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4화.지혜의 파편과 새로운 대원들 (165/278)

《지혜의 파편과 새로운 대원들》

 하룬은 딜런의 방으로 들어간 다음 아공간에서 지혜의 파편을 꺼냈다. 검증의 관에서는 그 내용만 들었을 뿐 실체를 얻지 못해 두 개뿐이었다.

 “이게 뭡니까?”

 “지혜의 파편이라는 겁니다.”

 “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검증의 관에 이것이 있다고 했다. 타니엘라에게 듣기로는 라 제국의 유물로 그 내용이 몸에 관한 것이었다고 했다. 비록 마나만큼은 아니지만 근육과 뼈, 그리고 신경조직과 관련이 많은 검술을 익힌 터라 그 내용이 궁금했지만 알 도리는 없었기에 그저 넘어갔던 적이 있었다.

 “여기에 손을 올리면 고대 라 제국의 지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연속해서 그 강의를 들으시고 내용을 깊게 연구하시면 얻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하룬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육체나 마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도 지혜의 파편에서 배운 것들로 인해 스스로 마나 플로를 해내지 않았던가. 딜런이라면 자신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는 딜런에게도 마정석을 먹일 생각을 했지만 그가 평생 축적한 마나만 해도 엄청난 양이라 별로 영향이 없을 거 같아서 포기했다. 현재 딜런에게는 마나 양이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이 절실한 상태라고 판단한 것이다.

 딜런은 하룬이 시키는 대로 손바닥을 펴서 지혜의 파편에 나 있는 홈에 대었다. 분명 눈을 뜨고 있음에도 시야에는 처음 보는 복색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작되는 강론. 딜런은 내용을 들으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육체에 대해 자세하게 배우거나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룬은 어느새 자세를 바로 하고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강의에 집중하는 딜런을 남겨두고 방을 나섰다. 이제 그가 방해받지 않도록 지켜 주어야만 했다. 비록 마나 플로나 마나 연공만큼은 아니었지만 집중이 흐트러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룬은 딜런의 방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자신도 지혜의 파편의 내용을 떠올렸다.

 “대장, 무슨 일입니까?”

 티노와 도네이스는 하룬의 방에서 나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딜런 경이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해주어야 합니다.”

 “제가 주의시키지요.”

 이제야 감정을 정리한 티노였다. 그는 하룬이 딜런에게도 뭔가를 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자에게 해줄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일임은 틀림없었다. 때문에 티노는 대원들과 전사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주의를 주었다.

 하룬은 방문 앞에 자리를 잡고 이미 지혜의 파편에서 들은 내용을 떠올리며 명상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의 명상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제 일상화되었기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하룬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익힌 단순한 마나 플로를 운용하고 있었다.

 딜런의 배움은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수련을 하기 위해 여관을 떠나 산속 공터로 향했다. 그리고 종일 수련을 한 다음에도 딜런의 방에는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결국 지친 사람들이 하나둘 숙면에 빠져들었고,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하룬에게 받은 마법서를 해석하느라 오늘 밤도 늦도록 라이트 마법이 인챈트된 구슬을 활성화시켜놓은 상태였다.

 이제 새벽이 머지않은 시간이 되어 그들도 슬슬 해석 작업을 마무리하고 잠을 자려는 순간이었다.

 “어? 뭐지?”

 “그러게. 굉장한 마나 유동이야!”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문득 인접한 곳에서 엄청난 마나가 유동하는 것을 감지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들보다 한참 윗줄인 마법사라도 나타난 것일까 걱정한 두 사람은 급하게 방문을 나섰다.

 “어! 저곳은?”

 마나의 유동이 일어난 곳은 바로 딜런이 들어가 있는 방이었다. 하룬은 여전히 그 방문 앞에 단정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근처를 살폈지만 별다르게 수상한 일은 없었다.

 “딜런 형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요, 사형?”

 “쉿!”

 타니엘라는 굳은 얼굴로 미루스의 입을 다물게 했다. 방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딜런이 지금 각성하는 것 같다.”

 “네에?”

 진정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 딜런이 그 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고위 귀족 출신도 아니고 평생 혼자 수련한 탓에 깨달음이 부족한 딜런인데 드디어!’

 비록 늘그막에 만나 인연을 맺었지만 마음이 맞아 동료보다는 친구로 지낸 딜런이다. 평소 늘 아쉬워하던 깨달음이 지금 이 순간 딜런에게 찾아들었다는 것을 타니엘라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깨달음을 얻은 거지? 혹시 대장이?’

 타니엘라는 떠오른 의문의 해답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밤새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하룬이 아니라면 딜런에게 깨달음의 단초를 제공할 사람은 없었다.

 “흐읍!”

 미루스가 억눌린 신음을 냈다. 어둠에 잠겨 있던 딜런의 방이 갑자기 환해졌던 것이다. 오래된 터라 자연스럽게 벌어진 문틈을 통해 강렬한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은 점점 더 강해져 급기야는 방문과 벽을 통과해서 밖으로 퍼져 나왔고 그 빛의 대부분은 여전히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하룬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어르신?”

 마나에 민감한 레미가 잠에서 깨어 나온 것이다.

 “쉿! 좋은 일이 생기고 있으니까 조용히 하게.”

 레미는 토끼 눈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눈부신 빛 무리에 휩싸인 하룬만이 들어왔다. 방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이한 빛의 향연은 어둠이 미명에 밀려날 때가 되어서야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빛 무리에 휩싸였던 하룬에게 그 변화가 먼저 찾아왔다. 서서히 그 반경을 축소하고 있던 빛 무리가 어느 순간 하룬의 몸 안으로 빨려가듯 사라진 것이다.

 “헛! 도대체 뭐요, 사형?”

 “나도 잘 몰라. 아마 대장이 저 빛 무리를 흡수한 거 같아.”

 “빛 무리라면 혹시 오러 라이트인 거요?”

 고개를 끄덕이는 타니엘라의 눈에는 기이한 빛이 일렁였다. 그 빛 무리는 분명 대지 가득 녹아 있는 마나의 정수였다. 마나들이 밀집하면 종종 이런 빛을 내기도 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 빛 무리를 흡수한다는 것은 마나를 흡수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전신으로 마나를 흡수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 그가 알고 있는 한 마나는 호흡으로만 흡수할 수 있었다. 만약 전신을 통해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면 그 축적량이나 효율은 호흡을 통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숨을 죽이고 하룬과 이제 더 이상 빛이 나오지 않는 방을 주시한 지 한참이 지난 후 방문이 열렸다. 그 순간 거의 감은 것 같았던 하룬의 눈이 찬란한 광망과 함께 떠졌다.

 “대장!”

 딜런은 방문 앞에 앉아 있다가 자신을 보고 일어나는 하룬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하룬은 딜런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해 엉거주춤했지만 금방 얼굴을 찌푸렸다.

 “크윽!”

 “왜, 왜 그러시오, 대장?”

 “냄새가…….”

 하룬은 급히 코를 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가까이 온 세 사람 역시 오만상을 찌푸리는 동시에 코를 잡고 황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보던 딜런은 자신의 소매를 코에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커억!”

 딜런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지만 일단 인지하기 시작한 냄새는 그 움직임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제 색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검게 변한 옷을 향하던 그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이, 건?”

 “축하합니다, 딜런 경. 몸의 노폐물이 다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하룬의 말에 딜런의 얼굴이 밝아졌다. 평생을 살면서 몸 안에 축적했던 각종 노폐물이 빠져나왔다는 것은 이제 완전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하하! 하하하하!”

 딜런은 성취감에 소리 높여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오래도록 이어졌고 결국 대원들과 전사들이 잠에서 깨어 뛰쳐나와서야 겨우 그쳤다.

 “어떻게 된 일인가?”

 타니엘라는 목욕탕에서 나오는 딜런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 덕분에 기연을 얻었네.”

 “기연?”

 “하하! 이제 완전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 같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이상했다. 전에도 자신보다는 팽팽한 피부를 가지긴 했지만 지금 본 딜런의 얼굴은 본 나이보다 20년은 족히 젊어진 것처럼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제길! 겨우 마흔 줄로밖에 안 보이는군.”

 세간에 퍼진 소문으로는 진정한 소드 마스터가 되면 육체가 젊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고요의 땅에서 본 소드 마스터들은 별로 그렇지 않았다. 팽팽한 피부에 좋은 혈색을 가지긴 했지만 이렇게 젊어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떤 기연이었나?”

 타니엘라는 하룬이 있는 방으로 향하는 딜런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물었다.

 “말할 수 없네.”

 딜런은 그가 친한 친구이긴 하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강론만을 들으며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두 번째 마나에 대한 강론과 상세한 각론의 내용은 마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보물이야.’

 세상에는 이름난 명문 검가들이 존재한다. 소드 마스터들의 열 중 여덟아홉은 그들 가문에서만 나온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마나 연공법과 상급 검술에 돌린다. 누구나 그들 가문이 보유한 마나 연공법과 검술만 익히면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고 믿는 것이다.

 딜런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혜의 파편을 통해 얻은 지혜를 깨달음으로 연결시키는 순간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 가문이 보유한 진짜 보물은 마나 연공법이나 상급 검술서가 아니라 바로 대대로 전해오는 마나에 대한 고찰과 연구 자료라는 사실을 말이다.

 소드 마스터는 단순히 마나를 많이 축적한다고 내딛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깨닫고 세상의 근원인 마나에 대한 고찰을 통해 자신의 몸이 작은 우주라는 사실을 각성해야만 한다.

 단순히 앎에 그치지 않고 완전하게 깨달아야만 오를 수 있는 경지가 바로 소드 마스터인 것이다. 그 깨달음이 마나를 오러로 발현시키고 그 오러를 검의 형상으로 변환시켜 세상과 소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치사하게 이럴 건가?”

 타니엘라는 궁금했던 만큼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딜런은 지혜의 파편에 대해 하룬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를 배려해서 그런 보물을 제공한 하룬 대장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곤란해! 차라리 대장에게 이야기를 해보게.”

 “이 빌어먹을 인사야! 벼룩도 낯짝이 있지. 우리 사형제를 위해 그 귀한 고대 마법서까지 구해다 준 대장에게 우리가 뭘 또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긴 타니엘라의 말이 맞다. 자신만 해도 대장이 그들만 너무 챙기는 것 아닌가 조금은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있으니 말이다. 마탑들이 공공연하게 100만 골드 이상을 주겠다고 했던 마법서들을 구해 주었으니 조금은 서운했던 것이다.

 “난 몰라. 난 이야기할 수 없네.”

 매정하게 뿌리치기가 힘들었기에 결국 타니엘라는 딜런의 소맷자락을 잡고 하룬의 방 앞까지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하룬의 방 문 앞에는 미루스가 안절부절못하며 있다가 두 사람을 보자 반색을 하고 달려와 타니엘라에게 쏘아붙였다.

 “사형! 어디 갔다 오슈? 대장이 기다리고 있는데.”

 “대장이?”

 두 사람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설렘이 가득했다. 티노에 이어 딜런까지 선물을 주었으니 이제는 자신들 차례인 것이다. 자신들 몫의 선물은 고대 마법서라고 생각했는데 선물은 더 있는지도 몰랐다.

 세 사람이 방으로 들어가서 보니 지저분하고 냄새에 찌들었던 실내는 이미 하룬이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말끔하게 치운 상태였다.

 딜런은 하룬을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룬이 냉큼 일어나 그의 몸을 붙잡았다.

 “딜런 경, 경의 마음은 잘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병대이기 이전에 가족과 같은 사입니다. 너무 과도한 예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딜런은 하룬이  형식적인 예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대신 그의 두 눈 가득 진심을 담아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했다. 하룬은 그것까지 말리지는 못했다.

 “이제 확실하게 소드 마스터에 오른 거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딜런은 자신의 검을 잡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검신이 파랗게 빛나는가 싶더니 검첨에서 오러 소드가 쑥 솟아나왔다.

 “오오! 이 정도면 오러 블레이드라고 해도 되겠는걸.”

 타니엘라가 탄성을 터트렸다. 시퍼런 오러로 이루어진 검의 길이는 약 1미터였는데 예리한 양날은 물론 혈조의 형태까지 검신과 닮아 있었다. 초급 소드 마스터가 만든 오러 소드와는 확실히 달랐다.

 “뭐야? 그럼 딜런 형님이 단숨에 소드 마스터 중급이 되었다는 거네?”

 미루스 역시 깜짝 놀랐다.

 소드 마스터 초급은 오러로 검의 형상을 만들기는 하지만 생성된 오러 검은 그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오러 블레이드라고 부르지 않고 오러 소드라고 부른다. 그런데 딜런의 것은 뚜렷하게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딜런의 말을 통해 그가 완전한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한순가에 소드 마스터 중급만이 가질 수 있는 완벽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딜런의 진한 미소와 함께 오러 블레이드는 순식간에 다시 검첨을 통해 사라졌다.

 “축하합니다. 진정한 소드 마스터가 되었군요.”

 “허허허! 축하합니다, 대장. 드디어 쓸 만한 칼잡이를 만들었군요. 지금이야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귀족 출신에 오러 블레이드까지 만들 수 있으니 이제부터는 제대로 부려 먹으십시오.”

 “예끼, 이 사람아!”

 타니엘라의 농담에 딜런이 짐짓 호통을 치면서 자리는 금세 가족과 같은 훈훈한 분위기로 변했다.

 “사실은 두 분에게도 보여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두 사람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이미 딜런의 진경을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보며 기대를 하던 참이다.

 “딜런 경에게 소드 마스터가 되는 깨달음을 준 물건입니다.”

 “정말입니까?”

 “오! 드디어 대장이 우리에게도 그 보물을 보여주시는군요.”

 타니엘라와 미루스의 눈빛이 강해졌다. 딜런에게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아 무척 궁금했던 차였다.

 하룬이 두 사람 앞에 지혜의 파편을 꺼내 놓았다.

 “이게 뭡니까?”

 “지혜의 파편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대 라 제국의 유물입니다.”

 “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듣던 대로 책의 외형을 가지고 있군요.”

 “그런데 이게 그 보물입니까? 듣기로는 근육과 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하던데…….”

 비록 본 적은 없지만 그들 역시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유물이 그들과 같은 마법사들에게는 큰 효용이 없다는 것도 말이다.

 “정말 이게 딜런을 단숨에 소드 마스터 중급으로 만든 물건입니까?”

 타니엘라의 물음은 당연했다.

 “이 유물은 현재 알려지기론 단 네 개만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첫 번째로 지혜의 파편을 대하면 모두가 동일하게 육체에 관한 내용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네에? 그럼…….”

 타니엘라와 미루스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마법사들이기에 무슨 이야기인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것이다.

 “한번 지혜의 파편을 대했다가 다른 것을 접하면 그 내용이 달라지더군요. 두 번째에는 마나에 대한 강론과 각론이 들어 있습니다. 전 잘 모르겠지만 이것을 통해 깨달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딜런 경 역시 그랬을 겁니다.”

 하룬의 대답에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딜런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채도 입을 열지 않았던 딜런은 이제야 비밀을 털어놓았다.

 “대장의 말이 맞아. 이 유물은 그런 방식으로 엄청난 비밀을 오랫동안 유지해 온 거였네. 워낙 기본적인 내용을 담은 유물이기에 유물로서의 가치만 생각했지 그 내용의 가치는 알아내지 못한 것이지. 물론 이런 고대 유물을 두 개 이상 모으는 것 자체도 힘들었겠지만 그런 비밀이 있기에 그저 유물의 가치만 가지고 지금까지 아무 손상 없이 내려올 수 있었던 걸세.”

 “세상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던 거지?”

 두 사람은 딜런의 말에 탄성을 질렀다.

 “검증의 관에 지혜의 파편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마법에 관한 것인데 아마 그 내용이 두 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시간이 없으니 일단 이 두 개의 내용부터 숙지하도록 하세요. 세 번째 것은 제가 그 내용을 외우고 있으니 직접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룬의 말에 두 사람은 서둘러 각자 하나의 지혜의 파편을 끌어다 놓고 손바닥을 음각한 곳에 가져다 댔다. 마법사들답게 그들은 금방 그 내용에 집중했다.

 “우리는 나가 있지요.”

 “네, 대장.”

 하룬과 딜런은 밖으로 나와 방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제 수고하셨으니 이곳은 잠시 내게 맡기고 좀 쉬십시오.”

 “아닙니다. 마나에 대한 고대 지식이 좀 생소하고 그 내용이 많았지만 마법사들인지라 금방 이해할 겁니다. 금방 들어가봐야 할 테니 이곳에서 그냥 명상이나 하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딜런이 밖으로 나가 마음껏 오러 블레이드를 시험하려는 것을 잘 아는 하룬이 빙긋 웃어주었다.

 두 마법사가 지혜의 파편 두 개의 내용을 전부 다 숙지한 것은 아침 무렵이었다.

 이미 하룬에게 들어 상황을 알고 있는 대원들과 전사들은 방해가 될까봐 아예 수련장으로 가있었고 숙소에는 하룬과 딜런만이 대기하고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두 사람은 초췌한 얼굴이지만 눈빛만은 밝게 빛나는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고! 배고프다.”

 미루스는 나오며 쑥 들어간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안 그래도 마른 체구라 그 모습이 사뭇 불쌍하게 보였다.

 “그럼 식사라도 하고…….”

 “헛! 아니오, 대장. 그냥 해본 소리요.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데…….”

 타니엘라는 형형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대하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한 미루스의 뒤통수를 힘주어 갈겼다.

 “아앗! 알았다고, 사형. 나도 나이가 있는데 어릴 때처럼 자꾸 이렇게 뒤통수를 치면 앞으로는 가만히 안 있을 거요.”

 “뭐라고! 너 열두 살 때 자다가 실례를 해서 침대보에 무슨 그림을 그려놨더라?”

 “아고오! 알았소, 사형. 그냥 해본 소리요. 아무렴 내가 지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라서 한 소리겠소?”

 어릴 때 이야기에 미루스가 꼬리를 말자 하룬은 두 사람을 다시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방 문 밖에는 딜런이 앉아 지키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비약적으로 상승한 자신의 능력을 바닥부터 점검한 딜런은 마음속으로 타니엘라 사형제도 자신처럼 기연을 얻기를 기원했다. 그래도 자신은 가진 것에 비해 늦지 않은 화후를 이루었지만 그들은 아니었기에 그 마음은 더욱 간절했다.

 ‘꼭 원하는 것을 이루게나!’

 방 안에서는 지혜의 파편에 수록된 마법에 대한 강론을 하는 차분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혜의 파편이 기연을 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대장이 바로 기연을 주는 사람이야.’

 그 간절한 기원 때문인지 아니면 딜런의 경우처럼 벽을 깰 만반의 준비를 갖춘 덕분인지 두 사람은 하룬의 강론이 끝나자마자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새로운 마법 이론들을 접한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 가운데는 자신들이 익히 잘 아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고대 마법의 체계는 현재와 많이 달라 그런 것을 한데 녹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룬이 조용히 방을 나오고 한참이 더 지나 밤이 깊어졌을 때 그들이 명상에 빠져 있던 방으로부터 강력한 흡입력이 발생해서 대기의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맹렬했는지 밖에서 호위를 하던 딜런과 하룬이 놀라 뒤로 물러난 것은 물론 같은 숙소를 사용하고 있던 대원들과 전사들이 놀라 뛰쳐나올 정도였다.

 덕분에 대원들과 전사들은 밤이 새도록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앉거나 서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룬은 딜런 때와 마찬가지로 방문 앞에 자리를 잡고 마나 플로를 돌렸다. 두 사람의 깨달음으로 인해 새로운 서클이 만들어지면서 자연 속에 녹아 있던 마나들이 대거 빨려 들어오는 것을 이용해 상당한 마나를 축적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새벽이 되어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왔다.

 “카카카! 드디어 마도사가 되었다!”

 검댕과 같은 이상한 물질을 얼굴에 묻힌 상태로 미루스가 감격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드디어…….”

 타니엘라는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할 정도로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누구보다 두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있는 딜런이 그들을 안으려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발을 멈추고 물러났다. 두 사람에게 향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코를 쥐어 잡고 몸을 떨면서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없는 지독한 악취가 그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크윽!”

 “커억!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이 멍청한 녀석, 당장 코를 잡은 손을 풀어!”

 그 전사는 조금이라도 콧구멍을 개방했다가는 죽을 거 같은 위기감에 숨이 막히는 줄도 모르고 기를 쓰고 콧구멍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방을 나온 두 사람은 그 냄새 때문에 당장 공동 목욕탕으로 향해야만 했다. 육체가 재구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 생성된 여섯 번째 마나 고리의 효과로 인해 딜런의 경우처럼 노폐물이 다 빠졌던 것이다.

 항상 수련으로 땀을 흘려 정기적으로 노폐물을 배출하던 딜런과는 달리 그들의 경우는 평생 땀을 흘릴 일이 별로 없어 그 냄새가 몇 배나 더 지독했기에 그 난리가 난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모습을 보인 두 마법사는 예전의 쭈글쭈글한 주름살은 다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팽팽하고 윤기가 흐르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딜런이 단숨에 두 계단을 넘어서고 두 마법사가 마도사가 되었으며 티노가 익스퍼트가 된 것을 생생하게 지켜본 도네이스와 마리 그리고 헤니는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딜런에게 전수받은 수련 검식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전사들 역시 차원이 다른 무력을 본 여파로 인해 수련에 박차를 가했고 딜런과 티노와의 대련을 통해 마수의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 최선을 기울였다. 그동안 그들의 힘은 인간이 아니라 마수를 상대로 사용되었기에 그 효율이 낮았지만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을 통해 그 약점을 개선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특히 딜런의 경우 그들이 극한까지 끌어 올린 마수의 힘을 상대하면서도 여유가 있었기에 마음껏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정체되어 있던 무력이 삽시간에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오후에는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가세하여 그들에게 마법 공격을 상대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주술이 아니라 마법 공격은 그들에게 생소한 것이라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지만 두 마법사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데빌 산맥은 무척 위험한 상황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그쪽으로 움직였고, 흑마법사들과 다크 엘프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답니다. 아카족들은 지금까지는 마수만 상대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인간들을 상대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세 분께서 이들을 좀 지도해 주십시오.”

 하룬은 우연히 맺게 된 인연이지만 같은 마수의 힘을 쓰게 되어서 그런지 그들이 남 같지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순수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 하룬의 부탁을 받은 세 사람은 군말 없이 받아들여 성심껏 전사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대신 하룬도 레미를 통해 하루에 두 개씩의 문신을 새겨 이제는 그녀의 한계인 열 개의 문신을 모두 몸에 새기게 되었다. 마수들의 힘은 중복되는 것들도 있었지만 샤키의 눈처럼 동체 시력을 현저히 높여주는 것부터 아이콘라드의 힘처럼 관절과 근육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까지 다양한 활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하룬 역시 수련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 플로 역시 지속적으로 운용한 끝에 마정석의 마나를 모두 흡수한 하룬은 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한 단계 올라 익스퍼트 상급이 되었다.

 티노 역시 밤낮없이 수련을 한 결과 익스퍼트의 상징인 검기를 생성하는 데 성공해서 다시 한 번 도네이스의 눈물을 쏙 빼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룬은 아직도 걱정이 되었다. 마수의 힘을 직접 써 본 하룬은 익스퍼트에 오른 티노의 실력이라도 마수를 상대하기에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데브론 경에게 나중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는 안 돼!’

 하룬은 티노에게 메신저 워킹을 가르쳤다. 이미 그 하위 스킬인 메신저 무빙 스킬을 익힌 티노인지라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비록 몇 번 실패하기는 했지만 반나절이 지나자 그 요체를 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숙련도를 높이는 것뿐이다.

 “이게 정말 가능한 겁니까?”

 티노는 같은 힘으로 두 배는 더 빨리 걷고 뛰는 것은 물론 제대로 걷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축적되는 것에 깜짝 놀랐다.

 “데브론 경의 허락이 없으면 자식에게도 전수할 수 없는 비전입니다.”

 하룬은 티노에게 메신저 스킬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더 이상 감사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장은 저에게는 생명 그 이상입니다.”

 젖은 눈으로 입술을 꽉 다문 티노의 말이 가늘게 떨렸다. 데브론의 허락이 없는 상태에서 이 스킬을 전수한 하룬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로 전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제고 대장 대신 생명을 바칠 수 있다면 천만 번이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티노는 눈물을 보일 수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스럽게도 하룬은 그의 부끄러운 꼴을 보지 않고 도네이스와 마리 그리고 헤니에게 향했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쳐낸 티노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메신저 워킹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도네이스와 마리는 이미 몸 안에 상당한 마나를 축적한 것은 물론 마나 로드도 잘 확장되어 있었고 오른팔로 향하는 마나 포인트들이 잘 뚫려 있었다. 헤니의 경우가 가장 한심했다. 그래도 의욕만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강했다.

 “드디어!”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어!”

 “나도!”

 주먹을 불끈 주니 세 사람이 마정석을 복용하자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하룬의 곁에 딜런과 두 마법사가 대기를 했다. 폭주라도 하면 막아야만 했던 것이다.

 “고내찮을까?”

 “수련 검식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걱정스럽긴 하지만 원래 마나를 사용해서 마나 궁술을 펼쳤으니 어쩌면 티노의 경우보다 더 쉬울 수도 있네.”

 타니엘라는 걱정했지만 딜런은 세 사람을 믿고 있었다. 수련이란 시간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중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헤니와 도네이스 그리고 마리가 지난 며칠 동안 보인 집중력은 그 자신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딜런의 말이 맞았다.

 도네이스와 마리는 엄청난 마나가 몸 안으로 퍼지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집중해 수련 검식을 펼쳤고 한 시간 정도 만에 마나 오션을 생성하는 것은 물론 이제까지 몸 구석구석에 흩어진 상태로 존재하던 마나들을 어느 정도까지 마나 오션으로 끌어들여 단숨에 익스퍼트 상급 실력이 되었던 것이다.

 “흐흐흐! 언니, 이제 나도 마나 궁술이 아니라 오러 궁술에 입문할 자격이 생겼어!”

 “왜 아니겠니. 난 이제 검이 필요 없게 되었는걸.”

 도네이스가 철시에 마나를 주입하자 애로우 오러가 쑥 솟구쳤는데 그 길이와 두께가 검기에 못지않아 근처의 바위를 내리치자 단숨에 반으로 갈라졌다.

 헤니의 경우는 마나 오션을 생성시키긴 했지만 마나 포인트들을 제대로 뚫지는 못해서 익스퍼트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헤니는 자신의 검에 어린 오러 라이트와 달라진 신체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하고 있었다.

 “축하해, 헤니! 이제 조금만 더 수련하면 마나를 익숙하게 쓸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딜런 경! 열심히 할게요.”

 비록 있는 듯 없는 듯 극소량만 마나 오션에 축적한 상태지만 마나를 끌어올리자 몸이 너무 가벼웠다. 그리고 무심코 휘두른 검에 굵은 나뭇가지가 손쉽게 잘려 나가는 것을 본 헤니의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가득했다. 헤니는 검사들이 익스퍼트의 경지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티노가 다가와서 축하와 함께 짧은 주의를 주자 겨우 정신을 차린 세 사람이 하룬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전사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 여관으로 가고 있었다. 그 뒤를 헤니가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쫓고 있었다.

 “대장!”

 당장이라도 달려갈 태세인 마리였지만 딜런이 말없이 손짓으로 그녀를 말렸다.

 “대장이 과한 예의를 싫어하는 건 잘 알고 있지. 대장은 우리를 계약에 의해 맺어진 사이가 아니라 정으로 맺어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잘 알겠지?”

 “네, 그럼요.”

 “그걸 알면 과한 인사는 하지 말고 진심이 담긴 짧은 인사만으로도 충분해. 대장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으면 되는 거야. 대장이 세상 모든 이들의 지탄을 받는 순간이 온다 해도 대장을 믿고 한 가족이라는 생각만 한다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고마워요, 딜런 님. 근데 제가 딜런 님에게도 너무 너무 감사해하는 건 아시지요? 딜런 님도 대장과 비슷한 성격이니 과한 인사는 생략할게요.”

 꾸벅 머리를 숙였다가 올리며 장난스럽게 혀를 날름 내민 마리가 벌써 하룬의 뒤를 바짝 따라잡은 티노 부부를 향해 달려갔다.

 “허헛!”

 딜런은 손녀와 같은 연배인 마리가 보인 치기 어린 행동에 헛바람을 토하면서도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모든 대원들이 가족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데빌 산맥에서 내 가족들이 상하는 것은 볼 수가 없지. 아마 대장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야.’

 딜런은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두 마법사를 한번 보고는 하룬의 등에 눈을 맞추었다.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만 한다. 딜런의 눈은 순간 강렬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대장, 우리와 이야기 좀 해요.”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차 한 잔을 같이 마신 후에 막 수련을 위해 움직이려던 때였다. 레미를 비롯한 아카족 전사들의 강렬한 눈빛이 하룬에게 모아졌다.

 “딜런 경, 이야기를 하고 따라가겠습니다.”

 “네.”

 딜런은 묘한 눈빛으로 전사들을 한번 쓸어 보고는 대원들을 데리고 산속 공터로 향했다. 다들 궁금한 얼굴이었지만 각자 수련할 것이 있었기 때문에 두 마법사를 빼고는 발길을 빨리했다.

 마침내 대원들이 시선에서 사라지자 하룬이 운을 뗐다.

 “할 말이 있는 거야?”

 “네. 우리끼리 이야기를 해봤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레미는 전에 없이 흥분한 상태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이 무척 보기 좋았다.

 “용병에 대해 알고 있어요. 의뢰를 받아 몬스터들을 잡고나 물건을 호송 혹은 사람을 지켜주는 일을 하고 돈을 번다고 하더군요. 그게 맞나요?

 하룬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우리도 용병이 될 수 있나요?”

 너무나 뜻밖의 말이라 하룬은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이제까지 수백 년 동안 마수를 사냥하며 살아온 아카족이다. 위험하긴 하지만 오랫동안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살아온 그들이 왜 용병에 대해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최근 몇 년 사이 마수들의 수가 많이 늘었어요. 전에 볼 수 없었던 강력한 마수들이 산맥 깊숙한 곳에서 나오기 시작했고요. 그 때문에 벌써 몇 개의 마을이 파괴되었고 아카족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던 상인들도 찾아오지 않아 우리는 기본적인 생활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룬이 상인을 자청하고 나서려는 것이 아닌가. 한데 이들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비록 선조들이 우리 아카족이 살 곳은 데빌 산맥이고 마수가 세상 밖으로 과도하게 나오지 않도록 막을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에요. 아무리 우리가 신성한 임무를 수행해도 마수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하지 않아요. 게다가 우리 대신 풍요로운 삶을 즐기고 있고요. 우리의 아이들이 굶주림과 병 때문에 죽어 가고, 성인들은 마수를 사냥하다가 부상을 입거나 죽어 가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았어요. 단지 제대로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이 필요한 우리인데 누구도 우리를 진심으로 도와주지 않았어요.”

 레미의 목소리에는 자신 부족에 대한 자긍심보다는 자신들을 야만인으로 치부하며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카족은 선조들의 당부를 수행하고 싶어도 더 이상은 능력이 되지 않아요. 마수들은 늘어나고 갈수록 더 강한 놈들이 나타나는데, 아카족은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어요. 산맥 곳곳에 흩어져 사는 우리 아카족이 전부 모인다 해도 채 만 명이 되지 않을 거예요. 이미 수백 년 동안 따로 살아온 터라 다른 종족처럼 문화와 풍습이 달라져서 모이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이고요.”

 도시를 경험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카족은 불행한 삶을 대를 이어 살아왔따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기에 그들은 나름의 순수한 문화와 자연에 동화된 삶을 살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후대까지 이런 고난스러운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비록 선조의 당부가 있었다고 해도 이제 그것응ㄹ 벗어나고 싶어요. 우리를 용병대원으로 받아 주세요. 도와주세요!”

 레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우리도 용병이 되겠다!”

 “마수와 몬스터 잡는 것은 우리가 최고다!”

 “우리는 하룬 대장의 도움을 원한다!”

 순수한 삶을 살아온 이들답게 그들의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들은 정말로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고난과 질곡의 고리를 끊고 싶어 했다.

 하룬은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안 그래도 소수의 인원으로 마수들은 물론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요소들이 가득한 데빌 산맥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안했는데.’

 어쩌면 며칠이 흐른 후에는 자신이 먼저 제안을 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하룬이 느끼는 압박감은 컸던 것이다. 개개인의 무력이 익스퍼트 중급에 필적하고 데빌 산맥의 지리를 잘 아는 아카족 전사들이라면 데빌 산맥 건은 물론 그 후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좋아! 다만 기존 대원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해. 그들이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너희들은 그 순간부터 돌풍 용병대원들이다.”

 “고맙다!”

 “이제 넌 우리 대장이다.”

 “나도 돌풍 용병대원이 되었다.”

 전사들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심지어 두르본은 하룬에게 달려들어 뽀뽀를 할 정도였다. 레미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지만 이제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상한 반응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들뜬 전사들을 앞세우고 수련장으로 간 하룬은 대원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거기에 덧붙여 지금 자신들에게 강한 무력이 필요한 것까지 이야기해주자 대원들은 흔쾌하게 아카족 전사들의 영입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이런 문제까지 우리와 상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장이 결정하면 우리는 당연히 따라갑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딜런의 묵직한 말에 가슴이 뭉클한 하룬이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작은 조직이기에 그만큼 서로의 의견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비록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시간의 낭비를 초래할 수는 있지만 일단 모두의 의견ㅇ ㅣ모아지면 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이제부터 같은 대원으로 대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다시 한 번 전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직 공용어와 예의가 부족한 아카족 전사들이지만 그들도 기존 대원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정겨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장, 이런 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소?”

 “그래, 맞아! 오랜만에 술 한잔 마셔야지.”

 두 마법사가 선동하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하하하! 좋은 날이니 두 분 말씀대로 우리끼리 작은 축제를 하기로 하지요. 티노, 도네이스와 마리를 데리고 성에 다녀오세요. 돼지 바비큐라도 뜯으면서 새로운 대원들을 축하해주기로 하지요.”

 “하하! 알겠습니다. 냉큼 다녀오겠습니다.”

 오랜만의 회식에 들뜬 세 사람의 발걸음은 마치 날개를 단 듯 가볍고 빨랐다.

 “같이 가요!”

 마리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두 사람을 따라잡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티노로부터 메신저 무빙을 전수받은 도네이스도 어느새 티노의 그것처럼 빨랐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불이라도 준비해야겠군.”

 타니엘라와 미루스가 헤니를 채근해서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레미를 비롯한 아카족 전사들이 그 일을 도우려고 했지만 두 마법사는 원래 신입은 앉아서 대접받는 것이 돌풍 용병대의 전통이라는 말로 거절했다.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산속의 너른 공터에는 모닥불이 피워지고 살찐 새끼 돼지가 꼬챙이에 꽂혀 지글거리며 익어갔다. 그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앉은 사람들의 손에는 맥주잔이 들려 있고 연방 건배 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기분이 좋아 마시는 술이라 한도 끝도 없이 마시는 바람에 그나마 술기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하룬과 딜런은 세 번이나 여관에 들러 맥주 통을 날라 와야만 했다.

 “헤헤헤! 하룬 대장. 널 애인이 생기기 전에 만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넌 정말 좋은 남자다. 그리고 좋은 대장이다.”

 비틀거리며 그의 옆으로 다가온 두르본이 꼬부라진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히히히! 기분 최고다! 대장아, 우리 까칠한 스승님 만나면 당신이 알아서 얘기 잘해 줘야 해! 산맥 밖 사람들에게 홀렸다고 우리 모두 엉덩이 까고 맞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알았지, 대장!”

 언제나 조신한 태도를 보였던 레미도 연속해서 마신 술의 힘에는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

 “대~장! 우리 대~장! 꼭 대련해 줘야 해. 난 대장이랑 싸우고 싶다.”

 “이런! 아니다, 대장! 나랑 먼저 싸워야 한다.”

 디온과 옥세르도 혀가 꼬부라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람 상체 크기에 달하는 맥주 통을 벌써 열 통 넘게 비운 것이다.

 “흐흐흐! 대장, 내 잔도 받으시오.”

 “아니, 내 잔부터 받으시오. 이제 대장은 우리의 주군이 되었습니다. 야! 미루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존대를 써! 너 계속 말투가 그따위면 딜런에게 되게 당하게 될 거다. 저기 딜런이 너 노려보는 거 보이지.”

 “딸꾹! 크험! 알았소, 사형! 나도 이제는 마도사가 되었으니 너무 어린아이 다루듯 하지 마시오. 안 그래도 내 말투를 고치려고 했단 말이오. 헤엥!”

 타니엘라와 미루스는 너무 취한 나머지 건배한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건배를 연거푸 세 번이나 하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딜런에게 향했다.

 하룬도 꽤나 취한 모양이다. 소변을 보려고 잠시 일어났는데 땅이고 하늘이고 모두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를 세차게 흔든 하룬은 비틀거리면서도 요행히 넘어지지 않고 숲으로 향했다.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방인인 헤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눈이 풀리고 비척거릴 정도로 엉망으로 취해버렸다. 술기운을 마나로 제어할 수 있는 딜런을 포함한 익스퍼트 실력의 대원들도 부러 술의 유혹에 빠져버렸다.

 “에효! 정말 미치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캡슐에 알코올이라도 잔뜩 집어넣었어야 했는데.”

 헤니 역시 분위기에 취해 진탕 마셨지만 취하기는커녕 배가 불러 계속 숲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자신의 상태에 절망했다. 그것만이라면 그래도 낫겠는데 다른 대원들이 하나둘 땅바닥에 뻗어 버리자 더욱 힘들어졌다.

 “이제 파장이라고요! 제발 일어나요! 자더라도 여관에 가서 자야 할 거 아니에요!”

 헤니는 몇 번이나 사람들을 일으켜 보려고 시도했지만 코를 골고 자는 사람들을 어떻게 옮길 도리가 없었다.

 헤니는 이방인인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 밤이 새도록 대원들의 곁에서 불침번을 서야만 했다.

 “근데 마리는 어떻게 된 거지?”

 자신과 똑같은 이방인이지만 분명 마리는 술에 취해 뻗은 상태였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마리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그녀는 깨지 않았다. 분명 로그아웃을 한 상태는 아닌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캬악! 이건 반칙이얏!”

 새로운 대원들을 맞이한 공터에는 밤새 헤니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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