향해 날아가는 배틀액스를 따라 람비의 발 문신을 활성화시킨 전사의 몸이 날아갔다. 그는 하룬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기사들이라면 비겁한 짓이라고 비난을 했을지 모르지만 마수와 싸우면서 생존해온 아카족의 전사들에게 있어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공격은 그 어떤 것이라도 정당화되었다.
까앙!
살벌한 예기를 뿌리며 날아가던 베틀액스는 하룬이 만들어낸 거대한 파도를 막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그 충격으로 입으로 피를 토하며 뒤로 튕긴 전사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하룬의 몸은 이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전사들의 눈에는 그를 정점으로 사방을 향해 밀려오는 거대한 검의 파도만이 보일 뿐이었다.
“끼야악!”
괴성과 함께 또 한 전사가 몸을 날렸다. 프로즐리의 힘을 끌어 올린 그의 어깨 근육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프로즐리의 강력한 힘을 담은 대도는 하룬이 쉼 없이 몸을 회전시키며 만들어낸 검의 파도를 단숨에 가를 기세로 베어 갔다.
“끼요옷!”
부들거리며 투기를 억제하던 또 한 명의 전사가 전투에 끼어들었다. 그는 날렵하게 빠진 검을 파도의 틈으로 찔러 넣었다. 파도 사이의 작은 간극을 보았던 것이다.
꽈앙!
까앙!
하룬의 검에 부딪히는 상대의 무기에 따라 다양한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누구도 하룬이 만들어 낸 검의 파도를 꺾지는 못했다. 한 사람씩 전투에 참가하면서 상황은 점입가경이 되고 있었다.
전사들은 프로즐리를 상대할 때 그러하듯 차륜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사방이 아니라 팔방을 동시에 공격했다.
비얀의 힘을 활성화시킨 전사 둘은 다른 전사들의 어깨를 발판으로 삼아 공중을 날아다니며 하룬의 머리를 노렸다. 팔스콘의 힘을 활성화시킨 전사 둘은 몸을 맡아 엉덩이와 어깨를 사용해 땅에 스치듯 날아가며 하룬의 발목과 다리를 노렸다.
어느새 하룬도 목검으로는 아카족 출신 대원들의 공격을 막아내질 못하고 박살을 꺼내 사용하기 시작했다.
“끼요옷!”
누군가의 괴성이 터져 나온다.
까앙!
누군가의 무기가 튕겨졌다.
“끄윽!”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온다.
웅얼거리며 전사들의 투기를 끌어 올리는 레미의 주술과 거친 전사들의 호흡 소리, 번들거리며 날카롭게 번뜩이는 투기 가득한 눈빛은 하룬의 몸과 마음을 최고의 긴장 상태로 만들었다.
‘즐겁다! 즐거워!’
이건 대련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고 심장이 꿰뚫리고 발목이 베일 그런 살벌한 전투인 것이다. 안 그래도 그의 방어구는 수차례 베이고 찔렸다. 피가 흐르는 것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 즐겁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전신의 신경세포가 알알이 깨어나 미친 듯이 신호를 주고받는다. 이제 위신느와는 거의 일체화가 된 듯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움직여진다.
-피닉스, 너도!
-카카카! 참느라고 혼났어!
피닉스가 기뻐하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지며 전신은 물론 박살에까지 피닉스가 스며들었다.
화르르!
“마법검이닷!”
“거리를 두고 상대해!”
다급한 두르본과 디온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아카족 전사들은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처럼 강렬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룬이 들고 있는 검은 흰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련이 막 시작될 때부터 식당에서 숙소로 연결되는 통로에 서 있었다.
“화염계 마법이 인챈트된 검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어찌 한갓 용병이 저런 귀한 검을 손에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호호호! 일룸 경은 아직도 그가 단순한 용병으로 보이는가 보네요.”
“저 정도는 저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용병하고 비교당하는 것이 기분 나빴는지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일룸을 보면서 이벨린은 피식 웃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아껴 파견해 준 친위 기사단 부단장의 짧은 생각이 너무 우스웠던 것이다.
그녀의 미소에 머리가 희끗한 노기사의 얼굴이 굳은 것을 본 이벨린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저 용병의 발이 보이시나요?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 그건…….”
이벨린의 말에 일룸이 말을 더듬는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그의 눈에도 하룬의 발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몸 전체가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그 형체나 움직임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군요. 오러 소드가 아니라 오러 블레이드를 쓴다고 해도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자라면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자가 가만히 검을 맞대 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벨린의 말에 일룸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새겨졌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으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소드 마스터 상급만이 발휘할 수 있는 탄강이 아니라면 효율적으로 상대하기 곤란할 것 같았다.
이제까지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거란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지만 저런 정도의 빠르기를 십 분이 넘게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그를 상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곤란할 것이다.
“저기 쓰러져 바닥에 뒹구는 자의 옷을 자세히 보세요.”
이벨린의 말에 일룸의 시선이 전권을 이탈해서 땅을 구르고 있는 한 전사를 보았다. 그의 옷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문신이 새겨진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저 하룬이라는 용병이 가진 검은 스치는 것만으로 화상을 입힐 정도로 가공할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는 거지요.”
자신의 일행들이 서 있는 곳은 그들과 서른 걸음이 넘는 거리였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후끈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그 열기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인 것이 분명하다.
‘지독한 열기로군.’
검의 파도가 쓸고 간 바닥은 새까맣게 타 버렸다. 전사들은 땀을 흘리며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그중 몇은 불이 붙은 옷을 끄기 위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오러가 보이지 않아 검술의 경지는 알 수 없지만 빠른 발과 이 마법검의 위력만으로도 익스퍼트 상급 정도와 견줄 수 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자신이 상대할 수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룸은 이벨린 황녀의 웃음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파이린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정치 일선에 나선 대현자들도 감탄하는 천하의 지혜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오오! 다른 종류의 힘이군요.”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이벨린의 탄성에 전장에 다시 집중한 일룸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아야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용병의 검은 오러 소드처럼 1미터가 훨씬 넘는 길이의 새로운 검이 솟아나 있었는데 그것은 반투명했고 물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아니, 아닌데!”
분명히 오러 블레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라기에는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익스퍼트, 그것도 중급이나 상급 정도로 판단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판단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타앗!”
용병의 기합성과 함께 그의 검에 솟아나 있었던 이질적인 형태의 소드는 마치 탄강처럼 전사들을 향해 날아가 그들의 무기와 충돌해서 상대의 몸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전사의 무기와 충돌한 그 소드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햇빛에 반사되어 여러 빛깔로 보이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물 덩어리가 맞았다.
“아쿠아 블레이드?”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전설에 전하길 고대 시대에 한 정령 마검사가 출현하여 물로 이루어진 특이한 블레이드를 사용했다고 했다. 비록 물 덩어리로 만들어졌지만 그 소드는 오러 소드나 오러 블레이드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했다. 전설은 그 정령 마검사가 만들어낸 오러 소드를 아쿠아 소드라고 부르며 정령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힘이라고 했다.
“후우웃! 흐흡!”
일룸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느새 검대에 꽂힌 검 자루를 잡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것이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버리지 못한 호승심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전설에나 나올 법한 정령 마검사라면 능히 자신의 상대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소드 마스터인 자신마저도 잔상과 실상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움직임을 가졌다면 그로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역시!’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일룸은 이 어린 황녀의 지혜로움에 탄복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저 천한 용병이라고 치부하며 그에게 직접 의뢰를 하기 위해 이런 곳까지 찾아와야 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길게 기른 머리카락으로 인해 그 용모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하룬이라는 용병이 소문보다 더한 실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사이기도 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강한 정령 마검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든 생각에 오한이 들었다.
‘그럼 아까 그 열기도 마법검이라서가 아니라 화염계 정령을 검에 둘러 형상화시킨 플레임 소드?’
그럴 수도 있었다. 분명 하룬을 공격하던 전사들은 수 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휘둘렀고 뒤로 튕겨 나갔다.
일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전설보다 더한 존재가 아닌가? 정령 마검사의 출현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플레임 소드의 아쿠아 블레이드라니!
‘설마 최상급 정령들과도 계약을……?’
꿀꺽!
일룸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플레임 소드는 모르겠지만 아쿠아 블레이드는 최상급 정령이 깃들어야만 한다. 그 정도라면 결코 자신의 아래는 아닌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오길 잘한 것 같군요. 저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면 반드시 의뢰를 성사시켜야겠어요. 전 그의 대원 중에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검사가 있고, 고요의 땅을 벗어날 때는 5서클 마법사 둘이 은밀히 그와 동행했다고 해서 신경을 쓴 것인데 대장 본인이 저런 실력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정말 놀라운 인물이군요.”
일룸은 이번에는 이벨리느이 말에 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도 대단했으니 말이다. 그들이 놀라는 대상은 하룬만이 아니었다. 아카족 전사들을 보는 그들의 눈에는 경탄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일개 대원들마저 저런 놀라운 힘과 기세를 가지고 있으니. 원래 소문이란 것이 부풀려지는 것인데 이 경우는 완전히 반대군요. 만약 이것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면 저 용병은 향후 대륙 정세에 대단히 중요하겠어요.”
“그, 그렇습니다. 저자들이 비록 마나를 쓰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마나에 비견할 미지의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한 전사가 휘두른 도끼에 마치 나무처럼 깨끗하게 베어진 바위의 절단면을 보고 있었다.
분명히 익스퍼트 기사를 상징하는 검기는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들의 무기는 오러 라이트조차 보이지 않았다.
‘놀랍다! 어떤 힘이기에 검기처럼 저렇게 깨끗하게 바위를 절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벨린 황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따라오면서 이렇게 놀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강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왜 여태까지 알지 못했을까? 기사들만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일개 용병들이 기사들과 비견할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니, 사실 충격이었다.
일룸은 선대 황제 때문에 세상에 그 존재를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대공의 친위 기사단에만 박혀 오랫동안 세상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세상은 넓구나! 짧은 시간에 제국을 열고 초석을 단단하게 세운 이벨린 황녀의 지혜로움만 해도 충분히 놀랍거늘 이자들은 더 하지 않은가.’
뒤를 돌아보니 궁정 마법사 베킬번과 친위 기사들이 놀란 눈으로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그 표정이 마치 넋이 나간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처음 보는 기막힌 능력이니.’
만약 자신들과 이자들과 붙는다면 상대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졌다.
주술로 아군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여자 주술사와 미지의 힘을 사용하는 스무 명 정도의 대원들, 그리고 아쿠아 소드와 플레임 소드를 쓰는 용병대장이라는 자를 비슷한 숫자의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일룸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숫자는 비슷하지만 자신들이 열세였다. 자신이 대장이라는 자를 상대한다고 해도 평균적으로 익스퍼트 중급 정도에 불과한 나머지 기사들은 저 흉측한 문신을 전신에 새기고 있는 자들을 당할 수 없다.
‘처절한 생사투를 수없이 경험한 자들이야.’
철저하게 예의를 따지며 겨루는 기사투나 마상 전투가 아니라 몸으로 난전을 수없이 겪은 자들이다. 비록 그 경지가 많이 차이난다고 해도 일격필살의 거친 의지를 담아 서슴없이 빈틈에 자신의 무기를 내지르는 그들이다. 대련임이 틀림없는 상황인데도 이럴 정도의 독기와 살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비겁하다고 욕을 먹더라도 상대를 죽이고 말 것이다.
‘휴우!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무척이나 쉬운 임무로 여겼던 일이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런 그의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광경이 보였다.
‘세상에! 새다, 새야!’
갑자기 하룬이 새처럼 자유롭게 날기 시작한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하룬이라는 용병은 아쿠아 소드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팔을 흔들며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땅에 내려오지 않고 공중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지상의 전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까앙! 깡!
꽈앙!
이쯤 되면 어느 한쪽이라도 지칠 만도 한데 아직 전투는 살벌하기만 했다. 부하들은 마치 그 대장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기세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고, 그 대장이라는 작자도 부하들의 생명 따위는 관심이 없는 듯 표홀한 움직임으로 날아다니며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켜보기 시작한 지가 벌써 이십 분은 지났을 것이다. 그 전부터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
‘지독한 놈들!’
이 정도로 전력을 기울여 싸운다면 소드 마스터인 자신이라면 몰라도 함께 온 기사들은 마나가 고갈되어 상대의 무기에 당할 수밖에 없다.
비록 차륜전의 형태를 취하기는 했지만 놈들 대부분은 일수 일 검에 전력을 기울이는 공격 패턴을 하는 터라 지금쯤이면 지쳐 쓰러져야 정상인데 놈들은 기를 쓰고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제길! 세상 헛살았군.’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귀족 출신의 기사가 이 용병대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귀족과 기사의 명예를 더럽힌 그자를 반드시 손봐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룸이다. 하지만 평시에도 이렇게 살벌한 대련을 벌이는 용병대라면 자신도 들어가고 싶다.
‘어쩌면 그자도 이런 용병대의 실력에 반했을지도.’
이제는 오히려 그 기사를 만나보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단한 신분의 틀을 깰 수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버리고 이런 강자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장내의 싸움이 끝나 있었다.
뭔가 웅얼거리던 여자 주술사가 힘이 다했는지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지독한 자들이군요.”
일룸은 이벨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한 점의 힘도 남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싸운 그들에게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수련이라면 실력이 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누가 어떻게 할지 모르는 이런 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모든 힘을 소진한 것은 질책받아 마땅하지만 말이다.
“헛!”
뒤에서 한 기사의 경악성이 터졌다.
“뭐야?”
일룸 자신도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 곧 죽을 것처럼 쓰러져 있던 자들이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들을 향해 강렬한 살의를 쏘아대고 있었다.
‘속임수였나? 아니, 아니야! 저들은 진짜로 모든 힘을 다 소진했어. 분명히 치료가 된 거야. 저들의 몸에는 상처가 보이지 않아.’
일룸의 눈에 보인 전사들은 마치 넝마처럼 변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상처 부위는 한 군데도 볼 수가 없었다. 아까 분명 대부분이 피가 낭자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짧은 사이에 상처를 다 치료했다는 건데 뻔히 지켜보고 있던 그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일룸은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먼 거리에서도 상대의 힘과 마나를 대충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은 그들이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까지 간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일룸은 이상한 기척을 뒤늦게 감지한 하룬이 상급 포션을 마신 나이아를 전사들의 몸속에서 진동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물의 정령은 그 자체로도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상급 포션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전사들이 금세 회복된 것이다.
“정말 황당하군.”
방금 전까지 지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던 이들이 지금은 자신들을 향해 흉흉한 기세를 보내는 걸을 본 일룸은 이해가 되질 않아 황망한 얼굴이었다.
“그만! 손님이다.”
하룬의 말에 전사들이 경계를 풀었다.
전사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온 하룬의 방어구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투구를 비롯해 여기저기 무기에 찔리고 베여 넝마를 방불케 했지만 신기하게도 깨끗한 상태였다.
“이벨린 공녀?”
이벨린은 중간까지 걸어온 하룬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설마 그가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하룬이 헤르쉬를 통해 자신의 영상이 담기 정보를 건네받았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댁이 돌풍 용병대의 하룬 대장이군요.”
“반갑습니다. 본인이 하룬입니다.”
하룬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을 했지만 일룸의 눈매는 금방 날카롭게 변했다.
“예의를 지켜라! 대파이린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시다!”
일룸의 호통과 함께 친위 기사들이 일제히 검파에 손을 댔다. 그와 동시에 하룬의 뒤쪽에 있던 전사들도 일제히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친위대를 덮칠 것처럼 흉흉한 모습이었다.
“허어! 이런 무식한 작자들이 있나!”
일룸이 막강한 기세를 사방으로 발산했다. 소드 마스터 중급에 올라서야 겨우 쓸 수 있는 기술인 마나 방사였다. 삽시간에 그의 전방으로 마나가 방사되어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불특정 다수의 기를 죽이는 데 무척 효과적인 기술이었다. 이것은 마치 맹수의 피어처럼 상대에게 강렬한 공포를 주는 효과가 있었다.
역시 일룸의 의도대로 전사들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전사들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인 것이다. 물론 전사들이 더 이상 마수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말이다.
그 순간 하룬의 입에서 대기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기합성이 터져나왔다.
“합!”
기합성과 함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나의 방사가 마치 철벽에 부딪힌 듯 막혀 버렸다.
‘허어, 놀랍군! 마나 방사마저 막을 정도란 말인가?’
일룸의 눈에 숨길 수 없는 놀람이 떠올랐다. 도무지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드 마스터인 것도 같고 어찌 보면 그 이하인 것도 같았다.
“제국에 황녀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서 실례를 했습니다. 예의가 부족했다면 다시 인사하지요. 용병 하룬이 인사드립니다, 황녀 전하!”
하룬은 당장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비록 양 무릎을 땅에 붙이고 얼굴을 바닥에 대는 극상의 예의는 아니었지만 일룸을 포함한 친위대는 하룬 정도의 인물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느끼고 기세를 풀었다.
“아직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지요. 반가워요. 이벨린이에요.”
“네, 황녀 전하.”
“귀하에게 할 말이 있어 들렀는데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네요. 본 제국에 이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정말 뿌듯하군요.”
이벨린은 부드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원래는 이렇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 제국의 심모원려를 깨부순 그에게 강렬한 공포와 경고를 주어 강압적으로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그의 실제 능력을 본 후론 그 의도를 버린 것이다.
“무슨 일이신지?”
“제국의 주인께서 귀하와 돌풍 용병대에게 시킬 일이 있어 이렇게 직접 왔답니다. 그분께서 직접 용병에게 의뢰를 하시는 것이니 영광으로 생각하세요.”
제국의 황녀가 직접 찾아왔으니 이 정도면 용병을 상대하는 데는 무척 과하다고 할 수 있는 대접이다. 당연히 하룬이 감복할 거라고 생각한 이벨린은 곧 들려오는 하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귀한 분의 말씀을 들어 드릴 수 없겠습니다.”
“무슨…….”
일어나라는 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일어난 하룬은 길게 늘어뜨려 얼굴 대부분을 감춘 상태에서 깊고 맑은 눈빛으로 이벨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나 돌풍 용병대원들은 파이린 제국의 주민이 아닙니다. 제 고향과 우리의 거주지는 후크란. 그곳은 그 어느 국가도 소유를 주장할 수 없는 땅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룬의 당당한 말에 이벨린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설마 그가 타국인임을 주장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설사 타국이라고 해도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면 이런 법은 없었다. 이벨린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게다가 우리 돌풍 용병대는 이미 받은 의뢰가 있어서, 파이린 제국 황실의 의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무척 아쉽게 되었군요.”
“이, 이런 버릇없는 자! 네가 감히 본 제국의 땅에 들어와서 고귀하신 황녀 전하를 대하고도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냐? 네가 정녕 살기가 싫은 모양이구나!”
일룸이 벼락처럼 소리를 쳤지만 하룬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예의는 충분하게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예의 문제가 아니라 의뢰 건이라면 이미 선약이 있으니 당연히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의뢰를 어찌 다른 하찮은 자들의 의뢰와 같이 여긴단 말이냐? 게다가 하찮은 용병이 고귀하신 황녀 전하에게 감히 고개를 뻣뻣이 들고 이야기를 하다니. 아무리 배운 것이 없는 용병이라도 그런 예의도 모른단 말이냐?”
일룸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하지만 하룬의 얼굴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이벨린 황녀 일행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본인과 돌풍 용병대는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몸입니다. 자꾸 예의에 대해 말을 하시는데 타국의 황녀에게 더 이상 무슨 예의를 더 차리란 말입니까? 테론 제국의 1황자, 아니 신 테론 제국의 황제이신 가르반 황제께서도 저에게 이런 식으로 예의를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몹시 불쾌하군요.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룬은 자신의 할 말을 마치고 두 손을 마주 잡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 이런…….”
일룸은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고 동행한 마법사들과 기사들도 충격이 심했는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뭐지? 이 작자는 대체 뭐야?’
황제의 총애를 받는 파이린 제국의 막후 실력자인 이벨린은 큰 눈을 치켜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룬의 행동이 너무 상식 밖이라 놀란 것이다. 거기에 더 황당한 것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자신의 대원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반응을 보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이벨린은 알 수 있었다.
“이노옴!”
차앙! 창!
일룸이 노호성을 터트리는 것과 동시에 친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사들도 만약을 위해 주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룬이 천천히 몸을 돌렸는데 어느새 그의 손에는 박살이 들려 있었고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인 일룸이 순간적으로 오싹할 정도의 엄청난 살기가 폭사되자 뒤에 있던 친위 기사들도 움찔했다.
“지금 우리에게 검을 겨누었소? 내가 왜 그대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 되는 건지 모르겠군. 내 비록 용병이지만 지금까지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소. 기꺼이 상대해 주지! 오시오!”
하룬의 말에 아카족 전사들이 일제히 문신의 힘을 끌어 올렸다. 이제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하룬이 모두의 몸에 넣어준 마정석으로 인해 소진되었던 마수의 힘도 어느 정도는 채워진 상태였다.
“분명히 제국 측에서 먼저 도발했음을 잊지 마시오. 이제 돌풍 용병대는 파이린 제국과 적이 되었음을 선포하오.”
황당했다.
이벨린은 물론이고 일룸과 친위 기사들의 얼굴에는 분노를 넘어서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설마 이런 자가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의와 의뢰를 강요했다는 이유로 말도 섞기 싫다는 것은 물론 거대한 제국에게 검을 겨루다니!
“흣! 단장님!”
그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한 기사가 흘리는 말에 뒤를 돌아본 일룸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벨린과 기사들의 얼굴도 역시 심각해지긴 마찬가지였다.
“언제?”
그들의 후방에는 몇 명의 용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 기도가 모두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후원으로 갔던 딜런을 비롯한 기존 대원들이 어느 틈에 그들의 후방을 점하고 있었다.
검을 뽑아 들고 흥미롭게 일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노검사의 전신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두 마법사는 허공에 선명한 마법진을 그려 둔 상태였다.
그들만이 아니다.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장대한 체구의 두 궁사가 화살을 시위에 건 상태였는데 그 촉은 요요한 마나 광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체구가 왜소한 한 중년 사내는 몇 개의 대롱을 꺼내 그중 하나를 입에 물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자의 몸이 마치 허깨비처럼 흔들린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그는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아까 보았던 하룬의 몸놀림에 버금갈 정도로 빨랐다.
‘이자들은 고요의 땅에 나타났던 대원들이다.’
네 명이 무려 삼백이 넘는 자들을 몰살시켰다는 그 위명이 자자한 돌풍 용병대원들이다.
‘허엇! 소드 마스터?’
그중 일룸을 향해 미소를 짓는 노검사는 딜런이 틀림없었다. 한때 황궁 근위 기사이기도 했던 그 대원의 검에서는 무려 1미터에 달하는 오러 소드가 시퍼런 광망을 토하고 있었다.
‘대장뿐 아니라 대원들의 실력도 잘못 알려졌다!’
일룸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알려졌던 딜런이 설마 소드 마스터인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대로 된 오러 소드를 가진 진짜 소드 마스터였다. 그는 딜런이 그저 시위하기 위해 제대로 된 오러 블레이드 대신 오러 소드를 만들어낸 것을 모르고 있었다.
“헛! 마, 마도사!”
궁정 마법사 베킬번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마도사라면 6서클 이상의 마법사를 높여 부르는 칭호가 아닌가.
‘제기랄! 누가 5서클 마법사라고 했어. 허공에 마법진을 그릴 정도면 마도사들이 틀림없는데.’
어느 마탑에서든 최고 직급에 오를 수 있는 6서클의 마도사 둘이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고 언제든지 활성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본 이벨린 일행의 눈이 경악으로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엄청난 거구를 가진 두 여인의 기세도 만만치가 않다. 단순히 마나가 실린 화살이 아니라 그 촉 주변에 오러가 일렁이는 것을 보면 오러 궁술까지 구사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형화된 마나인 오러가 일렁이는 철시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기만 하다.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저 화살에 맞으면 풀 플레이트라고 해도 뚫릴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입에 1미터가 넘는 긴 대롱을 물고 있는 중년의 용병은 어떠한가? 틀림없이 독침을 쏘는 것이리라. 난전이 벌어지면 저 빠른 발로 상대의 틈을 노릴 것인데 도무지 막을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일룸은 무심코 이벨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상황이라면 설사 죽더라도 이런 무례를 참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황녀가 왜 자신들과 동행해서 하룬을 찾아왔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제국의 중요한 행사를 그에게 의뢰하려고 온 것이다. 이렇게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벨린은 당황한 마음ㅇ르 가다듬으려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흐흣! 재미있어. 감히 황녀와 황실 친위 기사단을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우리 정도는 별 어려움 없이 상대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면 감히 이렇게 나오지 않았겠지? 돌풍 용병대라. 정말 대단하다는 것만은 인정해 주지!’
이벨린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세요, 단장님. 예의란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는 법입니다. 저들이 스스로 제국의 신민이 아님을 천명하고 있으니 우리 역시 그에 맞게 대해 주면 되는 일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저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왔으니 그 정도는 참아야겠지요.”
“알겠습니다.”
이벨린의 말에 일룸이 대답을 하는 순간 친위 기사들의 검이 검집으로 들어갔고 날카로운 투기도 사라졌다.
‘후웃! 잔머리가 뛰어난 여자로군. 자신들이 양보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면서 마저 용무를 마치겠다는 거군.’
이곳은 파이린 제국의 땅. 상대방이 검을 내렸는데 굳이 이런 상황을 더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투기를 거둔 하룬이 박살을 내렸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돌풍 용병대원들과 전사들이 일제히 그 기세를 풀었다.
일룸과 친위 기사들은 절도 있는 그들의 행동에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마치 오랜 수련을 거친 그들이 보인 것처럼 삽시간에 공격 태세를 감추었던 것이다.
“할 말이 있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의뢰 때문이라면 한발 늦긴 했지만 일단 들어는 보지요. 절 따르십시오.”
하룬은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며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중앙에 있는 티 룸이 그나마 그녀와 수행 기사들을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티 룸의 유일한 테이블에는 이벨린과 하룬이 마주 보며 앉았고 그들의 뒤로 몇 명이 섰다.
“그렇게 서 있지 마시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자리는 충분했다. 이벨린의 양옆에 일룸과 베킬번이 앉자 하룬의 양옆에 딜런과 티노가 자리를 잡았다.
“헤니, 차를 준비해!”
“네, 대장!”
사람들 뒤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헤니가 하룬의 말에 빠르게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법 아이템을 이용해서 금방 차를 끓여낸 헤니가 각각의 앞에 오미차를 내려놓자 아무 말 없이 하룬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벨린이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내 따로 하룬 대장과 긴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주위를 물리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양측의 사람들이 딜런과 일룸의 인솔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무리별로 대치를 하듯 자리를 잡았다.
“좋은 향기군요.”
“오미차라고 합니다.”
이벨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차 맛과 향을 음미하더니 놀란 눈이 되었다.
“호오, 최고군요.”
그녀의 반응에 하룬의 눈이 밝게 반짝였다. 이벨린은 그 눈빛의 의미가 궁금한 것 같았다.
“설마 독을 탄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의미죠?”
“황녀 전하께서는 이방인 출신으로 알고 있었는데 차의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낀다니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크게 동요가 없었던 이벨린은 하룬의 그 말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는 극비 사항이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아니, 어디서 안 거죠?”
이벨린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제껏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비밀을 자신은 이제까지 안중에도 없었던 용병이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영업 비밀입니다. 음식의 맛을 아시는 것을 보니 그곳 세상에서도 극히 희귀하다는 슈퍼 캡슐의 사용자이신 모양이군요.”
“그, 그것까지?”
이벨린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한차례 흔들었다. 그녀는 살면서 이렇게 당황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기함을 한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어진 하룬의 말에 이벨린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다크니스 쪽이 글로리 가이아이니 황녀께서는 역시 휴먼 가드 쪽이겠지요?”
“…….”
이벨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뒤엉켜 뒤죽박죽으로 변했던 것이다.
‘대체 이자는 누구야?’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녀가 휴먼 가드의 요인이라는 사실은 이제 겨우 마음을 연 황제 부부도 모르는 사실이다.
“놀라신 모양이군요. 그 반응이 오히려 제게는 뜻밖이네요. 우리 용병대에 대해 미리 조사를 했다면 우리가 특급 정보에 있어서만은 제국 정보 길드에 준하는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벨린의 경악은 하룬의 말이 있고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그래! 보고서에 의하면 돌풍 용병대가 최고급 정보를 꿰뚫고 있다고 했지. 설마 현실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들까지 꿰뚫고 있을 줄이야. 정녕 소문일 줄로만 알았는데…….’
그 실력이나 정체는 황실 정보단의 보고서나 소문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잡아야 해! 이런 가공할 정보력이나 친위 기사단을 두려워하지 않는 실력, 그리고 감히 황녀의 권위조차 통하지 않을 대답한 배포를 가진 이자들이라면 휴먼 가드 말고는 든든한 배후 세력이 없는 내게는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어.’
이벨린은 마른 입술을 축이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돌풍 용병대의 정보력에 다시 한 번 놀랐어요. 대원들의 실력들만 해도 충분히 놀랐는데 말이죠.”
“놀랐다면 사과드리곘습니다. 전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아예 안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말입니다.”
“놀랍군요.”
이벨린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상대가 숨기는 것 하나 없이 그녀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정도의 정보는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아마 제국 정보 길드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이계의 일은 우리도 그쪽과 제휴한 정보 조직과 거래를 하고 있기에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벨린은 하룬의 말에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이 용병대는 현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